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디지털적 공유, 우리는 무엇을 연결하고 공유하고 있는가

조혜영
조혜영은 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영상문화 연구자로서 페미니즘/퀴어 비평, 디지털 이미지와 영화적 게임,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갖고있다. 현재 project38 연구원,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운영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Archive, digital technology, and the inheritance of the Gwangju Uprising: the affect of the post-Gwangju generation of directors in Kim-gun (2019) and Round and Around (2020)”, 「영화적 게임의 젠더 다양성 재현과 동일시의 트러블 :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를 중심으로」가 있으며, 공저로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원본 없는 판타지』, 『소녀들: K-pop, 스크린, 광장』, 『한국 다큐멘터리영화의 오늘』 등이 있다.

광야의 혁명과 연결 노동

거대 연예 기획사 SM 엔터테인먼트의 걸 그룹 에스파(aespa)는 세 번째 싱글 〈넥스트 레벨 Next Level〉(2021)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I’m on the next level, yeah
절대적 룰을 지켜
내 손을 놓지 말아 결속은 나의 무기
광야로 걸어가
(…)
맞잡은 손을 놓쳐
난 절대 포기 못해

(…)
더 아픈 시련을 맞아도
난 잡은 손을 놓지 않을게
, oh
(…)
Black Mamba가 만들어낸 환각 quest
aespa, ae를 분리시켜놓길 원해 그래
중심을 잃고 목소리도 잃고 비난받고
사람들과 멀어지는 착각 속에
Naevis 우리 ae, ae들을 불러봐
aespa의 Next Level “P.O.S”를 열어봐
이건 real world 깨어났어
We against the villain, what’s the name?
Black Mamba

SM은 신인 그룹 에스파를 메타버스(metaverse)라는 새로운 기술의 환상 열차에 태워 보낼 준비 중이며 이를 위해 SMCU(SM Culture Universe)라는 세계관 속에서 그룹을 프로듀싱하고 있다.1 실제로 이수만 SM 총괄 프로듀서는 2020년 비전 발표에서 미래는 셀러브리티와 로봇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고 뒤이어 에스파를 결과물로 내놨다. 에스파는 물리적 세계만 따지면 4인조(카리나, 지젤, 윈터, 닝닝)이지만, 가상 세계의 아바타 멤버까지 포함하면 8인조(아바타 멤버는 ‘아이-본체 이름’으로 불린다)이다. ‘아이(æ)’라 불리는 아바타는 각 멤버와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세계관 설정에 따르면 디지털 세계의 또 다른 인격체이며, ‘플랫’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즉, 데이터를 공유하긴 하지만 각자의 타임라인을 갖고 살아간다. 이들의 노래 〈블랙 맘바 Black Mamba〉(2020)와 〈넥스트 레벨〉에 반복해 등장하는 ‘블랙 맘바’는 물리적 세계와 가상 세계의 연결을 끊으려는 악당으로, 본체와 아바타는 악당에 대적하기 위해 가상 세계인 플랫 너머의 무정형의 세계인 광야로 나아가는 모험을 시작한다. SM은 이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노래와 뮤직비디오 외에 〈에피소드 1 블랙 맘바〉라는 단편 영화까지 제작했다.2

현재 아바타 멤버의 주된 활동은 AR 방식으로 본체와 함께 하는 공연에 한정돼 있는 듯하다. 아직 이들이 기대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진 않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상 세계에 익숙해진 대중을 고려할 때 에스파를 포함해 다른 기획사의 가상 아이돌과 셀러브리티의 활동은 점점 더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에스파의 아바타 멤버는 『IZE』의 가상 아이돌 분석 기사가 밝히고 있듯이, 물리적 세계의 아이돌에 비해 기획자가 원하는 외모와 능력의 자유로운 구현, 영원한 젊음, 사생활의 완벽한 통제, 무한한 체력, 물리적 시공간으로부터의 자유, 동시다발적 일정 소화, 더욱 저렴한 기획 제작비, 손쉬운 해고(폐기) 등의 특징이 있다.3 그러나 이 이점은 모두 기획사 입장만을 기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래 〈넥스트 레벨〉은 이미 디지털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돌 본체와 아바타 모두의 존재 양식으로서 ‘연결’과 ‘결속’을 반복해 부르짖는다.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며, 악당 역시 그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위협하기 위해 연결을 끊으려 한다. 연결과 결속은 뮤직비디오와 단편 영화에 재현된 바와 같이 본체와 아바타 멤버 간의 공유된 데이터와 정체성을 지시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문화 생산자인 에스파 혹은 SM과 수요자인 팬덤 사이의 관계를 알레고리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돌 본체와 아바타 모두의 데이터 자원은 누구에게 공유되며 그 연결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더 중요하게 그 이익은 어떻게 생산되고 배분되는가?

예를 들어, 아주 단순하게 몸이 아프거나 다른 일정이 있는 본체 멤버를 대신해 24시간 일할 수 있고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아바타 멤버가 공연을 하게 된다면 그 공연을 통해 발생한 이익이 해당 멤버에게 돌아가는 것인가? 물리적 세계의 아이돌은 자신과 디지털로 연결되지만 비동기화되는 가상적 신체의 노동을 위해 데이터 자원과 질료를 제공한다. 또한 본체의 정체성과 경력은 아바타 멤버의 존재와 수행에 의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본체는 기획사와 어떻게 이익을 나눌 수 있는가? 아바타 멤버의 사용 기한과 방식을 본체 멤버가 결정할 수 있는가? 혹은 SF적인 상상력을 펼쳐보면 아바타 멤버는 스스로 경제적 권한을 포함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미래가 올까?

더 나아가 한 명의 아바타 혹은 가상 아이돌은 한 명의 대응되는 아이돌을 통해서만 구현되지 않는다. 에스파조차도 그 동안 SM을 거쳐 간 여러 아이돌과 팬덤 그리고 케이팝(K-POP) 문화 산업이 쌓아 온 데이터를 통해 구축됐을 것이다. 즉, 아이돌 노동의 역사가 가상 아이돌에 축적돼 있다 할 수 있다. 가상 아이돌은 기존 아이돌들의 데이터의 추출 및 추상화를 통해 이뤄진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아이돌 가수들은 그 소유권(ownership)과 사용권(copyright)을 어느 정도로 주장할 수 있는가? 자신의 데이터 사용을 개인이 증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기획사와의 계약이 끝날 때 이들은 아바타 멤버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 SM이 본체와 아바타가 반드시 동기화되지 않고 독자적 개성을 갖고 있다고 설정한 것은 서사적 목적을 넘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여타의 동의 없이 아바타 멤버만으로 별개의 콘텐츠와 팬덤을 형성해 이윤을 확장하려는 계획 때문일 것이다.

SM은 독자적 세계관을 구축하며 연결을 강조하고 공유와 연대의 혁명을 외치지만, 정작 기업은 데이터를 소유하고 사유화하는 것에 집중한다. 물리적 세계의 아이돌과 (기획사 소속을 넘어서 기획사 소유인) 아바타 멤버는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이익이 배리되고 갈등이 발생해 연결과 결속이 끊어질 확률이 높다. 일차적으로는 아바타 멤버가 더 이상 이득이 없다고 판단되면 쉽게 폐기될 수 있다. 또한 물리적 세계의 아이돌이 나이와 경험이 쌓이면서 기획사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정체성과 경력을 발전시키길 원할 때 자신의 젊은 시절의 얼굴을 하고 있는 아바타 멤버는 오히려 그에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점에 관해서도 일시적으로 아바타 멤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손쉬운 대체 가능성은 그 둘을 불안한 경쟁 관계 속에 놓이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엔터테인먼트 기업이야말로 그들의 연결과 결속을 끊으려거나 애초에 불가능하게 만드는 블랙 맘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볼 때 에스파는 연대와 혁명을 노래하며 ‘광야’의 영웅이 되려하지만, 정작 그 연결 노동에서 소외돼 있다고 할 수 있다.

플랫폼 노동과 공유 경제: 위험의 외주화와 데이터의 사유화

에스파 사례에서 보듯이 오늘날 노동과 경제에서 핵심은 연결과 빅데이터이다. 지금 우리 대부분은 편의성과 효율성을 위해 언제 어디든 늘 연결된 상태로 여기저기에 제 정보의 흔적을 뿌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저 산만하게 연결돼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연결이 매끄러우려면 소통과 교류의 규칙이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현재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플랫폼 기업이다. 디지털 산업은 기본적으로 독과점의 특징을 갖는다. 한 곳에 독점적으로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이게 하면 할수록 그들의 활동을 통해 데이터가 어마어마하게 쌓이고 그 데이터들은 예측의 정확도가 높은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유튜브, 넷플릭스, 아마존, 페이스북 등은 알고리즘을 통해 자동 추천 형식으로 사용자도 미처 알지 못하는 욕망을 구성해 준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되고 추적당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시된 추천 목록을 보고 나서야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구나’라고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익숙해진 사용 경험과 이미 연결돼 있는 사람들로 인해 사용자들은 결속감을 느끼고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이것은 계산적인 동시에 매우 정서적이고 정동적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머리의 일부는 이미 저기 클라우드와 알고리즘 어딘가에 내장돼 있는지도 모른다.

기업들은 “정형 데이터”(주민등록번호, 신용, 건강, 교육 데이터 등)뿐 아니라 “비정형 데이터”(감정, 정서, 정동, 생체 리듬 등)를 핵심 데이터로 여기고 수집한다.4 “사용자 데이터와 콘텐츠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거래되면서 저 멀리 국내외 기업들의 클라우드 서버에서 부지불식간에 알고리즘 기계에 의해 분석되고 예측되면서 주로 자본의 이윤을 위한 땔감이 된다.”5

노동자든 소비자든 플랫폼에서는 모두 사용자가 된다. 플랫폼에서 취미 생활을 하든, 노동력을 공급하든, 물건을 구입하든, 사용자들은 데이터를 제공하는 자원이자 기업의 이익을 내주는 무임금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어떠한 결과를 내는지, 그리고 데이터를 어떻게 얼마나 누구로부터 수집해 사용하고 있는지는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이 불투명성은 사용자들을 자기 데이터의 가치화로부터 소외시킨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지구적으로 서로 대면하는 것이 위험한 행위가 되면서 가상적 비대면 연결에 더 의존하게 됐다. 그러나 가상적 연결에도 여전히 물리적 연결은 필수적이다. 그러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플랫폼을 경유한 상품 구매와 택배다. 택배 노동자들은 코로나19로 물리적 이동이 제한된 상태에서도 생존을 가능하게 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과부화된 택배 노동은 결국 사람들을 과로사하게 만드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만들었다. 과로를 강제하는 플랫폼 노동이 새로운 것은 아니나 코로나19가 상황을 악화시킨 것이다. 대다수 택배 노동자들은 개인 사업자로 플랫폼과 계약하기 때문에 현재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플랫폼을 거부하거나 거절하기도 힘들다. 이미 일거리가 그곳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공유 경제의 핵심이라 불리는 플랫폼 기업들은 노동을 극단적으로 유연하게 만들고 노동 위험과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하면서도 노동자들을 ‘파트너’라 부르며 지배적이고 독점적인 플랫폼 기업과 대등한 계약 관계에 있는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극단적인 비정규직(긱 경제(gig economy))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개별 사업자로 계약한 택배 노동자들은 파편화돼 서로 연대하기 쉽지 않다. 함께 노동권을 주장하고 연대하기 위한 기반으로서의 ‘플랫폼(조직화)’은 구성할 수 없도록 규칙을 세우고 알고리즘화 했기 때문이다. 플랫폼 기업은 자기 이익이 맞을 때만 연결과 공유를 주장한다.

‘라이더 유니온’ 위원장 박정훈이 말하는 것처럼, 플랫폼에 구름처럼 모여든 노동자들이 일하는 방식은 “로그인-대기-일감 탐승-수행-대기 또는 로그아웃”이 됐다.6 ‘혁신’이라 불리는 기업의 경영 효율화는 일감이 있는 시간에만 노동자들을 고용하길 원한다. 즉, 언제든 필요할 때 쓰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대기 인력이 되기를 바란다. 가장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플랫폼 혹은 공유 경제가 무작위로 수집한 데이터는 소유하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함으로써 이 산업이 발생시키는 사회적 문제와 비용에 대한 책임에서도 벗어난다”는 것이다.7 산업 재해, 해고로 인한 분쟁, 소음과 주민과의 갈등, 급증한 이동 수단으로 인한 교통 혼잡과 포장재로 인한 환경오염 등에 대해 플랫폼 기업은 자신들은 사람들이 모이고 필요에 따라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이기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8

박정훈은 배송할 때 노동자들의 이동이 매순간 기록되는 것 또한 데이터 자원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공지능(AI)은 아직까지도 복잡한 골목길이나 여러 개의 진입로가 있는 대단지에서는 정확하게 길을 알려주지 못할 때가 많은데 택배 노동자들이 이 길을 다니며 AI의 오류와 불확실성을 교정하는 노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고객 또한 택배 노동자들이 오는 경로를 감시하고 평점을 매기면서 일종의 매니저 역할을 한다.9 그러나 이러한 무임금 노동에 대한 대가는 없다. 다시 말하면, 플랫폼 기업은 택배 노동자, 사업자, 고객 간의 직접적 갈등과 문제를 노동자 개개인이나 사회에 그대로 노출하고 전가하며(사회 갈등을 키우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자본인 데이터만을 소유하려 한다. 생산 수단의 ‘공유’라는 허울 좋은 말은 실제로 산 노동(living labor) 그리고 사회적 삶과 인프라에 대한 기업 ‘사유화’일 수도 있다.

〈데스 스트랜딩〉, 게임의 노동화, 노동의 게임화?

2019년 코지마 프로덕션(Kojima Productions Co., Ltd.)에서 출시한 〈데스 스트랜딩(Death Stranding)〉은 연결과 빅데이터를 핵심 기반으로 작동하는 오늘날의 노동을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한 게임이다. 이 게임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예측이라도 하듯, 모든 연결이 끊어진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데스 스트랜딩’이라는 전 세계적 대재앙이 일어난 이후 생사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비를 맞는 동안 시간이 가속되는 ‘타임폴’과 방치된 시체를 매개로 출현하는 괴물 ‘BT(Beached Things)’로 인류는 문명이 파괴되고 출산율이 영(0)에 수렴하는 등 멸종 직전에 있다.

플레이어 캐릭터인 전설적인 배달부 샘 포터 브리지스(노만 리더스(Norman Reedus) 분)는 대재앙으로 해체된 미국을 다시 연결하는 임무를 맡는다. 플레이어 샘은 삼중의 연결 임무를 맡는다. 첫째, 각 기지로부터 배송 임무를 받고 물품(광물, 의료품, 피자, 예술품, 시신, 무기류 등)을 손상되지 않게 제 시간에 목적지까지 배달해야 한다.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물품이 많이 손상되면 ‘좋아요’를 적게 받거나 임무에 실패한다. 그래서 균형을 잃지 않도록 수하물을 잘 쌓아야 하고 타임폴을 맞아 부식이 되면 녹 제거 스프레이를 뿌려 관리를 해줘야 한다. 둘째, 시간 오차가 거의 없는 초대용량 무선 데이터 통신인 ‘카이랄 링크’를 연결한다. 셋째, 파괴돼 있는 인프라의 재건과 플레이어들의 연결이다. 도로와 다리를 직접 건설하거나 사다리와 등산용 앵커를 적재적소에 설치하고 필요한 물품을 간이 보관소에 넣어둬 다른 배달부(플레이어)들을 도울 수 있다. 〈데스 스트랜딩〉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동기화돼 있어 게임에서 그들을 대면할 순 없지만 이동에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흔적을 남길 수는 있다. 각 플레이어들은 다른 플레이어가 건설하고 설치한 시설물에 ‘좋아요’를 눌러 반응할 수 있다. 데이터의 흔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방식은 외롭고 고립된 플레이어에게 소소한 위안과 타자와의 연결감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플랫폼 노동에서 시스템적으로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조직화가 어려운 것처럼 (동기화된 멀티 플레이 게임과 다르게) 적에 대항해 함께 싸울 수 없다.

게임에서 플레이어 샘은 배송 거리, 시간, 손상도, 도움의 정도 등에 따라 ‘좋아요’를 받는다. <데스 스트랜딩>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화폐는 ‘좋아요’다. 여러 개의 임무를 동시에 받아서 수행해야 할 때도 있는데 이럴 때는 동선과 화물 무게를 잘 계산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을 넘어 배달하면 실패하는 임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하나의 임무가 끝날 때마다 개별 임무와 커리어 통계를 제시해 게임 플레이를 수시로 평가한다. 개별 임무 평가 페이지에는 ‘배송 아이템 수, 화물의 평균 손상도, 최단 배송로와 플레이어 배송로 사이의 차이, 동시 배송 정보’가, 커리어 통계 페이지에는 ‘총 플레이 시간, 배송한 화물 총량, 배송한 화물 총 개수, 총 이동 거리, 커리어 균형 그래프’가 발표된다. 여러 임무를 통해 받은 ‘좋아요’는 플레이어 샘이 계속 배달을 하게 만드는 동기인 동시에 고립된 상황에서 연결감을 유지시키며 게임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게 하는 장치다.

이렇게 〈데스 스트랜딩〉은 연결, 감정, 빅데이터가 중요한 플랫폼 노동을 시뮬레이션하며 오늘날의 경제를 게임화 한다. 코지마 프로덕션이 이미 매우 잘 알려진 유명 영화배우와 감독들을 캐스팅한 것 또한 셀러브리티 문화와 아바타 노동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다.10 이중 가장 흥미로운 캐스팅은 주인공 샘의 양어머니이자 미국 연합 대통령인 브리짓 스트랜드를 연기한 린제이 와그너(Lindsay Wagner)다. 미국 배우 와그너는 1970년대 미국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시리즈 〈더 바이오닉 우먼Bionic Woman〉의 ‘소머즈’로 유명하다. 현재 70대인 와그너가 연기한 브리짓은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병으로 죽는다. 브리짓은 샘에게 딸 아멜리를 도와 미국 연합 재건을 이어가라는 유언을 남긴다. 생사의 경계 공간인 ‘해변’에 고립돼 있는 아멜리는 브리짓이 과거 자궁암으로 죽다 살아날 때 분리된 영혼이며 멸종을 야기할 멸종체라는 반전이 이후 서사에서 밝혀진다. 그래서 아멜리는 늙지 않는다. 코지마 프로덕션은 아멜리를 와그너의 젊은 시절, 즉 소머즈를 모델링해 디자인했다.

이 게임은 주요 여성 캐릭터에게 대통령과 천재 과학자 같은 권력과 지식을 가진 캐릭터를 부여하지만 이들은 결국 가부장제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젊음과 나이 듦, 임신과 불임이라는 이분법적인 신체성으로 환원된다. 유한하고 무력한 브리짓과 인류를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젊은 아멜리의 대립은 여성 배우의 경력을 젊음의 이미지로 환원하고, 그것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반여성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 레아 세이두(Léa Seydoux)가 연기한 민영 택배사 대표 프레자일은 얼굴은 젊지만 얼굴 아래의 몸은 타임폴을 맞아 노인이 된지 오래다. 마거릿 퀄리(Margaret Qualley)가 연기한 천재 과학자 마마는 사고로 사산한 BT 상태의 태아에게 연결된 상태로 목숨을 연장한다. 이렇게 불임인 여성들을 대신해 아이를 품고, 정서적으로 연결되고, 출산까지 하는 것은 주인공이자 남성인 샘이다.

샘은 배달과 연결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과 인공 탯줄로 연결된 인공 자궁에 넣어진 BB(Bridge’s Baby)를 배 쪽에 지고 다닌다. BB는 과학기술을 통해 상품화된 아기로 미국 연합의 소유물이다. 생사의 경계에 존재하는 BB는 뇌사 상태의 산모에게서 꺼내져 인공 자궁에서 살아간다. 일종의 생명 유지 장치인 BB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BT가 가까이 있거나 험한 지형에서 균형을 잃으려 하면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며 울음으로 경고한다. 결말에서 오래 사용한 BB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 폐기 처분해야 한다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샘은 문자 그대로 인공 자궁에서 BB를 꺼내 ‘출산’을 한다. 수많은 연결 임무를 수행해 온 플레이어 샘은 여성 신체에서만 가능했던 ‘최초의’ 연결이자 생사를 연계하는 임신과 출산의 노동(laboring)마저도 자신의 임무 수행으로 가져가면서 연결에 대한 강력한 욕망을 실천한다.

이 게임에서 남성인 샘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 하에서 전통적으로 여성 노동으로 강제돼 왔던 것들(감정 노동, 재생산 노동, 돌봄 노동 등)을 시샘하고 탈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전에 여성 노동으로 규정됐을 때는 적절하게 가치화되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가장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소셜 네트워킹의 노동은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부과돼 온 것이고 현재에도 주로 여성들이 맡아 일하고 있다. 로라 포트워드-스테이서(Laura Portwood-Stacer)는 가족이나 기타 소규모 집단에서 생일이나 명절에 안부를 묻고, 가족 모임을 주관하고, 친척이나 지인들의 가십을 전달하며 정서적으로 연결해 왔던 여성들의 노동을 페이스북이 미러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1 그리고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물리적 세계에서뿐 아니라 가상 세계에서도 공동체의 연결 노동을 이중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노동으로서 제대로 가치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카카오 스토리를 생각해 보자.) 단순히 가족이나 지인들의 정서적 연결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가 명명한 승무원, 접객원, 사회 복지사, 영업 사원 등의 감정 노동12, AI의 친절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13 등도 연결 및 플랫폼 노동의 ‘상황적 지식’14으로서 함께 계보화 돼야 한다.

이 게임은 ‘좋아요’ 같은 감정이나 임무의 성공 같은 긍정성만 가치화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경제는 기존에는 부정적으로 여겼던 감정과 비생산적 영역까지 잉여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개척지로 본다. 즉, 죽음마저도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성 댓글과 그 악성 댓글을 다시 기사화하는 미디어, 혐오 발언을 클릭 유도 장치로 쓰는 유튜버들, 경제를 일으킨다며 기후 재난을 가속화하고 있는 전 지구를 생각해 보라. 게임에서 타임폴은 시간을 가속화 해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적당량은 농작물의 빠른 성장을 돕는다. 게임 속 가상국가인 미국 연합은 국가적 차원에서 타임폴을 이용해 정보처리와 비물질 정보를 물질로 전환하는 기술을 발전시킨다. (현실에서도 이미 우리는 시간의 가속을 찬양하며 빠르게 죽음에 도달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뇌사 상태의 산모는 상품으로서의 BB를 생산한다. 샘은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귀환자이기에 전설적인 배달부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샘은 자신의 분비물들(피, 소변, 대변)로 BT와 대적할 수 있는 총알과 폭탄을 만든다. 이 과정은, 존재로부터 나오는 부산물을 전혀 남기지 않고 모두 재사용 시스템에 넣어 가치화 시킬 수 있다는, 즉 유통을 통해 완벽하게 0(부재)과 1(존재)을 오고간다는 불가능한 환상을 심어준다.

남성이 기준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종종 사회 규범에 맞지 않고 정상성의 경계에 있는 비체로 재현돼왔다. 그런 면에서 생사를 오고가고 자궁 속 기억을 갖고 있으며 자기 신체의 분비물을 지각하는 샘은 경계적, 비체적 존재로서 여성화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역사적으로 여성 노동 위에 세워진 디지털, 비물질 노동을 여성과 분리하며 재남성화하고 재가치화 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와 같은 게임 분석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데스 스트랜딩〉이 플랫폼 노동, 그중에서도 택배 노동을 얼마나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했는지에 대한 평가나 서사와 캐릭터가 반여성주의적인 재현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만은 아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지점을 조명하고 싶다. 첫째, 디지털, 비물질 경제 노동을 분석하면서 젠더적 관점에 기반한 상황적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젠더는 디지털, 비물질 노동 연구에서 다음 과제, 후기, 부록으로 붙을 사례가 아니라 토대이자 중핵이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감정 노동, 연결 노동, 비체적 노동 등과 같은 비물질 노동이 디지털 시대에 처음 등장한 것이라고 보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포디즘이든 포스트 포디즘이든, 물질 경제든 비물질 경제든, 여성의 노동이 늘 제대로 가치화되지 되지 못하고 차별받던 상황을 인식하며 역사적으로 성찰하고 연대할 필요가 있다. 둘째, 〈데스 스트랜딩〉이 택배 노동을 게임 플레이로 정교하게 시뮬레이션 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이 그만큼 게임화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게임 플레이와 평가 통계 뒤에 산 노동,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산 노동은 스트레스 지수를 알려주고 휴식을 요청하는 ‘BB의 존재’나 진입로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플레이어/택배 노동자’들의 정보 공유만으로는 부족하다. 라이더 유니온 위원장 박정훈이 말한 것처럼 플랫폼 노동이 노동으로 인정되고 공공성 침해와 생태위기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노동법과 환경법에 의해 규제를 받아야 한다.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끊임없이 시간에 쫒기는 비정규직, 프리랜서,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양산은 타임폴처럼 죽음을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지식인 프리랜서인 예술작가, 비평가, 강사 등도 여기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압축해 쓰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예외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인간은 세계 밖에서 세계를 통제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세계-내-존재이다. 플랫폼 기업의 독과점 비판, 데이터 수집과 활용, 그리고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비판적 성찰, 디지털 무임금 노동에 대한 정당한 몫 나누기, 플랫폼 노동에 대한 노동법 적용, 산 노동의 공정한 가치화, 연결의 공공성 강화, 디지털 시대 노동과 가치의 생산양식 대한 상황적 지식 쌓기 등. 우리가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연결되기 위해, 그러한 공통성을 찾기 위해 더 주장하고 공유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1. 에스파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사를 참고하라. 「MCU만큼 흥미로운 ‘에스파’의 세계관」, 『하퍼스바자』, 2021년 5월 25일. 

  2. aespa 에스파 ‘ep1. Black Mamba’ - SM Culture Universe」, aespa 공식 유튜브 웹사이트, 2021년 5월 15일. 

  3. 공미나, 「새로운 형태의 K팝… 메타버스 열풍 속 쏟아지는 가상 아이돌」, 『IZE』, 2021년 9월 10일. 

  4. 이광석, 『디지털의 배신: 플랫폼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유혹』(인물과 사상사, 2020), 알라딘전차책PC뷰어, 알라딘 E-BOOK 열람, 12%.  

  5. 앞의 책. 

  6. 박정훈, 『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빨간소금, 2020), 18.  

  7. 앞의 책, 25. 

  8.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2019) 역시 오늘날의 긱 경제에서 노동의 위험 부담과 시간 관리가 전적으로 개인에게 부가되고 노동에 대한 생명 정치적 감시 체계는 극단적으로 치밀해졌음에도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연대, 그리고 플랫폼 기업을 거절하기는 어떻게 거의 불가능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9. 〈연결과 단절의 알고리즘 사회〉」, 《2021 서울국제도서전 주제 세미나》, 2021년 9월 12일.  

  10. 주인공 샘에 캐스팅된 배우는 〈워킹 데드〉 시리즈의 대릴로 유명한 리먼 노더스이다. 그밖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 매즈 미켈슨(클리프), 레아 세이두(프레자일), 린제이 와그너(브리짓 스트랜드 대통령/딸 아멜리), 마가렛 퀄리(마마),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데드맨)와 니콜라스 빈딩 레픈(하트맨) 등이 캐스팅되었다. 유명인들의 캐스팅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CG 애니메이션임에도 실제 배우들의 연기노동(외모, 목소리, 페이셜/모션 캡처를 위한 연기)을 보다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다.  

  11. Quoted again from, Laura Portwood-Stacer, “Care Work and the Stakes of Social Media Refusal,” Ideology (March 18, 2014); Jacquelyn Arcy, “Emotion work: considering gender in digital labor,” Feminist Media Studies, 16: 2 (2016), 367. 

  12. 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 노동』, 이가람 옮김(이매진, 2009). 

  13. 이희은, 「AI는 왜 여성의 목소리인가」, 『한국언론정보학보』 90(2018), 126–153. 

  14. 모든 과학 지식은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으며 부분적이고 상황적이다. 그것이 지식에 대한 객관적 성찰이다. 그렇기에 지식을 생산하는 목격자의 권력, 영향력, 위치를 겸손하게 인식해야 한다. Donna Haraway, “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 Feminist Studies, Vol. 14, No. 3 (Autumn, 1988), 575–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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