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圓形)의 원형(原形), 원형(原形)의 원형(圓形) + Diffusion

김용관
김용관은 어떤 가정—설정—규칙이 구축하는 새로운 시공간에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점, 선, 면, 도형, 패턴, 퍼즐, 탱그램, 테셀레이션, 입방체, 등각투상도, 모듈, 추상, 반추상을 토대로 이미지와 이야기를 상상하기 좋아한다. 홍익대학교에서 판화를 전공했고, 경기창작센터,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고양창작스튜디오의 입주작가로 있었다. 《각진원형》(부산시립미술관-어린이갤러리, 2022), 《표본공간, 희망에 의한 기관의 변이》(인사미술공간, 2013) 등의 개인전과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2020), 《강박²》(서울시립미술관, 2019) 등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전시공간(全時空間)이라는 이름의 전시공간(展示空間)을 운영하고 있으며, 두 친구의 미래예술 탐방기를 다룬 만화책 『신파』(알마, 2022)를 쓰고 그렸다.

0.

꿈은 항상 사건의 한가운데서 시작한다. 우리는 낯선 시공간에서 낯설지 않은 느낌으로 깨어난다. 꿈의 시공간은 미래와 과거 두 방향으로 확장한다. 마치 이미지처럼. 혹은 이야기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가 먼저 있고, 그 시작은 사후적으로 생성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꿈의 안팎이 평형을 이루며 하나의 세계가 된다. 연결된 안팎에는 모순적이지만 공통하는 진실이 있다. 눈을 뜨면 이 구체적이고 따뜻한 물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내자… 그렇게 사랑이… 세계가 사라진다. 내가 상상하는 이미지는, 이야기는, 무한은 꿈의 안팎이 평형을 이룰 때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진다.

1.

3D 공간은 현실의 미메시스다. 3D 조각 프로그램은 현실을 모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적은 정보로 자신보다 많은 정보로 구성된 세계를 모방한다. 3D 공간은 현실을 추상한다.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속성을 모아 구성을 간소화한다. 물리적 구성이 단순한 세계에서 물리적 구성이 복잡한 세계를 모방하기 위해서는 추상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종이에 원을 그린다. 이것은 현실 세계의 원형(圓形)이다. 완전하지 않다. 원형(圓形)의 원형(原形)을 상상한다. 머릿속에서 그것은 완전하다. 수학적이고, 완벽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떠올린 이 원형(圓形)이 정말 원형(原形)의 원형(圓形)일까? 오히려 이 추상적인 원형(圓形)은 3D 공간에서 그린 원의 형태와 닮았다. 부피가 없고, 파라미터값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으로서의 원형(圓形). 현실이 원형(原形) 세계의 미메시스고, 원형(原形) 세계를 추상화한 결과라면, 원형(原形) 세계는 현실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복잡한 물리적 구성의 세계일 것이다. 어쩌면 원형(原形) 세계는 구체적이고, 완전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이 뒤섞인, 뭐라고 정의 내리기 힘든 것으로 가득 찬, 가장 극단의 반(反)추상일지도 모른다.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픽션 「원형의 폐허들(Las ruinas circulares)」1은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이야기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불에 타 폐허가 된 신전에 한 사람이 찾아온다. 그는 말의 형상 같기도 하고, 호랑이 형상 같기도 한 석상이 있는 원형(圓形)의 신전에서 끊임없이 잠을 잔다. 그의 목표는 꿈속에서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 현실에 내놓는 것이다. 그는 꿈속에서 불타버린 신전과 비슷한 신전을 짓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가장 우수한 학생만을 남기고 다른 것은 없애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지 못하게 되고,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그 후 그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달이 완전해지는 날에 몸을 깨끗하게 하고 잠을 잔다. 심장의 꿈을 꾸고, 그것을 세심하게 보살펴, 다른 장기들의 꿈을 꾸며, 하나의 인간-소년을 만든다. 그런데 소년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꿈속에서 호랑이와 말의 형상, 그 밖의 모든 형상이기도 한 불의 신을 만난다. 마침내 불의 신의 도움으로 소년의 심장이 뛴다. 그는 소년이 자신의 환영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소년의 기억을 지우고 그를 북쪽의 다른 사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한참 뒤에 북쪽 사원의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도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스스로가 환영이라는 것을 깨닫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된다. 어느 날 그가 거주하는 불의 신전이 불에 타기 시작한다. 지친 그는 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불길은 그를 태우지 못한다. 그는 자신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해 꿈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꽤 오랫동안 「원형의 폐허들」의 ‘원형’이 원형(原形)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원형(原形)의 붕괴, 본질이 무너지고, 원본이 흩어져버리는 공상을 즐겼다. 그런데 원형(圓形)이라고 한다. 다소 아쉬웠지만, 오히려 ‘원형(原形)의 폐허들’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혹은 여기서 파생된 이야기. ‘원형(圓形)의 원형(原形) ‘, ‘원형(原形)의 원형(圓形) ‘, ‘미메시스의 미메시스’,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에 대한 공상을 이어갔다.

3.

3D 조각 프로그램은 미메시스를 만드는(현실을 모방하는) 도구이자, 현실의 원형(原形)을 만드는 도구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데아가 아닌, 3D 조각 프로그램으로 설계한 미메시스를 원형(原形)으로 삼고, 이를 모방하며 물건을 만든다. 3D 조각 프로그램 중 하나인 스케치업은 주로 현실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사용된다. 실제 공간 혹은 앞으로 만들어질 공간을 3D 공간에 그리고, 그 위에 오픈소스로 공유되는 물체(의자, 책상, 가구, 조명 등)를 다운로드 받아 올려놓는다. 그렇게 연출된 3D 공간은 현실 공간의 원형(原形)이 된다. 3D 공간, 미메시스를 현실 공간이 모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 공간에 만들어진 것은 3D 공간 속 원형(原形)보다 구체적인 물체가 된다. 질감이 생기고, 직사각형과 원형(圓形)은 불완전해진다. 어쩌면 이것은 반(反)추상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런 공상을 한다. 3D 공간을 원형(原形) 삼아, 반(反)추상의 조각, 반(反)추상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까? 추상이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속성을 모아 구성을 간소화하는 것이라면, 반(反)추상은 모여 있는 보편적인 속성이 흩어지며 어떤 형태로든 구체화되는 것이지 않을까? 다음은 이 공상을 구현하기 위해 생각한 두 가지의 공정이다.

하나는 3D 공간에서 만든 물체를 허물고, 무너뜨리며, 불완전한 구체성을 조각하는 공정이다. 3D 공간만의 속성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조각을 시도한다. 파라미터값 변경하기, 컴포넌트 모듈 변경하기, 구부리기, 비틀기, 잡아당기기, 부분 선택 회전하기, 선과 면 제거하기, 확대하기, 축소하기, 비율 바꾸기, 색상 바꾸기 등. 또 하나는 앞의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 조각-이미지를, ‘미메시스의 폐허들’을 현실 공간에서 모방하는 것이다. 완전한 추상, 완전무결함에 흠결이 생기고 부피와 질감이 생기고, 직사각형과 원형(圓形)이 불완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저차원의 추상을 고차원에서 모방한다. 망상에 가까운 공상. 구체적인 반(反)추상의 조각-이미지를 만들며, 이들을 다시 원형(原形) 세계에서 모방하는 상상을 한다.

김용관, 〈미메시스의 폐허들, 폐허들의 미메시스(Ruins of Mimesis, Mimesis of Ruins)〉, 2019, 비트맵 애니메이션, 9분 4초.

4.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한동안 스테이블 디퓨전, DALL-E, 미드저니 등의 이미지 생성 AI로, 여러 이미지를 만들었다. 주로 미드저니의 ‘blend’ 기능을 사용하여, 내가 만든 이미지와 여러 레퍼런스 이미지를 합성하고, 그렇게 합성한 것을 새로운 프롬프트 명령으로 변주하고, 다시 합성하며, 원본과 거리가 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결국 선보이지는 못 했지만, 특별히 아쉽지는 않다. 이 일련의 과정 내내, 나는 어떤 공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돌에 이미 존재하는 조각품을 발견하고,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할 뿐이다.”라는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이미지 생성 AI는 노이즈 패턴에서 노이즈를 제거하며 이미지를 생성한다. 사용자가 프롬프트를 통해, 노이즈 패턴에 고양이가 있다고 말하면, AI는 노이즈 패턴의 노이즈를 없애며 선명한 고양이 이미지를 끄집어낸다. 돌에 이미 존재하는 조각품처럼, 노이즈 패턴에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말이다.

‘노이즈 패턴 : AI가 생성한 이미지’의 관계가 ‘원형(原形) 세계 : 현실 세계’의 관계와 닮아 보였고, 나는 이것을 어떻게든 연결해서 단일한 세계관을 만들고 싶었다. 원형(原形) 세계가 완전하지 않은 구체적인 것들이 뒤섞인 반(反)추상이라면, (이미지 생성 AI의 Seed에 해당하는) 노이즈 패턴은 구체적이지도 추상적이지도 않은 형태의 반(反)추상이다. 이미지적으로는 추상처럼 보이지만, 이미지 생성 AI의 노이즈 패턴은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속성을 모아 구성을 간소화하며 추상한 것이 아니라, 구체성과 추상성이 무너져 흩어지며 해체한 결과물이다. 다음은 이 세계관을 도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도식을 보며 또다시 공상에 빠진다. 눈을 감고, 새로운 반(反)추상의 조각, 반(反)추상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노이즈 패턴 AI가 생성한 이미지 도면, 개념, 지향, 프롬프트 현실 세계 원형 세계(이데아)
반(反)추상 구상 추상 구상 반(反)추상
초가상 가상 본질 현실 초현실

*이 글은 2019년에 발표한 텍스트 「원형(圓形)의 원형(原形), 원형(原形)의 원형(圓形)」을 이해하기 쉽게 수정하고, 업데이트된 생각을 덧붙여 작성했습니다.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원형의 폐허들」, 『픽션들』, 송병선 역(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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