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저급들〉 1장: 슬픈 퀴어 초상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그리 간단하지 않은 질문 하나.

Q. 퀴어들은 왜 셀카를 자주 찍을까?
A1. 퀴어들만 셀카를 자주 찍는 건 아니다.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무시하자.)
A2.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불가능한 퀴어들에게 데이팅 어플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와 같은 SNS에서 연애 대상을 물색하는 건 지난 십수 년간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 퀴어들은 팔리기 위해 셀카를 찍는다. 좋든 싫든 셀카를 찍어야 사진을 요구하는 ‘시장’에 자신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괜찮은 대답. 나쁘지 않다.)
A3. 슬프니까. (←정답.)

퀴어들은 슬프다. 행복한 세상 때문에 슬프고, 퀴어들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세상 때문에 슬프고, 그런 세상이 퀴어들의 불행을 없는 셈 취급하기에 슬프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말을 변형하자면, 그러므로 퀴어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슬픔을 물려받는다는 뜻이다.1 세상이 숨기기를 요구하는 퀴어들의 자격 없는 슬픔은 그들의 몸에 고스란히 축적된다. 슬픔 주머니로서의 몸. 동시에 세상이 바라는 행복이 덕지덕지 투사된 이 몸은, 그 자체로 퀴어들 자신에게 디스포리아를 유발한다. 퀴어들의 몸, 정확히는 몸 이미지는 두 개로 찢어져 있다. 한 쪽에는 세상이 원하는, 세상에 적응한 행복한 몸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세상에게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 버림받은 슬픈 몸이 있다. 그래서 타자의 가장 강력한 은유인 거울 앞에서 퀴어들은 자신의 온전한 몸을 찾지 못하고 분열한다. 거울 앞에서, 타자 앞에서 둘로 찢어진 퀴어들의 몸은 슬픔이 새어 나오는 틈새를 봉합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글이 밀어붙이게 될 주장처럼, 그래야만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거울 앞에서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슬픈 퀴어의 첫 번째 얼굴로 미셸 푸코를 거론하는 건 결코 무리가 아니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대목일, 그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외모를 객관적으로 서술 혹은 비평하는 부분을 보자. “눈앞 거울에 피할 수 없는 이미지가 나타난다. 야윈 얼굴, 구부정한 어깨, 근시의 눈, 민둥머리. 정말 못생긴 모습. 그리고 내 머리라는 이 추한 껍데기,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이 철창 속에서 나를 보여주며 돌아다녀야 한다. 바로 그 창살을 통해 말하고, 바라보고, 남에게 보여져야 한다. 이 피부 아래 머물며 썩어가야 한다.”2 놀랍도록 부글대는 자기혐오(“정말 못생긴 모습”)가 텍스트의 표면을 뚫고 솟아오른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동류 의식을 동반한, 둔중한 충격을 받았다. 푸코씩이나 되는 철학자도 이런 생각을 한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푸코씩이나 되는 철학자도 이렇게나 ‘동성애자’ 같은 생각을 한다고? 자긍심을 북돋우는 단어인 퀴어(queer) 대신, 정신병리에 속했던 자신의 과거를 잊지 못하는 동성애자(homosexual)라는 단어는 푸코의 경우 썩 잘 어울린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몸이라는 장소를 잊기 위해 유토피아를 탄생시켰을 것이라 가정하며 다음과 같이 질투심 어린 문장을 쓴다. “요정의 나라가 있다면 거기서 나는 매력적인 왕자가 되고, 눈꼴신 멋쟁이 젊은이들은 모두 새끼 곰같이 흉하고 털이 잔뜩 난 모습이 될 것이다.”3 거울 앞에서 푸코는 세상이, 그리고 스스로가 내면화한 이상인 “매력적인 왕자”가 될 수 없는 “추한 껍데기”인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본다. 어쩌면 『헤테로토피아』의 기획 전체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그러므로 치명적일 대목을 쓰면서, 푸코는 자신의 슬픔을 수치심 속에서 헤집어보기도 했을까? 아니면 이 대목이 갖는 기능상의 필요만을 온전히 의식했을까? 어찌되었건 덕분에, 그는 ‘슬픈 퀴어 아카이브’4의 중요 인사가 된다.

당시에는 ‘인버트(invert)’라 불렸고 현재로선 FTM 레즈비언에 가까울 『고독의 우물』의 주인공 스티븐이 거울 속 자신의 몸을 보고 읊조리는 대목 역시 슬픈 퀴어 아카이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를만 하다. “그날 저녁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근육질의 다부진 어깨, 작고 단단한 젖가슴, 운동선수처럼 날렵한 옆모습을 가진 자기 몸을 싫어하면서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생 동안 그녀는 영혼을 죄는 기괴한 족쇄와도 같은 이 몸을 끌고 다녀야 했다. (중략) 그녀는 자기 몸을 애통해 하면서 연민에 가득 찬 손가락으로 자기 젖가슴을 만지고 어깨를 쓰다듬었다. 자기 손으로 쭉 뻗은 허벅지를 쓰다듬어 내려갔다. 아, 불쌍하고 가장 버림받는 몸이여!”5 그에게 그저 달려 있을 뿐인 “기괴한 족쇄”인 몸은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아름답다. 다소 자아도취적인 이 대목에서 우리는 슬픈 스티븐이 꿈꾸는 자신의 몸 이미지와 그로부터 버림받은 행복한 몸, 이성애─재생산 시스템에서 완벽히 건강하게 기능하는 여성의 몸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리를 본다. 스티븐은 스티븐이 원하는 이상적인 몸으로 있을 수 없어서 불행하고, 또한 ‘기괴한 족쇄’인 자신의 몸을 세상에 양보할 수도 없기에 불행하다. 한편 평생 남장을 하고 살았던 스티븐의 창조자, 래드클리프 홀(Radclyffe Hall)은 당대 ‘동족’ 집단에서도 단연 이해받지 못하는 슬픈 몸이었던 것 같다. “로메인은 래드클리프 홀과 [그의 파트너인ㅡ필자 주] 우나 트루브리지의 남장이 우습다고 생각했고 (중략)”6 …이 짧은 문장에서 나는 찌르르한 슬픔이 전염되는 것을 느낀다.

동시대 슬픈 퀴어들 역시 거울을 보며 세상이 바라는 행복이 투사된 자신의 몸 이미지와 그저 슬픔 주머니에 불과한 자신의 육체 사이에서 격렬한 디스포리아를 경험한다. 이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푸코나 홀처럼 그러한 경험에 대해 길게 쓸 것이다. 아니면, 우선 셀피를 찍거나.

201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용어인 ‘제4세대 페미니즘’은 주로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결집된 (비교적 젊은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의 특수한 행동주의적 양식들을 포함하는 용어다. 국내의 경우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폭발적으로 가시화된 ‘넷페미’들의 양상이 바로 제4세대 페미니즘의 한 예시가 될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셀피 페미니즘(selfie-feminism)’은 지난 10여 년간 페미니즘─행동주의의 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통상 ‘셀카’로 번역될 수 있는 ‘셀피’는 휴대용 전화기의 보급과 함께 널리 퍼진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자화상 또는 초상 사진)의 한 종류로, 주로 여성들이 찍는다는 편견 또는 사실 때문에 진지하지 못한 사진의 하위 장르로 취급되어 왔다. 이렇게 셀피에 주어진 낙인까지를 긍정하는 ‘셀피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이성애중심주의⋅정상신체주의가 억압하는 소수자의 자기표현을 해방하고 소수자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고안되었다. 미국에서는 페트라 콜린스(Petra Collins), ‘슬픈 소녀 이론(Sad Girl Theory)’의 오드리 월런(Audrey Wollen)과 같은 예술가들이 연약하고 우울하고 ‘마른 백인’의 ‘텅 빈’ 자아 이미지를 연출해 이를 ‘소녀적 공격성’으로 재전유하는 예술─실천을 펼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겠지만 국내에서는 팀 ‘W/O F.(Without Frame)’가 동명의 잡지 『Without Frame!』(2023년 4월 현재, 2호까지 발간)을 통해 (셀프) 포트레이트 또는 셀피를 소수자들의 정치적⋅미학적 ‘말하기’의 일부로 다루고자 시도하고 있다.

1992년생의 젊은 예술가이자 제4세대 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 성장한 오드리 월런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전시장으로 사용한다. 그는 미술사적으로는 권위있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널리 비판 받아온 익숙한 이미지들을 차용해, 자기 자신을 주인공 삼는 셀피를 찍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의 셀피 시리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업 중 하나는, 통증관리센터나 병원을 배경으로 환자용 의복이나 장치를 착용한 채 패션지 스타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것이다. 병실에서 셀피를 찍는 것은, 모든 것이 정량화⋅제도화⋅수치화된 의료제도의 시스템에서 “작은 자율성(a small bubble of autonomy)”7의 빈틈을 열어준다. 월런은 “자신의 삶의 비율을 계산하고 잘라내고 봉합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ㅡ필자 주] 자율성이 없는 인형, 마네킹처럼 취급되지 않는다고 느끼기란 어렵다”라고 말한다.8 하지만 셀피를 통해 자신의 몸을 몇 번이고 기록하는 수행/상연(performance)을 통해 그는 자기 자신이 여전히 예술적 언어로 말할 수 있는 “한 인간(a person)”9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비건강’함에 도취된 부정적 이미지를 전시함으로써, ‘건강’ 개념이 은폐하고 있는 남성⋅재생산⋅정상신체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이를 공격하고자 한다. “우리의 증상(symptoms)은 우리의 무기로 변형될 수 있다. 우리의 증상은 힘(strength)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10

물론 우리는 월런의 방법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을 참기 어려울 수 있다. 오늘날처럼 SNS를 통한 자기 홍보와 자기과시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아니 어쩌면 그런 디지털 ‘잡일’이라는 조건 없이는 자기표현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의 방법론을 “존재하기 또는 생존하기의 방법론”11이라 정의하는 것은, (그의 ‘사진을 찍을 만한’ 외모, 스타일에 대한 지적은 차치하고서라도) 디지털 매체가 매개하는 주체화─예속화의 과정을 간과한, 지나치게 순진한 서술이 아닌가? 어쩌면 ‘셀피’는 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단지 죽어가기의 기록이 아닌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이다. 셀카는 공허를 생산한다.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나 허영심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가 셀카중독을 낳는다. (중략)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다.”12 그러나 이에 대해 월런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 것이다. 부정적 나르시시즘,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진 것이라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할, 끝내 자기 자신을 파괴할 부정적 나르시시즘의 말 없는 자매들인 우울, 수치, 불안과 같은 감정들은 애당초 슬픈 소녀들의 몫으로 지상에 남겨진 것이라고. 그러므로 월런은 슬픈 소녀 이론을 통해, 소녀들의 슬픔의 역사를 (성차별적인 세상에 대항해) 소녀들이 반응하고 저항해온 역사로 재탄생시키자고 제안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의 편에 서기를, 그것과 함께 (그 끝이 공허일지라도?) 가속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소녀들의 슬픔은 조용하거나, 약하거나, 부끄럽거나, 멍청하지 않다. 그것은 활동적이고, 자율적이며, 명료하다. 그것은 반격의 한 방법이다.”13 이처럼 오드리 월런의 ‘셀피’는 행복한 정상 신체의 이상과 불행한 퀴어 육체 사이의 디스포리아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하는 디지털 ‘잡일’이자 정치적⋅미학적 실천이다. 셀피를 옹호하며, 나는 기꺼이 ‘슬픈 소녀 이론’의 ‘소녀’를 ‘퀴어’로 바꿔 읽는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는 내내 내게 들러붙어 있던 이미지를 언급하고 싶다. 그것은 작가 조이솝의 전시 《사우다드: 데드 네이밍(SAUDADE: Dead Naming)》(2022.5.27-7.10, 김종영미술관)이다.14 전시 제목의 ‘사우다드’는 포르투갈어로 이제는 부재하는 대상이나 인물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뜻하고, 부제에 직접적으로 적힌 ‘죽음(dead)’는 전시가 작가 자신의 상실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15털실, 비즈, 조화와 같은 키치한 재료들을 주로 사용하는 희고 검은 조이솝의 조각들은, 나에겐 한편으로 그것들이 조이솝의 ‘자소상(自塑像)’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스틱한 에로티시즘과 연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것을 더 죽은 것으로 만드는 사물의 숭고화와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장은 비석 같은 흰 석고 판넬들로 에워싸여 있고, 중심에는 마치 무대처럼 설치된 좌대 위에 어디에도 발 붙이지 못하고 떠 있는 인체 조각들이 놓여 있다. 얼굴이 흐릿한, 얼굴이 파내어진 인체 조각은 어딘가 미성숙하고 성별을 특정할 수 없는 몸을 하고 있다.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 손이, 척추가 끝나야 할 곳에 꼬리 같은 형태가 비죽 삐져나온 인체 조각들은 사보타주 당한 그리스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짝 타버린 인외의 시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옆에 놓인, 이전의 용도와 상관없이 변형된 의자는 기실 존재론적으로 인체 조각들과 마찬가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 제 가치를 잃고 죽은 사물. 그렇기에 무엇과도 대체 불가능한, 사물이기만 해도 되는 사물. 복제 또는 재생산 가능성이 말살된 괴상한(queer) 조각들의 프릭쇼로부터 등을 돌리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테이블 위에 놓인 흰 아이폰이다. 무심하게 놓인 아이폰에서 재생되는 것은 조이솝의 셀피와 그가 작성한 짧은 텍스트의 교차로 이루어진 6분 11초짜리 비디오다. 회색조의 영상 속에서 작가는 주로 무표정이다. 그러다 지나가듯 등장하는 ‘눈물 셀카’. 나는 어쩐지 눈을 떼지 못하고 영상을 끝까지 다 본다. 두 눈이라는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슬픔과 우연히 마주쳤기 때문에 마치 내가 책임이라도 져야 할 것처럼.

편집: 김깃


  1. 원 문장은 다음과 같다. “페미니즘을 계승한다는 것은 슬픔을 계승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To inherit feminism can mean to inherit sadness).”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성정혜, 이경란 옮김(서울:후마니타스, 2021), 138. 

  2.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4), 28. 

  3.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29. 

  4. 사라 아메드의 표현인 “불행한 퀴어 아카이브(unhappy queer archive)”를 변형한 것이다.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164. 

  5. 래드클리프 홀, 『고독의 우물 1』, 임옥희 옮김(파주: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교보문고 e-book 어플리케이션 90%. 

  6. 안드레아 와이스, 『파리는 여자였다』, 황정연 옮김(서울: 에디션더블유, 2008), 161. 

  7. Emily Wells, “Audrey Wollen’s Feminist Instagram World,” Artillery Magazine, May 3, 2016, https://artillerymag.com/audrey-wollens-feminist-instagram-world/

  8. Emily Wells, “Audrey Wollen’s Feminist Instagram World.” 

  9. Emily Wells, “Audrey Wollen’s Feminist Instagram World.” 

  10. Emily Wells, “Audrey Wollen’s Feminist Instagram World.” 

  11. Ava Tunnicliffe, “Artist Audrey Wollen on the Power of Sadness,” NYLON, July 20, 2015, https://www.nylon.com/articles/audrey-wollen-sad-girl-theory

  12.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이재영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6), 26. 

  13. Ava Tunnicliffe, “Artist Audrey Wollen on the Power of Sadness.” 

  14. 이 웹사이트에서 전시도록을 열람할 수 있다. https://adocs.co/books/saudade-dead-naming/

  15. 데드 네이밍(dead naming)은 트랜스젠더 혐오 표현의 한 수단으로,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더 이상 쓰지 않는 과거의 이름을 고의로 부르는 행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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