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의 시간

오혜진
오혜진은 문학평론가이다.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근현대 문학·문화론을 공부했다.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 비평집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에서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심문하고, 새 세대가 선보이는 서사실험의 성격과 민주주의적 상상력을 분석했다. 『연구자의 탄생』, 『원본 없는 판타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그런 남자는 없다』, 『을들의 당나귀 귀』, 『민주주의, 증언, 인문학』, 『저수하의 시간, 염상섭을 읽다』 등의 책을 함께 썼고, 『한겨레신문』과 『씨네21』, 웹진 『핀치』 등에 칼럼을 연재했다.

#미투와 팬데믹의 시대, 한국 퀴어문학의 커뮤니티 재현과 결속의 조건들

에이즈 위기가 오면서 우리는 우리의 분리주의와 우리의 자유주의가 가지고 온 결과를 직접 대면해야 했다.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을 일컫기 위해 지금 우리가 ‘퀴어’라는 말을 되찾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정치적 국면 속에서다.1
― 더글러스 크림프

상상된 공동체, 사라진 공동체

2021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디어 나환》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서울 토탈미술관 지하 전시장에서 열렸다. 그해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가 전나환을 추모하기 위한 전시이자, 작가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작업한 《범람하고, 확장하는 Q》 시리즈에 속한 회화 열한 점을 처음으로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였다.2 각 그림에는 인물 서너 명의 왼쪽 옆얼굴이 만화 캐릭터를 연상케 하는 필치의 검은색 굵은 선으로 그려져 있고, 색색의 컨페티 조각들을 닮은 자유분방한 붓질이 그 위를 뒤덮었다. 정적인 자세로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은 무표정하거나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작가는 2018년부터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을 통해 만난 청소년들,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회원들, 인권활동가, 소설가, 변호사, 드랙 퍼포머, 배우, 유튜버, 클럽 운영자, 디자이너, 미술작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성소수자들과 앨라이(ally)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측면 얼굴을 그렸다. 작가가 어떤 이유로 이들을 인터뷰이로 선정했는지, 마흔두 명에 달하는 인터뷰이들을 어떤 기준으로 열한 개의 그룹으로 나눠 서너 명씩 각각 한 프레임 안에 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작가는 소위 ‘퀴어 판’에서 스스로를 ‘퀴어’로 칭하며 활동한다는 점 외에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이들을 거의 무작위에 가까운 방식으로 호출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 일시적·우연적·잠정적인 무리에 ‘범람하고, 확장하는 Q’라고 이름 붙였다.

전나환(Nahwan Jeon), 〈The Q #2 (한국 청소년 퀴어 그룹 Queer Teen Group in Korea 2)〉, 2018.
캔버스에 아크릴, 색연필, 스프레이 페인트, 145.5x102cm. 《범람하고, 확장하는 Q》 연작. 제공: 나환아카이브(Nahwan Archive).
전나환(Nahwan Jeon), 〈The Q #10 (상영, 혜린, 수빈, 정숙조신 Sangyoung, Hyerin, Subin, Jeongsukjoshin)〉, 2019.
캔버스에 아크릴, 색연필, 스프레이 페인트, 145.5x102cm. 《범람하고, 확장하는 Q》 연작. 제공: 나환아카이브(Nahwan Archive).
전나환 작가 추모 전시 《디어 나환》(토탈미술관, 2021). 촬영/제공: 오혜진.
전나환 작가 추모 전시 《디어 나환》(토탈미술관, 2021). 촬영/제공: 오혜진.

그림 속 인물들은 서로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을뿐더러, 작품에는 이들을 묶는 어떤 약속이나 신념도 암시되지 않는다. 다만, 마치 오래 기다려온 무언가가 그쪽에서 곧 오기라도 할 듯 인물들은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도래하는 순간을 앞질러 축복하듯 사방으로 흩뿌려진 무지갯빛 물감 자국들. 오직 그것들만이 이들의 ‘함께-있음’이라는 사태를 가까스로 지시한다. 인터뷰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퀴어 커뮤니티가 특정한 공간이나 단체, 자격 등과 같이 분명한 형식으로 구분되기보다는 사적인 관계, 결핍상태, 감정과 같이 매우 불안정한 요소들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3라고 술회한 작가는 이 임의적인 무리를 경유해, 무한한 연결과 결속을 전제로 하는 ‘퀴어 공동체’를 기어이 상상하고 실험해보고자 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지금-여기’에 이미 임재(臨在)한 무엇. 미래 완료의 어법으로 소환된 퀴어 커뮤니티 Q.

얄궂게도 우리는 지극히 역설적인 방식으로, 작가의 이 엉뚱한 상상이 결코 허무맹랑한 유희나 마술적인 동화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동료이자 이제는 부재하는 중심이 된 고인과 그의 작품들을 만나기 위해 전시장으로 삼삼오오 모여든 관객들. ‘우리’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이따금 한쪽 벽에 걸린 전나환의 그림들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우리’는 부러 서로 얼굴을 익히거나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무언가를 또렷이 감지했고 비로소 알아차렸다. 서로에게 친밀하거나 낯선 얼굴과 표정, 문득 스치거나 비껴나는 시선과 동선, 그리고 지금 이 전시장을 감싸고 있는 차갑고 반짝이는 슬픈 공기에 이름 붙인다면 그건 바로 ‘Q’일 것이라고.

《범람하고, 확장하는 Q》가 어떤 조짐도 기약도 없는, 비결정적이고 불확정적인 것으로 상상된 가상의 퀴어 커뮤니티를 기꺼이 기다리고 미리 축복했다면, 2021년 초에 열린 전나환의 또 다른 전시 《앵콜》(서울: 아조 바이 아조 플래그쉽 스토어, 2021.1.15.-2.7.)4에 묘사된 퀴어 커뮤니티는 이미 폐허다. 작가는 2020년 코로나19 사태 때, 이태원 클럽발 확진자 발생사건을 계기로 스산하게 비어버린 이태원 클럽 골목을 조명한다. 전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지하층에서 상영되는 〈아네싸의 방〉은 드랙 퍼포머 ‘아네싸’로 활동하는 ‘홍일표’가 자기만의 방에서 아네싸의 무대를 준비하며, 인터뷰어로 나선 작가와 대화하는 모습을 담았다. 홍일표가 ‘아네싸’로서 무대에 서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며 백여 개에 달한다는 가발들을 신중하게 손질하는 동안, 그의 휴대폰에서는 해당 지역의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을 알리는 재난문자 경보음이 무시로 울려댄다.

전나환, 〈아네싸의 방〉, 2020.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제공: 나환아카이브(Nahwan Archive).
전나환, 〈For a Flash〉, 2021.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5분. 《앵콜》(아조 바이 아조 플래그쉽 스토어, 2021) 전시 장면. 제공: 나환아카이브(Nahwan Archive).

2층에서는 또 다른 영상 〈For a Flash〉가 상영된다. 한쪽 벽면을 가득 차지한 대형 스크린 위로, 홍일표가 인적 없는 이태원 클럽 골목을 지나 클럽 ‘힘(HIM)’의 분장실에 도착해 ‘아네싸’로 공들여 분하는 장면이 한동안 길게 이어진다. 무대 뒤편에서 그가 손수 제작한 무대의상을 입고 예의 그 시그니처가 된 아이라인을 그리는 장면은 전체 러닝타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윽고 등장하는 아네싸의 무대. 아네싸의 공연 장면은 의외로 소략하다. 연출은 아네싸가 직접 선곡한 노래에 맞춰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지 않았다. 아네싸가 고른 음악은 다른 전자음악으로 대체됐고, 거리감을 두고 풀 샷으로 촬영된 아네싸의 공연 장면은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아네싸의 무대가 아니라, 바닥에 붙은 ‘사회적 거리두기’ 표시용 테이프와 적막에 파묻힌 빈 객석을 의미심장하게 비춘다. 캄캄한 전시장 바닥에 흩뿌려진 은빛 컨페티 조각들은 마치 아네싸의 무대에 쏟아진 것들이 영상 밖으로 흘러넘친 듯한 착시를 유도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클럽의 고요한 정경은 그마저도 아득한 옛 시절의 환영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고속 촬영된 아네싸의 무대 장면에서 하염없이 천천히 내려앉는 컨페티 조각들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팬데믹의 지리한 시간, ‘앵콜’을 외친대도 기약 없이 유예되는 아네싸의 무대, 재난과 낙인, 오염과 감염의 공포 앞에서 공동화(空洞化)된 퀴어 커뮤니티 안팎의 흔들리는 정동을 상기시킨다.

결속의 조건들(1) ― 익숙한 타자와 ‘우리-되기’

2017년에 폭발한 미투운동과 2020년부터 이어져온 팬데믹의 시간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조건들에 대한 지배적 심상을 획기적으로 뒤바꿔놓았다. 특히 그 이전부터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의 강화와 함께 부상한 ‘안전’과 ‘무해함’에 대한 감각은 미투운동이 고발한 폭력과 혐오의 스펙터클, 팬데믹이 드러낸 재난과 역병의 역학 앞에서 한층 더 강력한 기제가 되어 일상을 재조직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같은 정동의 변화는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재현하는 동시대 문학(장)에 다채롭게 기입되고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레즈비언문학을 비롯한 여성서사가 ‘교양 있는 중산층 계급’의 시민권 확보로 수렴되는 ‘안전’과 ‘안정’에 몰두하는 경향을 띤다거나, ‘건전한 시민’으로서 규범화·제도화된 소수자 모델에 대한 승인으로 이어지는 동화주의적 열망을 보인다는 지적5이 제출됐거니와 미투운동과 팬데믹을 지나며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된다.

그렇다면 일신의 안전과 무해한 생존방식을 모색하는 최근 한국문학에서 커뮤니티와 네트워크, 조직과 유대 및 결속의 문제는 어떻게 상상되고 있을까. 이런 질문에 착안할 때, 동시대 레즈비언문학에서 퀴어 커뮤니티를 지시하는 기호나 표지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롭다. 많은 게이소설에서 퀴어(게이) 커뮤니티에서의 활동이 ‘게이-됨’을 수행하는 문화적 실천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반면, 레즈비언소설에서 퀴어 커뮤니티의 재현은 꽤 드물거나 다소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게이 커뮤니티에 비해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형성 및 존속, 가시화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현실과 관련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게이소설과 레즈비언소설이 집중하는 퀴어의 정치문화적 위상 및 퀴어정동의 흥미로운 차이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문학평론가 김건형은 유독 경제적 생존의 문제에 천착하는 한국 퀴어문학의 인물들을 ‘생존-퀴어’6라고 명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과 소수자의 안전이 퀴어/페미니즘 정치학의 최대 화두로 부상7한 2015년 이후, 동시대 문학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커플들은 이 세계를 절멸의 예감이 짙어진 디스토피아로 인식한다. 이들은 폭력과 재난의 위험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세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방’을 필요로 하고, 그 방을 사수하고자 분투한다. 이들이 정체불명의 위험물질이 부유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던져진 채 수명을 깎아가며 일하는 것은 더 안전한 “방”(강화길, 「방」, 『괜찮은 사람』, 파주: 문학동네, 2016)을 얻기 위해서다. “우린 같이 있어야 해. 그래야 안전해.”(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서울: 민음사, 2017).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더 안전하고 더 깨끗한 집을 열망할수록 이들의 비규범적이고 불온한 에로스의 역능은 점차 휘발되는가 하면(김멜라, 「저녁놀」, 『제 꿈 꾸세요』, 파주: 문학동네, 2022),8 안전을 위해 자신의 비규범적 정체성을 숨기고 이웃 및 지역사회와의 연결을 거절한 채 오직 ‘나’와 ‘너’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안위를 도모하더라도, 종국에 이들은 그곳이 ‘너’라는 2인칭조차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폐색·봉인된 세계임을 확인하게 된다(김혜진, 『너라는 생활』, 파주: 문학동네, 2020).

이런 흐름에서 이채를 띠는 것은 성적 비규범성을 띤 인물과 사건 및 정동과 관련된 역사적·문화적 커뮤니티와 그 성격에 관심 두는 작품들이다.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서울: 민음사, 2019)은 1990년대 후반,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남성 아이돌그룹의 멤버들을 모델로 창작된 남성 간 성애서사인 팬픽을 읽으면서 ‘팬픽이반’으로 불리는 비규범적 성별 정체성과 성적 선호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서사화한다. BL 연구자 미조구치 아키코(溝口彰子)가 ‘버추얼 레즈비언의 탄생’으로 개념화9한 바 있듯, 팬픽이반의 출현은 남성들의 호모소셜한 관계를 호모섹슈얼한 관계로 전유해 그것을 관조하고 상품화하는 여성 독서공동체와 그로 인해 형성된 ‘여자들의 시장’[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즉 여초 커뮤니티의 비규범적 독서가 갖는 수행적 효과10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그 많던 팬픽이반들은 다 어디 갔을까’라는 이 소설의 질문은 지금 여기 존재하는 이반들의 존재를 비가시화하는 데다가, 그 질문을 발화하는 자신이 현재 이성애 제도에 안정적으로 편입된 정상시민임을 확인하는 재귀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자기보존적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조우리의 연작소설 『이어달리기』(서울: 한겨레출판, 2022) 중 한 편인 「엘리제를 위하여」에는 레즈비언 전용 바 ‘엘리제’가 등장한다. 엘리제가 자리 잡은 건물의 주인이자 비혼 레즈비언인 ‘성희’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일곱 명의 비혈연 조카들 중 한 명인 ‘혜주’에게 미션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미션의 내용은 “홍대 놀이터 옆 엘리제를 찾아가 그곳의 문제를 해결”11(19)하라는 것. 극소수의 고객에게 “L리제”(25)로 통용되는 엘리제는 눈에 쉬이 띄지도 않고, 음식 맛도 형편없으며, 인테리어도 촌스럽고, 만성 적자에 시달린다. 엘리제의 사장마저 가게를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렵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그리하여 성희가 혜주에게 부여한 미션의 진짜 내용은 어떻게든 엘리제의 폐업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엘리제는 왜 존속해야 할까? 엘리제를 사랑하는 종업원 ‘페페’는 그 이유를 엘리제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느낌”(38)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무엇으로부터의 안전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에, 혜주는 엘리제를 “동굴”이나 “피난처”에 비유하며, “‘우리 편’이 많아지면 더 좋잖아요.”(38)라는 말로 페페를 설득해 엘리제를 보다 대중적인 여성 전용 공간으로 만든다. 이제 엘리제는 ‘힙한’ 공간으로 포털에 광고되고 SNS를 통해 널리 회자된다. 다만, 엘리제가 한층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자 단골 레즈비언 손님들은 발길을 끊었다. 이들에게 엘리제는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숨기 위한 곳”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모여 있고 싶은 곳”(42)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다 못한 페페는 자신이 가게 경영을 이어받기로 하고, 엘리제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다. 엘리제는 다시 ‘구리고 이상한 곳’이 됐지만, 엘리제를 존속시키라는 성희의 미션은 달성된 셈이다.

이때 눈여겨볼 것은 레즈비언 바의 존재의미를 손쉽게 ‘안전에의 열망’으로 규정하려는 관성에 대해 레즈비언 인물 스스로가 갖는 모종의 의구심이다. 그는 이성애를 강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은 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편안한 동족공간(ethnic space)을 필요로 하지만, 그럼에도 ‘안전’이라는 규율화된 언어로써 엘리제를 표백된 공간으로 간주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소설은 이 미묘한 저항감을 더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채, 엘리제를 ‘그 엘리제’로 되돌리는 선택만을 넌지시 지지한다.

페페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이 저항감의 내용과 소설의 서사적 선택은 『이어달리기』의 수록작들을 포괄적으로 살필 때 더욱 시사적이다. 에필로그를 제외한 일곱 편은 모두 성희의 비혈연 조카 일곱 명이 성희에게 전달받은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을 각각 서사화한다. 성희는 전 애인의 조카나 지인의 딸들을 자신의 친조카처럼 여기며 그들과 ‘이모-조카’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는 마치 ‘키다리 아저씨’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은 아씨들』, 『빨간 머리 앤』”(20) 등에 등장하는 ‘(많은 유산을 남기는) 대고모’처럼 조카들을 살뜰히 살피고, 그들의 인생에 꼭 필요한 경험과 자원을 적시에 선사하는 후견인 역할을 자처한다. 마지막 수록작인 「배턴 터치」에서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열리는 자신의 장례식에 모든 조카들이 찾아와 서로 만나기를 염원해온 성희의 소망이 마침내 달성된다. 성희는 비혈연 조카들에게 자신을 매개로 형성된 ‘퀴어한 가족’을 선물한 것이다.

‘이모-조카’라는 유사가족의 레토릭을 전유해 ‘보호와 후원’이라는 돌봄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이 비혈연 가족의 유대와 친밀성은 더없이 안온하고 무해하다. 이 서사들에서 페미니즘 대중화와 미투운동 이후 안전한 커뮤니티와 믿을 만한 여성/레즈비언의 계보 및 연대에 대한 대중독자들의 한층 강렬해진 열망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충족된다. 성희는 이 비전형적·비정형적 유대를 존속시킬 관용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의 비혈연 조카들은 호혜의 원칙을 지키는 건전한 성원으로서, 성희가 베푼 호의를 마음 깊이 감사해하며 성희의 미션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그런데 과연 이 목가적이고 무해한 결속에는 낯설고 위험한, 더럽고 게으른, 배은망덕하고 불성실한 ‘타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을까.

국문학자 권명아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정동과 상상력의 기제가 근친(육친)의 형식으로만 제한될 때 타자의 특수성과 예외성, 비규범성은 결국 기존의 익숙한 공동체적 관습으로 번역된다는 점12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유사)가족의 언어와 친밀성의 내용을 의심 없이 승인·자연화하는 유대에 대한 상상력은 타자의 낯섦과 오염의 가능성을 기꺼이 수용하고 모험을 장려하기보다는 동족간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데에만 소용되는 것은 아닐까.

결속의 조건들(2) ― 낯선 친족과 ‘연루’의 존재론

설리번은 동성애자들이 에이즈 위기 때문에 성숙해지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렇지 않다. 에이즈 위기로 동성애자들이 그 이전부터 얼마나 윤리적인 삶의 방식을 만들어왔는지가 드러났을 뿐이다. 동성애자이기만 하면 자동으로 윤리적인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 키넌이 진정한 책임감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 삶의 기준이 부재하는 조건에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이 진정한 책임감을 퀴어한 것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내가 에이즈 위기 이전 동성애자의 성적 문화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활력과 생명력도 바로 우리의 공동체가 지고 있던 진정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믿는다. 진정한 책임감은 섹스라는 복잡한 문제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책임은 우리의 섹스를 제한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섹스와 함께 발생하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13

이 질문은 1980-1990년대 미국에서 에이즈 위기로 인해 게이 씬(scene)이 붕괴 위기에 처했을 때 공동체의 필요와 ‘퀴어한 책임감’을 역설한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의 사유 앞에서 한층 의미심장해진다. 당시 에이즈를 매개로 한 공포정치 국면에서 미국의 주류 미디어들은 게이섹스를 ‘문란한 행위’라고 비난하며 게이들의 무책임과 부도덕함을 지탄했다. 일부 저명한 게이 인사들까지 이런 언설에 굴복해 게이 성문화에 대한 반성 및 게이들의 ‘성숙’을 촉구하는 등 당대 게이 씬은 도덕적 엄숙주의에 깊이 잠식됐다. 이런 현상을 목도하며 미술비평가이자 퀴어활동가인 더글러스 크림프는 ‘지금 동성애자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자기비난을 경유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퀴어 씬의 비규범적 문화가 가르쳐준 진정한 책임감’이라고 갈파한다. 그간 내게 친밀한 파트너였던 존재가 불현듯 감염원이자 위험요인으로 현현할 때, 서로에게 무한한 쾌락을 약속할 때가 아니라 그 쾌락이 회의에 부쳐질 때, 바로 그때 비로소 크림프는 ‘퀴어’를 말한다. 서로에게 안전과 안정의 감각을 확보해주는 수평적이고 무해한 친족이 아니라, 서로가 질병과 죽음, 절멸의 위험과 연루된 네트워크에 속해 있고 이를 기꺼이 감당할 때, 바로 그 ‘윤리’와 ‘책임감’을 ‘퀴어한 것’이라고 부른다. 강조하건대, 그는 커뮤니티의 재건 및 유지의 중요성을 재차 역설하되 그것을 결코 ‘안전’을 위한 방패막이로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안전·위생·질서·건강·성숙’ 따위의 명분을 들어 가해지는 정상화·규범화의 장력에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이라는 실천14으로 맞서며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퀴어’를 복원해낸다.

최근 문화예술장에서 ‘퀴어한 친족’ 개념을 전유해 새로운 결속과 유대를 재현하려는 시도들이 빈번하다. 특히 게이소설의 인물들이 도심 곳곳을 거니는 멜랑콜릭한 개인으로서 데이팅 앱을 통해 또 다른 개인과 개별적이고 일회적이고 우연한 만남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친밀성을 형성하는 데 반해, 여성/레즈비언 서사에서 (유사) ‘언니’, ‘자매’, ‘이모’, ‘엄마’ 그리고 여성들만의 은밀하고 안전한 공간 등은 언제나 유대의 가장 강력한 기호로 등장한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비혈연·비이성애’라는 조건이 곧바로 퀴어가족정치학을 성립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여성학자 김순남은 퀴어이론가 리즈 몬테가리(Liz Montegary)의 논의를 빌려 퀴어가족정치학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퀴어가족정치는 기존 가족규범에서의 정상성(normality)을 벗어나는 당사자가 그것 자체로 어떤 관점을 가진다거나 대안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된다고 보지 않는다. 퀴어가 가족을 꾸리거나 아이를 양육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기존의 가족적인 언어와 다른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또한 그것만으로 가족규범을 전환했다고 보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15 퀴어가족정치는 그저 다양한 비공식적 관계들을 기존 가족제도에 포함·편입시키려는 시도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계약론과 근대적 인간관이 전제하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 자립과 의존, 호혜와 합리의 규칙들로 형성된 정상성을 해체하고, 이를 통해 비규범적 존재들과의 공생을 모색하기 위한 정치적 실험이다. 요컨대, 퀴어가족정치학을 친밀성의 조건과 내용을 새롭게 발명하기 위한 급진적 기획으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유사가족의 언어를 차용해 호혜적 돌봄의 기능을 무리 없이 소화하는 ‘무해한 결속’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비혈연성을 안전하고 익숙한 동족과의 유대를 정당화하기 알리바이로서 활용하는 일을 경계하고자 할 때, 오히려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 가운데서 낯선 타자를 발견하는 김병운의 역설적인 시도를 주목할 만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서울: 민음사, 2022)에서 작중 ‘나’는 몇 번 본 적도 없는 매형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안타까움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좀 잘못된 것 같다”(129)고 여기며 대구행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에서 ‘나’는 게이들의 인스타그램을 구경하고 대구에 ‘아는 남자’가 있는지를 떠올리면서, 자신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복무자들 앞에서 간도 빼고 쓸개도 빼고 정체성도 뺀 채로 견뎌 볼 수 있”(132)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를 가늠해본다. 아니나 다를까, 장례식장에 도착한 ‘나’는 익숙한 이질감과 위화감을 느낀다. ‘나’를 보자마자 “장가는 언제 갈 건데?”라고 닦달하는 큰외숙모, 큰외숙모와 오래 전 의절한 엄마의 사연, ‘나’를 “가족 중에 유일하게 대학 같은 대학 나온 애”(137)라고 요약하는 외사촌 ‘은수 누나’······. 이 어색하고 불편한 친족 사이에서 ‘나’는 문득 어린 시절 은수 누나의 친구들 중 “큰 키에 짧고 덥수룩한 머리, 걸걸한 목소리”를 한 채 “이선희”나 “이상은”(142)을 아느냐고 묻던 ‘정아’를 떠올린다. “그분은 확실히 뭔가 다른 존재”였고 “그 다름이 나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음을 “일찌감치 감지”(143)했던 기억을 상기하는 ‘나’에게 은수 누나는 정아가 현재 제주도에서 게장집을 하며 아들만 둘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한편,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장례식장 한 구석에서 마스크를 쓴 채 액정 화면만을 들여다보는 ‘경진’, 즉 외삼촌의 첫째 딸인 ‘은미 누나’의 둘째 아들이다. 다른 형제들과 섞이지 못한 채 “페미들한테 세뇌당해서 (중략) 지는 남자가 아닌 줄 안다니까요.”(156)라고 공격받는 경진은 “형들보다는 누나들과 어울리는 게 더 편”(158)했던 ‘나’의 유년을 생각나게 한다.

더 이상 외사촌들과 불편한 대화를 잇고 싶지 않은 ‘나’는 “얼른 혼자가 되고 싶”(159)은 마음에 장례식장을 벗어나 동대구역으로 향하지만, “줄 게 있”다며 은미 누나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나’를 멈춰 세운다. 그런데 역 앞으로 ‘나’를 쫓아온 것은 뜻밖에도 은미 누나가 아니라 경진이다. 경진은 작년부터 ‘나’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었다며, “8년 전”에 본 ‘나’를 기억하고 있고 자신이 ‘나’의 취향에 공명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나’가 경진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면서도 “어쩐지 이 친구에게는 지킬 수 있는 말만 하고 싶다는 생각”(165)에 부러 조금 거리를 두는 장면, 함께 햄버거를 먹자는 ‘나’의 권유에, 경진이 “제가 밥은 편하게 먹자는 주의여서요.”(166)라며 거절하는 장면은 혈연을 ‘가깝지만 낯선 타자’로서 새롭게 발견하는 오묘하고도 역설적인 순간을 함축한다. 이는 비혈연 친족으로 여겨진 정아가 ‘나’의 거울이기를 기대했던 ‘나’의 유년과 대비되면서, ‘삼촌-조카’라는 정상가족의 혈연관계가 내밀하고도 비정형적인 ‘타자들의 네트워크’로서 탈구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김병운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동질적인 개인들로 형성된 유대관계인 줄 알았던 ‘우리’의 자명성을 의심하는 또 다른 실험작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인주’가 ‘주호’의 친구이자 소설가인 ‘나(윤범)’에게 테라스와 베란다와 발코니를 구분해 설명하는 장면이다. ‘테라스’가 1층에서 확장된 공간을 뜻하는 반면, ‘베란다’는 위층과 아래층의 면적이 달라 생기는 공간이고, ‘발코니’는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돌출 공간이라는 것. “이 셋은 엄연히 다른데도 사람들이 자꾸 퉁쳐서 말”(57)한다고 인주는 지적한다.

이 장면은 두말할 것 없이, 주인공 ‘나’가 게이인권단체의 독서모임에서 알고 지낸 주호의 정체성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과 같은 ‘게이’로 생각해 “동료의식”(58)을 느껴온 사태를 지시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주호는 한 번도 자신을 “게이라고 단정한 적은 없었”(60)고, 스스로를 “양성애자”(61)로 소개했으며, 현재는 ‘무성애자 논모노 유로맨틱’으로 정체화해 인주와 사귀고 있다. 게다가 주호와 ‘나’가 과거에 연인관계였으리라고 짐작한 인주는 어느 날 주호를 미행했는데, 그 보고에 따르면, 주호는 ‘나’를 만난다며 외출해 혼자 연극을 보고 카페에서 ‘나’가 쓴 책을 읽다가 귀가했다. 그러고는 인주에게 ‘나’를 잘 만나고 왔다고 말했다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주호의 동선이 ‘나’와 주호가 옛날에 함께하던 경로와 겹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나’와 주호가 사귀는 사이였다는 추측에 대해서는 극구 부인한다. 미행의 결과로 오해가 풀렸겠다고 ‘나’가 말하자, 인주는 반문한다. “그런가요?”(73) ‘나’는 “죽어도 모”(74)른다. 주호가 만나고 돌아온 ‘나’는 주호가 옛날에 함께했던 ‘나’이며, 주호와 ‘나’가 함께 “보낸 시절의 모양이 결코 같지 않”(75)다는 것을.

더 의미심장한 서술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오늘 우리가 만난 얘기 쓸 건가요?”(75)라는 인주의 물음에, ‘나’는 유로맨틱 무성애자인 주호와 인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이 그 삶에 대해 함부로 쓸 수 없다고 답한다. 하지만 인주는 단박에 말을 끊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우리예요. 여기 이 베란다에 저만 있었던 게 아니고 윤범 씨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제 얘기예요, 우리 얘기지. 안 그런가요?”(77)

‘나’가 ‘우리’라고 뭉뚱그려온 유대관계가 실은 비동질적인 존재에 대한 ‘나’의 무지와 비가시화에 의해 지탱돼온 것임을 긴장감 있게 폭로하던 소설은 이 대목에서 급회전한다. ‘우리’라는 말로 손쉽게 관철돼온 결속의 성격에 대해 가까스로 성찰의 기회를 얻은 ‘나’에게, 인주는 다시 ‘우리’라는 유대를 쉬이 기각하거나 회피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작게는 근래 불거진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스캔들16에서 전면화된 ‘당사자’와 ‘서사적 소유권’ 및 ‘재현의 윤리’ 개념을, 크게는 페미니즘과 퀴어정치학이 본격화된 이래 언제나 뜨거운 화두였던 정체성주의와 당사자성 논의를 배면으로 삼는 이 장면은 ‘우리’라는 결속의 조건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사유를 요청한다.

이 대목에서 ‘연대(連帶)’의 화용론과 구분되는 ‘연루(連累)’의 개념을 짚어두는 것은 도움이 된다. 보통 ‘연대’는 공통의 의제를 달성하기 위한 협동으로서 진보적이고 목적론적인 함의를 갖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연대’라는 의도된 결속에는 이미 ‘공통의 것’이라고 전제되는 특정한 가치 혹은 대상이 있다는 점이다. 서로의 닮음 혹은 같음이 ‘공통의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자기동일성에의 확인이야말로 공통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성립시키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반면, ‘연루’는 “남이 저지른 범죄에 연관됨”이라는 사전적 정의에서 보듯, 범죄나 위험, 즉 예측 불가능한 ‘부정적’ 사태에 ‘의도치 않게’ 연관된다는 뜻이다. 예상치 못한 위험하고 불길한 사태에 속절없이 속하게 되는 것, 그 불가피함에 방점이 있다. 그러므로 ‘연루’는 독립적이고 분절적이라고 믿어지는 근대적 개인의 고유성 및 주체성, 자율성의 신화가 무력화되고, 서로가 서로의 볼모가 되는 방식으로 ‘공통적인 것’이 탄생되는 운명공동체의 형식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공동체(communitas)’에 대한 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의 도발적인 사유를 참조해보자. 그는 서구의 신공동체주의가 ‘주체의 자아를 비대한 형상으로 무한정 팽창시킨 결과’이자 ‘자기’의 복제품을 생산해낼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때 공동체는 “다수의 주체를 하나의 동일한 전체에 소속된 존재로 특징짓는 어떤 특성·정의·수식어에 불과하거나 구성원들의 결속이 생산하는 일종의 ‘본질’이라는 전제를 공통분모로 지”니는데, 이 공동체적 주체 역시 개인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결국 개인의 거울로 남는다.17

이를테면, 에스포지토는 민족 공동체나 언어 공동체, 종교 공동체 등에서 흥미로운 모순을 읽어낸다. 이 공동체들에서 ‘공통된’ 것은 사실상 그것과 가장 명백하게 반대되는 ‘고유한’ 것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 각자에 가장 ‘고유한’ 종족적·지역적·정신적 특성들을 하나의 유일한 정체성 안에 통합한 것이 바로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들만의 고유한 특성들을 공통점으로 지닌다.” 요컨대, “‘공통된’ 것은 ‘고유한’ 것이 사라지는 곳에서 나타난다. “타자와 공유하는 것은 더 이상 고유한 것이 아니다.””18 그리고 에스포지토는 이 ‘공통적인 것’, 즉 “주관적인 실체로 채워 넣지 않을 경우”에 “순수한 관계성”으로 남는 그것을 “허무”19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공동체란 그 자체로 실현 불가능하다. “공동체의 실현이 이미 ― 지금 여기에 ― 공동체의 본질적인 철회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공동체는 약속될 수도, 앞당길 수도, 전제될 수도, 어떤 목적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공동체는 목적론이나 고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20

그렇다면 이제 이 ‘연대’와 ‘연루’의 차이, 에스포지토가 말한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동체”를 떠올리며 분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엘리제에 모여든 ‘우리’와 지금 베란다에 함께 있는 ‘우리’. 상대와 자기가 거울관계, 즉 ‘동족’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약속되는 ‘우리’가 아니라, 각자가 처한 서로 다른 위치에서 공통의 상황에 속하게 됐고, 그에 대한 책임을 나눠 가졌기에 불가피하게 탄생하는 ‘우리’에 대해서.

팬데믹의 시간과 퀴어 정동의 아카이브

2020년 5월 14일자 일간지에 「이태원 클럽 방문자가 숨어버린 진짜 이유는…」21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서울 이태원 클럽을 방문했던 5500여 명 중 2000여 명과의 연락이 두절됐다는 다른 기사22를 인용하며, 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찬찬히 일별한다. 하나같이 게이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병리화·악마화하는 그 댓글들은 당시 발표된 장희원·박상영·김병운의 퀴어소설들이 놓인 사회적 맥락과 상통한다고 분석된다. “이들(이태원 클럽을 방문한 성소수자들 ― 인용자)은 우리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검사를 받아야 할 테지만, 그런데 어쩐지 이들이 숨어버린 원인은 이들에게만 있는 것 같지가 않다.”라는 본 기사의 신중한 서술은 팬데믹과 함께 펼쳐진 혐오의 스펙터클과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이 곧 동시대 퀴어문학의 핵심 정동을 주조하리라는 점을 예감케 한다.

그런데 팬데믹 기간에 발표되는 퀴어소설들이 단지 전염병과 관련해 성소수자에게 부여된 비합리적인 의심과 차별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고발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혐오의 스펙터클로 다 환원되지 않는 퀴어 정동의 특수성과 퀴어 커뮤니티의 (불)가능성을 가늠하는 서사로서 해당 작품들을 읽을 때, 동시대 퀴어문학은 팬데믹과 소수자의 존재론에 관한 아카이브로서 충실하게 기능한다.

예컨대 박선우의 「사랑의 미래」(『햇빛 기다리기』, 파주: 문학동네, 2022)에 등장하는 게이 커플은 사귄 지 1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해 동대문에 위치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다. 각자의 원가족과 함께 사는 이들은 서로의 집을 방문한 적도 없고, 코로나19로 인해 함께 해외여행도 가지 못했기에 한 번도 같이 밤을 보낸 적이 없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호텔에서의 하룻밤이 이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을 전염병으로 방해하고 있었”(47)다고 믿는 이들은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체크인을 하는 호텔 로비에서, 조식 뷔페를 먹는 식당에서··· 호텔방을 제외한 그 모든 곳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엄격해지자 이 클로짓 게이 커플은 오직 문자와 전화 연락으로만 서로를 만난다. 어느 날, 외로움과 답답함을 견디다 못한 연인이 “그냥 몰래 만나자”(65)라고 제안하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상상해버렸다. 혹시라도 전염병에 감염돼 서로에게 병을 옮기고 자신들의 동선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상황을. 이는 단지 “질병에 대한 걱정이랄까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좀더 근본적인 불안”과 “오랫동안 견뎌온 공포의 무게를 끝내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65) 연인은 만나자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고, 연락의 빈도는 크게 줄었으며, 결국 둘은 위기 경보가 완화돼도 만나지 않는 사이,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돼버렸다. 팬데믹 시기에 마스크 착용의 불편함이 도처에서 호소될 때, 성소수자들은 그 전부터 이미 마스크를 써야만 했다는 것을 씁쓸하게 곱씹게 하는 작품이다.

박상영의 연작소설집 『믿음에 대하여』(파주: 문학동네, 2022)에 수록된 「보름 이후의 사랑」은 이와 유사한 사태를 보다 파국적으로 묘사한다. 늘 “좀 하자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던, 한마디로 남자 보는 눈이 꽝인 ‘나’(찬호)는 “성격이 곧 운명”(73)이라는 말을 곱씹다가, 한번쯤은 반듯하고 모범적인 남자를 만나보자고 작심한다.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난 ‘남준’은 바로 그런 남자, 한마디로 “안정을 아는 사람”(79)이었다. 아나운서인 남준은 ‘이쪽’에서 게이라고 심심찮게 소문나 있긴 하지만, 자신의 성정체성을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는 클로짓 게이다. 평소 ‘이쪽’ 커뮤니티에는 절대 발들이지 않고, 데이팅 앱에도 가짜 나이를 적어놓을 만큼 남준의 자기방어 전략은 철두철미하다. 하지만 ‘나’는 “라푼젤”(87)처럼 집안에 갇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 연애가 점차 지겨워진다. 남준은 “우리 둘의 관계가 오직 두 사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86)고 말하지만, ‘나’가 생각하기에 그건 “애틋하기보다는 수치스러운 관계”(87)다. 이 문제로 크게 다툰 후, 남준이 내놓은 방안은 ‘나’와 남준이 각각 전세자금 대출과 주택 구매 대출을 받아서 아파트를 구입해 “같이 살자”(89)는 것이었다. 일사천리로 소형 아파트를 구매해 이사한 후 살림을 꾸리고 “매일 아침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가 우리 아파트의 시세가 오르는 걸 확인하는 재미로”(95) 살게 된 ‘나’는 모처럼 “안정감”(97)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기남시의 55번 확진자가 슈퍼 전파자로 언론의 메인 뉴스”(103)를 장식하자, 포털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으로 도배됐고, 이태원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지인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나’ 역시 선별 진료소로 향한다. ‘나’가 음성이더라도 보름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소식을 남준에게 전화로 전하자, “네가 만약 양성이면 나는?”(107)이라고 조심스레 묻던 남준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나’가 집에 도착했을 때, 남준이 옷가지를 챙겨 황급히 나간 티가 역력하게도 집안의 옷장과 서랍장은 전부 열려 있었다. 누가 물어보면 “우리는 만난 적 없는 거”고, 그저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일 뿐”(109)이라고 답할 것을 신신당부하는 남준의 말을 들으며, ‘나’는 격리가 끝난 ‘보름 이후의 사랑’과 자신들의 안녕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은 우선 매력적인 소비자이자 채무자가 되는 것, 즉 금융자본주의의 합리적 도덕과 재테크 기술23을 성실하게 학습하는 게이 커플의 생존전략을 설득력 있게 서사화한다. 시장질서에 안정적으로 편입함으로써 경제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퀴어리버럴리즘과 동성애국민주의(homonationalism)의 통치술24이 자연화되는 과정임은 널리 지적된 바다. 동시에 소설은 비규범적 성별 정체성과 성적 선호에 대한 사회적 낙인, 특히 동성 파트너십이 인정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는 ‘남들처럼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라는 순치된 자유주의적 소망조차 얼마나 달성되기 어려운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끝내 PCR 검사 받기를 거절한 채 숨어 도망 다니는, 정부의 방역정책에 결코 협조하지 못할 남준과 같은 클로짓 게이의 황폐해진 내면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반듯한 직장인으로서 누구보다도 규범적인 시민 모델에 충실한 남준이 비국민의 형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2020년 초, 게이 커뮤니티가 밀집한 서울 이태원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하자, 일부 개신교를 비롯한 퀴어혐오세력은 게이들의 무절제와 문란함을 지탄하며 성소수자와 전염병의 관계를 악의적으로 조작했다. 물론, 퀴어인권단체들은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해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 대책본부’(이하 ‘본부’)를 출범했다. ‘본부’는 성소수자가 아우팅의 위험 없이 익명으로 PCR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으며, 성소수자들에게도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선제적이고 사려 깊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점도 있다. 예컨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소식지팀장 터울은 “방역에 협조하는 착한 시민이고자 하는 마음을 폄훼할 생각은 없”으나, “‘인권단체’란 정부의 방역망을 최후까지 피해 숨어 다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방역당국이 아니라 그의 편을 들어 지원함이 마땅한 곳”25이라며 정부와 방역당국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는 성소수자의 특수한 존재론과 통치의 딜레마를 상기시켰다.

박선우 소설에 등장하는 게이 커플의 고질적인 우울과 고립감, 박상영 소설의 게이 커플이 경험하는 박탈감과 낭패감, 수치심과 모멸감을 단지 소수자들이 겪는 범상한 감정들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1980년대에 ‘게이들의 병’으로 낙인찍힌 에이즈 사태 앞에서 게이들이 경험하는 깊은 우울을 사유한다. 그에게 ‘우울’은 두 가지 양상으로 관찰된다. 하나는 에이즈로 인해 친밀한 이웃과 파트너들이 무수히 죽어가는 일을 목도하는 것, 그 상실의 압도적인 규모에 대한 정동적 반응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끝없는 상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두려운 나머지 현실을 외면하거나 합리화하려는 반동적인 대응으로서 보이는 도덕주의(moralism)와 자기비난26이다.

특히 커밍아웃한 게이이자 HIV 감염인인 앤드루 설리번(Andrew Sullivan)은 게이들이 한동안 이등시민의 위치를 감수한 대가, 즉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을 자유의 대가로 에이즈를 얻었다고 말하며, ‘에이즈 종식을 눈앞에 둔 지금’ 비로소 “이성애자 커플만큼이나 충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이들도 생겨”날 만큼 게이들이 ‘성숙’해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크림프가 보기에 에이즈 종식이 머지않았다는 설리번의 진단은 허구였다. 설리번은 칵테일요법의 등장 이후에도 오직 미국의 부유한 백인 남성들만 에이즈 치료제에 접근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채, 에이즈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무엇보다, 에이즈 위기 전까지 게이들이 삶의 기준이 부재한, 미성숙한 삶을 살았다는 설리번의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그 시기는 동성애자해방운동과 동성애문화가 가장 활발하게 꽃피운 때였고, 크림프는 게이들이 바로 그 시기에 ‘삶의 기준이 부재하는 조건 속에서도’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것, 자신을 기쁘고 짜릿하게 만드는 것, ‘나’와 친밀하고 ‘나’를 확장해주는 것들을 발명해냄으로써 새롭고도 윤리적인 삶의 방식을 만들어왔다고 밝힌다.27 에이즈 위기 앞에서 게이들이 경험하는 우울은 바로 이 모든 활력이 상실되는 데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다.

팬데믹의 시간을 재현하는 몇몇 예민한 퀴어문학들은 전염병의 창궐을 계기로, 그 이전부터 존재해온 성소수자 혐오와 그에 대한 퀴어 씬의 복잡하고도 분열적인 반응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 서사들에는 역병의 정국에서 성소수자에게 도덕주의적 비난을 가하는 세상에 대한 마땅한 고발 및 분노가 드러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성소수자들이 그간 스스로 학습하고 내면화해온 주체화의 메커니즘을 의심하고 성찰하는 순간 또한 정직하게 기입돼 있다. 이는 완연한 퀴어 성장담과 자긍심(pride) 가득한 소수자 모델, 즉 성적 자각과 커밍아웃을 경유한 정체성의 서사 및 사회적 인정(recognition)의 문제에 대한 재현을 압도적으로 선호해온 기존 퀴어문학의 지배적 경향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던 문제의식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시국에 성적 욕망을 풀기 위해 거리로 술집으로 뛰쳐나온 더러운 동성애자들”(「보름 이후의 사랑」, 103)이라는 사회적 비난 앞에서, ‘퀴어한 책임감’의 방식을 발명하려는 다채롭고 야심찬 시도들을 일별해보자. 이들은 때로 자신의 비규범적인 생활방식과 섹슈얼리티의 실천을 제한하는 등 ‘성숙한 시민-되기’를 착실히 수행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전형적인 연결과 돌봄의 상상력을 경유해 새로운 관계와 결속의 가능성을 적극 실험한다.

감염 공동체와 애도의 조건

2020년 말, 『시사인』은 ‘올해의 인물’ 중 한 명으로 미술작가 이정식을 선정했다. 그 자신 PL(HIV/AIDS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People Living with HIV/AIDS)로서 에이즈 감염인의 사회적 서사에 꾸준히 관심 가져온 그는 2013년 수동연세요양병원에 입원했던 한 감염인의 이야기를 조명해 전시 《김무명》(대전: 공간 ‘구석으로부터’, 2018.9.1.-9.21.)을 만들기도 했다.28 그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과 함께 감염과 가해의 수사학이 횡행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감염에 대한 사회적 낙인의 오랜 역사를 떠올린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졌다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어요. 그들이 말하는 ‘코로나 이전’이라는 시대가 과연 어떤 시대였는지, 지금과 그렇게 크게 다른 시대였는지. (중략) 저는 또 묻고 싶네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과연 그동안 장애인, 노숙인, 성소수자, 감염인,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혐오를 어떻게 바라봐왔을까요. 그런 폭력을 이제야 인식하게 된 건 아닐까요.”29

코로나19 사태에서 ‘감염’을 방종한 개인이 저지른 무책임의 결과이자 ‘가해’로 손쉽게 등치시키는 언설들은 그간 한국사회가 감염(인)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 그리하여 ‘감염인과 더불어 사는 법’에 대한 고민을 거의 진척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미디어 담론은 매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확진자의 수와 이들의 동선을 드라마틱하게 시각화하는 데만 열을 올렸을 뿐, 확진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않았다.30 감염의 경로를 세밀하게 추적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해도 개의치 않았고, 감염과 함께 발생하는 간병과 돌봄의 비용 및 인프라의 문제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여길 뿐 복지와 공공의료의 차원에서 중대하게 다루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감염의 스펙터클에 과몰입해 있는 동안에도 사회적 관심은 코로나19 이전부터 늘 존재해온 ‘감염인의 삶’으로 확장·심화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팬데믹의 시간을 직·간접적으로 재현하는 몇몇 서사들은 감염의 문화정치에 새롭게 관심 가지며 ‘감염인과의 관계 맺기’라는 과제에 도전한다. 박선우의 「우리 시대의 사랑」(『햇빛 기다리기』)은 “삼십 년 가까이 숨기고 부정해야만 했”으나 이제는 “더이상 누구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엄마에게 첫 커밍아웃”(117)을 한 ‘나’가 “새로운 비밀”을 갖게 된 이야기다. ‘나’는 엄마에게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까지 천연덕스럽게 하게 됐지만, “건강에 문제는 없고?”(115)라는 엄마의 심상한 질문에 대해서만은 솔직하게 답하지 못한다. “네가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117)을 말하지 못하는 ‘나’는 “실로 오랜만에 클로짓 게이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커밍아웃이라는 장벽과 전혀 다른 차원의 난관에 처음으로 맞부딪치는 경험을 했다.”(118) ‘나’는 엄마에게 ‘너’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장면을 몇 번이고 상상하지만, “엄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한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나의 연인을 향해 밑도 끝도 없이 쏟아낼 몰이해와 냉대의 말”(119)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너’와 사귄 지 일 년 반 만에 강릉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 ‘나’는 서울역 앞에 세워진 선별진료소, 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주눅 들어 보이는 사람들”을 본다. 이들에게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는 행인들을 보며 ‘너’는 말한다. “저런 반응은 꼭 HIV 검사 때 같네.” ‘나’는 그때서야 새삼 “네가 겪었을, 어쩌면 여전히 겪고 있을 어떤 시선들을 유추”(122)해본다.

유추, 즉 ‘나’가 감염인의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그에 이입하는 일은 결코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행해진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인위적인 노력을 요했다. 소설은 초반부터 HIV/AIDS가 “지속적인 관리로 통제할 수 있는 질환”이며, “감기나 눈병 환자보다 무해하다”(118)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는 처음 HIV를 진단 받았을 때 의사 앞에서 삼십 분이 넘도록 울음을 쏟고서는, 그 바람에 “다음 순서의 환자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다면서” “영문도 모른 채 대기실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을 이에게 미안하다”(135)고 술회했던 ‘너’는 그가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과 무관하게 ‘나’가 응당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음을 재차 확인한다. 나아가, 언제나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겨줄 수 있는 이와의 만남”(123)을 원했던 ‘나’에게 감염인과의 관계 맺기는 “내 삶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이끌었던 순간”의 “충동”과 “경이”(128)로 각인된다. ‘나’는 “정말이지 주제 넘는 생각에 불과하지만, 너를 괴롭히는 그 병을 나누어 갖고 싶다는 열망” “그렇게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우리가 한층 더 결속될 수 있다면, 포개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도 모르게”(136) 품는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감염인’이라는 타자와 친밀한 대상으로서 관계 맺기 위한 지난한 시도를 성실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HIV/AIDS를 ‘얼마든지 통제 가능하고 무해한 것’으로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죽음과 질병의 정동으로부터 애써 분리하고, ‘너’가 감염 사실과 무관하게 ‘사랑할 법한 사람’, 즉 타인에 대한 배려심 넘치는 선량한 시민임을 독자에게 부러 확인시키는 전략은 ‘안전’과 ‘무해함’을 강조하는 순치된 시민 모델의 통치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감염인의 서사가 ‘나’에게 “충동”과 “경이”를 선사하는 사건으로서 피상적·도구적으로 차용됐다는 혐의도 피하기 어렵다. 다만, 소설은 “이 세계에 드리워진 거대한 장막”처럼 “온통 칠흑같은 어두움에 감싸인 바다”,(134) 그것을 보며 “무섭다······”(135)라고 중얼거리는 ‘너’의 모습을 ‘나’가 통제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두었고, 그 “추위”와 “어두움”과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함께”(136) 지켜보기로 한다.

감염(인)에 대한 규범화된 재현 문제에 집중할 때 음미할 만한 작품은 ‘문란한’ 게이의 존재론과 성적 문화를 일탈적인 어법과 분열적인 다변을 통해 집요하게 묘사하는 유성원의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파주: 난다, 2020)이다. 소설의 문법으로도, 에세이의 문법으로도 말끔하게 환원되지 않는 이 모호한 텍스트는 익명의 남자와, 터부시되는 공간에서, 콘돔 없이,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섹스에 탐닉하는, ‘성적 열정이 과잉된’ 게이의 일상과 내면을 재현한다. 이는 건전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성소수자, 자긍심 가득한 소수자 모델만을 재현의 대상으로 선별해온 최근의 지배적인 경향과 명백하게 구분된다.

주지하듯, 에이즈 발견 이후 게이프라이드 운동은 게이와 에이즈의 연결고리를 애써 부정하고 게이섹스가 문란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교정하는 데 몰두해왔다. 게이커뮤니티가 세이프섹스 매뉴얼을 배포해 대중화하자, 에이즈 발견 이전까지 존속해온 스톤월 이전 세대의 다채롭고 실험적이고 ‘부적절한’ 성적 문화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에이즈에 관한 비과학적 인식이 수정되고 에이즈에 대한 정보의 총량은 늘어났지만, 게이섹스의 비규범성과 특수성이 재현의 기회를 거의 확보하지 못한 채 표백·삭제되는 현상도 이와 관련된다. 이에 대해 퀴어활동가 나영정은 “혐오세력이 멋대로 구성한 ‘문란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며 가정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파괴한다’는 게이의 모습이 진짜 게이의 모습이 아니라고 반대하면서 정말 ‘문란’한 어떤 게이의 삶을 우리 손으로 삭제해왔던 것은 아닌지 질문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게이는 문란하지 않아요’라는 방식의 해명”이 “정상성에 포함되고자 하는 전략을 통해 정상성을 강화하는 데 공모하는 주류화 전략의 문제를 인식”31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병운의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는 바로 이 표백과 삭제, 침묵이 수반하는 교묘한 정치적 효과를 문제화한다. 작중 ‘나’에게는 서로 너무 다른 두 친구 ‘물’과 ‘흙’이 있다. ‘나’가 한때 물에게 끌린 적 있지만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 것은 물의 라이프스타일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은 “휴게텔이나 디브이디방, 화장실” 같은, “위험과 부담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에서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도 자신을 욕망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일회성으로 만난다. 물은 그런 이야기를 ‘나’와 흙에게 거리낌 없이 했다. 그때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물을 판단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건 이미 내가 물을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에서부터 여과 없이 드러났을 텐데도 물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투명하게 보여주려 했다.”(177) ‘나’는 물에게 걱정 어린, 하지만 “강력한 위계와 무거운 낙인”이 담긴 말을 건네기도 했다. “안 그러면 안 돼? 그러다 너 좆 된다니까.”(178)

반면, 흙은 결코 차별적 언사를 쓰지 않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선량한 인물이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지하철의 승객에게서 악취가 나도 절대 자리를 피하지 않는데, 그 승객이 느낄 수치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흙은 얼마 전 탈옥한 상습 성폭행범에 대한 뉴스를 보다가 무심결에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게이로 사는 게 낫겠다.”(180)라고 말할 만큼 자기혐오가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흙은 물에게서 자유분방한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들으면서도, ‘나’에게는 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계속 그런 식으로 사는 건 아닌 것 같아.”(190) ‘나’는 “비난도 평가도 하지 말라며 물의 편을 들어 보기도 했지만” 잠시 후 “우리가 맘 편히 물을 걱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190)한다. 물에 대해 흙과 나눈 대화는 분명 물과 ‘나’ 사이를 벌려 놓았고, ‘나’는 이제 물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커뮤니티 안에서도 쉬쉬하고 수치스러워하는 물의 세계보다는 그나마 온건하고 안전해 보이는 흙의 세계에 나를 연루시키고 싶어서. 정상성의 위계구조 속에서 그나마 한 층이라도 더 위에 있는 삶에 나를 어떻게든 안착시키고 싶어서.”(191)

물의 부고는 갑작스러웠다. 전언에 의하면, “물의 유일한 가족이자 혈육이었던 아버지는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물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든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아 무빈소 장례를 선택했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기웃거리는 걸 원천봉쇄하기 위해 장지마저 비밀에 부쳤다.”(203) 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나’는, 물이 문란해서, 불안해서, 무력해서, 슬퍼서, 화가 나서, 외로워서,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기를 간절히 빈다. 그러면서도 생각한다. “어째서 나는 물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가. (중략) 내가 자기검열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시선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이고, 그 시선으로부터 허락받기 위해 밀어내거나 끊어 내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205)

물과 흙의 이분화된 세계는 건강과 위생, 근면과 성실, 안전과 무해 같은 근대의 기율을 통해 주조된 시민의 덕목이자 정상성의 기준이 금 그어놓은 세계다. 이는 소수자들 사이에서도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위계화된 기율로 작동한다. 소설은 이를 또렷하게 응시하며, 그간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소수자’임에 ‘자긍심’을 느끼던 퀴어 씬의 자기인식과 소수자정치의 전략에 의문을 표한다.32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소설은 물의 죽음이 ‘무결한 것’이기를 바라며, 바로 그럴 때에만 물의 죽음이 ‘애도할 만한 죽음’으로 여겨지리라는 ‘나’의 쓰디쓴 예감을 남겨둔다. 이는 더글러스 크림프가 퀴어 죽음의 애도 불가능성을 직시하며 제기한 질문과 정확하게 겹친다. 크림프는 에이즈 위기로 인해 상실한 것이 단지 우리의 친구, 이웃, 파트너, 공동체의 성원만이 아니라, 우리가 기꺼이 창조하고 누려온 성적 문화, 즉 근대가 문명의 목록에서 기각해온 게이들의 비규범적 성적 문화라면 그것 또한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이 물음은 그가 프로이트의 논문 「애도와 우울」(1917) 및 이를 근거로 정상성을 특권화하는 일부 논자들의 주장을 논박할 때, 더욱 치열하고 격렬해진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울(melancholia)’은 대상의 상실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느끼는 불안과 관련된다. 반면 ‘애도(trauer)’는 대상을 상실한 자신의 상태를 수용하고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크림프는 이 설명이 퀴어의 상실과 슬픔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퀴어의 존재론을 부정하고 비가시화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비롯한 비규범적 존재들은 애도를 통해 ‘회복’된다고 믿어지는 ‘정상적인’ 상태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퀴어는 애초에 애도 불가능한 존재이거나, 혹은 ‘투쟁’의 방식으로만 애도할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한다.33 이는 병리적인 ‘우울’에서 벗어나 ‘애도’를 통해 새로운 주체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단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기존의 애도 담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저에게 가장 강력한 애도는 침묵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침묵이어야만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사회적 낙인과 편견 속에 머물러야만 하는 감염인과 약물사용자의 삶에 대한 회의와 상처가 켜켜이 쌓여, 먼저 떠난 친구들의 죽음을 꺼내서 얘기하고 애도하는 것이 더없이 미안했습니다.

(중략) 켐섹스(chemsex)를 하는 사람들과 PL들은 비슷한 낙인과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켐섹스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법으로 규정된 약물의 소지와 사용일 테고, PL들에게는 섹스가 포함되는 모든 관계에서 가해자로 규정당할 수 있는 전파매개행위금지법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의료적 도움이 필요할 때 약물사용자와 PL 모두 병원이나 119 등의 제도적 도움이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권의 틀 안에서 얘기되는 보편적인 HIV/AIDS에 대한 얘기들, ‘약 먹으면 괜찮다, 예방하면 된다, 개독의 공격이 문제다’ 등 PL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얘기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PL이 된다면, 나와 섹스를 한 사람이 PL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PL은 항상 감염 사실을 알리고 섹스를 해야 하나, 나는 PL과 사귈 수 있나’ 등의 질문에서는 미세하지만 날카로운 떨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삶 안에 PL이 직접적으로 들어오게 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때부터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거리두기는 시작됩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배제되고 타자화되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PL와 켐섹스를 하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는 일일 것입니다.34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 ‘가진사람들’의 운영자이자 퀴어 커뮤니티에서 약물 사용의 문제를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고 대처하기 위한 연구모임 ‘POP’의 성원인 나미푸는 자신에게 HIV/AIDS 감염인과 약물사용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은 ‘침묵’이었다고 말한다. “약 먹으면 괜찮다, 예방하면 된다, 개독의 공격이 문제다” 같은, 인권단체와 퀴어 커뮤니티의 일반적인 언설들은 HIV/AIDS 감염인과 약물사용자에게서 ‘죽음’이나 ‘위험’, ‘불법’과 같은 부정적인 꼬리표를 떼어낸 채 ‘외부세력의 혐오’와 같은 ‘공통의 적’만을 내세워 연대의 가능성을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루될 때 커뮤니티 내부에는 “미세하지만 날카로운” 금이 그어진다. 약물사용자·감염인이 애도 불가능한 존재, 오직 “침묵”으로만 애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이처럼 정상성의 정치와 공모하는 표백 및 배제의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크림프가 처절하게 선언한 대로 “우리의 문란이야말로 우리를 구할”35 수 있을까.

노출된 상처와 면역의 상상력

혐오를 사유하는 많은 문화이론들은 피, 땀, 눈물, 침, 체액 등과 같은 동물적 육체, ‘비체적인 것(abject)’들과의 접촉 공포를 ‘혐오’를 유발하는 원초적 심상으로 제기해왔다.36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를 생리혈을 철철 흘리고,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아이를 출산하고, 미끄덩거리는 체액들이 마구 뒤섞이는 여성화된 이미지들은 늘 공포와 혐오의 감정을 수반했다.

전염병의 시대에 ‘촉각적인 것’은 더욱 정치적이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말이 공기에 분사되는 장면, 흐르는 물을 통해 알 수 없는 분비물과 바이러스가 맨살의 피부에 무방비로 닿는 장면은 결코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것과 전염병이 갖는 인과관계가 또렷이 명시된 적도 없건만, 마스크 착용 상태를 한 번 더 점검하게 하고, 수영장이나 목욕탕에 발길을 뚝 끊게 만드는 실제적인 효력이 있다. 율라 비스(Eula Biss)가 명쾌하게 묘파했듯, 전염병의 시대는 ‘접촉’을 일신의 안전과 곧장 직결되는 것으로 상상하게 만들었고, 합리적인 시민조차 이 감염의 레토릭에서 어떤 것이 은유이고 어떤 것이 실제인지 분별하는 데 과도한 열정을 바친다.37

‘게이들이 내 앞에서 애정행각만 하지 않는다면, 장애인들이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흔히 소수자와 더불어 살기 위한 조건으로 내세워지는 이런 유보의 조건들은 언제나 이질적인 것과의 접촉을 저어하는 형식을 띤다. 그리고 이 어법에서 드러나는 가상의 거리감은 반드시 ‘격리’나 ‘감금’ 같은 실제적인 분리조치로서 현실화된다. ‘소독’이나 ‘방역’ 같은 위생과 치안의 언어가 강력한 통치의 언어가 되는 상황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형국에서 오염과 감염의 정치를 통해 환대와 공생의 묘안을 찾아보자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무척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제안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감염의 시대에 힘이 세지는 개념은 ‘면역(immunity)’이다. 내 몸에 ‘침입’하는 ‘이질적인 것’을 막아내 나의 ‘안전’을 ‘지켜낸다’는 면역의 레토릭은 반드시 전투의 이미지들을 수반하며, 언제나 긍정적인 과정으로 의미화되고 옹호된다. 내 몸의 안과 밖, 익숙한 것과 이질적인 것,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 보호하는 것과 파괴하는 것의 이분법적 대립쌍들을 의심 없이 승인하는 이 면역의 언어들은 개인과 공동체를 ‘지켜내고 방어하고 치료해야 할 몸’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병리학적인 상상력을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면역에 강박적으로 집착해 일상과 공동체의 삶을 끊임없이 관리하고 재배치하려는 의지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있다. 에스포지토는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고유한 것’, ‘공통적인 것’으로 형성된다는 전제가 허구임을 설득하며, 공동체의 동일성과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면역을 상상하는 것은 자기폐쇄성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세간의 통념과 달리, ‘면역’은 그 자체로 “구조적 모순”을 가지는 체계다. 면역화란, “어떤 부정적인 동력의 실재를 ― 항원을 ― 간단한 방식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지하고 체제 내부로 끌어들여 체화하는 방식으로만 무력화할 수 있”38기 때문이다. 즉 면역이란, 이질적인 것의 침입을 막아냄으로써 내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을 부러 내 몸 안으로 끌어들여서 내부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처럼 ‘면역’이 외부와 내부의 구분을 무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할 때, 에스포지토는 다음의 질문에 다다른다. “면역화의 시대에 ‘공통[공동]을 어떻게 사유하고 [공통과 등을 맞대고] 살아갈 것인가?”39

모든 타자성이 결국 ‘자기’로 환원된다면 이는 곧 ‘자기’ 역시 언제나, 구축적인 단계에서, 타자로 변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자기’는 고유의 타자성과 일치한다. (중략) 실제로 “면역체계의 기능은 ‘타자와의 대조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정체를 확인하는 데에만 소요되지 않으며 ‘스스로를 바탕으로’ 자기를 끊임없이 정의하는 데에도 소요된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전제될 때, 면역체계는 항상 ‘자기’와 ‘타자’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열린 형태의 자기규정체계라고 볼 수 있다. (중략) 다시 말해, 면역과정은 더 이상 ‘외부’에 대한 선별과 배제의 장벽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내부에서 작동하는 ‘외부’의 사운드박스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난다.40

면역과 공동체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에스포지토의 이론에서 ‘완전히 면역화된 세계’, 즉 외부의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내부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감염의 위험 앞에 무시로 놓이는 수동적인 대상도, 고유성이나 순수성을 간직한 본질적인 대상도 아니다. 공동체는 언제나 면역, 즉 ‘외부적인 것의 점진적 내부화’ 과정을 통해 자기를 형성해왔고, 그러므로 늘 “감염과 상처에 노출”41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자기’ 몸에 침입하는 것은 단순히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질적인 만큼 자기이기 때문이다.”42 에스포지토는 바로 이런 면역의 본래적 모순에 더 깊이 천착하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공동체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팬데믹의 시간에 제출되는 퀴어서사들은 ‘안전’과 ‘연대’의 개념을 통해 무리 없이 설득되던 공동체의 기존 개념을 의심하고, 그것의 불가능성을 조심스레 발설한다. 이전까지 소수자들의 정체화와 정치적 세력화를 설득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공동체가 상상됐다면, 전염병의 시대에 만연한 감염의 수사들은 더 이상 공동체를 ‘일관되고 공통된 의지의 총합’으로만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감염의 시대에 상상되는 공동체란, 독립적·분절적 개인의 이성과 의지를 초과하고 그것들을 무화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부득이하고 불가피하게 탄생하는 네트워크다. 타인과 ‘함께-있었음’을 뜻하는 흔적으로서의 동선이 의심할 바 없는 감염의 경로로 간주되고,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것이 곧 타인과 더 안전하게 함께하기 위한 것이라는 역설적 진실이 통용될 때, 이런 위험하고 불길한 네트워크에도 ‘공동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온·오프라인을 망라해 기발한 접속의 방식이 끊임없이 발명되는 시대에, ‘접촉-감염-연루’의 존재론이 조건부의 연대나 치안의 통치술로 수렴되지 않고, ‘공동체’를 상상하는 흥미롭고 역동적인 메커니즘이 될 수 있을까. “특정한 공간이나 단체, 자격 등과 같이 분명한 형식으로 구분되기보다는 사적인 관계, 결핍상태, 감정과 같이 매우 불안정한 요소들로 연결되”(전나환)는 커뮤니티,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지금-여기’에 이미 임재한 무엇.

다시, 여전히, 새롭게 Q의 시간이다.


  1. 더글러스 크림프, 「당신에게 동의해요, 걸프렌드!」(1991), 『애도와 투쟁: 에이즈와 퀴어 정치학에 관한 에세이들』, 김수연 옮김(서울: 현실문화, 2021), 261쪽. 

  2. 이 시리즈는 2019년 10월 18일부터 31일까지 서울에 위치한 갤러리 ‘쉬프트(shift)’에서 열린 전시 《범람하고, 확장하는 Q》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당시에는 공간상의 문제로 9점만 전시됐다. 

  3. 전나환, 「작가 노트」(2020), 『범람하고, 확장하는 Q』(서울: 나환아카이브, 2022), 43쪽. 이 도록은 전시 《범람하고, 확장하는 Q》의 기록으로, 작가가 작고한 후 그의 파트너인 김형주와 동료 이경민이 함께 제작했다. 

  4. 해당 전시에 관해서는 전나환의 『앵콜』(서울: 토탈뮤지엄 프레스, 2022) 참조. 이 도록은 전시 《앵콜》의 기록으로, 작가가 작고한 후 그의 파트너인 김형주와 동료 이경민이 함께 제작했다. 

  5. 오혜진, 「‘주체’와 불화하는 글쓰기: 최근 한국 퀴어/페미니즘 문학의 에토스에 대한 메모」, 『SEMINAR』 Issue 09(2021). 

  6. 김건형, 「2018, 퀴어 전사: 前史·戰史·戰士」, 『문학동네』 96(2018년 가을). 

  7. 2015년 이후, 20대 여성이 페미니즘과 친연성을 갖게 된 계기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디지털성범죄 처벌, 성폭력 고발과 미투운동, 낙태죄 폐지’ 등 주로 여성의 ‘안전’과 관련된 이슈였음을 밝히는 통계로는 김은지, 「[20대 여자 현상] “약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차별받고 있다”」, 『시사인』 728, 2021년 8월 30일; 「[20대 여자 현상] 강한 페미니즘 집단, 새 정치세력 되다」, 『시사인』 729, 2021년 9월 6일. 이 현상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는 오혜진의 「불투명한 언어로 말하기: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의 소수자정치와 재현」(김성익 외, 『연구자의 탄생: 포스트-포스트 시대의 지식생산과 글쓰기』, 파주: 돌베개, 2022) 참조. 

  8. 오혜진, 「빈 괄호를 그냥 둔 채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일」, 김멜라, 『제 꿈 꾸세요』(파주: 문학동네, 2022). 

  9. 미조구치 아키코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것은 팬픽에만 국한되지 않은, 보다 넓은 의미의 ‘BL’과 ‘후조시’라 불리는, BL을 기반으로 한 여성 독서공동체다. 하지만 야오이와 팬픽이 BL의 장르전통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임을 감안할 때, 후조시에 대한 그의 분석 중 많은 부분은 팬픽이반을 설명하는 데에도 유효하다. 미조구치 아키코, 『BL진화론: 보이즈 러브가 사회를 움직인다』, 김효진 옮김(과천: 이미지프레임, 2018). 

  10. 박세정,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능력에 관한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류진희, 「동성(同性) 서사를 욕망하는 여자들: 문자와 이야기 그리고 퀴어의 교차점에서」, 권김현영 외, 『성의 정치 성의 권리』(서울: 자음과모음, 2012). 

  11. 이하 소설 인용시 해당 작품이 수록된 단행본의 쪽수를 본문 괄호 안에 명기한다. 

  12. 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한국 사회의 정동을 묻다』(서울: 갈무리, 2012). 

  13. 더글러스 크림프, 「우울과 도덕주의: 여는 글」,『애도와 투쟁』, 30쪽. 해당 인용문을 포함해, 이하 본문에 삽입된 인용문의 모든 중략 및 강조 표시는 인용자의 것이다. 

  14. 더글러스 크림프,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 계속하는 법」(1987), 『애도와 투쟁』. 

  15. Liz Montegary, Familiar Perversions: The Racial, Sexual, and Economic Politics of LGBT Families, Rutgers Univ Pr, 2018;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파주: 오월의봄, 2022), 13-15쪽. 

  16. 2020년 7월, 소설가 김봉곤에게 제기된 ‘사적 대화 무단 인용’ 혐의에 대해 법원은 원고가 “자신이 등장인물로 등장하고, 자신과 피고 사이의 카카오톡 대화내용을 인용하여 소설을 집필하고 출판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해주었다”고 판단해 피고인 김봉곤에 대한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한소범, 「카카오톡 대화 인용한 김봉곤 소설… 법원 “무단인용 아니다”」, 『한국일보』, 2021년 10월 5일. 

  17.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동체」, 『코뮤니타스: 공동체의 기원과 운명』, 윤병언 옮김(서울: 크리티카, 2022), 8-9쪽. 

  18.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동체」, 『코뮤니타스』, 12쪽. 

  19.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동체」, 『코뮤니타스』, 34쪽. 

  20.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동체」, 『코뮤니타스』, 38쪽. 

  21. 김승일, 「이태원 클럽 방문자가 숨어버린 진짜 이유는…」, 『독서신문』, 2020년 5월 14일. 

  22. 김연숙, 「이태원 클럽 방문 2천명 ‘연락두절’… 협조 않으면 CCTV 조사 대응(종합)」, 『연합뉴스』, 2020년 5월 12일. 

  23. 소비와 대출을 둘러싼 금융자본주의의 착취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김주희의 『레이디 크레딧: 성매매, 금융이 얼굴을 하다』(서울: 현실문화, 2020) 참조. 

  24.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장에서 매력적인 소비자가 됨으로써 가상의 글로벌 게이공동체의 성원이 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는 한우리의 「퀴어는 항상 급진적인가?: 퀴어리버럴리즘과 한국 퀴어시민의 위치성」(『말과활』 12, 2016년 겨울) 참조. 

  25. 터울,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감정과 경험: 그날 그 시각 그 클럽에 있었던 한 게이의 사례」, 『인권을 켜다, 평등을 켜다: 제12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자료집』, 2020년 8월 22일. 

  26. 더글러스 크림프, 「우울과 도덕주의: 여는 글」, 『애도와 투쟁』, 18-30쪽. 

  27. 더글러스 크림프, 「우울과 도덕주의: 여는 글」, 『애도와 투쟁』. 

  28. 이 전시에 관해서는 이정식의 『김무명』(대전: 구석으로부터, 2018)과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김무명들이 남긴 생의 흔적』(파주: 글항아리, 2021) 참조. 

  29. 나경희, 「〈2020 올해의 인물〉 코로나19 전부터 ‘감염자’로 살았다」, 『시사인』 693, 2021년 1월 2일. 

  30. 박다솔, 「코로나 재택 치료 72시간, 엄마는 깨어나지 못했다」, 『참세상』, 2022년 8월 1일. 

  31. 나영정,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언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파주: 난다, 2020), 407-409쪽. 

  32. ‘자긍심’ 모델을 내세운 소수자정치의 전략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는 오혜진의 「문명, 능력, 자긍심: 2022년, 장애 이슈를 통해 본 소수자정치의 문제적 국면들」(『뉴 래디컬 리뷰』 5, 2022년 가을) 참조. 

  33. 더글러스 크림프, 「애도와 투쟁」, 『애도와 투쟁』, 190-198쪽. 

  34. 2022년 12월 19일에 진행된 〈2022 성노동자 추모행동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에서 나미푸의 발언.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페이스북에서 발췌) 

  35. 더글러스 크림프,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 계속하는 법」, 『애도와 투쟁』, 96쪽. 

  36. 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영화,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손희정 옮김(서울: 여이연, 2017);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조계원 옮김(서울: 민음사, 2015). 

  37. 율라 비스, 『면역에 관하여』, 김명남 옮김(파주: 열린책들, 2016). 

  38.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임무니타스: 생명의 보호와 부정』, 윤병언 옮김(서울: 크리티카, 2022), 301쪽. 

  39.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면역적 민주주의」, 김상운 옮김, 『문화과학』 83(2015년 가을), 402쪽. 

  40.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임무니타스』, 316쪽. 

  41. 김상운, 「면역, 공동체, 민주주의: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문화과학』 83(2015년 가을), 409쪽. 

  42.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임무니타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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