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아 주는 사람들, 사물들

이여로
이여로는 지원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블로그, 독립출판, 해적번역 등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각자의 만들기 속에서 가치나 인정, 행동의 체계가 정립되는 과정을 ‘아마추어리즘’이라 부르며 예술을 비롯한 모든 만들기에 주목한다. 『긴 끈』(아티스트북),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이동휘 공저, 이론서), 『미술 구술: 전시 보기와 말하기 매뉴얼』(임가영 공저, 워크북) 등을 출판하며 현장 비평과 연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동료비평, 동료평가라는 말로 번역되는 피어리뷰(peer–review)는 본래 학술 출판의 품질과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분야의 전문가를 섭외하여 (대개 익명으로) 수행되는 출판물에 대한 논평을 뜻한다. 피어리뷰는 과학자사회1를 특징하고 유지하는 장치로써 그 이념과 필요성은 광범위한 동의를 받고 있지만 지나친 전문화에 따른 고착과 연구 경직성 등에 따른 비판과 제도적 개선을 요구 받기도 한다.2 예술가사회라면 어떨까? 이곳은 어떠한 규범과 장치로 경계지어 있고, 어떠한 부재와 흐릿함 속에서 작동되며, 그 내부에서 행위자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동료라는 말에도, 평가라는 말에도 우리는 서로 다른 꺼림칙함과 희망, 욕구 등을 갖고 있다. 사람들과 뜻과 마음을 나누는 인격적 차원에서부터 그러한 불만과 만족의 나눔 자체를 와해하는 여전한 폭력까지, 그곳에 나란히 놓여 있다. oo사회라는 말은 이 문제를 공동체의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로 함께 사고하기를 요구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다수의 예술 장르와 관점을 아우르는 사회학적 분석이나 종합을 할 수는 없다. 다만 나 자신의 작은 사회적 감각 하나를 붙들고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시급한 문제들과 만나게 되기를 바라며.

올해 6월, 개인 블로그에 「동료문화와 패거리문화」라는 글을 썼다. “한때 추구하기도 했던 동료 문화는 언제부턴가 의심과 반감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 그것을 추구했던 이유는 ‘공동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단순한 소속감의 욕구 때문이었다.”고 시작하는 이 글에서는 집단 내부의 상호인정이 중요한 문화적 기제라고 말했다. 이러한 형식은 그래피티나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비롯한 대항 문화, 앞서 언급한 과학자사회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으로 자기지속적 보상체계가 세워지기 때문이다. 가령 거리 문화의 샤라웃(shout out) 같은 호명 행위 역시 그 구체적인 방식 중 하나인데, 그것이 확립된 제도 내부에서 발생할 때에는 오히려 제도를 사적인 이해관계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경험적으로 느끼기도 했다. 더불어 2023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연구자: 이연숙) 라운드테이블 3부였던 〈아마추어리즘과 비평〉에서 우리는 블로그를 비롯한 웹에서 동료 만들기에 대한 사례를 공유했는데,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고 누군가에게는 매우 부담을 주는 것임을 참석자 간의 전체 대화에서 알게 되었다. 그러한 부담을 경감하는 방식들도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용기를 내보세요’라며 응원을 할 수만도 없었다. 이로 인해 나는 조금 더 간접적인 방식의, 매개를 허용하는 방식의 동료 만들기와 동료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또한 귀속성이 강한 혈연가족, 직업집단, 교육기관 등 전통적인 형태의 공동체에 소속되었다고 느껴본 적 없이 프로젝트형 모임을 반복해 온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앞선 글과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적극적인 규정이나 의견을 제시하지 못 했는데, 이 글에서는 다음의 질문을 따라가며 ‘함께 함’의 특정한 방법을 밝혀보고 싶다. 패거리나 커뮤니티라고 부를 법한 동질적인 소집단을 넘어, 구체적인 관계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사회보다 좁혀, 동료라는 말로 그 중간 단계의 공동체를 감각해볼 수 없을까? 이 물음은 ‘같은 분야의 전문가나 동업자’ 정도로 실체화된 동료라는 말의 개념적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이 변화를 쫓아갈 길로써 동료비평(peer–review)의 한 축인 리뷰(re–view)를 조명하고자 한다. 해당 키워드를 제시 받았을 때부터 떠올랐던 막연한 생각은 다음과 같다. 리뷰함으로써 동료가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 말을 제도에 의해서 전문화된 리뷰어, 즉 평론가나 연구자 등이 창작자의 동료가 된다는 뜻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 이 말은 제도의 경계를 환기하기보다 제도 내부의 사회화에 더 가깝게 작동한다. 그렇기에 ‘여타의 지면에 게시되는 분석적, 인상적 글쓰기’로 실체화되어 있는 ‘리뷰’ 또한 동시에 변화를 요구 받는다. ‘다시–본다(re–view)’는 것, 나는 이 행위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같이 보아 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민지(그림책 작가)

이여로(이하 ‘여로’): 그림책 작가라고 말하면 동화 작가라고 많이들 이해하잖아, 평소에 두 가지를 계속 구분하고 그림책이라는 장르를 강조하는 걸 봐 왔는데, 이번 기회에 소개해 줄래?

최민지(이하 ‘민지’): 동화는 어린이가 독자인 이야기야. 주로 글이나 말로 이야기해. 그래서 동화에는 그림이 들어가도 삽화라고 불려. 반면에 그림책은 그림, 글, 책이라는 형식으로 이야기하는 장르야. 그림책은 책을 떠나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장르인 것 같아. 또 그림책은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이 독자일 수도 있고.

여로: 민지의 그림책은 어린이의 보호자뿐만 아니라 따로 찾아 읽는 어른들도 많잖아. 그래도 나는 어린이 독자를 민지를 통해서 처음 만나 봤는데 너무 부러웠어. 왜냐면 나는 항상 작업을 통해서 나랑 다른 존재를 만나고 싶어하니까. 초등학교나 도서관에서 어린이들과 만나는 건 어때?

민지: 책을 같이 읽어서 너무 좋아. 많은 사람이 함께 읽을 수 있는 게 그림책의 특징이기도 해. 어린이가 멈추고 질문하고 어디서 웃고 궁금해하는지 한 장면 한 장면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그림책이라 가능한 것 같아. 어른들을 대상으로 삼는 작품은 대부분 ‘정숙하시오’라는 분위기에서 함께 보게 되잖아. 어린이 극이나 어린이 영화도 다 같이 소리내고 웃고 떠들면서 보지만 그림책은 어떤 장면에서 멈출 수 있다는 점이 또 다른 것 같아. 북토크를 하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어린이의 피드백을 받고 나도 알게 돼. 책의 주 독자인 어린이가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는지 배우게 돼. 특히 배경의 작은 사물이나 인물도 읽어 내는 게 어린이 독자의 중요한 특징인 것 같아서, 나도 책을 만들 때 작은 디테일에 신경을 쓰게 되고,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도 다 살아 있게 그리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첫 그림책보다 어린이 독자를 만난 이후부터 더욱 신경쓰게 된 부분인 것 같아. 그 세계를 더 믿고 생각해야 돼. 어린이 독자가 문어 목욕탕이 진짜 있다고 믿기도 하니까. 내 독자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나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더 알아야겠다고.

여로: 리뷰나 비평을 전문가나 연구자가 쓴 글이라고만 생각하잖아. 근데 민지가 그렇게 현장에서 질문과 반응을 받고 또 나누는 걸 보니까 어린이들이 하는 질문도 일종의 리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민지: 나도 글로 된 리뷰를 늘 찾아 읽고 더 읽고 싶어도 하는데, 내 그림책의 주 독자인 어린이는 글로 비평을 하거나 리뷰를 남기지는 않잖아. 다른 분야는 글로 된 비평이나 피드백을 받을 때, 자기 작업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게 부럽기도 하고, 더 풍성해지잖아, 담론이 쌓이는 거고, 재밌겠다고 생각했어.

여로: 그림책의 담론은 또 다른 모습으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 민지 말을 들어 보니까 어린이들이 리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민지: 그렇네. 얼마 전에 서울 구로구 꿈나무도서관에서 『나를 봐』3를 같이 읽었는데, 주인공이 구한 고양이 주인이 어떻게 알고 학교로 찾아왔냐고 누가 물어봤어.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 자세한 이면을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그 상황을, 다 생각을 못 해봤거든? 그래서 엄청 당황했어. 만든 사람을 초과해서 더 디테일하게 읽잖아. 이야기를 진짜라고 간주해서 그런 것 같아. 우리는 거리를 두고 보잖아. 또 2학년 친구가 “왜 자꾸 작가님이 확신이 없이 ‘한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세요?”라고 지적을 하는거야. “‘합니다’라고 대답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는데 충격이었어. 맞는 말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 ‘합니다’로 대답했어. 아니면 나도 모를 수밖에 없거나 대답하지 않고 열어두고 싶은 부분도 있잖아. 그럴 때는 그림책의 사람들도 프라이버시가 있다고, 그 사람이 안 알려주고 싶을 것 같다고 대답해.

여로: 어떤 관심으로 작업을 시작해?

민지: 최근에는 형식에 대한 관심이 이야기로 이어졌어. 『나를 봐』는, 이 그림책의 판형은 물리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그리기에 따라서 멀리서 보는 게 될 수도 있고 가까이서 보는 게 될 수도 있는 연출에 관심이 생겨서 시작했어. 이번 책인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4는 긴 판형을 써 보고 싶었고, 책의 가름끈이 책 속의 동아줄이기도 한데 그렇게 차원을 침입하는 게 재밌어. 그림책이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재밌어. 처음엔 소설을 쓰고 싶었어.

여로: 민지랑 맞는 매체를 만났네. 그럼 어떤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민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다른 사람이 말해주면 좋겠는데. (웃음) 처음에 한 장면이 떠올라. ‘엄마가 없는 아이는 어떻게 목욕탕을 가지?’, ‘심심할 때 하늘에서 방방이 떨어지면?’ 그래서 내가 궁금해서 그려봐. 그리고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해. 이야기를 통해서 내 마음을 바꿀 수 있어.

여로: 민지가 궁금해서 그린다는 게 재밌다. 그럼 어린이는 어떤 의미야? 주인공이 모두 어린이잖아.

민지: 어린이는 나야. 그림책 속 나를 세계에서 작은 존재로 의식해. 어린이를 위해서 한다고는 생각 안 해. 화자를 만들면 어린이가 되어 있어. 내가 나를 그렇게 의식해서 그런가? 내가 문어가 나오는 목욕탕에 가 보고 싶어. 그때 어린이라면 나처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여로: 내가 어린이처럼 따라하는 게 아니라, 어린이라면 나처럼 할 것 같다는 말이 재밌어.

민지: 성인이 주인공인 책도 만들어 보고 싶은데 잘 안 돼. 최근에 낸 책일수록 점점 내 책의 독자 연령층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최민지, 『문어 목욕탕』(서울: 노란상상, 2018). ©최민지.

2022년 10월 23일 일요일에는 경북 경주의 카페 겸 문화공간 ‘어제 아래’에서 『문어 목욕탕』5의 목욕탕 북토크가 있었다. 한 어린이가 “왜 문어 팔이 구불거려요?”라고 물었을 때, 그 말은 내게 강한 영향을 남겼다. 어른이라면 ‘예술적 표현’이라고 당연하게 판단하고 넘어갈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질문으로부터 나 역시 그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 저것이 아니라 이것인가, 이 물음이야말로 어떤 것이 존재하는 양상을 탐구하고 이해하게 만든다. ‘문화적 학습을 결여했다’고 표현할 법한 그 관점이 나에게는 오히려 예술이라는 인지적 상태를 생성하는 관점으로 보였다.

민지: 구매하는 사람이랑 읽는 사람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다른 문학과의 차이인 것 같아. 단순히 많이 팔리는 것과 어린이의 반응이 다를 수도 있고, 이렇게 행사에 직접 가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게 답답해.

여로: 민지 말을 들어보니까 각각의 매체에 적합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개발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

그 밖의 받고 싶은 형태의 피드백이 있냐는 물음에 “더 뜨거운 반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일 다수의 댓글이 올라오는 웹소설 작가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xx (웹소설 작가)

여로: 그래서 xx 생각이 났어. 웹소설은 댓글이 만 개 씩 달리잖아.

xx: 그렇진 않은데. (웃음) 그런 작품은 거의 없어.

여로: 아 진짜? 잘못 찾아왔다.

xx: 뭔데?

여로: 그럼 xx은 댓글이 얼마나 달려?

xx: 연재 초기랑 끝이랑 다르고, 자극적인 회차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인데, 0개에서 000개까지 나뉘는 것 같아. 그리고 지금은 웹소설이 전성기를 지나서 과포화 상태라서 작품마다 관심이 더 분산되고.

여로: 그렇구나. 그래도 거의 매일 그만한 반응이 달린다는 게 특별한 느낌일 것 같아. 겉에서 볼 때는 부럽다고 느끼기도 하고. xx 본인은 어때?

xx: 나는 단순하게 데이터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그 내용을 그대로 받으면 부정적인 영향이 될 때도 많고. 또 1화씩 나뉘어서 자주 공개되는 방식이다 보니까, 한 편 한 편마다 일차원적이고 바로 느낄 수 있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게 되기가 쉽고 반응도 그렇게 남겨지기 쉬운 것 같아, 아침드라마 같은 면이 있는데, 김치싸대기6를 보고 ‘헐!’은 외쳐도 그 이상은 어렵잖아. 또 독자들끼리 분량에 관한 불만이나 비판 같은 게 서로 간의 놀이나 밈(meme)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내가 뭘 쓰고 싶은지 읽어주고 해석하고 남겨주는 사람들도 있지. 아주 적어. 체감 상으로는 댓글 자체가 읽는 사람의 1% 정도만 남기는 것 같네.

여로: 그럼 xx한테 독자는 어떤 의미야?

xx: 독자에 크게 의미 부여를 안 하는 것 같아. 소비자와 공급자 관계로 이해하는 게 더 큰 것 같고,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서 희열을 느끼는구나, 같은 데이터 차원으로 받아들여. 아 그런데 책임감을 느낀 경우도 있네. 초등학생 독자가 댓글을 남겼을 때.

여로: 독자가 주된 동력은 아닌거네. 그럼 처음 웹소설을 쓰게 된 이유는 뭐야? 이제 4년 정도 됐나?

xx: 응. 그게 돈이 된다고 해서. 쓰기 전까지는 안 읽었어. 읽었던 건 1세대 웹소설? 『룬의 아이들』 같은 소설인데, 지금과는 환경이 너무 다르지.

여로: 어떤 반응을 원해?

xx: 사람들이 잠깐 즐거웠으면 좋겠다? 인생이 바뀌었다, 이런 걸 기대하지는 않아서. ‘재밌었다’ 정도.

여로: 본인에게는?

xx: 그것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말하니까 꿈도 희망도 없는 것 같아서 그런 [의미 있는] 얘기를 좀 해야 하는데 싶네.

여로: 누구를 위해서?

xx: 업계를 위해서? 다 이렇다고 생각할까 봐.

여로: 그럼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해?

xx: 요즘 유행하는 키워드를 찾아봐. 가령 육아물, 선결혼후연애, 소꿉친구… 그렇지만 이건 내 방식이고 다른 작가들은 또 다를 거야.

여로: 개인의 문제의식이나 해석을 먼저 밝히는 작가들과는 시작점이 달라서 재밌는 것 같아. 장르라는 게 일종의 사회적 합의 같이 느껴지는데, 장르물의 고유함일까? 모두 같은 조건에서 시작해서 달라지는 게. 그럼 xx이 하고 싶은 말은 뭐야?

xx: 없는 것 같은데? 나를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아.

여로: 아예 없진 않을 거 아냐. xx 혹시 AI?

xx: 뭐냐고. (웃음) 취향, 문제의식이 섞이게 되긴 해. 로맨스 판타지 쪽에서도 몇 년 전부터 페미니즘 경향이 드러났거든. 그래서 이 주제랑 섞이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긴 하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해. 근데 사람들은 가볍게 오락으로 읽는데, 계몽적이 될까봐 조심해. 그래도 글에서 편견이나 혐오를 조장하지는 않으려고 하지.

여로: 내가 미술 작업들을 보면서 느낀 건 비평적인 자의식, 의식화를 강하게 갖고 그걸 드러내는 게 권장된다는 거였거든? 작업이나 매체가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는지 끝없이 인지하려고 하고, 로맨스 판타지라면 동시대에 로맨스나 판타지가 무슨 의미가 되는지 계속 묻고. xx도 그래?

xx: 그런 웹소설 작가들도 있지. 나는 아닌 것 같아.

여로: 그럼 왜 해?

xx: 돈 벌려고?

여로: 일단 하게 됐으니까 소극적으로 ‘무엇 하지는 말자’ 정도의 의미인 건가? 작업으로 어떤 문제에 개입하고, 해체하고, 비판하고… 그런 언술들을 작가 스스로 하는 것을 자주 접해서 그런가, 그런 것에 비하면 수동적인 것 같네.

xx: 둘이 그렇게 다른가?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여로: 어떻게 아니야?

xx: 왜냐면 남성향 장르에서 여성에게 다른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거든. “왜 PC[political correctness]를 넣냐”, 이런 식으로 반응이 나오기도 하고, 그게 무관심이나 수익 하락으로 이어지기도 해. 뭘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것으로도 반발이 있는데, 만화용어에 비유하면 서비스 씬, 서비스용 여성 캐릭터를 빼는 것만으로도 반발이 있어. 그래도 그런 부분에서 타협은 안 하려고.

여로: 정형화된 로맨스의 모습은 따라가되, 디테일한 부분들에 대한 판단을 넣으면서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처음에는 뜻도 없고 의미도 없고 수익 활동이라고만 이야기 했는데, 얘기하다 보니까 또 다른 적극성이 있는 것 같아.

xx: 으음, 그런가.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 뭐랄까. 내가 예술을 한다고 도취되는 걸 경계한다고 해야 할까. 나는 예술가라고 생각은 안 해. 창작자는 맞는데, 만약 예술가라고 생각하면 내가 이 글과 직업을 대하는 태도가 지금이랑 달라질 것 같아. 한편으로는 너무 감정적이 될 것 같고. 하지만 창조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해. 똑같은 걸 만드는 게 아니고, 계속 새로운 걸 하고 싶어하는 편이야.

여로: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료 작가가 있어?

xx: 거의 없어. 내 경우에는 원래 알던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대학 동기나 SNS 친구.

여로: 동료의 필요성을 느껴?

xx: 대학교 때 ‘합평[합동평가]’ 생각이 나는데, 시간이 충분하면 스스로 돌아보고 고칠 수 있는데 그걸 단축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 의견을 빌려오거든. 웹소설은 오늘 쓴 걸 내일 올려야 하니까. 그런 피드백이 필요하긴 해.

여로: 편집자랑은?

xx: 편집자랑도 하는데 사람마다 달라. 더 나은 무언가를 제시하거나 개입하는 강한 피드백은 별로 없고, 단점을 없애거나 가리는 약한 피드백, 심하면 맞춤법 정도만 봐주기도 하고.

여로: 어떤 사람이 xx에게 동료가 될 것 같아?

xx: 뭔가를 최소한 하지 않겠다는 사람과는 뜻이 맞아. 서비스 씬을 넣을 수 있는데,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의식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노출하는 사람이 있어. 경계 의식이 있는 사람이랑 가까워지는 것 같아.

여로: 독자가 동료가 될 수는 없을까? 앞서 최민지 작가랑은 그런 얘기를 했거든.

xx: 나는 독자와 작가의 거리가 멀어지면 좋겠어. 심지어 댓글을 못 달도록 하는 플랫폼도 있고. 또 댓글은 일관성이나 지속성이 없어서 더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여로: SNS는 어때?

xx: SNS는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드는 것 같아서 위험하다고 느껴져.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만나고 싶은데, 교류할 장이 있는 건 아니고 웹툰처럼 팀 작업도 아니다 보니까, 다른 동료 작가를 만날 기회가 없네.

xx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콜렉티브로 활동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궁금하여 남선미 디자이너를 인터뷰했다.

남선미(디자이너)

남선미(이하 ‘선미’): ‘새로운 질서 그 후(After New Order)’’를 하다가 지금은 나왔는데, 그렇게 강하게 묶여 있는 콜렉티브도 해보고, 독서 모임이나 블로그 통해서 다소 느슨하게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여로 님이 말씀하신 중간 지점의 동료 문화나 감각을 저도 갖고 싶다는 생각을 요새 좀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동료를 모을 수 있는 형태 중 하나로, 여로 님이 책7 뒤에 큐알코드를 삽입해서 그걸 찍으면 리뷰를 남길 수 있는 페이지로 넘어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니면 블로그에서 이 사람이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나에 대한 글을 남겨주었을 때 그것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 동료 같았어요. 상호 참조가 가능한 경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 큐알코드 궁금한데, 디자이너가 제시한 아이디어인가요? 아니면 원래 있던 아이디어인가요?

여로: 제시한 건 저인데 인현진 디자이너도 이해해 주셔서 넣게 되었어요. 책의 웹페이지로 연결되는데, 그곳에 실제 댓글들이 달리지는 않았고. (웃음) 반응은 주로 다른 형태와 경로를 통해서 받은 것 같아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노출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결과물은 멀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난잡하게 어지럽히면서 하나의 경로를 찾아가는 과정이었거든요. 생각에 발 맞춰서 글을 쓰려고 했지만, 물리적인 과정도 내보이고 싶었어요. 이것 자체가 성공적인 경로였다기보다 경로 만들기의 의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블로그에 익숙해서 그런가 싶어요. 블로그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생각들을 올려 놓잖았아요. 틈이 많으니까 더 서로 침입할 여지가 크고. 지금은 블로그가 예전과 다르게 작동하는 느낌을 받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지만요.

선미: 저는 리뷰가 글이 아닌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을 못 해봤던 것 같아요. 여로 님이 북토크8 때 각자가 매혹되는 것에 각자의 방식대로 반응하자는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 같은데, 저는 제안을 하는 게 나의 리뷰 방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에 제가 ‘이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어’라는 생각으로 여로 님의 블로그 글을 조판해서 드리면, 그것도 리뷰일 수 있겠구나, 저도 다른 방식의 리뷰를 시도해 보고 싶어졌어요.

여로: 상대의 반응이 나에게 되돌아와서, 다시 내가 변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일으켜주는 것이 동료라고 느껴져요. 방금처럼 누가 조판을 해서 나에게 준다면, 저는 저 자신이 바뀔 것 같거든요? 이 글이 블로그 인터페이스로 볼 때와 또 다르게 읽히네, 다른 감각이 생기네, 그러면서 디자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말씀처럼 각자의 형태로 리뷰를 남기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선미: 매혹된 분들에게 “이런 거 하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라는 얘기를 많이 드리는 편인데, 그 사람이 하든 안 하든, 그게 제 리뷰 방식인가 봐요.

여로: 제안을 한다는 게 대상으로 소급되거나 파고들기보다 그것을 준거점 삼아서 확장되는 방향성을 가져서 저는 더 좋은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저도 올해 냈던 책이 제안들의 결과였네요. 공저자인 이동휘 씨의 블로그에 공동 연구를 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렇고, 제가 1인 출판을 하니 저자 계약이 아니라 출판사 단위로 협업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렇고요. 그걸 혼자 ‘이동식 임프린트’라고 부르고 있어요.

선미: 그럼 진짜로 이거 마치고 오늘 인터뷰의 리뷰로 제안서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여로: 너무 좋죠!

모임 ‘도구와 함께 추는 춤’(가제) 제안서, 2022. 제공: 남선미, 이여로.

선미: 하든 안 하든 여로 님한테 이걸 시켜보고 싶다는 감각이… (웃음) 이 사람이 이걸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여로 님이 wrm9에서 워크숍을 주최해보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도 참여하고 싶다.

여로: 그럼 선미 님은 기획자나 프로듀서에 가까운 성향일까요.

선미: 제가 그걸 재밌어 하더라고요.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10에서 운영하고 있는 비판적 기술 읽기 모임의 중간 연구 결과 공유회로 〈운율로부터 배열로〉라는 워크숍을 진행했었는데 워크숍에서 GPT–3로 존재하지 않는 잡지 원고를 함께 만들어 봤었어요. 참석자분들에게 워크숍 당일 기획 의도만 공유하고 잡지에 필요한 원고를 즉흥적으로 맡겼었어요. 워크숍이었지만 당일 실시간으로 잡지 원고를 받아보며 어떤 필자들을 떠올리면서 이런 걸 청탁하면 재밌을 것 같다, 이런 감각을 떠올리게 되는 게 좋더라고요. 『yesterweb』11이라고 자기들끼리 모여 인터넷 문화에 대해 얘기하고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구축하며 이를 틈틈이 퍼블리싱하는 웹진이 있는데요. 예전에 안그라픽스에서 시인과 디자이너가 짝을 이뤄 출판했던 것처럼, 글 쓰는 사람이랑 프로그래머 또는 디자이너랑 붙어서 각자가 쓴 글을 한 페이지짜리 웹사이트로 만들어 웹진을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요새 자주 해요. 이런 걸 제안서에 넣어 봐야겠다. (웃음) 얘기하다 보니까 너무 재밌어서 빨리 제안서를 보내드리고 싶어요.

여로: 너무 좋습니다. 또 선미 님은 ‘새로운 질서 그 후’ 말고 ‘인공위성+82’12 동인으로도 활동하시잖아요. 최근에 지방의 퀴어 이야기를 담은 『유학생』이라는 책을 출판하셨고, 그 직전에는 『백제금동대향로 동물백과』라는 책을 편집하셨죠. 지속적으로, 일시적으로 참여하시는 여러 모임들 소식을 듣다 보면 여기 있는 줄 알았는데 저기 가 있고, 그게 변덕스럽다기보다 유의미한 축적을 만들면서 동시에 변화하고 계신 것으로 느껴졌어요.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시나요?

선미: 올해 다 소진된 것 같지만 (웃음) 저는 사실 그 모델이 여로 님이거든요. 바둑판에서 돌이 움직이듯 움직이고 계신 것 같아서, 거기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여로 님도 진짜 활동 반경이 오타니 쇼헤이 같다, 일본 야구선수인데 투수도 할 수 있고 타자도 할 수 있는 선수예요.

여로: 자칫하면 이도저도 못 하는 사람. (웃음)

선미: 그렇게 오고가는 진동이 저한테 자극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패거리 바깥으로 벗어나서 자유롭게 유영하기? 사람들과 이런 걸 하고 있다는 걸 제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동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아서, 과정이 궁금했어요.

여로: 저 자신은 ‘그런 행위였나?’ 자각이 잘 안 되어서, 보시기에는 어떤 게 그렇게 느껴졌는지 궁금해요.

선미: 저는 『긴 끈』13부터 봐왔는데, 책을 직접 배송하는 서비스를 하셨는데 그런 DIY 유통부터 새로웠어요. 저는 예전에 같이 글쓰기 모임을 했었는데, [소설 쓰는] 나일선 씨도 그렇게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여로: 그랬었죠. 음악 연구자인 전대한 님이 내주신 아이디어였는데, 한동안은 내가 오늘 어디 지역에 있겠다고 SNS에 공지하고 대면으로 판매했어요. 대부분 부담스러워서 택배로 받으셨고 (웃음) 저라도 그럴 것 같은데, 그렇게 직접 만난 게 나일선 씨였어요. 당시에 ‘소규모출판의 특성을 살려서 어떤 의미나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알게 된 이후로 『셋 이상이 모여』라는 문학 앤솔로지를 함께 만들기도 하고, 그 책에 소설을 쓰셨죠. 맛있는 커피 골라 드시는 분이라, 커피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일선 씨 덕분인가? 책을 같이 내고 나서는 천천히 이별한 것 같아요.

선미: (웃음) 이별이요?

여로: 천천히 헤어지는 게 중요하더라구요. 급하게 헤어지면 원한이 생겨서. (웃음) 무언가를 같이 할 때 공통의 지평 위에 있지만 서로의 다름이 크거든요. 제 경우에 책 만들기라는 공통의 목표가 그런 다름을 긍정적으로 순환시키는 장치였던 것 같은데, 저는 그게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커지는 관계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억지로 인연을 더 끌고 가다 터질 때도 있고, 그래서 ‘헤어져야겠다’고 어느 새에 느끼는 것 같아요. 선미 님도 콜렉티브를 나오셨잖아요. 어떤 연유이신지, 다른 모임들은 또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선미: 콜렉티브 내에서 제 힘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도 있었고, 요새는 좀 더 느슨하고 유연한 형태의 동료 감각을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또 웹도 좋긴 한데 출판에 좀 더 관심이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여로: 처음 함께 하시게 된 계기는 민구홍 님의 워크숍인가요?

선미: 맞아요. 스튜디오 파이에서 진행하는 ‘새로운 질서’14라는 모임에서 수강생들끼리 끝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각자가 좋아하는 웹사이트를 공유해보자는 모임으로 시작했다가 콜렉티브 형태가 되었어요. 요새 느슨한 동료라는 감각을 가장 좋게 가졌던 건, 언메이크랩15에서 진행하는 포킹룸 리서치 랩이라고 5, 6명이 모여서 한 달 정도 각자 발제를 하는 모임이었는데, 느슨하게 관심사를 나누고 그런 게 되게 좋더라고요.

여로: 공동의 것을 함께 만드는 형태는 아닌가요?

선미: 그런 건 아니고, 각자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한 달 동안 각자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식이에요. 분야도 다양하고, 아카데미에 소속되지 않고도 이런 공유와 연구가 이뤄질 수 있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에서 하는 ‘비판적 기술 읽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모임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여로 님이 진행하셨던 들뢰즈 워크숍도 궁금했어요. 엄청 장기간으로 이루어진 모임이고, 써주신 글 중에서 “침묵도 환영”이 말이 너무 좋더라고요. 침묵조차도 말이 될 수 있구나, 이런 문구 하나가 좋더라고요.

여로: 선미 님 본인에 대한 리뷰를 바라시기도 하나요?

선미: 제가 리뷰를 받고 싶다는 생각은 못 해 본 것 같아요. 근데 이렇게 인터뷰 요청을 주신 것이 리뷰의 다른 방식 아닐까요?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쓰루미 슌스케(Shunsuke Tsurumi | 鶴見俊輔)의 말이 생각났다.

서클 속에서 이야기함은 생각함이 될 수 있고, 생각하면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타인의 주장을 받아 안아 자기 것으로 이야기하는 일 역시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사상[적] 실현이라는 영역에 한정되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사적 소유를 넘어서고 있고 서클이 그에 속하는 자에게 주는 풍부한 감각의 원천이 있다. 자기 생각이 타인의 생각과 결합하고 교류하여 증식해 나가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16

위 문단은 1950~60년대 일본에서 활발했던 서클 운동의 맥락에서 쓰인 것이지만, 나는 오늘날의 웹 환경이나 인용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도 종종 이러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상적 공공성을 마음이 맞는 개인 간의 우연한 만남 이상으로 길러내기 위한 조건이나 장치는 무엇일까? 작업 자체가 반드시 팀으로만 가능한 경우가 궁금해졌다.

김연재(극작가)

김연재(이하 ‘연재’): 연극만의 특수한 리뷰가 있다면 ‘분위기 리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극장에서는 창작과 수용이 동시에 발생하잖아요. 관객들은 순간순간 반응하며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데요. 이 분위기에 의해 작품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객석의 분위기는 반응을 넘어 리뷰가 되는 것 같아요. 언어로 정돈된 사후적 리뷰가 아니라 극장에 존재함으로써 비언어적 리뷰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연극 작업자들은 공연이 올라가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말하더라고요.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명쾌하게 답하기는 어려워요. 공연의 꼴이나 방향성일 수도 있고 작가가 시도하고 있는 것의 미적 효력일 수도 있고 작품의 사회적 맥락 내지 어떤 평가일 수도 있고요. 연습과 리허설을 통해 몇십 번 봤던 연극인데도 객석에서 관객과 함께 보면 완전히 새로이 보이고, 다 만들어 놓은 연극임에도 관객을 만나기 전까지는 완성되지 않은 것 같아요. 연극은 너무나 섬세한 생물이어서 날마다 달라지고 사소한 요소들에 영향을 받고 영향 받는 과정을 명확히 읽어내기도 어렵거든요. 그래서 관객의 분위기 리뷰에 따라 매번 다른 작품이 탄생하고 소멸해요. 극작가, 연출가도 자기 작품의 관객이 되어 객석에서 연극을 보잖아요. 나의 작품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러닝타임 동안 꼼짝 없이 함께 있는 일은 좀 특별한 경험인 것 같아요. 리뷰를 듣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겪는다’고 할까요.

희곡 차원에서의 리뷰에 대해 말해볼까요. 희곡의 경우에는 연극의 창작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리뷰들을 마주하는 것 같아요. 연출, 배우, 드라마터그, 디자이너가 읽었을 때 각각 다른 리뷰가 발생하고, 이때 리뷰는 텍스트에 대한 감상이나 후기도 있지만 다른 영역의 창작물, 이를테면 조명이나 무대, 연기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해요. 그리고 희곡이 연극으로 만들어져서 관객 앞에서 공연될 때, 공연 이후 관객이나 평론가에 의해 비평되고 기록될 때 등 다양한 리뷰의 겹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제가 갈증을 느끼는 리뷰는 작품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고 동시대 예술의 맥락에서 작품을 읽어내는 연극 비평이에요. 저는 이런 연극 비평이 굉장히 희박하고 귀하다고 느껴요. 감상, 칭찬, 비판의 영역에 있는 글을 주로 읽게 되거든요. 공연이 끝나면 작품이 사라지니까, 연극 비평은 작품을 기록하는 성격이 강하기도 하고요. 지면과 독자가 적은 것도 그 원인이겠지요. 학술 연구와 비평과 기록과 평가가 ‘연극 비평’ 안에 뭉뚱그려져 있는 것 같아요. 한 예술 장르 안에서 담론이 고이지 않으려면 기획과 학예연구, 창작과 비평이 같이 가야 하는 것 같거든요. 이런 리뷰 환경 속에서 저의 연극 작업을 어떤 언어로 남길 것인가, 리뷰를 어떻게 주고받을 것인가, 고민해요.

여로: 반대로 연재 님이 직접 학술 논문이나 연구서를 많이 읽으시잖아요. 근래 올라갔던 연극 ​​〈복도 굴뚝 유골함〉의 참조 문헌17을 나눠주셔서 보았을 때에도, 저는 이런 방식의 참조나 인용이 간접적인 동료 맺기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원래 학술 논문에서 참조는 선행 연구들을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어가는 의미일텐데, 전혀 다른 흐름으로 이걸 가져와서 이어가는 느낌이에요. 인용과 참조를 하나의 테크닉으로, 장식적으로 활용하는 경우와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극과의 분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는데요. 그것을 자료로 인식하면서 가져다 놓는 주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용과 피인용이 같은 층위에서 진행되는 느낌이랄까. 인용한 분들에게 인용 사실을 전하시기도 하나요?

연재: 좋은 영감이 되어주거나 귀한 자료를 발견했을 때는요. 이번에 서울메트로 지하철의 타일 벽화를 모아놓은 『서울의 지하철』18이라는 책을 참조했는데, 저자 중 한 명이신 석준기 님을 공연에 초대했어요. 건축 사진을 찍고 주거 정책을 연구하시는 분이세요.

여로: 어떤 반응을 주셨나요?

연재: 연극의 현장성과 에너지에 좋은 자극을 받으신 것 같았어요. 도시 계획과 역사의 측면으로 작품을 읽었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복도 굴뚝 유골함〉은 어릴 때 헤어진 엄마가 미국에서 죽었다는 메일을 받고 미국으로 떠나는 건축 사진사와 타일공의 이야기거든요. 건축 사진사는 엄마의 삶과 죽음을 추적하는데, 도시 건축물들의 이미지, 도시 계획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중요한 단서로 작용해요.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과 같은 남근적인 국가기념물들, 마포아파트, 한강맨션과 같은 산업화의 상징들, 88올림픽 때의 도시 미화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지하철 타일 벽화 등. 건축물의 역사적 의미는 그 자체로 너무나 선명하니까 작품 전면에 내세우지 않기를 택했어요. 대신 이것들을 띄엄띄엄 배치시킨 뒤 성좌처럼 연결하는 글쓰기를 시도했어요. 제 생각에 석준기 님께서 이러한 글쓰기를 감지해 주신 것 같아요. 도시 연구자의 눈으로 작품에 접속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실제로 작품에 언급된 대표적인 건축물, 장소, 도시 유산들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극중 인물들의 사회적, 계급적 위치나 삶의 감정, 시대적 생활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이런 식의 동료 맺기가 재미있었어요.

여로: 희곡 내부에서의 참조뿐만 아니라 연재 님 본인이 미술이나 타 분야와 적극적으로 협업도 하시잖아요. 올해 초의 인터뷰19에서는 ‘스스로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데 희곡을 계속 열심히 쓰는 것만으로는 그게 어려운 것 같아서 혼란을 느낀다’라고도 말씀해 주셨는데, 이런 맥락도 있는 걸까요?

연재: 연극은 여러 사람이 협업해서 만드는 예술이기 때문에 더욱이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요. 희곡은 연출과 배우의 해석을 통과해서 연극으로 만들어지잖아요. 그래서인지 나의 세계를 온전히 스스로 봉합해 내고 싶다는 욕구도 있지요. 그래서 최근에는 〈낙과줍기〉라는 연극을 연출했어요. 연출을 해 보니,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이라는 내 안의 어떤 예술의 상을 결과점이 아닌 시작점에 놓고, 작업을 거치며 그 상이 변화하는 모습을 면밀히 관찰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여로: 《불완전 운동》20이라는 전시에서는 영상을 만드시기도 했는데요.

연재: 〈달과 종〉이라는 영상 작업이었어요. 저는 서산의 제철산업단지 부근에서 십대를 보냈는데요, 제 안에 철을 향한 강한 향수와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자연에서 채굴되고 용해되고 제련되며 산화 및 부식되는 철의 긴 시간을 상상하면서 폐기물처리장, 폐산업시설, 을지로 등에서 철의 이미지를 수집했어요. 무척 소박하고 솔직한 작품이었어요. 제가 매혹된 실제의 이미지를 작품에 그대로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해방감을 느꼈어요. 물론 제가 아마추어 감독이어서 편히 작업했기 때문이겠지요.

타 분야와 협업할 때 저는 대개 텍스트를 담당하는데요. 극작가의 정체성으로 글을 써요. 이 정체성이 다른 장르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발현되는가? 그 또한 희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더 다양한 운명을 지닌 텍스트를 써 보고 싶어요. 올해 《텍스트 뷔페》21에서 희곡을 전시했는데요. 텍스트로서 보이고 읽히기 위해 깨끗하게 놓여있는 모습이 꼭 희곡의 다른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 같았어요.

여로: 요새 관심을 두는 건 무엇인가요?

연재: 오컬트에 관심이 있어요.

여로: 어떤 연유인가요?

연재: 여성적 공포를 연구하고 싶고, 공포물의 클리셰적 코드들을 모방하고 비틀면서 공포라는 감각을 전환해 보고 싶어요. 전통적 공포물에서는 남성 주체의 언어와 법, 공동체를 위협하는 두려운 타자가 여성 비체의 모습으로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여성인 저는 저의 몸을 낯선 타자라고 느끼고 공포증을 앓고 비체라고 인식할 때가 있어요. 여성에게는 가장 깊은 내부가 가장 낯선 외부인 것이죠. 그리고 야생의 자연이 누출하는 위협과 공포, 숲을 오래 응시할 때 발생하는 공황과 착란, 나의 몸의 테두리가 흐려지면서 자연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감각, 식물 공포… 이런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주관적이고 내밀한 감각을 따르는 글쓰기, 나를 비집고 튀어나오는 억압된 여자의 목소리를 받아 적기, 밀어 쓰기, 진실의 지하를 향해 내려가기, 죽음을 딛고 말하기… 이러한 글쓰기가 희곡이라는 장르에서 어떻게 수행될 것인가? 희곡에서의 대화는 인물이든 관객이든 자기 자신이든 화자의 의도와 청자의 반응이 전제되는 행위잖아요. 희곡이 지니는 이러한 명확함이 제가 지향하는 글쓰기와 부딪칠 때가 있어요. 그래서 희곡을 쓸 때마다 처음 같이 어렵고, 익숙해지지 않고, 외국어로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어떤 글쓰기를 할 것인가, 희곡 안에서. 여성의 희곡 쓰기는 무엇인가. 여성적 희곡 언어는 어떤 모습인가. 〈낙과 줍기〉도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 중에 있는 작품이었어요.

여로: 어떻게 보면 길지 않은 시간일 수도 있는데, 올해 초에 하셨던 인터뷰와 지금 해주신 말씀이 차이가 있어서, 많은 시간을 겪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연재: 작품을 발표하고 나면 생각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여로: 〈낙과 줍기〉에서 김문희, 최순진 배우의 목소리 연기에서 방금 말씀의 일부를 느낀 것 같아요. 대사가 전달된다기보다 그 대사를 겪는 자의 경험이 전달된다고 해야 하나. 그 인물에 대한 재현적인 공감이 아니라, 나와 전혀 다른 그 인물을 그 순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오늘 인터뷰 나누는 김에 저도 리뷰를 전하네요. 앞서 그림책 북토크, 웹소설 댓글, 디자인 제안서 등 분야나 개인에 따라 여러 방식의 리뷰가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연극은 어떨까요?

연재: 웹소설 같은 폭발적인 반응은 없고 (웃음) SNS에 남겨 주시는 약간의 흔적들, 아니면 약간의 지면에 남는 평론들이 있어요. 그런데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내부적 리뷰들이 계속 있는 것 같아요.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을 계속 견주어 보면서 맞춰가야 하니까. 이를테면, 첫 리딩을 하면, 같이 읽고 어떤 걸 이 텍스트에서 느꼈는지 얘기하는데 이것은 리뷰인 동시에 공연 창작에 대한 탐구이기도 해요. 연극이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져야 될 것 같다는 제안 또한 리뷰가 되는 거죠.

제가 같이 작업한 극단 동 같은 경우에는 신체행동연기라는 연기 메소드를 연구하고 수행해 온 팀인데요. 배우가 인물의 내면이 아닌 외부의 세계를 설계해서 그 세계를 만나고 그 세계에 의해 배우의 몸이 ‘동한다’, ‘되어진다’고 하거든요. 인물의 정서나 인물이 처한 상황을 재현적으로 표현하기를 지양하고요. 그러니까 좀 낯설 수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해요. 이 팀의 연기를 읽어내는 한 줌의 관객들은 연기 설계의 측면에서 공연을 리뷰하더라고요. 저는 배우들이 연기를 리뷰하는 말이 재미있어요. 연기를 안 해 본 사람은 절대 접속할 수 없는 말들인데 연기를 하는 사람들끼리는 척 보면 아는.

여로: 저도 이번 책을 내고서 리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치밀하게 작품을 분석하고 꿰뚫어 보는 것을 이상적인 리뷰로 생각했는데, 왜 굳이 그래야 하지?, ‘내 마음을 알아줘’ 이런 건가, 가령 저희가 이 책에서 설계했던 것을 전부 꿰뚫을 필요가 누구에게 있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것은 사실 어떤 평론가도 못 하거든요. 왜냐면 글 단위가 아니라 책 단위에서 설계했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훈련된 텍스트 분석과 더불어 책 만들기 경험까지 풍부한 편집자라면 꿰뚫어 보겠지만, 그런 배타적인 조건을 겹겹이 충족시켜야 할 수 있는 리뷰를 어떻게 좋은 리뷰라고 말할 수 있지? 싶은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것을 몰라도 이 책이 각자에게서 기능했고, 아까 석준기 님의 ‘읽기’를 말씀해 주신 것처럼 각자의 관심과 관점에서 통과해 나가는 말들이 있고, 그런 단편들이 모여서 책의 환경이 되어주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도 어떤 책을 읽을 때 그렇게 읽을 뿐이지 않나, 더 이상 하나의 완벽한 리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런 단편성들을 긍정하게 된 것 같아요. 맥락은 다르지만, 극장장님 제안으로 강량원 연출가와 나누신 문자가 공개되고 나서는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잖아요.

연재: 갑자기 매진 됐어요. (웃음)

‘신촌극장 2022 라인업’ 김연재 극본 ‘〈복도 굴뚝 유골함 undocumented〉 X 강량원’에 관해 김연재 극작가와 강량원 연출가가 나눈 문자 메시지. ‘신촌극장’ 페이스북 계정에서 2022년 11월 2일 공개되었다. 제공: 김연재.

여로: 그걸 보고 말씀 주신 내부적 리뷰가 떠올랐어요. 저도 이동휘 씨와 공저를 했기에 1년 동안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최근 한 달 동안은 혼자서 300매 가까이를 썼는데, 자괴감이 드는 거예요. 누구는 이런 매문가의 삶을 원하겠지만, 저는 ‘이게 뭐 하는 거지’ 싶은 거예요. 또 공저나 편집을 할 때에는 글과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충분하다 못 해 ‘그만하자’ 싶을 정도로 주고 받는 게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선물 같긴 해도, 갈급하게 원하는 것까진 아니게 되었어요. 왜냐면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의 확신을 만들어놨다고 느끼니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내 글 누가 읽었나 매일 내 이름 검색창에 쳐 보고. (웃음)

연재: 허무맹랑한 생각일 수도 있는데, 혼자 하는 장르일수록 리뷰가 발달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도 드는 것 같아요. 미술이나 문학이나…

여로: 그렇네요.

연재: 협업하는 쪽에서는 자급자족되는 면이 있어서.

여로: 연재 님께 여쭤보고 싶었던 게, 공저도 이 정도로 레이어가 쌓이는 협업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연재: 각자의 작업을 가지고 모이자, 하는 협업이 있는가 하면, 모여서 하나의 작업을 만들자, 하는 협업이 있잖아요. 연극은 후자에 속하고, 그래서 정말 죽자 살자 협업을 해야 하더라고요. 작가만 할 때는 몰랐는데 〈낙과줍기〉를 연출하고 알게 되었어요. 연출이 처음이어서 애를 먹었는데, 제일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제가 배우의 연기를 충분히 리뷰하지 못 한다는 거였어요. 연출은 좋은 관객, 충실한 리뷰어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해내지 못 한다고 느낄 때가 있었어요.

여로: 연출은 좋은 리뷰어가 되는 게 중요하다.

연재: 강량원 연출님과 저의 관계에서도 강량원 연출님이 저를 더 많이 리뷰하는 사람일 거예요. 연출가는 작품을 최종적으로 봉합하는 사람이니까 모든 포지션의 창작자를 만나고, 공연의 모든 요소에 리뷰를 해야 하니까요. 저는 최근 공연 〈복도 굴뚝 유골함〉의 작가였지만 조명 오퍼레이터이기도 했는데요, 조명 오퍼레이터를 하면 매일 극장에 나가서 매일 공연을 봐야 하잖아요. 이 공연, 이 연출의 작업을 탐구하고 저 나름대로 리뷰해 보고 싶어서였어요.

여로: 두 분의 문자를 공개한 건 극장장님 제안이라고 들었는데, 신촌극장의 극장장님과는 어떤 관계성을 가지시나요?

연재: 2019년에 거기서 처음 작업을 했어요. 김신록 배우님의 1인극 〈김신록에 뫼르소, 870x626cm〉에 각색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어요. 같은 해에 〈폴라 목〉이라는 1인극을 쓰고 만들었고, 한 해에 한 작품 꼴로 작업을 해왔어요. 지원금을 받지 않고도 소규모로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여로: 지원금이 없으면 대관료가 다르게 설정된다고 들었어요.

연재: 지원 사업을 받으면 대관료를 받는데, 아니면 대관료를 안 받고 관객 수익을 나누는 식이에요.

여로: 연극계에서는 소중한 곳이네요.

연재: 아주.

여로: 동료에 대한 얘기를 하면 흔히 같은 분야의 창작자가 주로 호출이 되는데, 가령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서점도 동료잖아요. 그래서 공연장이 생각이 났어요.

연재: 맞아요.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참고 자료들의 저자들이 동료가 된다는 걸 생각 못 했었는데, 사실 진짜 그들 같은 동료가 없고, 이렇게 적극적인 리뷰가 어딨나 싶은. (웃음) 창작물로 리뷰하는. 우리가 작품을 창작하는 긴 과정 중에서 여러 텍스트를 만나잖아요. 텍스트에 영향을 받고 받고 받고 충돌을 계속 하면서 여러 경우의 수를 가로질러서 우연적으로 도착한 게 하나의 창작물이잖아요. 그래서 [참조 문헌을 따로 제공해서] 그 과정을 드러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이러한 인용하기가 독특한 글쓰기 형식으로까지 나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인용만으로 이루어진 글을 써 볼 수 있을까. 아마 주석과 참고 문헌이 반 이상을 차지하겠죠.

여로: 상상하시는 또 다른 동료의 형태가 있을까요?

연재: 누군가 새로운 동료를 만난다면 번역가를 만나고 싶어요.

여로: 비유로서의 번역가가 아니라 실제 번역가.

연재: 네. 다른 언어권의 번역자를 만나면 지금까지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동료 맺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여로: 어떤 점에서 겪어보지 못 했을까요?

연재: 번역의 과정에는 제가 모르는 섬세한 언어적 세공이 있겠죠.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번역가를 통해 저의 작품이 읽힐 거고요. 저는 그 나라 말로 저의 작품을 읽는 경험을 하기 어렵겠죠. 번역은 나를 나의 작품으로부터 해방시켜주거나, 나의 작품이 나로부터 해방되게 해줄 것 같아요. 번역가와 원작자에 대해 말하다 보니 각색자와 원작자의 동료 맺기도 생각이 나요.

여로: 어떠셨나요.

연재: 기억에 남는 각색 작업은, 2019년에 공연된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라는 제목의 연극이었는데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Amos Oz)의 「친구 사이(Between Friends)」가 원작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이 작가의 세계를 내가 수호하고 대변해야 한다는 어떤 책임감 같은 게 있었어요. 아모스 오즈와 굉장히 깊은 친구가 된 것 같았고요. 아모스 오즈의 작품들을 번역하신 최창모 선생님께서 공연을 보시고는 오즈가 살아서 공연을 봤더라면 좋아했을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두 분은 원작자와 번역자로 친분이 있었고 아모스 오즈는 2018년에 별세했지요. 만난 적 없는 먼 나라의 아모스 오즈와 번역가와 각색자의 특별한 동료맺기의 경험이었어요.

여로: 번역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요. 얼마 전에 서점 더북소사이어티에서 태국 방콕의 씨티씨티갤러리(Bangkok CityCity Gallery)를 운영하시는 분들을 우연히 뵈었는데, 책을 교환하고 계셨거든요. 저는 영어도 잘 못 하니까 그냥 옆에서 책 구경하는 척 하다가 그래도 인사 한 번 나누고, 한국어라 미안한데 선물해도 되겠냐고 해서 저희 책을 드렸어요. 그런데 그 책을 안 버리시고 갤러리에 비치를 해두셨나봐요. 얼마 전 북토크 때 씨티씨티갤러리에서 이 책을 보고 신청하셨다는 분이 계셨어요. 와 그래서 이게 세계문학인가, 동아시아인가, 말로만 듣던.

연재: (웃음) 너무 좋다.

여로: 계속 다른 영역과 연결되고 싶다는 것도 이런 작고 개인적인 감각에 따르는 것 같아요.

연재: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번역하실 때는 작가와의 유대가 생기진 않았나요?

여로: 텍스트와의 유대였던 것 같아요. 너무 상징화된 사람이어서. 당시에 「자매(The Sisters)」를 여러 번역본으로 읽을 때마다 느낌이 너무 다른 게 이상해서 결국 한국에 나온 모든 번역본을 찾아봤는데 번역본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하나씩은 있더라고요. 그래서 손바느질 하듯 제가 직접 오역을 기워내면서 번역하고, 내가 느낀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아밀(김지현) 님이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을 이미 읽었는데, 이런 소설인 줄 지금까지 몰랐었다”고 남겨주셔서 기뻤어요.

연재: 기뻤을 것 같아요.

여로: 그 감각이 좀 특별했던 게, 제가 학부에서 철학과를 다닐 때 그런 활동을 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어요. 학과 자체가 전통적인 대학 시스템에 강하게 기반해있으니까, 근거 기반의 사고가 만연했거든요. 가령 무언가의 가치는 그것을 보증하는 객관적인 제도에 따라 결정되고, 어디 출판사에서 출판됐냐, 상을 받았냐 같은 것도 그렇겠죠. 당시에 이런 일을 하는 걸 보고 어느 교수가 “이게 좋은 번역이라는 근거가 어디있냐”는 거예요. 근거라면 소규모 출판에서의 감각, 서로를 지탱해주는 감각이 저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고 제 기반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연재: 모든 계가 그랬지만, 어떤 비평의 권위, 전문가의 권위, 이런 것을 허물고자 독립 출판이나 텀블벅이 부흥했잖아요. 연극도 [제도적] 비평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연뮤덕, 트위터 관객 리뷰, 이런 게 되게 많이 활발해졌던 것 같아요.

여로: 연뮤덕?

연재: ‘연극 뮤지컬 덕후’의 줄임말인데요. 미투 이후에 연극계에서는 관객 집회가 있었어요. 우리는 그런 공연은 향유하지 않겠다고 공연 애호가이자 소비자인 관객들이 마로니에 공원에 모여서 집회를 열었어요. 관객들이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던 계기였어요. 여성 서사, 젠더프리, 페미니즘 연극을 지지하고 소비하면서 창작물의 흐름을 주도하기도 했어요. 동료라는 것이 창작자들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관계 같았는데 미투 이후 창작자와 관객 간의 새로운 동료 맺기가 생기기도 했어요.

여로: 동료라는 말과 얼마나 겹치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인터뷰에서 하셨던 말도 생각나요. “인물을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냐”는 질문에 “책 읽고 공부하고 나의 말과 글을 반성하고 다양한 배경과 관심사를 가진 동료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라고 답하셨는데, 모범 답안 같고 당연한 말인데 왜인지 와닿았어요. 왜일까요.

연재: 글쎄요. (웃음) 당연한 말을 이렇게 들으니까 되게 부끄럽네.

여로: 동료를 이루려는 욕구는 많지만 동시에 그것을 다양성 속에 위치시키려는 의지를 별로 못 보아서 그럴까요.

연재: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다양성 속에 위치시키려는 의지보다 나의 안온한 세계를 수호하려는 힘이 늘 더 세기 때문에… 가령 〈낙과줍기〉를 공연할 때 텍스트에 “나는 완전히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한다.”라는 어떤 여자의 말이 있었어요. ‘미쳤다’는 말에 대해 토론했어요. ‘미쳤다’는 말이 비유적으로 쓰인다면 정신질환자를 비하하고 대상화하는 말이 될텐데, ‘미친 여자’라는 말에는 계보가 있잖아요.

여로: 그 부분은 그러면 수정이 되었나요?

연재: 연기를 하지 않기로 선택했어요. 책을 들고 읽었어요. 어떤 표현을 발화하고 연기하는 것이 배우에게 불편하다면 텍스트를 조정할 필요도 있고요. 극장이라는 공적 장소에서 배우의 입을 통해서 다수의 관객에게 발화된다는 점에서 연극을 만들 때는 표현을 더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발화될 때는 언어의 무게가 달라지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쓴 문장을 하나도 빼기 싫다는 마음 때문에 시름했어요.

여로: 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과학자사회에 대한 연구들을 좀 읽었는데, 지금 이런 이야기가 예술계 내부의 규범으로 우선 통용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던가, 다양한 작품을 접하다던가, 이런 규범이 예술계 내부의 창작이나 참조, 생활에서 가능하고 권장된다면, 그 결과물은 어떤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규범이 종종 환경적 차이를 무시하고 직접적이고 보편적으로 권장될 때면 좀 기이한 느낌이 들거든요. 규범이 공유될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잘 정돈된 문자언어로 떠올려져야하고, 의식적으로 반성되어야 하고, 이러한 방식의 의식화가 주체화의 조건이 되는 것은 또 의심스러워요. 그럴 때 내가 어떤 사람을 주체로 이해하는 방식과 범위가 굉장히 좁은 것 아닌가, 그 바깥의 경우를 실질적으로 얼마나 알고 어떻게 알지? 여전히 많은 담론이 이러한 의식화를 전제로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마주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제가 자꾸만 감각이라는 기초적인 단계로 자꾸 돌아가려는 것 같아요. 모든 언어화와 소통의 시작을요. 그런데 얘기하다 보니까 연재 님 연극에서도 그런 기초적인 감각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연재: 어떤 것이 그랬나요.

여로: 유은숙, 신소영, 송주희, 윤민웅, 네 분의 신체행동연기도 그랬고, 대사들도 뭐랄까, 말 자체는 아주 일상적인 언어인데 그것이 선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음의 말이 3차원의 다른 시공간에 놓인 것 같아서, 다음 말이 발화되자마자 그곳으로 내가 쭉 끌려 당겨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밀어’라는 것도 이런 방식으로 구축되는 걸까? 저는 지나치게 단순한 의미에서 투명성을 지향해보고 있는데, 다른 방식의 연결이 가능할까 궁금해져요.

연재: 그럴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말한 밀어라는 것이 쉽게는 무의식의 말일테고, 감각의 언어이기도 할테고요. 관객에게 감각의 길을 내는 글쓰기를 한다는 점에서 여로 님의 주제와 공명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여로: 〈낙과줍기〉도 그렇고 〈복도 굴뚝 유골함〉도 그렇고 사회적 현실이 그대로 노출되잖아요. 톨게이트 근무자와 근무 여건이라든지, 이민자들, 그런 것이 어떻게 연재 님한테 들어오게 되나요.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연재 님은 그들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나요. 저는 두 작품에서 그들이 등장하는 게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아니었거든요.

연재: 처음에는 어떤 이미지가 저에게 있어요. 이 이미지는 나중에 희곡의 인물이 보거나 기억하거나 겪게 될 이미지겠죠. 이미지가 생기면 이미지를 보는 사람이 생겨요. 이미지를 보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감각이 생겨요. 그러면 그 사람의 직업이 떠올라요. 어떤 사람의 감각은 그의 노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잖아요. 사람들의 몸에 기입되는 노동의 흔적, 특수한 움직임, 그가 보는 세계의 풍경 같은 것들이요.

〈낙과줍기〉에서는 대략 이런 생각의 과정이 있었어요. 화병에 오래 꽂아둔 꽃들의 물렁해진 줄기가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썩고 짓무른 부분과 생생하게 살아있는 부분이 뒤섞인 낙과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화분에 묻는 장면, 끈적이는 물과 흙의 감각, 등 뒤에는 생명과 죽음이 뒤섞인 검은 숲이 있고, 눈앞에는 작은 지방 도시를 향한 창문이 있다, 이 사람은 아주 좁은 곳에서, 어떤 경계 위에서 일한다, 톨게이트 직원이다. 이런 상상에 다다르면 그의 노동이 저의 몸으로 오는 것 같아요. 관심을 갖고 찾아보는 것은 그 다음이에요.
〈복도 굴뚝 유골함〉을 쓸 때 맨 처음 떠오른 이미지는 붉은 흙 위로 비죽 튀어나온 흰 뼈였어요. 봄비가 내리고 새소리가 들리고요. 흰 뼈를 보는 사람은 전원주택을 시공하는 타일공이에요. 뼈의 주인은 타일공과 깊이 연루된 신원미상자예요. 타일공이 이 뼈를 추리고 애도하기 위해서는 신원미상자의 삶의 공백을 새로 써야 해요. 그런데 누군가의 삶의 공백을 들여다보는 일은 내 기억의 공백을 기적처럼 메워주기도 하잖아요. 어떤 소수자의 삶은 다른 소수자의 삶의 주석이 되니까요.

저는 어떤 사건이나 이슈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아요. 그런 글쓰기의 유혹이 있지만 하지 않으려 노력해요.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불평등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훌륭한 작가들이 많지만 저는 잘하지 못 하거든요. 제가 당사자가 아닌 이야기를 쓸 때마다 조금씩 대상화를 저지르고, 부채감이 들어요. 다만 아주 내밀한 언어만이 길어올리는 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이 언어를 더 갈고 닦으려고요. 저는 이 편에 선 작가인 것 같아요.

여로: 객체의 감각이나 구체성에서 시작한다는 건, 대상화와는 반대의 방향인 것 같아요. 내가 의식화할 수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의 씨앗인 것도 같고요.


이 글을 시작하면서 다시–본다(re–view)는 행위로부터 동료 개념을 이해하려는 경험적 이유를 밝혔다. 글을 마치는 지금 반대로 리뷰를 생각해본다. 공공기관, 출판시장, 대학 등이 다중으로 얽혀 만들어진 제도 속에서 나 역시 평론을 쓰지만, 그것이 비평의 기능을 하나의 실체로 과도하게 대표하고 있다고 느끼며 그 말에 기대되는 욕구나 생각들이 흘러내리는 것도 익히 보았다. 비평의 흥망성쇠를 말하는, 똑같은 모양새의 담론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 역시 이러한 실체성 위에서 발화되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세마 코랄)의 원고 의뢰에 답해 필자가 인터뷰로 기획한 이 글에서 과학사회학을 참조하고 그림책, 웹소설, 디자인, 희곡 및 연극 분야의 종사자들을 만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다소 의도적으로 전제한 질문들을 나눴지만, 이야기는 다시금 전통적인 기능의 연구나 비평에 대한 필요성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그렇게 돌아온 뒤에는 강박적인 탈출의 욕구가 조금 진정되기도 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영역이 구조적으로 접속될 때에야말로 서로의 경계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드러나며, 이때의 ‘보기’가 타인에 의해서 더 효율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점이 나는 언제나 신비롭다. ‘다시 봄’이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하나의 보기를 공유하기보다 이러한 이중보기의 다수적 수행을 긍정할 때, 그리고 상대의 ‘다시 봄’을 나에게로 다시 들여오는 끝없는 순환의 과정 속에서 언어의 영역은 급격하게 넓어진다. 이러한 추상적 아이디어들을 나는 인터뷰를 통해서, 또 나 자신의 공저와 출판 경험을 통해서 초과하게 이해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는 지금,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이 담화 속에서 인격적 행위자가 갖는 태도나 방법부터 그것을 조직하는 비인격적인 장치까지 고루 고려할법한 아이디어를 찾으며 ‘다시 봄’의 몫을 다른 독자들과 나눠 갖는다. 말한 것을 정돈하며 맹점을 검토하고 말해지지 않은 곳을 상상할 몫, 이 경로에서 서로가 그때그때의 선별자의 역할을 한다면22, 그것은 문자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리뷰라고 불릴 수 있고, 그때 행위자들은 동료라고 불릴 것이다.


  1. 과학자사회라는 용어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과학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가 1942년 「과학의 자치」라는 논문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과학 연구의 예측 불가능성과 독립성에 기반해 국가 주도의 계획화 모델에 반대하는 아이디어로 제시된 이 개념은 이후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을 비롯한 미국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과학이라는 특정한 지식이 생산되는 근거나 동력을 개별 과학자의 업적이나 연구가 아닌 고유한 규범과 가치에 따라 제도화된 공동체에서 찾는 이 개념은 특히나 머튼이 제시한 네 가지 규범 구조(보편주의, 공유주의, 탈이해관계, 조직적 회의주의)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아이디어는 향후 다른 국가나 소집단 내에서 상이한 규범이 작동한다는 경험적 연구, 대항 규범의 발견, 보상체계의 우위, 성차나 인종이 배제되었다는 지적 등에 의해 비판, 보완, 논의되었지만 공동체적 관점의 중요한 준거점이 되어주었다. 이상의 정리는 김환석·김동광·조혜선·박진희·박희제, 『한국의 과학자 사회–역사, 구조, 사회화』(서울: 궁리출판, 2010)를 참조한 것이다. 

  2. 실비아 굿맨의 다음 기사를 참고하라. 기사 제목은 한국어로 ‘피어 리뷰어에게 비용을 지불할 때가 왔나요?’로 옮길 수 있다. Sylvia Goodman, “Is it time to pay peer reviewrs?,”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2022.12.04, https://www.chronicle.com/article/is-it-time-to-pay-peer-reviewers.
    해당 기사에서는 학술 출판물의 양적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연구자 수, 이력과 인정 형태로 보상을 받지만 종신, 정규직 연구자가 아니면 참여하기 어려운 무급 구조, 기여의 경제적 결과가 저자나 기관보다 출판사에 귀속되는 구조, 판데믹 기간 동안 여성과 유색인종에게 더 크게 부과된 간병 책임과 건강 문제에 따라 연구 결과를 발표할 가능성은 줄었으나 검토 요청은 증가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으며 대안적인 공동 피어 리뷰 플랫폼에 대한 짤막한 소개가 포함되어 있다.
    아담 마스트로야니의 다음 기사 또한 참고하라. 기사 제목은 한국어로 ‘피어 리뷰의 부흥과 쇠락’으로 옮길 수 있다. Adam Mastroianni, “The Rise and Fall of Peer Review,” Experimental History, 2022.12.14, https://experimentalhistory.substack.com/p/the-rise-and-fall-of-peer-review?fbclid=IwAR1smzCnE2QdMcm9OHQgRem3vtmlx-v7AwQKQDgn2BROiBSSRmV51BgIY84.
    해당 기사에서는 전후 미국에서 정부의 연구 기금 펀딩과 이에 따른 심사를 자체화하기 위해 도입된 과학계의 피어 리뷰 제도는 일종의 실험이었고 오늘날 과학 발전과 효율성 측면에서 완전히 실패한 실험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의사소통 및 변화이론을 연구하는 저자는 자신의 논문을 PDF로 블로그와 SNS에 게재했을 때 더 폭넓은 리뷰를 받았고 앞으로 우리가 다른 시스템을 실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3. 최민지, 『나를 봐』(파주: 창비, 2021). 

  4. 최민지,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부천: 모래알, 키다리, 2022). 

  5. 최민지, 『문어 목욕탕』(서울: 노란상상, 2018). 

  6. 2014년 7월 21일에 방영된 MBC 아침 드라마 《모두 다 김치》 60회의 15분 20초. 주인공의 김치 상품을 백화점에서 퇴출시키려는 모략을 짠 적대자에게 김치로 뺨을 때리는 장면이다. 

  7. 이동휘, 이여로,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예술, 언어, 이론』, 인현진 디자인(서울: 미디어버스와 기획:1, 2022). 

  8. 〈그들은/우리는, 왜/어떻게, 예술을/언어를/이론을, 하게/안 하게, 되었나/되는가〉 위 책의 북토크로 2022년 11월 18일에 책방 더북소사이어티에서 열렸다. 

  9. 서울 마포디자인출판지원센터의 새 이름으로, 공간 설명은 다음과 같다. “지금 홍대앞 디자인·출판문화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주체적으로 펼쳐 보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나온 모든 결과물을 수집, 기록, 공유하고, 홍대앞이라는 공간에서 이들이 실험적인 활동을 지속하게 하는 연대의 시작점이 되고자 한다.” http://wrmatters.kr/

  10. “2017년 결성된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이하 여성기술랩)은 오랜시간 도심제조업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어온 을지로에 위치해있습니다. 을지로라는 물리적 공간 뿐만 아니라, 메이커 문화, 미디어아트 등 기술을 활용하는 영역에 만연한 남성편향적이고 위계적인 문화에 문제의식을 갖고, ‘여성’과 ‘기술’이라는 두 키워드의 결합을 선언적 의미로 제시합니다. 워크숍, 전시, 세미나, 강연, 연구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술에 대한 흥미와 리터러시를 키우고, 주체적인 사고와 새로운 관점으로서 기술의 젠더적 접근-페미니즘의 기술적 실천을 도모합니다.” http://womanopentechlab.kr/

  11. 해당 웹사이트의 소개 일부를 발췌한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기업이나 “브랜드”가 아닙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웹상의 2등시민이 되는 것을, 거대 플랫폼들에 의해 ‘사용자’로 강등 당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중략) 우리는 무료(혹은 저비용)의 자기표현적이고 창조적인 취미(웹 사이트 구축)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반사회적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배우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다시 배웁니다. 우리는 거대 소셜 플랫폼의 진짜 목표와 그 피해의 범위를 폭로합니다.” https://yesterweb.org/.  

  12. “인공위성+82는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시각언어로 전달하는 작업을 하고자 결성된 콜렉티브입니다. 첫 번째 기획으로 ‘지방’의 퀴어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판하고자 합니다.” https://satelliteplus82.neocities.org/

  13. 이여로, 『긴 끈』(서울: 기획:1, 2020). 

  14. “인터넷과 웹의 역사를 비롯해 넷 아트의 흐름을 살피고, 컴퓨터 언어를 올바르고 정확하게 사용해 콘텐츠와 연결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 집중합니다.” 동명의 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웹사이트 제작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편리해 보일지 모르지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는 사용자보다 광고를 우선시하는 사기업이다. 사용자의 행복은 일차적 목표가 아니므로 사용자가 소셜미디어를 사용하거나 생각할 때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소셜 미디어 속 목소리가 뒤엉킨 디지털 불협화음 시대에 당신을 돌볼 사람은 당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따라서 자신이 누구고,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기록하려는 사람일수록 웹사이트가 필요하다. (중략)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웹의 미래를 이끌 사기업이 아닌 개인이 필요한 시점이다.” https://neworder.xyz/

  15. “언메이크랩은 기계의 인식 작용을 엉뚱하게 이용해 알고리즘의 집착을 아이러니, 우화, 일말의 유머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특히 아시아의 발전주의 역사와 기계 학습의 추출주의를 서로 겹쳐 현재의 사회문화, 생태적 상황들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기술사회를 독해하는 교육 활동과 연구를 주요한 방법론으로 삼고 있기도 하며, 그를 위해 포킹룸(forkingroom) 등의 활동에 참여하며 기술사회의 현상을 담론으로 만들고 있다.” https://www.unmakelab.org/.  

  16. 와타나베 후토시, 『휘말림의 정치학』, 오하나 옮김(서울: 그린비, 2012) 중 「카페와 문화 실천」에서 재인용, 163. 

  17. 강예린, 윤민구, 전가경, 정재완, 『아파트 글자』(대구: 사월의눈, 2017).
    강홍구 외, 『아키토피아의 실험』(서울: 마티, 2015).
    리옌첸, 『뼈의 방』, 정세경 옮김(서울: 현대지성, 2021).
    미셸 세르, 『천사들의 전설』, 이규현 옮김(서울: 그린비, 2008).
    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서울: 자음과 모음, 2011).
    석준기, 『서울의 지하철』(서울: 메트로오브서울, 2021).
    엘리나 펜티넨, 아니타 킨실레토, 『젠더와 모빌리티』, 최성희 옮김(부산: 부산대학교 출판문화원, 2017).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배수아 옮김(파주: 한길사, 2018).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노시내 옮김(서울: 마티, 2021).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박현주 옮김(서울: 마음산책, 2005).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서울: 워크룸프레스, 2018).
    GARM Magazine, 『다섯 번째 재료: 타일』(서울: garm SSI, 2018).
    이강봉, 「가장 오래된 숲, 미국에서 발견」, The Science Times (2019. 2. 20).
    BBC, 「터키: 실종자 수색 돕던 터키 남성, 이름 듣고 나서야 “저 여기 있는데……”​」, 2021년 10월 2일,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8771537.
    잉마르 베리만, 〈페르소나〉(1966), 〈화니와 알렉산더〉(1982).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아마추어〉(1979). 

  18. 석준기 사진, 이소영 기획, 『서울의 지하철』(서울: 메트로오브서울, 2021). 

  19. 「[Interview] “희곡은 감각을 이야기로 번역하는 일” - 김연재 작가 인터뷰」, 『아트인사이트』, 2022년 2월 6일,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8163

  20. 못갖춘마디 기획, 김연재·목소·윤경희, 《불완전 운동》(더레퍼런스, 2022.1.13.-2022.1.23.). 전시 개요는 다음과 같다. “김연재, 목소, 윤경희 세 작가는 음악의 불완전한 분절의 단위, 신체의 접합 부분, 영상의 프레임과 시퀀스 등에 두루 적용하여 확장할 수 있는 못갖춘마디라는 이름으로 모여 비인간 사물 존재와 조우하는 방법을 찾는다. 특히 근과거의 기계류에 초점을 맞추어, 기계의 역사, 재료, 구조, 작동 원리, 기능, 재료 등를 경유하여, 오늘날 점차 배제된, 누락된, 억압된, 폐기된 비인간 사물 존재를 한 자리에 불러모은다.” 

  21. 김연재, 정지영, 기예림, 공간주의(김영대, 신지연, 이승빈), 박동수, 곽수아, 오혁진, 이다의, ACULT(제종현), 장가연, 《텍스트 뷔페 Vol.2》(수건과화환, 2022.8.15.-2022.9.30.). 전시 개요는 다음과 같다. “《공간’空刊’잡지 ​​텍스트 뷔페》는 다양한 분야의 작가의 원고 단위 작업물을 뷔페의 형식으로 진열한 텍스트 전시입니다. 글을 인터넷이나 서점이 아닌 전시 공간에서 노출하여, 온전한 시간을 들여 텍스트를 소화시킬 수 있는 환경과 방식을 제안합니다. 전시를 관람하러 온 관람객은 독자가 되어 글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이를 수집/정렬하여 개인의 서사와 관심사로 텍스트를 엮어나가게 됩니다.” 

  22. 움베르토 마투라나, 「인지」, 지크프리트 J. 슈미트 편저, 『구성주의』, 박여성 옮김(서울: 까치, 1995),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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