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체적’ 정서의 내장 만지기: 이미래의 《캐리어즈(Carriers)》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1.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공포의 권력』에서 정식화한 개념인 비체(卑體 abject)는, 썩는 살과 내장, 오물과 토사물과 같이, 문화적 인간인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처럼 즉각적인 혐오의 반응을 유발하는 것들을 말한다. 비체는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 외부와 내부, 무엇보다 ‘나(주체)’와 ‘너(타자)’ 사이의 경계라는 구성물의 권위를 끈질기게 모욕한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결코 제거할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오물인 비체는 일종의 ‘즉자적 복수’로서 주체에게 언제나 유유히 되돌아온다.

크리스테바가 모성적 육체와 그것의 분비물들을 최초의 비체로서 열거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비체의 이 같은 정식들이 근대적/표준적 주체인 ‘남성’인 ‘나’에 의해 비천시된 타자인 ‘여성’의 존재 방식과 극적으로, 그러나 당연하게 결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체적인 것, 그것은 곧 ‘여성적’인 것이다. 부성적이고 가부장적인 상징계 질서 바깥으로 추방된 ‘구성적 외부’인 비체는, 오직 ‘내부’를 단단하고 순수한 것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더욱 부정한 것으로 재생산된다. 이 과도한 부정함은 곧 신성함의 양면인 바, 비체는 차라리 “그것을 더 잘 부인하기 위해 실컷 이용”1하는 패러디스트의 자세를 취한다. 이는 법과 도덕, 문법과 질서를 굳게 거절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 위에 올라타 그들을 낭비하면서 오직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테바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 조르주 바타유의 명제, “시인은 오직 자신을 소비하기 위해서만 쓴다”와 마주친다.

본성상 “위대한 범죄”라기보다 “우회적이고 음흉한” 사기술, “왜곡과 곡해, 부패”의 도착성2과 관계하는 비체는, 여성/퀴어 예술가들의 예술적 전략과 태도에 깊은 친연성을 가진다. 그것의 권위가 상실될 때까지 대상의 표면을 물신화하는 모방의 전략이든, 또는 대상에 대한 희화화와 동일시가 의문스러워질 정도로 지독한 패러디를 반복하든, 그도 아니면 비체적 형상의 역겹고도 유혹적인 형식적 스펙트럼을 탐하든 간에, 여성/퀴어 예술가들은 언젠가 처리되어야 할 비체적 부정성의 내부에서 작업하기를 즐긴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란 결국 예술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예술가”3라고 냉소하며 (그러나 대부분이 남성 작가들의 목록으로 이루어진) 문학과 예술에 비체적 결합의 영광스러운 왕관을 수여한다. 이처럼 크리스테바의 비체는 ‘익스플로테이션(exploitation)’의 장르적 과잉과 희열을 옹호하며 몰아적 정신착란과 예술적 창조성을 모성적 육체 속에 위치 시킨다.

비체 개념은 여성적 부정성의 영역과 ‘함께’ 머물기를 선택하는 자들에게 유용한 비평적 도구다. 크리스테바의 비판적 계승자인 바바라 크리드는 헐리웃 공포영화에서 재현되는 여성의 괴물적 형상에서 ‘거세자’로서의 위협적인 잠재력을 발견한다. 이제 비체적인 것은 괴물적인 것의 그로테스크하고 기이한(weird) 혼종성이 주는 얼얼한 충격과도 결합한다. 마크 피셔는 기이한 것이 유발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란, 기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차용한 범주들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반증이라고 말한다.4 괴물적인 형상은 곧 비규범적인 신체의 이미지─즉 과도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수행을 젠더 패러디의 실천적 전략으로 삼는 드랙(drag) 킹과 퀸5부터, ‘왕팸’6과 ‘끼순이’7, ‘부치’8와 ‘젠더퀴어’9에 이르는 이원론적 젠더체계의 경계를 타고 노는 ‘비체들’을 은유적으로 표상한다. ‘괴상함(queerness)’을 모욕이자 자긍심의 원천으로 삼는 이들 퀴어는, 가부장제와 이성애중심주의라는 자연적 토대 위에서 불온하게 솟아오르며 ‘진짜’와 ‘가짜’, ‘남성’과 ‘여성’과 같은 ‘실증적’ 범주를 혼란케 한다.

이처럼 여성/퀴어 예술가들에게 비체는 그들의 작업 세계뿐만 아니라 존재 방식 자체의 급진성과 부정성을 가리키는 바, 언제나 그들 신체와 정서의 물질적 차원과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니 우리는 비체를 동시대 페미니즘/퀴어 예술의 가장 큰 유산이자 채무로 간주해도 좋을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국내 페미니즘 미술 역사의 일부인 박영숙 작가의 〈미친년 프로젝트〉(1999-2005)에서, 가부장제의 ‘정상’ 규범을 유지하기 위해 재생산되는 타자인 ‘미친년’들, 즉 히스테리적 여성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 ‘미친년’이라는 낙인은 여성을 ‘인간적’ 문화와 경제의 순환으로부터 추방해 그들을 비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남성적 지배와 통제 바깥에 놓인 위협적인 ‘괴물’을 상상하고 창조하는 데 일조한다. 또한 우리는 이불 작가의 초기 작업, 〈장엄한 광채〉(1997)에서 상온에 방치된 썩어가는 생선이 풍기는 ‘비체적 악취’를 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이보그〉 연작과 〈몬스터〉 연작으로 이어지는 여성적 형상의 조각들에서 “사회문화적 경계짓기에 대한 갈등과 욕망이 드러나는 상징적 장소”10로서의 그로테스크한 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장지아 작가와 장파 작가 역시, 각기 다른 매체로 비체의 부정성과 파괴성을 물질로서 전유한다. 살과 피, 침과 오줌을 에로스와 금기, 쾌락과 고통의 매개물로 사용하는 장지아 작가는, 나르시시즘과 마조히즘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육체를 날 선 경계의 실험대에 올리던 여성 신체 예술가들의 계보를 잇는다. 장파 작가는 화면이 터질 듯 강렬한 ‘구멍들’로서의 여성, 주로 웃고 벌리고 흘리는 여성 신체의 표상들을, 그것의 전형성─즉 남성중심적인 독해 관습이 파열되는 지점까지 확장하고 팽창시킨다.

한편, 보다 젊은 세대의 여성/퀴어 작가들에게서도 비체-괴물적 형상의 재현은 자주 눈에 띈다. 이은새 작가는 폭력적이라 할 만큼 과감한 스케일과 터치로, 노상방뇨를 하고 천방지축 뛰어다니고 어딘가 ‘맛이 간’ 얼굴을 한 술 취한 여자‘떼’들, 즉 ‘괴물들’의 해방적 ‘추태’를 묘사한다. 신민 작가는 거대 패스트푸드 산업의 필연적 ‘쓰레기’인 감자튀김 포대에 ‘쓸모’를 제공하듯, 이를 재료로 ‘견상’ 자세를 한 알바생-괴물 조각을 제작한다. 아무렇게나 털나고 뿔난 ‘견상’ 괴물은 유순하게 ‘엎드려 뻗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인 착취와 폭력 속에서 생존을 위해 자신을 소진시켜야만 하는 ‘알바’의 분노가 조각들을 폭발 직전의 상태로 굳게 정지시켰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괴물성’을 작업의 핵심적 개념으로 차용한 프로젝트 팀인 ‘여성, 괴물’의 분노는 가부장제와 이원론적 젠더체계를 향한다. 이들은 레즈비언/퀴어 하위문화적 공연의 형태로 그로테스크한 공포와 유머를 촉발하는 ‘드랙킹’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무대 위에서 이들은 ‘남성성’이라는 자연적 범주를 모방하고 반복하는 ‘수행성’ 이론의 모범적인 예시로 등장하지만, 그보다 먼저 성별 범주의 이질적 속성들을 접합한 ‘기이한’ 신체 표현과 분장을 통해 ‘비체화’ 된다. 듀킴 작가 역시 사도마조히즘, 종교, 아이돌 문화와 같이 초자아적 명령이 지배적인 문화적 영역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척’하기의 기만적 전략을 구사한다. 과도한 복종적 제스처 속에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있든, 혹은 예술가적 자아의 실험이건 간에, 그는 ‘비체적 수행’을 통해 자발적으로 부정성의 영역에 머문다.

만약 우리가 2010년대 중반 이후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즘/퀴어 예술의 비평적 개념으로서 ‘비체’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낀다면, 이는 로빈 우드가 70년대 헐리웃 공포 영화를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제목 아래 분석한 이유와 동일할 것이다. “호러 영화는 우리들의 집단적인 악몽이다.”11 로빈 우드는 우리가 ‘과잉 억압’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공포 영화 속에서 ‘괴물’로 재현되며 귀환한다고 봤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정신분석학을 ‘깔때기’ 삼은 90년대 영미권의 철 지난 문화 비평들을 곧장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해시태그 운동’을 주축으로 한 ‘넷페미’의 부흥과 이에 반한 남성들의 격렬한 반응을 돌이켜 보자면, 그리 부적절한 인용은 아닐 것 같다. 소위 ‘프레카리아트’라 불리는 불안정한 인지-노동 계급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2030세대의 현실에서, 각자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각개전투는 특히 디지털 공간에서의 혐오 발언으로 가시화된다. 남성-일베 대 여성-메갈이라는, 언뜻 지저분한 진흙탕 싸움처럼 보이는 ‘키배’의 구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뜻밖의 과민반응이다. 다시 말해, 어른-아이인 젊은 남성들이 ‘페미니스트 여성’에게 느끼는 심리적인(심지어 경제적인) 박탈감과 그로 인한 분노가 꽤나 구체적이고 진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즉각적 혐오와 분노의 반응들을 일종의 ‘증상’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이현재는 여초 카페와 커뮤니티 등에서 새롭게 부상한 ‘여성 행위자’들의 ‘비체 되기의 전략’을 지목하며, ‘착한 타자’가 아닌, “주체의 인식틀을 벗어나는 ‘급진적 타자’”인 이들이 남성들에게는 불안과 공포, 나아가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12 대문자 ‘여성’, 즉 남근적 로고스의 거울이자 발명된 자연으로서 제 역할을 강요 받았던 타자적 존재들이 ‘자아’를 가진 채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온하고 위험한 ‘병리적인’ 현상이다. 그러니 가부장제의 바깥으로 뛰쳐나올 준비가 된 비체적 존재들에 대한 남성 주체들의 반응이 참을 수 없는 혐오인 것도 당연하다. 오히려 이는 우리가 더 ‘쎄고’, 더 위협적인 여성적 비체와 괴물의 이미지를 ‘감당’할만한 적절한 때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닐까?

다른 한편, 비체의 끔찍할 만치 선명한 물질성은 오늘날 ‘인지 자본주의’라 불리는 것, 즉 지식, 정보, 소통, 정동와 같은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노동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자본주의의 한 국면에서 보다 비밀스럽게 요청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오늘날 네트워크 경제에서 강조되는 유연성은 자본이 노동자의 육체를 독점하는 대신, 파편화되어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노동자의 시간을 조각내어 구매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13 과거 전통적 임금 노동에서 노동자의 육체가 말 그대로 점유되었다면, 오늘날 인지 노동에서 노동자는 인간 개인이 아니라 언어적 소통과 같은 최소한의 인지적 능력만을 갖춘 대체 가능한 기계로 환원된다. 그/녀의 시간과 정신은 분절되고 재조합될 수 있는 단위로 재편성되어 판매대에 오른다. 이때 정신병리적 증상들은 기호(인지) 자본주의의 속도가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미친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등장한다. 질 들뢰즈가 정신분열증을 당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현실로서 파악했듯, 오늘날 인지적 노동의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주의력 결핍(ADHD)과 양극성 기분장애, 공황과 불안과 같은 ‘사소한’ 정신병리의 증상들은 일종의 ‘분위기’처럼 만연한 것이 된다.

이처럼, 인간종을 절멸시킬 기술적 진보의 결정체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비인간 타자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난파된 정신의 끄트머리에서 서서히 ‘다른 존재’로 이행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의 권능을 다시금 회복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에서 비체는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경계의 외부, 말하자면 인간 문명의 역사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축출하고 매장한 생명 활동의 근원적인 혼란과 낭비로부터 솟아오른 것처럼 묘사된다. 그야말로 과도하게 존재하며 살과 뼈, 피와 내장을 열어 보이는 비체는, 필멸하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육체라는 물질에 대한 떨칠 수 없는 욕망과 불가능한 동일시의 환상을 제공한다. 따라서 비체적인 것의 물질성에 도착적으로 집착하든 또는 비평적 틀거리로서 그것의 유용성을 의심하든 간에, 비체 개념은 휘발되고 파편화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신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입구 중 하나로 기능할 것이다.

2.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미래의 개인전 《캐리어즈(Carriers)》(아트선재센터, 2020)를 중심으로, 그의 작업을 여성/퀴어 예술가들의 비체적 전략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이미래는 2014년 첫 개인전인 《낭만쟁취》(인사미술공간) 이후로 한국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는 주로 펌프와 모터를 이용한 수직적 키네틱 조각을 제작하며, 크고 작은 조각과 드로잉, 때로는 동료 작가들과 협업한 결과물 또한 적극적으로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이미래의 움직이는 조각들은 실로 비체 그 자체를 ‘작동’시킨다─끈적이고 질척하며 쉼 없이 흘러내리는 액체의 유동성, 마치 거대한 유기체에서 분리한 내장처럼 보이는 뒤엉킨 호스들의 꿈틀대는 움직임을 주된 특징으로 삼는 이미래의 작업은, 무엇보다 크리스테바가 묘사한 비체적 형태들의 비참함과 그 꼴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캐리어즈》가 ‘말할 수 없는’ 비체 그 자체를 얼마나 탁월하게 ‘재현’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대신에, 《캐리어즈》의 정서적 구조가 우리를, 더욱이 이미래 자신을 어떻게 ‘피부가 벗겨진’ 경계 상실의 상태로 이끄는지에 대한 가설을 늘어놓으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캐리어즈》의 입구에 도달해야만 한다.

[도판 1] 《이미래: 캐리어즈(Carriers)》의 전시장면(부분), 아트선재센터, 2020. 실리콘, pvc호스, 호스 펌프, 색소를 탄 글리세린, 철판에 레이저 커팅, 중고 거푸집 및 혼합 매체, 가변 설치, 긴 조각의 높이는 대략 230cm. 사진: 김연제. Ⓒ이미래

《캐리어즈》의 입구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중고 거푸집 나무판을 ‘더’ 버려진 것처럼 재가공해 짜깁기한 거대한 벽이자 통로다. 이것은 일종의 ‘커튼’으로, 이미래의 다른 작업인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2018-2020)과 〈메이드 오브 온리 하츠〉(2019)에서도 얇은 피부를 본뜬 것 같은 주름지고 반투명한 종이가 무대 소품처럼 활용된 바 있다. 기능적인 차원에서 커튼은 무언가를 가리기 위해 설치된다. 굳이 프로이트의 개념인 ‘부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커튼의 이중성을 금새 눈치채게 된다─한 편으로는 가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커튼 뒤에 숨겨진 것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가려진 것은 오직 가려져 있다는 이유로 중요해진다. 한편, 우울증과 멜랑콜리를 다룬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검은 태양』의 중반부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아름다움: 우울증 환자의 또 다른 세계”라는 이름의 장에서, 크리스테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집요한 우울증을 베일로 가리는 여성들의 장신구처럼, 미는 상실의 감탄스런 얼굴 모습처럼 나타나고, 상실을 변형시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14 당연하게도, 커튼은 숨겨진 것이 바깥으로 드러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호적 형식을 제공한다. 우리는 뒤에서 이 ‘집요한 우울증’으로 돌아오겠지만, 우선 이 통로를 지나가보도록 하자.

[도판 2] 《이미래: 캐리어즈(Carriers)》 전시장면, 아트선재센터, 2020. 실리콘, pvc호스, 호스 펌프, 색소를 탄 글리세린, 철판에 레이저 커팅, 중고 거푸집 및 혼합 매체, 가변 설치, 긴 조각의 높이는 대략 230cm. 사진: 김연제.
[도판 3] 《이미래: 캐리어즈(Carriers)》 전시장면, 아트선재센터, 2020. 실리콘, pvc호스, 호스 펌프, 색소를 탄 글리세린, 철판에 레이저 커팅, 중고 거푸집 및 혼합 매체, 가변 설치, 긴 조각의 높이는 대략 230cm. 사진: 김연제.
[도판 4] 《이미래: 캐리어즈(Carriers)》 전시장면, 아트선재센터, 2020. 실리콘, pvc호스, 호스 펌프, 색소를 탄 글리세린, 철판에 레이저 커팅, 중고 거푸집 및 혼합 매체, 가변 설치, 긴 조각의 높이는 대략 230cm. 사진: 김연제.

높은 벽으로 둘러쳐진 좁다란 통로가 조성하는 긴장감은, 상대적으로 입구에서 먼 곳에 배치된 키네틱 조각인 〈캐리어즈〉가 내는 불쾌하고 불규칙적인 소리로 인해 더욱 심화된다. 마치 낯설고 거대한 유기체의 내장 기관을 연상시키는 이 움직이는 조각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은 쿨럭대며 점성 있는 글리세린을 들이키다, 이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을 말 그대로 줄줄 발사해댄다. 누구 하나라도 더럽힐 기세로 멀리 겨냥되는 물줄기는 위협적이지만 동시에 변덕스러운 장난끼가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중 누군가는 호스 구멍 마다로 흐르는 글리세린과 몸체에 덩어리져 엉겨 붙은 이물질들을 만져보고 싶은 유혹적 충동에 휩싸였을지도 모르겠다. ‘캐리어즈’의 내부를 순환하다 토해내지고 흘러나오는 끈적이는 액체들이 연상시키는 것은 물론 피, 구토물, 배설물과 같은 비체적 대상들─다시 말해, ‘여성적’인 대상들이다. 액체성과 ‘어머니의 몸’으로 표상되는 여성적/타자적 존재를 연결한 것은 비단 크리스테바 뿐만이 아니다. 루이스 이리가레는 ‘액체의 유동성’을 여성 욕망의 본질 혹은 여성의 존재론에 비견한 바 있다.15 그는 고체성의 특징을 남성적 욕망과 언어/상징/은유의 작용, 이성과 근대적 합리성으로 정의하며, 고체적 세계관 아래 억압되어 있는 액체적이고 유기체적인 여성적 특수성을 ‘작동’ 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장 폴 사르트르에게 ‘액체의 고통’인 ‘끈적끈적함’은 언제나 실존적 구역질을 유발한다. “그 거대한 존재, 그것은 (중략) 아주 무르고, 여기저기 끈적하게 달라붙고, 잼처럼 걸쭉했다. (중략) 나는 무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가 치밀었다.”16 이처럼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으로서 ‘끈적끈적함’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지적했듯, 주체를 모조리 빨아 들이기를 원하는 비체적이고 여성적인 소유욕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처럼 액체성이 이미래의 조각에서 여성성의 비체적인 질감을 활성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앞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전조처럼 ‘낙하하는’ 그것의 비통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래가 본격적으로 그의 조각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액체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안드레아, 나의 가장 온화한 꿈 속에서〉(2016)부터일 것이다. 이 작업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내리는 실리콘 오일 ‘비’는, 마치 스크린을 찢는 글리치처럼 작업의 온전한 ‘관람’, 즉 거리두기를 방해한다. 거의 사람 크기로 제작된 콘크리트 조각의 ‘얼굴’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한 일본 AV 레이블의 영상 도입부가 재생되고 있는 모니터다. 영상에서 여자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른 채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지하철에서 선 채 졸거나 책을 읽고 있다. 이들은 무한히 반복되는 폐쇄회로 속에 ‘안전하게’ 갇힌 채 그들 몫의 필연적인 사건을 지연시키고 있다. 최소한 〈안드레아…〉 속에서 그들의 ‘꿈’ 같은 시간은 봉인된다─그러나 그들의 콘크리트 몸 위로 떨어지는 실리콘 오일은 이미 일어난 상실에 대한 애도적 제스처인,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눈물처럼 보인다.

[도판 5] 이미래, 〈안드레아, 나의 가장 온화한 꿈 속에서(Andrea, in my mildest dreams)〉, 2016. 석고 조각상 네 개와 비디오 하나, 오일 섞은 실리콘, 펌프 및 혼합 매체. 사진: 김지영.
[도판 6] 이미래, 〈안드레아, 나의 가장 온화한 꿈 속에서(Andrea, in my mildest dreams)〉, 2016. 석고 조각상 네 개와 비디오 하나, 오일 섞은 실리콘, 펌프 및 혼합 매체. 사진: 김지영.

한편, 〈캐리어즈〉는 그것의 물질적 조건에 있어 사건의 비가역성 자체를 구현하고 있는 것 같다. 잠잠했다 과격해지기를 반복하는 펌프의 규칙적인 싸이클이 이어지는 동안, 흘러내린 글리세린은 레이저 컷팅한 철판을 통과해 바닥에 고인다. 부러 외부로 노출된 펌프는 힘에 부치는 신음을 내며 천장에 매달린 ‘캐리어즈’의 입구로 글리세린을 다시 올려 보내 순환시킨다. 그것은 꽤 애처로운 광경이다. 더욱이, 〈안드레아…〉를 포함해 전작인 〈히스테리아, 엘레강스, 카타르시스; 말해진 것들은 한 번도 충분한 적이 없었다〉(2018)와 〈망치는 자들〉(2019)과 같은 큰 스케일의 키네틱 조각이 의존하는 ‘심장’인 펌프와 모터가 ‘과부하’로 인해17 잦은 고장을 겪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자면 더욱 그렇다. 조각의 원형적 형태뿐만 아니라, 조각을 작동시키는 펌프와 모터가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할때까지 소진시키는 폭력적인 ‘낭비’의 국면은, 실로 이미래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순간 중 하나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학대적이기까지 하다.

〈나의 망쳐놓고 싶은 조각들〉(2015)은 수직으로 기립한 네 개의 하얀 조각에 라즈베리 잼을 범벅으로 묻히며 ‘놀고’, 마치 지친 아이를 재우듯 깨끗이 씻긴 조각들을 침대에 눕힌 작업이다. 여러 번 같은 이름으로 제작된 〈오필리아〉(2018~2019)는, 『햄릿』에서 깊은 상심과 정신착란적 열락으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렸던 ‘백합처럼 하얀 그 애’, ‘오필리아’의 몸을 떠올리게 한다. 〈오필리아〉는 맨 처음 제작된 프로토타입으로부터, 모터가 달린 내장 부분과 내부가 텅 빈 관짝 같은 몸체로 분리되어 전시되었다. 말 그대로 ‘해부’된 〈오필리아〉는 느릿하고 무딘 움직임으로, 바로 옆에 놓인 자신의 ‘시체’를 더듬거리며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고 배치된 〈오필리아〉는 이미래에 의해 여러 번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났다. 작품과 재료의 재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미래의 (거의 친환경적이라 할만한) 알뜰함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호스가 끊어져 너덜거릴 때까지 조각을 ‘망쳐놓는’ 그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충동 앞에서는 잠시 말을 멈추게 된다. 이 짧은 멈춤 사이에서, 우리는 그것이 다루기 까다로운 만큼 핵심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도판 7] 이미래, 〈오필리아(Ophelia)〉, 2018~2019. 철제 오브제, 실리콘 호스, 파이프, 물티슈, 유토에 윤활제 및 혼합 재료, 약 15x15x30cm, 가변크기.
[도판 8] 이미래, 〈잠든 나의 망쳐놓고 싶은 조각(Abusable sculptures in sleep)〉, 2016. 가변크기(대략 사람 크기), 라즈베리 소스에 뒤덮힌 후 씻겨지고 침대에 놓인 네 개의 석고 조각들. (작가의 영문 포트폴리오에서 번역함.)
[도판 9] 이미래, 〈누워있는 모양(Horizontal Forms)〉, 2020. 네 개의 서로 다른 조각, 혼합매체, 크기 다양, 위부터 아래로 대략 50x60x230cm, 40x40x50cm, 40x40x164cm, 45x50x180cm. 사진: 김연제.
[도판 10] 이미래, 〈누워있는 모양(Horizontal Forms)〉, 2020. 네 개의 서로 다른 조각, 혼합매체, 크기 다양, 위부터 아래로 대략 50x60x230cm, 40x40x50cm, 40x40x164cm, 45x50x180cm. 사진: 김연제.

조각의 부서지기 쉽고 너덜거리는 ‘살’의 취약함과, 기계의 최대 성능을 한계치까지 몰아붙일 때의 압도적이고 난폭한 ‘힘’ 사이의 극단적 대비는, 수직적인 〈캐리어즈〉와 그를 둘러싸고 ‘누운’ 형상들로 이어진다. 〈캐리어즈〉와 가까이,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뒤를 돌아야지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누워있는 모양〉들은, 〈캐리어즈〉의 과도한 생명력과는 대비되는 정지된 죽음의 상태처럼 보인다. 이 죽음은 〈캐리어즈〉가 자신의 모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자원을 소진한 뒤 안치된 상황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고요하게 누워 있거나 이제 움직이기를 멈춘 조각들은 ‘캐리어즈’와 연속체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간신히 ‘좌대’에 올라와 있는 〈누워있는 모양〉은 우리의 시선을 더 깊숙한 바닥으로 이끈다. 마치 ‘캐리어즈’가 매달린 천장의 높이만큼이나 그것의 깊이를 벌충해야 한다는 듯이, 〈누워있는 모양〉은 관객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은 채 어둠에 잠긴 조각들 사이로 고개를 처박도록 만든다. 〈캐리어즈〉의 상승하려는 열망과 압도적인 비장함이 추락하는 자리로서 바닥은, 작품 이전의 재료의 원상태가 처한 누추함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이미래의 작업 속에서 바닥의 수평적인 ‘너그러움’은, 조각이 모사하는 생명 활동의 부산물들이 부유하고 흩어지는 구질구질한 ‘현실’을 허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닳아지며 무너지는 조각의 내장과 뼈대를, 아직 준비되지 않은 관객들에게조차 훤히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의 ‘엄마’가 잠든 모습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잠자는 엄마〉가 ‘캐리어즈’의 바로 옆에서 영사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누군가가 느낄 당혹감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 기인할 것이다. 우리는 작가의 사적인 관계에 갑작스럽게 연루되는 동시에 문득 그의 ‘엄마’가 ‘누운’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잠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안드레아〉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태연하게 일상적 장면이 반복 재생되는 것처럼, 〈잠자는 엄마〉 역시 비가역적 사건─죽음─에 대한 예감을 품고 있다. 잠든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잠들어 있는 시간 자체다. 이미래는 거의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은 카메라를 통해 ‘엄마’의 잠든 시간을 부드럽게─그러나 완전히 소유하려 한다.

[도판 11] 이미래, 〈잠자는 엄마(Sleeping mom)〉, 2020. 반복 재생시킨 비디오를 벽에 영사. 사진: 김연제.

3.

이미 이미래의 작업에 대한 비평들이 “괴물적 후기 신체”18,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그로테스크함”19, “비-인간적인 미래적 괴상함”20 등과 같은 수식들로, 그것의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물질성을 넘치도록 지적하고 있는 바, 어쩌면 나는 구태여 뻔한 말을 더 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기어이 밀어붙이려는 것은 이미래의 끈적이고 흘러내리는 괴물들이 단지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아니 그들은 오히려 추레하고 서글픈 상실의 멜랑콜리가 끊임없이 재생되는 나는 정서적인 장면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캐리어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움직임인 수직적 하강과 폭발적 분출, 순환과 회전의 유기체적 에너지는 그에 반하는 수평적 ‘눕힘’과 정지, 느리고 미세한 경련적 움직임과 대비되며, 결국 되돌릴 수 없이 ‘천천한 죽음’으로 이행하는 생의 지리멸렬함을 모사한다. 그리하여 〈캐리어즈〉가 뿜어내는 펄펄한 생명력은, 종국에는 ‘누워있는 조각’이 되기 위해 소진됨으로써 삶 속에 죽음을 출현시킨다.

《캐리어즈》의 ‘메인 무대’에 설치된 움직이는 ‘괴물들’은 물론 자기 자신의 내장으로 질식하고 있는듯한 ‘대발작적’ 움직임으로 우리에게 박력 있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비워진 듯한 전시장의 입구에서 중앙에 이르는 텅 빈 공간에서 〈캐리어즈〉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마치 어쩔 수 없이 천장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장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통렬한 슬픔이나 고통과 같은 ‘만져지는’ 감정들의 돌출이 아니라, 거리를 둘 새도 없이 덮쳐오는 대양(大洋)적인 공허, ‘검은 태양’ 그 자체다. “죽음의 대양 한 복판에서 멜랑콜리의 여환자는 언제나 그녀 안에 내버려지고, 그녀의 바깥에서는 결코 누구도 죽일 수 없는 죽은 여자이다.”21 상징계 내에서 자기 자신을 철회했기에 ‘죽은 여자처럼 존재할 수 있는’ 크리스테바의 ‘여환자’는, 자신의 카니발리즘적인 환몽 속에서 ‘전지전능’하다. 멜랑콜리의 증세로서 ‘집어 삼키는’ 판타지는 죽음에 대한 부인이자 지연으로 등장한다. 상실과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차라리 조각내고, 분해하고, 자르고, 삼키고, 소화”22하는 그녀는, 잃기 전에 먼저 잃어버리는 자이고 죽기 전에 먼저 죽는 자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캐리어즈》의 구현에 있어 중심이 된 하위문화적 용어인 “보어필리아”를 떠올리게 된다.

지난 몇 년간 본격적으로 이미래의 주된 관심사가 된 용어인 ‘보어필리아’는, 누군가에게 산 채로 잡아 먹힌 채 ‘함께 있고 싶다는’ 합일적 욕망, 즉 현실적 실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안타까운’ 성적 판타지를 가리키는 용어다. 한편, 전시의 제목인 ‘캐리어즈(Carriers)’의 사전적 정의가 “사용할 수 있고 무엇인가를 담아낼 수도 있는 어떤 것”23을 의미하는 바, ‘보어필리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시의 공간 자체가 마치 거대한 위장처럼 관객들을 ‘집어 삼킨’ 상황이 도출된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증을 유발하는 압도적인 어둠 또는 광활한 스케일, 또는 신경증과 관계하는 서스펜스적인 예감을 통해서가 아니다. 만약 관객들이 《캐리어즈》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래가 거의 공격적인 수준으로 자신의 내부를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무상히 반복되며 천천히 무너져내리는 절멸의 한 풍경이다. 글리세린을 뚝뚝 흘리며 천장에 매달린 ‘캐리어즈’의 무참한 형태 바로 옆에서, 곤히 잠든 작가의 ‘엄마’가 영사되는 것을 보며 우리는 갑작스럽게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매우 사적인 꿈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서서히 《캐리어즈》 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따라서 이미래의 보어필리아적 환몽은 우리가 《캐리어즈》의 경계 속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라, 《캐리어즈》가 자신의 경계를 내어주는 과도한 ‘환대’로서 우리의 경계를 침범할 때 실연된다. 우리가 그의 일부가 될 때까지 말이다.

바타유가 언급했듯, 비체적 ‘전염성’은 비체 자체의 생화학적인 치명성을 뜻하지 않는다─그것은 내가 아닌 것이 나를 점령하고 결국 내게서 나를 몰아내는 문제다. 사실, 《캐리어즈》의 비체적 정동의 전염성은 이미 이미래의 작업 과정 전반에서 작가 자신을 통해 증명된지 오래다. 이미래는 모터가 사용된 10미터 높이에 이르는 크기 키네틱 조각에서부터 ‘낙서’를 한 듯 구불거리는 모양의 작고 가벼운 ‘소품’까지, 다양한 스케일을 다뤄 왔다. 스케일 만큼이나 그가 다루는 재료 역시 PVC 호스, 콘크리트, 파이프와 같은 ‘전통적인’ 공업 재료부터, 그야말로 ‘혼합 매체(mixed media)’라는 단어로만 그것의 예술적 효용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법한 ‘슬픈’ 쓰레기들을 아우른다. 중고 거푸집, 휴지, 버려진 철판과 합판, 심지어 자기 자신의 작업을 재료로서 재활용하는 등, 이처럼 이미래는 버려지고 망가진 사물들을 작업에 주된 재료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 결과로 폐공장을 모체로 태어난 듯 보이는 기괴한 조각들은 근대적 인간 삶의 찌꺼기이자 타자로서 ‘쓰레기’, 즉 산업 폐기물이라는 ‘비체’의 괴물적 형상을 환기 시킨다.

이러한 사실들은, 결코 이미래가 다루지 못하는 크기나 재료는 없다거나, 또는 그가 자못 열정적인 모험가적 태도로 특이한 재료에 ‘도전’하는 일에 탐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혹은, 쓰다 버린 휴지와 같은 일상적 사물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전략’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물론, 결과적으로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이미래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가변 크기(Dimension variable)’와 ‘날 것’에 가까운 재료 사용의 고착화된 경향성은, 결코 작가의 무한한 자유로움과 급진적인 실험정신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반복해서 연출하고 가장하는 일종의 태도에 가깝다는 것이다. 작업의 특정한 크기와 재료에 대한 집착도 기피도 없는, 일견 무신경해 보이는 이미래의 태도는 사실, 원하는 장면과 정서를 구현할수만 있다면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겠다는 극도의 ‘이기심’을 숨기는데 용이하다. 그리고 그러한 결의에는 무엇보다 외과 수술적인 섬세함이 요구된다. 부피가 있는 추상적 재현물로서 조각은 혼자서도 존재할 수 있지만, ‘장면’은 여러 요소의 총합이며 정서, 혹은 분위기는 그러한 장면 속에서 감각되는 질감의 효과이기에, 이미래는 자신이 사용하는 재료가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끈적하고 흘러내리는 글리세린과 윤활제, 조각의 몸체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아진 물티슈, 금방이라도 형태가 무너질 것 같은 유토와 실리콘 덩어리는 ‘쓰레기보다 더 쓰레기처럼’ 보이도록 실험한 결과다. 여기에는 재료를 만지고 쓰다듬고 주물럭거리는 구강기적이라 할만한 놀이 행위가 수반되고, 작가는 이 과정에서 자신과 재료 사이의 육체적인 거리를 잃는다.

아마도 이미래의 스테이트먼트에서 등장하는 “몸이 작업의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소비되는 느낌”은, 그의 작업 과정에 수반되는 재료의 애무─만짐과 쓰다듬음, 주물럭거리고 망가뜨리는 행위들 속에서 촉발되는 것일 테다.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 자아』를 따라, 자아 정체감이 우리의 심리적 영역 전체를 감싸는 ‘싸개’, 즉 ‘피부’일 수 있다면, 나 아닌 것과 계속해서 살을 맞대고 있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자아로서의 ‘피부’를 잃어버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자아 경계의 빈번한 상실, 더 나아가 주관성의 함몰이자 객체와의 합일 상태를, 정신의학적 범주인 ‘경계선 성격장애’로 정의한다. 비체적인 것의 정의가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때, ‘경계선 성격장애’의 여러 특질들이 이 ‘비체적인 것’과 공명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애브젝트[비체]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중간자적 위치가 될 것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정신의학적 용어인 경계선 인격장애가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중략) 그 결과 숨이 막히게 달라붙은 어머니의 내벽, 곧 신체의 냄새와 실질적인 것을 겸비한 점액질의 막을 형성하는 장막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자율을 추구하는 어린아이의 승산 없는 싸움은 신체 자체의 경계가 가지는 무감각성을, 말하자면 모방하는 것으로서 수행된다.”24 마치 《캐리어즈》를 위해 쓰여진듯한 크라우스의 문장 속에서, 우리는 신체의 경계가 가지는 ‘무감각성’을 모방하는 ‘형식’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벗겨져 있던 피부를 입은듯이 흉내내는 일이다. 거기에는 아찔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창조성이 있다─마치 사마귀가 “죽은 척 하기”의 위장 전략을 유지하기 위해, 목이 떨어져 죽은 뒤에도 먹고 낳고 ‘죽는’ 삶의 모든 기능을 완벽히 모방하는 것처럼 말이다.25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결국, 이미래의 《캐리어즈》에서 구현하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비체적’ 정서는 자신의 상실과 우울 속에서 발견된 ‘회복적 위치’ 속에서 창조된 것일 테다.

[도판 12] 이미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The Liars)〉, 2020. 커튼처럼 천장부터 바닥까지 늘어지는 모양의 조각, 이불, 망사 및 레이스, 실리콘 및 혼합매체, 20x50x390cm. 사진: 김연제.
[도판 13] 이미래, 〈여자기둥(Woman pillar)〉, 2020. 색소를 탄 석고와 시멘트 혼합, 40x40x170cm. 사진: 김연제.
[도판 14] 이미래, 〈여자기둥(Woman pillar)〉, 2020. 색소를 탄 석고와 시멘트 혼합, 40x40x170cm. 사진: 김연제.

*본 비평문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작으로 세마 코랄의 편집 기준에 따라 문단 쓰기, 문장 부호, 참고문헌,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고 1번의 세 번째 문단의 ‘물아적’을 ‘몰아적’으로, 2번의 두 번째 문단의 ‘입구에’를 ‘입구에서’로, ‘버려진 철판’을 ‘중고 거푸집 나무판’으로 수정한 것 외에, 수상자가 응모한 원문 그대로 수록하였음을 밝힙니다.

도판 제공: 이미래


  1.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서민원 옮김(서울: 동문선, 2001), 40. 

  2. 앞의 책, 25. 

  3. 앞의 책, 25. 

  4.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안현주 옮김(서울: 구픽, 2019), 20. 

  5. “나는 드랙을 생물학적 성별에 기반하여 사회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퍼포먼스에 반대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형태로 표출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아장맨, “내가 드랙(Drag)을 하는 이유: ‘드랙킹’ 퍼포머의 정체성”, 『일다』, 2018년 9월 18일. https://ildaro.com/8310.) 아장맨은 드랙킹 퍼포머로, 이 글에서 언급된 ‘여성, 괴물’의 일원이자 ‘드랙킹 콘테스트’의 기획자이기도 하다.  

  6. 레즈비언의 하위 범주로 ‘과도한 여성성’을 수행하는 스타일을 가리킨다.  

  7. 게이의 하위 범주로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가리킨다. 

  8. 레즈비언의 하위 범주로 ‘남성성’을 수행하는 스타일을 가리킨다.  

  9.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론적 젠더체계에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 젠더 정체성과 스타일을 가리킨다. 

  10. 박선아, 「아브젝시옹 개념을 통해 본 2000년대 이후 한국 공포영화에 대한 연구 : 여성재현을 중심으로」, 『영화연구』 65호(한국영화학회, 2015), 87.  

  11. 로빈 우드,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이순진 옮김(서울: 시각과 언어, 1994), 105. 

  12. 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우리가 만난 비체들』(파주: 들녘, 2016), 열람기기 poke2 기준 교보문고 e-book 어플리케이션 34%. 

  13.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정유리 옮김(서울: 난장, 2013), 87. 

  14. 줄리아 크리스테바, 『검은 태양』, 김인환 옮김(서울: 동문선, 2004), 125. 

  15. 루이스 이리가레, 『하나이지 않은 성』, 이은민 옮김(서울: 동문선, 2000), 141-156. 

  16. 장 폴 사르트르, 『구토』, 임호경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2020), 열람기기 poke2 기준 교보문고 e-book 어플리케이션 69%.  

  17. 필자와 주고 받은 질문과 답변에서 작가가 한 말을 인용했다. 

  18. 김홍희, “괴물의 모습으로 표현된 신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경계를 파괴하다”, 『경향신문』, 2021년 3월 2일. https://m.khan.co.kr/culture/art-architecture/article/202103022042005

  19. 김소이, “’생물학적 현실’로서 여성의 육체: 세 개의 대답”, 『웹진 세미나』 6호, 2020년,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6/soyikim/

  20. HG 마스터스(HG Masters), “괴상함(Monstrosity)과 미래상(Futurity): 포스트밀레니얼 미술의 모습들”, 『더아트로』, 2021년, 6월 4일. https://www.theartro.kr/kor/features/features_view.asp?idx=4173&b_code=31e

  21. 줄리아 크리스테바, 『검은 태양』, 김인환 옮김(서울: 동문선, 2004), 45. 

  22. 앞의 책, 23. 

  23. 《이미래: 캐리어즈(Carriers)》, 아트선재센터, 2020. http://artsonje.org/carriers/

  24. 이브-알랭 부아, 로잘린드 E. 크라우스,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 정연심, 김정현, 안구 옮김(파주: 미진사, 2013), 279.  

  25. 앞의 책,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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