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저급들〉 6장: 레즈비언 황무지ㅡ비가시성에 대한 노트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기세 좋게 계획했던 연재 순서에 따르면 〈진격하는 저급들〉의 마지막에 해당할 이 글은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 발표된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경향성을 다뤄야 한다. 물론 나는 이 주제에 강박적인 수준의 관심이 있다. 지난 10년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주제에 관해 쓰고 또 말해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만이 동기는 아니었다. 매번 내게 이 주제, 그러니까 반복하자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큼이나 고생스럽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처럼 느껴졌으니까. 더구나 나만 그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이름의 황무지에 들어가고 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개간 작업을 해왔으며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유감스럽게도 이 작업은 전 지구적인 폭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를 들어 지난 2019년 작고한 바바라 해머(Barbara J. Hammer)를 보자. 2010년에 쓴 마지막 스테이트먼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작업은 보이지 않는(invisible) 몸들과 역사들을 보이게(visible) 만드는 것이다. 레즈비언 예술가로서 나는 존재하는 레즈비언 재현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기에, 텅 빈 스크린에 레즈비언의 삶을 담으며 미래 세대를 위한 문화적 기록을 남긴다.”1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기’란 일단 “텅 빈 스크린” 때문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 황무지에 발을 들이는 모든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또한 그는 1993년 발표된 글인 「추상의 정치학(The Politics of Abstraction)」에서 1970년대 자신이 제작한 영화들을 떠올리며(그리고 그 영화들이 레즈비언의 삶과 역사를 내세웠기에 ‘본질주의적’이라 비판받았던 상황 역시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레즈비언 영화는 보이지 않는 스크린 위에 있다. (…) 당시에 영화를 만드는 레즈비언들의 중심적인 관심사는 가시성(visibility)이었는데 그것은 활용할 수 있는 그림이나 이미지, 재현물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는 단순하지만 아주 서글픈 이유 때문이었다. 스크린 공간이 안팎으로 비어 있었다. 그저 주변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체해야 할 영화도, 분석해야 할 응시도 없었던 것이다.”2

약 20년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인용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바라 해머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또는 아마도 영원히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황무지의 일부를 어쨌든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바바라 해머의 글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쯤 처음 읽었다. 그리고 그가 글을 쓸 당시에 비해 오늘날의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깜짝 놀랐다. 그때 나는 바바라 해머와 마찬가지로 (남성/이성애중심주의에 의해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은 최소한 (여성) 성소수자 문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기호의 체계에 (여성) 성소수자의 이름과 얼굴을 기입하는 작업이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여성)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삶을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는 공통의 도구를 제공하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그 도구를 통해 정형화된 혹은 ‘본질화된’ (여성) 성소수자의 이름과 얼굴을 박살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건 도구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런 이유로 (결과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보일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보이게 만드는 일’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지배적인 경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더 나아가, 보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안 보이는 것보다 질적으로 더 우월한 것처럼 평가되기도 한다(‘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는 와중에 비시각적인 기억, 경험, 감각은 때로 시각적 재현의 체계에 들어맞지 못해 공적인 ‘가시성’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하고 누락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이는 ‘부수적 피해’ 또는 ‘필요한 희생’일뿐이다. 문제는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에서 ‘보이는 것’의 중요성이 제대로 의심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라는 명제는 최소한 이를 믿고 싶어하는, (여성) 퀴어-성소수자의 시각적 재현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진리처럼 작동하는 듯 보인다. 일단 이를 ‘가시성의 함정’이라 부르도록 하자.

(여성) 성소수자-퀴어의 시각적 재현의 부족, 심지어 부재를 이야기하는 ‘내부자’들의 평가는 현재까지도 주류를 이룬다. 게다가 동의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나는 최근 들어 심심치 않게 서울의 미술 현장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그래도 요즘은 퀴어 미술이 엄청 많아진 것 같아요, 그렇죠?” 이 당연한 듯 동의를 구하는 “그렇죠?”에 대답하기란 난감한 일인데, 첫째로는 (이런 질문이 예시로 드는) 신문과 패션 잡지에서 가시화되는 몇몇 작업과 전시가 퀴어 미술이라 불리는 하나의 장르를 과잉 대표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그것들이 주로 (시스남성) 게이 작가의 정체성과 동일시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러니까 퀴어 미술이라는 것이 성소수자들의 특수한 경험과 감성을 재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주변화된 존재/감각/인식들을 일시적으로 집합, 경쟁시키는 미적 실천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진지한 얼굴로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3 이러한 질문들은 (특히 그것을 둘러싼 담론의 유통 과정에서) 단지 (시스남성) 게이 정체성을 표현하는 미술을 가리킬 뿐인 세련된 용어로 퀴어 미술을 전유하는 암묵적인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 정체성을 소수자 정치의 최소 단위인 동시에 한계로 보는 이들에게 퀴어 미술은 ‘다양한’ 정체성을 반영하는 시각적 재현의 집합 그 이상이 되어야 할 당위가 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여성) 성소수자-퀴어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미술이 일단 ‘덜’ ‘보인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정하기 어려울지는 몰라도, 이는 더 큰 가시성을 확보한 것처럼 보이는 (시스남성) 게이 미술에 대한, 어찌 보면 불필요한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도대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 ‘덜’ 보인다거나 ‘안’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4 많은 이들이 즉각 떠올릴 만한 대답은 역시 (여성) 성소수자-퀴어 예술가들이 처한 경제적인 상황(‘돈이 없어서’) 때문에 그들이 공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노출할 기회를 적게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5 그러므로 버젓이 존재하는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은 안 보이는 것‘처럼’ 간주된다. 한편 ‘예술’이라는 범주에 초점을 맞춰보자면, 이 특수한 장르가 정체성 정치와 행동주의,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극단적인 두 스펙트럼에 걸쳐 포진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레즈비언을 다룬 시각적 재현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즉각 퀴어-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의 정치적인 지형 안에서 수용된다. 그러므로 ‘오로지’ (여성) 성소수자로서만 독해될 수 있는 시각적 재현이란 (그것의 애매한 장르적 경계 때문이라기보단 강한 비평적 틀에 가려져) ‘덜’ 보이거나 ‘안’ 보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보이긴 보이되 지금까지의 (서구/남성/이성애 중심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예술사적/미학사적 해석과 평가의 체계를 통해서는 제대로 인지될 수 없는 방식으로만 미약하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잘’ 안 보이는 것들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고 심지어 평가할 틀거리(frame)를 (지금으로서는)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랫동안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이원론은 근대적 (남성) 주체의 구성 원리라 간주되는 시각중심주의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중심주의는 또한 서구적 인식론의 바탕이 되는 로고스중심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이원론의 도식을 따르자면 보이지 않는 것은 곧 여성(적인 것)이며, 감정적인 것이며, 시각적인 것에 비해 ‘동물적’이라 간주되는 촉각적인 것이며, 무엇보다 비물질적인 것이다. (여성) 퀴어-성소수자 시각 예술의 비가시성을 다루는 이 짧은 노트에서 나는 결론 대신 다음의 제안을 남기고자 한다. 차라리 우리는 이러한 보이지 않음을, 비가시성을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의 조건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가시성’에 집중하다 보면 잊기 쉬운, 그것의 ‘부재’라는 공백 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기억과 감각을 어떻게 시각 예술의 형식을 통해 소환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편집: 김깃


  1. 바바라 해머 홈페이지, https://barbarahammer.com/about/statement/

  2. 바바라 해머, 「추상의 정치학」, 『호모 Punk 異般 :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 주진숙 외 엮고 옮김(서울: 큰사람, 1999), 133. 

  3. 퀴어 미술의 정의를 다루는 글로는 비교적 최근에 발행된 아래 두 편의 글을 참조하라.
    정은영, 「지금, 한국 퀴어미술의 어떤 경향」, 『일다』, 2021년 11월 26일, https://www.ildaro.com/9209, 남웅, 「동시대 퀴어/예술의 예속과 불화」, 『웹진 세미나』 2호,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2/%EB%8F%99%EC%8B%9C%EB%8C%80-%ED%80%B4%EC%96%B4-%EC%98%88%EC%88%A0%EC%9D%98-%EC%98%88%EC%86%8D%EA%B3%BC-%EB%B6%88%ED%99%94/

  4. 게다가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울에서 (여성) 성소수자-퀴어 정체성을 작업의 (주된) 주제로 삼는 작가들을 (내 능력 부족으로 인해) 전부 열거할 수 없겠지만, 올해 이들 중 일부가 올린 전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차연서 개인전: 이 기막힌 잠 This Unbelievable Sleep》(온라인 전시, https://energywhoisshe.com/, 2023.6.15.-7.15.), 《리단 개인전: Being Boring》(스페이스 미라주, 2023.6.8.-2023.6.22.), 《임아진, 강우솔 2인전: (불)응하는 몸 (un)fortunately, (un)body》(스페이스 미라주, 2023.5.18.-2023.6.1.) 등. 물론 영화와 연극, 사진과 만화 같은 장르까지 아우른다면 이 목록은 더 늘어날 것이다. 

  5. 나는 이 문제를 이반지하 작가, 문상훈 작가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쓰여진 아래 글에서 다룬 바 있다. 이연숙(리타), 「없거나 또는 안 보이거나 : 동시대 한국 레즈비언 미술이라는 곤란함에 관하여」, 『계간 시청각』 5호(서울: 시청각, 2021), 10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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