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이미지의 오래된 미래와 미세한 눈금들 : 온라인 이주 시대의 소장, 보존과 전시

곽영빈
곽영빈은 미술평론가이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객원교수로, 미국 아이오와 대학 영화와 비교문학과에서 「한국 비애극의 기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의 리더로서 게이코 리, Trytone 등과 협연하며 노래와 작편곡을 병행했으며 2015년 비평글 「수집가 혹은 세상의 큐레이터로서의 작가: 구동희론」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한 제1회 SeMA 하나 비평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2016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2017 제17회 송은미술대상전과 제4회 포스코 미술관 신진작가 공모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N번방’이라는 ‘지나간 미래’

2020년 7월 6일, 이른바 ‘다크웹’이라 불리는 국제적 ‘아동 성착취물’ 온라인 사이트 운영자였던 손정우가 풀려났다. 관련 영상 파일의 ‘소지’나 ‘다운로드’만으로도 경우에 따라 수십에서 수백 년의 형을 살게 되는 서구 상황과 달리, 회원 수 128만 명을 거느리고 생후 6개월된 영아의 영상까지 공유된 것으로 알려진 이 끔찍한 온라인 데이터 베이스/아카이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관장한 주모자로 무려 44억 원에 달하는 수익을 얻은 그는, 한국에서 겨우 1년 6개월의 징역형만을 치르고 나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1 이날 그에 대한 미국 송환 결정이 내려지고 조만간 외신에서 보던 수백 년 상당의 처벌을 받게 되리라 기대했던 많은 이들은, 이 충격적인 판결에 실망을 넘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2

그런데 이 격렬한 분노의 역류 속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은, 이 판결의 담당 재판장이었던 강영수 서울고등법원 부장 판사가 지난 2018년 이후 ‘한국정보법학회’의 공동 학회장으로 활동해 왔고, 2007년 출범한 ‘양형위원회’의 자문 기구로 역시 2018년 4월 30일 창립된 ‘양형연구회’의 발기인 21인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3 이는 문제의 판결을 한국 남성들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misogyny)’가 반영된 또 다른 증거로만 일반화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해당 판결이 ‘디지털 정보’와 ‘디지털 이미지’가 포함된 ‘정보(information)’의 위상과 함의에 대한 법적이고 ‘학술적 이해’에 근거한 ‘양형’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한다.4 물론 여기서 우리의 초점은 문제의 판결이 작동시킨 조문들을 ‘법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아니다.

‘모두의 소장품: 소유에서 공유로’와 ‘미래의 소장품: 유물에서 비트로’라는 이중의 문제 의식을 중심으로 ‘유연’하게 (안) 모인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다른 데 있다.5 그것은 해당 판결은 물론, 그 파장을 극대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소위 ‘N번방’ 사건의 판결에 대해 일선의 판사들이 제기했으리라는 질문, 즉 ‘실제 강간보다 (겨우) 디지털 영상 좀 공유한 일에 더 무거운 양형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상식적’인 반문과 그 궁극적인 함의다.6 문제는 이러한 재판부의 ‘상식적’ 견해가, 손정우의 아버지가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하며 ‘성공적으로’ 제기했던 반문, 즉 “강도·살인, 강간미수 등 [실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발언과 같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7

그에 못지않게 불편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당대의 담론적 장면(-scene)을 벗어나 있던(ob-) 외설적(obscene) 핵심은 ‘디지털’이나 ‘정보’ 또는 ‘(디지털) 이미지’란 그들에게 아마도, 그리고 여전히 ‘가짜’이거나, 이른바 ‘현실보다 덜’한 무엇이란 지극히 고전적인 의미에서 ‘사이버’ 또는 ‘버추얼(virtual)’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리라는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견해가 이른바 ‘디지털’, 또는 ‘비물질적(immaterial)’인 것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을 ‘물질적인 진품’의 “보충물(complement)”, “대리물/대체품(surrogate),” 또는 “복사본(copy)” 정도로 파악하는 미술관과 박물관 종사자들의 지극히 ‘상식적’인 인식과 정확하게, 혹은 불편하게 공명한다는 사실이다.8 좀 더 도발적으로 말하면, 이는 한편으로 저 거대한 공간에 창궐하던 8테라바이트 분량, 17만 개의 영상들이야말로 ‘반응하는 미술관, 유연한 소장품’의 때 이른 구현체일지 모르며, 그런 의미에서 ‘미래의 소장품: 유물에서 비트로’란 사실 ‘도래할 미래’이기는커녕 이미 ‘지나간 미래’라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해당 영상들을 공유하고 돌려본 수많은 이들이 어떻게 “강도·살인, 강간미수 등 [실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손정우 아버지의 반문에 반색할 수 있었는지, 다시 말해 대부분의 시청자가 궁금해하고 언론들이 관습적으로 ‘취재’하는 그들의 ‘심성’이나 ‘진정성’이 아니라, 이러한 물질적 행위의 네트워크를 작동 가능케 했던 ‘인식론적 가능성의 조건’을 시사해 준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허구와 현실(기록 행위)

물론 이러한 비교는 다분히 ‘수사적(rhetorical)’인 것이거나, 일종의 ‘범주 착오(category mistake)’로 보일지도 모르는데, 다음 문단은 바로 그러한 상식적 반응을 (남몰래) 공유하는 독자들을 위해 쓰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기존의 신체접촉 성범죄와는 별개인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입니다. 이는 단순한 음란물 제작·유포가 절대 아닙니다. 또한 단순히 가상공간에서의 성착취 영상 배포에 그치지도 않습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현실 공간에서의 성학대·협박·유인·폭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피해자의 사회적 인격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는 제작 즉시 가해와 피해 발생이 완료되는 범죄가 아닙니다. 즉, 제작 단계, 판매 및 배포 단계, 소지 단계 각 단계마다 새로운 가해와 피해가 발생되는 것이지, 판매 및 배포, 소지로 인한 피해가 제작으로 완성된 범죄에 부수적으로 가볍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소지가 판매 및 배포의 동기가 되고, 판매 및 배포가 제작의 동기가 되는 구조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합니다.9

이는 2020년 3월 25일,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준비 중이던 ‘아동·청소년 음란물 범죄 양형기준’의 “전면적 재검토”를 요청하면서, 13명의 판사가 법원 내부 통신망인 코트넷에 올린 글의 일부다. 여기서 환기되는 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상식적’인 이분법, 즉 ‘물질적’인 ‘진품’의 아우라 대(對) ‘비물질적’인 ‘복사본’에 부재하는 아우라라는 대립뿐만이 아니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건 중반 이하, 즉 “디지털 성범죄는 제작 즉시 가해와 피해 발생이 완료되는 범죄”가 아니라 “제작 단계, 판매 및 배포 단계, 소지 단계 각 단계마다 새로운 가해와 피해가 발생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2002년 작성된 원고이자 2017년 한국어로 번역된 유명한 에세이 『확산(Dispersion)』의 서두에서 미국 출신 작가 세스 프라이스(Seth Price)가 인용했던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의 말, 즉 “예술활동의 정의는 유통[/분배(distribution)]의 영역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다”는 전언을 환기시킨다.10 뒤샹에서 팝아트를 거쳐 개념미술로 이어진 20세기 현대미술의 궤적을 함축적이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독해한 이 글은 브로타스의 문장을 적절히 응축하는데, 그것은 ‘생산’에서 시작된 여정을 ‘소비’로 이끌기 위한 ‘매개’로, 다시 말해 ‘생산’ 다음에 순차적으로 오는 것으로 규정되던 ‘분배’ 활동 자체의 재규정을 요청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순차적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정의돼 온 시작과 끝, 즉 ‘알파와 오메가’로서의 ‘생산’과 ‘소비’ 역시 재정의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가 해당 글을 문서가 아니라 ‘pdf 파일’로 자신의 개인 웹사이트에 업로드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인쇄물의 형태로 정식 출판된 한국어본이 서점에 배포된 시점에서도 해당 한국어 번역본의 pdf 파일을 함께 올려놨다는 흥미로운 사실과도 조응한다. 후자와 같은 ‘시공간적 병치(spatio-temporal juxtaposition)’는 ‘5천 원’으로 책정된 정가가 잠재적으로 창출할 수 있었을 (물론 미미했을) 이윤에 ‘실질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 틀림없다.11 이 자명한 사실은, 문제의 ‘pdf’ 파일이 현실 공간에 물질적인 인쇄물로 출판된 ‘원본’의 가상적인 ‘복사본’으로서, 그것의 비물질적인 “보충물(complement)”이자 “대리물/대체품(surrogate)”에 불과하다는 식의 인식과 배치된다.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이러한 실험적 병치의 당대적 함의를 그 임계점까지 밀어붙인 바 있는데, 그는 “인터넷 상의 예술(Art on the Internet)”이 갖는 특징 중 하나로 “예술 생산과 예술 노출(art exposure)의 재동기화/재동시화(re-synchronization)”를 든다. 이는 우리가 방금 ‘순차적’이라 기술한, ‘생산-분배-소비’의 순서로 이어지는 (것으로 여전히 간주되고 반복되는) 예술의 활동과 향유 과정 자체가, 생산과 유통/분배가 ‘동시’에 이뤄지는 ‘인터넷 상의 예술’을 통해 일종의 위기에 처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재동기화/재동시화”를 통해 “예술가는 그 어떤 최종산물도 만들어 낼 필요가 없”게 되는데, 거기서 “예술 제작 과정에 대한 기록행위[documentation]는 이미 하나의 예술 작품”12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로이스의 방점은 “기록행위(documentation)”의 (변화된) 위상에 찍힌다. 주지하듯 전통적으로 어떤 형태로건 ‘현실’이 아니라는 지극히 관습적인 의미에서 “허구적(fictional)”인 예술 작품에 비해, 해당 작품의 기록물(documentation)은 “예술”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이러한 기록행위/기록물의 부차적이고 2차적인 위상은 인터넷을 통해 결정적으로 바뀐다. 이는 인터넷이라는 플랫폼, 더 정확하게는 그 말의 이중적인 의미에서 프레임(frame)으로서의 인터페이스(interface)가 “허구”,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믿는 척하기(make-believe)’의 양태로 간주되는 예술의 작동과 연동되는 “몰입”과 그것의 유예, 또는 “시치미 떼기(dissimulation)”를 근원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다.13 그 결과 일종의 ‘도약’이 일어나는데, 진정한 예술 작품으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언제나 다양한 방식으로 “재포맷되고, 다시 쓰여지며, 확장하거나 줄일 수 있”었던 “예술의 기록행위/기록물(art documentation)”은, 이제 “인터넷 상에서··· 하나의 특정한 종류의 현실, 작업 과정, 혹은 삶의 과정으로까지 제시된다.”14 즉 인터넷을 통해 제시되는 예술 작품의 기록행위/기록물은 ‘부차적’이란 의미에서의 ‘컨텍스트’가 더이상 아닐 뿐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허구’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이 기이한 위상은 지극히 불투명하고, 역시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변적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13인의 법관들에 의해 재규정된 디지털 성범죄의 독특한 위상, 즉 “판매 및 배포, 소지로 인한 피해가 제작으로 완성된 범죄에 부수적으로 가볍게 발생하”기는커녕 “소지가 판매 및 배포의 동기가 되고, 판매 및 배포가 제작의 동기가 되는 구조적인 측면”과 놀라운 공명을 만들어 낸다. 물론 “동기”가 된다는 표현이 시사하듯이, 여기서 소지와 판매, 배포와 제작은 동등한 위상을 갖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초과객체’로서의 ‘디지털 대상/객체’ 혹은 데이터와 대상/객체의 변증법

이러한 개념적 난관을 정면으로 돌파한 대표적인 인물이 홍콩 출신의 기술/매체철학자인 육 후이(Yuk Hui)다. 독일 관념론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와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을 신선하게 중첩시킨 일련의 저작을 통해, 그는 ‘디지털 대상/객체(digital object)’의 개념과 위상을 전통적인 오해의 늪에서 선명하게 끄집어 낸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상 그의 정치한 논의를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우리의 논의와 직결되는 ‘디지털 대상’의 핵심 중 하나는 그것이 ‘데이터(data)’와 ‘객체/대상(object)’이라는, 언뜻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개의 위상을 공유하면서도, 그중 하나를 중심으로 “구체화(concretization)”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후자를 그는 “데이터의 객체화/대상화(objectification of data)”와 “객체/대상의 데이터화(datafication of objects)”로 구분하는데,15 이는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인 방사선처럼 상호 배타적으로 간주되는 범주의 중첩이자 분기라 할 수 있을 현대 물리학적 인식의 연장선에 놓인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더욱 근원적으로, 이는 철학적인 맥락의 존재론(ontology)과 독립적인 용어이자 개념으로 컴퓨터 사이언스 영역에서 ‘온톨로지(ontology)’라 불리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구현 방식, 즉 GML이나 HTML처럼 “잘 구조화된 데이터의 분석과 비교”들이 “구조나 도식들에 의해 조정되는 데이터와 메타데이터로 이뤄진, 스크린상에 형성되는 대상들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후방 끝자락에 숨는 대상들” 사이에 만들어 내는 관계를 지칭한다.16

‘디지털 대상’에 대한 자신의 기술/매체 철학을 그는 “관계론”으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문제의 ‘관계’란 두 가지 서로 다른 ‘실체’들 사이의 관계도, ‘주체’들 사이의 관계도 아닌,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지칭한다는 점이다. 즉, ‘디지털 대상’이 맺는 ‘관계’란 ‘실체(substance)와 외양(appearance)’, 혹은 ‘주체와 실체’ 개념의 짝패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자연적 대상(natural object)’은 물론, ‘주체’와 ‘대상’의 축을 중심으로 규정되는 “대상과 환경(object and milieu)의 변증법”을 통해 작동하는 ‘기술적 대상(technical object)’들 사이의 관계와도 구분된다. 이를 그는 “간대상성(inter-objectivity)”이라고 부르는데, 이 개념은 미국의 철학자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이 그의 주저 중 하나로 꼽히는 『초과객체들: 세계종말 이후의 철학과 생태학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2013)에서 제시한 ‘초과객체(hyper-object)’ 개념과도 흥미로운 공명을 만든다. ‘초과객체’란 미세먼지나 스티로폼, 또는 플루토늄처럼 개별 국가의 국경이나 십 년 또는 백 년 단위의 시간 축을 넘어 작동/존속하는 것으로서, 전통적인 의미의 ‘대상’ 또는 ‘객체’ 개념에 근거해서는 실질적으로 파악 또는 대처할 수 없는 현상과 대상(object)을 지칭한다.17 모튼에 따르면 이들은 ‘점성(viscosity)’, ‘비지역성(non-locality)’, ‘시간적 파동(temporal undulation)’, ‘위상 조정(位相調整)(phasing)’, ‘간객체성/간대상성(interobjectivity)’이라는 5개의 핵심 특징을 공유하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거나, 서로에게서 독립적으로 떼어 내려 해도 떼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끈적한 점성을 유지하면서도, 특정 지역이나 시점 또는 단계를 절단면으로 삼아서는 분석과 진단을 내릴 수 없는 방식으로 명멸함으로써 내재적으로 연결된다.18

주지하듯 이러한 모튼의 논의는 급진적 생태학(radical ecology)이나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으로 대표되는 ‘객체지향적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조류와의 관계 속에서 논의돼 왔고, 2020년 전 지구를 강타한 코로나19 위기는 ‘인류세’나 ‘기후 위기’란 표현과 더불어 그 함의를 그 어느 것보다 당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지만, 우리의 논의가 시사하듯 그의 ‘초과객체’ 개념은 육 후이의 ‘간대상성’ 개념과 함께, N번방과 그것의 다종다기한 변주인 디지털 공간에서 작동하는 ‘디지털 대상’의 위상을 이전과는 다른 존재론의 평면에 재정위시킬 수 있는 가능성 및 절박함과도 연동한다. 디지털 대상이 ‘데이터(data)’와 ‘객체/대상(object)’이라는 양가적인 위상을 공유하고, 그중 하나의 방향으로 “구체화(concretization)”될 수 있다는 것, 즉 육 후이가 “데이터의 객체화/대상화(objectification of data)”와 “객체/대상의 데이터화(datafication of objects)”라고 지칭한 두 개의 구체화 방식은, 현실 공간의 여성 피해자들이 N번방에서 디지털 파일 이미지로 교환, 증식, 코멘트됨으로써 궁극적으로 ‘놀이’, 즉 ‘게임’으로 향유되고 ,19 이 과정에서 갖가지 끔찍한 명령어(command)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되먹임(feedback)됐던 방식을, 컴퓨터에서 하나의 파일을 기존의 형식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변환하는 것을 지칭하는 ‘내보내기(export)’와 중첩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20

디지털 대상의 장소 특정성? 온라인 이주 시대의 정주와 시대착오적 현실 또는 이미지들

윤지원 작가의 <무제(동영상 루트들) >이란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레지스트라가 수장고로 들어가는 장면을 카메라가 담고 있는 장면이다.
윤지원 작가의 <무제(동영상 루트들) >이란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레지스트라가 수장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장면을 카메라가 담고 있는 장면이다.
윤지원 작가의 <무제(동영상 루트들) >이란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레지스트라가 구동희 작가의 영상작품이 소장된 외장하드를 장갑을 끼고 들고 있는 장면을 담았다.
윤지원, <무제(동영상 루트)>(2016) 갈무리. (단채널 영상, 18분 6초.)

N번방을 가득 메운 끔찍한 이미지들과는 동떨어져 보이지만, 윤지원의 〈무제(Untitled)〉 시리즈 중 하나인 영상 작품 〈무제(동영상 루트들)〉(2015)은 이러한 ‘디지털 대상/객체’로서의 이미지가 수집, 보존, 전시되는 과정에서 유지되는 시대착오적인 혼동들을 이른바 ‘궁서체’의 진지한 영상을 통해 익살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전자의 흥미로운 짝패이자, 일종의 ‘지나간 미래’라 할 수 있다.

특히 작가 구동희의 2012년 단채널 영상 작품인 〈What’s Not There?〉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수장고에 소장되는 과정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 〈무제(동영상 루트들)〉의 백미라 할 만하다. 카메라를 든 작가가 얌전히 뒤를 따르는 수장고의 담당자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미술관 직원조차도 수장고에 들어갈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작품이 본 성질을 잃지 않고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수장고”라고 환기한다. 그에 따르면 수장고의 “온도는 20도+/- 2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고” “습도는 55% +/- 5% 내에서 사계절 365일 관리”되는데, 소장전을 통해 전시되는 500여 점 외의 “나머지 작품들 9,500여 점 이상은 수장고에서 자기 고유의 자리”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관건은, 문제가 되는 구동희의 시청각 작품이 ‘디지털 파일’이라는 점이다. “작품의 정보와 열람용 파일은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어 보관되며, 열람용 파일은 국립현대미술관 내의 미술연구센터나 디지털정보실에서 열람” 가능한데도 말이다. 다시 묻자. 디지털 파일이 가장 잘 수장 및 보관될 수 있는 “자기 고유의 자리”란 대체 어디인가? ‘디지털 파일의 장소 특정성’이란 무엇일까?21 아니 무엇일 수 있을까?

자막을 통해 윤지원은 이 디지털 “파일을 담은 저장매체가 미술관에 도착하면, 조각이나 회화 작업과 마찬가지로, 살균살충 과정을 거쳐, 항온항습이 되는 수장고에 넣어 보관”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디지털 파일’에 벌레가 끼거나, 곰팡이가 핀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수장고에 보관되는 대상이 ‘디지털 파일’이 아니라 이 “파일을 담은 저장매체”라는 점은, 왜 후자가 “조각이나 회화 작업과 마찬가지로, 살균살충 과정을 거쳐, 항온항습이 되는 수장고에 넣어 보관”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 준다. 무엇보다 하얀 목장갑을 낀 수장고 직원의 손이 작품의 기본 정보가 쓰여진 외장 하드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지점은, ‘데이터’와 ‘대상’ 사이의 관계로 새롭게 규정되는 ‘디지털 대상’, 즉 영상 파일이 ‘자연적 대상’과 혼동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우스꽝스럽게 포착한다. ‘파일이라는 실체’(?)가 그것을 담는 ‘외양으로서의 외장 하드’로 대체되는 이 소극은,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예술 작품이 보관되는 장소로서의 ‘미술관’을 ‘디지털 대상’이 어떻게 ‘초과’하는지를 웅변한다. 이런 의미에서 윤지원의 작품은, 8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전혀 ‘실체’가 없어 보이는 손정우의 ‘반응하는 미술관’이 ‘웰컴투비디오’라는, 전자에 못지않게 시대착오적인 이름으로 관장되고 유지되었다는 사실과 기이하게 중첩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따로 또 같이’ 정성스레 보존하고 소장하려는 ‘유연한 소장품’들의 전시가 ‘유물과 비트 사이’에서, 혹은 그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Image in Media Res: 사물 가운데의 이미지 (혹은 미디어)

이는 ‘디지털 대상’이, 또 다른 근원적인 의미에서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재규정했던 ‘이미지’의 중간자적 위상과 갖는 공명을 환기시킨다. 베르그송에게 이미지란 “관념론자(l’idéaliste)가 표상/재현(une représentation)이라 부르는 것 이상이면서, [동시에] 실재론자(le réaliste)가 사물(une chose)이라 부르는 것보다는 못한/덜한 존재,” 즉 “사물과 표상/재현 사이의 중간길에 위치한 존재(une existence située à mi-chemin entre la «chose» et la «représentation»)”였기 때문이다. 즉, 이미지란 실제 사물보다는 관념 또는 (정신적) 표상/재현에 가깝지만, 후자에 비하면 훨씬 ‘사물’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이미지들을 전부 모은 것, 또는 총체로서의 적분값이 (‘이미지’가 아니라) “물질(matière)”이라는 그의 수수께끼 같은 전언은 물론,22 “존재와 [인간에게] 의식적으로 지각된 존재 사이에는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해 준다.23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은 베르그송이 사용한 “la «chose»”라는 개념이다. 이는 한국어로 ‘사물’ 또는 어떤 ‘것’으로, 영어로는 ‘thing’으로 번역되는데, 하이데거는 이것이 고대의 고지 독일어 ‘das Ding’에 상응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원래 ‘소집(die Versammlung)’을 뜻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 즉 송사(eines Streitfalles)를 처리하기 위한 소집”을 지칭했다고 환기한 바 있기 때문이다.24 다시 말해, 베르그송의 시대에 프랑스권에서 “la «chose»”로 번역 및 정착된 고대 독일어 ‘Ding’은 “사건(Angelegenheit)”, 즉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사람들을 관여하게 하는 것”, 또는 “논란의 대상이 되게 하는 그런 것”을 뜻했던 것이다.25 이는 코로나 사태 직전까지 지난 몇 년간 한국을 뒤흔들었던 ‘미세먼지’가 과연 중국의 공장들이 내뿜는 매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공장이나 자동차 배기가스의 결과인지를 두고 여전히 계속되는 논란은 물론, N번방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첨예한 논쟁들이 무엇을 ‘초과’하고 범람했는지를 다시 한번 환기해 준다. 모튼의 ‘초과객체’ 개념과 육 후이의 ‘디지털 대상’ 개념은, 하이데거가 강조했던 차원에서 “사람들을 관여하게 하”고, “논란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das Ding’ 또는 ‘thing’과 연동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재점검해야 할 것은 ‘매체’, 즉 ‘미디어(media)’의 개념이다. 미리 환기해 두자면, 미디어란 무엇보다 목적(ends)을 위해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도구(tool)나 수단(means)이 아니다. 미국의 주목받는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철학자인 존 더럼 피터스(John Durham Peters)는, “중간계가 최고다(The mid-world is best)”라는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말을 자신의 역작인 『멋진 구름: 원소 미디어의 철학을 향하여 (The Marvelous Clouds: Toward a Philosophy of Elemental Media)』(2015)의 제사(epigraph)로 삼은 바 있는데, 이 책의 서론은 ‘In media res’라는 라틴어 구문을 제목으로 갖는다.26 ‘중간계’와 ‘in media res’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일단 ‘media’란 뜻이 ‘중간(mid-)’ 또는 ‘가운데’라는 뜻을 갖는다는 건 별다른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In media res’란 라틴어 구문은 영어로 대개 ‘in the midst of things’로 번역되는 것으로, 한국어로는 ‘사건/사물의 가운데에서’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27 여기서 ‘things’로 번역된 ‘res’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하이데거가 고대 독일어와 영어를 경유해 환기했던 그 ‘das ding/thing’의 로마어에 해당한다. ‘res’가 “어떤 것에 대해 말하다, 어떤 것에 대해 담판하다”는 뜻을 갖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in media res’는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사람들을 관여하게 하는 것” 혹은 “논란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 “가운데”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개념이 어떤 ‘중심’ 또는 ‘중앙’은 물론, 그 ‘목적지(telos)’로서의 ‘종점’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사물들 가운데에’ 있다. 나는 종종 버스나 전철을 탄 어린아이를 예로 드는데, 어린 시절 부모나 형제자매와 함께 이런 대중교통 수단을 타 본 경험을 떠올리는 게 도움이 된다. 교통수단의 기점이나 종점은커녕, 도시의 지형지물을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열)차와 버스는 하염없이 가거나 끊임없이 정차하지만, 아이는 자기가 어디쯤 왔는지, 얼마만큼 가면 다 온 것인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 수반되는 지루함과 불안은 이러한 무지에서 오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녀가 아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위치가 중심을 전제하지 않는 ‘사물들 가운데’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처음과 끝’, ‘중심과 주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물들 가운데’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단순히 출발지와 도착지를 모른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디지털 이미지 또는 디지털 대상이 ‘초과객체’라는 것, 또는 ‘간대상성’의 차원에서 재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들이 ‘생산-분배-소비’라는 연대기적 시간의 축은 물론, ‘자연적 대상’을 수집, 보관, 수장하는 곳으로서의 ‘미술관’이라는 공간적 축 양자를 초과하고 범람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히토 슈타이얼을 탈개인화하기

N번방과 윤지원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시사하듯, 이들은 ‘소유에서 공유로’의 이행이 ‘유물에서 비트로’로의 이행과 중첩되는 지점에서 발생한 ‘범례적인 (오)작동(exemplary (mal)operation)’의 사건이자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디지털 대상’이 수반하는 존재론적 함의는, 아주 먼 ‘미래의 소장품’이라는 시간축이나 특정 예술가의 입장, 또는 미술 작품에 대한 개별적 해석의 지평을 ‘초과’한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예를 들어 ‘세계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라거나28 ‘넷아트’ 또는 ‘포스트 인터넷 아트’ 등 일련의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통해, 역설적으로 전통적인 ‘아방가르드’의 지위를 점유한 ‘단독자적 개인’으로 회수될 위험에 노출돼 온 작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이론적, 실천적 작업 및 이에 대한 수용은, 더욱 적극적으로 탈개인화/탈개별화(de-individualized)될 필요가 있다.29 이는 그녀가 정말로 ‘세계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인지 아닌지에 대한 (지극히 비생산적인) 논쟁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전개해 온 이론적, 실천적 작업의 위상이 우리의 논의와 그 지평을 근원적으로 공유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종 ‘이미지의 유물론’이란 이름으로 적절히 요약되는,30 이미지를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사물(Ding/thing)’로 간주하는 그녀의 입장31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르그송이 규정한 ‘이미지’의 중간자적 위상을 정확하게 환기하고,32 이를 ‘3D 프린팅’이라는 당대적 메커니즘과 직결시키는 부분 역시33 육 후이가 ‘디지털 대상/객체’라는 개념 하에 재규정한 ‘데이터(data)’와 ‘객체/대상(object)’ 간의 새로운 관계와 내재적으로 공명한다.

이렇게 슈타이얼이라는 ‘(천재적) 개인’의 개별성을 당대적 담론의 지평 속으로 누그러뜨림과 동시에 필자가 강조, 더 정확히 말해 세공하고자 하는 것은, “슈타이얼이 말하는 ‘포스트 재현’ 체제의 존재론적 핵심”, 즉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네트워크가 구축하는 이미지, 사물, 주체, 실재의 근본적인 동일성”이란,34 그들 사이에 놓인, 베르그송이 “본성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une différence de degré et non pas de nature)”라 부른 미세한 눈금(gradation)을 통해 미세하게 ‘탈동일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미세한 눈금의 정도와 간극이야말로 슈타이얼이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란 완벽하고 “근원적인 원본(the originary original)”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군집[으로 이뤄지는] 유통(swarm circulation), 디지털적인 분산(digital dispersion), 깨지고 유동적인 시간성들(fractured and flexible temporalities)” 같은, 빈곤한 이미지 “그 자체의 진정한 존재 조건들”에 대한 것이라 환기하고,35 디지털 이미지의 “글리치와 인공물들, 리핑과 전송의 흔적들”을 “이미지들의 멍(bruises of images)”36 이라고 강조한 이유일 것이며, 역설적으로 N번방이라는 끔찍한 이미지들의 집적과 유통이 ‘비현실적’이고 ‘현실’보다 못한 것으로 간과됐던 이유일 것이다.

정확하게 이런 맥락에서 ‘디지털 객체/대상’과 ‘디지털 이미지’란, 베르그송과 하이데거, 그리고 육 후이를 경유한 의미에서 사물과 표상의 가운데(in media res),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며, 우리의 과제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온라인으로 이주하지 못하는 시차를 염두에 두고, 그 유동적인 눈금들의 실질적인 함의를 더욱 면밀하고 당대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본고는 2020년 7월 24~25일 서울시립미술관이 개최한 SeMA Agenda 2020 ‘수집’ 〈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심포지엄 발표문을 각색 및 재편집한 원고입니다.


  1. 박미영, 「[판결] 서울고법 “‘웰컴 투 비디오’ 손정우, 美 송환 불허”」, 『법률신문』, 2020년 7월 6일. (2020년 7월 15일 검색). 

  2. 최선을, 「손정우 판결에 외신도 비판…“대법관 안된다” 청원 30만(종합)」, 『서울신문』, 2020년 7월 7일. (2020년 7월 15일 검색). 

  3. 대법원 공보관실이 작성한 양형위원회 창립 관련 보도자료는 대한민국 대법원의 공식 홈페이지에 업로드돼 있는데, 이에 따르면 양형위원회는 법원조직법 81조의2에 의거해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양형 실현을 목적으로 양형기준을 설정·변경하고, 이와 관련된 양형정책을 연구·심의하는 대법원 소속의 독립기관”으로서, 2007년 4월 27일 “출범한 이후 지난 10년간 양형기준 설정·수정업무에 주력하여 전체 구공판 사건 중 90% 이상에 해당하는 범죄군에 대하여 양형기준을 설정되었고[sic], 대륙법계 국가에서 유일하게 채택된 양형기준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었다는 평가”를 스스로 내리고 있다. 여기서 강영수 판사는 “각계의 대표”로 호명된 다른 20여명의 법조계 학자 및 법관들과 함께 양형연구회 발기인으로 명기돼 있다.  

  4. 공교롭게도 ‘한국정보법학회’는 2020년 6월 27일‘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정보법의 도전과 과제’라는 주제로 학회를 가졌고, 강영수 판사는 ‘공동 학회장’ 명의로 개회사를 했다.  

  5. 이 문장은 2020년 여름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일반 청중 없이 서울시립미술관 지하에서 비대면으로 열린 학술 회의가 유튜브로 생중계됐던 상황을 환기하는 것으로서, 이 글에서 논의하는 사례들과 적절한 공명을 이룬다고 생각해 그대로 뒀다.  

  6. 다음을 참조하라. 소중한, 「‘디지털성범죄’ 석방한 판사의 의미심장한 한마디」, 『오마이뉴스』, 2020년 3월 25일. (2020년 7월 15일 검색). 

  7. 한승곤, 「[종합]생후 6개월도 음란물로…‘다크웹 손정우’ 父 “강간 저지른 것 아냐” 선처 호소」, 『아시아경제』, 2020년 5월 6일. (2020년 7월 15일 검색). 

  8. 다음을 참조하라. Nicole Meehan, “Digital Museum Objects and Memory: Postdigital Materiality, Aura and Value,” Curator: The Museum Journal 63.1 (2020). 이러한 태도는, 2019년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김홍석 작가와의 2인전 《미완의 폐허》에서 VR 작업을 전경화한 서현석 작가의 작업에 대해 필자가 쓴 도록 수록 글의 일부와도 공명한다. “[이는] 이번 신작 전시 중핵에 놓인 VR(Virtual Reality)의 위상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관습적으로 ‘가상 현실’이라 번역할 때 VR은, 한 마디로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VR 작업인 ‘먼지극장 1’에서 관객들은 말 그대로 ‘폐허’가 된 북서울시립미술관과 주변 환경을 본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건 자명하다. 헤드셑을 벗자마자 우리는 멀쩡한 미술관을 발견하며, 밖으로 나와도 현실은 그대로다. 지하의 다목적홀에서 경험하는 VR도 다르지 않다. VR 속에서 관객은 자신이 앉은 한 자리에 제한되지 않고, 다목적홀 내부의 수많은 위치를 점유한다. 하지만 VR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처음 앉았던 것과 같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곽영빈, 「가상적인 것들의 시대착오적 유희/게임—폐허에서 VR까지: 서현석 작가론」, 『2019 타이틀매치: 김홍석 vs. 서현석: 미완의 폐허』 (서울시립미술관, 2019), 318. 

  9. 「[전문] 법원 내부방에 올라온 ‘디지털 성범죄’ 양형 비판글」, 『오마이뉴스』, 2020년 3월 31일. (2020년 7월 15일 검색). 

  10. “The definition of artistic activity occurs, first of all, in the field of distribution.” 한국어 역본은 ‘distribution’을 ‘유통’이라고 옮겼고, 에세이 제목인 ‘dispersion’을 ‘확산’으로 번역했는데, 필자는 ‘분배’와 ‘분산’이라는 역어들과의 중첩 또는 대체 역시 가능하다고 본다. 

  11. 실지로 필자는 이 텍스트의 영어 원문과 한국어본을 세스 프라이스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pdf로 다운로드해 읽었고, 구매하지 않았다. 현재 프라이스의 웹사이트는 사라졌지만, 해당 pdf와 관련 자료들은 구글에서는 물론 웹페이지에서 어렵지 않게 구해 읽을 수 있다.  

  12. “[T]he documentation of the process of art making is already an artwork.” Boris Groys, “Art on the Internet,” In the Flow (New York: Verso), 2016, 180. 

  13. Groys, In the Flow, 174. 재현을 ‘믿는 척하기로서의 모방’ 과정으로 간주하는 대표적인 논의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Kendal Walton, Mimesis as Make-Believe: On the Foundations of the Representational Art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14. Groys, In the Flow, 174–175. 

  15. Yuk Hui, “What is a Digital Object?”, Metaphilosophy Vol. 43, No. 4, July 2012: 389; Yuk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6, 34. 

  16. “What is a Digital Object?”, 389;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1. 컴퓨터 사이언스 영역에서의 ‘온톨로지’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 특히 2장(“Ontology in Computer Science”)을 참조하라. K.K. Breitman, M.A. Casanova and W. Truszkowski, Semantic Web: Concepts, Technologies and Applications (London: Springer-Verlag), 2007. 

  17. ‘hyperobject’를 ‘거대 객체’나 ‘거대 사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스티로폼’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hyper-’라는 접두어는 문제가 되는 대상이나 현상의 양적인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적절한 번역어로 보기 어렵다.  

  18. 모튼의 2016년 저작인 『어두운 생태학: 미래 공존의 논리를 위하여 (Dark Ecology: For a Logic of Future Coexistence)』에서 그는 이러한 “간관계성의 사유(the thinking of inter-connectedness)”를 “그물망(mesh)”이라 부르는데, 이는 메를로-퐁티가 자신의 유고에서 “얽힘(le chiasme)”이란 개념 하에 사유했던 것과 흥미로운 공명을 이룬다. Maurice Merleau-Ponty, “L’entrelacs-le chiasme,” Le visible et l’invisible (Paris: Gallimard), 1964, 170-201. 

  19. 독일어로 ‘Spiel’은 ‘놀이’, ‘게임’, ‘경기’를 뜻한다.  

  20. 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aris: PUF), 1896/1985, 1;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 22. 번역 수정.  

  21. 다음을 참조하라. 권미원, 『장소 특정적 미술』, 김인규·우정아·이영욱 옮김 (현실문화, 2013). 

  22. 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France:Les Presses universitaires), 1965. 다음을 참조하라. Frédéric Worms, Le vocabulaire de Bergson (Paris: Ellipses), 2000, 30. 

  23. “Il y a pour les images une différence de degré et non pas de nature entre être et être consciemment perçues.”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35.  

  24. Martin Heidegger, “Das Ding,” in Vorträge und Aufsätze (1936–1953), ed. F.-W. von Herrmann (Frankfurt am Main: Vottorio Klostermann), 2000, 167. 마르틴 하이데거, 「사물」, 『강연과 논문』,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이학사, 2008), 224–225. 

  25.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225. 

  26. John Durham Peters, The Marvelous Clouds: Toward a Philosophy of Elemental Medi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 1. 

  27. 한국어본은 이를 ‘사건의 중심으로’로 번역하고 있는데, 아래 상술하겠지만, ‘가운데’를 뜻하는 ‘media’는 ‘중심과 주변’, 또는 ‘처음과 끝’의 짝패에 포섭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in’은 방향이나 운동의 경향성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적절한 번역이라 보기 어렵다. 존 더럼 피터스, 『자연과 미디어』, 이희은 옮김 (컬처룩, 2018), 21.  

  28. 「英 미술전문지 선정 ‘파워 100인’에 정도련 등 한국인 4명」, 『연합뉴스』, 2017년 11월 5일. (2020년 7월 15일 검색).
    물론 이런 이슈에 대한 국내의 보도들이 종종 그렇듯, 해당 기사에서 히토 슈타이얼은 한국의 미술계 인사들인 “김선정·이현숙·양혜규”에 대한 정보가 제공된 후에야 “1위는 독일의 히토 슈타이얼”이라는 식으로 언급됐다. 문제의 리스트는 2017년 11월 영국의 미술 월간지 『아트리뷰(ArtReview)』가 구성해 공표한 것이다. “Artist Hito Steyerl heads 2017 edition of ArtReview’s annual Power 100,” Art Review, November 2, 2017. 

  29. “뉴미디어아트라는 뭉뚱그려진 단어로 ‘장르화’를 시도”한 뒤, “넷아트, 포스트인터넷아트 등···‘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일컬어지는 모호하고 광범위한 행위와 현상을 활용”하는 작가로 기술된 슈타이얼이 ‘예술가의 예술가’로 호명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이미지-현실을 관통하는 시선」, 『퍼블릭 아트』, 2017년 4월.  

  30. 다음을 참조하라. 김지훈,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포스트인터넷: 히토 슈타이얼의 이론과 미술 프로젝트」,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6/2018), 269–282. 

  31. “···the image as thing, not as representation.” Hito Steyerl, The Wretched of the Image (Berlin: Sternberg Press), 2012, 50. 

  32. “베르그송이···말하는 이미지는···전통적인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물(Ding)’과 그 ‘표상/재현(Vorstellung)’[한국어 번역본에는 ‘생각’이라고 번역돼 있다] 사이의 중간쯤에 있는 대상을 의미한다.” Hito Steyerl, Die Farbe der Wahrheit: Dokumentarismen im Kunstfeld (Wien: Verlag Turia+Kant), 2008, 56. 슈타이얼이 베르그송의 “다른 글”이라고 적고 언급하는 이 부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물질과 기억』의 7판 머리말(의 독어판본)이다. Steyerl, Die Farbe der Wahrheit, 151f78;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안규철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9), 100–101. 

  33. Hito Steyerl, “Is the Internet Dead?”, Duty Free Art (New York: Verso), 2017, 151. 

  34. 김지훈, 『스크린의 추방자들』, 277. 

  35. Steyerl, The Wretched of the Image, 44. 

  36. Steyerl, The Wretched of the Image,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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