지식

세마 코랄의 ‘연결’ 주제어와 SeMA 의제를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생겨난, 시각문화/예술과 미술관의 (동)시대적 과제에 관해 논하는 지식을 선보입니다.

글과 웹 프로젝트를 함께 수록해서 세마 코랄이 지향하고 생산하는 지식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목록 보기’는 수록된 글과 웹프로젝트의 제목을 부호-숫자-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공개된 날짜를 보여줍니다.
‘목록 다운로드’를 누르시면 발행순으로 수록된 글의 목록을 정리한 전자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 Q의 시간

    2021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디어 나환》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서울 토탈미술관 지하 전시장에서 열렸다. 그해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가 전나환을 추모하기 위한 전시이자, 작가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작업한 《범람하고, 확장하는 Q》 시리즈에 속한 회화 열한 점을 처음으로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였다. 각 그림에는 인물 서너 명의 왼쪽 옆얼굴이 만화 캐릭터를 연상케 하는 필치의 검은색 굵은 선으로 그려져 있고, 색색의 컨페티 조각들을 닮은 자유분방한 붓질이 그 위를 뒤덮었다. 정적인 자세로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은 무표정하거나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작가는 2018년부터 청소년들,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회원들, 인권활동가, 소설가, 변호사, 드랙 퍼포머, 배우, 유튜버, 클럽 운영자, 디자이너, 미술작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성소수자들과 앨라이(ally)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측면 얼굴을 그렸다.

  •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저급 이론들의 연합〉: 후기

    이 글에서 나는 지난 2022년 9월 총 3회에 걸쳐 진행된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저급 이론들의 연합’〉의 녹취록을 위한 후기 겸 안내를 제공하고자 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음성 기록을 문서화한 (증언 또는 증거) 자료를 의미하는 녹취록은, 해당 프로젝트 내에서는 라운드테이블의 기록물이라는 보다 유연한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다. 현장에서 진행된 대화가 녹취록의 형태로 재구성되면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 세마 러닝 스테이션에서 폭죽처럼 터지던 웃음들, 눈맞춤과 끄덕임들, 무엇보다 영원할 것처럼 흐르던 짧은 침묵들이 행간 사이로 매끄럽게 숨어들었다.

  •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1. 여성 퀴어 작가의 콜렉티브

    오늘은 연휴 전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올해 저는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저급 이론들의 연합’이라는 제목으로 라운드 테이블을 총 3회 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자리에서는 세 분과 함께 ‘여성 퀴어 콜렉티브’라는 제목의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할 것이고, 두 번째 자리에서는 ‘아마추어리즘과 비평’, 세 번째 자리에서는 ‘실패의 퀴어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라운드 테이블을 이어갈 것입니다. 퀴어 이론가 주디스 잭 할버스탐(Judith Jack Halberstam)이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참조해서 ‘저급 이론(low theory)’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올해와 내년의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중심 개념으로 삼고자 합니다.

  •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2. 아마추어리즘과 비평

    오늘 라운드 테이블에서 함께해 주실 이여로 님과 강덕구 님은 이번과 같은 계기로 꼭 만나 뵙고 싶었던 분들이라서, 저도 지금 이 자리가 무척 기대가 됩니다. 이번 두 번째 라운드 테이블 자리에서는 ‘아마추어리즘이라는 태도 또는 정체성’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아마추어리즘이 무엇인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적인 도구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을 어떠한 삶의 방식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위계와 마찬가지로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위계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최근 두드러지는 활동을 시작한 두 분과 함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예시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3. 실패의 퀴어 예술

    라운드테이블 ‘실패의 퀴어 예술’에 이반지하, 양승욱, 문상훈 세 분을 모신 데에는 엄청나게 구체적인 이유가 있지는 않고요. 제가 이 자리에서 ‘실패의 퀴어 예술’이라는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분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이 자리를 계기로 ‘실패’라는 개념을 함께 공적으로 다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패가 곧 저항이므로 퀴어는 곧 실패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퀴어 이론의 한 명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공하고 싶고, 잘나가고 싶고, 돈도 벌고 전시도 많이 하고 싶은 퀴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세속적인 욕망을 가진 퀴어들이 어떻게 하면 실패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희는 이런 질문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 ‘당신을 지지한다’는 문장의 곤란함에 관하여

    많은 예술가들은 사회 이슈를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예술의 언어를 동원하고 시각예술의 형식을 갱신해왔다. 더러 미술관은 규율과 관습을 깨는 재현적 투쟁의 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같은 전시 안에서도 검열과 그에 저항하는 행동들이 쟁투를 벌이는 재현적 정치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비평은 무엇을 예술로 소환하고 있는가를 묻는 데 나아가 이를 관찰하고 표현하는 주체가 어떻게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배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양식과 방법론으로 대상을 재현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 〈진격하는 저급들〉 1장: 슬픈 퀴어 초상

    ‘셀피 페미니즘(selfie-feminism)’은 지난 10여 년간 페미니즘─행동주의의 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통상 ‘셀카’로 번역될 수 있는 ‘셀피’는 휴대용 전화기의 보급과 함께 널리 퍼진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자화상 또는 초상 사진)의 한 종류로, 주로 여성들이 찍는다는 편견 또는 사실 때문에 진지하지 못한 사진의 하위 장르로 취급되어 왔다. 1992년생의 젊은 예술가이자 제4세대 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 성장한 오드리 월런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전시장으로 사용한다. 그는 미술사적으로는 권위있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널리 비판 받아온 익숙한 이미지들을 차용해, 자기 자신을 주인공 삼는 셀피를 찍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의 셀피 시리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업 중 하나는, 통증관리센터나 병원을 배경으로 환자용 의복이나 장치를 착용한 채 패션지 스타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2장: 단식 광대는 왜 춤추는가

    깡마른 채로 웃고 달리고 춤추는 아서 플렉의 몸은 〈조커〉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집요하게 묘사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감히 추측하건대 〈조커〉를 즐길 수 없었던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표현하는 바로 그 몸의 아름다움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서 플렉의 기이할 정도로 마른 몸은 그 자체로 그를 관통했던 정신적⋅신체적 학대와 고된 노동의 시간이 축적된 증거물이며, 그가 가진 “부정적인 생각들”만큼이나 그의 유일한 자산이다. 그의 몸은 먹지 않음으로써 말없이 배신하고, 저항한다. 무엇에 대해서? 어머니와 함께하는 식사가 강제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그를 상처 입히는 동료들과의 친목에 대해서,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일할 수 있는 몸의 규격에 대해서, 무엇보다 그의 인간됨을 보장하는, 섭취와 배설이라는 유기체적 절차에 대해서.

  • 〈진격하는 저급들〉 3장: 뉴플 스케치

    부치들 팸이든 복장도착자든 이곳에 모인 몸들은 서로의 질량에 대응해 서로에게 감응하고 충돌한다. 잠재적으로 당신을 원하거나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그러므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에로틱한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당신은 자신의 몸을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감각한다. 이제 내 몸은 단순히 내 것만은 아니다. 내 몸은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몸, 다른 몸들과 관계하는 몸, 그러므로 다른 몸들에게 다른 쾌락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몸이다. 이곳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이 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낯선 이들과 어울리기, 무엇보다 멈추지 말고 춤추기. 이곳 바깥의 논리로는 온전히 포착될 수 없는 모호한 친밀성의 제스처를 발명하고 마주치는 몸들 사이의 힘을 증폭하기. 그러므로 이 몸은 매개체다. 이 몸은 사용되기 위해 여기 있다.

  • 〈진격하는 저급들〉 4장: 사이버펑크 혹은 살아남기의 장르

    그러니까 이 뒤로 이어질 이야기는 항상 답이 없는 상황적 비극일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 대한 나의 건설적인 피드백이다. 나는 〈엣지러너〉의 결말을 본 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데이비드를 살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데이비드가 그의 연인인 루시와 함께 달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답은 사이버웨어의 디자인에 있었다. 알다시피 인간성의 ‘엣지(경계)’를 향해 내달리는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를 범주화하는 것은 그것의 주제만큼이나 특정한 미적 스타일이다. 어둡고, 축축하고, 암울한 도시의 전망 속 뿌옇게 빛나는 네온사인, 미래적인 인상을 주는 가죽⋅라텍스⋅금속 재질의 의상들, ‘사이버 스페이스’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수한 (고글 모양의) 기기들과 글리치 섞인 홀로그램들이 자아내는 인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5장: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

    이 글은 좋았던 우리의 옛날을 회상하거나 트위터에게 이른 작별을 고하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 지구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목도하고 원래 하려던 말을 잊어버린 종류의 그런 글이다. …아무리 진지하게 싸워도 그것은 끝끝내 ‘사적인 해프닝’에 머무른다. 심지어 그것은 아무런 결론도 대안도 생산해낼 수 없는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의 시간낭비로 치부된다. 물론,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데도 말이다! …지금처럼 트위터를 계속한다면 머리가 망가지고 그것이 주는 쾌락에 구속되어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밤낮으로 해대는 세상에 맞서기 위한 유일한 전략은 오직 지금보다 더 한심하고 쓸모없게 구는 것이다. …헛소리들은 그 어떤 의미나 가치로도 환산될 수 없는 극치의 쓰레기들이며, 우리는 이것으로 망가진 우리의 머리를 통통히 살찌워야 할 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6장: 레즈비언 황무지ㅡ비가시성에 대한 노트

    기세 좋게 계획했던 연재 순서에 따르면 〈진격하는 저급들〉의 마지막에 해당할 이 글은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 발표된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경향성을 다뤄야 한다. 물론 나는 이 주제에 강박적인 수준의 관심이 있다. 지난 10년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주제에 관해 쓰고 또 말해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만이 동기는 아니었다. 매번 내게 이 주제, 그러니까 반복하자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큼이나 고생스럽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처럼 느껴졌으니까. 더구나 나만 그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이름의 황무지에 들어가고 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개간 작업을 해왔으며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진격하는 저급들〉 들어가며: ‘젠더 문제’

    이 글은 2021년 SeMA-하나 평론상의 특전으로 2년간 지원받은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진격하는 저급들〉 연재의 서문에 해당한다. 작년 가을 진행한 《저급 이론들의 연합》 라운드테이블에 이어 〈진격하는 저급들〉은 (시각)예술문화 전반에서 포착되는 퀴어 부정성(queer negativity)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둔다. 퀴어 부정성은 1990년 테레사 드 로레티스가 처음 ‘레즈비언&게이 [담론]’의 사이에 위치한 ‘&(and, 그리고)’라는 분리의 표시를 퀴어라는 “공동 전선”을 통해 다시 사유하자고 제안한 이후 “퀴어 이론의 정상화(규범화)” 혹은 ‘탈정치화’라 부를 만한 시점이 도래한 상황에서 다시금 퀴어를 정치적으로 급진화하는 시도에 가깝다.

  • 리서치의 역할을 기록하기 〈Social minorities and Art in Japan〉

    세마 코랄의 커미션 연구로, 공연 프로듀서 고주영은 ‘리서치의 역할’을 보여주는 웹프로젝트 〈Social minorities and Art in Japan(일본의 사회적 소수자와 예술)〉을 제작한다. 글뿐 아니라 연구적 태도와 감각을 접목한 웹프로젝트를 기획·제안하는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때문에 코랄은 과연 ‘리서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 리서치는 현상, 정보, 지식과 같은 추상적 결정화 이전에, 어떤 누구, 어디, 그 무엇, 그리고 이것들이 얽힌 구체적 현장에서 긴 세월, 배양된다. 따라서 리서치 수행자는 이러한 구체성을 껴안아야 한다. 리서치 미덕, 그 암묵지를 침묵의 상태에 두지 않고 하나하나 기록해 둔 고주영 프로듀서가 일본에서 수행한 사회적 소수자·소수성(minorities) 리서치처럼.

  • 부재를 스크리닝하기: 임철민의 〈야광〉

    장한길은 ‘비경험 세대의 경험’과 ‘포스트메모리’ 개념을 ‘부재’라는 키워드로 엮어 설명하고, 이를 성소수자의 크루징이라는 문제와 연결하며, 이 주제를 다룬 실험적 영상 작업인 임철민의 〈야광〉을 분석한다.

  • 탈인간을 위한 실천: 사물의 윤리

    기계는 작동되어야 하거나 찬양되어야 하거나 지배되어야 할 어떤 물건이 아니다. 기계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의 작동양식이며, 우리의 신체성의 한 측면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raway) 1 어떤 존재들을 배제해나가는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만들어지는 타자성(otherness)에 도전하기 위하여, …

  • 탈인간을 위한 실천: 사물의 윤리 (1)

    어떤 존재들을 배제해나가는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만들어지는 타자성(otherness)에 도전하기 위하여,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한 방식인 ‘사물화(objectification)’ 개념을 새롭게 사용할 수는 없을까? 그동안 비인간화, 사물화(혹은 대상화)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부정적인 말로 쓰여왔다. 두 개념을 통해, 인간이 식물과 동물 등 타자들과 구별되는 어떤 특성이 있다고 정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특성이 결여된 상태가 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글은 능력(ability)과 장애 여부를 기준으로 인간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는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며, 인간성의 뚜렷한 표식을 제거해나가는 작업들을 검토한다. 퍼포먼스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연작은 사물화를 실행하고 동시에 사물화 당하는 몸이 사물성과 겹쳐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구분에 도전한다.

  • 탈인간을 위한 실천: 사물의 윤리 (2)

    억압과 식민주의 역사에 기반한 노동 착취를 지지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정치 안에서 사물-되기는 과연 어떻게 실현 가능하며,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을까?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는 초현실주의, 코미디, 음악적 요소를 사용하여, 목적 없는 기계가 되는 한 정신장애인을 묘사한다. 사이보그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순응과 치유로 귀결되는 전형적인 심리치료 서사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괜찮다’는 평가는 퀴어적 장애성이 잠재적으로 인간과 사물 사이의 경계를 흐릴 수 있음을 암시한다. 더 분명한 것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능력을 나타내는 표식에 국한되어 있는 행위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언뜻 수동적 사물로 보이던 영군은 의도치 않게 수용시설이라는 공간에서 장애를 가진 삶, 인지적/심리적 차이를 가진 삶을 인간성의 조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지지공동체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