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기, 만지기, 가늠하기

임소담
임소담은 페인팅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미술작가이며 세라믹, 드로잉을 함께 다룬다. 눈 앞에 있는 대상보다 의식 속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영역을 형태와 색으로 드러내는 방법에 관심이 있으며 주로 신체에 남아있는 정서적인 이미지에 주목한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Rainforest》(상상마당 갤러리, 2011), 《Eclipse》(갤러리스케이프, 2015), 《새, 장》(온그라운드2, 2016), 《Shape of memories》(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2018), 《응달: In the shade》(더그레잇컬렉션, 2020)가 있다.

1. 그리기

‘본 적 없는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은 작업하는 나를 계속 따라다닌다. 나에게 생생하게 반짝거리는 순간은 비시각적인 감각들과 함께 구성되기 때문에 종종 시각보다 강력하게 나를 작업하도록 추동하는데, 이 때문에 나는 그리기의 대상이 눈앞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미지의 것을 꺼내어 형태를 입히기 시작하면 그림은 금방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고 관념의 세계란 나의 과거 시각 데이터의 집합이므로 내가 모르는 형태일 확률이 낮다.

임소담, 〈Universe〉, 2018. 캔버스에 유화, 53ⅹ45cm. Ⓒ임소담

나는 철망을 그린다. 정확히는 철망을 피해 너머의 배경을 그린다. 스케치 없이 한 칸씩 그리는 방식은 과정 중에 내가 그리려는 전체를 조망하기 어렵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작업 중에 새롭게 떠오르는 색과 형태를 수용하더라도 철망의 격자무늬 덕에 결과적으로 캔버스 위의 화면을 균질화하여 고르게 에너지를 분포시킬 수 있는 장치이다. 스스로 만든 장애물의 안팎을 오가며 그리기 전에는 몸 안에 존재하던 것을 몸 밖의 물질로, 보이는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운동과 같다.

2. 만지기

그림을 그리던 내가 흙도 만지고 있다. 입체와 평면이라는 결과적으로 가장 큰 차이를 차치하고도 둘의 제작과정은 매우 달라 몸을 사용하는 방식 또한 달라진다. 흙은 그리기보다 내 몸에 더 가까웠고 작업자의 의지로 결정하지 못하는 요소들이 과정과 결과 사이에 있다. 흙이 가진 각각의 성분에 따라 유약은 다른 색으로 발현되고 소성 온도에 따라 결과물은 수축하며 유약끼리 섞일 때 일어나는 화학작용은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매 순간의 터치가 다음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페인팅과 달리, 세라믹은 결과를 보는 일이 소성 이후로 지연되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흙이 겪어온 전 조형 과정과 선택한 유약들의 과거 결괏값, 그리고 작은 조각이 가질 몸짓의 뉘앙스를 동시에 떠올리며, “아. 그래 이것이다!” 하는 신호를 받을 때까지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같다.

더 선택할 수 없이 기다리는 소성 시간과 가마가 식을 20여 시간이 지나 문을 열며, 지나간 선택들이 한 데 엮여 유일한 형태로 망막에 닿는 순간을 좋아한다.

3. 가늠하기

일하는 사람의 손을 보고 있자면 집중한 사람은 체화된 업무에 따라 다른 손동작을 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의식적으로 배워오고 반복했을 동작들이 무의식의 영역에 새겨져 손들은 눈과 머리의 지시를 받기 이전에 움직이는 독자적인 생물처럼 보인다.

플로리스트인 친구의 손은 작고 동그라며 손끝이 뾰족한 것이 야무지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만들어 본 적 없는 낯선 손 모양을 하고 꽃을 잡는다. 엄지는 사선으로 오르고 검지는 새로 올 줄기를 받아들이듯 열려있는 모양, 중지와 약지는 가장 안쪽에서 무게를 받치며 새끼손가락은 이 모든 균형을 잡기 위해 공중에 떠 고부라져 있다. 손가락들은 사이사이 자신의 넓이를 인식하며 미래로부터 오는 부케를 향해 움직인다.

어느 날은 단골 미용사의 손을 관찰한다.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의 공간은 가위처럼 열리며 사이를 지나는 머리카락의 양을 가늠한다. 적절한 순간이 될 때 그 공간은 재빨리 오므라지고 그는 반대 손으로 가위질을 한다. 금속 재질의 가윗날의 한쪽 면이 나란히 뻗은 검지와 중지의 가장 여린 살과 맞대어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임소담, 〈Measuring hand〉, 2021. 세라믹, 8ⅹ25ⅹ9cm. 사진: 언리얼 스튜디오. Ⓒ임소담

미술관으로부터 의뢰받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트로피를 제작하며 눈앞에는 없지만, 의식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을 향해 나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작업방식 사이의 연결 관계를 어렴풋이 느꼈다. 인간이란 과거의 몸으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살아가는 존재지만 각자가 더듬거리며 가늠해본 미래를 지금 이곳에 나타나게 하는 힘 또한 우리 손에 있지 않은가.

임소담, 〈2021 SeMA-하나 평론상 트로피〉, 2021. 세라믹, 17.5ⅹ17.5ⅹ10cm. 사진: 홍철기.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임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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