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치(Oetzi)의 눈: 책들 사이에서 엿본 미래

한윤아
한윤아는 기획자로, 출판사 ‘타이그레스 온 페이퍼(Tigress on Paper)’를 운영하며 책을 만든다. 동아시아 영화를 공부하고,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미술계에서는 《배틀 오브 비전스(The Battle of Visions)》[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쿤스트할레 다름슈타트(Kunsthalle Darmstadt), 2005]의 필름&비디오 스크리닝 기획자,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4)의 필름 프로듀서 등의 활동을 했다. 현재 영화, 그림책, 만화, 어린이책, 출판 문화 등 동아시아의 시각 문화를 다루는 『스포로이드 진』이라는 소규모 비평 진(zine)을 발행하고 글을 쓴다. 『새로운 보편성을 창조하기』 (쑨거 지음, 2021), 『나사와 검은 물』(쓰게 요시하루 지음, 2022) 등을 번역했다. 《서재의 유령들》(SeMA 창고, 2019), 《헬로, 스트레인저!》(하자센터, 2020) 등의 전시 및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틈새

김영글이 팬데믹을 지나며 쓴 책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서울: 돛과닻, 2022)의 첫 장면에는 ‘틈’에 끼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람은 훗날 ‘아이스맨’ 혹은 ‘외치(Oetzi)’라 불리게 될 냉동 인간이다. 그는 알프스 해발 3,210미터의 한 바위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산을 오르던 두 등산객과 딱 마주친다. 책에는 “비스듬한 빙벽 아래 두 개의 바위틈에서” “눈에 반쯤 묻힌 미지의 사물이 측면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1(9)는 모습으로 ‘그것’이 발견되었다고 묘사한다.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적으로 구성된 이 만남의 장면은 너무 신비롭고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외치의 모습은 산의 일부나 암석 같은 것으로 보일 만큼 사람보다는 사물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니 꽤나 긴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인지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얼음 틈새에서 지낸 시간이 5,300년 정도 될 것으로 추정했다. 피부를 제외하고 모든 장기, 치아에 붙은 꽃가루,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에서 주목했던 문신 등 몸에 남은 흔적이 그대로였다. 그는 선사 시대의 물질과 이야기를 몸에 간직한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식으로 말하면] ‘캐리어 백(Carrier Bag)’이었다. 외치를 발견한 건 우연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라가 의지를 가지고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야 하겠다고 계획했다 한들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없다고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이 있다.

책에서 그린 장면에서 등산객 중 여자[에리카 지몬(Erika Simon)]의 반응은 좀 더 주목해 볼 만하다. 그녀는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가 보낸 “무수한 낮과 밤”(9)의 시간을 떠올린다. 애도하는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 흡사 에리카가 그 시간을 순식간에 스크리닝하는 것처럼 느꼈고, 평소 백패킹과 하이킹을 하는 김영글이 에리카에게 이입되어 그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흔히 인생의 마지막 순간, 혹은 죽음을 감지한 순간에 자신의 전체의 삶이 영화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는 식의 표현을 하곤 한다. 김영글이 에리카와 겹쳐져 ‘틈’의 사람(사물)을 인지하고 그의 마지막 ‘비전’을 대리해 주는 것처럼 다가왔다. 한편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이 기승전결의 연결이 있는 서사를 가진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앞으로 펼칠 긴긴 스토리의 프롤로그로서도 기능한다. 여러 화자에게 빙의하여 팬데믹의 시간과 삶과 죽음의 ‘사이’를 집요하게 묘사하는 일이 이 책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때 삶과 죽음의 사이, 혹은 ‘간극’은 네거티브 필름처럼, 잠재된 상태로 묘사되고 있고 아직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여러 가능성으로 암시되고 있다.

고고인류학적 방법을 통해 외치의 몸에 남은 여러 기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그가 살았던 연대, 나이, 직업, 문화적 특성, 심지어 성격과 신념도 이야기되었다. 외치는 틈새에서 발견된 하나의 텍스트였고,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관계를 뒤집어 외치에게 어떤 주체성을 부여해 보고 싶다. 틈새에 놓인 존재는 유기체에서 미라, 즉 사물이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수분이 점점 빠지며 말라간다. 그 시간 동안에 자기 몸에 바람과 얼음의 흔적을 남기고, 동물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고 미생물과 접촉하기도 하면서 물리적 활동을 지속한다. 외치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통해 접촉 과정, 그리고 타자성이 완전히 주체를 잠식하는 과정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행위자가 된다. 또 스스로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낼 의지도 보일 수 있는 신화적 존재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를 새로운 역사가의 모습으로 그려보는 건 재미있다. 20세기 초, 빠르게 지나가는 진보의 시간과 잔해와 잔해가 급속하게 쌓이는 장면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사유한 ‘역사의 천사’의 21세기 버전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외치를 떠오르게 한, 혹은 얼음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게 한 ‘광풍’은 어떤 것일까? 얼마 전 히말라야에서 산악 빙하가 점점 녹아내리면서 수많은 등산객이 수십 년간 버리고 간 쓰레기와 사물의 더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보도사진을 보았다. 1990년대의 외치는 2020년대 쓰레기 사물들의 세례 요한, 먼저 온 선지자이다. 역사가 아이스맨이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은 어떤 내용이 될까.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에서 작가 김영글이 얼음이라는 스펙트럼을 통과시켜 분사한 이야기는 종말론적 뉘앙스의 무지개 띠를 구성하고 있다. 실제로 책의 마지막 장면은 멸종된 동물들의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소설의 외양을 갖고 있지만, 역사 쓰기의 한 양식으로도 읽고 싶은데 발전주의 사관도 아니고, 한 국가나 민족의 서사도 아니며, 고고학적으로 구성된 인류의 역사도 아니다. 이 계보 없는 역사의 현장으로 다양한 종과 존재, 사물을 초대하고 다시 어떤 세계를 구성하려고 할 때, 틈새에 놓인 외치에게 역사가이자 예언가의 임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2. 간극

세마 코랄에서 글을 위한 주제로 “간극에서 공유되는 미래”라는 말을 주셨는데, 나는 이 말 묶음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우선 ‘간극’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이렇다. 두 가지 사건, 두 가지 현상 사이의 틈. 그러므로 틈이나 간극을 말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은 최소 ‘두 가지’(혹은 그 이상) 사건이나 현상이다.

만약 이 두 가지(혹은 그 이상)가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닮거나 친하지도 않고, 심지어 같은 맥락에 놓이지도 않았다면, 궁극적으로 변증법적인 통합을 이루지 않은 채 계속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한다면, 그건 어쩌면 내가 관심을 계속 두었던 일, 때로는 우연히 만난 상황들과 관련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내가 공부한 ‘영화 이론’은 간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연구 방법으로 구성된 학문이며 68년 이후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간 학제적이라는 말은 ‘사이’에서 구성되었다는 말로 제도적으로 계보화된 분과학이 아니라 협동과정 같은 것이다. 1990년대부터 익혀온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방법론, 개념, 맥락, 상황을 연결하려면 적절한 틈새에 자리 잡아야 한다. 이런 방법은 따라야 할 계보나 전통이 없고, 섬겨야 할 정전이나 ‘아버지’도 없다 보니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동시에 불안정, 정통성이 없는 이단이 되는 것, 속된 말로 권위 있는 마스터 없이 ‘야매’로 훈련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와 자괴감을 주기도 한다. 한편 이런 지점은 어쩌면 계보 없고, 남겨진 유산이 별로 없는 남한의 식민적 상황을 에두르지 않고 적나라하게 담을 수 있는 조건과 닮기도 했다.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탈식민’의 방법으로 고안되기도 한다. 직업적으로는 예술가와 현장 혹은 생산(프로덕션)을 매개하는 기획자라는 위치도, 책을 짓는 저자와 텍스트, 물성을 가진 책의 중간에 놓인 편집자라는 위치도, 번역이라는 작업도 마찬가지로 간극에 자리 잡는 일이다. 그렇다면 간극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혹은 여기서 미래를 지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3. 공유

‘공유’란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먼저 복잡한 심경을 불러왔다. 양육자로서 나는 돌봄의 모든 책임을 양육자 개인에게 맞추는 사회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여성주의적 유산이라고 믿는 공동육아 사회적협동조합을 참여했다. 이는 터전이라고 불리는 어린이집 시설부터 공동 소유로 출자하는 형식이다. 공동체, 콜렉티브, 대안 공간도 결국 크게는 공간을 비롯하여 여러 다양한 자원들을 어떤 형식으로 공유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시작부터 진입장벽이 있는데, 그렇다면 원래부터 소유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공유하는 형식을 가져야 할까? 사유화의 형식, 자본주의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급진적인 장을 만들지 않는다면, 이런 공유 형식은 국가나 복지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대리해 주는 역할로 흡수될 수 있다.

다른 면으로 나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황성원, 김민철 옮김, 서울: 갈무리, 2011)을 읽으면서 왜 공동육아나 협동조합의 경험이 왜 어려웠고 힘들었는지 뒤늦게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태생부터 인클로저를 통해 공유지를 파괴하면서 시작했고, 마녀사냥의 긴 과정을 통해 출산 같은 인구 재생산, 돌봄 등 여성적인 것을 누구나 가져다 쓰는 공공 자원 같은 것으로 배치했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이를 정확한 말로 속 시원히 표현하였는데 자본이 노동을 ‘착취’했다면, 여성의 재생산 영역, 공유지, 자연(생태)은 자본이 ‘수탈’한 것이다.2 공유를 말할수록 언제나 손해보는 듯한 기분은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소유, 공유의 재편성을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써 감춰진 성별 권력관계까지 논의되지 못하는 것, 돌봄은 공짜나 저임금, 비정규로 편성되는 것의 불만과 불안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다시 공동체의 생활 양식과 공유를 생각한다면 무엇이 될까 고민한다.

나는 출판 동료들과 2021년부터 ‘어떤출판연구회’를 꾸렸다. 여기서 출판과 관련된 자원을 ‘공유’하거나 받은 기금을 작게 운용하면서 소규모 공동 출판을 한해에 하나씩 만들어 가고 있다. 큰 의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정에 기반한 상호 부조의 성격, ‘연구’라는 거창한 이름은 일종의 패러디이고 실은 작은 자원부터 실제적 필요를 편하게 나누고자 하는 모임이다. 근래에 함께 갸아트리 스피박의 『읽기』(안준범 옮김, 서울: 리시올, 2022)를 읽었는데, 책에서 ‘읽는 주체’란 간극에 자리하는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읽는다는 건 텍스트에 묻어 있는 저자 및 타자성의 흔적을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을 투영해 보는 경험을 통해 ‘자기 이해 관계에서 빠져나오는’ 훈련의 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읽기는 무엇이 될까. 스피박은 ‘읽기’를 수업과 대화, 교육의 과정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교수이고, 학생들과 함께한 세미나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교육’이 제도적인 차원이라고 우선 생각할 수 있지만, 교육은 좀 더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 언어 습득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스템으로서의 언어체계와 개별적인 사물, 주 양육자의 개별적인 말 습득을 오가는 ‘번역하는 주체’로 상정한다. ‘읽기’는 이러한 양극을 오가는 간극에서 윤리적인 관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4. 적대

‘나이 든 여인’이 같이 사는 어린 소녀에게 많은 집안일을 시키고, 터무니없는 요구와 혹독한 시험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 매서운 엄동설한에 푸른 상추나 붉은 진달래꽃을 따오라는 식의 명령은 집요하고 폭력적이다. 이 어른은 또래의 아이들끼리 서로 돕고 위안을 나누는 것마저도 철저하게 빼앗고 아이들의 터에 불을 질러 모두 까맣게 불태워 버린다. 백희나의 그림책 『연이와 버들 도령』은 위의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식의 잔혹하고 어린이에 대한 학대를 담은 민담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나 그림(Grimm) 형제가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수집한 이야기에서도 만날 수 있다. 역사가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이 쓴 『고양이 대학살(The Great Cat Massacre)』(조한욱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6; 개정판, 2023)에서는 어린이를 유기하는 근대 이행기의 이야기들은 판타지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농민들의 리얼리즘이자 일상사(史)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지독한 가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던 농노의 삶의 양식이 잔혹한 상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옛이야기를 맑스주의적 비평으로 접근하는 잭 자이프스(Jack Zipes)는 그의 책 『동화의 정체(Fairy Tales and the Art of Subversion)』(김정아 옮김, 파주: 문학동네, 2008)에서 민담을 순화시켜 가정의 교훈 이야기로 만들어 낸 그림 형제의 출판 활동을 근대 부르주아 가족 만들기 프로젝트의 기획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동화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산물로서만 기능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옛이야기는 삽화가나 그림책 작가들을 통해 계속 시각적으로 재화(retelling)되어 출간될 때마다 권력 관계를 들추거나 안전한 감정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 때로는 ‘전통’을 심문하면서 근대성의 구성을 되묻는 전복적 상상력을 부추기는 이야기로 계속 회귀한다.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 낸 옛이야기의 출간 붐도 그런 면으로 분석할 수 있다.

‘나이 든 여인’의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연이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일부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일어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백희나 작가는 계모 설화를 ‘나이 든 여자’로 바꾸어 혈연 정상 가족의 이야기를 재생산하지 않고, 세대 간 폭력의 이야기로 보이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 폭력은 어린이를 적극적으로 학대하는 범죄적 상황이라기보다 매일매일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과제를 수행해야 하고, 극단적인 노력을 강요당하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백희나의 아이들은 식물들, 즉 버들잎, 세 가지 신비한 약초꽃을 다루는 능력을 발휘하여 죽음과 삶의 사이 공간을 통과해 스스로를 구원하고 무지개 나라로 간다. ‘나이 든 여인’은 적극적인 벌을 받는 대신 다음 세대의 사라짐을 대면하며 쓸쓸하게 죽는다.

“나이 든 여인은 어찌 되었냐고?
그야 나이가 들어 죽었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서 말야.”3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당혹스러운 현실적 상황이 아닌가? 백희나의 그림책에는 지속적으로 서발턴 어린이라고 불릴 만한 아이들이 재현되어 왔다. 아파트보다는 빌라나 연립주택 같은 공동 주택을 배경으로 일하는 싱글맘의 부재의 시간 동안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어린이들의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백희나는 미국의 칼 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인형과 소품을 직접 제작하여 카메라로 찍는 퍼펫 애니메이션의 방법으로 그림책을 만든다. 배경이 되는 무대 공간이나 소품들은 영화 미술팀의 용어로 ‘간지(생활감)’의 디테일이 너무나 정교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리얼하기 그지없는 실제 사물들을 배경으로, 돌봄의 공백이나 어른들의 부재 상황을 아이들에게 찾아온 환상적이고 기이한 존재들과 함께 공존하는 경험으로 바꾸어 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가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책 속에서 어른들의 역할은 소극적이지만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적은 별로 없었다. 2022년의 어둡지만, 강력한 전복적인 서사를 불러온 상황은 어떤 것일까.

놀라운 점은 『연이와 버들 도령』의 환상 장면은 어린이책의 금기와 연결되어 있다. 죽음을 은유가 아니라 시신이라는 물질 자체로 바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옛이야기라는 장치 속에서 이 유물론적 장면은 판타지로 처리되어 있지만, 까맣게 타버린 재와 뼈, 그리고 뼈를 수습하는 손길이 3장에 걸쳐 3번이나 반복 재현된다. 쉽게 마주하기 힘들 정도의 복잡한 심경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비슷한 정동을 불러온 장면은 그림 형제의 민담을 2018년에 시각적으로 재화한 숀 탠(Shaun Tan)의 『뼈들이 노래한다(The Singing Bones)』이다. 해골을 표지로 한 이 책은 그림 형제 민담의 이야기 모음이 아니라, 각 이야기 중 장면 하나를 잘라내어 한 장의 조각 작품 사진과 함께 배치한 그림책이다. 각 장면의 선별 기준은 안전하거나 평화롭거나 교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상하거나 낯선 감각, 말 그대로 언캐니(uncanny)한 순간들을 모았다.

“31
노간주나무
엄마는 나를 죽였고,
아빠는 나를 먹었네.
누이동생 마를렌은
내 뼈를 빠짐없이 추슬러서
비단에 더할 나위 없이 곱게 싸서
노간주나무 아래에 놓아두었다네.
짹짹 짹짹! 난 참으로 어여쁜 새라네!”4

숀 탠은 호주에서 살며 작업하는 중국계 이민자 작가이다. 그는 2006년 작 『도착(Arrival)』, 2008년 작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Tales from Outer Suburbia)』처럼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민자들의 개별적으로 다양한 경험, 다른 얼굴들을 묘사하거나 새로운 땅이라는 지리적 상황, 혹은 공동체나 사회 안에서 느끼는 ‘유리된 감각’을 작은 사물이나 낯선 존재에 빗대어 그리곤 했다. 숀 탠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이 완전한 채식주의자(비건)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가 표현해 온 ‘유리된 감각’이 동물들의 상황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은 팬데믹 기간 동안 그린 『이너 시티 이야기(Tales from the Inner City)』(김경언 옮김, 서울: 풀빛, 2020) 등 최근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주목하는 변화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감각이 고양되었다는 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가 환기하려는 것은 ‘위급 상황’이다.

2023년 봄에 평창동의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책 생각들〉이라는 라이브러리 기획에서 「미술, 어린이와 미래의 책」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책과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어린이라는 타자성에 대한 관심은 좀 오래된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백희나와, 『감기 걸린 날』(파주: 보림, 2002)을 그린 김동수 작가의 그림책에 끌렸고, 해외에서 나온 ‘예쁜’ 책들을 모았다. 2005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간한 『어린이를 위한 다섯 개의 단편영화』를 쓰기도 했다. 이때는 양육자는 아니었지만 문화 연구를 통해 다양하게 부상하는 마이너리티, 타자성의 한 섹터로서 어린이와 그림책을 이해했던 것 같다.

백희나가 지면을 영화의 씬(scene)처럼 구성하는 탁월한 작가라면, 김동수는 직관력이 뛰어나고 물질과 세계의 활력에 감응하는 능력을 갖춘 예언가형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오리털 점퍼에서 삐져나온 깃털 하나에 이상한 느낌을 안고 잠이 들고, 괴상한 꿈으로 재생된다(『감기 걸린 날』). 어린이는 권력 관계로 이루어진 물리적 세계와 사회 구성을 언어가 아닌 직관으로 단숨에 이해했으며 간극의 장소에서 기발한 윤리적 응답을 만들어 낸다.

김동수의 책을 팬데믹 기간 동안 다시 읽게 된 계기는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준 환기 때문이다. 그레타 툰베리는 성난 고양이 마냥 공격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고 외친다. 더구나 “당신이 감히”라는 전혀 순응하지 않은 적대적인 목소리는 ‘불가해한 타자성’의 한 형상으로 다가왔다. 어떤 이들은 그레타 툰베리의 예민한 감응 능력과 분노를 그가 가진 특수한 기질, 즉 아스퍼거 증후군과 같은 진단명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레타는 성인 주체들이 ‘다루어야 할’ 특수한 기질을 가진 금쪽이로 환원될 수 없다. (모든 어린이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가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다.

어린이들의 공격, 특히 공유 자원을 둘러싼 적대감은 평소 자신이 ‘나이 든 여자’ 같은 폭력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 더구나 나름 윤리적으로 살고자 애써왔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곤혹스러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 혹은 민주주의에 대해 그려온 모습이 소음이나 잡음을 제거하는 합의의 과정으로 이해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근래 사회의 통합에 대한 요구나 페미니즘, 장애 운동, LGBTQ 등이 시끄러운 자기 재현에 대한 노골적 탄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샹탈 무페(Chantal Mouffe)에 의하면 이러한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잠잠하게 하는 합의의 과정이야말로 반(反)정치와 미성숙의 민주주의이다. 과도한 합의는 무관심을 반영한 것이고, 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어린이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구성원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간극에서 만들어 내는 공유의 형식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5. 미래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ón)의 영화 2006년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은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근미래를 보여주었다. 당시 테러와 내전이 만연한 상황, 난민 수용소, 시민권이 없는 이들에 대한 일상적 분리 감금을 보여주며 SF장르지만 정치적 리얼리즘으로 독해되었던 이 영화의 예언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원작자 P. D. 제임스(Phyllis Dorothy James),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작품 등, 더이상 재생산되지 않거나, 재생산을 통제하는 사회를 그리는 것은 페미니즘이 만든 미래 서사로서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2023년에 그려보는 이야기는 『제로의 책』[제로의 예술(강민형, 김화용, 전유진) 기획, 서울: 돛과닻, 2022]에 담겨 있다. 디자이너 어라우드랩은 버려지는 종이를 최소화하는 판형을 계산하여, 재생펄프와 콩기름 잉크를 사용해 책을 제작했다.

가장 인상적인 챕터는 급진적인 상상을 밀어붙인 헤더 데이비스(Heather Davis)의 글 「퀴어 자손」이었다. 미세 플라스틱, 석유 화학을 개탄하는 것이 환경 문제를 지적하는 클리셰가 되고, 어린이와 환경을 ‘보호’하는 것을 통해 재생산된 사회를 상상하는 관습을 깨버리는 제언을 담고 있다. 인류가 생식을 통해 재생산되지 않는 상황은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가, 근대 자본주의적 소비와 결탁하여 과잉 생산해 버린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의 ‘지위’는 무엇일까. “독성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어떤 것일까. 퀴어는 이미 호르몬을 교란시켜 인간종을 개조하고, 생식, 재생산과 상관없는 섹슈얼리티를 구성하고 있고, 미세 플라스틱은 새로운 변종의 박테리아를 위한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이미 무심코 생성 중인 새로운 세계는 이제 성별적 재생산과 상관없다고 선언한다. 멸종에서 시작하는 생성, 퀴어 자손, 박테리아 공동체, 비정상과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상상의 이야기들. 간극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바라보는 것은 이제 숨을 다한 얼음 속 외치의 눈이 될 것이다.


  1. 이하 인용에서 해당 작품이 수록된 단행본의 쪽수를 본문 괄호 안에 명기한다. 

  2. 낸시 프레이저,『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장석준 옮김(파주: 서해문집, 2023). 

  3. 백희나, 『연이와 버들 도령』(서울: 책읽는곰, 2021). 마지막 장면이다. 

  4. 숀 탠, 『뼈들이 노래한다』, 황윤영 옮김(서울: F,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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