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저급들〉 3장: 뉴플 스케치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언제나 처음 10분이 문제다.1 10분 내에 이곳을 즐길 마음을 먹지 못한다면 곧장 귀가하는 게 낫다. 입장하자마자 따귀라도 맞은 듯 얼떨떨한 당혹감에 온 몸이 얼어붙겠지만 서둘러야 한다. 주의: 이미 취한 여자들을 쳐다보지 말 것. 어설픈 관심은 언제나 재앙으로 돌아온다. 시지각을 마비시키는 강렬한 사이키 조명과 귀청을 때리는 몰취향한 클럽 믹스셋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데 온 힘을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미 이곳에 이미 적응한 적나라한 몸들에 적응해야 한다. 얼마 전에는 틱톡에서 유행하는 음악인 〈2 phút hơn〉이 나왔다. 모두가 즐거워하며 매스게임이라도 하듯 일제히 좌우로 격렬하게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엉덩이를 흔드는 팸(femme)들을 구경하는 부치(butch)들만 빼고. 그들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며 빛났다.

어떻게 묘사해도 거북스러운 이런 광경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빠르게 취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는 안 된다. 취하면 원하는 만큼 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오늘 놀고 싶은가? 아니면 이대로 집에 가고 싶은가? 재차 강조하건대 중요한 건 마음을 먹는 일이다. 마음이 먹어진다면 거기가 어디든, 심지어 레즈비언 클럽이라 해도 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안다. 이제 10분 내에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것이다. ‘이걸 넘어서야 해.’ 속으로 생각한다. ‘이 곳의 분위기와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즐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곳과 이곳의 사람들을 혐오하는 마음을 완전히 잊어야만, 지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공자 왈,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에서 처음 봤다. 그래, 될 것도 같다. 즐길 수 있을 것도 같다. 프리 드링크로 받은 테킬라의 효과. 뱃속이 불이라도 난 듯 뜨거워지며 취기가 오른다.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유행가들에 겨우 올라타 정신을 해방시키려는 찰나, 한껏 미소를 머금은 바니걸 복장의 노동자 두어 명이 세팅된 샴페인과 스파클러(폭죽의 한 종류), LED 조명이 번쩍이는 피켓을 들고 한 테이블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걸어간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아하, 저 테이블에서 샴페인을 시켰구나. 샴페인 주문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요란한 세리머니를 끝낸 후 바니걸 복장의 노동자들은 조용히 스테이지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자정 이후로는 이런 일들이 영원처럼 반복된다. 내 영혼은 조용히 경악한다. ‘여기서 나가야 해.’ 이런 광경을 견딜 수 없는 이유는 내가 페미니스트라서도 아니고 레즈비언 혐오자라서도 아니다. 물론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레즈비언들이 돈을 쓰고 노는 방식에 넌더리가 나서다.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노는 방법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이젠 측은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오만한 자세로 한껏 호들갑을 떨어대는 내게 일행이 말한다. “친구가 테이블 잡아놨대. 샴페인도 시켰대.” 나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냉큼 일행의 뒤를 따르면서 레즈비언들이 돈을 쓰고 노는 방식 운운에 대한 무가치한 트집 같은 건 집어치운다.

빼곡히 클럽에 들어찬 인파를 뚫고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고 나서야 레즈비언–몸의 덩어리가 제각기 얼굴이 있는 다른 몸들로 분리된다. 대부분은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깨끗하고 빤빤한 얼굴들이다.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건 사방을 경계하며 자신의 긴 머리 여자친구를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감싼 부치와 그런 부치에게 안겨 있는 팸 커플이다. 이들은 전혀 춤을 추지 않는다. 이들은 그냥 서서 클럽에 모인 사람들을 노려보기만 한다… 도대체 왜? 물론 이들만 그런 건 아니다. 흡연 공간 근처에서는 어두운 색의 옷을 입은 한 무더기 짧은 머리의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를 노려본다. 마치 노려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처럼. 물론 노려보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아무 때고 그럴 기회가 있는 건 아니니까. 때로는 누군가가 술을 사줄 것도 아니면서 내게 말을 건다.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도어맨(doorman), 아니 도어퍼슨(doorperson)으로 4년 동안 일하고 난 뒤에는 눈빛만 봐도 누가 나와 어설프게 알은체 하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된다. “퀴어방송 맞으시죠?” 퀴어방송은 내가 10년 동안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의 이름이다.2 나를 ‘퀴어방송’이라 부르는 그는 심지어 내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내가 맞다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 그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쌩하니 뒤돌아 간다. 대부분은 그러려니 하지만 어떤 날은 유독 뾰족하게 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와 나는 같은 편이고 그러므로 너는 나를 당연히 환영해줘야 한다고 믿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리고 한 번도 숨긴 적은 없지만, 나는 이곳의 사람들을 그 어떤 부류의 사람들보다 더 빨리 분류하고 판단한다. 그게 사실과는 다르다고 해도. 누군가가 자신을 선택해주길 꿈꾸는 초짜, 쭈뼛거리며 주변을 서성이는 단기 체류자, 주로 가장자리에서 혼자 맥주를 들이켜는 잘생긴 부치, 서로만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블루스를 추는 긴 머리 팸 커플, 만취해 미친듯이 춤추는 팸, 그런 팸들 근처를 떠나지 않는 체격 좋은 부치, 플로어 위의 솔로 플레이어, 아무 데나 추파를 던지는 나르시시스트, 화장이 진하고 장신구가 많은 스무 살, 키 작고 마른 소년 부치, 자정에는 돌아가야만 하는 성실한 운동 중독자 등등. 최근에는 나와 미래의 내 친구들을 위한 분류 범주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ㅡ노익장을 과시하고 싶은 탈색한 3040. 스테레오타입은 언제나 가혹하다. 위의 분류표에는 당사자들이 해명할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제대로 알려진 적 없는 이 분류표는 내부자들이 가지고 놀 만한 몇 안 되는 장난감 중에 하나다. 오가는 말이 없는 이곳에서 보여지는 몸들은 질식하리만치 다채로운 레즈비언 분류학을 번성시킨다. 그리고 이 분류학에는 당연하지만 에로틱하고 페티시즘적인 기호들이 흘러넘친다.

이곳처럼, 어떤 공간은 분명 과잉 성애화된다. 당신이 원래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성별이나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든 간에, 당신의 모든 몸짓과 말과 눈길은 고스란히 이곳이라는 예외적 공간에서만 허락되는 비밀스러운 암호로 재배열된다. 이곳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전부인 스타일의 분류학은 이곳을 지배하는 암묵적인 규칙이다. 여기서 고리타분한 이분법이 유용해진다. 당신은 머리가 길고 화장을 했기에 부치를 찾는 팸이다. 당신은 머리가 짧고 가죽 부츠를 신었기에 팸을 찾는 부치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그냥 복장도착자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종의 롤플레잉이지만, 그렇다고 진짜가 아닌 건 아니다. 부치들 팸이든 복장도착자든 이곳에 모인 몸들은 서로의 질량에 대응해 서로에게 감응하고 충돌한다. 잠재적으로 당신을 원하거나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그러므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에로틱한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당신은 자신의 몸을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감각한다. 이제 내 몸은 단순히 내 것만은 아니다. 내 몸은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몸, 다른 몸들과 관계하는 몸, 그러므로 다른 몸들에게 다른 쾌락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몸이다. 이곳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이 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ㅡ충분히 성공적이지는 않은 어설픈 플러팅, 장난스럽지만 진지한 친구들과의 스킨십, 딱 다른 사람들만큼만 취하기,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낯선 이들과 어울리기, 무엇보다 멈추지 말고 춤추기. 이곳 바깥의 논리로는 온전히 포착될 수 없는 모호한 친밀성의 제스처를 발명하고 마주치는 몸들 사이의 힘을 증폭하기. 그러므로 이 몸은 매개체다. 이 몸은 사용되기 위해 여기 있다.

10분은 진작에 지났다. 이곳을 밀어내는 척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는 아직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다. 나는 패배감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 문제 많은 몸들을 이길 방법이 도무지 없다는 사실에.3

편집: 김깃


  1. 이 글의 제목인 「뉴플 스케치」는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의 「런던 스케치(London Observed: Stories and Sketches)」를 차용한 것이다. 2023년 5월 21일 현재 서울시에 위치한 레즈비언 클럽은 총 3군데, 뉴플(뉴플로우), 에이스, 앰비션이다. 굳이 이 글의 제목에 뉴플을 언급한 까닭은, 뉴플이 가장 크고 오래된 업장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 나오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뉴플과 에이스에서 겪은 나의 경험을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은 없어진 두 클럽, 라리(라브리스)와 핑크홀에서의 경험에 관하여는 필자의 다음 두 편의 글을 참고하라. 「레즈비언 클럽이 구린 이유」 https://m.blog.naver.com/hotleve/220007980251, 「Leaving Labris(라브리스를 떠나며)」 https://m.blog.naver.com/hotleve/220803450286

  2. 퀴어방송(진행자: 리타, 철수)은 2013년 2월부터 2023년 5월 현재까지 103회의 방송을 진행했다. 다음에서 청취가 가능하다. https://www.podbbang.com/channels/5610

  3. 이 글의 후기에 가까운 각주: 이 짧은 에세이에서 다루지 못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레즈비언 바와 클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꿀벌이 사라지는 건 걱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레즈비언 바와 클럽이 사라지는 걸 반드시 걱정해야 할까? 해외 매체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주로 도심에 위치한 레즈비언 바와 클럽이 피해갈 수 없는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안정성을 추구하는 레즈비언들의 라이프 스타일, 레즈비언에 국한하지 않고 좀더 스펙트럼이 넓은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세대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예컨대 홍콩에 위치한 한 레즈비언 바의 업주는, 홍콩이 진보하면서 굳이 레즈비언 바가 아니더라도 눈치 보지 않고 아무 가게에서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진단한다.
    또 다른 문제 하나는 내가 앞서 언급한 서울시 내의 레즈비언 클럽들 중 어떤 곳도 성별정정 이전의 MTF 트랜스젠더들에게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레즈비언 클럽만을 반드시 고집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요컨대 퀴어들을 위한 공간은 아니지만 충분히 ‘퀴어 친화적임’을 표방하는 공간들을 대표적인 대안으로 떠올려볼 수 있다.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든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될 수 있는 퀴어 친화적 업소들은, 문화⋅정치적으로 구세대에 속할 ‘레즈비언 업소’의 지긋지긋한 비여성⋅비레즈비언 배제적인 정책을 잊게 만들 만한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몇몇 퀴어 친화적 공간들이 동시대 한국(특히 서울을 거점으로 한) 퀴어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으며, 대놓고 퀴어 친화적임을 표방하지 않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퀴어 문화에 속한 당사자들에게 ‘앨라이(ally)’임을 승인받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전용 공간’이 주는 레즈비언 분리주의적인 울림은 오래되었을 뿐더러 후지다. 이는 앞서 언급한 첫 번째 문제인 레즈비언 클럽과 바의 사라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문제다. 변화하는 퀴어한 몸들의 요구와 욕망을 모두 흡수할 만큼 레즈비언이라는 범주가 유연하고 또 급진적일 수 있는가? 여기에서는 따로 결론 내리지 않겠지만, 이 질문은 퀴어 문화와 레즈비언 문화 사이의 간극을 고민하는 이들이 반드시 고려해볼 문제다. 

© 2024 작가, 저자,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세마 코랄 | SeMA Coral)에 수록된 콘텐츠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작가, 저자,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있으며, 저작자와 서울시립미술관의 서면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각 저작물에 담긴 의견은 미술관이나 세마 코랄과 다를 수 있으며, 관련 사실에 대한 책임은 저자와 작가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