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인간을 위한 실천: 사물의 윤리

김은정
김은정은 미국 시러큐스대학교 여성/젠더학과와 장애학 프로그램 부교수이자 장애여성공감, 가족구성권연구소 회원이다. 교차성·초국적 여성주의 장애학·인권·무성애·크립/퀴어 이론을 다룬 논문들을 썼고, 질병의 인식론, ‘불구’의 생태학과 존엄성의 실체에 관해 연구 중이다. 저서 Curative Violence: Rehabilitating Disability, Gender, and Sexuality in Modern Korea는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번역되었다 (강진경, 강진영 공역, 후마니타스, 2022). 역서로 『거부당한 몸』(공역) 등이 있다.

기계는 작동되어야 하거나 찬양되어야 하거나 지배되어야 할 어떤 물건이 아니다. 기계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의 작동양식이며, 우리의 신체성의 한 측면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raway)1

어떤 존재들을 배제해나가는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만들어지는 타자성(otherness)에 도전하기 위하여,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한 방식인 ‘사물화(objectification)’ 개념을 새롭게 사용할 수는 없을까? 그동안 비인간화, 사물화(혹은 대상화)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부정적인 말로 쓰여왔다. 두 개념을 통해, 인간이 식물과 동물 등 타자들과 구별되는 어떤 특성이 있다고 정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특성이 결여된 상태가 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글은 능력(ability)과 장애 여부를 기준으로 인간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는 관점(예컨대, “사물은 앞을 볼 수도 없고 인지 능력도 없기 때문에”2 사물은 인간이 아니다, 혹은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라는 방식의 사고)에 문제를 제기하며, 인간성의 뚜렷한 표식을 제거해나가는 작업들을 검토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의 〈리듬(Rhythm)〉(1973-74) 연작과 〈예술가는 존재한다(The Artist Is Present)〉(2010) 퍼포먼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를 통해, 인간이 노동하는 기계가 되거나, 의식이 없거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이는 ‘유사-사물’이 되어 사물의 특질을 체화하고 자신의 몸 혹은 몸의 일부를 사물로 인식하는 순간을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관습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나 가치라고 여겨져 온 것들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순간을 분석해보려 한다. 인간이 곧 사물이고 사물이 곧 인간이라는 말이 주는 강렬한 느낌은 인간과 사물 (혹은 동물이나 식물)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이, 신성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취약한 것임을 말해준다. 사물이 인격을 가진 존재로 다뤄지거나 인간이 사물처럼 다뤄지는 상황 속에서 이 둘은 서로 중첩한다.

장애학자와 활동가들은 다양한 범위의 기능과 역량, 체형을 가진 사람들이 존엄성을 가지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해 왔고, 우리의 삶이 동등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존재의 인간됨(humanness)은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가진다’라는 말처럼 권리가 보장되는 당연한 특성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존엄성을 상실한 자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어떤 이들을 배제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자립생활운동(Independent Living Movement)을 시작한 장애활동가 에드 로버츠(Ed Roberts)는 의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회상했다. “아드님이 죽기를 바라셔야 할 겁니다. 계속 살더라도 아드님은 식물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될 테니까요. 어머님이라면 하루 24시간을 인공호흡장치로 숨 쉬며 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인간됨을 주장하는 대신 이렇게 외친다. “전 세계의 식물이 단결하고 있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

장애의 삶과 비장애의 삶 사이 위계질서는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를 기반으로 구성되는 ‘인간 이하’라는 범주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정상적인 삶의 조건이 가진 이미지에 과도하게 의존해 가치와 존엄성을 생각한다면, 장애학은 그런 위계질서를 성공적으로 비판하기 어렵다. 재스비어 푸어(Jasbir Puar)는 “장애를 가진 몸이 갖는 차이에 집중하다 보면 특정 장애를 가진 신체만이 특권화되는 예외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4 차이의 질적인 내용이나 가치를 주장하는 전략은, 특권을 획득해야만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특권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unearned privilege)과 노력을 통해 얻은 것(earned privilege)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배타적인 권력을 만들어내지 않고 존재양식과 생존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상성의 규범은 인간성 여부를 법의 판단에 맡김으로써 구성된다. 새머라 에스미어(Samera Esmeir)는 식민지 이집트의 근대법에서 “비인간화 혹은 비인간성의 상태를 잔학/착취/타락의 상태로 지칭”하고 있었음을 짚는다.5 나아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폭력을 비판하는 자들 역시 “인간성(humanity)은 사라지거나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제 인권보장 체제가 “인간성을 구성하는 법의 권력”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한다.6 그렇다면 이 글에서 살펴볼 몸의 실천으로서 사물-되기는 어떻게 “인간성은 부여되는 것이고, 선포되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관념”에 저항하는가?7 ‘우리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주장 또한 그런 틀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인간과 사물을 도덕적으로 구분하는 데 문제 제기하지 못한다. 이는 사물을 취급하는 방식이 인간을 취급하는 방식과 무관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폭력을 ‘비인간적’으로 여기는 데 반해,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rkrabarty)는 인도-파키스탄 분할로 일어난 대량학살에서 드러난 폭력의 인간적 면모를 강조한다. “집단적 폭력이 인간을 한갓 사물로 취급하는 것처럼 보일 때, 분명한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이를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이 근본적인 전제조건이라는 점이다. 고문하고, 강간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사물에게 행하지 않는다. (중략) 따라서 희생자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인간성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8 사물화라는 불경함은 한 개체(인간)를 다른 것(사물)으로 오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성이 먼저 인식된 뒤에야 어떤 특징들이 적극적으로 제거되는 과정이 뒤따른다.9 그 과정은 사물이 다뤄지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물은 사용되고 버려지지만 어떤 사물은 사랑받고 숭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폭력의 가해자가 인간이 아닌 짐승이고, 피해자는 사물화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려는 시도이며, 폭력과 비폭력의 인간적인 면모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그런 시각은 인간을 제외한 동물이나 사물이 행하는 폭력과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차크라바르티가 폭력을 가리켜 비인간적(inhuman)이라고 하는 대신 “인간 내적(in-human)”10이라 하듯이, 폭력을 인간 내부에 위치시킬 때 우리는 인간성에서 탈출하는 방식으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폭력의 실행을 거부할 수 있고, 사물-되기에 수반되는 취약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의식이 없거나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을 유사-사물과 연결시키는 것은 비도덕적으로 보이고, 이들을 비하해 단순히 ‘비인간화(dehumanizing)’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퍼즐’이라거나 ‘외계인’이라거나 ‘식물인간 상태’라 부르면서,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 혹은 비인간적 존재에 비유하는 것 역시 인종차별적이고 장애차별적인 사회에서 꽤 자주 일어나는 모욕이다.11 정상성을 강화함으로써 (주변화된 집단이 가진) 차이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해로운 것처럼, 어떤 사람들을 모욕함으로써 그들의 인간성을 제거하는 방식 또한 폭력적인 효과가 있다. 그럼에도 서노라 테일러(Sunaura Taylor)는 ‘기형인간’ 전시쇼 문화와 의료 담론에서 장애인과 동물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질문한다. “이런 비교에 결부된 노골적인 인종차별/계급차별/장애차별주의를 넘어서서 이 메타포들을 사유할 방법은 과연 없는가? 동물 비유에 대해 우리가 왜 그토록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동물이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억압과 편견으로 피해를 본 희생자들인데 말이다.”12 나는 사물이 존재하고 취급되는 여러 방식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멜 첸(Mel Chen)처럼 테일러의 질문을 “수정된 윤리를 만들기 위한 출발점으로”13 보고 사물-되기에 관해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사물-되기의 순간은 ‘목적 없이 존재하기’의 윤리를 만들어낼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얘기는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안 되더라도, 많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 줄 수 있다. 인간을 사물로 보는 관점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현상을 비난하기 위한 말로서 ‘사물화’가 지닌 정치적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문화적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도록 해준다.14 그런 비난은 실제 사물화되는 경험의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채 행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공간, 어떤 환경에서 파괴적인 방식이 아닌 생성적인 방식으로 이 사물-되기를 실천할 수 있을까? 살 수 있는 삶,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조건을 만들고, 보편적 인권의 주장을 통해 (인간을 특정한 자질이나 능력을 가진, 혹은 가져야만 하는 존재로 상정하지 않고서) 폭력을 철폐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에 이러한 작업이 지니는 윤리적 함의는 무엇인가?

사물들의 퍼포먼스

사물화와 폭력을 자동적으로 연결하는 관점은 사물화하는 자(the objectifier)와 사물화되는 자(the objectified) 사이의 일관된 이원론적 분리를 가정한다. 이것이 바로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사물화 이론이 토대로 삼는 지점이다. 즉 사물화를 긍정적이거나 무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합의와 평등을 통해 두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15 저명한 퍼포먼스 예술가이자 논쟁을 몰고 다니는 인물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연작은 사물화를 실행하고 동시에 사물화 당하는 몸이 사물성과 겹쳐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구분에 도전한다.

〈리듬〉 연작은 아브라모비치의 첫 번째 퍼포먼스 작품인 〈리듬 10〉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아브라모비치는 바닥에 놓인 흰 종이 위에 자기 손을 놓고 손가락 사이 공간을 칼로 찌르는 강렬하고 리듬감 있는 동작을 보여준다. 한 손으로는 말 그대로 사물화하는 자이면서, 다른 한 손은 사물화되는 몸인 것이다. 손이 베일 때마다 다른 칼을 사용하는데, 그렇게 총 20개의 칼을 차례로 사용한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몸과 동작, 사물이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와 리듬을 녹음한다. 칼을 모두 써버린 뒤에는 그때까지 녹음한 퍼포먼스를 틀어놓고, 다시 같은 퍼포먼스를 동시에 반복하는데, 결국 같은 부분에 손을 베게 된다. 맨살의 취약함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 종이와 그 위에 벌어져 있는 손가락 사이의 구분은 사라진다. 아브라모비치의 비장애성, 즉 손과 눈을 연결하는 조정능력, 손가락이 여러 개 있는 양손을 가졌다는 것, 움직임을 통제하는 능력과 집중력, 시력/청력 등의 감각을 제쳐두고서, 반복 행위와 녹음 소리의 재생으로 관객은 자해의 위험에 대한 공포와 긴장을 넘어서고, 행위예술가 자신은 신체 일부를 사물로 경험하며 그 공간을 근육의 기계적 움직임으로 채워나간다.

〈리듬 5〉에서 아브라모비치는 불에 타는 오각형 구조물 한가운데 누워 한동안 의식을 잃는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불에 집어넣음으로써 신체-사물(body-object)을 화염의 일부로 만들고 스스로 의식을 잃는 데 기여한다. 관객들은 아브라모비치의 바지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의식을 잃었음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면서 퍼포먼스에 개입하게 된다.16 이런 결과를 자신이 의도한 퍼포먼스가 방해받은 것으로 해석한 아브라모비치는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중에도 퍼포먼스를 방해받지 않고 지속할 방법을 고안한다. 〈리듬 2〉에서 그녀는 긴장병(catatonia) 치료약을 복용한다. 후에 기록하길, 의식이 있고 상황을 인식할 수 있을 때에도 약의 효과로 자기 몸이 비자발적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약효가 가시자 이번에는 반대로 진정제를 복용한다. “신체적으로 나는 그곳에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17 〈리듬 4〉에서도 아브라모비치는 의식 없는 몸으로 퍼포먼스를 수행해낸다. 강한 송풍구 위로 몸을 기울여 바람에 띄우고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를 흡입하려 애쓰다가 의식을 잃지만, 머리는 바람 때문에 둥둥 떠서 계속 움직이게 된다. 관객들은 그저 모니터를 통해 다른 방에서 그 움직이는 머리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관객들은 그녀가 의식을 잃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18 이렇게 신체적 자가실험을 공개 전시하여 의식과 신체를 분리하고, 의식의 드나듦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신체에서 의식으로, 의식에서 또다시 퍼포먼스를 하는 신체로 옮긴다.

주체-대상 이원론, 의식-신체라는 이원론은 아브라모비치가 자기 자신을 사물화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다가 연작의 마지막인 〈리듬 0〉에서 복권되며 다시 강조된다. 1974년 나폴리의 스튜디오 모라(Studio Morra)에서 아브라모비치는 6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나는 사물입니다”라는 팻말을 달고 관객으로 하여금 사물화하는 이의 역할을 하도록 초대했다.19 지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72가지 물체가 있으니, 원하는 대로 제게 사용하십시오. 6시간 동안 모든 책임은 제가 질 것입니다. 이 중에는 고통을 주는 물건도 있고 쾌락을 주는 물건도 있습니다.”20 테이블 위에는 총/총알/쇠창 같은 무기도 있고, 면도날/도끼/못/톱처럼 무기로 쓰일 만한 도구도 있고, 빗/거울/향수 같은 몸단장 도구도 있으며, 주방도구와 빵/사과/포도/꿀 등 음식도 있고, 깃털과 장미도 있었다. 그와 같은 도구의 배열은 신체의 취약함에 대한 감각을 고양시키고, 행위성을 유보하게 한다. 사물로서 작가의 지위는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 주장과 모순되기는 하지만, 관객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녀의 몸을 포함한 각각의 물건에는 어떤 시나리오가 담겨 있고, 마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놓인 것 같은 다양한 배열 안에서 용도가 무엇인지 전달하고 있다. 시나리오에는 여러 가능성이 있는데, 클라우스 비젠바흐(Klaus Biesenbach)가 말한 것처럼 ‘최후의 만찬’이 될 수도 있고 수술실이 될 수도 있다.21 나폴리 공연을 기록한 사진을 보면 관객 두 명이 아브라모비치의 몸을 옮기고 있거나, 그녀의 몸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거나 외투로 덮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상의가 벗겨진 채 눈물 흘리며 서 있는 모습도 있다. 몸과 얼굴에 낙서가 되어 있거나, 상처에서 피가 나는 모습도 있다. 관객 하나는 그녀의 손에 총을 쥐여 그녀 자신을 겨누게 하기도 했다. 이후 다른 관객이 총을 거둔다. 살아 있는 동상처럼 움직임이 없던 그녀의 몸은 정지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매우 극적으로 만들었다. 6시간이 지나자 아브라모비치는 관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그녀와 “실제로 대면하지 않기 위해”22 도망쳤다. 사물에서 움직이는 주체로의 전환이 너무나 충격적으로 경험되는 사실은 관객이 그녀가 사물이라는 상황에 몰입했고, 그녀를 실제 사물로 대했음을 알려준다. 크리시 아일스(Chrissie Iles)는 폭력을 인간 외의 동물과 바로 연결 지어 “문명은 아주 얇게 포장되어 있다”라고 하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을 때 사람이 얼마나 금세 짐승 같아질 수 있는지 생각하면 매우 공포스럽다”라고 지적한다.23 주디스 핼버스탬(Judith Halberstam)은 “여성을 향한, 예술가를 향한, 자아를 향한 관객의 살인 충동”이 드러나는 것에 주목한다.24 그러나 아일스와 핼버스탬이 가리키는 ‘짐승같이’ 되는 것 혹은 ‘살인 충동’에 따른 행위는 단일한 의미를 가질 수 없고, 관객이 아브라모비치가 정해준 규칙에 따라 행위한 사실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근접성과 맥락은 예술가에 의해 신중하게 고안되었고, 여성으로서 예술가의 몸을 포함한 각각의 사물에 각인되어 있고, 문화적/역사적으로 형성된 각본과 결합되었다. 관객은 아브라모비치와 사물들이 요구하고 허락한 대로 행위자가 되었고, 예술가인 아브라모비치는 사물로 남았다. 개인에게 무작위로 수감자나 교도관 역할을 할당한 고전적 연구인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참가자들처럼, 아브라모비치의 관객은 주어진 상황에서 협동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즉흥적으로 행위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완전히 수동적인 육체, 상황이 부여해준 권력, 주어진 사물들을 가지고 문화적으로 익숙한 레퍼토리를 재현해낸다. 달리 말해, 모든 행위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상황에서 관객은 아브라모비치의 포지션이 무력함을 함께 실천하도록 초대한다고 상상해내지 못한다. 예술비평가 토머스 매케빌리(Thomas McEvilly)는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가 스스로 순종적이고 수동적으로 되는 여성적 에너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데, 아브라모비치는 이 작품을 하려고 마음먹은 용기가 남성적 에너지와 더욱 결부된다고 답했다.25 다른 곳에서 그녀는 관객이 젠더화된 반응을 보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컨대 여성 관객은 거의 자신이 직접 행위하지 않고 남성 관객에게 어떤 행위를 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26 능동성과 수동성은 각각 남성과 여성의 특징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실천되지만, 스스로 완전히 수동적으로 되겠다고 결정하는 일은 권력과 결부된 것이며 남성적인 것으로 젠더화된다. 이렇게 사물-되기 실천이 젠더화되는 것은 탈인간의 어려움과 함께, 위계 없이 자유롭고 완전한 근접성을 획득하는 것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종국에는 아브라모비치의 사물로서의 상태는 제거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녀는 탈사물화된다. 심지어 약을 개입시켜서라도 그녀는 몸의 정지 상태를 풀고 규범적으로 젠더화된 상태가 된다(〈리듬 2〉). 〈리듬〉 연작에서 드러나는 사물-되기가 행위성과 주체성을 남성적인 것과 연결해 이해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못하지만, 이는 분명히 몸의 사물성이 지닌 수행 능력을 드러내고, 수동성과 능동성을 해석하는 젠더화된 방식의 기반을 뒤흔든다. 여기에서 사물과 인간의 중첩은 뚜렷해지며, 사물화를 핼버스탬이 “급진적 수동성(radical passivity)”27이라고 부른 무권력(powerlessness)의 실천으로 읽어낼 수 있다.

권력의 형태로서, 또 권력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으로서 탈인간화의 순간을 탐구하는 것은 특정 맥락에서 누군가를 언제든 폐기 처분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고, 돌볼 가치가 없고, 폭력을 가해도 되는 대상으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착취이며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가진 사물성과, 인간으로 인정되지 않는 수많은 존재를 생각할 때 사물-되기를 통해 장애를 가진 몸, 비생산적인 몸, 퀴어의 몸, 유색인의 몸이 장애차별적인 사회와 맺는 관계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이 모든 장애인이 비생산적이라거나 수동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장애차별적인 사회는 정상성을 미끼로 삼아 인정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이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사물이나 기계로 상상되고 구현되는 사물성(objecthood)의 경우를 살펴보면, 생명과 죽음 사이에, 비인간과 인간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모호한 공간 속에서 사물, 물질, 존재들 사이의 관계성은 반장애차별적 입장, 즉 정체성(identity)과 사회적 관계성(sociality)뿐만 아니라 근접성(proximity)과 공존(copresence)에도 기반하는 퀴어 비인간주의의 윤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공연한 유명 퍼포먼스, 〈예술가는 현존한다〉(2010)에서는 아브라모비치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행위예술이 〈리듬 0〉에서와 달리 현존과 존재 사이의 정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근접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물-되기의 상황을 빚어낸다. 관객으로 둘러싸인 빈 공간에서 아브라모비치는 경호원의 엄호를 받으며 세 달 동안 매일 미술관 개장시간 내내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관객은 차례로 그 맞은편에 앉아 원하는 만큼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바라보는 것 외 행동을 하면 경호원에게 붙들려 퇴장당했다. 이처럼 엄격히 통제된 상황에서 관객은 오로지 시선과 에너지 장을 통해 상호 작용함으로써 사물-신체의 정지 상태를 수행해야 한다. 누가 누구에 의해 사물화되는가보다 중요한 문제는, 예술가가 현존한다는 것과 만남의 순간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결말(closure)에 대한 깊은 저항과 다중성(multiplicity)”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개념공간(conceptual space)”을 만들어 관객에게 참여를 요구하고, 작가의 현존을 정의하는 방식을 통해 작가인 그녀가 만든 규칙들을 중요시했다.28 개념공간이 폭력적 상호작용의 레퍼토리를 (〈리듬 0〉처럼) 불러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사물화와 유사-인간 상태가 곧장 폭력으로 연결되는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객이 앉아만 있도록 경호원이 감시하며 공간을 통제한 사실은 장애차별주의적 원칙의 가시/비가시적 통제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그러한 원칙은 기능/행동/지식/정서/미학적 정상성에 의거해 장애를 가진 몸을 공적 공간에서 제거한다.

“예술가는 사물이다”라는 글에서 핼버스탬은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들이 뚜렷한 “페미니즘적 주체”가 부재한 “그림자 페미니즘(shadow feminism)”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오직 “말을 할 수 없고, 말하기를 거부하는 비주체(un-subject), 일관성을 거부하고 흐트러지는 주체, 그리고 존재라는 것이 자기활성적이고, 자기인식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주체로 정의되는 곳에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는 주체”만이 있을 뿐이다. 핼버스탬은 아브라모비치가 사물이 됨으로써 “체화된 주체성 주변에 결집되는 합리성이라는 모든 상투적 형태에 강력하게 맞선다”라고 결론짓는다.29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체화’(embodiment)는 비의도성, 말없음, 보지 않음, 침묵, 비운동성, 비활성, 무능력, 무성성, 단절성보다는 의지적 욕망과 말하기, 보기, 거부, 이동성, 목적성, 지성, 욕망, 연결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장애의 몸이라는 좁은 의미로만 상상되어왔다. 따라서 핼버스탬의 “비-주체”는 앰버 자밀라 머서(Amber Jamilla Musser)가 “탈주체화의 양식” 그리고 “사물-되기(becoming-object)의 양식”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30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이러한 신체가 어떻게 장애차별주의를 비판할 수 있을까? 장애차별주의는 몸을 통제하는 능력에 따라 인간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에 기반한다. 움직임 없이 계속 앉아 있음으로써 아브라모비치는 관객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움직임이 없는 상태를 재연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선을 마주치면서도 자신의 몸을 통제하고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초인간적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박제되어 있는) 모든 신체는 정지한 순간이나 사물의 형태로 존재하는 ‘비-생명’의 순간에도 첸이 지적한 것처럼 끊임없는 ‘움직임(animacy)’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는 상태로 보이는 것은 장애를 가장하는 것일 뿐 아니라, 초능력을 수행하는 것이다.31 물질인 아브라모비치의 몸이 수행한 장애의 상태와 그녀의 정신과 시선이 보여준 초능력의 위험한 결합은 움직이지 않는 몸의 살아 있는 상태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그녀의 의자 밑에는 요강이 잠시 설치되었다가 이내 제거되었다. 그녀는 수분 섭취를 조절하는 식이요법에 따라 하루에 공연하는 시간 동안 전혀 소변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아브라모비치는 이에 대해 “나는 마인드 컨트롤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32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화장실이 물리적으로 접근 불가능하거나, 화학물질이 잔뜩 뿌려져 있거나, 성별 이분법에 따라 분리되어 있거나, 돈을 내는 고객만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누구나 접근 가능하고 안전한 공공 화장실이라는 게 거의 없는 사회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수분 섭취 조절법이 공공장소를 다닐 때 흔히 해야 하는 경험이다. 하지만 아브라모비치가 훈육, 통제, 신체적 한계의 극복을 강조하는 것은 이원론적으로 정신이 육체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 즉 수전 웬델(Susan Wendell)이 말하듯 “신체가 마음대로 통제될 수 있다는 믿음”33을 강화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이 이원론은 몸이 계속 떨리거나, 가만있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거나, 혹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의 몸들을 통제 실패의 상태로 보는 시각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쳐왔다. 게다가 아브라모비치가 관객을 응시하며 앉아 있을 때 나타난 인간성의 표식으로서의 눈맞춤은, 이런 눈맞춤을 강제로 배워야 하는 신경다양성을 가진 자폐인들(neurodiverse individuals)에게는 적대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처럼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가 장애차별적인 양상을 고집스럽게 나타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현존은 친밀한 사회성 없이도 비정상의 존재와 공존하고 협상하는 근접성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정상신체를 중심으로 조직된 시간성(temporality)을 극복하려 애쓰며, 자기 자신이 사물이 됨으로써 ‘신체정신(bodymind)’의 물질성을 인식하도록 초대하는 계기를 만든다.34

마거릿 프라이스(Margaret Price)는 정신장애에 주목한 논문에서 ‘신체정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정신과 몸을 분리해서 보는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정신적, 신체적 프로세스는 전통적으로 둘로 여겨지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하나로 작동하기 때문이다.”35 그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은 항상 하나로 통합되어 느껴진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인간의 사물성에 관해 생각할 때, 의식과 몸이 분리된 감각은 장애의 경험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올리버 색스는 고유수용성 감각(proprioception), 즉 몸에 대한 감각 및 “우리 몸이 제대로 조율되고 균형을 잡는 데 필요한 조절 기능과 복합적 메커니즘”36을 잃은 크리스티나라는 여성의 사례를 소개한다. 크리스티나는 처음에 자신이 “육신을 떠났다”라고, 자신의 몸이 “스스로를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라고 느꼈고, 고유수용성 감각의 상실이 지속됨에 따라 계속해서 자신의 몸이 “죽었고”, “실재하지 않으며”, “자기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37 의식과 몸이 통합되어 있다는 가정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이 사례에서 장애를 가진 크리스티나의 몸은, 작동되기 위해 그녀 자신의 시선이 닿는 대상으로서, 그리고 색스가 말했듯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 그리고 그녀의 경험을 묘사할 언어가 부재해 표현할 길 없는 “비영역(non-realm)”으로서 그녀 가까이에 존재한다.38

“탈신체화(disembodiment)”라고 할 수 있는 고유수용성 감각 장애는 육체적 존재와 사물성 사이의 중첩을 드러내준다. 크리스티나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의 메타포를 사용하는 것은 이 고유수용성 감각 장애가 다른 방식의 감각 처리임을 설명해준다. 비슷하게 래리 데이비드슨(Larry Davidson)도 자신의 연구 참가자 중 조현병을 가진 한 명이 “자신을 더 이상 한 사람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때”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런 순간에 그가 가졌던 인식은 사물로서의 인식으로 느껴졌다.”39 데이비드슨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사람의 말도 인용한다.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사물이 되고 있고, 사물들은 감정이 없으니까요.”40 물론 이 인용문들이 그들의 개인적 경험의 더 큰 맥락들에 대해 알려주는 바는 없지만, 몸과 의식이 단절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정신적/신체적/감각적 장애의 다중적 차원이 신체정신(bodymind), 정지성(stillness), 차이의 긍정적인 측면과 같은 하나의 대안적 존재론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대신 탈인간화의 존재론은 의식과 몸이 공감하고 연결되며 결합되어 있든 아니면 단절되고 파편화되어 겨우 근접해 있는 상태이든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론적/윤리적 개입으로서 탈인간화의 퀴어 비인간주의(queer inhumanism)는 장애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노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능력, 가치, 합법성, 사회적 수용에 기대지 않고서는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인간의 주체성에 관해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인간성을 나타내는 통상적인 표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인간성과 개인성을 ‘부여’하려는 욕망을 유보하면,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해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우리가 더 향상되고 능력을 획득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은 힘을 잃는다. 이는 육성언어나 수어로 의사소통하지 않는 이들에 관해 더글러스 비클런(Douglas Biklen)이 주장하는 “능력의 추정” 원칙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비클런은 자폐인인 티토 라자르시 무코파디예이(Tito Rajarshi Mukhopadhyay)와 수 루빈(Sue Rubin)의 글에서 해당 개념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먼저 그 사람에게 좋은 쪽으로 가정해보고, 능력이 있다고 전제한 다음, 능력의 증거를 찾으려 노력하고, 의사 표현을 하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라고 했다.41 지적장애라는 낙인이 자동적으로 타자성을 만들어내고 기대치를 낮춘다는 것을 생각하면, ‘능력의 추정’은 지적장애인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데 중요한 실질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추정은 ‘능력(competence)’이 곧 평등과 사회적 관계의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믿음에 도전하지 못한다. 어떤 존재의 존재방식을 인정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배타적 기준으로 작동되는 인간성이라는 자격 요건에 도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비판적 비인간주의의 관점으로 장애를 중심에 두고 사고한다는 것은 인간을 더 정확하게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게끔 개념을 재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어떤 가치판단이나 분류 기준 자체가 필요치 않은 다양한 존재론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또한 장애인이 치유되고, 재활에 힘써야 하고, 동화되고,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비장애 중심적 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의 조건에 주목하는 것은 생산적 시민이어야만 인간성이 인정되는 것이 아닌,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인권에 대한 전 지구적 노력과도 예상치 못하게 맞물릴 수 있다. “권리를 가질 권리”에 대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주장은 권리보호를 보장하는 전제조건이 존재하는 문제를 드러낸다. 그 전제조건은 “행위”와 “의견” 그리고 “조직된 어떤 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포함한다.42 아렌트는 “완전하게 조직된 인간성”에 기반한 근대적 개념의 인권이 등장하기 이전에, “우리가 오늘날 ‘인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폭군도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의 일반적 특징으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덧붙인다.43 퀴어 비인간주의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인간을 중심 조건으로 설정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성을 아무리 포괄적으로 정의하더라도 모든 인간의 특징을 완전히 대표하거나 설명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물성에 기반한 비판적 사고는 무엇보다 한 가지 형태의 저항과 행위성만을 특권화하거나 가치 있는 삶을 고정된 방식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며, 순응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됨을 유예하는 것은 차이에 대한 가치평가와 판단을 그치고 공존과 근접성의 존재론을 지향하는 것이다.

Marina Abramović, Rhythm 0, 1974. Performance, 6 hours. Studio Morra, Naples. Photo by Donatelli Sbarra. Courtesy of the Marina Abramović Archives.

기계여도 괜찮을 수 있는 삶의 조건

억압과 식민주의 역사에 기반한 노동 착취를 지지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정치 안에서 사물-되기는 과연 어떻게 실현 가능하며,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을까?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서는 초현실주의, 코미디, 음악적 요소를 사용하여, 목적 없는 기계가 되는 한 정신장애인을 묘사한다.44 이 영화가 행하는 실험의 중심에는 역설적으로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요소를 탐색하는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 라디오 공장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영군(임수정 분)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은 자신을 아직 목적을 알 수 없는 사이보그라고 생각한다(사이보그로 변화되어가는 중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몸의 전류를 충전하고자 어느 비 오는 밤 공장에서 자가 감전을 시도한 그녀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고, 거기서 음식 섭취를 거부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 영화에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 두 부분이 함께 엮여 있다. 정신장애를 지닌 독특한 집단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각자의 환각과 망상을 마치 기계 부품처럼 이동시킬 수 있고 공유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줌으로써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다른 한 부분은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군의 폭력적인 복수가 나타나는 부분으로, 보호시설에 보내졌던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영군의 기계 정체성에 의해 실현된다. 영화는 사물, 인간, 반사회성, 근접성 사이를 오가며 전복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도덕적으로는 모호한 여행을 그린다. 결국 이 영화는 능력에 기반해 인간임을 정의하지 않고, 필요에 기반해 존재를 이해하려는 관점을 취한다. 영화는 ‘사물의 열등성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물과 함께 존재하고 사물과 관계 맺는 삶과 정신장애를 가진 삶을 긍정한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로 진단되어 병원에 수용된 또 다른 인물 일순(정지훈 분)과 영군의 공동 작업은 정체성을 규정할 필요도 존재의 이유도 없이, 그리고 ‘나아질’ 필요도 없이, 먹는 것과 사람들 옆에 있는 것이 괜찮은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제시한다.

도입부에서 움직이는 톱니바퀴를 클로즈업한 이미지는 엑스레이로 찍은 것처럼 기계 내부의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계적인 리듬감과 함께 펼쳐진 장면에서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 수많은 젊은 여성이 밝은 공간에 일렬로 줄지어 앉아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장애여성 공장노동자인 등장인물을 분석할 때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해러웨이는 집적회로를 생산하는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한국의 공장노동자에 관해 언급하며 “‘유색인 여성’은 사이보그 정체성으로서, 아웃사이더 정체성들로 합성된 잠재력 있는 주체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45 해러웨이는 “과학에 기반을 둔 산업에서는 ‘유색인 여성’이 노동력으로서 선호된다”라고 지적한 후 이렇게 말한다. “성산업과 전자제품 생산직에 종사하는 젊은 한국 여성들은 고등학교에서 바로 모집되어 집적회로를 중심으로 교육받는다. 문자언어 능력, 특히 영어 능력을 갖춘 ‘값싼’ 여성 노동력은 다국적기업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대상이다. 오리엔탈리즘적 전형인 ‘구어적 원시성(oral primitive)’과는 반대로, 문자언어 능력(literacy)은 목숨을 걸고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가르친 역사를 통해 미국 흑인여성, 남성이 습득한 능력으로, 유색인 여성에게 특별한 것으로 간주된다.”46 여기서 신체능력과 젠더, 연령, 민족성, 지정학적 역사는 착취할 수 있는 인간성의 “이상적인” 조건을 구성한다. 이 착취가능성은 계몽되지 않았으며 진화적 위계에서 낮은 단계를 차지하는 표지로 인식되는 ‘구어적 원시성’의 이미지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한 이미지는 교육을 통해 개인들을 근대성과 인간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식민지적 예속을 정당화한다. 유색인 여성의 문자언어 능력과 이들이 반복적인 비숙련/숙련 노동에 재능을 타고났다는 인종차별적이고 젠더화된 편견 때문에 유색인 여성들은 국가 경제성장이라는 명목 아래 환영받는다.

유색인 여성으로서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생산경제에서 착취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한 장면에서 영군은 환각 속에서 명령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치켜든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이는 일렬로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똑같이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이미지와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대조된다. 이런 기계화된 인력 노동 내에서, 영군은 사이보그가 되어 착취할 수 없는 존재로 스스로를 변형시킴으로써 자본주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난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라는 존재를 생존 기술과 연결시킨다. “사이보그적 글쓰기는 살아남는 능력에 관한 것이며, 이는 원초적 순수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타자로 규정한 세계에 자신의 표시를 남길 수 있는 도구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구는 이야기들, 그리고 다시 쓰이는 이야기들이며, 자연화된 정체성의 위계적 이원론을 대체하고 전복하는 방식으로 쓰인 이야기들이다.”47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나타나는 권력과 폭력, 비인간인 사물이나 동물과 맺는 관계, 생존 등의 주제는 타자화라는 불의를 다루고 있고, 정신장애와 의료시설 수용이 정치적으로 비정상화된 존재의 조건임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가만히 앉아 있는 아브라모비치의 사물성이 시선 교환을 통해 몸의 연결과 단절을 시험하는 사회적 만남의 조건이었다면, 영군의 라디오 공장 내 제조 공정은 기계화된 노동자들이 서로의 상태를 알아보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에 복종하다가 영군은 상처를 내고 그 부위에 전선을 붙인다. 영화는 콘센트를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공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군의 행위와, 병원에서 영군의 어머니와 의사 최슬기가 영군의 ‘자살 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교차 편집되는 장면은 사건의 전과 후를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의사는 이렇게 묻는다. “이번 일 있기 전에 영군이한테 특별한 변화 같은 건 없었나요? 갑자기 밥을 안 먹는다든지.” 섭식에 관한 이 질문은 강제로 음식을 투여하는 것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복선을 깔아준다. 어머니는 “사실 외할머니는 영군이가 키워주셨는데. 아니, 제 말은, 외할머니가 영군이를 키워주셨다는 거지요.” 이 말실수는 세대 역할이 뒤집힌다는 점과 영군과 할머니의 상호 의존관계를 암시한다. 영군과 할머니는 둘 다 제2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인물이다. 할머니가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의사는 묻는다. “혹시 영군이도 자기가 다른 존재라고 얘기한 적 없나요?” “없어요, 선생님. 영군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거짓말은 의미심장하게도 감전된 후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는 영군이 의식을 잃는 장면과 동시에 관객에게 제시된다. 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영군의 몸은, 두 줄로 늘어선 작업라인에서 절대로 고개를 들어 보지 않는 노동자 대열에서 그녀가 고장 난 몸, 부적격인 몸, 액체가 새어나오는 몸이라는 뚜렷한 표시다. 이 끔찍한 장면은 이내 영군의 몸이 완전히 충전되었으며 사이보그로 활성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장면으로 경쾌하게 옮겨간다. 이때 영군의 발가락은 오색 불빛으로 클로즈업되는데, 몸에 전원을 연결하고 배터리를 핥고 전기충격요법을 받는 것이 영군에게는 바로 사이보그를 지탱하는 방법이다.

사이보그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순응과 치유로 귀결되는 전형적인 심리치료 서사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근데 외할머니 그런 거랑 큰 상관없겠죠? 영군이 자살하구? 우리 영군이… 괜찮겠죠?”라고 어머니는 묻는다. 어머니는 동물이나 사물 혹은 다른 인간들과의 친밀성이 아주 드문 경우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서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이는 어머니 자신에게도 밝히지 않은 정체성이 있을 수 있음을, 모계 유전적 정신장애가 있을 수도 있음을 넌지시 알린다. “어머니 기분이 그날따라 좀 그랬겠죠. 그 새끼쥐하고… 저도 곱창이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거든요. 선생님도 그러실 때 있잖아요, 환자들하고?” 이 말은 장애가 보편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라기보다는 장애가 연속선상에서 경험된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런 말로 어머니는 자기 식구들이 이른바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지우고 가리려 한다. 영군의 사이보그 정체성을 숨겨 병리화와 사회적 낙인을 피하려 하면서도, 그런 영군의 삶이 괜찮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은 자신이 기계로서 인정받고 그 정체성이 공유되어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군의 상태와 충돌하게 된다.

영군이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은 달리는 앰뷸런스를 따라잡아 할머니에게 틀니를 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무를 갉아먹는 쥐로 살아가는 할머니에게는 생존을 담보하는 필수부품으로서 틀니가 꼭 필요하다. 할머니가 강제로 요양원으로 보내지던 날을 보여주는 회상 장면에서 영군은 앰뷸런스를 따라잡지 못했고, 그 뒤로 틀니를 할머니의 대체물로 간직한다. 영군이 병원 침대 머리맡에 걸어둔 사진48에는, 증기를 내뿜는 밸브가 달려 있고 벽에서 나온 파이프와 연결된 기계장치를 허리를 구부린 채 양팔로 손보고 있는 사람이 보이며, 영군은 틀니와 함께 컴퓨터용 마우스를 늘 지니고 다닌다. 이러한 습관은 그녀가 작동 중인 기계장치와 동질적 존재로서 그것에 신체적/정서적 근접성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동하는 기계들과 그녀가 다른 점은, 기계는 저마다 특정한 목적과 유용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영군은 노동하는 물체로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절반은 유기체이고 절반은 기계인 사이보그는 어떤 목적을 가진 완전한 기계가 되기 위한 이행 중의 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수단화(instrumentalization)되는 것이 사물화의 한 방식인 것처럼, 영군은 자신의 유용성이 기계됨의 본질적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공리주의자들처럼 생산성과 사회기여도로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대신, 사용되고자 하는 영군의 욕망은 자기의 이익을 주장하는 데 힘을 쓰는 행위성이 아닌 관계적 수동성과 근접성이 사물-되기의 핵심임을 드러낸다.

영군은 어떤 목소리와 의사소통하면서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낸 병원 직원들인 ‘하얀맨’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칠거지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목소리는 부드럽고 친절하게 칠거지악을 “나쁜 순서대로” 나열하며 동정심, 슬픔, 설렘, 망설임, 쓸데없는 공상,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일러준다.49 영군의 사이보그로서의 윤리 덕목은 반사회성을 추구한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하얀맨들에게도 할머니가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공상, 하얀맨들이 죽으면 그 할머니들은 어떡하나 하는 동정심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하는 망설임을 가져서는 안 되겠어요”라고 경고한다. 인간성 자체가 아닌, 슬퍼하는 할머니들이 있다는 것이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되고, 따라서 영군의 미션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동정심은 영군에게는 치료되어야 하는 질환의 증상이다. 영군은 일순에게 자신의 동정심을 훔쳐 가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야 자신이 반사회성을 갖추고 의료진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밖에서 틀니를 끼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마우스를 땅에 묻고 곡소리를 내며 죽은 할머니를 애도하는 장면에서 영군은 할머니에게 자신에겐 슬픔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한다. 영군의 동정심을 훔친 일순은 영군에게 다가와 그녀의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입맞춤을 한다. 이때 영군의 얼굴은 일순을 향해 있고, 몸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있고, 로켓처럼 발끝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공중 부양한다. “설레임(설렘) 금지”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영군의 몸은 추락한다. 영군과 일순의 키스는 인간이라는 개념에 맞물려 있는 이성애 규범성을 드러낸다. 영군은 계속해서 사이보그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이성애적 정동을 억누르려 애쓰며, 일순과의 키스를 기계로 체화된 사물과 인간 사이의 섹슈얼리티로 치환한다. 일순이 이제 영군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 세계의 일부가 되자, 영군이 끼고 있던 틀니는 키스를 통해 일순에게 옮겨간다.

이러한 신체 간 사물 이동과 마찬가지로,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전형적으로 정신장애의 ‘증상’이라 이해되는 각자의 독특한 환상을 교환하고 공유하는 앙상블을 보여준다.50 한 남자는 자기 주변의 모든 일에 죄책감을 느껴 과도하게 사과하고 다른 사람에게 등을 보이는 무례한 행동을 삼가려고 뒷걸음질로 걷는다. 그의 과도한 겸손함과 공손함은 일순에게 도둑맞았다가, 다시 그에게 돌아온다.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의 말처럼, 환각이 두렵게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호 동의적 인정(consensual validation)”을 받지 못한다는 점인데, 영화에서 ‘증상’의 전이는 정신장애를 가진 이의 환상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준다.51 캐런 나카무라(Karen Nakamura)는 일본 북부 어촌 마을공동체 베델 하우스(Bethel House)의 민족지적 연구를 수행하며, 조현병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현실감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자신의 환각과 망상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며, “결과적으로 그들이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사회적 고립감을 더 키운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마을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환각과 망상에 대해 말하도록 장려된다. 따라서 환각과 망상은 공동의 소유물이고, 모두가 이야기할 수 있고 함께 대처할 수 있는 것이 된다.”52 이와 비슷하게 영화에서도 환각은 외부로 표현되고, 도둑맞거나 되돌려질 수도 있고, 의사소통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새로운 존재방식을 상상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영군의 동정심을 훔치려고 준비하는 일순은 문화내부적(emic) 관점을 지닌, 즉 한 언어나 문화의 내부적 요소를 해석 없이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관점의 인류학자가 된다.53 다른 환자의 특징이나 증상을 훔친다는 것은 일순이 그들의 환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순의 이런 모방 행위는 다른 환자들을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모드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고, 이들의 ‘증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전이는 래리 데이비드슨(Larry Davidson)이 “경험의 상호주체적 속성”이라 부르는 것을 나타낸다.54 관객은 일순의 눈을 통해 영군의 특징을 보게 된다. 일순의 시선은 영군의 행동을 반복적인 기계적 행동을 뜻하는 임상용어인 반향언어, 반향동작, 상동운동으로 규정하는 의료적 시선과는 다른 시선이다.55 이러한 관찰을 통해 일순은 영군이 몰래 배터리만 핥고 음식을 먹지 않아서 완전히 기력이 쇠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면을 착용한 일순이 기계로 가득 찬 보일러실에서 어떤 의식을 행함으로써 영군의 동정심을 훔치는 데 성공한 후, 영군은 자동 기계소총으로 작동하게 된다. 영군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자동소총으로 간호사들과 의사들을 대량 살상하는 첫 번째 환각을 경험한 후 쓰러져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먹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반응이 없고 뼈만 남은 영군의 몸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말한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상태이다.56 아감벤은 “살아 있는 시체”라고도 일컫는, 뼈만 남아 기운이 없고 움직임도 감각도 없어 죽음의 문턱에 다가간 몸을 뜻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은어인 ‘무젤만(Muselmann)’을 논한다. 아감벤은 무젤만이 바로 “존엄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어떤 형태의 삶의 윤리(학)의 문턱을 지키는 문지기”라고 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아감벤은 “인간 존재가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면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순응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유일한 규범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내재적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절대적 감각’은 그 어떤 의미로도 존엄성 같은 것이 될 수 없다.”57 그는 비인간화는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보기 불편하고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어떤 윤리도 그들의 인간성을 정당하게 배제할 수 없다.”58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유쾌하고 환상적인 묘사 때문에, 영군의 긴장병을 무젤만이라는 역사적 조건과 비교하는 것은 좀 극단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감벤의 통찰은 인간성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요소로서의 존엄 개념을 폐기하는 것, 인간성의 “외부”를 만들지 않는 것, 그리고 힘없음이 폭력의 원인으로 간주되거나 폭력을 부른다고 간주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특권이라든가 합법적 인격이라는 자유주의적 개념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사물 존재를 체현함으로써 그리고 인간적 가치와 신체능력,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인간 범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생성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영군의 담당의사는 그녀가 사이보그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전기충격요법을 시행하고, 그 덕분에 영군의 몸은 완전히 충전된다. 전기충격을 받는 동안 영군은 전선이 잔뜩 연결된 거대한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는 꿈을 꾼다.59 그녀는 바깥에 할머니가 서 있는 것을 목격하는데, 할머니는 입모양으로 영군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려주려 애쓰지만 문장은 완결되지 않는다. 충전이 끝난 후 고성능 기계소총으로 변신한 영군의 몸은 장애인들을 제외한 병원 직원들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기 시작한다. 영군의 입 안에서는 탄약이 돌아가고 있고 팔과 손가락은 총부리로 기능한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해당 장면은 3분이 넘게 이어지면서,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영군의 냉정한 무자비함의 강도를 보여준다. 이 살해 장면은 영화의 장르를 정신장애를 지닌 이들의 공동체를 그리는 유쾌한 드라마에서 의료 시스템에 대한 복수, 그리고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폭력을 만드는 정체성에 관한 잔혹사로 변화시킨다. 자신의 환상 속에서 영군이 이렇게 격렬한 행위를 저지르는 동안, 다른 이들에게 그녀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긴장병 증세가 나타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총알에 난사당한 몸들이 연출하는 피투성이 장면은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폭력적이고 무자비하다는 전형적이고 위험한 오해(총기를 이용한 폭력이 정신질환과 강하게 연관되기 쉬운 미국에서 더욱 널리 퍼져 있는 이미지)를 양산하기 쉽다. 그럼에도 영군의 대량학살 환상은 시설수용 시스템에 대한, 그리고 존재의 다양한 양식을 허용하지 않는 장애차별적 사회 일반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이보그가 저지르는 이 폭력적인 대량학살 장면은 저항의 한 방식으로서 폭력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아니면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폭력을 개인적 차원에서 “정화하는 힘”이라고 부른 것처럼 그렇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60 혹은 그 장면은 ‘퀴어 부정성’의 예로서, 체화된 사물성과 결합된 폭력적인 환상의 모습으로 행해진, 시스템에 대한 맹렬한 정치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가?61 복수라는 주제를 다룬 감독의 이전 영화들이 이 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맥락을 제공해준다.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2002)에는 영군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청각장애인이 등장한다. 동생의 신장 질환, 그리고 장기매매업자들에게 끌려가 장기를 빼앗긴 경험 때문에, 그는 여자친구가 속한 사회주의 단체에 가담한다. 두 영화 모두 의료 자본주의가 인간의 몸을 착취 가능한 재화로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비순응적 투쟁을 폭력적인 복수를 통해 펼치거나 그런 환각을 일으키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영군이 음식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있을 때, 환자들은 영군을 독방에서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집단으로 단식투쟁을 개시한다. 병동에서 영군의 생존을 둘러싸고 강제 식이에 저항하는 새로운 사회적 연결망이 형성된 것이다. 정신적 다름이 수용되고, 각기 다른 환상이 상호적으로 교환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일순은 자신이 영군의 몸속에 장치를 설치하면 밥이 전자물질로 변형될 것이라면서 영군이 밥을 먹게끔 설득한다. 감동적으로 그려진 보일러실 장면에서 일순은 영군의 등에 상징적 수술을 집도하고, 그럼으로써 그는 영군의 몸속 기계장치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 결정적 순간에 일순은 작은 케이스에 들어 있는 어머니 사진을 영군의 몸에 설치하며 자기를 버린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를 떠나보낸다. 영군이 밥을 삼키는 동안 모두가 환호하는 극적인 장면에서 영군의 몸은 투명해져 그 안에 설치된 케이스가 비친다. 일순과 영군의 역사는 사물을 통해 하나가 된다.

총기 난사 후에도 영군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할머니 이미지에 사로 잡혀 있다. 할머니의 입 모양을 기억해 메시지를 해독하면서 영군은 자신이 이제 핵폭탄이며 세상을 폭파시켜 끝장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자면 억만 볼트의 전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영군과 일순은 폭풍우가 치는 밤, 언덕 꼭대기에 안테나를 들고 앉아 기다린다. 아침이 되자 카메라는 무지개가 뜬 하늘 아래 두 사람의 몸이 벌거벗은 채 포개져 누워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다소 코믹하기도 한 이 엔딩 장면은 이성애적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뮤지컬 엔딩을 상기시키지만, 역설적으로 기계와 인간의 사랑이라는 퀴어적 다양성을 표현하는 상징인 무지개가 이를 축복해주고 있다. 이 결론은 정신장애를 가진 삶의 여정에서 두 사람이 동반자가 되어준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장애가 치유되지 않았고, 정신적 다름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들을 따라다니는 기억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고, 그들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으로 서로의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군이 사이보그여도 이를 숨기기만 한다면, 음식을 제대로 먹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말을 통해, 영군의 어머니는 인간과 사물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다는 관념에 자신도 모르게 도전하고 있다. ‘괜찮다’는 평가는 퀴어적 장애성이 잠재적으로 인간과 사물 사이의 경계를 흐릴 수 있음을 암시한다. 더 분명한 것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능력을 나타내는 표식에 국한되어 있는 행위성(agency)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언뜻 수동적 사물로 보이던 영군은 의도치 않게 수용시설이라는 공간에서 장애를 가진 삶, 인지적/심리적 차이를 가진 삶을 인간성의 조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지지공동체를 만들어낸다. 환각적이고 망상적인 비일관성을 보여주며 정신장애가 괜찮다고 주장하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보살핌과 사랑을 전담하도록 이상화된 이성애적 비장애 핵가족을 약화시키는 평범하지 않은 관계에 관객이 주목하게 끔 한다. 반사회성을 끌어안아 인간됨의 자격을 상실함으로써 마침내 영군과 일순은 기계와 인간의 짝을 이루고, 이해받기도 하고 이해받지 못하기도 하는 삶을 살아나갈 것임을 영화의 결말은 암시한다. 규범적 가족 바깥에 놓여 있으며 장애를 가진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근접성은 폭력을 치유하고 인간 존재에 대한 공리주의적 틀에서 해방되는 것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이라 할 수 있다. 사물성은 일종의 반사회적 양태로서, 핼버스탬이 “반사회적 인간은 수치심을 주거나 무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고수할 것과 탈인간화할 것을 요구하며, 급진적 수동성은 차이를 가진 채 여성성 안에 머무는 것을 가능케 한다.”62라고 한 것처럼,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습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핼버스탬이 탈인간화 행위라고 명명한 것은 사물 되기의 형태로, 그리고 사물로 정의되는 특질을 가짐으로써 실현 가능하다. 사물 되기라고 해서 꼭 선한 것은 아니다. 영군의 복수 장면이 보여주듯 그녀는 장애 커뮤니티와 의료진 사이에 절대적인 분리선을 그어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결정하는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의사에게 자신이 사이보그임을 밝힌 후 영군은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할머니가 요양원에 보내진 그날을 회상한다. 회상 속에서 영군의 어머니와 함께 집에 온 이모와 이모부는 영군이 라디오를 조립하고 할머니는 무를 먹고 있는 평화로움을 깨뜨린다. 세 명의 어른은 집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강압적으로 내려다본다. 먼저 어머니가 할머니에게서 무를 빼앗는다. 집 안에서 나는 냄새를 맡은 이모는 “어떻게 이러고 살았어?”라고 소리친다. 영군은 라디오 볼륨을 키우며 이모의 폭력적인 말을 지워내려 한다. 어머니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영군에게서 라디오를 빼앗으려 한다. 서로 뺏으려고, 뺏기지 않으려고 씨름하다가 라디오는 바닥에 던져져 부서진다. 라디오가 박살 나는 장면은 영군과 할머니의 세계가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산산조각 내는 폭력, 할머니가 집에서 내몰리는 폭력과 병치된다. 기계와 장애여성 사이의 연결점은 영군의 사이보그 정체성으로 날카롭게 표현된다. 영군이 폭력적인 반응을 하는 것은 반인간적인(anti-human) 것이 아니라 폭력이 인간 내부에 존재함을 표현해주는 것이며, 사물이 되기 위해서 그녀는 인간 내부로부터 완전히 떠나야만 한다.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결합되고 그들의 물건과 환상, 증상들이 상징적으로 전이되는 것은 정신장애의 경험을 상상하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영군과 할머니 사이의 강한 연대 역시 중요하다. 비천하고 비인간적인 삶의 상태를 해결해준다는 명목으로 영군의 어머니와 이모, 이모부는 할머니를 시설에 보내는데, 그런 ‘해결책’은 할머니를 보호시설에 수용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 장애차별적인 가족의 공모에 대항하는 것이 바로 영군과 할머니의 세대 간 연대다.

근접성 그리고 사물-되기

 그렇다면 사물이 됨으로써 탈인간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상적 경험의 조건으로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사물과 인간 사이에 겹쳐지는 부분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기 관리를 하며 자급할 수 있는 개인만이 신자유주의적 가족의 안정성을 누릴 권한이 있는 반면, 장애인과 퀴어 청소년, 노인, 노동자들은 집 밖으로 내몰리게 된다. 2011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자신을 해고한 한진중공업 조선소에 있는 35미터 높이의 85호 크레인 꼭대기에 올랐다. 회사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내부 경제적 문제에 대한 직접적 대책이 아니라, 1997년 IMF의 개입으로 이어진 경제위기 이후 시행된 낮은 임금, 긴축정책, 대량 해고, 하청 생산 등 신자유주의 원칙과 연관된 것이었다. 김진숙은 한진에 해고 계획을 철회하고 해고 노동자를 복직시킬 것을 요구하며, 요구가 수용될 때까지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0개월이 넘어서 노조와 한진이 협상을 체결한 후 마침내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은 “지난 309일 동안 인간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투명인간”이라 칭하면서,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음식을 위로 올려다 주고, 아래로 내려 보낸 오물통을 비워주는 타인들에게 의존하면서, 김진숙은 해러웨이의 말처럼 “자신을 타자로 규정한 세계에 자신의 표시를 남길 수 있는” 도구, 기계를 점유할 수 있었다.63

김진숙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노동자와 함께 폐기되거나 팔려갈 운명에 놓인 기계 안에 살았던 것이다. 그녀의 투쟁은 2003년 129일간의 노동권 투쟁에서 삶을 마감한 동료 노동자 김주익을 추모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진숙의 벌거벗은 삶은 희망버스 운동을 촉발시켰고, 사람들은 크레인 앞에 와서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했다. 거기에는 노동권 지지자, 장애 인권 활동가, 교사,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퀴어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글로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기계와 함께 기계로 존재하고, 쓸모없는 사물로 취급되며, 주변화된 존재로 산다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투쟁으로서, 또한 이해받지 못하는 취약한 존재양식으로서 목적 없는 사물-되기를 끌어안도록 초대한다.

페미니즘의 사물화 이론은 타자화된 몸들이 어떻게 보여지고 취급되는지, 얼마나 도덕적/인지적/물질적 평등을 보장받지 못하는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도구로 기능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몸으로 경험되고, 어떻게 사물과 애착을 맺고, 사물과 가까이 있고, 사물 자체로 신체화되거나 몸으로부터 분리되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채, 단순히 사물성은 인간성보다 열등하다는 개념에 의존한다면 사물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에스미어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우리 스스로가 비인간화(dehumanization) 개념을 제거해, 비인간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또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식민적, 신식민적 실천을 재생산하지 않게끔 할 수 있는가?”64 존재의 존엄, 가치, 타당성, 적법성 개념에 기대 인간성을 복권시키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그 대신 나는 협소하게 개념화된 행위성과 신체능력에만 기반해 인간성이 존엄과 존중의 장소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자고 제안한다.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연작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보듯 인간 신체가 사물성을 실천할 때, 자격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분리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인 자기규제, 생산성, 유용성, 삶의 질, 그리고 비장애인 몸에 기반한 사회성은 해체되고, 고통을 생산하는 권력과 폭력을 통해 관계 맺는 권력이 폐기될 수 있다. 퀴어 페미니즘적 장애학은 ‘우리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주장하며 사물화를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물 그리고 사물 비슷한 상태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거부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공존성, 동일시하지 않는 근접성, 동시적 정주를 통해 차이와 교섭하는 비인간주의라는 새로운 반장애차별적 퀴어 윤리학은 착취 불가능한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일을 승인한다. 즉 어떤 개념틀 안에서 누군가를 사물로 인식하거나 스스로를 사물로 느끼는 것 자체가 항상 윤리적으로 해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물-되기는 장애차별과 정상성을 규범으로 하는 인간성, 그리고 폭력을 해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한 번역: 허원

*이 글은 영어로 먼저 출판된 글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저자가 간략히 추가한 내용이 있습니다. 영어 원문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Eunjung Kim, “Unbecoming Human: An Ethics of Objects,” Special issue on Queer Inhumanism, ed. Mel Chen and Dana Luciano, GLQ: A Journal of Lesbian and Gay Studies, vol. 21, nos 2-3 (2015): 295-320.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에 책에 먼저 실렸습니다. 김은정, 「탈인간을 위한 실천: 사물의 윤리」, 허원 옮김, 『퀴어인문잡지 삐라』 3호 ‘길티 플레저’(서울: 노트인비트윈, 2016), 200-233. 재수록을 동의해주신 GLQ『퀴어인문잡지 삐라』 (노트인비트윈), 두 편집부와 허원 번역가께 감사드립니다.


  1. Donna Harraway, “A Manifesto for Cyborgs: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 Feminism in the 1980s,”Socialist Review, no. 80 (March-April, 1985), 99. 

  2. Andrea Dworkin, Pornography: Men Possessing Women (New York: G. P. Putnam’s Sons, 1981), 108. 

  3. “Highlights from Speeches by Ed Roberts,” collected by Jon Oda, World Institute on Disability, web., wid.org/about-wid/highlights-from-speeches-by-ed-roberts. 

  4. Jasbir K. Puar, “Coda: The Cost of Getting Better: Suicide, Sensation, and Switch- points,” GLQ, vol. 18, no. 1(2012), 153, 154. 

  5. Samera Esmeir, Judicial Humanity: A Colonial History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2), 3. 

  6. Samera Esmeir, “On Making Dehumanization Possible,” PMLA, vol. 121, no. 5(2006), 1547, 1549. 

  7. Samera Esmeir, ibid., 1549. 

  8. Dipesh Chakrabarty, Habitations of Modernity: Essays in the Wake of Subaltern Studie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2), 142. 

  9. Mel Y. Chen, Animacies: Biopolitics, Racial Mattering, and Queer Affect@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2), 43. 

  10. Dipesh Chakrabarty, Habitations of Modernity: Essays in the Wake of Subaltern Studie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2), 142. 

  11. 자폐증 치료를 주장하는 단체인 Cure Autism Now가 제작한 영상을 보면 자폐를 가진 아동이 인격을 빼앗겼다는 수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www.youtube.com/watch?v=j_cJp714jXQ. 

  12. Sunaura Taylor, “Beasts of Burden: Disability Studies and Animal Rights,” Qui Parle, vol. 19, no. 2(2011), 194. 

  13. Mel Y. Chen, Animacies: Biopolitics, Racial Mattering, and Queer Affect@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2), 235. 

  14. 사물화에 대한 이론적 논의로는 Linda LeMoncheck, Dehumanizing Women: Treating Persons as Sex Objects (Totowa, NJ: Rowman and Allanheld, 1985); Lina Papadaki, “What Is Objectification?,” Journal of Moral Philosophy, vol. 7, no. 1(2010); Martha C. Nussbaum, “Objectification,”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vol. 24, no. 4(1995); Ann Cahill, Over-coming Objectification: A Carnal Ethics (New York: Routledge, 2011) 참조. 

  15. Martha C. Nussbaum, ibid. 

  16. Marina Abramović́ and Velimir Abramović́, Artist Body: Performances 1969-1998 (Milan: Charta, 1998), 68. 

  17. Marina Abramović, “Body Art,” ed. Anna Daneri, Giacinto Di Pietrantonio et al., Marina Abramović́ (Milan: Charta, 2002), 30. 

  18. Marina Abramović, ibid., 30. 

  19. Klaus Biesenbach, ed. Marina Abramović́: The Artist Is Present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2010), 74. 

  20. Marina Abramović, “Body Art,” ed. Anna Daneri, Giacinto Di Pietrantonio et al., Marina Abramović́ (Milan: Charta, 2002), 30. 

  21. Klaus Biesenbach, “Marina Abramović́: The Artist Is Present. The Artist Was Present. The Artist Will Be Present,” in Biesenbach, ed. Anna Daneri, Giacinto Di Pietrantonio et al., Marina Abramović́: The Artist Is Present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2010), 17. 

  22. Marina Abramović, “Body Art,” ed. Anna Daneri, Giacinto Di Pietrantonio et al., Marina Abramović́ (Milan: Charta, 2002), 30. 

  23. Chrissie Iles, quoted in The Artist Is Present, directed by Matthew Akers (2012; Chicago: Music Box Films, 2012), DVD. 

  24. Judith Halberstam, “The Anti-Social Turn in Queer Studies,” Graduate Journal of Social Science, vol. 5, no. 2(2008), 150. 

  25. Thomas McEvilley, “Stages of Energy: Performance Art Ground Zero?,” Marina Abramović́ and Velimir Abramović́, Artist Body: Performances 1969-1998 (Milan: Charta, 1998), 16. 

  26. Marina Abramović, “Body Art,” ed. Anna Daneri, Giacinto Di Pietrantonio et al., Marina Abramović́ (Milan: Charta, 2002), 30. 

  27. Judith Halberstam, The Queer Art of Failure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1), 139. 

  28. Lucy Sargisson, Utopian Bodies and the Politics of Transgression (London: Routledge, 2000), 3. 

  29. Jack Halberstam, “The Artist Is Object: Marina Abramovi ́c at MOMA,” April 5, 2010, bullybloggers.wordpress.com/2010/04/05/the-artist-is-object-. 

  30. Amber Jamilla Musser, “Objects of Desire: Toward an Ethics of Sameness,” Theory and Event 15, no. 2 (2013): n.p. 머서는 “사물을 향한 성적 지향성인 사물성애”에 수반되는 “사물-되기”와 “퀴어 이론에서 관계성과 윤리의 문제”를 탐구한다.  

  31. Mel Y. Chen, Animacies: Biopolitics, Racial Mattering, and Queer Affect@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2). 

  32. Rachel Dodes, “Artist Marina Abramovi ́c Sits for an Interview,” Speakeasy: The Wall Street Journal(June 1, 2010), web., blogs.wsj.com/speakeasy/2010/06/01/artist-marina-Abramović-sits-for-an-interview.\ 

  33. Susan Wendell, The Rejected Body: Feminist Philosophical Reflections of Disability (New York: Routledge, 1994), 85. 

  34. Margaret Price, “The Bodymind Problem and the Possibilities of Pain,” in “New Conversations in Feminist Disability Studies,” ed. Kim Q. Hall, a special issue of Hypatia, vol. 30, no. 1(2015), 268-284. 

  35. Margaret Price, ibid., 269. 

  36. Oliver Sacks,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98), 72. 치료자로서 이들을 만난 작가의 기록을 통해 그런 경험을 엿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로즈마리 갈런드 톰슨이 색스가 “경탄”에 차 전하는 치료기를 “프릭쇼”의 계보로서 논하며 지적한 바 있듯이 말이다(Thomson, Extraordinary Bodies: Figuring Physical Disability in American Culture and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56). 그럼에도, 현상학적 관점에서 쓰인 색스의 글은 웬델이 관찰한 것과 같다. 기앤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대하는 대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37. Sacks,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98), 51. 

  38. 자폐를 가진 이들이 경험하는 몸과 의식 사이의 불연속 혹은 자기수용 인지에 관한 사례들은 다음을 참조하라. Douglas Biklen, Autism and the Myth of the Person Alone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5), 264–69. 

  39. Larry Davidson, Living outside Mental Illness: Qualitative Studies of Recovery in Schizophrenia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3), 148. 

  40. Andrew McGhie and James Chapman, quoted in Davidson, Living outside Mental Illness, 148. 

  41. Douglas Biklen, Autism and the Myth of the Person Alone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5), 258. 

  42.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repr., San Diego: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6), 296-297. 

  43. Hannah Arendt, ibid., 297. 아이러니하게도 아렌트는 ‘인간관계’와 함께 ‘말하기’를 최소한의 인간 조건의 하나로 꼽는다. 

  44. 박찬욱 감독,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서울: CJ 엔터테인먼트, 2006), DVD. 

  45. Donna Haraway,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in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174. 

  46. Donna Haraway, ibid., 174–75. 강조는 필자. 

  47. Donna Haraway, ibid., 175. 

  48. 해당 사진은 에드 반 더 엘스켄의 사진집 표지에서도 볼 수 있다. Ed van der Elsken, Sweet Life (New York: H. N. Abrams, 1966). https://placartphoto.com/book/1294/sweet_life-ed_van_der_elsken.  

  49. 이 7가지 절대악은 유교가 시댁에서 여성을 쫓아내는 풍습을 정당화하는 ‘칠거지악’과도 공명한다. 

  50. 박진, 「정신분석 내러티브의 새로운 영역」, 『국제어문』, 제42집(서울: 국제어문학회, 2008), 482.  

  51. Oliver Sacks, Hallucinations (New York: Knopf, 2012), p. x. 

  52. 나카무라는 이렇게 말한다. “매년 베델하우스에서는 연례행사를 여는데,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환각과 망상 그랑프리이다. 그해 최고의 환각과 망상에 상이 주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최고’란 가장 많은 사람을 하나로 모으거나 공동체 경험을 가장 많이 이끌어내는 환각이나 망상을 뜻한다는 것이다.” Karen Nakamura, A Disability of the Soul: An Ethnography of Schizophrenia and Mental Illness in Japan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13), 82-83. 

  53. Kenneth Lee Pike, Talk, Thought, and Thing: The Emic Road Toward Conscious Knowledge (Dallas: 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 1993). 

  54. Larry Davidson, Living Outside Mental Illness: Qualitative Studies of Recovery in Schizophrenia (New York: NYU Press, 2003), p25. 

  55. “Section Ⅱ: Diagnostic Criteria and Codes,” in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5, 5th ed. (Washington, DC: American Psychiatric Publishing, 2013), DSM Library, web., dsm.psychiatryonline.org/content.aspx?bookid=556&sectionid=41101755#103435410. 

  56. Giorgio Agamben, Remnants of Auschwitz, trans. Daniel Heller-Roazen (New York: Zone Books, 1999), 55. 

  57. Giorgio Agamben, ibid., 69. 

  58. Giorgio Agamben, ibid., 64. 

  59. 정신장애를 갖고 있으며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수정되지 않은 전기충격 치료를 비자발적으로 받곤 하는데, 마취도 하지 않거나 마취를 하더라도 동의 없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치료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유엔 인권이사회는 후안 E. 멘데스(Juan E. Mendez)의 「고문과 기타 잔학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비하적인 취급 혹은 처벌행위에 관한 특별 조사위원의 보고[“Report of the Special Rapporteur on Torture and Other Cruel, Inhuman or Degrading Treatment or Punishment,” A/HRC/22/53 (February 1, 2013)]」를 받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에게 가해지는 신체구속과 감금을 동반하는 가학적 치료와 환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환경은 강제 약물 투여나 전기충격 수술과 같은 강제 치료로 이어질 수 있다.”(위의 글, 15.) 

  60. Frantz Fanon, The Wretched of the Earth, trans. Richard Philcox (New York: Grove, 2008), 51. 

  61. Judith Halberstam, Judith Halberstam, “The Anti-Social Turn in Queer Studies,” Graduate Journal of Social Science, vol. 5, no. 2(2008), 154. 

  62. Judith Halberstam, ibid., 151. 

  63. Donna Haraway,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in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175. (역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표현은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박진우 옮김. 서울: 새물결, 2008)에서 인용했다. 

  64. Esmeir, “On Making Dehumanization Possible,” PMLA, vol. 121, no. 5(200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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