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지지한다’는 문장의 곤란함에 관하여

남웅
남웅은 인권운동과 더불어 시각문화 및 미술평론을 한다. 2011년 제 4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미술비평 부문에 “동성애자 에이즈 재현에 관련된 논의—에이즈 위기부터 오늘의 한국사회까지”로 당선된 바 있으며, “오늘의 예술 콜렉티브—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보지만, 얼마동안 빛이 있는 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로 2017년 제2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공저로는 『감염병과 인문학』(2014), 『메타유니버스—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2015), 『한국의 논점 2017』(2016)이 있다. 현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상임활동가이다.

1. 미명을 거슬러

+1. 매년 11월 20일은 혐오범죄로 목숨을 잃은 트랜스젠더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TDoR(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로 부르는 이 날 서울에는 트랜스젠더 인권단체와 커뮤니티가 추모행사를 기획하고 거리를 행진한다. 몇 년 전에도 큰 탈 없이 행진을 마무리하는가 싶었다. 트랜스 운동단체에 지지를 표시해온 이성애자 남성이 집회를 정리하는 단체 사람들에게 뒤풀이 합석을 요청했다. 단체 사람들은 내부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정중히 거절을 표시했다. 그는 곧 SNS에 지지 철회 선언을 게시했다. 자신의 지지를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 설득은커녕 누리꾼들의 비판에 직면한 그는 곧장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극적이고 극단적인 입장 선회를 보였다. 물론 위의 사례에서 그의 태도는 상식적이지 않다는 평이 지배적이고 해당 사건은 수년 전 해프닝으로 잊혀갔다. 하지만 그것은 이후의 시간을 예고하는 또 다른 징후였을지 모른다.

+2. 2020년 변희수 하사와 이은용 극작가의 죽음을 비롯한 연이은 트랜스젠더의 부고 소식으로 당사자뿐 아니라 퀴어 커뮤니티와 시민사회는 집단의 슬픔과 우울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고민했다. 수백 명의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지하철을 타고 애도하며 서울을 순환하고, 이후 서울광장을 둘러싸고 같은 노래를 불렀다. 또 다른 시간, 성소수자 인권운동단체에서는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심정과 자신의 상황을 나누는 집담회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당시 사안에 관심을 가졌던 방송인과 언론인들도 참여했다. 그들은 사려 깊게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지지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코로나19가 국내에 상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이태원 지역에 확진자가 속출했다. 언론들은 게이들이 이 환국에도 쾌락을 좇아 만남을 지속한다고 비난했다. 당시 확진자 수가 한자리 수준으로 감소하면서 정부는 방역 수위를 느슨하게 낮췄고, 5월 연이은 연휴로 사람들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던 상황이었다. 게이 남성들 역시 자신들이 주로 다니던 이태원과 종로 등지를 향했고, 개중에는 유학생과 더러는 자신의 질병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확진자도 있었을 것이다. 언론은 경쟁이라도 하듯 확진자가 다녀간 동선을 짚고, 그중에는 게이클럽과 게이찜방이 있다는 것을 보도했다. 질병에 대한 정보와 예방보다도 게이들이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섹스를 하는가에 천착하는 보도들은 예방에 크게 도움 되지 않았다. 만남이 한정되고 제한되는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상적으로 보이는 면면만을 짜깁기하고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언론은 80년대 에이즈 위기 시절 성소수자를 전시대상으로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견지했다.

별 상관없어 보이는 두 에피소드에는 언론이 가로지른다. 코로나 시국 게이들의 만남 행태를 비난하는 언론인 중에서는 지난 트랜스젠더 추모행사에 참여한 기자가 있었다. 그는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지지한다고 적었지만, 동시에 게이들의 섹스를 규탄하는 기사를 냈다. 그에게 성소수자 인권이란 무엇이었을까. 그전에 그가 지지하는 타인의 삶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당신이 부당한 차별을 받아선 안 되지만, 나의 안전을 해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일까. 당신의 삶을 지지하지만, 당신이 지지받기 위해서는 규범을 잘 따르는 모범 시민의 요건을 충족해야 자격을 보장한다는 것인가.

새로운 감염병이 확산하는 상황에 예방을 위해 성원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렵지 않은 선택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성원들이 충분히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지, 혹여 그들이 어떤 위계와 제약된 환경 속에 고립된 것은 아닌지, 취약함 속에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만남을 찾는 감정은 무엇인지 간과하기 쉽다. 안전으로부터 취약한 이들을 비난과 공격의 대상으로 표적 하여 사회적 책임을 전가하고 있음을 문제 삼는 일은 사회적 통제와 규율에 후순위로 밀려난다.

+3. 2022년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 축하 발언을 위해 북미-유럽권 대사들이 무대에 올랐다. 그들 중 하나는 ‘다수자와 소수자가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지지 발언을 했다. 틀린 것 없어 보이는 이 발언은 그럼에도 숙고의 여지를 남기는데, 여전히 다수와 소수를 나누는 것은 아무리 잘 살아도 위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령 그의 발언이 선의에 바탕할지라도 소수는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다수의 관용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위계적 구분을 재차 확인한다. 이는 또 다른 짓궂은 질문을 남긴다. 당신의 지지가 전제하는 ‘관용’은, 의도와 상관없이 구분 짓기에 순응하며 상위에 위치하는 우회적 포석은 아닌가. 일반 시민으로 안정적인 주류의 지위에서, 그 지위를 재차 확인하기 위해 관용을 수행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관용과 연민은 타인의 상황에 대한 동감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관용의 미덕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어렵게 물어야 하는 것은 관용이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는지, 관용이 배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어야 할 것이다.

+4.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주류사회의 지지는 이들에게 힘이 되지만, 때로는 다른 위계와 수탈을 감추는 도구로 동원되기도 한다. 가령 최근 퀴어 커뮤니티 안팎으로 보폭을 넓히는 초국적 제약회사 길리어드 사이언스(Gilead Sciences, 이하 ‘길리어드’)의 행보는 어떠한가. 현재 길리어드는 HIV/AIDS 예방요법으로 쓰이는 트루바다를 홍보하기 위해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문을 두드리며 거리를 좁히고 있다. 특히 길리어드 코리아는 이번 2022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 스폰서십 파트너로 참여하며 행진을 이끄는 트럭을 점하기도 했다.

다른 행사들보다도 행진 차량을 점하는 상황은 오랜 시간 자신의 장소를 박탈당하고 상실한 이들이 거리를 점거하며 착취와 차별에 반대해온 행진의 의의를 거스르는 것이기도 했다. 더구나 특허권을 독점하는 초국적 제약회사는 높은 약가를 유지하면서 성원의 건강권보다 이윤을 앞세운다는 점에 다른 기업들과 이윤추구의 성격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길리어드가 개발한 코로나19 치료제 람데시비르의 경우 고액의 약가를 유지하면서 이를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일부 선진국들만 약을 구입한다. 이에 가난한 나라들의 시민사회는 길리어드를 비롯한 초국적 제약회사의 행보를 비판해왔다. 일련의 맥락을 고려하며 이번 소식에 한국의 성소수자와 HIV/AIDS운동 단체들은 문제를 제기했다.1 현재 길리어드는 에이즈 예방요법으로 쓰이는 트루바다 프로모션을 수시로 진행하고 성소수자와 HIV/AIDS 커뮤니티에 후원과 홍보의 폭을 넓힌다. 하지만 이것을, 약가를 낮추지 않으며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폭리와 이익을 취하는 기업의 호의를 비판 없이 받아주고 그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 명분으로 삼을 수 있는가. 물론 문제의 근간에는 사회적 자원이 빈약한 시민사회운동과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 사회적 건강과 관용의 문제가 기업의 이해관계와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다.

+5. 근래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편성, 유인식 연출, 문지원 극본)는 화제만큼이나 많은 이슈를 뿌렸다. 드라마를 통해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와 함께 사는 일상을 어렵지 않게 학습하리라는 기대 저편에 허구로서 드라마와 현실의 자폐성 장애 당사자의 상황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비교하는 콘텐츠가 연이어 등장하기도 했다. 개중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그린 만평이 잠시 화제가 되었다. 7월 26일 전장연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다른 반응’이라는 제목의 2컷 만평은 ‘우영우’를 둘러싼 세간의 장애인 캐릭터를 향한 관대한 태도와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지하철 타기 선전전’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이중성을 지적한다. 다소 비약을 감수하고 배치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화면 속 천재 장애인과 출근길을 막아서는 장애인을 거칠게 구분한다는 점에 많은 호응과 논란을 유발했다. 하지만 잠시 만평을 대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을 꺼낼 수 있다. 공존을 말할 때, 공존의 대상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수용과 거절의 기준은 무엇인가. 대상이 되고 판단의 주체가 되는 기준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관용은 당신이 나의 삶에 개입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결핍을 전시하는 ‘착한 대상’으로 남을 때 가능한 것일까. 나는 드라마가 매력 있고 능력 있는 장애 캐릭터를 로맨스의 도구로 동원함으로써 감상의 거리를 좁히고 자폐성 장애인에게 선의를 갖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위계가 갖는 부채감을 면죄할 구실을 준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허구에 바탕한 이야기일지라도 보기에 따라 엘리트 자폐 장애인의 이야기와 지하철을 점거하는 장애인들의 삶은 다종다양한 사회 이야기로 균질화하여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독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례가 어째서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질문은 이렇게도 던질 수 있다. 둘을 차별적으로 감응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제는 무엇인가. 나는 여기에 ‘당신을 지지한다’는 아름다운 문장의 함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소수자를 지지하는 태도가 지나치기 쉬운 함정은 지지의 대상이 상상적 프레임에 구성된 이들, 사회에 순응하고,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외부에서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는 이들로 포착되기 쉽다는 점이다. 더불어 타인의 삶을 지지하는 이들이 가진 자원이 많거나 정치적 힘이 있을 때, 소수자는 예기치 않게 소비력이 있는 이들과 빈곤한 이들로, 장애가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로, 착하고 유능한 타자와 그렇지 않은 이들로, 문란하고 손상에 취약한 이들과 올바름을 수행하는 이들로, 내부 편 가르기에 휘말린다. 이렇듯 선의와 관용은 때로 소수자를 지지하지만 지지함으로써 다른 소수자 집단을 비가시화한다.

2. 사건의 좌대로서 예술

위의 관점을 예술로 옮겨 다음의 질문을 이어가 보자. 지지의 태도가 미적 대상으로 재현될 때, 현장의 역동이 그대로 재현과 전시의 양태로 박제되는 것은 아닌가. 사건과 존재를 재현하는 예술은 재현의 거리와 더불어 복제와 가공, 시각적 스펙터클의 여건을 확보한다.2

많은 예술가들은 사회 이슈를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예술의 언어를 동원하고 시각예술의 형식을 갱신해왔다. 더러 미술관은 규율과 관습을 깨는 재현적 투쟁의 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같은 전시 안에서도 검열과 그에 저항하는 행동들이 쟁투를 벌이는 재현적 정치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가치의 지평을 열어내는 것이 미술관의 사명이라 관철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비평은 지금 미술관이 투쟁의 완충지대로서 사건의 강도와 무게를 중화하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한 질문을 여전히 유효하게 취급하고 던져야 한다. 비평은 무엇을 예술로 소환하고 있는가를 묻는 데 나아가 이를 관찰하고 표현하는 주체가 어떻게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배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양식과 방법론으로 대상을 재현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관용적 재현의 대표적인 갈래는 타인을 애도의 대상으로 소구 하거나 예술적 가치로 상찬 하는 것일 터. 국내에 소개되어온 성소수자 작가들의 작업은 애도의 감수성으로 접근되는 경우가 많았다. 2020년 국제갤러리에서 진행한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전시 《MORE LIFE》의 경우 퀴어 섹슈얼리티와 에이즈는 고전의 가치로 도약시키는 위한 일종의 애도 장치이자 구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는 2022년 리만 머핀 갤러리에서 진행한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의 국내 첫 개인전 《나의 해안에서 당신의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에도 발견할 수 있는 태도였다. 미술관에 등장하면 이들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 장애와 질병 여부 등은 신중하게 다뤄진다. 퀴어로 살아온 이들의 삶을 조심스럽고 사려 깊게 설명하는 접근 뒤에는 이내 형식 분석을 바탕으로 고전과 정전의 의미를 불어넣고, 가치를 높이는 상찬이 이어진다. 문제는 작품이 걸쳐있는 역사적 맥락으로서 퀴어적 친밀함과 성적 실천들이 미적 대상과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소환되는 배경으로 최소화되는 점이다. 이는 작품이 위치하는 역사적 맥락의 역동을 이해할 수 있는 접근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현재 작품을 전시하는 지역 커뮤니티와의 연결성과 해석의 확장을 가로막으며 외려 배타적 울타리로서의 미술의 벽을 실감하게 만든다.

하위문화의 습속을 존중하면서도 그로부터 보편적인 가치를 갱신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미술관의 의의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 물어야 하는 것은 보편적인 가치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누락되고 착색되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이를테면 작품과 작가의 시대적 맥락에 집중하면서 미술관 바깥의 현실은 배제하거나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2021년 변희수 하사를 비롯한 트랜스젠더 죽음이 이슈로 떠오르던 당시 정은영 작가는 《아트 인 컬처》 2021년 5월호에 메이플소프 전시 리뷰 「로버트 메이플소프: 위대한 퀴어 예술가」에서 전시 당시 한국사회의 성소수자 죽음에 대해서는 감응은커녕 언급도 하지 않는 미술계의 냉담함을, 그저 메이플소프를 고전의 입지로 올리고 작품 자체의 가치를 소비하는 선별적 태도를 성토한 바 있다. 미술관은 주류적 범주에 소수자의 이름을 넣는 것 너머 지지와 연대를 어떤 방식으로 공감하고 표시하는가. 관용을 전시하는 행위 자체가 소재의 맥락을 감추고 기관과 주체의 선의를 부각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닌가. 이는 민주적 재현에 대한 미술관의 부채를 완충시키면서 사회에 면죄부를 주는 구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위의 관점에서 퀴어 예술은 국공립 미술관과 주요 갤러리의 기존 체제에 개입하고 체제에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성소수자의 섹션으로 나뉘고 할당제처럼 기획마다 성소수자 작가를 섭외하며 구색을 맞추는데 그치고 있지는 않은가. 당사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또한 간단한 선택은 아닐 것이므로 그 노력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들을 전체의 일부로 호명하고 주류 미술의 소재 또는 기여도로 편입시키는 방식은 결국 위계의 구조를 비판하거나 어떠한 변화를 시도하기보다 기존 질서 위에 새로운 성원을 추가하는 것으로 만족하기 쉽다. 이는 또한 퀴어 미술을 성소수자 작가들의 미술로 분과 취급 함으로써 일종의 종족화를 재생산한다. 사회적 소수자의 호출은 미술사회의 위계와 문법을 지키면서도 관용을 표시할 수 있는 보수적인 효과로 남기 마련인데, 이러한 태도는 퀴어 재현의 동시대적 역동에 스테레오 타입을 개입시켜 진부하게 취급하고 한물간 것으로, 이미 누군가가 시도했던 것으로 평가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틀 짓기는 동시대 퀴어 예술이 어떤 비평적 재현의 갱신을 시도했는가를 물을 기회를 박탈할 뿐 아니라, 동시대의 미술 형식이 어떻게 퀴어적 관점으로 다시 거슬러 독해할 수 있는가의 역동적 비평의 확장 가능성까지도 일축한다.

소비 주체가 소비력의 유무로 발언의 명분을 얻을 수 있는 자유 시장의 한편에는 소수자적 위치 자체가 예술의 가치로 포장되며 바깥의 맥락과 분리되는 상황이 있다. 또는 공익적이고 인권기반의 관점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자리를 배당받을 때 이들은 피해자로서, 무고한 희생자로서, 애도되지 못했지만 늦게라도 애도되어야 하는 이로서, 혹은 섹션화된 퀴어 영역의 당사자라는 명함을 부여받는다. 희생된 당사자의 빈자리만 남거나 주변적인 토큰만 부여하는 것이 전시의 경향으로 이미 자리 잡은 것은 아닌가. 판에 박힌 재현의 프레임은 외려 사회적 소수자의 재현과 정치적 참여가 이미 진부해진 것처럼 치부하도록 하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3

하여 지금 가져야 하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주어진 발화자의 자리 너머 그 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을 수 있는 비판적 태도이다. 이는 기존 질서 안에 부분적인 자리를 내어준 데 그치지 않았는지, 그로써 변화를 최소화하고 재현적 위계를 보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견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대의 보편적 가치 너머 우리가 어떻게 개입하고 불화하며 경합하고 교섭하는가를 살피는 시도는, 연대를 표시하는 당신의 위계가 이미 주류 질서를 체화하고 또한 실천하고 있음을, 더불어 당신의 지지를 지탱하는 견고한 전제가 결국 관용을 취하지만 배경에 지배적 규범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환기한다. 이어지는 논의에서는 분석을 심화하며 이다은 작가를 중심으로 몇몇 작가들이 최근 작업에 다루는 난민의 재현을 비판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3. 재현과 재현 불가능성의 난관들

이다은 작가는 개인전 《안개, 상자, 입》(2022)에서 M의 CCTV 이미지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다시피 했던 M은 수차례 부당한 처우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난동을 부린다는 이유로 두 손을 다리와 결박하여 등 뒤로 묶는 ‘새우 꺾기’를 당했다. 보호를 위해 취한 조치라고 하지만 머리에 헬멧을 씌우고 손발이 결박된 모습은 누가 봐도 폭력적인 통제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착안한 전시는 그간 난민에 관심을 가지며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작업해온 궤적의 연장이기도 하다.

작가는 미디어 자료와 기록들을 아카이빙하고 M과 인터뷰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남기는가 하면,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찾아가고 기자회견에 참여한다. 하지만 편지는 그대로 작가 손에 있고, 난민 당사자는 만나지 못했다. 대신 작가는 시설 기록영상과 3D 스캐닝 이미지를 연결한다. 온전히 연결되지 않은 파편의 이미지들은 곧 라이더 프로그램으로 기록하고 들려오는 음성을 녹음한다. 라이더의 산출물은 조금 의미심장한데, 광선을 사방으로 방출하고 반사해서 되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입체 공간을 만드는 프로세스는 공간의 윤곽을 보이지만 공허한 장소성을, 누군가 있었지만 이제는 때늦은 관찰자로 남게 된 이가 증언하는 좁힐 수 없는 거리이자 간격으로서 공간을 시각화한다. 그밖에도 전시는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포즈와 안무를 구성한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그 영상을 상영하는가 하면, 퍼포먼스를 구성하기 위한 회의 기록을 전시한다. 같은 전시공간에 작가는 부산에 거주하는 베트남 난민의 이동장소를 기록한 지도를 펼치고, 아카이브 목록과 영상을 배치한다. 연관 없는 난민 당사자의 동선을 연결한 것은 아마도 거주 자격을 얻고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정주하지 못하고 이동해야만 하는 환경을 연결하고 싶었던 의도가 아니었을지 가늠해본다. 시설로부터 멀찌감치 기록한 음성은 전시장 벽에 부착한 진동 스피커에 연결해 관객들이 벽에 귀를 대야 들을 수 있다.

말인즉 전시는 사건 자체에 대해, 시설 내부가 어떻게 운영되고 관리되는가에 대해 정보 값을 보여주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전시는 그가 다다르고 접촉하고자 했던 대상을 재현할 수 없고 보여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찾을 수 없었고 찾지 못했으며 어쩌면 구태여 찾을 마음이 없을지도 몰랐을 사실 자체를 전시는 음화된 정보로 치환한다.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반-르포로서 예술이고, 실패의 아카이빙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난민들이 겪은 경험보다 작가로서 난민들에게 접선을 시도했음에 의의를 두고 실패의 기록에 주안점을 둔 것일까. 조우를 시도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이미 알고 예정된 빈칸 자체를 의도한 것은 아닌가 말이다.

난민을 재현하는 일의 곤란함은 근래 홍순명 작가가 바다를 건너는 시리아 난민들을 그려 넣은 회화작업을 떠오르게 한다. 눈이 겨우 닿을 흐릿하고 뿌연 형상으로 망망대해에 고개만 내민 이들의 표정을 실루엣만 그려 넣은 장면은, 자신이 출발한 뭍으로 돌아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어 목숨을 걸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절박함과 처절함을 화폭 위 무력한 작가의 시선으로 치환하여 관객에게 전한다.

난민의 자리를 비유적으로 재현하는 또 다른 시도로 벨기에 출신 멕시코 작가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의 〈지브롤터 항해일지〉(2008)의 접근을 참조할 수 있다.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에 놓인 지브롤터 해협은 목숨을 담보한 국경의 종단선으로 많은 수가 가라앉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자신들을 박해하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난민들의 길이다. 프란시스 알리스는 난민의 길을 좇고 이를 작업으로 남겼는데, 예의 2채널 영상은 아이들이 해협 위에 종이배를 연달아 띄우며 절박한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바다 위에 사라진 이름들을 애도하고 연결을 상상하도록 한다. 몸으로 파도를 맞으며 이어내는 종이배의 총길이는 해협의 거리에 비하면 터무니없지만, 마음은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삐딱한 의문은 드리운다. 어린이와 종이배로 바다를 잇는 장면은 예술적 상상력으로 현실의 무게를 탈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식민주의적 수탈과 공존의 책임에 면죄부로 작동하지는 않는가 말이다. 수면에 드리우다 바다에 잠기기를 반복하는 카메라는 이러한 긴장을 최대한 놓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관점에서 이다은 작가는 절박한 대상의 처지로부터 접근 자체를 제한받고 통제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공유하는 모습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림자만 남은 타인의 실루엣을 직접 남기보다 그를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가 머물던 공간과 주변적인 자료들을 알레고리 삼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친절하게 사건을 파헤쳐 설명하기보다 언저리의 기록을 담는다. 사건으로부터 신체의 움직임을 분리해 퍼포먼스를 가공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설 내 소음을 들려준다. 이러한 접근은 애초에 시설에 감금된 난민을 닿을 수 없는 이로, ‘타자’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주체의 무력함을 가까이서 감각하도록 한다. 그것은 수감되고 학대당하는 난민을 시각적 타자로 그려내는 관습에 대응하는 비판적인 자세일 수 있지만, 빈칸의 지표들로 소재를 구성하는 방식은 난민의 구체적인 사정을 살피기보다 그를 결박된 몸 이미지로, 몸짓으로, 정체 모를 음성으로 전제하며 실존을 탈취하는 것이기도 하다(여기에는 ‘냄새를 지운다’와 ‘빼앗아 취한다’는 중의적 의미를 모두 허용할 수 있다).

실패의 기록으로부터, 더불어 재현이 사건에 닿을 수 없는 불가능성으로부터 작가는 무엇을 보이고자 했을까. 당사자를 담지 않은 것이 타자를 포박하지 않기 위한 재현의 윤리를 고려하여 취한 태도라면, 비평은 그 자리에 무엇이 채워지고 있는가를 읽어야 한다. 유령으로 붙박이가 된 타자의 빈자리에 외려 텅 빈 주체의 제스처가 각인된 것은 아닌가. 결과적으로 접촉에 실패하지만 실패의 궤적 자체를 남기는 전시는 일련의 실패를 반성하는 주체의 한계와 빈곤함을 부각하지 않는가.

이다은 작가는 2018년 영상작업 〈이미지 헌팅〉에서 본인이 불법 촬영과 딥페이크, 유포를 당한 피해 경험을 시작으로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포스트 다큐멘터리와 무빙 이미지의 형식으로 담은 바 있다. 경찰서에 신고하고 방송국에서 그를 찾아 인터뷰하고 스스로 딥페이크 프로그램을 파헤치고 유통경로를 거슬러 좇는 과정은, 피해자로서 사건을 처절하리만치 집요하게 추적한 기록의 산물이다. 하지만 해결은 오리무중이고 어디까지 유포되었을지 가늠조차 어려운 와중에 사건을 다루는 기관과 미디어는 어디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를 인터뷰한 질문들은 기어이 그를 피해자 프레임에 담는다. 여성을 유통 가능한 피상적 이미지로 수렴시키는 시스템을 추적하는 과정은 벽에 부딪히고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이미지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며 탈주를 꾀하는 작업의 충동을 기록한다. 무력한 추적 활동을 예술을 빌어 기록하고 전시하는 방식은, 무력한 실패로 보일 수 있지만 여성을 성적 기호로 수렴시키고 증발하는 예의 프로그램들을 스스로 가지고 놀 듯 운용함으로써 재현의 주도권을 확보한다. 그 과정이 성과 없는 무용함으로 남을지라도 예술이라는 또 다른 무용한 형식으로 체화한다는 점에 무색하게 남지만은 않으리라는 기대를 남긴 셈이다.

인상적인 점은 영상 말미 ‘불법 촬영 유죄’와 ‘가해자 처벌’을 외치는 혜화역 시위를 저만치 두고 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로 담는 구도였다. 여기서 그는 집단적 운동과도 거리를 두는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태도가 고립인지 독립인지 온전하게 분간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는 반성적 주체로서 자기 공간을 확보하겠다고 포석을 둔다는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페대기’라는 페미니즘 이론연구 콜렉티브와 함께 퍼포먼스 〈환영받지 못한 자〉를 선보인다. 트랜스젠더 여성과 장애인 성노동자, 이주여성, 예멘 난민을 한국적 상황에 대입하는 퍼포먼스는, 친절하게 용어를 설명하고 조명과 무대를 활용하며 상황을 안내하며 공간적 미장센으로 환경을 시각화하기도 한다. 특히 이주여성을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그는 거시적인 역사의 프레임으로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인터뷰이는 답을 회피한다. 종국에는 이해에 실패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터뷰로, 당신의 사정에 닿을 수 없고 마음을 열기는커녕 이름조차 묻지 않은 채 헤어져야 하는 상황으로 갈무리한다. 물론 의도한 시나리오일 것이고, 그 의도란 피해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타자를 향한 일방적 지지와 관용의 기만을 무대로 상연하는 것에 근접해 보인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호의를 수행하지만, 작가는 그래도 자신이 무능하고 편파적인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스스로 반성적인 주체임을 자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행착오로부터 작가는 다음의 스텝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M을 소재로 삼은 전시에서 작가는 외려 실패를 전면화하며 그 안에 연대의 열망을 재차 표출하는 모습을 취한다. 실패를 이미 전제하는 접근은 애초 당사자와의 접촉을 지양하기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작업 초기 자신이 겪은 사건을 추적하는 시도는 페미니즘 리부팅 이후 기존 페미니즘 담론이 동시대 성원들에 의해 호출되고 새롭게 의미부여되며 확장해온 궤적이 있어 분석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었을지 모른다. 피해당사자로서 스스로를 재현하고 대상화하는데 과감해 보였던 것은 작가가 상황을 주도하며 맥락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배경이 있다. 그에 반해 난민을 소재로 삼는 일련의 작업들에서 사건은 보이지만 맥락을 볼 수 없던 것은 그만큼 난민에 대한 인지가 사건과 가십의 수준으로 남아 있고, 당연한 수순으로 난민에 대한 성원의 태도가 적대와 회피에 가까운 취약한 여건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그의 의도적인 실패(라고 쓰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작업을 ‘부단한 실패의 실천’으로, ‘부단한 실패가 돌출시킨 연대의 구멍’이라 읽고 싶다)의 근거와 책임을 온전히 작가에게 물을 수만은 없다. 근본적으로는 난민에 대해 감수성과 인프라가 희박한 한국사회의 구멍이 가장 크다.

그럼에도 그가 정말 피해당사자를 만나려 했다면 이미 M을 만나 조력하고 대응하고 있는 활동단체와 활동가/변호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관련하여 성명과 인터뷰들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시에는 그간 작가가 난민과 관련된 뉴스클리핑을 하고 이미지 리서치를 한 결과물이 가공되어 재생되는데, 아카이빙 기록으로 재생되는 장면들이 이번 사건과 어떤 연결성을 갖는지, 드러난 사실보다 정확히 M과 부산 베트남 난민을 비롯한 이들과 어떤 호흡을 같이하는지는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개인으로서 M의 실존을 만나기 위해 다른 갈래의 시도들을 하지 않은 의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어떻게 외부에 자신을 지지하고 지원할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호소하고 이슈를 만들었는지 분투하는 시도가 적어도 전시에는 빈칸으로 남는다. 전시장에서 당사자는 보이지 않고 정체 모를 음성과 그로부터 취했을 시각적 흔적과 몸짓만이 떠오를 뿐이다. 난민을 온전히 재현적 대상으로 포착하고 통제하는 것이 문제적이라는 것에 동감하지만, 그의 존재적 위상을 유령으로, 유령 이미지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권태현은 그의 전시를 중심으로 남긴 비평문 「반영, 반사, 반투명」(2021)4에서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방법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를 정치로 만드는 것’이라 쓰며 ‘결코 타자를 일방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야기를 갈음할 수 있을까. 그의 문장 뒤에 따라야 했던 내용은 타자를 일방적으로 담을 수 없는 이미지의 자리에 무엇이 전시되고 있는지, 그렇게 전시된 이미지가 누구에 의해 배치된 것인지, 예의 이미지가 전면화하는 것은 무엇이며, 전면화된 이미지는 무엇을 감추며 시각화된 것인지에 관한 다음 차례의 물음은 아니었을까. 이미지는 제작하고 유통하는 환경과 이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주체들의 수행 없이 그 자체만으로 정치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 시행착오와 의도적인 실패를 구분하지 않는 문장은 ‘이미지의 정치’에 대한 막연한 이상향을 남길뿐이다.

현장 리서치 기반의 예술작가든 학자든 그들의 비판적 관점과 노고가 담긴 작품과 연구는 어느 정도는 독립적인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당사자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를 어떻게 대상화하거나 주체성을 부여하는지, 그가 사회 성원의 어떤 권리를 확보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그가 제한된 상황에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누락하면 사건을 소재 삼지만 사건을 압도하며 자기 작업만을 부각하여 전시하는 빈곤함을 남긴다. 나는 그것이 타인이 독립적 주체로 서기 어려운 곤란함과 취약함을 외려 그를 유령적 존재로 재현할 알리바이로 오독하는 것은 아닌지, 그에 연대를 표시하고 공존을 이야기하는 가능성을 기각하며, 실패의 재현을 미학적 관점으로만 읽을 때 안게 될 숙명은 아닌가를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개, 상자, 입》이 전면화하는 공백의 대극에는 난민을 대상으로 삼으며 난민과의 우정을 실천하는 제람(강영훈)의 태도를 떠올릴 수 있다. 그가 작업한 그림책 『암란의 버스/야스민의 나라』(2020)는 친절하게 난민이 본국에서 어떤 박해를 받아 탈출하게 되었고, 그가 당도한 한국에서는 어떻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가를 설명한다. 성실하고 사려 깊게 재현하는 내용의 면면을 고려할 때, 작가가 재현의 장치로서 그림책을 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난민의 사연을 청취하고 채록하여 가공하는 작업은 난민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는데 문턱을 최대한 낮춘다. 하지만 예의 ‘착한 재현’은 외려 난민을 ‘수용 가능한 이웃’이라는 프레임으로 대상화함으로써 난민과 정주민 사이의 위계를 오히려 옹호하며 반복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웃의 이름을 ‘난민’으로 새겨 넣게 만드는 또 다른 함정을 설치하고 있지는 않은가.

최근 그는 인천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이집트 난민 아나스의 바람(장미가 가득한 꽃집을 열고 싶다고 했다)을 바탕으로 같은 지역의 복합문화공간 CoSMo40에서 ‘장미다방’을 나흘 동안 진행했다. 이는 난민의 경험을 듣는 자리 너머 난민을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주체로 대하는 점에 관계의 보폭을 넓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난민 당사자의 참여를 전면화하는 시도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도 안전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이들로 제한하고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물론 제람이 난민과의 협업 범위를 넓히는 시도는 그들에게 사회적 공존과 지지의 감각을 넓히는 모델을 만들어낸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프로젝트가 상정하는 공존과 안전의 가치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비판적 질문이 따른다. 보폭을 넓히면서도 협업이 불가능한 이들은 어떻게 주도적으로 자신을 재현할 수 있을까. 그 형상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저마다 난민을 접근하는 상반된 관점과 접근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근간에 난민을 침입자로 의심하고 편견을 씌우며 검열의 대상으로, 사건의 희생자이자 범법자로 낙인찍는 프레임에 저항하고 있다는 공통된 진심은 흔들지 못할 것이다. 다만 ‘재현 불가능성’과 ‘환대’의 태도는 짐짓 이상화된 개념으로 가두며 조우 이후 열어갈 구체적 시간을, 재현적 실천을 규제하고 가두기 쉽다. 그것이 환대와 재현 불가능성 사이 예술이 봉착해온 난관이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4. 관용과 연민의 틈새로부터

그럼에도 예술은, 어쩌면 공존의 답을 내리고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당신이 타인에게 다다를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하지만 당신을 일방적으로 대상화하면서 편의적으로 거리를 좁히지 않겠다는, 무력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불가능과 불화의 거리를 전시하는 기예가 아닐까. 당신의 출몰에 나는 당신이 이웃임을 선언하고 호명하면서 당신의 서사를 쉽게 가공할 수 있는 것으로 의미화하고 의미로 삼킨다. 나는 과도하게 알고 있거나 과도하게 무지하며 이 둘은 다르지 않다.

타인을 소재 삼는 태도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당신이 필요할 수밖에 없음을, 해독할 수 없는 당신을 수탈하고 착취하며 더러는 부정하고 배제함으로써 나를 설명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주체와 타자의 연대는 매끈하게 봉합되는 무엇이 아니며 여기에는 끝없는 불화와 협상, 긴장을 전제하고 있음을 상정한다.

이는 곧 내가 선 자리가 끊임없는 제도적, 문화적 수행으로 만들어진 위계에 있음을 말한다. 비평은 사회가 제시하는 공존의 이상적 모델은 타인에게 동의를 강제하고 타자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닌가를 계속해서 묻는다. 이는 타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바라보는 것 너머 이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어떻게 주류 질서에 편입되거나 어긋나 있는가를 거슬러 읽을 것을 요청하는 바, 그것은 나의 안정이 어떤 균열과 틈새를 봉합하고 일축하며 안정을 취하는가를 살피도록 한다.

불안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것을 착취하고 희생시키거나 수탈과 소비가 가능한 대상으로 동원한다고 할 때, 예술은 이를 드러내고 질서의 중핵에 불안과 불편의 감수성을 숨기지 않고 그동안 숨겨온 궤적을 드러내는 작업임을 표명한다. 타인에게 자리를 할당해주는 것 너머 나의 자리가 무엇을 배제하며 만들어져 온 것인가를 살피는 작업을, 당신에 대한 관용 너머 관용을 행하는 나의 자리 역시 정상성이라는 기준 위에 인정된 것임을 확인하는 것, 결국 퀴어적 수행이란 당신뿐 아니라 나의 견고한 경계까지도 의심할 수 있음을, 연대가 관용과 연민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갈음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1. 자세한 내용은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가 7월 7일 발행한 공동논평 ‘길리어드 사이언스 코리아의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진 차량 참여에 유감을 표하며―초국적 제약회사의 후원을 퀴어커뮤니티가 경계해야 하는 이유’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notacrime-hiv.org/?p=1606

  2. 이는 5년 전 필자가 투쟁의 역동을 시각예술의 언어로 재현하는 콜렉티브 작가들을 다루는 「오늘의 예술 콜렉티브- 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보지만, 얼마 동안 빛이 있는 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에서도 날을 세웠지만 판단을 유예할 수밖에 없던 지점이기도 했다. 이 글은 아래 링크에서 파일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semacoral.org/media/pages/cabinet/10-namung-susangjak/646dc777c3-1629434794/3-2.pdf

  3. 하나 당부할 점은 그것이 단지 성소수자에게 한정된 문제는 아니며 예술 전반 재현적 규범과 형상의 프레임을 갱신하고 돌파하는 시도들, 확장된 해석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재현의 시도들을 가로막는 기제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현재 전라북도 완주에서 활동하는 박선 작가는 제주도 4‧3항쟁을 경험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도민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초상을 그린 작업을 한 바 있다. 《동백꽃 피다》(쇼앤텔, 2019)와 《섬의 얼굴- 4·3 남겨진 자의 초상》(소네마리, 2019)에서 색색이 알록달록한 수채화를 보고 초상에 참여한 이들과 제주도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온 예술가들은 4·3의 무게에 묶이지 않고 새로운 표현을 중심으로 형상을 출몰시켰다는 감상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주민과 수도권의 식자들은 작가 당신이 4.3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평을 했다고 한다. 특히 전시를 지원한 기관에서는 ‘4·3항쟁’을 전시 홍보와 전시장 곳곳에 강조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사건의 공인된 역사적 의의가 지배하는 무게와, 사건으로부터 생존한 이들이 일궈온 개인적인 삶 사이에 긴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프레임에 고정된 사건의 의미에 무게를 두는 것은 이웃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지금을 고립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는 여전히 과거로부터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누구의 오늘을 잠식하는가 하는 비평적 관점을 되새기도록 한다. 박선 작가의 해당 프로젝트는 작가 개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parkxun.com/camellia-bloom.  

  4. 권태현의 글은 이다은 작가의 작업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s://ee-da.com/2022/08/0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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