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의 지도 그리기로서 회절(diffraction)

임옥희
임옥희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2021년까지 인문학을 가르쳤다. 경희대학교에서 버지니아 울프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0년 이후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동료들과 함께 페미니즘 관련한 이론·연구·실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들과 함께 여자들의 이야기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저서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젠더 감정 정치』, 『메트로폴리스의 불온한 신여성들』, 『팬데믹 패닉 시대, 페미-스토리노믹스』 등이 있다.

태양신화로서 반영론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거울 반사 이미지와 관련한 흥미로운 신화다. 나르키소스의 엄마인 강물의 요정 리리오페는 예언자 테레시아스에게 이 아름다운 아이가 오래 살 수 있는지 물어본다. 테레시아스는 아이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한 그럴 수 있다고 예언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듣고 리리오페는 세상의 모든 거울을 없앤다. 리리오페의 염려와 달리 나르키소스는 무럭무럭 자란다. 청년이 된 나르키소스는 너무 아름다워서, 남녀불문 보는 사람마다 그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나르키소스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 않는다. 나르키소스와 사랑에 빠진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요정인 에코도 있었다. 나르키소스는 에코의 사랑 또한 매몰차게 뿌리친다. 모멸감에 깊은 산속으로 숨어든 에코는 점점 야위어간다. 살과 뼈가 전부 사라져 유령처럼 떠돌면서도 에코는 끝내 목소리로 살아남는다. 타인의 메아리로.

어느 하루 사냥을 끝내고 돌아가던 나르키소스는 목이 말라 맑은 샘물에 고개를 숙인다. 물을 마시려다가 마주친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그는 사랑에 빠진다.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자기 자신임을 나르키소스는 마침내 알아차리게 된다. 자기애의 포로가 된 나르키소스는 처음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랑의 고통에 절망한다. 불가능한 사랑의 고통으로 나르키소스 또한 에코처럼 야위어간다. 죽음을 예감한 나르키소스는 헛되이 사랑받은 이여, 내가 죽는 것은 슬프지 않지만, 나의 죽음이 곧 너의 죽음인 것이 슬프다고 애통해한다. 마지막으로 나르키소스는 “안녕, 내 사랑.”하고 자신에게 작별을 고한다. 허공을 떠돌던 에코만이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내려다보면서 “안녕, 내 사랑.”하고 애도한다.

이탈리아 중세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나르키소스〉는 밝은 빛 가운데서 검은 물표면에 비친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자기(해러웨이식으로 말하자면 제3의 타자)를 갈망한다.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에서 그를 제외한 모든 공간은 깊은 어둠에 잠겨있다. 그의 모습은 빛 가운데 있음에도 투명한 광휘보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지배한다. 나르키소스의 헛된 욕망을 ‘반영’한 것처럼, 샘물은 명경지수가 아니라 깊고 어둡다.

빛이 있는 그대로 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은 옛사람들이라고 하여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양신화는 빛이 신성한 신의 말씀이라고 설득할 만큼 세속적인 힘을 가졌다. 유대-기독교 신화에 따르면 ‘빛이 있으라’는 신의 명령과 더불어 빛이 탄생한다. 빛은 신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서 로고스이자 어둠과 사악을 물리치는 순수한 진리가 된다. 말씀을 뜻하는 로고스는 그리스어로 이성의 어원이기도 하다. 기독교 천년왕국은 이렇게 하여 빛=말씀=진리=이성을 백색신화로 연결시킨다. 여기서 백색신화는 불길하고 불결한 검은색이 섞이지 않은 동질적이고 투명한 빛으로서의 백색성에 토대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에 이르기까지 동질성을 추구해왔던 서구 철학은 ‘아무나’와 난잡한 결합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처럼 난잡한 결합은 백색의 순수성과 동질성의 근간을 흔들어놓고, 그 결과 백색신화가 기원적인 진리라기보다 만들어진 허구임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서구철학은 여성의 문란에 비견되는 은유의 난잡성을 통제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동일성의 독점경제는 혼종의 생산기계인 은유의 무한증식을 통제할 때 가능해진다. 은유는 어원상 전달, 이동, 여행을 뜻한다. 은유로 결합된 의미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여행하고, 번역되는 과정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은유의 운반자(carrier)는 보균자처럼 통제하기 힘든 의미의 잉여를 초래한다. 언어가 가진 은유의 속성은 궁극적으로 오인과 오독에 열려 있다. 이처럼 은유는 의미의 무한증식을 통해 자신의 잉여가치를 극대화한다.

서구 태양신화는 진리가 아니라 은유로 넘쳐난다. 서구에서 유일하고 영원한 말씀을 위해 자기 안의 타자들을 솎아내는 비유적 장치가 이분법이다. 빛/어둠, 백/흑, 낮/밤, 천사/악마, 거짓/진리, 순수/오염, 순결/불결, 등. 태양신화의 이분법적 체계에서 빛은 말씀, 진리, 선, 금, 낮이라면, 어둠은 허구, 거짓, 악, 똥, 밤 등이다. 이분법의 양극에 자리한 항목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열등한 것으로 생산해낸다. 이런 이분법적 위계질서에 기반하여 태양신화는 절대적인 진리를 보증하려고 한다. 반영된 타자를 자신으로 오/인하는 나르키소스처럼 서구 철학의 동일성 주장은 타자의 차이를 유령화하여 자기 안에 합체한다. 동일성에을 바탕으로 한 나르시시즘은 대상을 자신의 복제로 식민화한다. 타자성의 차이를 억압하는 폭력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태양신화는 서구 백인들의 제국주의적 지배논리를 정당화하는 백색 식민서사로 이어진다.

대상을 자기에게로 재흡수 통합하는 것이 반영(反映 | reflection)이라고 한다면, 해러웨이는 반영론에 구멍과 균열을 낼 수 있는 전략으로 회절(回折 | diffraction)에 의존한다. 반영이 직진하면서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면, 회절은 겹치고 주름져서 보이지 않는 것의 흔적에 주목한다. 광학에서 회절은 빛이 장애물을 만나면 일부는 직진하지 못하고 에둘러가는 현상을 뜻한다.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는 오래된 논쟁이었지만 현재 빛의 이중성(반영과 회절 모두)을 인정하는 바, 회절은 빛이 파동임을 보여주는 현상 중 하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서, 빛은 어둠에 의해서 존재함에도, 반영론의 인식론적 우월성에 균열을 내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보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등식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적인 반영론은 인간의 인식구조상 손쉽게 손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흔적 찾기로서 〈회절〉

반영론의 진리독점에 대한 대항서사로서 해러웨이는 회절의 은유성에 의존한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1에서 해러웨이는 회절이란 보이지 않는 것의 ‘지도 그리기’에 대한 은유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비판의식으로서 지도 그리기다. 헤러웨이가 회절실천을 요구한 것은 비/가시적인 대상 속에 유령처럼 겹친 흔적을 찾아내고 목소리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회절현상은 은유처럼 여행하고 이동하는 과정에 오인되고 오역됨으로써 ‘의미화의 에피데믹(epidemic of signification)’처럼 전이되고 전파된다. 그것은 반영처럼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무늬를 기록하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회절패턴이 ‘상호작용, 간섭, 흔적, 차이’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자, ‘의미를 생산하는 서술적, 회화적, 심리적, 영혼적, 정치적 과학기술’이라고까지 일컫는다.

해러웨이의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_만나다: 페미니즘과 기술과학』2은 린 랜돌프(Lynn Randolph)의 그림에서 시작하여 끝난다. 이 책은 페미니스트 젠더 테크놀로지로서 회절의 사례를 추적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 저서의 마지막을 장식한 랜돌프의 그림 〈회절(A Diffraction)〉에서 대상은 하나의 이미지로 반영되지 않는다. 사시처럼 삐딱하고 이중적인 비전(double vision)으로 인해 여자의 머리는 여러 겹으로 겹쳐 보인다. 스크린 뒤 가부장 이미지에 부딪혀 에둘러온 여자의 모습은 물결처럼 흔들린다. 흔들린 자취는 가부장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주술처럼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저서에서 여성의 정체성 탐색은 여성인간©, 앙코마우스™,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뱀파이어, 여신에 이르기까지 미끄러져 나간다.

『겸손한_목격자』에서 해러웨이는 자연분만운동을 실천하는 활동가이자 조산원인 자기 학생이 기저귀 안전핀을 모자에 꽂고 있는 모습에서 회절의 사례를 지도화한다. 자연분만을 상징하는 기저귀 안전핀은 초음파 촬영이나 질경(virginal speculum)으로 중재되지 않는 여성과 아기의 관계를 의미하는 일상적인 물건이다. 기저귀 안전핀은 인공적 탄생에 가려져 비가시화된 자연분만의 흔적을 상기시킨다. 조산원의 자연분만의 손은 남성 의사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철의 손(테크노 광학 기술적인 질경 등)이 대신하게 된다. 그런 흔적을 에두르면서 해러웨이는 탄생의 기원적인 풍경인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담의 창조〉에서 아담은 하느님의 형상을 ‘반영한’ 존재로서, 창조주에 의해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 아직 완전히 태어나지 못한 이브는 하느님의 옆구리에서 천사들과 함께 머물러 있다.

반면 앤 캘리(Anne Kelly)의 만화는 미켈란젤로의 탄생신화에 대한 유머다. 켈리는 아담의 자리에 창조주로서 이브를 배치한다. 이브의 손가락은 컴퓨터 자판을 가리키고 태아는 컴퓨터 자궁 속에 웅크리고 있다. 켈리의 여성은 루벤스, 벨라스케스, 마네 등의 작품에 반영된 누드 여성들처럼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켈리의 만화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배치한 하느님의 자리에 컴퓨터와 키보드가 놓여 있다. 반면 여성은 아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 아담을 탄생시킨 켈리의 이야기는 광학기술 자체가 다르다. 그녀가 클릭하고 있는 컴퓨터 화면은 거울이 아니고, 태아 또한 그녀의 분신이거나 복제가 아니다. 켈리의 임신은 자궁외 임신이다. 태아는 파일 안에 있고 파일이 바뀌면 사라진다. 태아는 일종의 데이터이고, 태아에게 가능한 운명은 출생/낙태보다 복제/내려받기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전핀의 이면에 퇴적된 역사적 자취를 따라가게 되면, 젠더화 된 탄생신화는 내파 되고, 초음파 촬영기술과 데이터로서 태아, 젠더 테크노 산업에 이르는 흔적들이 가시화된다. 이처럼 회절은 하나의 물건 속에서도 퇴적된 기억으로 ‘두터운 지금’ 속에 파묻혀 있는 폐허의 자취들을 가시화한다.

서구 백색신화의 동질성에 구멍을 내는 것이 난잡한 여성적 글쓰기로서 다공성 개념이다. 그것을 잘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메이야수(Claude Meillassoux)는 노예제를 순수혈연 친족관계의 해체로 이해한다. 노예제가 친족결연에 미치는 영향은 경제적 착취계급으로서 노예제와는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주인, 노예, 자유인, 이방인의 범주를 가로지르는 생물학적 재생산은 친족결연을 해체하는 양식이 된다. 여성은 다른 상품과 달리 거래됨으로써 친족관계를 구성하는 특별한 상품이라고 게일 루빈은 지적했지만, 노예 여성들은 혼인관계로 인한 친족구성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흑인노예여성과 백인 농장주 사이에 태어난 혼혈, 혼종 물라토 딸들은 경제적으로 착취되는 노예계급의 재생산체계를 교란한다. 다른 한편 농장주 백인 여성이 불법적으로 흑인 노예 남성과 관계하게 되면 백인여성이 지닌 순수혈통 재생산 능력의 사회적 가치를 백인남성들이 주장하기 힘들어진다.

이처럼 동질성에 뚫린 구멍으로서 다공성은 폭력의 결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경계를 교란하면서 다른 길을 열도록 해준다. 백색신화를 회절 시키게 되면, 태양숭배를 피하고자 밤에만 각성되어 깨어나는 유령, 좀비, 뱀파이어들이 보이게 된다. 그들은 사악하게 죽지도 부패하지도 않으면서 뱀파이어로 부활한다. 이런 흡혈귀들은 기독교 신성가족의 신화를 조롱한다. 그들은 가부장적 혈연가계를 난잡하게 오염시키고 인종적, 성적 혼종을 약속함과 동시에 위협하는 트러블 메이커들이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여성들은 탈자연화된 사이보그/몬스터가 된다. 인종, 국경의 경계선을 허물고 뒤섞이는 몸들은 온갖 혼종성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1세계(First World)가 철저하게 자기 영토의 경계선을 수호하려고 하는 마당에 그것을 허무는 행위는 부적절한 타자들의 저항인 셈이다. 글로벌한 “몬스터의 약속”은 특정한 투쟁과 풍경을 주유하면서 지도화하는 운동이자 여행담이다. ‘시간의 가장자리’, 삶의 가장자리에 선 여자들은 SF적인 ‘또 다른 곳(elsewhere)’에서 뒤섞인다. 여신만이 아는 곳을 상상하고 현실화하는 여성/사이보그/몬스터들은 살아남아 순수의 경계를 허물면서 자신들의 서식지를 만들어나간다.

맹목적인 빛으로 자연을 지배하려 했던 유럽중심적인 서구 계몽주의의적 기획, 순수성, 투명성이라는 동일자의 치명적인 이미지로 지구행성을 지배하려는 인간이성중심주의적 기획, 모든 인간종, 동물종들을 백인의 이미지로 의인화하는 백색신화적 기획 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해러웨이는 장구한 전통을 지배해온 반영담론(기존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회절담론에서 찾는다. 해러웨이는 이런 정치적 상황 분석과 관련하여 대안을 제출한다. 리얼리즘적 반영론의 패러다임에 바탕하여 태양숭배 스토리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자신을 맹목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체들의 가시화 전략으로서 회절

회절은 비체화되고 유령화 된 공간을 에둘러간다. 2022년 8월 8일 서울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집중호우는 신림동 세 모녀의 반지하 셋방을 10분 만에 완전히 잠기게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보았던 관객이라면 영화 속에서 홍수로 인해 반지하(Banjiha) 셋방이 한순간에 잠기고, 변기가 역류하는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기생충〉 개봉 당시 나에게 이 장면은 계급적 양극화의 극적 효과를 노린 것이지만 현실적이기보다 과잉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영화에서 반지하 가족은 가까스로 탈출했다. 영화적 개연성을 위해 감독이 이들 가족을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실은 허구보다 더욱 허구적이고 우발적이며 잔혹하다. 송파구, 신림동, 수원 세 모녀의 죽음과 자살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노약자, 장애인, 싱글맘, 여성, 아이)의 보이지 않았던 삶이 한순간에 드러난 경우다. 우리는 지옥고(반지하, 옥탑, 고시원)를 보면서도 보지 않는다. 그런 공간은 ‘예외적인’ 비상사태에서만 노출된다. 그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날, 나는 직접 나가기는 망설여지고, 코로나 자가격리 이후 익숙해진 배달을 시켰다. 디지털 노동자들이 폭우에 얼마나 위험에 처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나만은 안전한 공간에서 배달된 치맥을 뜯으며 뱀파이어가 된다. 그것도 서이제의 단편 「두개골의 안과 밖」3을 펼쳐놓고서.

서이제의 「두개골의 안과 밖」은 살처분으로 인한 새, 흙, 말, 살에 그려지는 풍경을 묘사한다. 이 단편은 여러 명(사냥꾼, 이주노동자, 수의사, 방역요원 등)의 화자가 각자의 눈에 비친 현실을 대단히 시각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첫 번째 화자는 까치 사냥꾼을 쳐다보면서 과수원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다. 재개발로 서식지를 잃은 까치는 배가 고프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믿었던 시절의 까치는 더 이상 없다. 집도 절도 없고 배고픈 까치들은 전깃줄에 올라앉아 전선을 갉아먹는다. 자주 정전이 초래된다. 사냥꾼들이 산탄총을 어깨에 메고 마을로 들어온다. 그들은 까치 한 마리당 8천의 수당을 받는다. 배 농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나’는 언제든 맞아 죽을 수 있다. ‘나’는 맞아 죽거나, 농작물처럼 팔려나간다. 이주노동자 ‘나’는 까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농장에서 도주하여 남구로역 인력시장에 나간다. ‘나’의 파트너는 원인모를 질병에 시달리고 ‘나’는 돈이 필요하다.

친구는 새를 총살하고, 방역요원 ‘나’는 조류독감에 걸린 닭들을 살처분하는 현장에 투입된다.

병든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아픈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자주 아픈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시름시름 앓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체력이 좋지 않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 잘 낳지 못하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알을 낳지 못하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살이 잘 찌지 않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체구가 작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근육이 너무 많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날고 싶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호기심이 많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고집이 센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질투가 많은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선한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산만한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똑똑한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그리 똑똑하지 못한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화를 잘 내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잘 웃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잘 우는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소심한 닭. (쓸모없음/폐기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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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살처분당하고 생매장당한다. 인수공통감염병인 조류독감에 걸리면 인간이 새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전문가들이 나와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라고 훈계를 한다. ‘나’는 생매장한 닭들의 비명에 잠을 이룰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생매장당하는 닭들의 고통과 공포를 알 수 있을까? 비명을 지르는 닭들의 고막을 찢을 듯한 울음소리들. “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鷄 鷄 鷄 鷄鷄.”5…수십만 마리의 닭들이 어둠 속에 파묻힌다. 닭들은 너무 많고 심지어 안락사조차 시킬 시간이 없다.

“닭의 비명이 계속 들린다. 몸을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피비린내가 난다. 인간들이 급습했을 때 ‘우리는 살려줘,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하지만 인간들은 우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닭장에서 끌려 나와 처음으로 햇빛을 보았을 때 우리는 빛과 함께 죽었다.”6 ‘나’는 쓴 것들을 모조리 지워버린다. 닭들의 고통을 알지 못하면서도 의인화하여 ‘우리’라고 쓰고 있는 자신이 가증스럽다. 하지만 지나치게 참혹한 장면이나 슬픔은 가려야 한다.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으므로. 이성의 언어로는 닭들의 고통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서, ‘나’는 쓴 것을 지운다.

두개골 안과 밖을 넘나드는 허접한 휴머니즘의 언어, 개연성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편협한 이성의 언어로 닭들의 말을 번역할 수 없다. 휴머니즘적 문학이 닭의 고통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인간에게 감동받는 문학, 오로지 인간종을 위한 문학,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유일한 행위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문학, 인간만이 존중받는 조건을 탐구하는 문학,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문학, 인간이 동물보다 잔혹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문학에서 벗어나 ‘나’는 닭을 의인화(擬人化)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의계화(擬鷄化)하고자 한다.

10년 만에 돼지, 닭들을 매장한 땅을 다시 파헤치자 악취가 진동한다. 비닐을 덮고 묻은 돼지들, 닭들은 제대로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생매장된 돼지들은 십 년이 지났음에도 형태가 남아 있다. 썩지 못한 살 들은 지층에 악취와 곰팡이 무늬를 그린다.

현생인류는 간빙기인 홀로세(Holocene)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2000년 파울 크루첸(Paul Crutzen)과 유진 스토머(Eugene Stormer)는 인류세(Anthropocene)를 선언한다. 아직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분분하지만, 그럼에도 인류세라는 개념은 시사용어처럼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인류세는 급격한 기후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행위에 의해서 지질변동이 초래된다는 말이다. 그 말은 인류가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지질변동을 초래할만한 긍/부정적 힘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류가 먹어치우는 닭들의 시체를 상상해본다면, 이미 충분히 인류세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인류세 시대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비과학적이라고 무시되었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이론을 재활용한다. 라투르는 가이아의 양면성을 다시 들고 나온다. 라투르는 자연이 자애로운 것만이 아니라 저주하고 분노하는 복수의 여신이기도 하다는 신화적 상상력과 생태과학적 현상을 결합한다. 그는 인간이 지상의 다른 종들을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철저히 식민화하고 착취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언비어처럼 인간에게 날지도 못하는 날개가 솟아난다. 인간이 ‘새인간’으로 변신한다. 새/인간은 인류세 시대의 신인류로서 새인간이 된다. 유언비어가 현실이 된 마당에 ‘나’는 생매장한 새떼들 중에 새인간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새인간을 살처분하거나 사살할까 두렵다. 자기 속을 닭뼈로 가득 채운 새인간은 오물로 폐기처분된다. 인간쓰레기들은 어디로 갈까?

정보라의 SF 『저주 토끼』7에 실린 단편 「머리」는 인간쓰레기의 종말을 끔찍한 유머로 보여준다. 어느 하루 여자가 변기에서 일어나는 순간 ‘어머니’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윤곽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희끄무리한’ 머리가 변기 속에서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네가 누구냐”라고 여자가 묻자, 희끄무리한 것은 “머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느냐”라고 여자가 묻자, 머리는 “당신이 변기 속에 버리곤 했던 빠진 머리카락, 당신의 배설물과 뒤를 닦은 휴지들, 생리혈 등 배설과 오물들에서 내가 생겨났기에 당신을 어머니로 부르는 것입니다.”8라고 대답한다. 혐오스러운 머리와 마주칠까 두려워 화장실에 가는 것이 공포스러운 여자는 변을 참다가 방광염과 변비에 걸리게 된다. 직장 화장실에서도 머리와 마주한 여자는 공포에 질려 직장을 그만둔다. 여자는 살길을 찾아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아간다. 여자는 딸아이를 낳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목욕시키다가 다시 머리와 마주친다. 머리는, 당신의 아이는 물고 빨고 귀여워하면서 아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분신인 저는 왜 혐오하고 제거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냐고 묻는다. “태어난 경로는 비록 다를지라도 저 역시 어머니의 피조물입니다.”라고 머리가 넋두리를 한다. 머리는 아무리 제거하려고 해도 없앨 수가 없다. 세월이 가면서 머리는 그녀가 배설한 오물로 점점 더 꼴을 갖추어간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 역시 잘 자라서 고만고만한 젊은이가 된다. 여자는 대학생이 된 딸에게서 낯설고도 익숙한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여자는 딸이 놀랍고 대견하고 사랑스럽지만 동시에 부러워서 시샘을 느낀다. 자신은 잃어버린 젊음을 딸에게서 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드디어 완전한 성체가 된 젊은 여자가 변기에서 빠져나온다. 젊은 여자는 그녀의 딸처럼 이제 집을 떠나려 하지만 알몸으로 나갈 수 없으니 어머니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시면 군말 없이 사라지겠다고 늙은 여자에게 부탁한다. 늙은 여자는 어이가 없어서 하필 내가 입던 옷이냐고 묻는다. 평생 어머니가 버린 것들만 받아먹으면서 몸을 얻었으니 새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다고 젊은 여자가 답한다. 늙은 여자는 입고 있던 것들을 전부 벗어준다. 그것을 걸치자마자 젊은 여자의 태도가 돌변한다. 늙은 여자가 어서 떠나라면서 등을 떠밀자, 젊은 여자가 말한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은 바로 너다. 이 순간까지 어둡고 좁고 더러운 곳에서 버티면서 이를 갈았다고 하면서, 젊은 여자는 늙은 여자를 머리통부터 변기에 쑤셔 넣는다.

경로는 다르지만 똥과 아이는 똑같이 여자가 생산한 작품들이다. 아이의 뒤집힌 얼굴이 비체로서 똥이다. 이 단편에서 배설물은 이성을 가진 머리가 되고, 변기는 세계생산의 현장이 된다. 똥과 뇌, 아이와 오물, 입과 항문, 쓰레기와 생산물이 뒤집힌 세계에서 오물이 된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단편에서 인간은 거름으로 돌아가서 거름에서 태어난다. 인간이 배설한 쓰레기로 몸을 입은 머리가 만들어낸 인류세 시대에, 인간은 새인간, 뱀파이어, 거름, 똥이 된다. 인류세의 비상사태 속에서 비로소 오만한 인간은 자신의 타자로서 비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기애의 동질성은 반영의식의 착시현상이며, 그런 동질성과 합체된 유령 같은 에코들은 비체로서 언제나 더불어 함께 있다는 사실을 회절현상은 말해주고 있다. 인수공통감염병이 창궐하는 코로나 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두개골의 안과 바깥에서.


  1. 다나 J. 해러웨이, 사이어자 N. 구디브, 『한 장의 잎사귀처럼』, 민경숙 옮김(서울: 갈무리, 2005). 

  2. 다나 J. 해러웨이,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_만나다: 페미니즘과 기술과학』, 민경숙 옮김(서울: 갈무리, 2007). 

  3. 서이제, 「두개골의 안과 밖」,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2022』(파주: 문학동네, 2022). 

  4. 서이제, 위의 책, 278. 

  5. 서이제, 위의 책, 287. 

  6. 서이제, 위의 책, 288. 

  7. 정보라, 『저주 토끼」(서울: 아작, 2017). 

  8. 정보라, 위의 책,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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