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저급들〉 2장: 단식 광대는 왜 춤추는가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알다시피 〈조커(Joker)〉는 모두를 기분 좋게 해줄 만한 영화는 못 된다. 2019년 개봉한 〈조커〉는 영국의 대처리즘 시기를 연상시키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양식 아래의 고담시에 거주하고 있는 코미디언 지망생인 아서 플렉(Arthur Fleck)이 어떻게 악명 높은 범죄자 또는 혁명가(!)인 조커로 거듭나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희대의 아나키스트이자 테러리스트의 아이콘인 조커의 탄생 기원을 다룬 〈조커〉는 만화를 원작으로 둔 영화로는 최초로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조커〉의 수상은 논쟁적이었다. 이는 개봉하기 전부터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의 상영관에서 “내가 조커다”라고 주장하는 남성에 의해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의 반복을 우려한 좌파와 우파 모두의 견제를 동시에 받았고, 개봉하고 나서는 그것이 재현하는 폭력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동시에 가난한 정신질환자 또는 남성 인셀(incel,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이 행사하는 폭력이라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영화의 나쁜 명성에 뒤따르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국내에서 발표된 비평만 참조하더라도 그렇다. 손희정은 〈조커〉가 “스스로를 선량하고 억울한 피해자라고 주장할 뿐 영웅이라고 하지 않는” 아서 플렉과 “세계 인식”을 공유하는 인셀 관객들에 의해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보고, 이를 통해 〈조커〉가 “편재하는 폭력의 반복과 지속”을 강화한다고 진단했다.1 또한 김혜리는 〈조커〉가 자신이 의존하는 사회⋅정치적 사건⋅맥락들을 단지 “주인공의 곤경과 타락의 계기”로 전유하는 “탈역사적 관점”을 고집함으로써 “사회드라마로서 더없이 공허”해진다고 비판했다.2 『씨네 21』은 ‘조커 찬반 평론’이라는 제목으로 두 상반된 입장을 대비시키는 기획 기사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반대 측의 김병규는 〈조커〉가 “과잉의 수사화”를 통해 겨우 “예측 가능한 파국의 형태와 접합”함으로써 “파렴치하게 반동적”인 영화로 전락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3 한편 찬성 측의 박지훈은 〈조커〉가 “폭력을 반추하게 한다는 점”, “언어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자신의 언어를 찾는 과정과 세계를 재구성하는 경로를 보여준다는 점”, “시대의 징후를 보여준다는 점”을 들며 〈조커〉를 옹호했다.4 어느 쪽에 동의하든, 이들의 비평적 논의가 SNS에서 격한 동의 또는 신랄한 비난을 받으며 〈조커〉라는 하나의 현상을 지속케 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다른 조커들과 아서 플렉은 어떻게 다른가? 여러 매체가 〈조커〉가 조커의 기원을 다룬 첫 시도라고 보도했지만, 비인간적인 안타고니스트인 조커의 개인사를 조명한 작품이 영화 〈조커〉가 처음은 아니다.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왓치맨(Watchmen)』과 같은 굵직한 작품을 만든 작가 앨런 무어(Alan Moore)가 브라이언 볼랜드(Brian Bolland)와 만든 단편 그래픽 노블인 『배트맨: 킬링 조크(Batman: The Killing Joke, 이하 『킬링 조크』)』가 대표적인 예시다. 배트맨이 조커의 농담에 한바탕 호탕하게 웃는 결말로 유명한 이 작품에서 조커는 “단지 운 나쁜 하루” 때문에 미쳐버린, 가난하고 비참하고 배신당한 코미디언으로서의 과거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더욱이 『킬링 조크』의 “단지 운 나쁜” 조커는 배트맨과 자신의 공통점을 장광설로 끊임없이 설파하며 배트맨의 실존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자신이 배트맨의 짝패, 분신임을 적극적으로 암시한다. 요컨대 “너도 그랬잖아, 맞지? 장담할 수 있어. 너도 운 나쁜 하루 때문에 모든 게 변했잖아”5와 같은 대사를 통해서 말이다. 마찬가지로 2008년 개봉한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의 히스 레저(Heath Ledger)가 연기한 조커 역시 은근슬쩍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누설하는데(그 유명한 대사인 “뭐가 그리 심각해, 아들?(Why so serious, son?)” 말이다), 이는 그것의 진실 여부와는 별개로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어쩌다 그가 파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처럼 기능한다. 격렬한 취조실 장면에서 조커는 기원상 자신과 배트맨이 거울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그의 자기 의심과 자기 분열을 부추긴다. 이처럼 배트맨의 세계관에서 조커는 정의롭고 선량한 영웅인 배트맨이 기실 “날아다니는 쥐의 복장”6을 한 괴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일깨우지만,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조커가 체포됨으로써 안전히 봉합된다. 결말부에서 항상 조커는 법 뒤로 사라지거나, 사라져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커〉의 조커는, 알고 보면 배트맨만큼이나 제정신인 『킬링 조크』의 조커를 포함해 지금까지 다른 조커들이 표방해온 악마적인 천진난만함을 갖춘 성상파괴주의자(1989년 작 〈배트맨(Batman)〉의 잭 니콜슨(Jack Nicholson)), 그리고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영리한 사이코패스(〈다크 나이트〉의 히스 레저)와 완전히 구분된다. 〈조커〉의 조커는 배트맨의 가장 강력한 적수라는 역할과 극중의 위기 구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에게 배트맨이라는 외부이자 완벽한 연인7은 없으며, 앞서의 비평들이 이미 지적한바 해답도 대안도 없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나르시시즘만 있을 뿐이다. 〈조커〉는 시작부터 그가 대사 그대로 “항상 부정적인 생각뿐(All I have are negative thoughts)”인 자아도취적 사회부적응자에 우울과 망상을 겪는 정신질환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조커는 화이트칼라인 남성 셋을 죽인 ‘각성’ 이후로는 뻔뻔할 정도로 교육적인(?) 태도로 생방송에서 테러를 감행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한다. 망상인지 현실인지 불분명한 결말부에서 그는 상담사는 물론이고 관객들에게도 자기 설명 또는 소통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You wouldn’t get it).” 그러니 사회적으로도 정서적으로 고립된 실패자인 〈조커〉의 조커, 아서 플렉을 동시대 폭력적 남성 인셀의 한 모범처럼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남성 인셀들과 어떻게 연대할지, 혹은 그들에게 어떻게 접속할 수 있는지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조커〉의 가장 큰 문제는 배트맨이라는 외부의 부재도, 그럴싸한 정치적 메시지의 결여도 아니다. 진짜 문제, 어쩌면 유일한 문제는 아서 플렉의 몸이다. 앞서 소개한 비평들에서도 짧게 거론된 바 있는 아서 플렉의 몸의 특징들ㅡ“뒤틀린 고목이나 해저생물”, “견갑골 연기”(김혜리), “휘어진 육체”(김병규)ㅡ은 ‘그’라는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부수적 옵션이 아니라 ‘그’라는 인물의 전부다. 그러므로 깡마른 채로 웃고 달리고 춤추는 아서 플렉의 몸은 〈조커〉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집요하게 묘사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감히 추측하건대 〈조커〉를 즐길 수 없었던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표현하는 바로 그 몸의 아름다움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서 플렉의 기이할 정도로 마른 몸은 그 자체로 그를 관통했던 정신적⋅신체적 학대와 고된 노동의 시간이 축적된 증거물이며, 그가 가진 “부정적인 생각들”만큼이나 그의 유일한 자산이다. 부적절한 상황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 그의 병이 치유될 수 없거나 또는 치유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그의 몸은 고집스럽게 그 어떤 영양분도 거부하는 듯 보인다. 그의 몸은 먹지 않음으로써 말없이 배신하고, 저항한다. 무엇에 대해서? 어머니와 함께하는 식사가 강제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그를 상처 입히는 동료들과의 친목에 대해서,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일할 수 있는 몸의 규격에 대해서, 무엇보다 그의 인간됨을 보장하는, 섭취와 배설이라는 유기체적 절차에 대해서. 그의 마른 몸은 그가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삶의 양식들, ‘인간적인 삶의 거부’라는 결정 속에서 배양된 삶의 양식들을 대변한다. 그런 이유로 아서 플렉을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의 깡마른 몸, 깡마르다 못해 어딘가 비틀린 것처럼 보이는 몸은 〈머시니스트(The Machinist, 2004)〉에서 불면에 시달리며 말라가는 크리스천 베일(Christian Bale)의 몸과는 다르고, 〈헝거(Hunger, 2008)〉에서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단식 투쟁을 벌이느라 야위어가는 마이클 패스밴더(Michael Fassbender)의 몸과도 다르다. 아서 플렉은 마치 먹지 않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즐기기라도 하듯이 먹지 않는다. 이는 이전의 조커들이 최소한 한 번은 음식에 손을 댄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예외적이다. 우리는 이런 아서 플렉의 몸을 섭식장애, 그중에서도 거식증을 죽음 본능의 성차화로서 의미화한 엘리자베스 그로츠(Elizabeth Grosz)의 문장과 함께 발견할 수 있다. “거식증은 여성 육체에 부여된 사회적 의미에 대한 항의의 한 형식이다. 단순히 날씬한 몸매에 대한 당대의 가부장제적 이상과 무절제하게 공모한 것으로 거식증을 해석하기보다는 바로 그 가부장제의 “이상”을 정확히 체념한 것으로 거식증은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8 그로츠와 마찬가지로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거식증을 “자기 자신이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소비의 규범들로부터 벗어나기”로 정의하며 그 몸 자체가 “하나의 정치, 말하자면 미시 정치”를 작동시키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9 이러한 관점을 따라 우리는 아서 플렉을 자본주의 내에서 일하는 몸, 기능하는 몸, 그리하여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몸이라는 이상을 거부하는 기이한 몸을 체현하는 예외적인 광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마른 상태에 도취된 것처럼 하느작거리며 춤을 추는, 경찰을 피해 재빠르게 달리는 아서 플렉의 몸이 뜻밖의 에너지로 충만해 보인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내부 없이 문자 그대로 텅 빈 그의 비유기체적인 몸은 금속성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잘도 달린다. 첫 번째 살인 이후 무작정 내달린 그는 공중 화장실로 숨어들어가 몇 번 숨을 고르지도 않고 곧장 ‘이상한’ 춤을 춘다. 자신의 온몸을 느끼며 혼자 추는 춤. 어쩌면 그는 어디서도 본 적 없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그런 춤을 추기 위해 앞으로의, 그리고 나중의 모든 행보를 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헤이, 아서. 당신 정말 대단한 댄서네요(Hey, Arthur. You’re a really good dancer).” “나도 알아요(I know).”]

물론 아서 플렉의 극단적으로 마른 몸을 그 자체로 긍정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뒤따른다. 그가 자신의 영양실조 상태의 몸을, 또는 그런 몸과 함께 (주로 춤을 통해)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기에 이는 마치 느릿한 자살처럼 보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아서 플렉을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는 자신의 체중 감소 경험이 얼마나 쾌락적이었는지를 가벼운 태도로 증언하기까지 한다. 그는 〈조커〉에 출연하기 위해 “하루에 사과 한 알(an apple a day)”ㅡ흥미롭게도 이는 유명한 섭식 장애 당사자의 수기 제목이기도 하다10ㅡ을 먹으며 52파운드(약 23킬로그램)을 감량하고 메소드 연기를 펼침으로써 이전 세대의 조커들인 잭 니콜슨, 히스 레저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조커를 완성했다고 말한 바 있다.11 그는 몇몇 인터뷰에서 전형적인 섭식장애 당사자처럼 말한다. “[52파운드를 감량하는 것은] 힘을 준다. (중략)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더 위험하게는, “일단 목표 체중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바뀐다. 마치 매일 일어난 뒤에 가장 어려운 일이 0.3파운드(약 136그램)에 집착하는 게 되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장애처럼 발달한다. (중략)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육체적으로 느끼는 유동적인 감각이었다.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캐릭터의 중요한 부분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물리적 움직임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12 그의 이런 발언을 두고 가장 먼저 반응한 이들은 물론 섭식장애를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몇몇은 남성 연기자인 호아킨 피닉스의 발언이 (특히 대부분의 당사자가 여성인) 섭식장애를 향한 오해를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섭식장애는] 예술이 아니라 천천히 육체를 파괴하는 죽음의 행진이다.”13 한편 〈조커〉가 무엇보다 정신질환에 대한 영화임을 이해하며, 호아킨 피닉스가 섭식장애로부터 회복되길 기원하는 당사자도 있다. “그의 매니악한 웃음, 떨리는 손, 명백한 기괴함, 정신 나간 춤을 통해 내 관심을 가장 끌어당긴 아서 플렉의 한 측면은 바로 몸무게였다. (중략) 호아킨 피닉스가 (희망컨대) 지금은 더 나은 곳에 있길 바란다.”14

이러한 의견들은 물론 몇 안 되는 〈조커〉의 몸 재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공해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커〉에서 재현된 아서 플렉의 몸과 호아킨 피닉스의 몸을 분리하지 못함으로써 도덕적인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질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 만약 아서 플렉의 몸이 “천천히 육체를 파괴하는 죽음의 행진”이자 “부정적인 생각”을 작동하기 위해서만 바쳐진 기계일 뿐이라면? 만약 아서 플렉이 느릿한 자살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인식론적 앎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 앎이 쾌락적이기까지 하다면?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말처럼 “내용 없는 자기 파괴의 형태로 추락”하는 몸이 추는 〈조커〉의 자아도취적인 춤은 이 지점에서 “우리가 현존하는 질서를 없애기 위해 이 영점을 지나야만 한다고 말하는 데 있다”는 수긍할 만한 “교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15 춤은 여기서 다른 어딘가로 이행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다. 춤은 그냥 춤이다. 몸도 그냥 몸이다. 〈조커〉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찬 한 몸이 어떻게 스스로를 위한 쾌락을 생산할 수 있는지를 본다.

편집: 김깃


  1. 손희정, 「조커, 어느 인셀의 탄생」, 『경향신문』, 2019년 10월 7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910072047005#c2b

  2. 김혜리,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웃는 남자」, 『씨네21』, 2019년 10월 23일,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4097

  3. 김병규, 「조커 찬반 평론ㅡ반대: 〈조커〉의 폭력, 엉성한 난장」, 『씨네21』, 2019년 10월 17일, http://cine21.com/news/view/?mag_id=94059

  4. 박지훈, 「조커 찬반 평론ㅡ찬성: 〈조커〉의 폭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와 우리 시대의 문제」, 『씨네21』, 2019년 10월 17일, http://cine21.com/news/view/?mag_id=94058

  5. Alan Moore and Brian Bolland, Batman: The Killing Joke (California: DC Comics, 2014). 

  6. Alan Moore and Brian Bolland, Batman: The Killing Joke

  7.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나를 완성시켜(You complete me).”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 1996)〉에서 이 말은 고백의 대사이기도 하다. 

  8. 엘리자베스 그로츠, 『뫼비우스 띠로서 몸』, 임옥희 옮김(서울: 여이연, 2001), 113. 

  9. 질 들뢰즈, 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 전승화 옮김(서울: 동문선, 2005), 196. 

  10. ‘An Apple a Day’라는 영어 원제의 책은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다음을 참고. 엠마 울프, 『하루에 사과 하나ㅡ사랑과 거식증 치유의 기록』, 이은선 옮김(서울: 새움, 2013). 

  11. GQ STAFF, “An Apple A Day Helped Joaquin Phoenix Lose More Than 23KG For The Joker,” GQ, Sep 23, 2019, https://www.gq.com.au/fitness/health-nutrition/an-apple-a-day-helped-joaquin-phoenix-lose-more-than-23kg-for-the-joker/news-story/1d4cf4025b2464a54fc45cfecad96d47

  12. Lindsey Bahr, “Joaquin Phoenix on ‘Joker’ weight loss, dance and De Niro,” AP news, Sep 30, 2019, https://apnews.com/article/9dfc87d4243e4f4abdfa7b03b05e71a1

  13. Courtney Enlow, “Hey, Joaquin Phoenix? What You’re Describing Is an Eating Disorder,” Pajiba, Oct 8, 2019,
    https://www.pajiba.com/film_reviews/hey-joaquin-phoenix-what-youre-describing-is-an-eating-disorder.php

  14. Lexi Kayser and Amasil Fahim, ““Joker” and Eating Disorders: The Parallel We Need to Be Talking About,” Her Campus, Nov 5, 2019,
    https://www.hercampus.com/school/slu/joker-and-eating-disorders-parallel-we-need-be-talking-about/

  15. Slavoj Žižek, “More On Joker: From Apolitical Nihilism to a New Left, or Why Trump is No Joker,” The Philosophical Salon, Nov. 11, 2019, https://thephilosophicalsalon.com/more-on-joker-from-apolitical-nihilism-to-a-new-left-or-why-trump-is-no-j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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