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세마 코랄의 ‘연결’ 주제어와 SeMA 의제를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생겨난, 시각문화/예술과 미술관의 (동)시대적 과제에 관해 논하는 지식을 선보입니다.

글과 웹 프로젝트를 함께 수록해서 세마 코랄이 지향하고 생산하는 지식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목록 보기’는 수록된 글과 웹프로젝트의 제목을 부호-숫자-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공개된 날짜를 보여줍니다.
‘목록 다운로드’를 누르시면 발행순으로 수록된 글의 목록을 정리한 전자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 2023 〈SeMA-하나 평론상〉 공모

    서울시립미술관은 미술평론 활성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로운 논리력으로 미술과 세계의 변화를 꿰뚫는 비평다움’을 보여 줄 평론가를 찾습니다. 2023년 평론상 응모평문 접수는 이메일로 8월 1일부터 25일까지 입니다. 2023 〈SeMA-하나 평론상〉의 수상자는 2천만 원의 상금에 덧붙여, 미술관과 함께 평론의 반경과 깊이를 키워갈 2024-2025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참여 기회를 얻습니다. 한국 미술 비평을 새롭게 할 여러분의 적극적인 응모를 환영합니다. 평론을 매개로 상생하는 미술 생태계를 만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실천은 계속됩니다.

  • 〈진격하는 저급들〉 1장: 슬픈 퀴어 초상

    ‘셀피 페미니즘(selfie-feminism)’은 지난 10여 년간 페미니즘─행동주의의 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통상 ‘셀카’로 번역될 수 있는 ‘셀피’는 휴대용 전화기의 보급과 함께 널리 퍼진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자화상 또는 초상 사진)의 한 종류로, 주로 여성들이 찍는다는 편견 또는 사실 때문에 진지하지 못한 사진의 하위 장르로 취급되어 왔다. 1992년생의 젊은 예술가이자 제4세대 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 성장한 오드리 월런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전시장으로 사용한다. 그는 미술사적으로는 권위있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널리 비판 받아온 익숙한 이미지들을 차용해, 자기 자신을 주인공 삼는 셀피를 찍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의 셀피 시리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업 중 하나는, 통증관리센터나 병원을 배경으로 환자용 의복이나 장치를 착용한 채 패션지 스타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2장: 단식 광대는 왜 춤추는가

    깡마른 채로 웃고 달리고 춤추는 아서 플렉의 몸은 〈조커〉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집요하게 묘사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감히 추측하건대 〈조커〉를 즐길 수 없었던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표현하는 바로 그 몸의 아름다움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서 플렉의 기이할 정도로 마른 몸은 그 자체로 그를 관통했던 정신적⋅신체적 학대와 고된 노동의 시간이 축적된 증거물이며, 그가 가진 “부정적인 생각들”만큼이나 그의 유일한 자산이다. 그의 몸은 먹지 않음으로써 말없이 배신하고, 저항한다. 무엇에 대해서? 어머니와 함께하는 식사가 강제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그를 상처 입히는 동료들과의 친목에 대해서,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일할 수 있는 몸의 규격에 대해서, 무엇보다 그의 인간됨을 보장하는, 섭취와 배설이라는 유기체적 절차에 대해서.

  • 〈진격하는 저급들〉 3장: 뉴플 스케치

    부치들 팸이든 복장도착자든 이곳에 모인 몸들은 서로의 질량에 대응해 서로에게 감응하고 충돌한다. 잠재적으로 당신을 원하거나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그러므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에로틱한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당신은 자신의 몸을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감각한다. 이제 내 몸은 단순히 내 것만은 아니다. 내 몸은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몸, 다른 몸들과 관계하는 몸, 그러므로 다른 몸들에게 다른 쾌락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몸이다. 이곳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이 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낯선 이들과 어울리기, 무엇보다 멈추지 말고 춤추기. 이곳 바깥의 논리로는 온전히 포착될 수 없는 모호한 친밀성의 제스처를 발명하고 마주치는 몸들 사이의 힘을 증폭하기. 그러므로 이 몸은 매개체다. 이 몸은 사용되기 위해 여기 있다.

  • 〈진격하는 저급들〉 4장: 사이버펑크 혹은 살아남기의 장르

    그러니까 이 뒤로 이어질 이야기는 항상 답이 없는 상황적 비극일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 대한 나의 건설적인 피드백이다. 나는 〈엣지러너〉의 결말을 본 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데이비드를 살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데이비드가 그의 연인인 루시와 함께 달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답은 사이버웨어의 디자인에 있었다. 알다시피 인간성의 ‘엣지(경계)’를 향해 내달리는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를 범주화하는 것은 그것의 주제만큼이나 특정한 미적 스타일이다. 어둡고, 축축하고, 암울한 도시의 전망 속 뿌옇게 빛나는 네온사인, 미래적인 인상을 주는 가죽⋅라텍스⋅금속 재질의 의상들, ‘사이버 스페이스’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수한 (고글 모양의) 기기들과 글리치 섞인 홀로그램들이 자아내는 인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5장: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

    이 글은 좋았던 우리의 옛날을 회상하거나 트위터에게 이른 작별을 고하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 지구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목도하고 원래 하려던 말을 잊어버린 종류의 그런 글이다. …아무리 진지하게 싸워도 그것은 끝끝내 ‘사적인 해프닝’에 머무른다. 심지어 그것은 아무런 결론도 대안도 생산해낼 수 없는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의 시간낭비로 치부된다. 물론,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데도 말이다! …지금처럼 트위터를 계속한다면 머리가 망가지고 그것이 주는 쾌락에 구속되어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밤낮으로 해대는 세상에 맞서기 위한 유일한 전략은 오직 지금보다 더 한심하고 쓸모없게 구는 것이다. …헛소리들은 그 어떤 의미나 가치로도 환산될 수 없는 극치의 쓰레기들이며, 우리는 이것으로 망가진 우리의 머리를 통통히 살찌워야 할 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6장: 레즈비언 황무지ㅡ비가시성에 대한 노트

    기세 좋게 계획했던 연재 순서에 따르면 〈진격하는 저급들〉의 마지막에 해당할 이 글은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 발표된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경향성을 다뤄야 한다. 물론 나는 이 주제에 강박적인 수준의 관심이 있다. 지난 10년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주제에 관해 쓰고 또 말해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만이 동기는 아니었다. 매번 내게 이 주제, 그러니까 반복하자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큼이나 고생스럽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처럼 느껴졌으니까. 더구나 나만 그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이름의 황무지에 들어가고 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개간 작업을 해왔으며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진격하는 저급들〉 들어가며: ‘젠더 문제’

    이 글은 2021년 SeMA-하나 평론상의 특전으로 2년간 지원받은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진격하는 저급들〉 연재의 서문에 해당한다. 작년 가을 진행한 《저급 이론들의 연합》 라운드테이블에 이어 〈진격하는 저급들〉은 (시각)예술문화 전반에서 포착되는 퀴어 부정성(queer negativity)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둔다. 퀴어 부정성은 1990년 테레사 드 로레티스가 처음 ‘레즈비언&게이 [담론]’의 사이에 위치한 ‘&(and, 그리고)’라는 분리의 표시를 퀴어라는 “공동 전선”을 통해 다시 사유하자고 제안한 이후 “퀴어 이론의 정상화(규범화)” 혹은 ‘탈정치화’라 부를 만한 시점이 도래한 상황에서 다시금 퀴어를 정치적으로 급진화하는 시도에 가깝다.

  • 다시 보아 주는 사람들, 사물들

    동료비평, 동료평가라는 말로 번역되는 피어리뷰(peer–review)는 본래 학술 출판의 품질과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분야의 전문가를 섭외하여 (대개 익명으로) 수행되는 출판물에 대한 논평을 뜻한다. 피어리뷰는 과학자사회를 특징하고 유지하는 장치로써 그 이념과 필요성은 광범위한 동의를 받고 있지만 지나친 전문화에 따른 고착과 연구 경직성 등에 따른 비판과 제도적 개선을 요구 받기도 한다. 예술가사회라면 어떨까? 구체적인 관계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사회보다 좁혀, 동료라는 말로 그 중간 단계의 공동체를 감각해볼 수 없을까? 이 물음은 ‘같은 분야의 전문가나 동업자’ 정도로 실체화된 동료라는 말의 개념적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이 변화를 쫓아갈 길로써 동료비평(peer–review)의 한 축인 리뷰(re–view)를 조명하고자 한다. 해당 키워드를 제시 받았을 때부터 떠올랐던 막연한 생각은 다음과 같다. 리뷰함으로써 동료가 되는 건 아닐까?

  •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아카이브 작업이란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가공하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남겨진 자료들 속에서 텍스트를 발견하고 해석하여 리얼리티를 구성해야 하는 일이다. 아카이브 작업은 현실을 붙잡는 일에 대한 불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정서영의 조각 앞에 선 내가 느끼는 어떤 상실감, 구멍이 숭숭 뚫린 현실을 보는 듯한 막연함은, 사물의 실재를 가능한 좇는 그의 조각이 현실에 대해 가지는 아카이브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카이브 작업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관람 조건이 되었고, 이 얽힌 상황 자체를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편으로 이건 억울한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특권이기도 했다. 여기서 특권이라 함은 내가 정서영의 작업에 대한 유일한 아카이브 작업자라서가 아니다. 아카이브 작업이 정서영의 조각과 맺는 특권적 관계 때문인데, 그 관계성에 대해 이해하고 쓰기를 시도할 수 있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부재를 스크리닝하기: 임철민의 〈야광〉

    장한길은 ‘비경험 세대의 경험’과 ‘포스트메모리’ 개념을 ‘부재’라는 키워드로 엮어 설명하고, 이를 성소수자의 크루징이라는 문제와 연결하며, 이 주제를 다룬 실험적 영상 작업인 임철민의 〈야광〉을 분석한다.

  • 열 손가락과 목소리를 조금씩 밀어내며

    언젠가부터 인간의 신체조건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음악적 환상들이 발견됐다. 주로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유럽 전통을 따르는 근현대 음악가들의 악보에서 나타난 징후로, 대체로 연습하면 해낼 수 있는 것과 신체 구조상 거의 불가능한 것의 경계면에 있었다. 이어지는 상상들. 소리는 당연히 귀에 들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청주파수 대역폭 안에서도 일정한 진동수를 가지고, 진동과 통증이 아닌 것으로 느끼게 되는 특정한 공기의 진동, 같은 정의를 만들어보기. 그리고 그 넓은 영역 안에서 음악이라는 개념은 얼마나 작고 얇은지 생각한다. 엄청나게 긴 시간 속에서 인간 신체가 변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몸 바깥에 있는 안경이나 이어폰, 보청기 같은 외부 장착물들이 점차 신체 더 깊은 곳으로 향하며 ‘보철’이라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몸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다.

  • 외치(Oetzi)의 눈: 책들 사이에서 엿본 미래

    외치를 발견한 건 우연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라가 의지를 가지고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야 하겠다고 계획했다 한들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없다고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이 있다. …세마 코랄에서 글을 위한 주제로 “간극에서 공유되는 미래”라는 말을 주셨는데, 나는 이 말 묶음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우선 ‘간극’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이렇다. 두 가지 사건, 두 가지 현상 사이의 틈. 그러므로 틈이나 간극을 말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은 최소 ‘두 가지’(혹은 그 이상) 사건이나 현상이다. 만약 이 두 가지(혹은 그 이상)가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닮거나 친하지도 않고, 심지어 같은 맥락에 놓이지도 않았다면, 궁극적으로 변증법적인 통합을 이루지 않은 채 계속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한다면, 그건 어쩌면 내가 관심을 계속 두었던 일, 때로는 우연히 만난 상황들과 관련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