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세마 코랄의 ‘연결’ 주제어와 SeMA 의제를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생겨난, 시각문화/예술과 미술관의 (동)시대적 과제에 관해 논하는 지식을 선보입니다.

글과 웹 프로젝트를 함께 수록해서 세마 코랄이 지향하고 생산하는 지식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목록 보기’는 수록된 글과 웹프로젝트의 제목을 부호-숫자-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공개된 날짜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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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을 지지한다’는 문장의 곤란함에 관하여

    많은 예술가들은 사회 이슈를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예술의 언어를 동원하고 시각예술의 형식을 갱신해왔다. 더러 미술관은 규율과 관습을 깨는 재현적 투쟁의 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같은 전시 안에서도 검열과 그에 저항하는 행동들이 쟁투를 벌이는 재현적 정치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비평은 무엇을 예술로 소환하고 있는가를 묻는 데 나아가 이를 관찰하고 표현하는 주체가 어떻게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배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양식과 방법론으로 대상을 재현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 ‘비체적’ 정서의 내장 만지기: 이미래의 《캐리어즈(Carriers)》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공포의 권력』에서 정식화한 개념인 비체(卑體 abject)는, 썩는 살과 내장, 오물과 토사물과 같이, 문화적 인간인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처럼 즉각적인 혐오의 반응을 유발하는 것들을 말한다. 비체는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 외부와 내부, 무엇보다 ‘나(주체)’와 ‘너(타자)’ 사이의 경계라는 구성물의 권위를 끈질기게 모욕한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결코 제거할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오물인 비체는 일종의 ‘즉자적 복수’로서 주체에게 언제나 유유히 되돌아온다.

  • 보이지 않는 것의 지도 그리기로서 회절(diffraction)

    대상을 자기에게로 재흡수 통합하는 것이 반영이라고 한다면, 해러웨이는 반영론에 구멍과 균열을 낼 수 있는 전략으로 회절에 의존한다. 반영이 직진하면서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면, 회절은 겹치고 주름져서 보이지 않는 것의 흔적에 주목한다. 광학에서 회절은 빛이 장애물을 만나면 일부는 직진하지 못하고 에둘러가는 현상을 뜻한다.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는 오래된 논쟁이었지만 현재 빛의 이중성(반영과 회절 모두)을 인정하는 바, 회절은 빛이 파동임을 보여주는 현상 중 하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서, 빛은 어둠에 의해서 존재함에도, 반영론의 인식론적 우월성에 균열을 내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 우연한 몸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라인 삶의 형체와 질량이 한층 더 확장했고, 화면 속 육체가 없는 존재들의 묵직함과 정보의 범람에 의해 다양한 몸들의 윤곽이 얼버무려지고 있는 듯하다. 사용자는 ‘좋아요’와 같은 반응 기반의 상호 작용을 추적하는 통계로 몸을 입증하고, 기계가 생각하는 ‘인간미’가 없다면 몸은 인식되지 못할 수 있다. 매일매일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물리적인 현실과 디지털 환경의 얽힘(entanglement)에 편재하는 굉장한 공허와 대혼란 사이에서 우리의 몸을 정의하고 입증하기 위해 바삐 활동하고 있다. 그 움직임이 중앙 집권화된 편협한 규범성에서의 쳇바퀴 달리기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예상된 패턴을 이탈하는 오류인 글리치(glitch)를 통해 출구전략을 세우고 또 다른 형체의 몸에 도달해 보려 한다.

  • 탈인간을 위한 실천: 사물의 윤리

    기계는 작동되어야 하거나 찬양되어야 하거나 지배되어야 할 어떤 물건이 아니다. 기계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의 작동양식이며, 우리의 신체성의 한 측면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raway) 1 어떤 존재들을 배제해나가는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만들어지는 타자성(otherness)에 도전하기 위하여, …

  • 탈인간을 위한 실천: 사물의 윤리 (1)

    어떤 존재들을 배제해나가는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만들어지는 타자성(otherness)에 도전하기 위하여,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한 방식인 ‘사물화(objectification)’ 개념을 새롭게 사용할 수는 없을까? 그동안 비인간화, 사물화(혹은 대상화)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부정적인 말로 쓰여왔다. 두 개념을 통해, 인간이 식물과 동물 등 타자들과 구별되는 어떤 특성이 있다고 정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특성이 결여된 상태가 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글은 능력(ability)과 장애 여부를 기준으로 인간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는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며, 인간성의 뚜렷한 표식을 제거해나가는 작업들을 검토한다. 퍼포먼스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연작은 사물화를 실행하고 동시에 사물화 당하는 몸이 사물성과 겹쳐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구분에 도전한다.

  • 탈인간을 위한 실천: 사물의 윤리 (2)

    억압과 식민주의 역사에 기반한 노동 착취를 지지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정치 안에서 사물-되기는 과연 어떻게 실현 가능하며,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을까?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는 초현실주의, 코미디, 음악적 요소를 사용하여, 목적 없는 기계가 되는 한 정신장애인을 묘사한다. 사이보그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순응과 치유로 귀결되는 전형적인 심리치료 서사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괜찮다’는 평가는 퀴어적 장애성이 잠재적으로 인간과 사물 사이의 경계를 흐릴 수 있음을 암시한다. 더 분명한 것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능력을 나타내는 표식에 국한되어 있는 행위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언뜻 수동적 사물로 보이던 영군은 의도치 않게 수용시설이라는 공간에서 장애를 가진 삶, 인지적/심리적 차이를 가진 삶을 인간성의 조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지지공동체를 만들어낸다.

  • 흩날리는 말, 소리의 삶

    아카이브의 식민성에 대한 고찰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많은 연구자들과 창작자들이 실증주의적 지식관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면서, 제국의 지식생산과 억압이 맞물리는 순간에 대해 더욱 예리하게 분석하고, 이러한 아카이브의 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그 당시 식민적 조건과 구조를 밝히고, 그 속에서 저항의 흔적 또한 읽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러한 작업이 이뤄낸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시도는 문자로 된 아카이브와 그것이 말하는 (혹은 숨기고 있는) 서사에 집중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음성으로 된 자료는 단순히 문자로 된 아카이브에서 밝혀낼 수 있는 서사를 증명하는 표본으로서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인가? 제국의 지식생산이든 비판적 아카이브 분석이든, 소리는 계속 문자와 문자가 만들어내는 서사에 종속되거나, 부차적 자료로 기능하는 것으로만 다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