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세마 코랄의 ‘연결’ 주제어와 SeMA 의제를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생겨난, 시각문화/예술과 미술관의 (동)시대적 과제에 관해 논하는 지식을 선보입니다.

글과 웹 프로젝트를 함께 수록해서 세마 코랄이 지향하고 생산하는 지식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목록 보기’는 수록된 글과 웹프로젝트의 제목을 부호-숫자-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공개된 날짜를 보여줍니다.
‘목록 다운로드’를 누르시면 발행순으로 수록된 글의 목록을 정리한 전자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 -과 -사이 쓰기: 작업을 그만두기, 지우기, 버리기, 없애기

    세마 코랄의 커미션 연구로, 시각예술작가 봄로야는 온라인 참여자들의 ‘쓰기’를 통해 매체, 시간, 감정, 문장, 음(note)과 같은 기억과 감각의 요소들이 ‘다시 쓰기’로 향하는 웹프로젝트 〈-과 -사이 쓰기〉(2023)를 선보인다. 봄로야는 몇 년간 지녀 온 작업을 ‘그만두기, 지우기, 버리기, 없애기’ 등의 충동을 기반으로, 이전의 작업을 재맥락화한 전시 《봄못/양생 중(vernal pond/curing)》를 개최했다. 이번에는 그중 〈-과 -사이 쓰기〉를 웹의 맥락으로 옮겨와 재제작했다. 관객이 직접 손으로 눌렀던 피아노는 웹 프로그램으로 옮겨 오고, 지난 작품에 대한 답장으로서 15점의 드로잉과 21편의 텍스트를 선보인다.

  • 글쓰기-달걀의 혁명과 닭의 사랑

    『메두사의 웃음』(1975)에서 앞으로 도래할 “여성적 글쓰기”를 선언했던 식수는 그것의 범례, 혹은 자신의 “뮤즈”를 리스펙토르에게서 발견한다. 식수는 프랑스에서 호세 카스텔로와 한 인터뷰에서 리스펙토르를 “20세기 가장 위대한 서구 작가”, “유일하게 비견될만한 작가는 카프카”인 작가라고 거침없이 호명했다. 전문가들보다 어린 소녀들이 더 잘 읽어낸다는 리스펙토르, 순서와 상관없이 읽거나 띄엄띄엄 읽고 있게 될 리스펙토르, 매일 조금씩 읽어도 읽었다는 기쁨을 주는 리스펙토르, 몇 문단만 읽어도 방향상실을 초래하는 리스펙토르. 저 기자에게 리스펙토르의 친구가 들려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문장 “리스펙토르를 조심해. 그건 문학이 아니야. 그건 마법(witchcraft)이거든”이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 다시 보아 주는 사람들, 사물들

    동료비평, 동료평가라는 말로 번역되는 피어리뷰(peer–review)는 본래 학술 출판의 품질과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분야의 전문가를 섭외하여 (대개 익명으로) 수행되는 출판물에 대한 논평을 뜻한다. 피어리뷰는 과학자사회를 특징하고 유지하는 장치로써 그 이념과 필요성은 광범위한 동의를 받고 있지만 지나친 전문화에 따른 고착과 연구 경직성 등에 따른 비판과 제도적 개선을 요구 받기도 한다. 예술가사회라면 어떨까? 구체적인 관계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사회보다 좁혀, 동료라는 말로 그 중간 단계의 공동체를 감각해볼 수 없을까? 이 물음은 ‘같은 분야의 전문가나 동업자’ 정도로 실체화된 동료라는 말의 개념적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이 변화를 쫓아갈 길로써 동료비평(peer–review)의 한 축인 리뷰(re–view)를 조명하고자 한다. 해당 키워드를 제시 받았을 때부터 떠올랐던 막연한 생각은 다음과 같다. 리뷰함으로써 동료가 되는 건 아닐까?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로너(loner)’의 사전적 의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혼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나는 ‘로너’란 단어를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홀로 있음’과 ‘같이 있음’을 중계하는 행위로서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기이한 행위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SNS건, 과거의 서신이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우리를 표현하고자 애쓴다. 요즘에 난립하는 자가 출판 기업은 자기표현을 환전하는 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문학 강좌에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한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들은 왜, 또 무엇을 알고 싶은 걸까?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가? ‘콜리그(colleauge)’라는 낱말이 그 자체로 동료를 뜻하는 건 아니다. 60여 편 이상의 글을 실은 이 ‘콜리그’라는 플랫폼이 어떤 연대, 공동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홀로 있는 사람들이 잠깐 오가는 공간에 가까울 것이다. 그곳은 어떤 지식도 산출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다양하고 자동적인 표현들이 존재할 뿐이다.

  • 상호 배움의 일지

    “온라인 비평가”나 “새로운 세대의 콜렉티브”라는 말이 붙기도 했다. 옐로우 펜 클럽은 이러한 맥락에 호명되면서 인터뷰에 응하거나 토크 같은 행사에 초청되는 일이 생겼고, 우리 자신의 활동 방식과 동력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것의 하나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집필의 중간 과정을 공유하며 생산적인 피드백을 주고받는 글쓰기 방식인 상호편집, 다른 하나는 각자의 관심 분야를 연구하는 동시에 그 지식을 서로에게 가르치는 동료학습이었다.

  • 어려움에 대하여

    게임을 할 때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견지하는 동기 구조가 역전된다. 결과를 위해 수단을 선택하는 일상생활의 동기 구조와는 반대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수단, 즉, 분투(striving)의 활동을 경험하기 위해서 결과(일회용 목표)를 장착하게 된다. 이러한 동기 역전의 요인은 게임에서 나타나는 가장 흥미롭고도 고유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행위성이 두 층위(장기적 행위성과 일시적 행위성)로 중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행위적 중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장기적 행위자는 일시적 행위자의 분투 활동을 ‘미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때 게임은 예술이 된다. 그리고 이제 현대 미술에 관해 짧게라도 이야기해 보자. 조금 짓궂게 말하자면, 나는 현대 미술을 ‘소화’하는 데 실패했고, 거꾸로 현대 미술은 작품으로써 나에게 그 장르의 존재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 없음과 있음들에 대하여

    “거기에는 늘 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김남주가 아닌 또 하나의 목소리도 듣는다. 재일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아니, 오히려 우리야말로 북도 남도 아닌 하나의 조선”이라고 힘주어 외친 남자의 목소리다. 그 오사카 시인은 광주사태를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늘 내가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갈라진 해협의 거리가 아니라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이다. 시대에 짓눌리면서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무기’로 바꾸려 했던 또 한 명의 시인. 자신의 어둠을 향한 통절한 목소리.” 이 글은 사쿠라이 다이조(櫻井大造)라는 일본의 연극인이 썼다. 여기서 ‘우리’란 ‘바람의 여단’이라는 1980년대 일본의 텐트연극집단을 말하지만, 이 대목은 넘어가겠다. 따로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대신 이 글에서 몇 가지 단어를 챙겨두고 싶다. 목소리, 재일, 감옥, 시인, 어둠, 그리고 ‘존재’.

  • 외치(Oetzi)의 눈: 책들 사이에서 엿본 미래

    외치를 발견한 건 우연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라가 의지를 가지고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야 하겠다고 계획했다 한들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없다고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이 있다. …세마 코랄에서 글을 위한 주제로 “간극에서 공유되는 미래”라는 말을 주셨는데, 나는 이 말 묶음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우선 ‘간극’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이렇다. 두 가지 사건, 두 가지 현상 사이의 틈. 그러므로 틈이나 간극을 말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은 최소 ‘두 가지’(혹은 그 이상) 사건이나 현상이다. 만약 이 두 가지(혹은 그 이상)가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닮거나 친하지도 않고, 심지어 같은 맥락에 놓이지도 않았다면, 궁극적으로 변증법적인 통합을 이루지 않은 채 계속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한다면, 그건 어쩌면 내가 관심을 계속 두었던 일, 때로는 우연히 만난 상황들과 관련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요청형 웹을 위한 브라우저, 코랄(CoRaL)과 마블(Marble)

    세마 코랄의 커미션 연구로, 디자이너 윤충근은 서울시립미술관의 교육 프로그램 자료에서 나타나는 ‘질문들’에 초점을 맞춘 웹프로젝트를 제작한다. 교육 프로그램의 공개된 또는 공개되지 않은 여러 자료 속에서 우리는 미술관이 여러 방법과 맥락에서 ‘질문하기’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않음을 확인한다. 미술 교육 프로그램에서의 ‘좋은 질문’은 맞는 답을 끌어내기 위해 잘 설계된 질문이 아니라, 배움의 수용자가 기꺼이 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고 환대하는 질문에 가깝다. 그래서 이 질문들은 어떤 대답으로부터의 요청에 계속 열려 있어야 하고 새로 고쳐질 수 있는 대담함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 흩날리는 말, 소리의 삶

    아카이브의 식민성에 대한 고찰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많은 연구자들과 창작자들이 실증주의적 지식관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면서, 제국의 지식생산과 억압이 맞물리는 순간에 대해 더욱 예리하게 분석하고, 이러한 아카이브의 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그 당시 식민적 조건과 구조를 밝히고, 그 속에서 저항의 흔적 또한 읽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러한 작업이 이뤄낸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시도는 문자로 된 아카이브와 그것이 말하는 (혹은 숨기고 있는) 서사에 집중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음성으로 된 자료는 단순히 문자로 된 아카이브에서 밝혀낼 수 있는 서사를 증명하는 표본으로서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인가? 제국의 지식생산이든 비판적 아카이브 분석이든, 소리는 계속 문자와 문자가 만들어내는 서사에 종속되거나, 부차적 자료로 기능하는 것으로만 다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