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저급들〉 5장: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 트위터에 대한 글을 쓰기로 계획하고 있던 차에 본인이 쓴 ‘정치적인 트윗’으로 원치 않는 ‘어그로’를 끌게 되었고,1 설상가상으로 웹 2.0을 이끄는 SNS 플랫폼이자 ‘민주주의적 공론장’의 총아였던 바로 그 트위터가 며칠간 다운되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2 이제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는 걸까? 트위터의 종말은 미지근하게 연결된 익명의 사람들과 오해를 사기 쉬운 길이의 짧은 문장을 단체로 중얼거리는 일이 재밌다고 느끼던 사람들에게는 분명 큰일이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 말이다. 빠르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글은 좋았던 우리의 옛날을 회상하거나 트위터에게 이른 작별을 고하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 지구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목도하고 원래 하려던 말을 잊어버린 종류의 그런 글이다.

그래, 고작 일주일 전만 해도 나는 트위터에서 진지한 논쟁을 벌이는 일이 왜 창피스럽게 느껴지는지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다. 언젠가 존경하던 페미니스트 ‘선생님’들을 만났을 때 내 딴에는 중요했던 트위터에서의 ‘키배’를 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는지를 떠올리면서. 당시 내가 느낀 창피함은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본성상 그것이 빠르게 휘발되며 감정적 상흔만 남긴 채 결코 정당한 방식으로 기록되지도, 그러므로 기억되지도 못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아무리 진지하게 싸워도 그것은 끝끝내 ‘사적인 해프닝’에 머무른다. 심지어 그것은 아무런 결론도 대안도 생산해낼 수 없는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의 시간낭비로 치부된다. 물론,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데도 말이다! 비공식적인 “페미니스트 기억”3 또는 ‘역사’에 해당할 몇몇 논쟁들, 혹은 진실에 더욱 가깝게 말하자면 ‘발리 투두(Vale Tudo)’, 즉 무규칙 격투에 해당할 넷페미들의 ‘개싸움들’은 공적 기록으로 남기기엔 추잡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셈 치기에는 모두에게 지나치게 큰 상흔을 남겨왔다.

몇 년 전 한 동료는 내게 악명이 높은 특정 넷페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을 ‘장수들’이라 불렀다. 한때 유행했던 미술계의 용어로 말하자면 ‘플레이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장수들은 특히 2016년 이후 본격적으로 위세를 떨치며 트위터를 전장 삼아 각각의 진영 간 국지전을 부추기거나 이끌면서 혁혁한 킬(kill) 수를 기록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상당히 과격한 수위의 ‘트롤러’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강경한 혁명가이자 투사다. 혹시나 불거질지 모를 법률상의 문제로 이들을 하나하나 거론하기는 힘들겠지만, 어찌 되었든 ‘트페미’의 타임라인 속에서 반복되는 몇몇 ‘플로우(flow)’들은 (언제나 고맥락의 설명을 동반해야 한다는 난처함을 견뎌야 할지라도) 하나의 장면으로서 스케치될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은 상대 당을 비방하기 위해 도저히 독해 불가능한 ‘그뭔씹’인 내용의 현수막을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우리 동네 여기저기에 당당하게 걸어재끼는데,4 마찬가지로 ‘그뭔씹’인 우리(!) 페미니스트들의 진흙탕 싸움이 같은 방식으로 게시되고 기록되지 못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물론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현수막이 추하며 아깝기 때문이다.)

말미에 이르러 ‘페미위키(www.femiwiki.com)’의 가능성에 대해 흘리듯 언급하려 했던, 사적-공적 영역의 경계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페미니스트 기억’과 그에 상응하는 ‘페미니스트 기록’을 주제로 전개하려 한 이 글은 안타깝게도 지금 여기에 없다. 앞서 말한 ‘타이밍’의 이유로 이 주제에 대한 내 관점이 다소 변화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언젠가는 사료로서 가치 있을 ‘기록’보다, 느리더라도 망해갈 것이 확실한 ‘현장’에 집중하는 게 훨씬 다급해 보이기 시작한 탓이다. 알다시피 2006년 처음 출시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트위터는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최소한 스마트폰이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빠르게 녹아들어갔다. 이후 10년간 트위터는 좋게 말해 대안적 뉴스 채널이나 소수자들의 임파워링을 위한 디지털 거점,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지식의 탈사유화를 위한 커먼즈로 기능했다. 동시에 나쁘게 말하자면 트위터는 검열 기능이 고장난 사이버 불링 기계이자 광기 어린 집단 정동의 증폭기이며 열거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디지털 범죄가 실험되고 실행되는 딥웹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양면성은 트위터의 속성이기 이전에 인터넷 자체의 속성이다. 1990년대에 태어난 나는 인터넷의 보급을 전후로 등장한 (특히 페미니스트들의) ‘사이버 스페이스’에 관한 유토피아적인 낙관을 글로 배웠다. 그런 낙관이 어떻게 실망으로 이어졌는지는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이미 인터넷 중독자였던 내가, 그리고 당신이 잘 안다. 2017년 많은 학부모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는 ‘엘사게이트(Elsagate, 유명 만화 주인공이 등장하는 성인물 콘텐츠)’는 마치 2000년대 초반 유행하던 플래시 게임 형식의 조잡한 포르노가 마땅히 자기 자리를 되찾기 위해 귀환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그런 포르노들에 심취하게 만들면서도, 고작 ‘서태지’ 항목을 추가했다는 이유로 으스대는 최신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가르쳐주지 않는,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탐스러운 정보를 그야말로 포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이런 무분별한 섭취 행위에는 선악의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어서, 솔직히 말해 ‘엽기하우스’의 저질스러운 영상이나 ‘군가산점 폐지’에 대한 논쟁은 모두 내게 동일한 무게로 자극적인 것이었다. 이 둘은 딱히 내외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 한꺼번에 들어와 서로를 더럽히며 한 덩어리처럼 뒤섞였을 것이다.

그런고로 이제 쓰레기는 정보만큼 유용하고 정보는 쓰레기만큼 위험하다.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은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도 인터넷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의 가능성은 그것의 한계와 공존한다. 아니, 그것의 한계가 곧 그것의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우린 인터넷의, 트위터의 일부만을 취할 수는 없다. 전부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나가서 사람을 만나”5면 괜찮아지리라는 온(on)-오프(off)의 허약한 이분법에 기반한 서글픈 망상을 지속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하다. 트위터에서의 진지한 페미니스트 논쟁은 ‘페미니스트 기억’인 동시에 ‘사적인 해프닝’이자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의 시간 낭비’다. 후자로 오염되지 않고 전자만을 깨끗하게 보호할 수는 없다.

애당초 트위터는 기본적으로 ‘한심하고 쓸모없는 중독자들’을 양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매체다.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사용자의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주의력과 집중력 장애를 유발하고, 보상(쾌락) 회로를 변형해 버린다고 경고하는 전문가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물론 그럴 것이다.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는 우리의 ‘현생’에서 해낼 수도 있었던 수많은 성취들을 방해하고 망쳐왔다! 예컨대 “나는 살면서 트위터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활동했을 때(팔로어와 리트윗의 측면에서)가 인간으로서 가장 쓸모없을 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관심이 필요했고, 지나치게 단순했으며, 독설을 잘 퍼부었다. 물론 트위터에서 이따금 통찰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보를 흡수하는 지배적 방식이 되면 사고의 질이 급속히 낮아질 것이다.”6 또는, “한때는 우리는 인터넷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이제는 이것에 팔다리가 묶인 신세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도 그 사실을 의식한다. 연대와 공감을 약속했던 플랫폼들은 군중 속의 고독을 유발한다. 인터넷은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했으나, 이제 이 자유라는 것의 가장 큰 잠재력은 얼마나 잘못 사용될 수 있는가뿐인 듯하다.”7 등등. 이들은 준엄한 목소리로 우리가 트위터라는 ‘가상’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진짜’ 현실 속에서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가? 왜 트위터로부터 멀리 떨어져 ‘정상적인’ 그리고 ‘쓸모 있는’ 인간성을 회복할 만한 시간과 여유가 있는 소수의 특권적인 사람들의 훈계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세상은 이미 쓸모있는 것들, 그럼으로써 시장에서 교환될 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들로 넘쳐난다. 그런 신물 나는 경제 논리에 포획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몇 달간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들어가 ‘디지털 디톡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한심하고 쓸모없는 시간 낭비로부터 일말의 유용성을 긁어모으는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트위터를 계속한다면 머리가 망가지고 그것이 주는 쾌락에 구속되어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밤낮으로 해대는 세상에 맞서기 위한 유일한 전략은 오직 지금보다 더 한심하고 쓸모없게 구는 것이다. 트위터에도 만약 윤리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을 배신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한심하고 쓸모없는” 시간 낭비의 결과물인 무가치한 헛소리들을 최고이자 최선의 가치로서 고집하는 것이다. 헛소리들은 그 어떤 의미나 가치로도 환산될 수 없는 극치의 쓰레기들이며, 우리는 이것으로 망가진 우리의 머리를 통통히 살찌워야 할 것이다. 이것이 트위터의 끝장에 가까워지며 새롭게 수정된 이 글의 결론이다.

편집: 김깃


  1. “가족주의는 어쨌든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근간이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자기 유산을 자기 혈연에게 물려주는 징그럽게도 이기적인 시스템이다. 퀴어 욕망이 이런 진부한 욕망에 결합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이걸 단호하게 거절할 필요가 있다.” 전체 트윗 타래는 다음을 참고. https://twitter.com/cloud666tony/status/1674428064368050177?s=20

  2. 2023년 7월 4일자로 다운은 해결되었지만 유저의 유료 구독 여부에 따라 읽을 수 있는 트윗의 양은 차등적으로 제한된 상태다. Matt O’Brien, “Elon Musk put new limits on tweets. Users and advertisers might go elsewhere,” AP news, July 4, 2023, https://apnews.com/article/twitter-elon-musk-rate-limits-04380c0a90528edcd7441d2f0b47549e

  3. 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새로운 여성 주체의 등장: 200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넷페미사』(서울: 나무연필, 2017), 알라딘 e-book. 

  4. 다음의 기사는 정당들의 현수막 공방전을 다루고 있다. 하상윤, 「안 보고 싶다··· 도시 공해가 된 ‘정당 현수막’」, 『한국일보』, 2023년 6월 24일,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3062213290000724

  5. 이 관용구는 트위터에서 키배 도중 상대방을 인신공격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방 안에서 트위터만 하고 있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서 (진짜) 사람과 대화를 함으로써 (진짜)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제대로 파악하라는 뜻이다. 용례로, 현재 트위터 회장인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패러디 계정(@ElonMuskAOC)은 최근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긴 바 있다. “내가 “보기 제한”을 설정한 까닭은 우린 모두 트위터 중독자고 밖에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난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또한 당신은 방금 또 하나의 보기를 사용했다(The reason I set a “View Limit” is because we are all Twitter addicts and need to go outside. I’m doing a good deed for the world here. Also, that’s another view you just used).” 이 트윗은 일론 머스크 본인에 의해 리트윗되었다. 원문은 다음을 참고. https://twitter.com/ElonMuskAOC/status/1675268446089773056?s=20

  6. 요한 하리, 「우리가 소셜 미디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도둑 맞은 집중력』, 김하현 옮김(서울: 어크로스, 2023), 알라딘 e-book. 

  7. 지아 톨렌티노, 「인터넷 속의 나」, 『트릭 미러』, 노지양 옮김(서울: 생각의힘, 2021), 교보문고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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