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달걀의 혁명과 닭의 사랑

양효실
양효실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서울대, 한예종 등에서 강의한다. 태도로서의 페미니즘-퀴어의 (미적)정치가 육화된 텍스트 읽기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미술 비평이 주업이고 연극, 문학, 공연도 들락거린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등을 썼고,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 읽기


2010년 이후 리스펙토르의 영어권 수용

2015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의 단편(short stories) 86편을 영역한 『단편 전집(Complete Stories)』이 뉴 디렉션스(New Direntions)에서 출간되었다(2018년 개정판에서는 89편으로 늘어났다). 현재 뉴 디렉션스는 리스펙토르의 전작(全作)을 번역하겠다는 목표 하에 계속 신간 번역서를 출판하고 있다. 단편 전집의 번역자 카트리나 돗슨(Katrina Dodson)은 2009년 벤자민 모저(Benjamin Moser)―모저는 『단편 전집』의 편집자이기도 하다―가 출간한 『리스펙토르의 전기(Why This World: A Biography of Clarice Lispector)』 출간 이후 영미권에서 불고 있는 “리스펙토르열풍(Lispectormania)”을 “영어권 제4의 리스펙토르 물결(the fourth wave of Lispector in English)”이라고 부른다.1 리스펙토르는 “위대한 브라질 작가”, “카프카 이후 가장 위대한 유대인 작가”, “여자 체홉”, “브라질의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의존적 수식어에서 “클라리스 리스펙토르”로 단순해졌고, ‘문학’에 그 자신으로 등재된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리스펙토르의 번역은 무엇보다 배수아 작가 개인의 들쭉날쭉한 세계 유랑에 힘입은 바 크다. 배수아는 브라질 여행 중에 “뒤라스와 엘리네크 이후로” 끊어진 “특별한 여성 작가의 글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여성 작가”의 책을 우연히 만난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브라질의 여성 작가”의 『G.H.에 따른 수난』을 간간이 읽으며 배수아는 “아무런 내용도 줄거리도 시작되지 않았기에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까지 아무런 내용도 줄거리도 시작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릴 것만 같으므로 이 책에 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줄 수 없어. 어쩌면 도중에 읽기를 그만둘지도 몰라”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 이후 미국 여행 중 서점에서 『단편 전집』을 발견하고, 맨 먼저 저 유명한 「달걀과 닭」을 읽었다. 배수아는 리스페토르의 텍스트를 “전체 이야기가 하나의 덩어리로, 한꺼번에 다가온다. 마치 꿈이 그렇듯이, 특히 악몽이 그렇듯이”라고 일갈한다. 「달걀과 닭」을 특정해서는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의 촉감을 가진 광선이 피부 속으로 곧장 들어와 나라고 불리는 한 순간을 직선으로 투과하고 빠져나간다. 나는 희고 투명하게 피폭되었다”라고 묘사했다.2

이제 우리에게는 배수아가 번역한 단편집 『달걀과 닭』, 장편 『G.H.에 따른 수난』과 작년 말 민승남이 번역한 『야생의 심장 가까이』, 그리고 절판된 추미옥 번역의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까지 4권의 리스펙토르가 생겼다.

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책은 우선 사놓고 보는 열렬 독자로서 『달걀과 닭』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받은 뒤 곧장 구입했다. 맨 앞에 놓인 「달걀과 닭」을 읽고 어떤 충격과 문제에 봉착했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난다. 작가 자신이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가 쓴 단편” 혹은 “내게도 미스터리”였다고 말하는 「달걀과 닭」을 두고 카트리나 돗슨은 그 책을 읽는 것이 “밀실공포증”의 경험이었다고 묘사했다. 공중에 떠 있다든지, 달에 산다든지, 모래 위에 그려지는 달걀은 계속 재현/이해를 피해 달아다니는 과녁이고, 닭의 ‘모성’은 우리가 아는 모성과 다르다. 정녕 읽기의 “끝”에 다다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배수아의 고백은 브라질의 작가이자 기자인 호세 카스텔로(José Castello)가 인터뷰한 가수 카자(Cazuza, 1958~1990)에게서 더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카자는 특히 『아구아 비바(Água Viva, 1973)』를 좋아한다면서 몇 문단이라도 읽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책을 덮을 때마다 띠지 안쪽에 X표시를 했는데 세어보니 총 111번(날)되어 있었다고 들려준다(이 숫자는 ‘완독’으로서의 1회가 기준인 독서의 상투형을 저버린다.) 혹은 그가 어느 날 버스에서 몰래 훔쳐본 『G.H.에 따른 수난』을 읽고 있던 소녀는 여백에 글자가 빼곡히 적히고 붉은색 표시가 난무하는 본문을 지그재그로, 앞에서 중간을 건너뛰어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가는 식으로 읽고 있었다.

『메두사의 웃음』(1975)에서 앞으로 도래할 “여성적 글쓰기”를 선언했던 식수는 그것의 범례, 혹은 자신의 “뮤즈”를 리스펙토르에게서 발견한다. 식수는 프랑스에서 호세 카스텔로와 한 인터뷰에서 리스펙토르를 “20세기 가장 위대한 서구 작가”, “유일하게 비견될만한 작가는 카프카”인 작가라고 거침없이 호명했다. 전문가들보다 어린 소녀들이 더 잘 읽어낸다는 리스펙토르, 순서와 상관없이 읽거나 띄엄띄엄 읽고 있게 될 리스펙토르, 매일 조금씩 읽어도 읽었다는 기쁨을 주는 리스펙토르, 몇 문단만 읽어도 방향상실을 초래하는 리스펙토르. 저 기자에게 리스펙토르의 친구가 들려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문장 “리스펙토르를 조심해. 그건 문학이 아니야. 그건 마법(witchcraft)이거든”이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3

이 글은 멋모르고 시도한 「달걀과 닭」 해제의 결과물이다. 〔······〕 그리고 그전에 나는 리스펙토르의 가족 이야기를 잠깐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행의 장면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리스펙토르의 특이성이 드러나는 장면이고, 누군가에게는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통과하는지의 예시일. 마비된 몸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엄마의 막내딸이었고, 언어의 사회성을 정녕 이해하지 못하고 말문을 닫은 아들의 엄마였던 리스펙토르의 글쓰기에서 나는 ‘문학’이 어떻게 개인적인 것을 경유해서 ‘보편’에 가 닿을 수 있는지를 또 본다.

가족

리스펙토르의 가족(부모님과 언니 둘)은 우크라이나 포돌리아에서 그녀가 두 살 때인 1922년에 브라질로 이주한다. 러시아/볼셰비키 혁명 이후 내전 시기 그곳에서 자행된 유대인대학살(pogroms)로 리스펙토르의 할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엄마는 소련 점령군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다. 엄마는 매독에 걸렸고, 현대의학은 너무 멀리 있었고 그 지역의 민간신앙이 유일한 의지처였다. 매독에 걸린 여성은 임신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마니아는 리스펙토르를 임신한다. 그러나 마니아는 낫지 않았고 브라질 이주 후에는 마비된 몸으로 말을 잃은 채 흔들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리스펙토르가 9살이 되던 해 엄마는 결국 사망한다. (9살 소녀가 화자인 단편 「소피아의 재앙」에서 이 사건은 “내 아버지는 일하고 있었고 내 어머니는 몇 달 전에 죽었다”란 문장으로 ‘기술’된다.4 충격과 슬픔은 봉인된 채.)

가족과 자신의 과거에 대해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리스펙토르가 딱 한번 그 사건을 들려준 방식은 이렇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출산을 위해 예정되었다. 엄마는 이미 아팠고 임신이 병에 걸린 여성을 치유할 것이라는 흔한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중하게 창조되었다. 사랑과 희망을 갖고. 그러나 나는 엄마를 치료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도 죄의식이 나를 짓누른다. 두 분은 특별한 사명을 위해 나를 만들었고 나는 두 분을 실망시켰다. 마치 두 분은 전장의 참호 속에서 날 믿고 의지한 것이었지만 나는 탈영한 것이었다. 부모님이 나의 헛된 탄생과 그들의 위대한 희망을 배반한 나를 용서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나는 내가 태어났으니 엄마를 낫게 해달라고, 그저 기적을 원했었다.” (「달걀과 닭」의 이상한 닭이 리스펙토르의 ‘운명’을 이상한 방식으로 분담할 것이다.)

브라질 동북부 가난한 항구마을에 도착한 리스펙토르의 가족은 1927년에 그녀에게는 고향과 다름없는 리오데자네이루에 정착한다. “엄청나게 도덕적인, 인간의 악과 냉담을 뛰어넘은 사람”이었던, 세 딸을 대학까지 보냈던 아버지는 1940년 리스펙토르가 법대에 입학하기 직전에 수술 도중에 사망한다. “감옥 체계를 교정하겠다”며 법을 전공한 리스펙토르는 졸업 후 한동안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5 발표 즉시 “문학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첫 번째 소설 『야생의 심장 가까이, 1943』를 출간한 몇 주 후에 리스펙토르는 이탈리아 나폴리 주재 브라질 영사로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출국, 유럽과 북미에서 외교관의 부인으로 산다. 1959년 리스펙토르는 당시로는 흔치 않았던 이혼을 감행하고 두 아들과 리오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외교관의 부인으로 살았던 경험을 놓고 “나는 그런 삶이 싫었지만 내가 해야 하는 것은 했다. 나는 저녁 만찬을 준비하고 당신이 의당 기대할만한 모든 것을, 구역질을 하면서 해냈다”6라고 회상했다.

외국인 보모의 모국어를 모두 알아들을 만큼 일찍이 놀라운 언어 습득 능력을 보인 큰 아들 Pedro는 그러나 다른 아이들과의 대화는 전혀 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말을 못 하게 된다. “언어의 모호성들과 부적합성에 사로잡힌” 페드로에게 의사는 조현병 진단을 내린다. 리스펙토르는 “단어의 소리와 단어의 의미의 자의적인 연결을 의심하는 아들의 불안을 공유한 것”이기도 했다. 친구들이나 작가들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은 채 살았던 리스펙토르의 “인물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소진시킨다.” 몸이 마비된 엄마나 소통으로서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게 된 아들이 리스펙토르의 가족이다. 혹은 리스펙토르는 엄마와 아들을 포함한 이른바 “자기-의식이 없는 동물들과 백치들을 이상화한다. 그들은 경험을 단어로 옮기려는 욕망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7

리스펙토르가 글을 썼던 시기 브라질 정치는 반공·극우를 표방한 군사 독재자들의 무대였다. 당시 대부분의 브라질 작가가 리얼리즘 스타일로 민족과 공동체에 헌신하는 저항문학을 견지하던 것과 달리 리스펙토르의 문학은 “무-정치적(apolitical)”이었고 덕분에 탄압과 감시에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기도 했다. 리스펙토르는 난소암으로 사망하기 몇 달 전에 진행한 TV와의 인터뷰에서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작가의 역할에 대해 묻는 사회자에게 저 유명한 문장 “가급적 적게 말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8 문학과 정치의 관계가 ‘텍스트성’에 대한 논의를 거치며 재현적 리얼리즘이 아닌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것을 기억한다면, 스스로를 “대담한 겁쟁이”라고 불렀던 리스펙토르의 문학이 최근 들어 정치적 텍스트로 재전유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달걀은 당분간은 항상 혁명적일 것이다(An egg, for now, will always be revolutionary)”는 문장은, (둘째) 아들이 기억하기로 일생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였던 엄마-지식인 리스펙토르의 ‘미적’ 혁명론으로 「달걀과 닭」을 읽는 데 버팀목이 된다. 그녀의 혁명은 주체의 재귀적/반성적 능력인 자기-의식을 잃는 것, 그러므로 언어가 불가능한 “시종일관 정신착란(consistently delirious)”9 상태를 겪는 것이고, 그러므로 “동화된다는 일이 무엇과의 동화이든 간에, 동화되는 대상과 정반대인 성질까지도 관통해야만 하는 점진적인 고통의 과정임을 이미 아는”10 이들을 통해 일어난다. 대부분의 장소는 집/실내이고,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사건도 없는 고요와 정적 속에서 갑자기 불안 혹은 감각이 무질서를 초래한다. 지독한 불면증자로 낮에도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던 리스펙토르의 한 인물은 “심지어 그 당시에도 안정(stability)은 그에게 위험을 뜻했다. 다른 사람들이 안정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보건대, 불안정의 이점이 없다면 그런 실수는 영구적일 것이었다”11고 확신한다. 다들 안전, 안정을 부르짖으며 틀린 방향으로 가는 것을 교정하려고, 우리를 그런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리스펙토르가 쓴다. 엄마를 구하지 못한 리스펙토르가 그러나 “매일 사람들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라며 어린 시절 괴롭힘과 학대를 경험했던 객석의 관객이 필사적으로 항변했던 것을 강연자 벤자민 모저가 증언한다.12

O ovo: 명백한 달걀, 혹은 달걀의 혁명

단편의 첫 문장의 원문은 “De Manha na cozinha sobre a mesa vejo o ovo”이고, 카트리나 돗슨은 “In the morning in the kitchen on the table I see the egg(아침에 부엌 탁자 위에서 나는 달걀을 본다)”로 번역했다.13 시간과 장소, 보는 주체가 컨텍스트를 만든 후에야 사소하고 취약한 오브제 달걀이 나타난다/쓰인다(이 문장을 단편을 다 읽고 마지막 문장 ‘이후에’ 또 읽으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지만). ‘달걀이 있다’는 일상적이지만, ‘달걀을 본다’는 비일상적이다. 사건이다. 이 첫 문장이 이미 사건이라는 것은 끝까지 읽고 다시 읽을 때 감지될 것이다. 포르투갈어 달걀(the egg), ‘o ovo’는 이미 이미지-기표의 층위에서 달걀이다. 리스펙토르는 단편의 맨 앞부분에서 달걀의 형태학적, 이미지적 특성을 갖고도 유희한다. 가령 그다음 문장 “Olho o ovo com um só olhar(나는 달걀을 흘깃 본다)”나 “O ovo é óbvio(달걀은 명백하다)”, “Como o mundo, o ovo é óbvio(세계와 마찬가지로 달걀도 명백하다)”에서 우리는 종이 위에 ‘그려진’ 동그란 달걀도 역시 본다(그리고 o ovo의 시각적-이미지적 특성은 본문의 이상한 달걀들 중 “처음에는 삼각형”이었던 달걀이나 “모래 위에 그려진” 달걀과 연접한다).

영상으로 남은 인터뷰에서 리스펙토르는 새벽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는 글을 쓴 이후 아이들에게 계란 요리를 해주는 작가-주부의 시간을 생각한다.14 나는 배수아의 번역 “아침에 달걀을 본다. 나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부엌 탁자의 달걀을 응시한다”를 읽자마자 충격을 받았다. 다름 아닌 여성의 공간, 비가시적인 공간, 여성적 사물/오브제인 달걀이 첫 문장으로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재현의 권리’를 갖는 것은 특히 주부-여성-작가의 등장 이후이다. 그러나 이 단편이 페미니즘의 문제화나 장면을 펼칠 것이라는 기대는 그다음 문장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15 왜냐하면 단편의 화자는 여성적 장소와 사물을 소환한 그 즉시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인 성찰(멍 때리기)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매일 껍질을 제거하고 프라이나 오믈렛으로 식탁에 오르는 달걀을 갖고 그런 ‘진지한’ 사유를 시작하다니. 사유에 부적합한 장소에서 역시 부적합한 대상을 갖고 사유-몽상-상상이 시작된다. 이 부적합성이 이 글의 ‘신비’를 전담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연히 이 즈음에 나는 양구에 가는 버스에서 박문호 선생의 뇌과학 관련 유튜브 강연을 듣게 된다. 본다는 행위를 주체와 대상이 아닌 ‘빛’의 작용으로 보는 관점은 이미 사진론에서 혹은 양자역학에서 읽었던 것이고, 그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는 박 선생의 설명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했다. “시는 의미를 숨기고 이미지를 드러낸다”며 시 읽기를 즐긴다는 선생의 2시간 대중 강연 중 나는 다음 부분을 필사했다.

“우주에서, 별에서 우리에게 오는 게 뭐가 있을까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별)빛입니다. 우리 인간이 세계상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빛에 의해서입니다. 〔···〕 밖에 나가면 태양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20초 전의 태양입니다. 8분 20초 전에 출발한 빛 알갱이가 드디어 내 눈의 망막에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8분전의 태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태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르죠. 태양에서 8분이 지나간 것입니다. 안드로메다 은하를 예로 들어 보죠. 페가수스 사각형인 안드로메다 은하를 본다면 여러분들은 이백 이십 만 년 전에 출발한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내 친구는 대략 백만분의 1초 전의 친구입니다. 우주에서 지금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넌센스입니다. 우주는 국부적인 현상입니다. 지금 현재라는 개념은 넌센스입니다. 무수한 현재가 존재하죠. 우주에서는 무수한 현재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본다는 현상은 우주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주의 시간을 보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를 볼 수 있습니다. 원리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카메라를 가리키며) 저기 빛이 보입니다. 저 서치라이트 빛이 내 피부에 반사되어 우주로 나간다고 가정합시다. 그 빛을, 시리우스란 별 옆 행성의 어떤 지적인 존재가 본다면, 8년 전의 나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지적 존재가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저는 8년이 지나갔고 어떤 상태인지 모릅니다. 나의 미래죠. 그런데 그 사람은 나의 과거를 보고 있습니다. 우주에서는 동시에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다 다른 순간들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행성에서 나의 과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가 과거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연속된 존재로서 있을 수 있겠어요. 시간이 흘러간다는 느낌이 착각입니다. 그럼 그런 착각이 왜 생기느냐. 셀프self가 관찰자의 관점에서 그 흐름을 만들어냅니다.”16

나는 이 글을 거의 다 쓴 뒤에 다시 이 인용문을 읽는다. 그리고 리스펙토르를 박선생이 말하는 “우주에서는 동시에 있습니다”의 문학적 버전으로 해석한다.

리스펙토르도 “본 달걀은 상실된 달걀(an egg seen is an egg lost)”이라고 말한다. 우리네 냉장고 속의 간고등어처럼 주부의 노동과 희생을 함축한 탁자의 달걀이 고지하는 일상성의 의례가 “무목적적으로”, 탈-기능적으로 달걀을 보는 여성 작가의 시선과 이접적으로 연결된다. 화자는 계란은 “흘깃 볼 수 있는” 사물이지 “보는(see)”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과거가 된 것을 또 보는 행위가 보기이기에 본 달걀은 “3천 년 전에 본 달걀”이 된다. 달걀을 “기억하는” 자만이 ‘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보기는 다시-보기이고, 화자는 ‘3천 년’이란 숫자로 고대를 소환하려고 한다. 그녀는 과학자가 아니고 몽상가이다. 혹은 화자의 방편인 흘깃 보기는 잘 보려는 자가 직면하는 어긋남의 미혹, 곤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가령 작가 ‘권군’이 맨눈으로 태양을 보고 그리는 대담한 시도 덕분에 눈에 화상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자는 ‘눈’이 있는 것은 모두 달걀을 볼 수 없다고, “오직 기계만이 달걀을 볼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눈/나(I/eye)’의 주권성을 자신의 무대에서 곧 제거한다. 화자는 자신이 “고대인(ancient)이었을 때”인 “3천 년 전”에는 달걀이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라고 증언/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죽었지만, 시간을 통과하는 사물-이미지-물자체-재현불가능한 것인 달걀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초가시적이고 초감각적인 달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 달걀은 그러므로 “이미 죽은 별의 빛”과 같다. 아침/빛이라는 (비가시적) 전제가 달걀을 현재 시제로 본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달걀은 이미 항상 거기에 없다. 그러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달걀은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세계와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그런 달걀을 깨뜨리지 않으려고(우리가 아는 달걀은 모두 깨진 달걀이다. 실수나 관성 때문에, 폭력적인 콜럼버스에 의해, 의심하는 브로타에스에 의해 달걀은 이미 항상 깨져 있다), 이해(“이해는 착각의 증거이다”/“이해는 상처를 입힌다”)하지 않으려고, 화자는 탁자 위의 계란을 피상적으로 주목한다. “피상적 주목(superficial attention)”이란 문구는 역설이고 이접(disjunction)이고 모순이다. 혹은 그런 이상한 주목으로, 사시(斜視)로 우리는 생존한다.

달걀은 이제 탁자 위에 없다. 그것은 3천 년 전에는 나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A4 용지 반 페이지 정도의 글쓰기 이후에는 (리스펙토르는 타자기로 썼다) “허공에서 멈추어버린 발사물처럼” 줄곧 공중에 “매달려(suspended)” 있다. 그러므로 아는 달걀을 모르는 달걀이 대체한다. “달걀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고 “달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달걀에 대한 올바른 말하기를 내게 준다.” 고유한 달걀의 존재론이나 올바른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러므로 이접과 모순/역설을 통한 “사랑”만이 남는다. 사랑은 줄곧 앎의 대상일 수 없는 대상과의 관계 맺기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소환됨과 동시에 허물어진다. 시인은 미쳤기에 공화국에서 추방해야 한다던 형이상학의 ‘아버지’ 플라톤과 미친 사유로 철학을 패러디하는 리스펙토르가 함께 보인다. 리스펙토르는 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달걀이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어디든 있는 달걀이 불현듯 “달에 서식한다(inhabit)”고 적힌다면 이제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된다. 우리/독자는 ‘생각하는 백치’의 대우를 받으며 리스펙토르에게 빨려 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문단에서 두 문장이 지나면 “달걀은 부엌을 발가벗긴다(denude). 달걀은 식탁을 비스듬한 면(plane)으로 만든다”란 문장이 나온다. 왜죠? 왜 달걀이 식탁을 비스듬한 면으로 만드는 걸까요, 라고 묻자 필기구 없이 수업을 듣는 학생 중 하나가 의문문으로 대답했다. 달걀이 구르는 것은 달걀의 관점에서 보면 식탁이 비스듬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오! 네 번 읽은 전문가 선생은 전혀 이해를 못한다고 했고 어린 소녀는 자기 소설을 너무나 좋아한다고 리스펙토르가 이야기했지… (“젊은이들이 내 곁에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축복이다”)17 기울어진 지구에서 직선은 눈속임이다. 그러므로 구르는 달걀은 아침의 고요한 부엌을 시끄럽게, 움직이게 만든다. 부엌의 달걀은 혁명이다.

달걀의 ‘기원(명사)’은 앞서 말했듯이 “처음에는 삼각형이었는데 너무 오래 우주에서 굴러다니다가 둥그런 모양이 된 달걀”처럼 문장이거나 “물병”처럼 도구이거나 “기원이었을 마케도니아에서 한 남자가 손에 막대기를 들고 모래 위에 그린 뒤 맨발로 문질러 지워버린” 장면이다. 그렇게 화자는 이 달걀에서 저 달걀로 계속 이동하다 보면, “맨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에게”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온화하다. 달걀과 신은 연결되어 있고 만난다. 리스펙토르의 세계는 이분법적인, 분별에 기반한 세계가 아니고, 성들(sexes)도 평등하고 심지어 동일하다.

닭은 달걀보다 뒤에 등장한다.

닭의 사랑의 모순

고대 철학자들이 제기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란 질문을 리스펙토르는 간단히 정리한다. 달걀은 시간을 통과하며, “동시에 여러 곳에서” 산다. 닭은 그런 달걀이 “시대를 가로지를(traverse the ages) 수 있도록 존재한다.” 그리고 “시대를 너무 일찍 앞질러 왔기에” 달걀은 우리가 잘 아는 “그분(That Man)”, 예수일 것 같은 한 사람과 같아진다. 그의 죄목은 “자기 자신이었다(He was what he was)”는 것이었고, 구체나 비유가 불가능한 “그분(남자)”은 그렇게 “주제를 고갈시켰기(exhaust)”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정관사(The face)는 부정관사들(a pretty face)의 세계를 고갈시키기 때문일까? 정관사-존재를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형이상학/존재론은 인류를 죽이려는 음모라는 것인가?

그분은 그분이었기에 죽임을 당했고, 이제 그다음이 달걀이 입을 화, 혹은 달걀 때문에 인류가 또 입을 화이다. 그분의 모순은 육화된 몸으로 “그분”이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분의 그런 말하기는 인류를 분노하게 했고, 그렇게 “오늘까지 우리는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그런 화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기 위해 닭보다 먼저인 달걀이 “닭을 찾아냈다.” “계란이 희다”는 말은 그 말을 입에 올린 자의 죽음을 초래하는 ‘금기’이기에, 주제(The egg)의 고갈과 인류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기에, 닭의 몸에 숨어 있어야 한다. 닭은 “달걀이 이용할 도구”이고 달걀은 “닭이 일생 지고가야 할 십자가”이다.

(여기까지 쓰고 7시면 마감인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 오래전에 읽은 ‘어른을 위한 우화’라는 부제가 달린 『책상은 책상이다』를 떠올렸다. 순대국밥을 먹으면서 찾아본 블로그 중에는 작자 페터 빅셀은 어쩌면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지 않았을까, 등장인물 중 조현병자도 있는 것 같다고 감상문을 남겼다. 소쉬르는 이른바 기의와 기표의 관계를 필연성에서 자의성/우연성으로 옮겨놓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단단하고 고정된 세계, ‘책상은 책상인’ 세계에서 산다고 믿는다. 페터의 인물 중 하나는 자신만의 기호체계로 모든 고정된 사물들의 동일률에 기반한 관계를 훼손하다가 종국에는 침묵에 이른다. 자의성을 필연성으로 믿은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의성을 ‘보는’ 자는 미치거나(미쳤다고 규정당하거나) 예술로 숨어든다. 아들 페드로와 엄마 리스펙토르처럼.)

닭은 달걀의 존재를 모르기에, 자신의 운명을 모르기에 그것을 사랑한다. 리스펙토르는 인터뷰어가 “왜 쓰는가”라고 묻자 “모른다”라고 대답하거나 “살아 있기 위해(stay alive)”라고 대답한다―리스펙토르의 닭은 모른 채 사랑하고, “삶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기에 오직 계속해서 생존하려고 한다.”―리스펙토르는 우크라이나에서는 히브리어로 삶(life)을 뜻하는 Chaya란 이름으로 불렸다. “닭은 달걀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안다면 “닭으로서 스스로를 조심스럽게 다룰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달걀을 잃게 될지 모른다.” 닭은 자신이 “뭔가를 채우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또 이접/모순/역설이 명증해진다. 닭이 “아주 사소한 위협에도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오르는” 것은 “오직 자신 내부의 달걀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닭은 알지 못하는(not-knowing) 자의 모순을 육화한 피조물이다. 닭의 운명이 “닭 자신보다 중요하기에”, “닭 개인의 삶(personal life)은 우리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희생을 거부하는 닭들, 자기(self)를 주장하려는 닭들의 무지/오만은 이렇게 적힌다. 그런 닭은 “‘나 I’란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종이에 건성으로 휘갈긴 어휘 중 하나이고, 더 나은 모양을 찾기 위해 시도하다가 생겨난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던 닭”이다. 리스펙토르는 생물학적 암컷(female)과 문화적 여성성(feminity) 모두에서 자신의 닭을 빼낸다. 닭의 희생은 우스꽝스럽고, 닭의 운명을 거부한 채 주체성을 주장하는 닭은 어리석다.

그래서 리스펙토르가 자신의 닭을 묘사하는 데 첩보원(agent)의 은유를 끌어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비밀결사(Masonic society)”에 속한 이들 첩보원-닭은 “달걀을 보았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부인한 자들”이다. 앞서 예수가 이름 없이 인용되듯이 그 뒤를 이어 유다도 그렇게 암시된다. 이들은 “나머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환멸”인 사랑을 하는 자들이다. 화자는 “사랑은 궁극의 가난이다. 사랑은 갖지 않음(not having)이다. 더욱이 사랑은 사랑이라고 여겨오던 것에 대한 환멸이다”라고 말한다. 뭔가 감동적인 이 문장은 그러나 그다음 문장, “사랑은 다름 아닌 형편없는 첩보원들에게, 만약 뭔가를 모호하게 짐작하도록 허용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망쳐놓을 첩보원들에게 승인된다”는 문장과 이어지면서 역시 감동보다는 모순이 ‘생존’ 조건인 이들의 유머나 희극성으로 낮아진다. 무능한 첩보원 중에 “자살을 선택한 첩보원”으로 세 부류가 거론되는 데 특히 세 번째 부류가 인상적이다. 그 남자(리스펙토르는 이 남자를 자살했다고 하지 않고 “역시 제거되었다”라고, 사실은 살해되었다고 말하는데)의 모순인바 “용기처럼 보인 우둔함”은 이렇게 적힌다/남겨진다. 그는 “어느 날 ‘진실은 용감하게 말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우선은 진실을 애써 공들여 찾는 데 주력했다. 그는 진실을 위해 죽었다고 전해지지만 사실은 너무 순진해서 진실을 발견하기 더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나는 앞서의 많은 문장에서 실실거렸지만 이 문장에서는 제대로 실실 댔다. 믿는 자들이 공백을 진실로 만드는 데, 너무 진지하게 믿은 세 번째 첩보원은 진실이 결여라는 첩보물의 최종심급을 건드렸기에 제거된 것이다. 카트리나 돗슨은 리스펙토르의 텍스트가 “철학적이면서 슬랩스틱스럽다”라고 평했다.

“나의 신비(mystery)는 나는 그저 하나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 화자를 “웃게 만든다.” 페이지 안에서 화자도 웃는다. 첩보원이라는 “가짜 직업을 진짜 직업으로 만들면서 나의 진정한 목적을 위장하는” 이상한 행위성(agency)을 화자가 긍정한다. 자신에게 수여된 “가장 사악한 유형의 자유”을 놓고 화자는 미소 속에서 그렇다면 그것은 “자유인가, 아니면 나는 조종당하는 것인가”를 묻는다. 모순/역설은 화자의 자기-의심을 통해서도 견지된다. “내 거울조차도 내 것인 얼굴을 아직 비추지 않았다”면 이 세계에서 자기-동일성은 아직 시작도 안 된 것이다. 화자는 그런 미궁-부엌-우주에서 자신의 운명에 감동한다. “최소한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감정으로 고동치는 가슴으로 나는 최소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신뢰로 고동치는 가슴으로 최소한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달걀을 보호하라”는 상부의 지령을 지키면서 닭-화자는 이렇게 말(words)을 이어간다. 계속 말하는 것이 달걀을 잊게 하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달걀은 잊혀야 한다. 맨눈으로 볼 수 없고, 희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여러 이미지와 닭의 운송으로써 시간을 통과하는 달걀에 대한 사랑은 철저한 종속, 수동성에 대한 긍정이고 감동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 “달걀이 불가능해진다면, 달걀은 마지막으로 우주(space)에서 내가 항상 열어두는 창으로 옮겨올 것이다. 그리고 동틀 무렵(at dawn) 우리 집으로 내려올 것이다. 고요하게 움직이며 부엌까지. 나의 창백함으로 부엌을 환하게 밝히면서.”

여명은 사물들의 차이가 잘 식별이 되지 않는 어스름이다. 그 시간 부엌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나의 창백함(my pallor)”이다. ‘달걀이 나의 창백함으로 부엌을 환하게 밝힌다’라는 문장은 신-달걀의 은총으로 당신을 용서하는가, 비문이기에 울게/화나게 하는가, 밝기에 웃게 하는가. 모순을 겨냥한 말들은 마지막까지 현기증을 일으킨다. 그리고 더 큰 현기증, “밀실공포증”이 그 위에 겹쳐진다. “텍스트는 아침과 더불어 시작한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화/기표화하려고, 마지막 문단은 여명에 있게 된다. 마지막에서 우리는 시작(the beginning)에 도달한다. 한 바퀴를 다 돈 다음에 다시 시작한다.”18

++ 70년대 초 리스펙토르는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열린 국제 마법 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Witichcraft)에 주빈으로 참여했다. 신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했음에도 자신의 글쓰기에 고유하게 내속하는 어떤 것이라고는 생각했기에 그녀는 참석을 받아들였고 대신 연설은 거부했다. 대신에 리스펙토르는 「달걀과 닭」을 낭독했다.19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와 전시의제의 소주제를 발굴하는 2022 SeMA 의제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록되었습니다.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의제는 ‘시’입니다.


  1. 카트리나는 리스펙토르의 서구 문학으로의 유입을 네 단계로 나누어 이렇게 정리했다. 1961년 남미문학의 붐의 영향으로 『어둠 속의 사과』를 출간한 텍사스대 출판사, 1980년대 프랑스 페미니즘 철학자 엘렌 식수의 영향 하에 리스펙토르의 프랑스어 번역을 주도한 프랑스 출판사 드 팜므(De Femmes), 그리고 1990년대 다문화주의적 맥락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그녀의 몇 권의 작품을 번역한 뉴디렉션스와 영국의 Carcanet 출판사가 이전의 세 흐름이고, 2009년 이후가 네 번째 흐름이다.
    남미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이기도 한 카트리나는 리스펙토르 단편집 번역으로 2016년에 펜(PEN) 번역상 외 여러 번역상을 수상했다. Katrina Dodson, “LITERATURE: Rediscovering Clarice Through Translation,” Berkeley Review of Latin American Studies, Spring 2017, https://clas.berkeley.edu/literature-rediscovering-clarice-through-translation

  2. 배수아, 「어느 날 그들이 암탉을 죽였을 때 - 옮긴이의 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서울: 봄날의 책, 2019), 359-382. 

  3. 가수, 소녀, 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다음의 글을 참조했다. José Castello, “Clarice Lispector: Madame of the Void,” The Paris Review, December 10, 2020, https://www.theparisreview.org/blog/2020/12/10/clarice-lispector-madame-of-the-void/

  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 110. 

  5. 1941년에 스물한 살의 리스펙토르는 “처벌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처벌할 권력이 존재한다. 죄를 짓고 처벌받은 자는 국가가 그 사람보다 힘이 강하기에 처벌받는다. 대형 범죄인 전쟁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썼다. 

  6. 리스펙토르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는 배수아의 「옮긴이의 말」을 포함 구글에서 찾은 여러 자료를 참고했다. 

  7. Rachel Aviv, “Speak as Little as Possible: On Clarice Lispector,” The Nation, September 28, 2009, https://www.thenation.com/article/archive/speak-little-possible-clarice-lispector/

  8. “Interview with Clarice Lispector―São Paulo,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w1zwGLBpULs

  9. Terrence Rafferty, “‘The Complete Stories,’ by Clarice Lispector”, The New York Times, July 27, 2015. https://www.nytimes.com/2015/08/02/books/review/the-complete-stories-by-clarice-lispector.html 

  10.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이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르는 독자에게”, 『G.H.에 따른 수난』, 배수아 옮김(서울: 봄날의 책, 2020). 

  11. Terrence Rafferty, “‘The Complete Stories,’ by Clarice Lispector.” 

  12. Scott Esposito, “Passionate Acolytes: An Interview with Benjamin Moser,” The Paris Review, August 17, 2015. 

  13. 배수아의 번역도 카트리나의 영역본을 참조한 것이다. 나는 이제 배수아의 한글 번역과 필요한 부분에서는 카트리나의 영어 번역을 참조하면서 「달걀과 닭」을 해제할 것이다. 따로 원문의 페이지 묘사는 하지 않겠다. 카트리나의 영어 번역은 구글에서 찾을 수 있다. https://electricliterature.com/this-is-your-brain-on-clarice-lispector/ 참조. 

  14. “아침 일찍 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아침이다. 4시 반이나 5시에 일어나 앉아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다.” “Interview with Clarice Lispector―São Paulo,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w1zwGLBpULs

  15. 식수는 “클라리스가 글을 쓰던 시기에 여성의 질문(the question of woman)은 제기되지 않았다. 〔···〕 그녀가 보기에 사랑 안에서 성들(sexes)은 평등해진다. 거의 동일해진다”라고 해석한다. Hélène Cixous, “‘The Egg and the Chicken’: Love Is Not Having,” Reading With Clarice Lispector (Minnesota: Univ of Minnesota Press, 1989), 121. 

  16. “박문호 박사의 자연과학 이야기 몰아보기 : 우주와 존재” https://www.youtube.com/watch?v=1-x2hufoliQ 참조. 43분부터 필사했다. 

  17. “Interview with Clarice Lispector―São Paulo,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w1zwGLBpULs

  18. Hélène Cixous, “‘The Egg and the Chicken’: Love Is Not Having,” 112. 

  19. José Castello, “Clarice Lispector: Madame of the V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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