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날리는 말, 소리의 삶

장한길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운드 작가이자, 번역가이자, 평론가이다. 소위 ‘필드’ 혹은 ‘현장’에서 사용되는 동시대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목소리와 구술성에 관련된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공적 기억의 형성에서 기술매체가 수행하는 역할을 실험적으로 다룬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으며, 그에 관해 웹진 『세미나』, 『그래픽』 타이포잔치 특별호, 『퐁』,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등에 글을 게재했다. 이외에도 『딕테』(DICTEE)에 대해 쓴 석사 논문이 국역되어 『동방학지』에 게재되었고, 2018 베트남 시민평화법정 조사팀원으로 일하면서 『한겨레 21』 및 Asia-Pacific Journal에 기고한 바 있다. 번역서로는 『무의미의 제국』(2024년 출간 예정), 공역으로 참여한 『짐을 끄는 짐승들』 등이 있다.

“듣기”라는 행위에 대하여

사운드 아카이브

베를린 훔볼트 포럼(Humboldt Forum)은 2020년 온라인 개관, 2022년 오프라인 개관한 독일의 국립박물관으로, 독일판 대영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대영 박물관과의 유사점은 안타깝게도 소장품의 규모와 종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 논쟁까지도 아우른다. 적지 않은 세금을 들여 제국 시절의 독일을 상징하는 옛 프로이센 도성을 일부 재건하고 그 안으로 민속학박물관(Ethnologisches Museum)과 아시아미술관(Museum für Asiatische Kunst)의 소장품을 이관시킨다는 기획 때문에, 훔볼트포럼은 온라인 개관 전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으며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1 그뿐만 아니라, 훔볼트 포럼은 얼마 전 한국 대중매체에도 이름을 알린 바 있는데, 지역별 및 국가별로 운영되는 전시관 중, 한국관이 일본관이나 중국관에 비해 유독 초라하고 협소하다고, 그리고 일본의 식민주의관을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2

그에 비해 조금 덜 알려진 것은 훔볼트 포럼 3층에 있는 베를린 녹음기록보관소 (Berliner Phonogramm-Archiv)에 소장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로 붙잡혀 있던 한인들의 목소리가 녹음된 유성 실린더의 존재다.3 녹음기록보관소에는 1900년부터 50여 년간 세계 각지의 음악과 노랫소리를 수집한 유성 실린더 형태의 녹음자료가 보관되어 있으며, 최근까지 민속학박물관 산하에 있었지만 훔볼트 포럼의 개관과 함께 소장 중이던 자료들 또한 이관되었다. 녹음기록보관소와 라우트아카이브(Berliner Lautarchiv; 이후 두 기관 모두 “베를린 아카이브”로 통칭)에 나뉘어 보관된 3만여 개의 실린더 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다양한 지역 및 언어권 출신의 전쟁 포로들의 말과 노래를 담은 녹음집이다. 영국이나 프랑스군 포로 중에서는 식민지 아프리카 또는 남아시아 지역에서 징집된 군인들이 있었고, 러시아군 포로 중에서는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던 한인, 즉 “원호인” 징집병들이 있었다.4 베를린 녹음기록보관소의 창립자인 카를 슈툼프(Carl Stumpf)를 위시한 프로이센 왕립 녹음기록위원회(Königlich Preußische Phonographische Kommission)는 포로수용소에서 녹음환경을 조성하고, 그 안에서 각지 출신의 포로들을 데려와 축음기의 나팔관 앞에 앉혀 말과 노래를 시켰으며, 그것을 유성 실린더에 녹음하고 수집했다.5

유성실린더 디지털 변환기기, 훔볼트 포럼(Humboldt Forum)의 베를린 녹음기록보관소(Berliner Phonogramm-Archiv), 2022년 12월 8일. 사진: 장한길.

녹음된 노래와 말은 세계 각지의 문화, 특히 각 문화권의 구어(口語)의 표본인 셈이었다. 이는 녹음기록위원회의 기획 또한 민속(음악)학적 그리고 언어학적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6 이렇게 녹음된 자료들은 접근성의 문제로 인해,7 최근에 와서야 말소리의 사료로서, 그리고 전쟁사 사료로서 독일 밖 각국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녹음기록보관소와 “출처 공동체(source community)”8 사이의 협력을 통해, 녹음에 담긴 말이나 노래 가사를 전사(轉寫)하고 필요에 따라 번역을 거쳐 내용을 파악하는 작업이 일부분 진행되고 있고, 이렇게 “발굴”된 내용을 표본 삼아 당시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 대한 연구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9

육성이 담긴 녹음자료가 희귀했던 시기의 표본을 건져 올려, 공동체의 역사기술을 위한 귀중한 사료 혹은 증거로써 활용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의문의 거품도 떠오른다. 제일 먼저, 식민성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베를린 아카이브는, 특히 녹음기록위원회 컬렉션은 더더욱 그렇듯이, 반박할 여지가 없는 식민주의적 아카이브이다.10 평상시라면 멀리 떨어진 식민지나 “원주민”의 땅을 향해 배를 타거나 육로 위로 기나긴 여정에 나섰어야 할 연구자들에게 전쟁은 꽤 매력적인 필드워크(현장연구) 환경을 제공했다. “연구 대상”이 자신들의 나라에, 그것도 잠정적 무기한 감금 상태로 나타나 주었으니 말이다.11 전시(戰時)의 제국에서 생산된 아카이브가 남긴 식민지 타자의 고유명사, 즉 녹음 대상의 이름이나 출신 지역의 지명 등에 대한 빈번한 오기나 누락은 그들의 식민지적 태도를 일정 반영하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침묵” 또한 아카이브의 식민성을 더 돋보이게 한다.12 아카이브에 대한 데리다와 푸코의 사유가 큰 역할을 했던, 소위 “기록학의 포스트모던적 전환” 이후, 이러한 자료들이 생산되었던 식민주의적 조건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논의는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이다.13

그다음으로, 아카이브의 매체에 관한 질문, 즉 소리 아카이브의 특수성에 관해 고찰해 볼 수 있다. 아네테 호프만(Anette Hoffmann)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음성 자료는 특정 학제에 배정된 아카이브에 ‘묻혀’ 있다. 이에 따라 이 자료들은 ‘단순히’ 특정 언어의 문장 표본 혹은 비유럽권 음악의 한 견본으로서 받아들여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연구 분야에 유의미한 자료로 간주하는 일이 드물다.14

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기인하겠지만, 무엇보다 유성 실린더에 새겨진 소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환경에서 생산되었다는 점, 그리고 흔히 “구술사”라고 불리는 것과 다르게 대다수가 그 자체로 서사를 구성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15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애초에 이러한 녹음이 생산될 때부터, 이미 제국의 식민주의적 지식 생산 기획의 표본으로서만 기능할 것이 전제되었던 것이다.

아카이브의 식민성에 대한 고찰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많은 연구자들과 창작자들이 실증주의적 지식관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면서, 제국의 지식생산과 억압이 맞물리는 순간에 대해 더욱 예리하게 분석하고, 이러한 아카이브의 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그 당시 식민적 조건과 구조를 밝히고, 그 속에서 저항의 흔적 또한 읽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러한 작업이 이뤄낸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시도는 문자로 된 아카이브와 그것이 말하는 (혹은 숨기고 있는) 서사에 집중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16 그렇다면 여기서도 음성으로 된 자료는 단순히 문자로 된 아카이브에서 밝혀낼 수 있는 서사를 증명하는 표본으로서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인가? 제국의 지식생산이든 비판적 아카이브 분석이든, 소리는 계속 문자와 문자가 만들어내는 서사에 종속되거나, 부차적 자료로 기능하는 것으로만 다뤄야 하는가?

훔볼트 포럼(Humboldt Forum)의 베를린 녹음기록보관소(Berliner Phonogramm-Archiv)에 전시된 ‘프로이센 왕립 녹음기록위원회(Königlich Preußische Phonographische Kommission) 수용소 녹음실’ 사진을 재촬영했다. 2022년 12월 8일. 사진: 장한길.

매체 고고학

문자매체와 소리매체의 차이에 대해서는 많은 매체 연구에서 다뤄진 바 있다. 그중,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ller)는 문자란 말소리를 기록하기 위해 그것을 26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체계 안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라 주장했다.17 이러한 환원 과정은 소음 혹은 잡음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일종의 필터링처럼 기능한다. 어떤 의미에서, 문자는 인간의 귀가 소음 속에서 목소리, 말, 그리고 다른 보다 익숙한 소리를 즉각적으로 구분해 듣도록 훈련된 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비해 소리매체인 축음기는 “음향적 사건” 그 자체만을 듣고 기록한다고 키틀러는 지적했다.18

“매체 고고학자” 볼프강 에른스트(Wolfgang Ernst)는 더 나아가, 소리를 기록하는 매체로서의 문자가 내포한 환원주의가 기존의 역사가 기술되는 지배적인 방식인 서사의 형식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매체 연구자들이 이에 대해 의식하고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서사의 형태로 수렴되는 것을 거부하도록 요구했다.19 에른스트에게 있어, 서사는 알파벳 문자만큼이나 환원적이고, 디지털 정보처리에 빗대어 본다면, 손실이 큰 압축과 다름없다. 그가 매체 고고학이라고 부르는, 매체 연구의 가장 바람직한 형태가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그가 “역사서술”, “문화적 상징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하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서사가 아니라, 그 밑에서 그리고 그 너머에서 작동하는 “신호의 세계”이며, 여기에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기록한 모든 것에 더해, 의도치 않게 기록된 것 또한 모두 포함된다.20 이는 기록매체를 구성하는 물리적 그리고 기술적 조건들뿐만 아니라, 그 특성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기록된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축음기가 잡아내는 소음도 잡음도 모두 아우른다.21 “매체의 제국이야말로 인문학의 사각지대”라고 주장한 그는 이렇게 인간의 귀로 한차례 걸러지고, 그 거름망의 형태를 답습한 환원주의적인 상징체계(예를 들어, 알파벳 문자 체계)에서 직조된 역사, 더 나아가 서사 형태를 배제하고, 축음기의 발명 이래 포착이 가능해진 거름망 밖의 것들, 즉 “물리적 실재(the physically real)”만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2

매체 고고학적 원칙에 따라 유성 실린더를 듣는 작업을 상상해보자. 축음기를 이용해 실린더에 녹음하는 과정, 특히 “좋은 음질”의 녹음을 획득하는 과정은 많은 준비와 인력 그리고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먼저 인지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기껏해야 각 실린더당 약 2분 정도 길이밖에 녹음할 수 없었다는, 그리고 당시의 축음기는 나팔관 바로 근처에서 울리는 소리 외에는 잘 포착하지 못했다는 기술적인 조건 또한 기억해야 한다. 녹음 침이 실린더 표면을 긁을 때 떨어지는 왁스 부스러기를 계속 불어 날려야 했다는 사실 또한, “잡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녹음된 목소리를 들을 때 ‘삶’의 환청을 들으려는 충동을 억제하여야 한다. (중략) 매번 주어진 기술적 순간에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매체를 다루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자(死者)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작동하는 죽은 매체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23

하지만 단순히 에른스트의 매체 고고학적 관점으로만 일관하기엔, 앞서 언급했듯 베를린 아카이브에는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그림자가 아주 짙게 드리워 있다. 안타깝게도 에른스트의 지침을 충실히 따라 축음기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실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기계 매체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사 기술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함의를 밝혀낸다고 해도, 녹음기록위원회 연구자들의 (상징적 문자 체계의 환원주의가 작용하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소리를 그 자체가 아니라 음성학과 음악학의 체계로 걸러 들을 수밖에 없게 한) 음성학 그리고 음악학적 필터를 떼어낼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아카이브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카이브의 식민성을 매체를 아우르는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취조하려면, 결국 아카이브의 매체적 그리고 물리적 조건을 매체 고고학적으로 밝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밝혀낸 “사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야만 한다. 에른스트는 우리에게 물리적 실재, 소노그래프(sonograph)로 그려낼 수 있는 것 외에는 듣지 말라고 하지만 (그 이외는 “환청”일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의도치 않게 기록된 모든 것들, 키틀러가 “상징계의 좌표에 포착될 수 없는 폐기물 또는 잔여물… [즉,] 생리적 우연과 신체의 무질서한 스토캐스틱”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어떤 것을 더 들어야 하고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식민성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매체 고고학”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24

재현 대 “있는 그대로”의 현전?

소리라는 물리적 파장을 유성 실린더의 왁스 표면 위에 그대로 새기는 축음기는 문자매체로 된 기록과 다르게, “재현”하지 못하고, 그 자체로 어떠한 서사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이지 않다는 에른스트의 지적을 다시 상기해보자. 이 지적은 클라우드 란츠만(Cloud Lanzmann)이 러닝타임 9시간 26분을 자랑하는 영화 〈쇼아(Shoah)〉 를 유대인 수용소 생존자 및 관련자들의 증언만으로 채우고, 홀로코스트 관련 시각 아카이브 자료 사용을 전면 배제했다는 사실과 묘하게 겹친다. 〈쇼아〉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재현 불가능성을 가장 단적으로 선언했던 란츠만에게서는, 육성 증언은 재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육성 증언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진실을 전달할 뿐이라는 관점이 읽히는데, 물론 상이한 층위에서지만 축음기와 소리 아카이브에 대해 에른스트가 생각했던 것과 유사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리 녹음은 그저 수동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물리적 파장, 혹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재생산 또는 전달할 뿐인가? 에른스트와 란츠만이 둘 다 관심을 보일법한 작업, 음악학자 타루스킨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제대로 된 단 하나뿐인 음악적 응답이자, 다른 매체를 포함해 봐도 소수밖에 존재하지 않는 예술적 응답 중 하나”라고 극찬한 음반을 들어보자.25 미니멀리즘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1988년 작 《Different Trains》는 27분 길이의 현악 4중주 연주와 테이프 녹음 샘플링으로 구성된 곡으로, 샘플링된 음원에는 세 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육성 녹음이 포함되어 있다. 〈It’s Gonna Rain〉 (1965), 〈Come Out〉 (1966) 등 이전의 테이프 작업에서 라이히는 테이프 루프와 페이즈 기법을 사용해 녹음된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형시켰지만, 《Different Trains》에서 그는 전작과 사뭇 다른 접근을 선보였다. 육성 녹음을 아주 짧은 토막으로, 하지만 말의 내용과 음향적 속성이 크게 변형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제시했던 것이다.26 이렇게 제시된 육성 녹음의 음고(pitch)는 각 모티브를 구성하는 반복적인 멜로디의 기반을 제공하며, 이는 기차가 달리는 소리를 흉내 낸 선율과 대위적(對位的)으로 배치되며 곡을 구성한다.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Different Trains》 1악장의 〈From Chicago〉 중 육성 녹음을 재생한 부분의 악보를 필자가 직접 옮겨 그렸다. 2022년 12월 8일. ©장한길.

《Different Trains》에 담긴 소리 샘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라이히의 옛 가정교사, 그리고 전직 기차 승무원의 육성에 더해, 기차 기적 소리 또한 포함하고 있다. 라이히는 어렸을 적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각자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별거 중인 부모님 사이를 기차를 타고 오가야 했다. 라이히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사이에 녹음된 다양한 기차 소리를 수집했는데, 여기에는 비단 미국에서만 녹음된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녹음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 인터뷰에서 라이히는 미국과 유럽의 기차 기적 소리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27

에른스트가 《Different Trains》에서 주목했던 것은 바로 라이히의 다양한 기차 소리가 서사 혹은 재현의 환원주의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문화적 시간성”과 유의미한 연결지점을 생성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과 미국의 기차 기적 혹은 (현악기가 흉내 내고 있는) 달리는 소리 녹음과 그 미세한 차이는 그 자체로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지 않으며, “실제 기차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단순한 물리적 사실의 재생(산)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역할은 물리적 실재계가 아닌 특정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서 유효한 것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Different Trains》가 들려주는 기차 소리 간의 차이는 유럽으로부터 대서양을 건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미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에 타고 있던 과거의 미국 유대인 소년 라이히와 유럽 각지에서 수용소행 기차에 탄 유대인 아이들 사이의 간극을 구성하며, 이는 에른스트의 말에 따르면 “역사서술(즉, 상징계의 문자 체계)로는 표현될 수 없는… 과거 경험의 양상”을 만들어내고 있다.28

재현의 영역으로 수렴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소리가 제시됨과 함께, 서사적인 것이 아닌 방식으로 기억을 구성하여 이를 통해 청자가 과거의 경험을 인식하게 하는 것. 에른스트가 라이히의 작업에서 중요하게 읽어내는 지점은 사실 라이히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취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미니멀리즘 음악의 전체적인 기조와 놀랍게도 일치한다. 《Different Trains》에 대해 이야기할 때, 라이히는 “있는 그대로”라거나 “다큐멘터리”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고, 증언 선별 과정에 대해서 질문받을 때도, 육성의 음악적 요소(즉, 말의 리듬과 음고)만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강조한다.29 이는 분명 라이히가 홀로코스트의 재현 불가능성의 문제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기도 했겠지만, 일반적인 미니멀리즘 음악 기조의 영향도 컸으리라 사료된다. 라 몬테 영의 음악을 연구하던 제레미 그림쇼는 미니멀리즘 음악을 “음향적 실증주의”, 즉, “언어적 의미나 음악적 맥락보다 음향적 물성을 강조”하는 태도라고 규정했는데,30 앞서 언급한 미니멀리즘 테이프 루프 작업 〈It’s Gonna Rain〉과 〈Come Out〉에서 라이히는 청각적 차원에서 말소리가 변형되는 효과를 거두지만, 음원 그 자체에 변형을 가하지는 않았다. 음원의 음향적 물성만을 강조한 것, 즉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제시하는 것과 다름없다.31 사람의 귀와 다르게 뭐든 있는 그대로 듣고 기록하는 에른스트의 녹음매체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Different Trains》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혹은 실증주의적 기대에 완전히 부응하지는 못한다. 라이히의 귀는 축음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이미 린 블로다스키(Amy Lynn Wlodarski)의 주장대로, “그의 작업은 ‘그들[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 일어난 일’을 단순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청취한 증언의 기록이다.”32 《Different Trains》에서 작업에 사용될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육성 증언 선별에서 그 음악성만큼이나 증언 내용에 대한 굉장히 깊은 고려가 이루어졌다는 점, 마치 영상 필름을 편집하듯 꽤 능동적 그리고 자의적으로 증언 조각을 이어 붙이고 잘라냈다는 점, 그리고 특히 증언 내용 중 몇몇 구절을 (의도적으로든 잘못 들었든) 틀리게 전사했다는 지적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소리란 무엇인지 질문하게 하고, 미니멀리즘 음악과 매체고고학의 기저에 자리한 소리에 대한 실증주의적 집착에 대해 재고하도록 만든다.33 에른스트와 키틀러가 제기했던 “듣기”의 문제 또한 다시금 환기하면서 말이다.

나는 당신이 지금 있는 곳과 다른 방에 앉아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업을 한 점 짚어보자. 알빈 루시에(Alvin Lucier)의 1969년 작 〈I’m Sitting in a Room〉은 제목 그대로 방 안에 앉은 루시에가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여 재생하고, 재생된 목소리를 다시 녹음하는 과정을 약 45분간에 걸쳐 반복한 것이다. 루시에는 1969년에 이 작업을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였고, 1970년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초연을 가졌다.

알빈 루시에의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라이히의 테이프 루프를 활용한 초기작들처럼, 점점 말소리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변형되어 간다는 점이다. 그 과정은 〈I’m Sitting in a Room〉의 가사, 그러니까 루시에의 낭독 내용에서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나는 당신이 지금 있는 곳과 다른 방에 앉아 있다. 나는 나의 말하는 목소리를 녹음하고 있으며, 그것을 다시 방에서 재생할 것이다. 다시, 또다시, 이 방의 공명주파수가 강화되어 나의 말소리의 그 어떤 흔적도, 아마 리듬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될 때까지. 그러면 당신이 듣게 될 것은 말소리에 의해 발화된, 이 방의 자연적인 공명주파수가 될 것이다. 나는 이 행위를 물리적 사실의 증명이라기보다, 나의 말소리의 불규칙함을 매끄럽게 만드는 방법으로서 인식한다.34

여기서 “공명주파수”는 소리가 울릴 때, 진폭이 더 큰 특정 주파수 대역을 일컫는다.35 구체적으로 어떤 주파수 대역에서 진폭이 더 큰가는 물리적 개체마다 다 다르며,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각자 고유한 특징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공명 주파수는 비단 소리를 발생하는 개체 (사람, 동물, 악기 등)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울리는 모든 공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루시에가 “이 방의 공명주파수가 강화되어 나의 말소리의 그 어떤 흔적도… 모두 파괴”된다고 할 때, 이 말은 루시에가 말소리를 내고 있는 공간, 즉 방의 고유한 소리적 특성이 점점 지배적으로 드러나고, 루시에의 목소리가 가진 특성은 쪼그라들게 된다는 뜻이다. 루시에가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그것을 재생하여 스피커에서 나오는 자신의 녹음된 목소리를 다시 녹음하고, 그것을 다시 재생하여 녹음하는 행위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과정에서 루시에의 낭독이 반복될 때마다, 방의 공명주파수는 강화되고 루시에의 목소리의 공명주파수는 약화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루시에의 작업이 끝에 다다를 즈음, 그의 말소리 특징은 거의 다 사라지고 방, 즉 환경의 특징만이 남아 울린다. 〈I’m Sitting in a Room〉은 우리가 말을 들을 때 거의 자각하지 않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말은 말이 울릴 물리적 공간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 공간의 존재 또한 사람의 말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의 귀에 소리가 들릴 때, 우리가 있는 공간은 그 소리의 발생원만큼이나 핵심적인 역할을 함에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 존재는 발생원 뒤로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에 맞서, 〈I’m Sitting in a Room〉은 그 공간의 존재를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부각한다.

루시에의 작업은 믈라덴 돌라(Mladen Dolar)가 규정하는 “목소리” 개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들려)주고 있기도 하다. 돌라는 목소리를 “신체에서 튀어나오는 발신체, 발사체”라고 정의했으며, 그러한 목소리는 그것이 발생한 신체와도, 그리고 그것의 물리적 현전으로서도 규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목소리는 “신체의 헤아릴 수 없는 내부로부터 발산되고 외부 세계로 연장되며, 그 성질은 바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이 돌라의 개념에 있어서 핵심적인 지점이다.36 목소리는 그것이 발생한 내부(혹은 사람/목소리의 주체)로만 규정될 수도, 그 외부로 나온 울림(물리적 실재/객체)만으로 규정될 수도 없다. 내부와 외부를 항시적으로 넘나드는 상태, 접촉과 교란의 상태 자체가 목소리, 그리고 더 나아가 소리의 성격이다. 루시에의 작업이 들려주는 것은 이러한 소리이다.

루시에와 돌라의 작업이 갖는 함의를 단순히 발화가 이루어지는 물리적 환경이나 공간뿐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너머의 것은, 발화의 물리적 현상이 발생하고 발화의 형식과 내용이 구성되는 데에 핵심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그 외 비물리적 상황이다. 소리의 발생원뿐만 아니라 소리가 “들리는” 공간이나 환경에도 고유한 공명주파수가 있다는 점과 그 특성이 발생하는 소리를 형성한다는 사실은, 주체와 목소리에 관한 개념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목소리는 목소리의 주체와 자동적으로 등치 되어선 안 되며 (많은 논의에서 목소리는 주체성, 진정성, 행위자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적은 목소리의 주체를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37 그 주체의 목소리를 형성하고 우리에게 들리게 되는 데 작용하는 물리적 그리고 비물리적 매개 요소들에 대해 주목하게 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한다.

이러한 방향에서 고찰해보면, 말이란 것은 기존에, 혹은 준비된 상태로 주어져 있고, 그것을 꺼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지만, 블로다스키 역시 증언에 대해서 조프리 하트먼(Geoffrey Hartman)을 인용하며 “[그것은] 그저 저기 바깥에서 완전한 형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38 동일한 음향적 환경에서, 인간의 몸에서 발산되는 소리는 다양한 물리적 요소의 매개와 상호작용을 통해 청자의 고막에 다다르게 되는 것처럼, 말의 생성 또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예를 들어, “들려지지 않았던 목소리를 발굴한다”라는 표현에 대한 거부감에서 이러한 지점을 읽어낼 수 있다.39 인터뷰에서의 구술자와 청취자 사이의 위계적 관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작업 윤리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한 것이 크겠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 누군가가 발굴되기만을 기다리며 묻어온 목소리를 어느 날 연구자나 작가 또는 활동가가 그것을 발견하고 파내어 알리는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이 생성되는 순간의 극한 사례 몇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역사 기술에도, 주류 언론과 아카이브와 담론과 역사에도, 원래는 전혀 허용되지 않는 증언의 사례들이 있다.”40 이 구절은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히토 슈타이얼의 대답이다. 여기서 슈타이얼은 스스로를 “이슬람/무젤만(Der Muselmann)”41 이라 칭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증언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나는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의 순간을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50년에 달하는 “침묵을 깨고 당당하게 살아있는 증거”로 나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그리고 “말을 건넨 서발턴”으로 일컬어지는 미군 ‘기지촌’ 여성의 사례다.42

문학 연구자 이지은의 지적대로, 생존자의 말을 “살아있는 증거”로 여겼던 ‘위안부’ 운동 초기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의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은 생존자 발언의 상호구성성, 즉 “증언은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사이의 공동작업(collaboration)이며, 경청하는 연구자는 청자이자 동시에 화자의 입장에서 경계 넘나들기(cross-bordering)를 통해 경계의 주체성을 구성한다”는 점에 주목한다.43 그들의 목소리는 4-50년 동안 묵혀두었다 “발굴”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회, 정치, 문화적 환경과 그들과 상호작용하던 사람들 그리고 사유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루시에가 들려주는 월경(越境)의 성질이 자명한 소리처럼, 이러한 순간에 생성된 말 또한 처음부터 주어졌던 것이 아니며, 다양한 내부와 외부 요소에 의해 점차 구성되어 갔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루시에의 작업에서 방의 공명주파수가 점진적으로 그리고 선형적으로 더 지배적으로 들리게 되는 것과는 다르게, 당대의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외교적 이해관계와 문제의식과 맞물려 수많은 소거, 증폭, 그리고 굴곡을 거쳐야 했고, 비교적 최근의 “정의연 사태”에 이르러서는 생존자가 복화술사의 인형과도 같이 취급되기도 했다. 이러한 굴곡은 어떤 식으로 들릴 수 있을까? 루시에의 피드백 루프 과정에서, 재생이 반복될 때마다 방의 공명주파수뿐만이 아니라 방 바깥, 그리고 방 너머에 있는 온갖 다양한 개체의 공명주파수가 간섭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상상함으로써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루시에의 낭독에서 언급되고는 있지만 소리 작업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는 “당신”, 다른 곳에 있는 당신, 즉 지금 루시에의 음반을 듣고 있는 당신이다. 발화자, 그리고 발화자가 있는 방, 그리고 다른 시공간에 있는 “당신”도 모두 소리를 구성하고 있다는 발상은, 말이 생성되는 이러한 극한 사례에 빗대어 생각해 볼 때 인상적인 메타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찰은 받아 적을 수 있는, 읽을 수 있는,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구술자의 “말”에 국한되어 있다. 다시 돌아와, 문자매체의 환원주의를 넘어 말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수반하는가? 발화자가 살아있다면, 무슨 질문을 건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매체로,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서발턴은 “자신에 대한 증언할 상황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인터뷰는 무의미하다.”44 하지만 소리는, 적어도 본 지면에서 살펴본 소리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터뷰하기를, 조우하기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소리는 울리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 아카이브의 유성 실린더, 라이히의 《Different Trains》, 루시에의 〈I’m Sitting in a Room〉이 모두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말과 소리 모두를 (다시) 들어야만 한다.

훔볼트 포럼(Humboldt Forum)의 베를린 녹음기록보관소(Berliner Phonogramm-Archiv), 2022년 12월 8일. 사진: 장한길.

  1. Irene Hilden, Absent Presences in the Archive: Dealing with the Berlin Sound Archive’s Acoustic Legacies (Leuven, Belgium: Leuven University Press, 2022), 22. 

  2. 다음 기사 참조: 이진, 「[기고] 독일 훔볼트포럼 한국관의 미래」, 『한겨레』 2020년 8월 27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59639.html; 이율, 「’식민주의 반성’한다는 훔볼트포럼… 한국관서 “日식민주의 재현”」, 『연합뉴스』, 2021년 9월 21일, https://www.yna.co.kr/view/AKR20210921017300082

  3. 해당 자료는 2012-14년 사이 국립국악원이 베를린 녹음기록보관소(당시 민족학박물관 산하), 그리고 라우트 아카이브(Lautarchiv; 훔볼트대학교 산하)의 협조를 얻어 디지털 사본을 생성 및 이관하였고, 2014년에 관련 자료에 관한 학술행사 또한 개최했다. 국립국악원 국악아카이브 웹사이트 내 해당 자료의 디지털 사본에 관한 정보: http://archive.gugak.go.kr/portal/collection/SelectDonorDetail?p_pub_id=100073. 학술행사 자료집은 국립국악원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으며,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국립국악원; 주한독일문화원, 『베를린에 남겨진 20세기 초 한인의 소리』 (국립국악원; 주한독일문화원, 2014). 열람정보 링크: https://www.gugak.go.kr/site/program/gugakdata/dataView?menuid=001003004002001&regi_Number=Z023113.  

  4. 반병률, 「러시아 한인(고려인)사회와 정체성의 변화: 러시아원동 시기(1863~1937)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40 (2008): 105-6; 108-111. 

  5. 프로이센 왕립 녹음기록위원회, 그리고 더 나아가 베를린 녹음기록보관소의 창립과 맥락에 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조하라. Britta Lange, Rubaica Jaliwala trans., Captured Voices: Sound Recordings of Prisoners of War from the Sound Archive 1915 - 1918 (Berlin: Kulturvelag Kadmos, 2022), 62-72. 

  6. Monique Scheer, “Captive Voices: Phonographic Recordings in the German and Austrian Prisoner-of-War Camps of World War I,” in Reinhard Johler, Christian Marchetti and Monique Scheer eds., Doing Anthropology in Wartime and War Zones (Bielefeld: transcript Verlag), 279-280.  

  7. 표면이 왁스로 되어있는 유성 실린더는 재생 횟수를 거듭할수록 보관 수명이 짧아지는 매체였고, 베를린 아카이브에서 해당 매체가 디지털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의 일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매체로 된 자료에 대한 접근성은 현저하게 낮을 수밖에 없었다. Anette Hoffman, “Introduction: listening to sound archives”, Social Dynamics 41.1 (2015): 76. 

  8.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인 “source community”를 따랐다. 

  9. 이에 해당하는 한인포로 녹음 관련 저술로는 김보희, 「1917년 독일포로 고려인이 부른 독립운동가요」,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2 (2012): 75-106; 차재은, 홍종선, 「20세기 초 베를린 한인 음원의 음운과 형태」, 『한국어학』 72 (2016): 257-282; 그리고 앞서 언급한 국립국악원과 주한독일문화원의 학술행사 자료집 등이 있다. 

  10. 본 지면에서 인용하고 있는 브리타 랑게(Britta Lange), 힐덴(Hilden), 호프만(Hoffman), 그리고 쉬어(Scheer)의 공통된 판단이다. 

  11. Hilden, Absent Presences, 24-5. 

  12. 문화연구자 브리타 랑게는 녹음기록위원회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 또 다른 아카이브인 베를린 라우트 아카이브의 전쟁포로 유성 실린더를 “아카이브의 침묵, 기술적 침묵, 내용적 침묵, 그리고 정치적 침묵” 등의 층위에서 조명했다. Britta Lange, “Archival Silences as Historical Sources: Reconsidering Sound Recording of Prisoners of War (1915-1918) from the Berlin Lautarchiv,” SoundEffects 7.3 (2017): 48. 

  13. Terry Cook, “Archival Science and Postmodernism: New Formulations for Old Concepts,” Archival Science 1 (2001): 3-24. 

  14. Hoffman, “Introduction,” 74. 필자의 번역이다. 

  15. 물론 랑게는 이 자료들이 “특별한 사적 그리고 전기적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러한 정보가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사로 구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과정은 보다 많은 “추가”와 “필터링”을 거쳐야만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후 지면에서 서술할 문자매체와 서사형태의 환원성에 관한 매체연구 내 논의를 참조하라. 랑게의 지적은 다음의 글에서 인용했다. Lange, “Archival Silences as Historical Sources”, 48. 

  16. 이 주장은 푸코의 “고고학적” 작업에 대해 키틀러가 지적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Friedrich Kittler, Gramophone, Film, Typewrit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5.  

  17. Kittler, Gramophone, 3.  

  18. Kittler, Gramophone, 23. 

  19. Wolfgang Ernst, Digital Memory and the Archiv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2013), 17-19. 

  20. Ernst, Digital Memory, 58. 이러한 서사 형식에 대한 고찰은, 포스트모던 조건의 특징 중 하나로서 서사에서 데이터베이스로의 지식 패러다임 전환을 꼽는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의 관점과도 연결점을 찾을 수 있고, 컴퓨터, 인터넷 등의 뉴미디어가 계열중심적(paradigmatic)인데 비해, 영화와 같은 기존의 미디어는 통합중심적(syntagmatic)이라고 관찰한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의 연구와도 맞닿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Lev Manovich, The Language of New Media (Cambridge: MIT Press, 2001), 230-1; Jean-François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37-53. 리오타르의 책 중 특히 51쪽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Data banks are the Encyclopedia of tomorrow. They transcend the capacity of each of their users. They are “nature” for postmodern man.”  

  21. Ernst, Digital Memory, 7. 

  22. Ernst, Digital Memory, 173. “실재”라는 표현은 물론 라캉의 용어에서 차용한 것인데, 매체연구에서 에른스트 이전에 키틀러가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를 각각 (키틀러의 책 제목을 구성하는) 축음기, 영사기, 그리고 타자기에 상응시킨 바 있다. 

  23. Ernst, Digital Memory, 60, 183. 

  24. Kittler, Gramophone, 15-6. 

  25. Richard Taruskin, “A Sturdy Musical Bridge to the 21st Century”, New York Times, Aug. 24, 1997, https://www.nytimes.com/1997/08/24/arts/a-sturdy-musical-bridge-to-the-21st-century.html

  26. Antonella Puca, “Steve Reich and Hebrew Cantillation”, Musical Quarterly 81 (1997): 538. 

  27. Ernst, Digital Memory, 174. 

  28. 에른스트는 라이히의 작업이 자아내는 과거 경험의 양상을 “문화적 시간성 안에 위치한 실재의 소노그래프”라고 덧붙인다. Ernst, Digital Memory, 174. 

  29. “어떤 방식, 어떤 형태, 아니면 어떤 형식으로든 작업의 주제로서 홀로코스트를 다루려고 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그저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 불가능하죠. 이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증언자들의 육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제가 그들의 말에 깃든 멜로디를 단순히 청음한 뒤, 그것을 음악적 시작점으로 삼아 작곡을 했다는 것이겠죠. 그 다큐멘터리적 성격이야말로 이 작업의 존재에 있어 본질적인 것입니다.”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To consider using the Holocaust as subject material in any way, shape, or form is so inherently…not just difficult, but impossible. What makes this piece work is that it contains the voices of these people recounting what happened to them, and I am simply transcribing their speech melody and composing from that musical starting point. The documentary nature of the piece is essential to what it is.” Rebecca Y. Kim, “From New York to Vermont: Conversation with Steve Reich,” Current Musicology 67-68 (2002): 345–66. 

  30. Amy Lynn Wlodarski, “The Testimonial Aesthetics of Different Trains”, Journal of the American Musicological Society 63.1 (2010): 106. 

  31. 라이히는 같은 테이프 음원 여러개를 동시에 재생하며, 재생되고 있는 테이프간의 시차를 활용해 해당 효과를 얻어냈다. 필자의 다음 글에서 〈Come Out〉에 관한 부분을 참조하라. 장한길, 「“말일지도. 부서진. 조각 조각”: 『딕테』 속 소리」, 『SEMINAR』 Issue 09 (2021),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9/janghangil-dictee/.  

  32. Wlodarski, “The Testimonial Aesthetics”, 130. 

  33. Wlodarski, “The Testimonial Aesthetics”, 104, 116-125, 126-136. 

  34. 원문은 다음과 같다. “I am sitting in a room different from the one you are in now. I am recording the sound of my speaking voice and I am going to play it back into the room again and again until the resonant frequencies of the room reinforce themselves so that any semblance of my speech, with perhaps the exception of rhythm, is destroyed. What you will hear, then, are the natural resonant frequencies of the room articulated by speech. I regard this activity not so much as a demonstration of a physical fact, but more as a way to smooth out any irregularities my speech might have.” 마지막 구절인 “말소리의 불규칙함”은 말을 더듬는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며, 앞의 원문에서 해당 부분을 필자가 이탤릭체로 표시해두었다. 

  35. 연관된 개념으로 포먼트(formant)가 있는데, 소리를 주파수(x축)와 진폭 (y축)값으로 이루어진 스펙트럼으로 나타냈을 때의 봉우리(peak)를 가리킨다. 공명은 소리가 울리는 물체의 특성을 의미하는 데 비해, 포먼트는 공명을 통해 형성되는 소리 자체의 특성을 의미하고 있어 분명 서로 별개의 개념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둘 사이의 구분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용어 사용 및 구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음향학적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Ingo R. Titze, Ronald J. Baken, Kenneth W. Bozeman et al., “Toward a consensus on symbolic notation of harmonics, resonances, and formants in vocalization” in The Journal of the Acoustic Society of America 137 (2015): 3005-3007.  

  36. Mladen Dolar, “Voices that Matter” in Martha Feldman and Judith T. Zeitlin eds., The Voice as Something More: Essays toward Material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9), 344. 

  37. 라이히의 테이프 루프 작업 〈Come Out〉에도, 그리고 종종 《Different Trains》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던 비판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 〈Come Out〉에서 사용된 목소리의 주인공이 흑백 분리정책이 아직 유효하던 시기에 살인죄를 잘못 뒤집어쓰고 재판을 받던 흑인 청소년 대니얼 햄의 증언이기 때문에, 매우 첨예한 미국의 정치적 그리고 인종주의적 함의가 더 깊게 얽혀있었다. 라이히 작업에서 흑인 목소리의 변형과 “지움”의 함의를 두고 제기된 비판에 대해선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Sumanth Gopinath, “The Problem of the Political in Steve Reich’s Come Out” in Robert Adlington ed., Sound Commitments: Avant-garde Music and the Sixties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122. 

  38. “…the testimonies are not just ‘out there, complete, objective; [they are] also in a frame or with a dimension which is that of reception and therefore interpretation.” Wlodarski, “The Testimonial Aesthetics”, 140. 

  39. 다음 좌담록에서 이은진의 발언을 참조하라. 웹진 <결> 편집팀, 「일본군‘위안부’ 투쟁 영역의 확장 〈3부〉 - 다르게 선택하기」, 『웹진 결』, 2022년 10월 14일, https://kyeol.kr/ko/node/486.  

  40. 히토 슈타이얼, 안규철 역, 『진실의 색』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9) 40. 

  41. 슈타이얼, 『진실의 색』, 40-42. 유대인 수용소에서 “이슬람”(번역본에서는 “무젤만”으로 옮겼다.)이라는 용어는 “삶의 의지를 잃고 죽음의 문턱에서 아무런 기대 없이 살아가는 [유대인] 수감자”를 일컬었다. 아감벤이 차용하여 널리 알려진 이 오묘한 용어는 철저하게 비인간화된 유대인 수감자를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논리가 도대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지만, 아감벤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아감벤의 “침묵”에 대해 질 자비스(Jill Jarvis)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Jill Jarvis, “Remnants of Muslims: Reading Agamben’s Silence”, Political Theory 45.4 (2014): 707-728.  

  42. 이지은, 「증언과 증언 사이를 청취하기: 증언의 사회적 의미 획득/부과 방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증언 이후: 일본군’위안부’ 피해 재현의 윤리와 폭력』, 학술콜로키움 자료집, 2022년 4월 28일, 26; 이은진, 「간극을 고민하며」, 이경빈, 이은진, 전민주,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 (2018), 10. 일례로, 사회학자 이나영이 페미니즘 카페 두잉에서 진행한 특강의 제목은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역사와 운동, 말 건네는 서발턴의 가능성”이었다. 황예지, 「포주는 정부였다: 미군 기지촌 ‘위안부’특강을 함께 하며」, 『지속가능저널』, 2018년 10월 20일, http://www.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2322

  43. 이지은, 「지속되어야 할 ‘위안부’ 운동을 위하여」, 『일다』 2020년 5월 13일, https://www.ildaro.com/8728 . 증언의 상호구성성에 대한 연구나, 이에 대해 인식하며 수행된 작업 중, 특히 『IMO』의 경우 기존 구술집의 환원적인 체계를 확인하게 해 준다. 피해사실에 국한되지 않는 구술자의 온갖 “의견”은 사실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피해를 국가폭력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혹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을 반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이 공적 공간에서 스스로를 국가폭력의 피해자로서 발화하는 순간의 상호구성성과 그 순간을 선행하는 과정에 대해 가장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경빈, 이은진, 전민주,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2018) 참조. 같은 책의 개정판 서해문집본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경빈, 이은진, 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양공주, 민족의 딸, 국가 폭력 피해자를 넘어서』(파주: 서해문집 2020). 

  44. 슈타이얼, 『진실의 색』,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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