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저급들〉 들어가며: ‘젠더 문제’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이 글은 2021년 SeMA-하나 평론상의 특전으로 2년간 지원받은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진격하는 저급들〉 연재의 서문에 해당한다. 이 연재는 내가 생전 처음 가져본, ‘퀴어’와 (시각) 예술에 대해서만 말해도 되는 최초의 지면이다. 도대체 이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잘’ 써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 나는 결국 내가 아는 오로지 두 개의 쓰기 전략을 동시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걱정하지 마시라, 앞으로 읽게 될 글이 모두 이런 식이지는 않을 테니. 하지만 ‘이런 식’은 최소한 나의 (잠재적) 동지들에게서 내가 도저히 거리를 두고 말할 수 없는, 대단히 특권화되었으며 동시에 비체화되는 주제인 ‘퀴어’, 다름 아닌 나의 주제인 ‘퀴어’를, 이처럼 나의 이해관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면에서 다루는 쾌락 또는 곤란이 무엇인지를 누설해줄 것이다. 이 기회(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많이 ‘기회’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달리 말할 방법도 없거니와 그게 정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는 한편으로는 놓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국 배신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회다. 나는 한편으로는 내가 그간 우습도록 비장하고 진지하게 말해 온 퀴어한 삶, 퀴어한 미적 양식, 퀴어한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비평’해 누군가를 설득, 심지어 유혹하고 싶다는 저속한 열망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 누구에게도 영원히 설명하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후자는 특히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는 성향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고집스러운 침묵이라기보다 얼떨떨한 중단에 가까운데, 왜냐하면 이 침묵은 기실 전자의 열망, 그러니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무엇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중요한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기적인 열망이 결국 실패하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낭패감을, 부끄러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확히 수치심이 작동하는 방식을 예시한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가 “숨김과 드러냄의 이중 작용”1이라고 말한 바 있는 수치심(shame)은 “상상된 타인의 시각”2 혹은 이상적인 초자아의 ‘시선’을 의식할 때 발생한다. 이로써 수치심을 느끼는 주체가 사실은 끈질기게 ‘타인’이라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표시한다. 다시 말해 수치심을 느끼는 주체는 항상 말하고 싶어하는 주체다. 말하고 싶어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주체다. 피부 아래의 내장에서부터 숨겨놓은, 세계와 연결되려는 열망을 뺨을 붉히고 말을 더듬는, 다분히 생리적인 반응으로 노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주체다. 엘스페스 프로빈(Elspeth Probyn)은 수치심을 다음과 같이 의미화한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간에, 당신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중요한 것, 자신에게 필수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중략)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들은 때때로 우리의 깊은 걱정과 관심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관심은 수치심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고, 수치심은 우리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절박하게 일깨워준다.”3 물론 프로이트적 독해를 따르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같은 이론가들에게 수치심은 다수자들이 가진 완전한 자기애적 이상의 결함을 소수자들에게 투사한 결과의 효과로, 건전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제거되어야 할 유해한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은 여전히 소수자들, 그중에서도 내가 다룰 ‘퀴어’라는 주제에서 그들의 삶과 분리 불가능한 감정이다.

왜 아니겠는가? 예컨대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번 포즈를 바꾸는 동안 나는 내 기억 속 수치심의 장면들을 여럿 떠올렸다(“그 사람 퀴어만 쓰는 사람이잖아.” 곧장 이어지는 ‘(나의) 일기’ 같은 글에 대한 폄하. 그리고 나에게 재기 불가능한 내상을 입히는 아군들의 공격. “남자 흉내 좀 그만 내.” …도대체 언제까지 글을 쓸 때마다 이런 푸닥거리를 계속할 생각인가?). 이런 장면들은 끈적이는 기름 자국처럼 내 자아 이미지에 들러붙어 있다. 주체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의문에 부침으로써 내부부터 자아를 손상시키는 파괴적 감정인 수치심은 때로는 글 쓰는 것을, 심지어 삶을 사는 것을 중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로 인해 거듭 재생산되는 수치심은 또한 푸코적 의미에서 생산적이기도 하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수치심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포기할 수 없는 관심과 애착이라는 내면을 피부라는 외부를 통해서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 피부는 수치심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끝끝내 분리될 수 없는 “가차 없는 장소”4인 동시에 유토피아를 발명하게 만드는 가능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실반 톰킨스(Sylvan Tomkins)를 재독해하며 아담 프랭크(Adam Frank)와 함께 쓴 책에서 이브 세즈윅(Eve Kosofsky Sedgwick)은 “긍정적인 정서가 없다면 수치도 없다.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흥미를 끄는 장면만이 당신에게 수치를 준다. (중략) 수치심은, 몸의 표면이 갖는 취약함과 극도의 유연함을 통해 누군가의 내면을 바깥으로 표출하거나 또는 외부를 안으로 끌어들인다. [역겨움과 마찬가지로ㅡ필자 주] 수치는 디지털화된 정동의 메커니즘에 구멍을 내는 뚜렷한 정서 중 하나”5라고 말한다. 수치심이 줄줄 새어 나오는 숨길 수 없는 구멍, 바로 이 구멍이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한계이자 가능성이 거하는 장소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우울을 정치적 정서로 전유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브 세즈윅은 수치심이 내는 구멍 자국을 통해 “정체성” 없이도 “우리의 상상적 체계와 의식·몸·이론·우리 자신과 개인들”을 바꿔낼 수 있다고 쓴다. 우리 각자의 구멍 자국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까? 정체성 없이도 구멍 자국에서 새어 나오는, 우리의 내장 깊숙이 숨어 있는 각자가 열망하고 고집하는 삶의 형태와 가치 체계를 마주치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해나 개즈비(Hannah Gadsby)의 코미디 쇼 〈나네트(Nanette, 한국어 제목 ‘나의 이야기’)〉에서, 시끌벅적한 자긍심의 구호를 “열심히” 외치는 퀴어 퍼레이드의 현장을 TV로 목격한 그가 “조용한 동성애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는 장면에서 그가 겪었을 수치심의 역사가 묵직하게 상기되는 것처럼. 또는 〈SAP(한국어 제목 ‘행복을 찾아서’)〉의 메이 마틴(May Martin)이, 자신의 ‘젠더 문제’와 ‘디스포리아’를 언급하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청중석을 바라보며 “…무거운 정적”이라 농담할 때처럼. 그리고 그가 웃음을 꾹 참는 표정으로 ‘젠더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내게 유발되는 ‘공감성 수치’처럼.

물론 이것은 기쁨처럼 공중으로 발산되는 종류의 해방적인 연대의 감각은 아니다. 아니 그보다 이건 젠장, 끔찍하게 편안한 침묵이 아닌가? 뜨끈한 수치가 치밀어오르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설치된 비밀을 헤집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깐다. 나는 기다린다. 은밀히 내 구멍 자국을 당신에게 들키기를 소망하면서. 약하고 수동적이지만 그럼에도 끈질긴 소망. 그런 식으로 우리는 수치가 제공하는 시차를 통해 ‘우리’에 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앞서 예고한 두 개의 쓰기 전략 중 나머지 하나를 쓸 예정이다. 이제부터는 ‘나’가 적극적으로 빠진다.

작년 가을 진행한 《저급 이론들의 연합》 라운드테이블에 이어 〈진격하는 저급들〉은 (시각)예술문화 전반에서 포착되는 퀴어 부정성(queer negativity)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둔다.6 퀴어 부정성이란 자본주의-이성애-규범성과 불화하는 가치들을 퀴어한 것으로 전유하는 서구 퀴어 이론가들(잭 할버스탐, 리 에델만, 리오 버사니,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 로렌 벌렌트, 헤더 러브, 앤 트베코비치, 엘스페스 프로빈, 사라 아메드 등)이 발전시킨 개념이기도 하고, 동시에 결코 정합적으로 의미화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의 모순을 여성·성차·섹슈얼리티 같은 개념으로 표시하려 한 정신분석 이론가들(조운 콥젝, 알렌카 주판치치 등)에게서 간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삶 대신 죽음을, 의미 대신 모순을 택하기에 반(反)직관주의적 전회라고도 불리는 퀴어 부정성의 이론들은 정체성 정치가 홍보하는 자긍심과 시민-소비-퀴어 주체의 건전함에 반기를 들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정치적 반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애당초 퀴어가 실증적 범주의 성적 일탈자들을 가리켜온바, 중산층적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교양있는 퀴어 시민들의 삶을 야생의 상태로 원상복귀시켜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더구나 그러한 순수성의 추구는 환상에 불과하다). 차라리 퀴어 부정성은 1990년 테레사 드 로레티스(Teresa de Lauretis)가 처음 ‘레즈비언&게이 [담론ㅡ필자 주]’의 사이에 위치한 ‘&(and, 그리고)’라는 분리의 표시를 퀴어라는 “공동 전선”을 통해 다시 사유하자고 제안한 이후7 “퀴어 이론의 정상화(규범화)”8 혹은 ‘탈정치화’라 부를 만한 시점이 도래한 상황에서 다시금 퀴어를 정치적으로 급진화하는 시도에 가깝다.

이는 비단 퀴어 이론의 본토라 여겨지는 미국의 문화·정치적 맥락에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탈식민적 지식 생산의 조건과 상황에 수반되는 시차를 고려하더라도 최소한 문화예술계에 전반에서 ‘퀴어’는, 한편으로는 조야한 의미에서 ‘킨키한(kinky)’ 또는 ‘신기한’과 같은 용례로서 사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성적 소수자’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하지만 퀴어는 ‘그런’ 뜻이 맞다. 문제는 퀴어가 자주 ‘그런’ 뜻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퀴어에 주렁주렁 딸려오는 죽음, (자기)파괴, 혐오, 수치, 분노, 우울, 실패와 같은 부정적인 가치들 때문에 특히 그렇다. 이러한 가치들은 한편으로는 퀴어의 삶 또는 퀴어한 삶에서 발견되는 핵심적인 정서적·경험적 자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보다 보편적인 범주에서(‘정체성 없이도’) 논의될 수 있는 인간적·문화적 ‘문제’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미 퀴어 범주 내부에 내적 긴장을 초래한다. 〈진격하는 저급들〉은 이러한 긴장 상태가 벌이는 특수성과 보편성의 경합을 퀴어한 것의 조건이자 특권으로 이해한다. 더욱이 퀴어의 ‘선을 넘는’, 자기 자신을 초과하려는 움직임은 ‘가로지르다(quer, across)’를 어원으로 하는 퀴어라는 동사에 이미 내재된 근원적 힘이 아니던가? 앞으로 연재될 〈진격하는 저급들〉의 글들은 퀴어의 이러한 역량을 의식하는 6편의 비평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미술뿐 아니라 오늘날의 (시각)문화예술 전반을 아우르며 전개될 〈진격하는 저급들〉의 연재는 어쩌면 단순히 (특히 서울 중심의) 퀴어 ‘판’을 요약하는 그림으로 보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제는 퀴어 ‘당사자’와도 무관할 부정성을 향한 대책없는 집착처럼 보일 수도 있다. 누군가 〈진격하는 저급들〉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드문 유용성의 이름이 퀴어 부정성의 궁극적인 ‘쓸모없음’과 동의어로 판명나더라도 말이다.

편집: 김깃


  1. Sara Ahmed,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4), 104. 

  2. Ahmed,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105. 

  3. Elspeth Probyn, Blush: Faces of Shame (Minneso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5), 10. 

  4.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4), 28. 

  5. Eve Kosofsky Sedgwick and Adam Frank, “Shame in the Cybernetic Fold: Reading Silvan Tomkins,” Shame and Its Sisters: A Silvan Tomkins Reader, eds. Eve Kosofsky Sedgwick and Adam Frank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5), 22. 

  6. 이 글에서 나는 ‘퀴어(queer)’와 ‘퀴어성(queerness)’이라는 두 용어를 특별한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다. 짧은 분량의 이 글에서 두 개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불필요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퀴어성(퀴어니스)를 ‘퀴어한 것’ 또는 ‘퀴어 범주’와 같은 방식으로 의역하는 편이 오해를 최소화할 것 같다는 판단에서다. 

  7. Teresa de Lauretis, “Queer Theory: Lesbian and Gay Sexualities An Introduction,” differences 3, no.2,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1), iii-xviii. 

  8. David M. Halperin, “The Normalization of Queer Theory,” Journal of Homosexuality 45 (Michigan: University of Michigan, 2003), 339-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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