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세마 코랄의 ‘연결’ 주제어와 SeMA 의제를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생겨난, 시각문화/예술과 미술관의 (동)시대적 과제에 관해 논하는 지식을 선보입니다.

글과 웹 프로젝트를 함께 수록해서 세마 코랄이 지향하고 생산하는 지식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목록 보기’는 수록된 글과 웹프로젝트의 제목을 부호-숫자-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공개된 날짜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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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SR Application Note ― v1.4

    GSR은 Game-Sandbox-Residency의 약자로 동시대 이미지 생산-유통 패턴을 레지던시라는 미술 제도 안에서 실험하는 기획이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온라인 자동 영상 제작 프로그램과 닮아있다. 이 프로그램의 원형은 MS 오피스 등의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던 시각 템플릿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서비스와 GSR의 가장 큰 기술적인 차이라면 최종 결과를 인코딩 서버를 통해 영상 파일로 출력하는 것이 아니라 HTML5의 캔버스와 WebGL을 이용해 웹브라우저에 출력한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GSR 시스템의 설계-구현-운용에 관해 작성한 일종의 기술문서, 그중 엔지니어들을 대상으로 작성하는 어플리케이션 노트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더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에 관한 서술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GSR의 분절점이다.

  • GSR 매개/관람 기록물

    이 글은 필자가 GSR 플랫폼 개발 과정을 매개한 사람으로서, 동시에 시각 예술을 자주 관람하는 한 명의 관람자로서 남기는 기록이다. 필자는 GSR 플랫폼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기획자–개발자–생산자(작가) 사이의 의도와 의견을 매개-조율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즉 ‘동시대 이미지의 생산-유통 패턴을 레지던시라는 미술 제도 안에서 실험’하는 한 형식이 생산되는 과정에 포함되어있으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개입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 셈이다. 그렇게 이중적인 위치에서 필자는 과연 GSR 플랫폼이 소위 ‘동시대 이미지/콘텐츠 소비’ 지형 내에서 다른 이미지나 콘텐츠와는 무엇을 달리 보여 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였고, 한편으로는 GSR 플랫폼이 전시에서 구현된 최종 결과물의 형태로서 사용자/관람자들에게는 어떻게 다르거나 다르지 않게 보이는가를 질문하게 되었다.

  • 게임 - 샌드박스 - 레지던시 - 텍스트 Game-Sandbox - Residency - Text

    GSR을 레지던시로 설정한 이유는 20여 년간 국내 미술 현장의 한 축을 담당했던 국공립 창작공간은 하나의 제도로 자리를 견고히 하고 있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프로그램을 갱신하거나 이를 재고하는 노력이 있었는지 질문하고자 함이다. 영상과 조각, 평면 등 많은 작업이 디지털 소스를 현실에 출력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에 반해 레지던시는 여전히 물리적 스튜디오와 이를 활용한 개별 예술가의 작업 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레지던시의 지향점은 공유하는 시간성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인데 GSR은 개별 예술가의 디지털 작업 데이터를 공유하고 이것이 웹 프로그램을 통해 뒤섞이는 일종의 공동 작업 환경으로서 제안되었다. GSR은 당대의 창작 개념, 생산물의 소유권, 콜렉티브 형태를 비켜서는 탈중심적 개념에 닿고자 했던 시도였다.

  • 어려움에 대하여

    게임을 할 때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견지하는 동기 구조가 역전된다. 결과를 위해 수단을 선택하는 일상생활의 동기 구조와는 반대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수단, 즉, 분투(striving)의 활동을 경험하기 위해서 결과(일회용 목표)를 장착하게 된다. 이러한 동기 역전의 요인은 게임에서 나타나는 가장 흥미롭고도 고유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행위성이 두 층위(장기적 행위성과 일시적 행위성)로 중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행위적 중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장기적 행위자는 일시적 행위자의 분투 활동을 ‘미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때 게임은 예술이 된다. 그리고 이제 현대 미술에 관해 짧게라도 이야기해 보자. 조금 짓궂게 말하자면, 나는 현대 미술을 ‘소화’하는 데 실패했고, 거꾸로 현대 미술은 작품으로써 나에게 그 장르의 존재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