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저급들〉 4장: 사이버펑크 혹은 살아남기의 장르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작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시리즈 〈사이버펑크: 엣지러너(Cyberpunk: Edgerunners)〉(이하 〈엣지러너〉)는 2020년에 만들어진 게임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스튜디오 트리거(Trigger)가 제작한 작품이다. 10부작으로 완결된 이 애니메이션은 비극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으로서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1인용 비디오 게임인 〈사이버펑크 2077〉은 우리가 현재 ‘사이버펑크적’이라고 할 때 연상할 수 있는 바로 그 장르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일조한 1989년 작 TRPG 게임인 〈사이버펑크 2020(Cyberpunk 2020)〉을 원작으로 두고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발아해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Neuromancer, 1984)』를 정전 삼아 짧은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알려진 사이버펑크는 근 미래의 고도로 발전되고 완전히 민영화된 기술로 인해 파괴되거나, 그것에 적응하거나, 그것으로 이행하는 인간성을 다루는 (문학⋅예술⋅대중 문화의) 한 장르다. 한 오래된 웹사이트에 따르면 적어도 여섯 가지의 특징이 ‘사이버펑크적임’의 정의를 구체화한다. “기술 발전이 인간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인간과 기계의 융합, 사회를 통제하는 기업, 지하 세계에 초점을 맞춘 스토리 전개, 정보에 대한 유비쿼터스한 접근, 사이버펑크한 비주얼과 스타일”1 등등.

대다수가 동의할 사이버펑크의 이러한 특징들은 낙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인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향해 한껏 기울어져 있다. 물론 사이버펑크만이 그처럼 차가운 미래를 예언하는 데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SF 장르에서 지배적인 경향 중 하나가 이러한 미래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만약 사이버펑크를 더 큰 범주인 SF와 구분할 수 있게 만드는 특징, 그것을 여전히 급진적이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기술 발전이 인간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는 하위 주체들의 자율성을 개방하는 가능성으로도 제시한다는 점이다. 사이버펑크에서 기술은 (현실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두 갈래의 길을 내며 가속하는 파괴적인 힘처럼 묘사된다. 두 갈래의 길 중 하나는 지배 계급이 정해놓은 방식대로 기술을 사용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또는 그들에 대항해 기술을 사용하는 길이다. 둘 중 어느 길이 다른 하나에 비해 질적으로 우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 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다른 한쪽 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에서 이 다른 한쪽 길을 상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장르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80년대 반문화, 하위 문화의 기수였던 펑크, 즉 하위 주체다. 이들은 살기 위해, 싸우기 위해, 즐기기 위해 폭력적인 기술의 속도 속에서 분열증을 앓으면서도 악착같이 그들에게 감히 허락되지 않은 다른 한쪽 길을 점유하려 분투한다. 설령 그 결과가 개죽음뿐이라 해도 말이다.

〈엣지러너〉는 살기 위해 신체를 강화하는 기계 부품인 사이버웨어를 장착한 소년 데이비드 마르티네즈(David Martinez)가 바로 그런 개죽음을 당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작품이다. 기본적인 수준의 복지나 치안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생존 역시 보장 받을 수 없는 미국의 한 도시, 나이트시티에 거주하고 있는 데이비드 마르티네즈는 모친의 비참한 죽음 이후 무법자 용병인 엣지러너가 되고자 한다. 엣지러너는 나이트시티에서 기업이나 개인의 의뢰를 받아 무력을 통해 문제가 되는 상황을 해결하는 일종의 프리랜서들로, 이들은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의 보수를 받는다. 엣지러너들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외관상의 특징은 바로 식별 가능한 정체성의 표지인 얼굴을 제외하고 극한까지 개조된 신체다. 이들은 내부 장기부터 뼈와 근육, 팔과 다리, 피부와 손가락에 이르는 신체의 모든 부위를 더 강한 사이버웨어로 교체하기를 원한다. 국가라는 근대적인 통치기구가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거대 기업이 일상생활의 모세혈관까지 촘촘하게 통제하는 〈엣지러너〉의 세계 속에서, 엣지러너와 같은 하위 주체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좋든 싫든 자신을 착취하는 기업의 기술에 의존하거나 혹은 이를 불법적으로 전용해 자신을 개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하 세계의 해커, 중독자, 무법자 용병, 테러리스트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인간성을 구성하는 조건들이란 오히려 이들의 생존을 방해하는 한계로 작용한다. 인간성은 그것을 추구할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역사적 개념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과는 달리 강해지기 위해, 또는 쾌락을 느끼기 위해 유기체 몸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신체를 개조하고 약물을 사용하는 엣지러너들은 인간 미만, 혹은 인간 바깥의 비인간 존재자들과 훨씬 더 가까운 무엇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엣지러너들에게 결코 모욕이 아니다. 왜냐하면 〈엣지러너〉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순수한 유기체적 몸이란 비인간 존재자들의 변형가능하고 대체가능한 몸에 비해 가치도 매력도 없는 일회용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얼른 돈 모아서 크롬으로 바꿔”2).

유기체 몸뿐만 아니라 사이버웨어가 장착된 몸 역시 쓰고 버리는 고철 덩어리이긴 마찬가지다. 〈엣지러너〉의 몇몇 장면에서 ‘넷러너’라고 불리는 해커가 사이버 스페이스에 접속하기 위한 매개체인 현실의 물리적인 몸은 과열을 조심하기 위해 얼음물 속에 넣어두어야만 하는, 거추장스럽게 거대한 단말기처럼 묘사된다. 예컨대 사이버 스페이스에 접속한 넷러너가 현실의 문제로 ‘로그아웃’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동료들이 욕조에 잠긴 그의 몸을 보호 또는 관리하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이러한 장면에서 시체처럼 안치된 현실의 몸은 무력하고 왜소하고 창백한 물건이자 사이버 스페이스 속 자유로운 디지털 몸을 훼방 놓는 글리치(glitch, 시스템의 일시적인 오류)처럼 느껴진다. 무게 없는 디지털 아바타의 몸,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정신적 사념체로서의 몸은 고장나고 망가지고 박살나는 물리적인 몸에 우선해 넷러너의 경험과 지식을 구성한다. 넷러너에게는 현실이 사이버 스페이스에 우선하는 원본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망각한 역사가 축적된, 한계 없는 광활한 아카이브인 사이버 스페이스가 ‘로컬넷’으로 축소된 현실에 우선하는 원본이다. 〈엣지러너〉는 이처럼 인간적인 몸의 자연, 기원, 원본으로서의 지위를 개조된 몸, 강화된 몸, 탈부착이 가능한 몸, 기계와 융합된 인공 몸의 지위와 간단하게 뒤바꾸는 관점을 제시한다. 유한한 진짜보다 무한한 가짜가 언제나 더 낫다. 일견 비인간 혹은 반인간의 도래할 세기를 예견하는 듯한 〈엣지러너〉의 인간적인 ‘모럴(moral, 도덕)’ 없는 세계는 쿨한 사이버펑크의 장르적 스타일과 결합하며 거부하기 어려운 어두운 매력을 발산한다.

여기까지는 뭐, 좋다. 지금까지 기술한 바는 신체 개조에 유독 집착한다는 것만 빼면 〈엣지러너〉 뿐만 아니라 여타의 사이버펑크 장르에 속하는 많은 작품들에게도 해당할만한 코멘트다. 〈엣지러너〉를 진정 흥미로운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도시 빈민 소년인 데이비드 마르티네즈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조건들이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데이비드는 사설 보험 업체에 가입할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 아마도 적절한 때 구조되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모친을 길거리에서 죽어가도록 방치할 수밖에 없다. 빈사 상태의 모친은 (아마도 공립일 병원에서) 가장 저렴한 패키지로 수술을 받았기에 적절한 처치 없이 입원실에 방치되어 며칠 만에 사망한다. 역시나 비용의 문제로 모친의 시신은 빠르게 화장되어 캔 모양의 유골함에 담겨 자판기에서 굴러떨어져 데이비드의 손에 들어온다. 데이비드는 유골함을 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이트시티의 엉망인 이웃들을 지나 월세가 연체되어 출입구가 봉쇄된 집 안으로 익숙한 듯 어떻게든 꾸역꾸역 들어간다. 이 모든 과정은 대단히 속도감 있게 진행되며, 데이비드는 애통해할 틈도 없이 병원비와 월세를 걱정하며 모친의 옷에서 발견된 군용 사이버웨어인 산데비스탄을 팔아치우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모친의 죽음은 나이트시티에서는 물론이고 데이비드에게서도 일상을 무너뜨릴 사건이 못 된다. 일상은 애초에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도박처럼 걸 수밖에 없는 나이트시티의 빈민들에게 죽음은 일상에 이미 부착되어 있는 항시적인 상태일 뿐이다. 또한 삶이란 곧 채무를 갚기 위해 지연된 죽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빈민들에게 어쩌면 일상은 죽음보다 더한 노역의 시간에 불과하다. 현재라는 일상은 언제나 미래의 채권자들에게 저당 잡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없다.

이 같은 ‘미래 없음’의 상태는, 아마도 데이비드와 데이비드의 모친뿐만 아니라 낮이든 밤이든 길거리에서 구토하고 발작하고 자위하는 나이트시티의 가난하고 지저분한 거주자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정서일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연출되는 나이트시티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풍경은 어딘가 아주 잘못되어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만성적인 “반성적 무기력”3의 분위기를 풍긴다. 아무것도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유일한 선택지는 이러한 상시적 위기 상태에 적응하는 것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적 복수와 생계를 위해 산데비스탄을 자신의 몸에 장착한 데이비드의 자발적인 선택은 최악의 상황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느린 자살이자 자폭이기도 하다. 인간이 가진, 사이버웨어에 적응하는 능력의 평균을 상회하는 자질을 가진 데이비드는 극중에서 내내 기세등등하게 자신은 특별하며 결코 다른 엣지러너들과 같은 파국적 운명을 맞지 않으리라고 자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엣지러너〉의 결말에 이르러 데이비드 역시 “어떻게 죽느냐로 기억되는”4 다른 엣지러너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사이버웨어로부터 자아를 잃고 폭주하는 상태인 사이버사이코시스로 변해 죽는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자신의 개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데이비드는 한결같이 죽음을 앞당기는 선택지만을 고른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데이비드의 판단 능력을 아무리 존중한다 하더라도 그를 그런 선택으로 내몬 조건들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어렵다.

이제 우리는 〈엣지러너〉가 제공하는 사이버펑크적인 스타일의 외피로부터 살짝 비켜서서 이 작품을 도시 빈민 소년에 대한 우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는 살기 위해 사이버웨어를 장착하고, 사랑에 빠지고, 위험한 일을 시작하고, 동료들의 죽음을 겪고, 일종의 정서적 무감각 상태에서 높이 날아오르다가 결국 가파르게 추락한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끝장을 내기 위해 최악의 적에게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살기 위한 선택이 곧 삶 자체를 축소하고 소진시키는 선택이기도 할 때, 이러한 선택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살에 가까운 죽음뿐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선택지 속에서 아등바등 대며 분투해봤자 결국 거대 기업에 의해 간접적으로 살해당할 뿐인 하위 주체들의 삶을 묘사한 우화가 속할 장르는 과연 비극적인 드라마인가, 아니면 슬랩스틱 코미디인가? 로렌 벌렌트(Lauren berlant)의 용어를 빌려 시트콤과 비극을 결합한 조어인 “상황적 비극”5으로 부를 만한 〈엣지러너〉는 데이비드라는 도시 빈민 소년을 주인공 삼아 삶의 유일한 목표가 생존이 될 때 주체가 어떻게 닳고 찌그러지는지를 총 10화에 걸쳐 느릿하게 보여준다. ‘살아남기’라는, 끝으로 갈수록 선택지가 점점 졸아드는 협소한 장르의 규칙 속에서 우리는 담담한 표정을 하고 정해진 결말을 향해 걸어가는 데이비드를 결코 멈춰 세울 수 없다.

방금 멈출 수 없다고는 말했지만,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다. 정확히는 내 아이디어를 〈엣지러너〉의 세계에 적용해 보면 어떤 결말이 날지가 궁금하다. 그러니까 이 뒤로 이어질 이야기는 항상 답이 없는 상황적 비극일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 대한 나의 건설적인 피드백이다. 나는 〈엣지러너〉의 결말을 본 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데이비드를 살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데이비드가 그의 연인인 루시와 함께 달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답은 사이버웨어의 디자인에 있었다. 알다시피 인간성의 ‘엣지(경계)’를 향해 내달리는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를 범주화하는 것은 그것의 주제만큼이나 특정한 미적 스타일이다. 요컨대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1995), 〈코드명 J(Johnny Mnemonic)〉(1995), 〈매트릭스(The Matrix)〉(1999)가 보여주는 어둡고, 축축하고, 암울한 도시의 전망 속 뿌옇게 빛나는 네온사인, 미래적인 인상을 주는 가죽⋅라텍스⋅금속 재질의 의상들, ‘사이버 스페이스’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수한 (고글 모양의) 기기들과 글리치 섞인 홀로그램들이 자아내는 인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대개 무표정하고 검은 옷을 입으며 무성적이다. 이들은 우연한 계기로 매끄러운 줄만 알았던 세계의 틈새라는 실재와 마주하고 결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고, 그로부터 도망치지만 결국에는 세계 전체와 싸우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이버펑크의 스타일을 재활용해 최근 5년 동안 개봉한 영화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요컨대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Ghost in the Shell)〉(2017),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2017),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2018), 〈알리타: 배틀 엔젤(Alita: Battle Angel)〉(2019), 〈매트릭스: 리저렉션(The Matrix Resurrections)〉(2021)과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약 20년의 장르 공백기 이후 뜬금없이 쏟아져 나온 대형 블록버스터 사이버펑크 영화들은 이전 세기에 큰 성공을 거둔 원작들을 좀 더 거대하고 화려한 판본으로 재제작한 모사물들로, 별다르거나 새로운 문제의식 없이 진보한 CG 기술을 과시하는 데에 큰 관심을 둔다(〈알리타: 배틀 엔젤〉은 예외다. 이 영화는 충분히 기이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글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Postmodernism and Consumer Society)」를 인용하며 마크 피셔(Mark Fisher)가 논평했듯 “죽은 스타일들을 모방하고 가면을 쓴 채 상상의 박물관에나 있을 스타일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만이 남은 세계”6에서는 아무리 ‘대안적’이고 ‘독립적’이라는 반주류적인 입장을 표방한다 해도 이는 단지 “주류 내부의 스타일, 사실상 바로 그 지배적인 스타일”을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사태로 귀결될 따름이다.7 오늘날 과거의 형식이 자꾸만 현재로 복귀해 마치 영원할 것처럼 반복되는 현상(복고주의)은 영화뿐 아니라 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 발견되는 증상이다.

사이버펑크가 마치 처음인 양 천연덕스럽게 되돌아오는 이런 상황, 그럼으로써 사이버펑크에게 내재되어 있던 펑크로서의 대항적 에너지가 사실상 지배 문화에 완전히 포섭되었음을 시인할 뿐인 이런 상황에서 〈엣지러너〉는 과연 어디쯤 서서 말하는 작품인가? 바늘구멍만큼의 희망도 탈출구도 없이 무조건 필패하도록 운명 지어진 데이비드의 죽음은 물론 나를 포함한 동시대의 ‘데이비드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겠지만, 이러한 결말은 때로 쾌락주의적인 우울로 쉽게 미끄러지는 것만 같다. 요컨대 데이비드의 ‘반성적 무기력’ 상태가 우리에게 옮겨지는 것이다. 내가 〈엣지러너〉의 세계가 그 어떤 변화의 여지없이 닫혀 있으며 애당초 데이비드‘들’을 양산하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실험실이자 무덤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버웨어들의 디자인이 비슷비슷하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다. 사이버웨어들은 (무엇보다 이 애니메이션의 제작사인 스튜디오 트리거의 취향에 따라) 크고 무겁고 투박하다. 무엇보다 (유기체 몸에 대한 무시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인간형을 하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이버웨어가 라이벌 관계에 있는 거대 기업에서 생산되다 보니 그렇겠지만, [극중 인물인 필라(Pilar)를 제외하고] 누구 하나도 자신의 사이버웨어를 커스터마이징(주문 제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토록 사이버펑크적으로 개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도 왜 사이버웨어는 모두 비슷비슷한 디자인을 하고 있는가? 왜 이들의 미적 취향은 그토록 공포스럽게 발전한 기술에 비해서 이토록 심심한가? 결정적으로, 그런 끔찍하게 무거워 보이는 사이버웨어를 입고 있으면 당연히 죽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상상한다. 어느 평행우주의 또 다른 〈엣지러너〉 속 데이비드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디자인의 사이버웨어를 착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우리가 본 적 없는 디자인의 사이버웨어를 착용한 데이비드가 품고 있을 상이한 욕망들은 분명 이번 버전의 〈엣지러너〉와는 또 다른 결말을 보여줄 것이다.

편집: 김깃


  1. SFAM, “What is Cyberpunk?,” CyberPunkReviews, February 19, 2007, https://www.cyberpunkreview.com/what-is-cyberpunk/

  2. 극중 인물인 메인(Maine)이 데이비드에게 하는 말. 

  3. “그러나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무관심이나 냉소주의가 아니라 반성적 무기력(reflexive impotence)의 문제라는 점이다. 이들은 사태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또한 안다. 그런데 이런 ‘앎’, 이런 반성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잇는 상황에 대한 수동적인 관찰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자기 충족적 예언이다.” 마크 피셔, 「반성적 무기력, 안정 지향,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고양: 리시올, 2018), 교보문고 e-book. 

  4. 극중 인물인 루시(Lucy)가 데이비드에게 하는 말. 

  5. “상황적 비극이라는 새로운 혼합 장르는 개인들이 그들의 결점을 계속해서 에피소드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 장르다. 배우고 변화하고 안도하는 건 물론이요 더 나아지는 것은 고사하고 죽음조차 불가능해진 장르, 즉 비극과 상황적 코미디가 결합한 장르이다.” (필자 번역) Lauren Berlant, Cruel Optim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1), 176. 

  6. 마크 피셔,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자본주의 리얼리즘-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고양: 리시올, 2018), 교보문고 e-book에서 재인용. 

  7. 마크 피셔,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자본주의 리얼리즘-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고양: 리시올, 2018), 교보문고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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