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랙’에서 만나 ― 프로덕트와 세계 짓기

오천석
오천석은 미술 안팎에서 활동하는 작가 콜렉티브 ‘업체eobchae’의 ⅓이다. 화면에 글을 쓴다.
업체eobchae
업체eobchae는 김나희, 오천석, 황휘로 구성된 오디오-비주얼 프로덕션으로, 비평적 관점이 소거되지 않은 재화와 용역을 생산 및 거래한다. 업체eobchae는 컴퓨팅 장치와 크고 작은 스크린의 주변을 배회하며 계약에 명시된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제각기 할 일을 한 뒤, 솔직히 만족스럽지 않은 돈을 받고 흩어진다. 일하며 발생한 고통의 총량이 모두의 효능감을 초과하지 않도록 다양한 서류를 만들며 변수를 통제한다. 이 과정은 퍽 회사 같다. 그러나 나는 작가적 프로젝트의 프로덕션(제작)이 전술한 문장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 채로 모두가 달릴 때 비로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처럼 최선이 찾아온다고 믿는다.

1. 프로덕션에 대해

영상 1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인원은 최소 1명, 평균 3명이며, 많아지면 8~9명까지 늘어난다.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부터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에 이르는 과정은 짧으면 2개월, 길면 1년이 소요된다. 시작, 중간, 끝에 합류하는 인원이 다 다르며, 이들 중 대다수는 영상이 익스포트 될 때까지 다른 참여자를 한 번도 못 볼 가능성이 크다. 실례로 2019년부터 업체eobchae 프로덕션에 참여해 온 3D 디자이너 이용아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김소희는 2022년에 처음 만났다. 이들은 모 전시 오프닝에 시간 차를 두고 도착했으나, 내가 소개하기 전까지 서로를 못 알아봤다고 한다.

가. 고통 매니지먼트

프로덕션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커질수록 참여자의 ‘현전감’은 줄어든다. 이들은 노동의 최종 산출물로부터 소외된 것일까? 나는 애초에 서로서로 모르는 편이 더 낫다고, 대화가 많아질수록 무언가 잘못 굴러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통제에서 나오는 얄궂은 효능감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고통의 경감을 말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총량이 적고, 그중에서도 ‘인간적 커뮤니케이션=노이즈’에 덜 기댈수록 마찰이 줄어든다. 이를 위해선 매 단계의 워크 스코프와 마감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나는 업체eobchae의 프로덕션이 참여자 모두에게 일정량의 고통을 할당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이를 최소화하는 책임을 도맡는다. 담당자의 결정을 쉽게 번복하지도, 작가적 고민이라는 명목 하에 이전 스테이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최소한의 합의점을 만족하면 빛이 새어 나오는 방향으로 건너간다. 새벽의 걱정스러운 대화 없이도 모두가 문제없이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프로덕션은 성공적이다. 절차를 이행할 때마다 모두가 모여 그 의미를 고통스레 곱씹는가? 그럼 그 프로덕션은 실패했다.

모든 프로덕션의 실제는 노동의 시작점과 끝점 사이에 위치하며, 산출물이 나올 때까지 견뎌야 하는 무한히 긴 트랙일 수밖에 없다고, 포말처럼 터지는 개념어를 걷어내면 결국 늘 빈약해 보이는 예산 테이블과 모두의 불만을 절감할 ‘고통 매니지먼트’가 남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미화는 이 소동을 벌인 작가의 몫이며, 소스를 짜깁기하기 전까지는 작업의 정당성을 참여자에게 설득하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작가는 자발적으로 야기한 대단히 낮은 ROI(Return on Investment | 투자자본수익률)를, 어쩌면 다르게 쓰일 수도 있었을 연루된 이들의 시간을 클라이언트의 마음으로 관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업체eobchae와 업체의 프로덕션은 어떤 지점에서 변별되는가?

나. 프로덕션의 실제

업체eobchae는 이름처럼 회사에 준한 조직이 되어 간다. 이 판단은 어떤 경험에 근거한 것일까. 여기서 나는 프로덕션 전반을 이끄는 업체eobchae의 ⅔, 김나희와 황휘를 소환해 그들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천석(이하 ‘오’): 우리 셋은 회사에 다니기도, 다녔기도 해. 회사는 업체eobchae와 ‘무언가를 만든다’는 광의의 공통점을 가진 듯한데, 회사 안팎에서 산출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업체eobchae와 어떻게 비슷했어?

김나희(이하 ‘김’): 이것이 천석의 매니지먼트의 영향인지 때문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사람들의 리소스와 우리가 투자할 수 있는 역량의 슬롯을 최대한 잘 매치한다는 점? 과하게 욕심 내지 않고 그 안에서 프로덕션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하려고 한다는 점이 회사와 좀 비슷했어.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실험을 여러 번 거칠수록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도 사실인데, 리소스 할애가 많이 될 것 같으면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자고 제안하는 그런 지점.

그런데 업체eobchae가 우리의 풀타임 잡[전업]이 아니다 보니 퍼포먼스의 정량적인 확인이나 리소스 할당이 비교적 헐거운 것도 사실이고, 그 헐거운 리소스 배치가 작업이 될 만한 뭔가를 생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방향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

황휘(이하 ‘휘’): 공통점은 내가 만드는 결과물의 파일 포맷이 같은 정도인가?

조직도를 보면 회사 인원도 업체eobchae와 비슷하거나 어쩔 땐 더 적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회사 일을 할 때 더 아마추어처럼 일한 적도 있는 것 같아. 미리 스케줄링하거나 키노트 토대로 PPM(Pre-Production Meeting | 제작 준비 회의)을 진행하는 등의 프로덕션 과정은 얼추 비슷한 면도 많은 것 같네.

: 업체eobchae가 회사보다 더 회사처럼 굴러간다고 느낀 적 있었어?

: 나는 오천석이 짜둔 스케줄을 봤을 때. 이렇게 촘촘히 짜 놓은 스케줄을 회사에서 본 적이 없어.

: 맞아, 그것도 되게 회사 같고. 또 업종마다 다르겠지만, 사회적인 경향을 예측하고 그 트렌드를 맞춰 가려고 하는 점도 비슷해. 작업의 스펙터클을 어떻게 하면 담론적으로 잘 팔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도 그렇고.

: 프로덕션을 작동시키기 위한 일련의 그림자 노동도 회사처럼 굴러가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 같아. 콘티를 장표로 정리해서 제작자에게 보낼 때라든가. 이처럼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노동도 조직이 굴러가게 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한 듯하네.

: 맞아, 근데 그림자 노동에 노동 시간을 투입해 가며 질을 높이게 되는 이유가 우리 모두 기준이 높아서 그런 것 같아. 이렇게 해가면 애들이 별로 안 좋아하겠지, 이러면서. (일동 웃음)

: 맞아. 그리고 대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최소화하려는 목적도 있지. 작가가 발의한 프로젝트라 하더라도 누군가한테는 그냥 일이니까, 그들의 고통을 덜려면 그 자료만 봐도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냉정한 마스터플랜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 동시에 작가적 표현의 영역에서 참여자에게 자율성을 많이 부여하게 되는 지점도 있어. 어떤 테마의 소스를 이러이러한 레퍼런스를 토대로 언제까지 전달해달라고 하고, 그 규격에 맞도록 티키타카를 거치고.

: 그렇다면 업체eobchae가 회사와 어느 지점에서 대별된다고 봐?

: 방향성을 세팅하는 주체가 나인 점과 방향성에서 지적, 감각적 쾌가 가장 크게 작동한다는 점?

: 관객 피드백이나 그런 방면에선 무관심하지. 그리고 친밀성에서 나오는 매끄러운 의사 합의 과정.

: 시장성과 사용성 측면에서는?

: 우선 시장성에서는 테스트를 하지 않는다는 점. 가상의 오디언스를 떠올리고 결과물을 내는데, 라이브 된 뒤에 실제 관객에게 어떤 효능이 있었는지 알려고 하지도, 최적화하려 하지도 않잖아.

: 사용성 측면에서도 기존 프로덕트의 플로우나 원리를 뜯어보기는 하는데, 어떤 가상의 유저가 이미 작업 내에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 같아. 그들이 너무 잘 쓰고 있어서 실제 관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서 아무도 안 봐도 그냥 잘 작동하는 것 같고.

: 관객은 그냥 본인.

: 타자는 그냥 끼어들어서 보는 거지.

: 작가와 작업은 다람쥐 통처럼 계속 굴러가고, 관객은 통 너머로 보고 있고.

: 웬만한 회사보다 프로페셔널하게 결과물을 산출하지만 구성원이 그 결과엔 무관심한 조직이라…

작가적 확신을 가지고 구상됐으며, 사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나 유능하게 이행해야 하는 준산업적 프로젝트. 나는 그 결과물을 ‘프로덕트’에 미달과 초월의 양가적 함의를 지닌 접두사 ‘파라-(para-)’가 붙은 ‘파라-프로덕트(para-product)’라 부르겠다.

다. 파라-프로덕트(para-product)

디지털 비즈니스에서의 ‘프로덕트’는 특정 고객 세그먼트의 수요를 충족해 이윤을 발생시키는 경험적 구성물을 말하며, ‘서비스’의 동의어로도 쓰인다. 프로덕트는 고객에 집착한다. 소비자의 정동이 프로덕트의 향방을 좌우하기에, 기획자는 론칭 전부터 누가 그 제품을 어떻게 쓸 건지 사전에 엄밀히 정의하며 사용성의 정도를 높여 나간다.

파라-프로덕트는 디지털 프로덕트의 제작 방법론을 직접적으로 참조하며 미술계보다 산업계의 레퍼런스와 친연성이 높으나, 결국 제품의 형상을 띤 비제품이라는 점에서 프로덕트에 미달한다. 사용성 원칙에 기초해 만듦새 있게 만들었으나, 실제 쓰임새는 소거되어 있다. 예컨대 업체eobchae가 2022년 제작한 가상의 가상 화폐 ‘업체코인’은 이더리움 테스트넷에 게재되어 있으며 메타마스크를 통해 주고받기도 가능하나, 그 용례는 스크립트의 설명과 프로토타입, 파라-프로덕트가 통용되는 픽션적 영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고객의 부재는 파라-프로덕트가 프로덕트를 넘어서는 지점이기도 하다. 업체eobchae의 파라-프로덕트가 전시된 공간을 생각하면 밝고 텅 빈 쇼케이스 현장이나 컨벤션 센터, 또는 관객 없는 블랙박스가 떠오른다. 유휴 공간에 가까운 그곳에선 스크린 두어 개와 스피커가 호젓하게 전력을 소모하고 있다. 파라-프로덕트의 고객은 그곳에 없다. 프로덕트만큼 심리스 하게 작동하나,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거나 문제를 애써 해결하려 하지 않고 초연하다.

대신 고객은 스크립트에, 파라-프로덕트가 산업계의 표준이 된 화면에 등장인물로서 내재한다. 건축물 투시도의 행인처럼 천연덕스레 포착되며, 어떠한 의심 없이 화면 안쪽에서 파라-프로덕트를 작동시킨다. 그렇기에 파라-프로덕트는 제작되는 순간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다. 파라-프로덕트는 일견 유사한 비평적 디자인의 입장과 달리 실세계의 고객/관객/사용자의 일상에 침투하려 들지 않는다.

2. 왜 파라-프로덕트를 만드는가

파라-프로덕트는 실세계의 고객에 무관심하기에, 무기능적인 대신 최소한의 물리적 요건만을 필요로 하기에, 퍽 자기 충족적이다. 파라-프로덕트를 위해 지갑을 열 고객은 없다. 그렇기에 이윤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참여자의 고통을 감수해가며 프로덕션을 꾸리는 까닭, 굳이 프로덕트의 근사치를 지향하는 이유와 그 효과는 무엇인가?

가. 디지털 프로덕트와의 경주

파라-프로덕트는 가장 경쟁력 있는 프로덕트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기 위해 태어난다. IPO(Initial Public Offering | 주식 신규 상장)를 꿈꾸는 초집약된 인지 노동과 자본이 넘실대는 ’디지털 소비재 마켓‘은 가장 경쟁적인 시장으로 손꼽힌다. 이곳에서 디지털 프로덕트는 독점을 향해 달리며, 경쟁 끝에 독점에 성공하는 순간 제품이 서비스되는 지역의 생활양식은 일시적으로 표준화된다. 사용자의 일상은 후속 주자가 균열을 내기 전까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파라-프로덕트는 프로덕트가 형성한 생활양식의 표준을 역설계해 이에 도전하며, 경쟁을 건너뛴 채 미래의 사용자를 화면 내로 끌어들인다. 이윤을 포기한 대가로 나는 사변적 동역학을 동력 삼아 전능하나 핍진한 준제품을 출시한다. 펀딩과 피치 덱(pitch deck)은 잊어라. 고객이 없으면 있다고 치는 정신 나간 스타트업 멤버가 되어 동시대의 인터페이스를 그럴듯하게 뜯어고치는 경험은 제법 근사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프로덕트에 우리가 매료되는 지점을 모사하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환경.” 이것이 김나희가 말하는 파라-프로덕트의 미덕이다.

그리고 어떤 기술적 경향은 파라-프로덕트의 도전에 기꺼이 응한다. 아직 무르익지 않아 유동성이 모여드는 신기술의 비전과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연기하며 스스로 포촘킨 파사드를 세운 파라-프로덕트는 외견상 프로덕트와 쉽사리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직 프로덕트가 고도화되지 않은 웹3 스타트업의 백서는 탈중앙화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해 웹2 패러다임이 전복된 새로운 세계 질서를 그린다. 빅테크를 향한 정당한 의심과 유동성, 실리콘밸리 이데올로기 특유의 자신감이 결합될 때 시장의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은 해결해야 할 페인 포인트(통점)로 격하된다.

나. 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 | 초소형 국가)의 청사진

파라-프로덕트는 파괴적 혁신을 꿈꾸는 프로덕트와 경주하며 체급을 키우고, 나아가 독자적 정치 기반을 형성하려 드는 시장의 망상을 시뮬레이트 한다. 파라-프로덕트 메이커(작가)는 고삐 풀린 자본이 허물고 다시 세우는 세계를 빠르게 선취해 그 귀결점에 먼저 다다를 수 있다.

회사가 주체인 프로덕트식 세계 짓기의 예시는 도처에 있다. 코인베이스의 전 CTO(Chief Techonology Officer | 최고기술책임자)인 발라지 스리니바산(Balaji Srinivasan)의 책 『The Network State(더 네트워크 스테이트)』는 국민국가 체제에 사망 선고를 내린 뒤, 공통의 암호 화폐를 사용하는 초국가적 디지털 커뮤니티의 독자 세력화를 주장한다.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시스테딩 협회(The Seasteading Institute)의 마이크로네이션 프로젝트 사례도 있다. 사업가, 벤처 캐피털리스트이자 미국 보수주의 정계의 킹 메이커로 알려진 피터 틸(Peter Thiel)은 시스테딩 협회에 펀딩해 ’모든 형태의 정치로부터 벗어난(escape from politics in all its forms)’ 자유지상주의 유토피아를 바다에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독자 세력화를 꿈꾸던 아인 랜드(Ayn Rand)식 기획은 프로덕트를 실현하기 위한 많은 재원과 기술적 역량, 그리고 스테이트로부터 벗어난 스테이트를 실현해야 한다는 내재적 모순 때문에 표류했다.

이처럼 현실의 자원이 비전을 압도하기 시작할 때, 마이크로네이션은 청사진 단계로 되돌아온다. 반면 마이크로네이션과 세계 짓기라는 같은 꿈을 공유하는 파라-프로덕트는 스테이트의 보조금으로 빌린 스크린에 그 꿈을 안전하게 투사한다. 파라-프로덕트는 세계 시장의 현기증 나는 변혁에 상징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그림자처럼 그 흐름과 평행선을 그린다. 업체eobchae는 이 간극에 서서 생산관계부터 행동양식까지 전 지구적으로 표준화하는 디지털 소비재의 반투명한 세계를 멋대로 패스트 포워드한다. 파라-프로덕트가 위치한 우리의 사변적 시장 속에서 수십, 수백 개의 기업이 융기했다 사라진다. 틀려도 맞아도 안도하는 예측 시장(prediction market)처럼 그 자체로 쾌감을 일으킬 추측들.

나는 왜 가짜 프로덕트를 진짜 프로덕션을 거쳐 프로덕트인 양 제작하는가? 이유는 이러한 무용한 효능감 때문이다. 고객, 관객, 사용자의 자리가 없는 파라-프로덕트를 만들 때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와 경주하며 이를 유희적으로 합선시킬 여지가, 근미래의 새로운 테스트베드가, 발생한다.

-끝-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와 전시의제의 소주제를 발굴하는 2022 SeMA 의제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록되었습니다.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는 ‘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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