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정의와 수집 제도, 어떻게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반응해야 하는가

양지연
양지연은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교수로, 뉴욕대학교 시각예술경영학 석사,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예술경영학 박사학위와 박물관학 certificate을 취득하고 이후 예술경영과 박물관학, 문화예술정책에 대해 연구해 오고 있다. 주요 연구로 번역서 『큐레이터를 위한 박물관학』(2004)이 있으며, 「뮤지엄과 대중참여 : 크라우드소싱 기반 전시기획의 실천과 전망」(2018), 「박물관 미술관 공공지원의 근거와 방향에 대한 재성찰」(2016), 「소장품의 활용과 개방형 수장고의 교육적 역할에 대한 연구」(2014)가 있다.

변화하는 ‘뮤지엄’의 정의와 소장품의 지위

역사적, 학문적으로 미술관과 소장품은 근원적인 연관성을 갖고 존재해 왔다. 그러나 미술관과 소장품, 수집이 갖는 의미는 지난 20년간 패러다임 전환에 준하는 변화를 겪어 왔다. 이는 최근 국제박물관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이하 ICOM)가 ‘뮤지엄(museum)’의 정의를 개정하려 했던 움직임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ICOM은 2019년 교토 총회에서 이 개정 작업을 준비해 왔다. 12년 전에 개정된 정의1가 오늘날의 사회에서 뮤지엄의 역할과 성격을 담아내기에 미흡하다는 인식에 따라 뮤지엄의 정의 개정을 추진했고, 웹사이트에서 뮤지엄의 새 정의를 공모하기도 하는 등 협의회 내외부에서 다양하게 의견을 수렴해 총회에 회부된 새로운 뮤지엄의 정의는 아래와 같았다.

뮤지엄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비판적 대화를 위한 민주적이고 포용적이며 다성적인 공간이다. 현재의 갈등과 도전을 인정하고 다루면서 뮤지엄은 사회를 위해 신탁 받은 유물과 표본을 소장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다양한 기억을 보호하며, 유산에 대한 모든 사람의 공평한 권리와 접근을 보장한다. 뮤지엄은 이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뮤지엄은 참여적이고 투명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 세계의 평등과 안녕에 기여하는 목적을 갖고 수집, 보존, 연구, 해석, 전시하고 이해를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공동체와 활발히 협력한다.

이 정의는 ICOM 산하 각종 위원회와 분과의 다수가 반대하거나 유보적 입장을 표명해 채택이 보류됐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뮤지엄 정의에 대한 논의를 통해 뮤지엄과 소장품의 변화된 위상과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개정안에서 뮤지엄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적 대화를 위한 민주적이고 포용적이며 다성적인 공간’, ‘다양한 공동체와 협력’하며, ‘현재의 갈등을 인정하고 다루는’ 공론장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새로 제안된 정의에서도 수집과 기억의 장치로서의 역할은 변화하지 않는 뮤지엄 본연의 기본 기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뮤지엄 상(像)에서 수집이 그 자체로 목적으로 간주되는지, 아니면 민주적, 포용적, 다성적 공간으로서의 미션을 구현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독려될 것인지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다양한 기억’, ‘다양한 공동체’, ‘다성적 공간’이라는 표현은 뮤지엄이 더이상 해당 학문에 의거한 전문가적 해석과 계몽주의적 교육에 기반한 공공 기관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중재하고 콘텐츠를 구성하기 위해 공동체와 함께 일하는 문화적 플랫폼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변화된 뮤지엄 상을 반영한다.

18세기 이후 물리적으로 공중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뮤지엄의 소장품은 19세기 초반에 들어서면 공공의 소유인 공공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2 나아가 일린 후퍼-그린힐(Eilean Hooper-Greenhill)이 21세기의 새로운 뮤지엄 상으로 제안한 ‘포스트뮤지엄(post-museum)’ 개념은 소장품의 축적이 아닌 활용에 초점을 두면서, 더욱 다양한 계층이 접근할 수 있고 주도적 권한을 갖는 공유재로서의 소장품을 상정한다.3 이는 개방형 수장고, 수장고형 전시, 소장품의 디지털화와 오픈 액세스, 대중적/대외적 활용 등과 같이 소장품을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이동성과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방식을 구현하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미술관 소장품과 수집 패러다임이 변화해 온 양상과 논제들을 살펴보고, 서울시립미술관을 중심으로 수집 제도의 현재와 미래 비전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수집의 새로운 패러다임

‘소장품(collection)’은 수집 행위를 전제로 한다. 수집의 지속적인 과정과 소장품의 역동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수집 패러다임에서는 ‘소장품 형성(collection development)’의 개념을 중요시 한다. ICOM의 국제수집위원회(COMCOL) 의장을 역임한 멘쉬(Leontine Meijer-van Mensch)는 “모든 뮤지엄들은 소장품의 역사성과 오늘날의 미션이 요구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 소장품을 (뮤지엄의) 새로운 미션에 통합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지속적인 수집이다. 수집 행위는 역사적으로 성장하며 구성된 소장품을 존중하는 것이며, 동시에 소장품의 내적 일관성과 차별성에 기여할 수 있다”라고 하며 지속적인 수집을 통한 소장품 형성의 의미를 제안한다.4

소장품은 문화적 정체성과 개인 및 집단의 기억, 사회문화적 가치를 생산하고 조정하는 문화적 과정이자 행위, 즉 ‘의미와 가치 생산의 문화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장품을 축적된 물건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 생산의 과정으로 보는 관점은 소장품과 수집에 대해 한층 역동적이고 현재 진행형의 관점을 부여한다. 이는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이 그들의 소장품을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컬렉션(growing collection)’으로 간주5하는 것이나,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이 소장품을 현대미술의 폭넓은 관점을 보여주고 다층적인 해석에 열려있는 ‘진화적 컬렉션(evolving collection)’으로 규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6 소장품을 여전히 연구 중인,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 ‘활성 소장품(active collection)’과 연구가 완료된 ‘비활성 소장품(passive collection)’으로 구분하는 개념7 역시 소장품에 대한 해석의 다중성,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소장품의 재해석에 주목하는 현대 뮤지올로지의 동향과 연관된다. 소장품과 수집은 하나의 시점에 완료돼 박제화 되는 것이 아닌, 과거를 존중하면서 오늘날의 사회문화적 가치와 연결시키는 문화적 과정, 지속적인 성장과 진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미술관은 유일한 수집 기관이 아니며 다양한 수집 주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미술관 외에 미술은행, 기업, 개인 컬렉터, 작가 재단, 아카이브, 정부 등 미술품을 수집하는 다양한 기관 및 개인들은 뮤지엄과 비(非)뮤지엄을 아우르는 일종의 수집 공동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의회가 ‘유산 공동체(heritage community)’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대두된 ‘새로운 수집(new collection)’은 뮤지엄과 여타의 수집 기관들 간의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이러한 유산 공동체 개념에서 뮤지엄은 유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역할을 하거나, 뮤지엄이 개인과 그룹이 자신의 유산을 수집하는 플랫폼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모델로 제시되기도 한다.8 이는 뮤지엄이 가치 있는 유산의 수집 기관으로서의 독보적인 위상을 갖고 배타적인 소유의 모델을 견지해 온 것과는 철학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라익스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이 공동수집한 렘브란트(Rembrandt)의 <Marten Soolmans, Oopjen Coppit 초상화>(1634).
(출처: ‘Rijksmuseum welcomes Rembrandt wedding couple’ July 1. 2016. (2021년 9월 15일 검색))

소장품의 ‘공동 수집(joint acquisition)’은 유산 공동체 개념에 따른 새로운 수집의 또 다른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테이트 미술관(Tate)과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연합(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은 화상 안소니 도페이(Anthony d’Offay)로부터 공동으로 기증받은 도페이 컬렉션을 공동 소장하고 있다. 주요 근현대 작가 작품 1,600여 점으로 이루어진 도페이 컬렉션은 2009년부터 《예술가의 방(Artist Rooms)》이라는 제목으로 영국 전역에서 연중 순회 전시되고 있다. 이는 작가의 개인전 형태로 젊은 관람객 층에 영감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과 함께 기획하는 원칙을 따른다.9 최근 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번에 있는 반 아베 미술관(Van Abbemuseum)과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은 몬드리안 재단(Mondriaan Fonds)의 후원으로 독일 출신 작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비디오 설치 작품 4점을 공동 구입했다.10 두 시립미술관은 이외에도 세 점의 공동 수집 작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의 협업을 확대해 갈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밝혔다. 네덜란드 라익스 미술관(Rijiksmuseum)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은 2016년 렘브란트의 초상화 2점을 경매사 크리스티(Christie’s)로부터 구매해 공동 수집했는데, 이는 두 나라의 국립 기관이 공동 수집한 최초의 사례다. 소유권은 각 기관에 있되 두 작품을 항상 함께 전시하고 두 기관을 번갈아가며 전시하는 조건으로 공동 수집됐다.11

이러한 공동 수집은 작품의 희소성과 구입 비용 절감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공유와 협업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려운 수집 방식이다. 디지털 가상 공간은 수집 공동체의 협업을 촉진하는 네트워크를 더욱 용이하게 하고 있다. 일례로 유럽 연합의 문화적 연대 프로젝트인 ‘유로피아나(Europeana)’는 뮤지엄, 도서관, 아카이브가 네트워크된 디지털 플랫폼이다. 유럽 전역의 1,500여 개 기관들과 협력해 교육, 연구, 향유를 위해 문화유산을 디지털 형태로 공유, 활용할 수 있도록 데이터 리소스를 수집하고 가공하며 이를 웹사이트에서 제공한다.12 다양한 수집 주체 간의 네트워크는 ‘모두의 소장품’이라는 명제를 구현하고 사회의 문화적 자산을 풍부하게 하는 방안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미술관의 소장품을 단순히 시민이 소유권을 갖는 공공재에서 나아가 공유재로 간주한다면, 이는 공유의 주체들이 소장품의 수집과 활용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미술관은 누구와 소장품을 공유하는가? 연구자, 예술가, 회원 및 후원자, 시민 대중 등 미술관이 공유의 주체로 간주하는 대상은 다양하게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뮤지엄에 대한 시민 대중의 참여는 전시, 교육과 같은 공공 프로그램에서 나아가 학문적 전문성과 정치적 의제에 통제돼 온 수집의 기능에도 도입되고 있다.13 미술관의 수집에 시민이 참여하는 방식은 아직 일반적이지 않으나 몇 가지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솔라몬 R.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은 일종의 멤버십 프로그램인 ‘젊은 컬렉터 의회 수집 위원회’(Young Collectors Council Acquisition Committee)’와 ‘사진 의회(Photography Council)’를 통해 큐레이터가 제시한 작품들에 대해 회원들이 의견을 내고 투표하는 방식으로 수집 결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제공하고 있다.14 조지아 미술관(Georgia Museum of Art)은 불용 처분하고자 하는 소장품을 결정하는 데 관람객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관람객 투표를 시행한 바 있다. 물론 수집과 폐기에 미술관 내부 학예직과 전문가가 아닌 대중 다수를 참여시키는 방식은 더욱 폭넓은 계층의 참여와 관여를 유도하기 위한 미술관의 시도를 보여주는 예시며, 수집 방식의 본류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례들이 보여주는 바는 오늘날 미술관이 수집과 그와 연관된 활동(기록, 보존, 수복)에 민주주의적 참여를 시도하는 새로운 방식의 수집에 열려있어야 하는 과제를 준다.

미술관, 특히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 작품을 수집하는 현대미술관에서 ‘시간성’의 문제는 수집에 관해 고유한 문제를 제기한다. 뮤지엄은 일반적으로 신중한 수집을 위해 수집 대상에 대해 시간적 거리를 둔다. 수집 대상의 가치를 역사적, 비평적으로 검증할 시간과 객관적 거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서구의 국립 미술관들이 작가의 사후 10년 또는 작품 제작 후 20년 정도가 지난 후 구입하는 것을 합의된 정책으로 채택해 온 것은15 이를 반증한다.

현대미술관들 역시 신중한 수집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숙고 기간(period of incubation)’을 두고자 한다.16 그러나 현대미술관이 추구하는 동시대성은 수집에 내포된 축적과 역사화라는 개념과 근본적인 모순을 갖고 있고, 이는 수집 제도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영구 소장하지 않는 미술관, 이른바 ‘쿤스트할레(Kunsthalle)’나 ‘아트 센터’ 등은 이러한 개념에서 추동된 것이다.17 동시대 미술의 기치를 들고 최근 10년 안에 제작된 미술만을 다루는 뉴 뮤지엄(New Museum)이 1977년 설립 당시 작품의 소장 기간을 10년으로 설정해 반영구적 소장품 개념을 표방하기도 했으나 현재 소장품 없는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는 상황은, 현대미술관의 ‘동시대성’이 미술관 수집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을 요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18 또한 오늘날 미술의 범위나 매체가 변화하면서 달라지는 작품의 물리적 수명은 수집, 보존의 문제와 연계되고, 퍼포먼스 및 뉴미디어 등 비물질적인 시간 기반 미디어의 경우 제작 이전에 구입하기도 하는 등 현대의 미술관 수집에 있어 시간성의 개념이 변화하고 있다.19 생존 작가와 밀접한 연계성을 갖는 ‘동시대적 수집(contemporary collecting)’과 수집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거나 사전 아카이빙하는 ‘미래적 수집(prospective collecting)’은 역사적, 비평적 가치 검증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적인 ‘회고적 수집 (retrospective collecting)’과 구별되는 동시대 미술관의 수집 방식이다.20

서울시립미술관의 수집 제도, 현실 조건과 제도적 비전

서울시립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해야 하는가? 35년 간의 수집을 통해 이제 약 5,200점에 달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은 어떤 기준에 의해 수집되고 있으며 어떠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국제박물관협의회의 『뮤지엄 윤리규정』은 ‘소장품 정책(collection policy)’의 중요성과 명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소장품 정책은 미술관이 무엇을 왜, 어떻게 수집하고 관리해야 하는가를 공표하고 있고, 그 핵심 내용은 미술관의 미션에 의거해 소장품의 주제, 시대적, 지역적 범위 등 수집의 범주(scope)를 명기하고 있다.21 수집 범위는 수집 및 선별의 실질적인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하며, 수집 범위 외의 수집은 신중하게 제한돼야 한다는 것이 소장품 정책의 기본 원리다. 1985년부터 소장품을 수집한 서울시립미술관에 2003년 수집보존과가 설치되고 2010년에야 『서울특별시립미술관 작품 수집 및 관리 규정』 (2010.07.19.)이 제정됐으며, 지금도 대부분의 주요 공립 미술관에 소장품 정책 관련 규정이 부재한 사실은, 우리 미술관 문화에서 소장품 관리 업무가 있을 뿐 수집 기관으로서의 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무엇을 어떻게 수집해야 하는가에 대한 공식적인 합의나 근거가 미약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소장품 수집 및 관리 규정에 수집의 범위는 어떻게 제시돼 있는가. 『서울특별시립미술관 작품 수집 및 관리 규정』(2013.07.16. 일부 개정)을 보면 미술관은 “학문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현대의 국내외 미술작품 또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미술작품”을 수집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수집 범위가 미술관의 소장품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데 충분하고 적절한 수집 기준을 제시해 왔는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22 대다수가 소장품 없이 정책적 판단에서 건립된 우리나라 공립 미술관들의 태생적 속성을 생각할 때, 상위 규정에서 수집의 범주를 구체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중장기 및 연간 작품 수집 계획을 통해 이러한 수집의 전략과 우선순위를 더욱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관장의 임기가 짧고 리더십 기반이 취약한 공립 미술관에서 일관성을 갖고 수행하기 어려운 한계를 노출한다. 결국 소장품 정체성 형성을 위해서는 수집 정책 단위에서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수집의 범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도출하고 명문화하기 위한 숙의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수집의 범위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역사적 맥락과 조건, 그리고 현재와 미래적 비전을 담아내야 하는데, 먼저 미술관과 수집에 관한 근본 미션의 차원에서 고려돼야 할 지점을 제기할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수집은 역사적인 시각을 견지하며 한국 근현대 미술사적 문맥에서 균형을 이루는 접근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시립미술관의 성격과 강점 영역에 집중하면서 끊임없이 동시대성을 갖는 비역사적 수집을 지향할 것인가. 이 두 가지 접근은 반드시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문제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역사적 맥락과 현재적, 미래적 비전에 따른 수집 범위의 설정 가능성이다. 첫째는 메트로폴리스 수도를 대표하는 시립 미술관, 서울시 행정과의 연계성을 갖는 공립 미술관으로서의 성격이 수집에 반영되는 부분이다. 이는 여타 지역 기반의 공립 미술관과 상이한 조건을 제시하며, 서울시 공립 미술관 및 박물관들과의 관계와 차별성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을 노정한다. 둘째는 기존의 소장품과 프로그램으로부터 향후 수집의 강점과 기회 요인을 검토하는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분석 자료에 의하면, 2000년대 이후 제작 작품(최근 20년의 동시대 미술)이 54.4%로 과반수23이며, 천경자 컬렉션(한국화, 여성 미술)과 가나아트 컬렉션(민중 미술)이 특화 컬렉션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미디어 아트), 서울사진축제(사진)와 같은 역사성을 갖고 진행돼 온 정기 전시 역시 지속적인 수집의 기반이 된다. 셋째는 분관 정책이다. 서서울미술관, 남서울미술관, 서울사진미술관, (가칭)평창동미술문화복합공간(아카이브)의 지리문화적, 기능적 특성은 서울시립미술관 수집 정책의 주요 고려 요소가 될 것이다. 예컨대 아카이브는 작품과 비등한 위상을 갖고 소장품에 편입될 수 있다. 넷째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미술관 내외부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장소 특정적 커미션 작품의 수집 가능성이다. 이러한 서울시립미술관 고유의 조건과 비전은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의 정체성과 성좌를 구성하는 주요 맥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미술관은 수집 범위의 분명한 기준과 소장품에 대한 지속적인 검토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 수집 행위를 통해 소장품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미술관의 소장품은 개별 소장품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적 성격을 갖는다. 이처럼 모여진 것으로서의 힘을 갖추려면 수집 범위로 나타나는 소장품의 정체성과 우선순위를 판단할 수 있는 수집 전략이 요구된다. 산발적으로 성장한 소장품, 다시 말하면 분명한 선별 기준이 없이 지속된 수집은 내적 일관성과 차별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수집 방식은 소장품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수집은 작품 수집 및 관리 규정에 의해 구입, 기증, 관리 전환 등의 방법으로 이뤄진다. 수집 방식 별로 볼 때 총 5,172점의 소장품 중 65.7%가 구입을 통해, 34.1%가 기증으로 수집됐다.24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구입은 공고, 학예연구직 수집 작품 제안, 관장 섭외, 경매 구입으로 이뤄질 수 있는데,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구입은 대부분 공모를 통해 구입된 작품이다. 공모 구입은 미술관의 수집 방식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뮤지올로지 차원에서 수집은 수집 정책과 전략에 따라 학예 연구를 바탕으로 미술관 내부에서 수집 대상을 발의하고 선별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공모제는 미술관의 일반적인 수집 방식은 아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1999년 전문 관장이 부임하면서 “작품 없는 미술관은 존립할 수 없다. 소장품의 수준이 곧 미술관의 수준”25이라는 공언과 함께 미술관의 차별화된 소장품 구입 및 수증을 시도했다. 공모 구입 제도는 2003년도에 도입했다. 작품 구입을 통한 작가 지원의 역할과 공모라는 형식이 갖는 절차적 개방성, 공정성으로 인해 공모 구입은 근 20년 동안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수집의 주요 방식으로 지속돼 왔으나, 미술관의 수집 방식으로 공모 구입 형태가 갖는 한계는 뚜렷하다. 매년 2,000여 점에 이르는 공모 신청 작품 중 보통 약 7% 정도의 작품이 최종 구입되는 데서 초래되는 행정적 비효율을 차치하더라도, 현행과 같은 공모 구입제로 미술관 수집 정책과 전략에 따른 소장품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공모 구입 제도가 갖는 한계는 수집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비평적, 시간적 거리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공모 구입 신청자의 대다수는 작가고, 화랑과 개인 소장자가 일부를 이룬다. 컬렉터(유저)나 큐레이터(매개자)가 아닌 작가(제작자, 창작자)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수집 제안하는 형태이다. 창작자가 학술적, 미학적 가치를 스스로 평가해 제안하고 그 안에서 재선별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는 근본적으로 수집 대상과의 비평적 거리를 두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26 또한 수집 제안 작품이 대부분 최근작인 점과, 몇 시간의 일회적 소장 작품 추천 회의에서 다수결 방식으로 수집 작품이 추천, 결정되는 구조는, 수집 정책에 근거해 작품을 조사 및 연구하고 판단, 선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공모 구입 위주의 수집 방식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논의는 미술관 내외부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수집 방법에 대한 여러 대안적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사 연구 과정을 통해 수집 대상에 대한 비평적,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는 원론적인 방안일 것이다. 미술관의 수집 정책과 전략에 근거해 학예 연구 조직을 통해 수행된 조사 연구를 바탕으로 수집 제안이 이뤄져야 하고, 학예 조직의 연구 기반 구입 추천에 의한 수집이 미술관 소장품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기본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 조직은 팀제나 외부 연구자와의 협업 등 유연한 형태로 전문성과 개방성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장기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집은 소장품의 기록, 보존 및 관리, 전시 및 교육적 활용에도 필수적인 과정이다.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 학예 분야별로 수집 권한을 가진 큐레이터들이 수집 대상의 가치와 시장 가격, 소장처를 조사하고 검증하는 데 수년의 조사 연구와 집단적 논의 과정을 거쳐 수집하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집을 통해 미술관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비평적, 시간적 거리를 바탕으로 한 조사와 연구, 논증의 과정을 요구한다. 더불어, 이러한 조사 연구를 통해 도출된 수집 전략 내에서 수집 범위와 전략, 우선순위를 더욱 명확하게 제시해 구입 작품을 공모한다면 공모제는 소장품 형성에 더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왜,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기술적인 방법론이나 구입 방식의 균형의 문제를 넘어, 의미있는 소장품 형성을 위한 수집의 비전을 모색하는 열린 태도와 새로운 수집 방식을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행정적, 재정적 뒷받침, 그리고 미술관의 전문성에 대한 시 행정의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 중심에는 더욱 분명한 수집 기준과 연구에 의한 지속적인 수집이 소장품의 내적 일관성과 차별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조건임을 확인하고, 연구-수집-다큐멘테이션-보존을 재구조화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함께 소장품을 사회문화적 의미와 가치 생산의 역동적인 과정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비전과 수집 네트워크, 민주주의적 참여를 통해, 소장품이 미술관의 사회적 미션을 구현하는 중심으로 기능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방안들을 공론화하는 것이 요구된다.

*본고는 2020년 7월 24~25일 서울시립미술관이 개최한 SeMA Agenda 2020 ‘수집’ 〈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심포지엄 발표문을 각색 및 재편집한 원고입니다.


  1. 2007년에 채택된 현재 ‘뮤지엄의 정의(museum definition)’는 다음과 같다. “뮤지엄은 교육과 연구, 향유를 목적으로 인류와 그 환경의 유형 및 무형의 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소통, 전시해 사회와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고, 공중에게 개방되는 비영리의 항구적 기관이다.” ICOM 웹사이트에서 원문과 개정안에 대한 논의를 살펴볼 수 있다.  

  2. Leontine Meijer-van Mensch & Peter van Mensch, “From Disciplinary Control to Co-creation: Collecting and the Development of Museums as Praxis in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y,” in Encouraging Collections Mobility: A Way forward Museums in Europe (Helsinki: Finnish National Gallery, 2010), 34.  

  3. Eilean Hooper-Greenhill, Museums and the Interpretation of Visual Culture (New York: Routledge, 2000), 152–153. 

  4. Peter van Mensch & Leontine Meijer-van Mensch, New Trends in Museology (Celije: Museum of Recent History, 2011), 20–22. 

  5. 테이트 모던의 시니어 리서치 큐레이터인 이숙경과 필자와의 면담 중, 테이트 모던, 2019년 2월 16일. 

  6. 뉴욕 현대미술관은 2019년 10월 재개관하면서 웹사이트에 소장품과 전시 재편의 지향을 기술하고 있다.  

  7. Freda Matassa, “Active Collections: Revisiting our Collection for More and Better Use,” in Encouraging Collections Mobility: A Way Forward Museums in Europe (Helsinki: Finnish National Gallery, 2010), 107–135. 

  8. Peter van Mensch & Leontine Meijer-van Mensch, New Trends in Museology, 26. 

  9. 테이트 모던 웹사이트 참조.  

  10. Stedelijk Museum and Van Abbemuseum jointly acquire four works by Hito Steyerl,” posted by artdaily. 

  11. Agence France-Presse, “France and Netherlands to jointly buy rare Rembrandts,” The Guardian, (September 30, 2015). 

  12. 유로피아나 웹사이트 참조.  

  13. Peter Van Mensch & Leontine Meijer-Van Mensch, New Trends in Museology, 22. 

  14. 구겐하임 웹사이트 참조.  

  15. Peter Van Mensch & Leontine Meijer-Van Mensch, New Trends in Museology , 21. 

  16. 같은 책, 21. 

  17. 1936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의 자매 기관으로 설립된 보스톤 동시대미술관(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ICA)이 1948년 이미 역사화 된 ‘모던 아트(modern art)’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미술관 명칭에 최초로 ‘동시대(contempora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뮤지엄’ 대신 ‘인스티튜트’라는 용어를 차용한 것은 이러한 동시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ICA는 “어떠한 시도가 인정되고 고전이 되면 더 이상 여기에서 전시될 수 없고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하며 오랫동안 영구 소장을 하지 않았다. 이 러한 정책은 2005년까지 지속됐다. 

  18. 미술관 관장들의 국제적 연합체인 미술관관장협회(AAMD)는 ‘미술관(art museum)’을 정의하면서 미술관의 대부분은 영구 소장품을 보유하나 전시와 교육의 바탕이 되는 소장품을 보유하지 않은 미술관들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Association of Art Museum Directors, Professional Practices in Art Museums (Association of Art Museum Directors, 2011), 4.  

  19. 뉴 미디어 아트 고유의 비물질적, 과정 지향적, 상호 작용적 속성에 따른 미술관 수집에 대한 문제는 다음을 참조하라. Beryl Graham, ed. New Collecting: Exhibiting and Audiences after New Media Art (New York: Routledge, 2017). 

  20. Peter Van Mensch & Leontine Meijer-Van Mensch, New Trends in Museology, 21–23. 

  21. Professional Code of Ethics for Museums (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2003); Barry Lord and Maria Piacente, Manual of Museum Exhibitions (Maryland: Rowman & Littlefield, 2014), 396. 

  22. 이러한 수집 범위의 모호함은 구입 공고문에도 반영된다. 최근 2년간의 소장품 구입 공고에는 구입 대상 작품을 1)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 중 주요 사조, 운동, 경향에 중요한 역할을 한 미술사적 대표 작품, 2) 한국 현대미술사의 맥락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작가들의 시기별, 매체별, 양식별 대표 작품, 3) 역량 있는 원로 및 중진 작가와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신진 작가의 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23. 작가 연령으로는 1970년대 출생 작가가 가장 많아 21.2%를 차지하고 있다. 

  24.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작품 분석 자료, 서울시립미술관 수집연구과 내부 자료, 2020년 4월 13일. 

  25. 이원홍, 「인터뷰, 서울시립미술관 초대관장 유준상씨」, 『동아일보』, 1999년 5월 17일. 

  26. 서울시립미술관 규정에 의해, 수집 제안 작품은 내부 ‘수집선별회의’의 선별을 거쳐 ‘소장작품추천 회의’(내외부 전문가 8인 이내, 전문가 인력풀에서 회의시 위촉)에서 수집 작품이 추천된다. 이는 ‘가격평가심의위원회’(외부 전문가 5~7인으로 구성, 전문가 인력풀에서 회의시 위촉)의 가격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미술관운영자문위원회의’(외부 전문가와 시의원 10~15인으로 구성, 2년 임기로 시장이 위촉)에서 구입이 최종 의결된다. 위원 간 상호 중복 위촉은 금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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