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원체험, 동굴

박상준
박상준은 서울SF아카이브 대표이며, SF 및 교양과학 전문 기획번역가 및 해설가로 근현대 SF 및 과학기술문화 사료들도 수집하고 있다. 『화씨451』과 『라마와의 랑데부』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미래에서 온 외계인 보고서』,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공저) 등의 책을 썼다. 세종대학교와 계원예술대학교 외래교수를 지냈다. 2017 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19 ‘전기우주’(문화역서울284), 2024 미국 남가주대학(USC) 도서관 ‘Sixty Years of South Korean Science Fiction’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예전에 인상 깊게 본 영화 중에 켄 러셀(Ken Russell)이 감독하고 윌리엄 허트(William Hurt)가 주연한 〈상태 개조(Altered States)〉(1980)가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감각 차단 탱크(isolation tank)에 들어간다. 그곳은 시각과 청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에 자극이 전혀 없도록 외부와 차단된 장소로, 그 안에서 주인공은 인간의 체온과 같은 염수(鹽水)에 뜬 상태로 누워 있게 된다.

사실 인간은 외부 자극이 전혀 없는 상태에 익숙하지 않다. 눈에 항상 무언가 보이고 주변에서 끊임없이 소리가 들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외부 자극들을 완전히 차단하면 우리 몸은 당황한다. 그래서 없는 자극을 만들어 내어 환청이나 환각을 경험하기도 한다. 화이트 노이즈나 ASMR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나는 동굴 안에서 감각 차단을 경험하곤 한다. 눈을 뜨나 감으나 전혀 차이가 없는 완벽한 칠흑 어둠(pitch black) 속에서 소리 역시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따금 어딘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는 있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감각이 점점 예민해지는지, 한번은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귀로 들었던 적도 있다. 이게 생리학적으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아무튼 그런 체험은 바깥세상에서는 드물다시피 한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기회가 된다.

동굴 탐사를 다닌 지 십수 년이 되었다.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관광 동굴이 아니라 미공개 동굴에 들어가는데, 해당 지역 지자체의 허가를 받아서 동굴 학술 조사를 하는 팀의 보조원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강원, 경북, 충북에 석회 동굴이 많이 있고 제주도에는 용암 동굴이 있다. 규모가 작은 것들까지 포함하면 전체적으로 1,000개가 넘는 동굴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추정된다.

영화 〈상태 개조〉에서 감각 차단 탱크에 들어간 주인공은 태고의 원시인으로 변신한다. 자극이 차단된 상태에서 인간 내면에 잠재해 있던 원초성이 발현한다는 설정이다. 감각 차단으로 외부와 단절되는 것은 지금도 진행 중인 인류의 역사에서 벗어나 시간이 멈춘 우주의 한 공간에 놓이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 종의 한 개체로서 홀로 우주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나는 동굴 안에서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지금 지구가 아닌 다른 외계 행성의 동굴 안에 있는 거라면?’

데이비드 에게(David Egge)가 그린 가상의 행성의 얼음 동굴에서 본 플레이아데스 성단 그림. 출처: Carl Sagan, Cosmos, New York: Random House, 1980, p. 215.

내가 동굴 탐사를 하게 된 계기는 위의 상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한 그림이었다. 중학생 시절이었던 1980년대 초에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COSMOS)』에서 그 그림을 봤고 어떤 끌림을 느꼈다. 얼음 동굴 안에서 바라본 밤하늘에 플레이아데스(Pleiades) 성단(星團)이 아주 커다랗게 떠 있는 상상도(想像圖)였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예전엔 서울에서도 잘 보였고 지금도 날이 아주 맑으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쌍안경으로는 더 잘 보인다. 『코스모스』에서 본 그림의 플레이아데스는 지구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었는데, 그건 지구가 아닌 다른 외계 천체, 즉 플레이아데스와 훨씬 가까운 어떤 외계 행성의 얼음 동굴에서 관찰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지구에서 400광년 넘게 떨어져 있으니 그 외계 행성도 지구와는 최소한 몇백 광년 떨어져 있는 셈이다.

아무튼 내 뇌리에 그 그림이 각인됐다. 플레이아데스보다는 ‘외계의 얼음 동굴’에 방점이 찍혔다. 살아생전에 결코 가 볼 수는 없을 어떤 꿈의 장소. 그곳에 대한 생각을 계속 품고 있다가, 성인이 된 한참 후에야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동굴 탐사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동굴에서 우주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우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체가 있다. 태양 같은 항성, 지구나 토성 같은 행성, 그 행성들의 둘레를 도는 위성(달), 혜성이나 가스 등등.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원소는 다 같은 것이다. 수소, 헬륨, 탄소, 철 등 지구에서 흔한 물질들이 외계 천체 또한 구성한다. 외계 행성들의 지질학적 작용이나 구조 또한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지구가 아닌 외계에도 동굴이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달에서 동굴이 발견된 바 있는데, 그곳은 장차 건설될 우주기지의 후보지로 유력하다. 달에는 지구와 같은 대기도 없고 강력한 자기장도 없어서 위험한 우주방사선이 그대로 표면에 내리쬔다. 동굴은 이러한 우주방사선을 막아주는 좋은 차폐막이 될 수 있다. 외계의 동굴은 외부의 빛과 소리 등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지구의 동굴과 같은 환경일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에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린다는 동일한 조건을 갖기에, 지구의 동굴 안에 들어가서 여기가 지구가 아닌 외계 천체라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앞세워, 현실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우주 탐사 대신 동굴 탐사를 한다. 일단 동굴 안에 들어가면 인간 사회는 물론 지상의 생태계와도 사실상 분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동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이런 체험을 할 방법이 없다. 감각 차단 탱크는 그 자체가 인공적이라 감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해서 신체적 활동과도 거리가 멀다. 동굴은 지구상에서 우주 탐사에 가장 근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2016년 여름에 촬영한 강원도의 한 동굴 입구부 모습. 바깥의 더운 공기와 동굴 안의 차가운 공기가 만나는 경계면이 뚜렷이 보인다. 사진 제공: 한국동굴환경학회.

실제로 우주생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동굴을 좋은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동굴 안에는 빛이 없기 때문에 광합성이 필요한 식물이 살 수 없으므로, 이를 먹고 사는 동물도 자연스레 없을 수밖에 없다. 동굴 생물 하면 흔히 박쥐를 떠올리지만 박쥐는 동굴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한다. 그런데 동굴 안에서 박쥐가 싼 배설물을 먹고 사는 아주 작은 동물들이 있다. 노래기 같은 종류이다. 그 외에 동굴 밖에서 흘러들어 온 물에 섞인 유기물들을 먹고 사는 미세 생물들도 있다. 이렇듯 동굴 생태계는 빛이 없이 유지되는 매우 독특한 환경을 지니고 있어서 극한 생태계를 연구하는 우주생물학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동굴의 또 다른 특별함은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세계로 넘어왔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석회 동굴에서는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의 종유석이며 석순 등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보통 수천 년 이상이 걸린다. 동굴 자체도 수백만, 수천만 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에 생겨났다. 그 긴 세월 동안 인공적인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다시피 존재해 온 동굴의 모습을 대면할 때면 글자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기분이 든다. 계절의 변화 같은 것도 없이 기온은 늘 일정하다. 물이 흐르는 동굴인 경우라야 바깥에 비가 많이 오면 수량이 한동안 불어나는 정도이다.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지질학적 타임캡슐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시간이 정지한 듯한 동굴 안에 있으면 번잡한 바깥세상을 떠나 별천지에 온 기분을 느낀다. 힐링보다는 겸허함을 얻는 순간이다. 자연 앞에서 잠시 살다 가는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새삼 절감한다.

2017년 겨울에 경북의 한 동굴에서 발견한 얼음기둥들. 사진 제공: 한국동굴환경학회.

미지의 개척지를 찾아 목적지도 모른 채 탐험을 떠나는 것은 대항해 시대 이후 일부 서양인들이 지녔던 이른바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지금은 그러한 정서가 사라진 지 오래다. 지구상의 모든 땅은 구석구석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인공위성으로 샅샅이 관측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곳이 동굴이다. 동굴은 ‘제8의 대륙’이라고 불리곤 한다. 그만큼 동굴은 전 세계에 널리 존재하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숱한 동굴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도로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새로운 동굴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보도된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동굴’이나 ‘가장 깊은 동굴’의 기록은 계속 갱신되고 있다. 몇 년 전에 베트남 퐁냐께방(Phong Nha-Ke Bang) 국립공원의 동굴들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2000년대에 처음 발견된 거대한 동굴의 규모를 목도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나 큰 대학교 캠퍼스가 통째로 몇 개나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압도적인 동굴 공간이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에 비해 강우량이 많아서인지, 생성되는 석회 동굴의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이러한 거대 동굴들을 중국이나 말레이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동굴을 다니다 보면 여러 지방에서 공통적으로 ‘피난굴’이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다. 멀리는 임진왜란부터 가까이는 6·25 전쟁까지, 전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고통을 겪을 때마다 동굴에 들어가 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사연에는 근현대사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다.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곳곳의 동굴에는 그곳에 몸을 숨겼던 양민들이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슬픈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베트남의 한 동굴에 붙은 안내판에서는 베트남전쟁 시기 미군의 폭격을 피해 동굴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최후를 맞았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동굴이라고 하면 거대한 이무기 같은 괴물이 숨어 있는 장소를 연상하곤 하지만, 실제로 동굴 안에서는 덩치가 큰 동물을 마주칠 일이 없다. 앞서 말한 대로 그러한 동물이 살 수 있는 생태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수직 동굴에 떨어졌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굶어 죽은 멧돼지 등의 유골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사람에게든 동물에게든 동굴은 잠시의 휴식처는 될지언정 영원한 터전이 될 수는 없다. 태고의 원시인들에게조차 동굴은 잠자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 로켓 과학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Konstantin Tsiolkovsky)(1857-1935)는 “지구는 인류의 요람이지만 인간은 언제까지나 요람에서만 살 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1 나는 우리 인간이 우주를 동경하고 늘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원초적인 본능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원시 인류는 혈거인이었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은 동굴에서 벗어나 드넓은 세상으로 진출했다. 따라서 지금 다시 동굴을 찾아 들어가 감각 차단을 경험하는 것은 태초의 원체험과 다름없다. 나는 동굴 속에서 시간이 멎은 우주를 느끼며 겸허함을 되새기면서, 우주 저편의 외계 행성에 있는 동굴에서 제각기 비슷한 경험을 하는 외계인들을 상상한다. 인류를 포함한 우주 곳곳의 존재들이 그렇게 우주를 대면하면서 거대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언젠가 그들과 만나는 때가 온다면 나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대는 동굴 안에서 우주를 느껴 보았는가?’


  1. 유럽 우주국(European Space Agency)에서 올린 치올코프스키가 쓴 편지 중 일부를 발췌한 문장이다.
    참고: “SCIENCE & EXPLORATION Konstantin Tsiolkovsky”, European Space,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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