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세마 코랄의 ‘연결’ 주제어와 SeMA 의제를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생겨난, 시각문화/예술과 미술관의 (동)시대적 과제에 관해 논하는 지식을 선보입니다.

글과 웹 프로젝트를 함께 수록해서 세마 코랄이 지향하고 생산하는 지식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목록 보기’는 수록된 글과 웹프로젝트의 제목을 부호-숫자-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공개된 날짜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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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의 시간

    2021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디어 나환》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서울 토탈미술관 지하 전시장에서 열렸다. 그해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가 전나환을 추모하기 위한 전시이자, 작가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작업한 《범람하고, 확장하는 Q》 시리즈에 속한 회화 열한 점을 처음으로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였다. 각 그림에는 인물 서너 명의 왼쪽 옆얼굴이 만화 캐릭터를 연상케 하는 필치의 검은색 굵은 선으로 그려져 있고, 색색의 컨페티 조각들을 닮은 자유분방한 붓질이 그 위를 뒤덮었다. 정적인 자세로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은 무표정하거나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작가는 2018년부터 청소년들,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회원들, 인권활동가, 소설가, 변호사, 드랙 퍼포머, 배우, 유튜버, 클럽 운영자, 디자이너, 미술작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성소수자들과 앨라이(ally)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측면 얼굴을 그렸다.

  • 〈진격하는 저급들〉 1장: 슬픈 퀴어 초상

    ‘셀피 페미니즘(selfie-feminism)’은 지난 10여 년간 페미니즘─행동주의의 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통상 ‘셀카’로 번역될 수 있는 ‘셀피’는 휴대용 전화기의 보급과 함께 널리 퍼진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자화상 또는 초상 사진)의 한 종류로, 주로 여성들이 찍는다는 편견 또는 사실 때문에 진지하지 못한 사진의 하위 장르로 취급되어 왔다. 1992년생의 젊은 예술가이자 제4세대 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 성장한 오드리 월런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전시장으로 사용한다. 그는 미술사적으로는 권위있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널리 비판 받아온 익숙한 이미지들을 차용해, 자기 자신을 주인공 삼는 셀피를 찍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의 셀피 시리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업 중 하나는, 통증관리센터나 병원을 배경으로 환자용 의복이나 장치를 착용한 채 패션지 스타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2장: 단식 광대는 왜 춤추는가

    깡마른 채로 웃고 달리고 춤추는 아서 플렉의 몸은 〈조커〉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집요하게 묘사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감히 추측하건대 〈조커〉를 즐길 수 없었던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표현하는 바로 그 몸의 아름다움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서 플렉의 기이할 정도로 마른 몸은 그 자체로 그를 관통했던 정신적⋅신체적 학대와 고된 노동의 시간이 축적된 증거물이며, 그가 가진 “부정적인 생각들”만큼이나 그의 유일한 자산이다. 그의 몸은 먹지 않음으로써 말없이 배신하고, 저항한다. 무엇에 대해서? 어머니와 함께하는 식사가 강제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그를 상처 입히는 동료들과의 친목에 대해서,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일할 수 있는 몸의 규격에 대해서, 무엇보다 그의 인간됨을 보장하는, 섭취와 배설이라는 유기체적 절차에 대해서.

  • 〈진격하는 저급들〉 3장: 뉴플 스케치

    부치들 팸이든 복장도착자든 이곳에 모인 몸들은 서로의 질량에 대응해 서로에게 감응하고 충돌한다. 잠재적으로 당신을 원하거나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그러므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에로틱한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당신은 자신의 몸을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감각한다. 이제 내 몸은 단순히 내 것만은 아니다. 내 몸은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몸, 다른 몸들과 관계하는 몸, 그러므로 다른 몸들에게 다른 쾌락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몸이다. 이곳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이 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낯선 이들과 어울리기, 무엇보다 멈추지 말고 춤추기. 이곳 바깥의 논리로는 온전히 포착될 수 없는 모호한 친밀성의 제스처를 발명하고 마주치는 몸들 사이의 힘을 증폭하기. 그러므로 이 몸은 매개체다. 이 몸은 사용되기 위해 여기 있다.

  • 〈진격하는 저급들〉 4장: 사이버펑크 혹은 살아남기의 장르

    그러니까 이 뒤로 이어질 이야기는 항상 답이 없는 상황적 비극일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 대한 나의 건설적인 피드백이다. 나는 〈엣지러너〉의 결말을 본 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데이비드를 살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데이비드가 그의 연인인 루시와 함께 달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답은 사이버웨어의 디자인에 있었다. 알다시피 인간성의 ‘엣지(경계)’를 향해 내달리는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를 범주화하는 것은 그것의 주제만큼이나 특정한 미적 스타일이다. 어둡고, 축축하고, 암울한 도시의 전망 속 뿌옇게 빛나는 네온사인, 미래적인 인상을 주는 가죽⋅라텍스⋅금속 재질의 의상들, ‘사이버 스페이스’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수한 (고글 모양의) 기기들과 글리치 섞인 홀로그램들이 자아내는 인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5장: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

    이 글은 좋았던 우리의 옛날을 회상하거나 트위터에게 이른 작별을 고하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 지구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목도하고 원래 하려던 말을 잊어버린 종류의 그런 글이다. …아무리 진지하게 싸워도 그것은 끝끝내 ‘사적인 해프닝’에 머무른다. 심지어 그것은 아무런 결론도 대안도 생산해낼 수 없는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의 시간낭비로 치부된다. 물론,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데도 말이다! …지금처럼 트위터를 계속한다면 머리가 망가지고 그것이 주는 쾌락에 구속되어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밤낮으로 해대는 세상에 맞서기 위한 유일한 전략은 오직 지금보다 더 한심하고 쓸모없게 구는 것이다. …헛소리들은 그 어떤 의미나 가치로도 환산될 수 없는 극치의 쓰레기들이며, 우리는 이것으로 망가진 우리의 머리를 통통히 살찌워야 할 것이다.

  • 〈진격하는 저급들〉 6장: 레즈비언 황무지ㅡ비가시성에 대한 노트

    기세 좋게 계획했던 연재 순서에 따르면 〈진격하는 저급들〉의 마지막에 해당할 이 글은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 발표된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경향성을 다뤄야 한다. 물론 나는 이 주제에 강박적인 수준의 관심이 있다. 지난 10년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주제에 관해 쓰고 또 말해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만이 동기는 아니었다. 매번 내게 이 주제, 그러니까 반복하자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큼이나 고생스럽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처럼 느껴졌으니까. 더구나 나만 그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이름의 황무지에 들어가고 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개간 작업을 해왔으며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진격하는 저급들〉 들어가며: ‘젠더 문제’

    이 글은 2021년 SeMA-하나 평론상의 특전으로 2년간 지원받은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진격하는 저급들〉 연재의 서문에 해당한다. 작년 가을 진행한 《저급 이론들의 연합》 라운드테이블에 이어 〈진격하는 저급들〉은 (시각)예술문화 전반에서 포착되는 퀴어 부정성(queer negativity)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둔다. 퀴어 부정성은 1990년 테레사 드 로레티스가 처음 ‘레즈비언&게이 [담론]’의 사이에 위치한 ‘&(and, 그리고)’라는 분리의 표시를 퀴어라는 “공동 전선”을 통해 다시 사유하자고 제안한 이후 “퀴어 이론의 정상화(규범화)” 혹은 ‘탈정치화’라 부를 만한 시점이 도래한 상황에서 다시금 퀴어를 정치적으로 급진화하는 시도에 가깝다.

  • 보이지 않는 것의 지도 그리기로서 회절(diffraction)

    대상을 자기에게로 재흡수 통합하는 것이 반영이라고 한다면, 해러웨이는 반영론에 구멍과 균열을 낼 수 있는 전략으로 회절에 의존한다. 반영이 직진하면서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면, 회절은 겹치고 주름져서 보이지 않는 것의 흔적에 주목한다. 광학에서 회절은 빛이 장애물을 만나면 일부는 직진하지 못하고 에둘러가는 현상을 뜻한다.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는 오래된 논쟁이었지만 현재 빛의 이중성(반영과 회절 모두)을 인정하는 바, 회절은 빛이 파동임을 보여주는 현상 중 하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서, 빛은 어둠에 의해서 존재함에도, 반영론의 인식론적 우월성에 균열을 내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