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몸들

다연
다연은 시카고예술대학교 비주얼 및 크리티컬 스터디 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전시 기획 및 번역을 하고 있다. 주요 활동으로는 번역서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미디어버스, 2022) 출간, 온라인 전시 《힌터랜드》(PACK, 2021, 2022) 공동기획, UC 버클리 대학 영화 및 미디어 컨퍼런스 《High/Low》(2019) 참여 등이 있다. 또한 AQNB, FAR-NEAR, Nang, Visla, The Kitchen’s blog 등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문화예술 관련 에세이, 리뷰, 인터뷰를 기고한 바 있다.

몸은 업데이트 중

언제부터인가 아침 기상과 함께 각종 기기들의 푸른빛과 전자파 속에서 하루 일과가 펼쳐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이메일과 화상채팅으로 업무를 보고, 소셜 미디어로 소통을 하고, OTT 서비스로 보내는 여가 시간이 매끄럽게 반복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라인 삶의 형체와 질량이 한층 더 확장했고, 화면 속 육체가 없는 존재들의 묵직함과 정보의 범람에 의해 다양한 몸들의 윤곽이 얼버무려지고 있는 듯하다. 사용자는 ‘좋아요’와 같은 반응 기반의 상호 작용을 추적하는 통계로 몸을 입증하고, 기계가 생각하는 ‘인간미’가 없다면 몸은 인식되지 못할 수 있다. 매일매일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물리적인 현실과 디지털 환경의 얽힘(entanglement)에 편재하는 굉장한 공허와 대혼란 사이에서 우리의 몸을 정의하고 입증하기 위해 바삐 활동하고 있다. 그 움직임이 중앙 집권화된 편협한 규범성에서의 쳇바퀴 달리기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예상된 패턴을 이탈하는 오류인 글리치(glitch)를 통해 출구전략을 세우고 또 다른 형체의 몸에 도달해 보려 한다.

글리치와 사용자의 몸을 함께 엮은 것은 2012년 레거시 러셀(Legacy Russell)의 에세이 「디지털 이원론과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문(Digital Dualism and The Glitch Feminism Manifesto)」에서 시작한다. 당시 인기를 누리고 있던 어느 남자 성인배우의 매력을 파헤쳐 보고자 시작한 글은 컴퓨터를 매개로 여성이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알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한다. 성적 활동에 참여할 때의 흥분에 빗대어, 정지된 화면이나 느린 로딩 같은 오류를 러셀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글리치는 디지털 오르가즘이다.”1 디지털 판타지에 빠져있는 사용자가 기대하는 어떤 절정이나 흐름을 깨트리는 글리치는 사용자로 하여금 화면 앞 자신의 육체로 되돌아오는 신호가 된다. 기계적 몸서리침은 물리적 시공간까지 다다르는 체현된(embodied) 경험인 것이다.

러셀의 글리치는 디지털 이원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온/오프라인으로 분열된 몸이 아닌, 연속적인 몸을 제시하는 러셀은 2013년 에세이 「다른 곳에서, 홍수 이후: 글리치 페미니즘과 글리치 몸 정치의 출현(Elsewhere, After the Flood: Glitch Feminism and the Genesis of Glitch Body Politic)」에서 이러한 디지털 격차를 젠더 격차와 연계한다. 구체적으로는 페미니즘의 몸 정치에서 성별 평등이라는 필연적인 운동 아래 성별 이분법을 영속하는 모순을 고발한다. 오작동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디시어 어원으로 ‘미끄러지다’를 의미하는 글리치는 규범적인 사회 체계의 틈새들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 몸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트랜스(trans) 정치학과 디지털을 매개 삼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 교차하는 지점을 향한다.2

그렇게 단편 에세이 두 편으로 시작한 글리치 페미니즘은 2019년 글리치가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 방법을 종합적으로 담은 선언문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으로 발화했다. 마치 러셀의 데스크톱 화면에 접속한 듯, 글리치의 활성법은 12개의 ‘폴더’로 정리되어 소개된다. 각 폴더에는 서양 미술사에서 배제되어 온 유색인 현대 예술가, 드랙 퍼포머, 예술 집단 등의 변혁적인 작품들로 가득하다. 특히 기술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글리치는 정적인 공간에 움직임을 선동할 수 있는 “우연한 몸(accidental bodies)”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3 글리치 페미니즘이 재고하는 몸의 정의, 예측할 수 없는 저항으로서의 글리치는 오늘날의 복합적인 디지털 경험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언어의 필요성과도 직결된다. 이를 위해 러셀은 흑인 시인, 학자, 사상가들의 단어들을 소환해 디지털을 예술적 재료뿐만 아니라 몸의 해방을 위한 도구로 삼을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한다. 맥락과 감정선 모두 압축시키는 시청각 콘텐츠의 포화 아래 러셀이 발단 삼았던 “육체적 자아의 작은 죽음(petite mort)”4과 같은 절묘한 감각 체계는 어디서, 어떻게 자아낼 수 있을까?

우리가 매끈하다고 여기는 현실에서 글리치들은 파열을 드러내며 사회적, 문화적 체계들의 속임수를 보여준다. 글리치들은 사회적 기표들로서 몸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국가에 의해 무기로 활용되는 몸은 헤게모니적인 규범 공식의 자본으로만 작동하는데 실패한다. 이분법의 몸은 혼란과 혼미를 일으키며 타자화의 양태들에 따라 우리의 이익을 서로 적대시한다.5

흑인, 여성, 펨, 퀴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러셀은 성 및 성별 정체성이 디지털 환경 속 놀이와 연결되는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범위가 온라인 활동을 통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적화된 사용자 경험을 위한 시스템 디자인은 모든 몸들의 모습과 행동을 그 유선형의 체계에 맞출 것을 강요한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결함과 균열인 글리치는 러셀에게 다양한 정체성을 탐구하고 스스로를 무한히 변형할 수 있는 경로를 열어준다.

아리드와 머드

‘아리드’(Arid)와 ‘머드’(Mud)는 한국계 미국인 시각예술가, 음악가, 점술가이자 문학가인 요하나 헤드바(Johanna Hedva)의 기계적 근심에서 탄생한 무형의 존재다. 정확히는 보코더로 조작된 헤드바의 목소리가 읊는 블랙홀, 암흑 물질, 저녁, 공허, 잠, 음악, 목소리 등에 대한 축약된 지식을 받아먹으며 성장한 부정확한 AI(인공지능) 음성 클론이다.

아리드와 머드의 출현은 기괴하고도 강렬하다. 장(臟) 내부인지 바다인지 모를 풍경들을 횡단하는 비디오 게임, 그리고 한 사람씩 들어갈 수 있는 협소한 블랙박스 설치물로 관람 가능한 헤드바의 작품 〈GLUT: 공허의 풍요 (GLUT: a superabundance of nothing, 이하 ‘GLUT’)〉는 두 개의 클론을 동원해 암흑 속 관객의 시청각을 무자비로 뒤흔드는 경험을 선사한다.

아마존에 판매되는 수만 권의 책들 중 헤드바는 자신이 집필한 책을 아마존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받은 적이 있다. 헤드바는 사용자의 취향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판단한 기술과 마주했을 때 비롯되는 익숙하지만 무엇인가 낯설고 심란하게 만드는 언캐니(uncanny)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는 몇 년 전 헤드바가 샤머니즘 트랜스(shamanic trance)에 빠졌을 때, 예상했던 몸을 초월하는 영적인 감각보다는 몸의 평범함과 세속적인 한계에 도달했던 상황을 상기시켰다고 한다.6 그 연장선에서 그들(헤드바)은,7 본 작품에서 점술을 컴퓨터의 출현 전 ‘인공지능’으로 일종의 심원한 기술로 제안한다.

초월성의 측면에서만 신비로움(the mystical)을 거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신비로움]은 반-절정(anti-climax), 바디 호러(body horror), 혼란, 파멸, 공포의 상태를 뜻하며, 바로 이 역설이 무엇인가를 신비롭게 만드는 것입니다.8

신비주의(mysticism)를 어떤 물리적인 현실을 ‘초월’하는 변성 의식 상태의 깨우침 혹은 황홀경에 도달하는 경험으로 정의한다면, 헤드바가 여기서 역설적이라고 특정 짓는 것은, 육체의 경계 소멸이나 자아의식의 일탈 역시 ‘몸’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헤드바는 물리적 환경과 디지털 공간, 마법과 과학, 유형과 무형 어디쯤 몸을 위치시키고 있는 걸까? 헤드바는 작업 활동에서 몸을 “은폐하고, 분해하고, 그것이 실패할 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핵심적으로 다뤄 왔다. 이 작품은 지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몸이 지정된 정보(혹은 데이터 셋)에 따라 형성되고 변형하는 과정을 모색하는 시도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먼저 비디오 게임 버전9에서 플레이어는 온통 하얀 긴 통로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화면 중앙 아래쪽에는 응고진 핏덩어리와도 같은 붉은색의 형체가 있다. 백색광이 켜진 듯한 경로는 간단한 명암으로 직선적인 깊이감을 표현한다. ‘W’ 키를 꾹 눌러 플레이어의 디지털 몸체인 고동치는 기형종은 스스로를 앞으로 이끈다. 기이한 환청이 점점 차오르고 전자음이 덧입혀진 약간의 쉰 목소리가 공중에 떠 있는 텍스트를 읽어준다. “당신이 필요한 것은 목소리뿐이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에 약간의 의심이 들어 뒤로 돌아볼 때면 비인간적인 고함 소리가 얼굴 가까이 훅하고 날아온다. 텍스트 “세상은 우리 감정에 관심 없다”와 “다른 고객들이 구매한 것”을 지나면 길에 뚫린 검은 구멍, 혹은 블랙홀의 진입로에 도달하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야지만 게임의 끝을 도달할 수 있기에 시작과는 상반되는 어둠 속 폐쇄적이고 미로 같은 공간에 플레이어는 진입한다.

아리드와 머드의 탄생 뒤에는 데이터 착취를 우회하려는 헤드바의 의도가 있다. 본 작품의 사운드를 위해 사용하려던 AI 음성 소프트웨어는 사용자의 목소리 데이터를 정부나 기업에 판매할 수 있는 권한 부여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헤드바는 시각 예술가, 음악가, 기술자, 그리고 문학가인 제시카 카즈릭(Jessika Khazrik)과 협업해 이를 우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자신의 실제 목소리가 아닌 보코더로 조작된 인공 목소리로 AI를 훈련시켰다.

경로 곳곳에 헤드바가 보컬 클론을 학습시키기 위해 실제로 사용한 인용구들, 혹은 ‘코퍼스’(corpus)의 문장들을 확인할 수 있다. (코퍼스는 인공지능이 학습할 때 사용하는 현대문어나 구어로 된 언어 사용 표본을 모아놓은 데이터베이스, 혹은 ‘말뭉치’를 가리킨다. 코퍼스의 어원은 ‘몸’을 뜻한다.) 문장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물리법칙과 세상에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해하려는 가르침으로 구성됐다. “공간과 시간 각각 그 자체만으로는 그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오직 두 요소의 융합만이 독립적인 현실을 보존할 것이다.”과 같은 심오한 이야기부터 “소를 공 모양으로 그려라.”라는 우스꽝스러운 말은 모두 아리드와 머드의 일부를 만드는 입력값이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공간에 파편화되어 있는 클론들의 지능이자 ‘팔다리’를 발견하며 플레이어는 그들의 존재를 형상화할 수 있다.

이어지는 풍경에서 플레이어는 실재하는 환경의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비유클리드 기하학(non-euclidean geometry)으로 디자인된 7개의 맵을 거닌다. 흰 통로부터 검은 터널, 반짝이는 동굴, 바다처럼 일렁이는 사방 등 한 공간을 지날 때마다 점점 환경적 구조가 추상적으로 변하고 방향 감각이 혼란스러워진다. 각 공간에 울려 퍼지는 탈-인간스러운 목소리의 불협화음은 머릿속을 메우고 유체이탈과 같은 경험을 일군다.10 베를린의 HKW에서 개최한 단체전의 출품작이었던 〈GLUT〉은 아리드와 머드가 충돌하며 자아내는 사운드의 공간화를 통해 몸의 경계를 역시 지워버린다.11 하지만 동시에, 잔잔한 물속에 몸을 띄워 액체와 육체의 경계를 허물고 의식적인 긴장을 푸는 감각 차단 탱크(sensory deprivation tank)와는 역으로, 관객이 앉은 벤치에 스피커와 서브 우퍼를 설치해 엄청난 사운드의 진동으로 공간에 비례한 몸의 시작과 끝을 더욱 예리하게 감각하도록 유도한다.

‘몸’: 그것은 세계를 창조하는 단어다. 가능성으로 넘쳐나며 ‘글리치’처럼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신체가 있다’(bodied)가 동사로 사용될 때 “추상적인 무엇인가에 물질적인 형태를 부여[한다]”라고 정의한다. 명사나 동사 모두 같이, 우리는 추상을 형상화하기 위해, 합병된 완전체를 알아보기 위해 ‘몸’을 이용한다.12

가장 최신식의 점술 기법 중 하나로 아마존 알고리즘을 고려했을 때, 헤드바는 점술과 현대 기술, 두 영역 모두 몸을 지우려는 행위를 통찰한다. 육체를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는 신비로움, 그리고 고객의 니즈를 위해 가동되는 아마존 뒤에 숨겨진 실재하는 몸들의 노동력. AI와 점술 기법의 융합에서 탄생한 〈GLUT〉의 사운드 스케이프는 관람자의 평탄화되어 가는 감각 체계를 무작위로 자극해 몸의 한계를 알아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헤드바가 투입한 왜곡된 디지털 트윈 아리드와 머드가 안내하는 곳은 다름 아닌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한 알고리즘 언어 전후의 몸, 추상의 몸인 듯하다.

다시 만난 몸

러셀은 글리치하는 몸들의 행동 패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작동하기를 거부하는 시스템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진로를 바꾼다.”13 진로를 바꾼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코로나로 인해 세상 대부분의 도시들이 봉쇄되었던 2020년 가을, 영어로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이 출간됐다. 그해 봄 미국에서는 경찰의 물리력 행사로 인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부정당한 죽음을 기점으로 미국 역사에 뿌리 깊이 내려져 있는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었다. 각종 개인 디바이스를 통해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는 온라인상으로 실시간 송출되었고 분산된 기록물은 오히려 더 단합된 이야기를 전달했다. 이는 코로나와 함께 확산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중첩돼 우리가 속한 사회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변화를 촉구하는 열띤 사회문화적 시간이 되기도 했다. 황폐했던 거리를 가득 메우는 발걸음과 환호성,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한 무형의 군집이 선동한 소셜 플랫폼 피드 속 소음은 여러 몸들의 생존을 위해 소리 내고 있었다. 글리치가 시스템의 오작동만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닌, 그 오류 너머의 경로로 나아갈 수 있는 포털로 드디어 개화한 듯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음악 공연 시리즈를 기획하는 비애클럽의 새로운 온라인 스트리밍 파티 〈자가격리시대를 위한 송가〉(이하 ‘송가’) 소식이 전해졌다.14 당시 개최되고 있던 각종 예술·문화 행사는 주류 예술 신에서 배제되어 온 창작자들을 조명하고, 행사 수익금을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 커뮤니티의 생계 지원하기 위해 활용하는 등 자본과 기회의 재분배를 활동 취지에 녹여내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필연적이게 됐다. 비애클럽 역시 파티로 창출한 수익금의 일부를 한국여성민우회,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미국의 Emergency Release Fund와 G.L.I.T.S.에 기부했다.

비애클럽은 공연과 파티를 매개체로 대중, 실험, 인디 등 음악 장르의 위계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리스닝 문화를” 구상해 왔다.15 그해 여름, 고립된 몸들을 위한 그들의 〈송가〉는 두 차례 개최했고, 그중 오디오-비주얼 페스티벌 형태를 도모한 두 번째 세션은 다양한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아시안, 여성, 퀴어 음악가 7명과 시각 예술가 4명을 매칭해 라인업을 구성했다. 공연은 라이브스트리밍 플랫폼 트위치(Twitch)와 유튜브(YouTube)를 사운드 스테이지와 비주얼 스테이지로 각각 활용했다. 화면을 분할해서 관람하는 멀티탭 파티는 물리적인 클럽의 공간적 이동성과는 또 다른 몰입을 유도하는 디지털 공간만의 입체성을 돌출하길 시도했다.

디제이들은 바닥에 앉거나 작은 디스코 조명을 킨 정도의 담백하고 단출한 각자의 방구석을 배경으로 셋을 진행했다. 루이 호(RUI HO)의 날세운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과 이웃 창에 채도 높은 디지털 이미지들로 “몸의 추상”을 일궈내고 있는 한지형의 분주한 포토샵 화면은 짜릿한 아드레날린 증가를 선사해 잠시 잊고 지내던 과도하게 생산적(hyper-productive)인 코로나 전 일상의 산만하고 빠른 템포를 상기시켰다.16 반면 따로 동반하는 비주얼 없이 연주한 실험 음악가 토모코 소바주(Tomoko Sauvage)의 셋은 오로지 물이 담긴 세라믹 그릇과 하이드로폰으로 진행했다. 도자기 그릇 속 파동은 공기 입자를 유동하게 만드는 섬세한 울림으로 연결되어 소바주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허공을 채웠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소바주의 연주는 다양한 시차를 엮어내는 청각적 진동으로 화면 너머 관객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맥주 냄새와 땀이 뒤섞인 축축한 공기 속에서 몸을 맞대며 춤을 추는 것은 아니지만, 화면 속, 혹은 건너편에 있는 몸들의 실체가 더욱 육체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격리 중에 만난 몸은 약속된 시간에 잠깐 동안이라도 음악을 공유하며 하나의 거대한 감각체계의 존재로 형상화되기도 했고, 공연이 끝난 뒤 공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검은 화면에 비친 개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한계들을 넘어서는 감촉이 디지털 경험을 정의한다. (중략) 우리가 디지털에 참여할 때,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도전하기를 권장받고, 이러한 지속적인 시정과 도전들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을 전적으로 변형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들의 창조를 촉진시킨다. 17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에서 인터넷은 러셀이 성장한 일종의 놀이 공간부터 폐쇄적이고 플랫폼 기업에 중앙집권적인 모델을 차용한 환경까지 다중적인 모습을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경로 이탈을 갈구하는 글리치는 결국 특정적이고, 개인적인 “기계적 근심(machinic anxiety)”에서 촉발되는 것이다.18 오늘날 다양한 근심들이 넘실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노출시킬 것, 소셜 미디어에서 캔슬당하는 것, 가짜 뉴스와 잘못된 정보가 의심의 여지없이 전파하는 것, 혐오 단체들의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것, 정부와 플랫폼의 가이드라인 위반에 따라 권한을 박탈당하는 것, 봇에게 계정을 해킹당하는 것,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것, 데이터 센터 화재로 앱 사용이 불가해지는 것, 클라우드 용량이 부족한 것, 인터넷에 한 번 올라간 것은 영구적으로 남게 되는 것, 잃어버린 데이터를 복구할 수 없는 것, 기계에 인식되지 않는 것, 기계에 인식되는 것. 목록은 더 이어지지만, 위와 같은 근심만 두고 보았을 때 우리의 공사(公私) 생활을 소조하는 시스템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불안이 공통된다.

그래서 다시, 진로를 바꾼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장(腸) 속이든 장(場) 안이든, 시위이든 파티이든,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에서 나 자신의 몸과 타인의 몸이 함께 생동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우연한 만남과 움직임의 연속에서 도달하게 될 곳이라는 것이다. 헤드바가 아리드와 머드를 투입해 보여주듯, 어떤 영적인 기운이나 심원한 기술 아래 개인의 단위를 초월하는 경험과 확장된 공간에 참여할 때, 우리는 더욱 우리 몸의 경계선들을 통찰하고 감각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가야 한다. 그리고 글리치는 기계 안과 밖에서 조금은 요상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조금은 어색한 몸짓으로 춤추는 몸에 도달하는 경로로 우리를 안내한다.


  1. Legacy Russell, “Digital Dualism And The Glitch Feminism Manifesto,” The Society Pages, December 10, 2012. https://thesocietypages.org/cyborgology/2012/12/10/digital-dualism-and-the-glitch-feminism-manifesto/

  2. Legacy Russell, “Elsewhere, After the Flood: Glitch Feminism and the Genesis of Glitch Body Politic,” Rhizome, March 12, 2013. https://rhizome.org/editorial/2013/mar/12/glitch-body-politic/

  3. 레거시 러셀,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다연 옮김(서울: 미디어버스, 2022), 85. 

  4. 불어 속어로 오르가즘을 뜻한다. Legacy Russell, “Petits Fours / La Petite Mort: Edible Effigies for the Modern Mourner,” 2011. https://www.legacyrussell.com/PETITS-FOURS-LA-PETITE-MORT-EDIBLE-EFFIGIES-FOR-THE-MODERN-MOURNER

  5. 레거시 러셀,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다연 옮김(서울: 미디어버스, 2022), 101. 

  6. Frances Forbes-Carbines, “Glut: A Superabundance of Nothing – an interview with Johanna Hedva,” Culturall, October 18, 2021. https://culturall.io/glut-a-superabundance-of-nothing-an-interview-with-johanna-hedva/

  7. 헤드바는 성별을 특징짓지 않는 3인칭 복수 대명사 ‘그들(they/them)’을 사용해 자신을 지칭한다.  

  8. Johanna Hedva의 〈GLUT: a superabundance of nothing〉 공식 홈페이지 중에서 옮겨온 문구이다. 대괄호는 내가 삽입한 것이다. https://glut.website/#about

  9. 비디오 게임은 다음 링크에서 무료 다운로드 할 수 있다: https://glut.website/#. 

  10. 깊어진 밤 헤드폰을 착용한 채 컴퓨터 화면만 어둠을 밝히는 상황에서 게임에 접속한 나는 검은 호수와 같은 공간에 진입할 때쯤 나는 멀미를 느껴 게임을 중단해야 했다.  

  11. 헤드바가 〈GLUT〉를 비디오 게임과 사운드 설치로 제작한 이유 뒤에는 접근성을 둘러싼 현실적인 고민이 있다.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하고 밀폐된 공간 속 극적인 사운드를 비롯한 각종 설치 구조에 따라 몸소 체험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이 비디오 게임 형식으로 작품을 경험할 수 있도록, 헤드바는 작업한 것이다. 또한 ASL과 BSL 수화 번역을 제공하는 게임 투어 영상과 음성 해설은 작품에 접속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내어준다.  

  12. 레거시 러셀,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다연 옮김(서울: 미디어버스, 2022), 52–53. 

  13. 위의 책, 120. 

  14.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고마운 순간이었다. 

  15. “비애클럽은 언더그라운드 음악 애호가이자 기획자인 유영식(yuyungsik), 젠더 논-바이너리 뮤지션이자 DJ인 벨라(bela), 소설가이자 뮤지션인 위지영(Jiyoung Wi)이 함께 만들고 있다.” 조랭, 「A2C 사운드: 서울 – 쾰른」, A2C 웹사이트, 2020. https://www.a2csound.com/

  16. 이 부분은 한지형 작가의 소개글에서 가져왔다. https://sorrowclubseoul.blogspot.com/2020/07/sorrow-club-online-festival-requiem-for_14.html

  17. 레거시 러셀,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다연 옮김(서울: 미디어버스, 2022), 80. 

  18. 위의 책,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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