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강덕구
강덕구는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진이다. 한예종에서 영화이론과 영화사를 전공하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다. 동시대 영화, 한국 힙합, 힙스터리즘 등 사회와 예술이 만나는 접경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있다.

ETN에서 방송인 김구라가 연예인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의 방송 클립을 우연찮게 유튜브에서 보았다. 록밴드 부활의 기타리스트 김태원이 주인공이었고, 그의 일산 자택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김태원 자택은 내가 살던 오피스텔과 비슷했다. 일산에 있는 회사를 다닐 때 얻은 사택이었다. 복층 구조였다. 김태원은 아침부터 진행된 인터뷰였음에도, 연신 소주를 병째로 마시며 김구라와 시답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한마디는 묘한 형태로 내 마음을 뚫고 지나갔다.

“우리 ‘로너’잖아.”

‘로너(loner)’의 사전적 의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혼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 의미란 고독을 향유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물론 ‘로너’가 말 그대로의 혼자 고립된 사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로너’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홀로 있음’을 향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야 정확하다. 나는 ‘로너’란 단어를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홀로 있음’과 ‘같이 있음’을 중계하는 행위로서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기이한 행위다. 한 번 시작하면 그것을 멈추기란 힘들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는 쓰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글쓰기가 지향하는 ‘자동적인’ 기능이 있다. 글은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자아의 하부에 존재하는 충동이 명령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SNS건, 과거의 서신이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우리를 표현하고자 애쓴다. 요즘에 난립하는 자가 출판 기업은 자기표현을 환전하는 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문학 강좌에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한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들은 왜, 또 무엇을 알고 싶은 걸까?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가?

‘콜리그(colleauge)’라는 낱말이 그 자체로 동료를 뜻하는 건 아니다. 60여 편 이상의 글을 실은 이 ‘콜리그’라는 플랫폼이 어떤 연대, 공동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홀로 있는 사람들이 잠깐 오가는 공간에 가까울 것이다. 그곳은 어떤 지식도 산출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다양하고 자동적인 표현들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여러 지면에서 글쓰기가 갖고 있는 무가치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이는 의문을 왜 영화 보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도대체 왜 필자가 되어야 하지’라고 묻는다면,
나는 김태원처럼 대답하고 싶다.

이때부터 우리는 자기표현과 그로 인한 나르시시즘의 관계에 대한 메커니즘을 다룰 수밖에 없다. 좋아. 난 아마추어야, 그러나 내가 그것을 혼자 즐겨야만 하나? 내 행위에 대한 보상은 어디에 있지? 기성세대는 저 좋았던 옛 시절을, 이를테면 행위에 대한 보상 체계가 모호해도 되는 시대적 분위기를 충분히 만끽했다. 그들은 커리어 패스를 손쉽게 만들 수 있었다. 열정이 사회적 지위가 되어 인생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던 시대였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그런 인생 모델을 채택하기란 버겁다.

이에 대해 조금은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파비오 지로니(Fabio Gironi)라는 철학자, 선원이 있다. 지로니는 한국에는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의 주술책 『사이클로노피디아(Cyclonopedia)』 저자 인터뷰로 잘 알려졌는데, 현재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그만뒀다. 그가 쓴 「이전에 철학자였던 사람의 고백(Confessions of an Ex Philosopher)」은 제도 내부에 안착하려는 경쟁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람의 이야기다. 몇 년 전, 이 글을 읽고 대단히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학계, 혹은 예술계의 문화는 자아 중심적이다. 나는 예전에 이런 문화를 욕하기 바빴다. 일반 회사에서의 사회성이 필요하다면, 이 문화에는 자기중심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자기-PR은 은둔을 표하는 작가라 해도 벗어날 수 없다. 현대 미국 작가들 중 많은 남성 작가들이[호밀밭(J.D 샐린저)부터 핏빛 자오선(코맥 맥카시), 중력의 무지개(토마스 핀천)까지]은둔하고 있다. 하지만 은둔이 오히려 광휘를 만든다. 그건 은둔 작가가 주인공(재밌게도 핀천이 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인 돈 드릴로(Don DeLillo)의 『마오 2(Mao II)』가 적나라하게 보여준 지점인데, 숨으면 숨을수록 자아는 노출된다. 루머와 가십이 또 다른 나를 만들고 있다고.

많은 예술학교 학생, 연구자들이 저 경쟁 경로에서 이탈하거나, 좌초한다. 그것은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처음 가속주의자들(Accelerationist)에게 흥미를 느낀 건 그들 대다수가 저 경로에서 낙오됐기 때문이다. 블로거-철학자들. 닉 랜드(Nick Land)와 마크 피셔(Mark Fisher)로 시작해서, 울펜데일(Pete Wolfendale)이나 지로니 같은 신진 철학자들까지. 하지만 그런 낙오와 실패는 항상, 다른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고, 어떤 돌파 지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제도의 공식 언어에서 낙오된 것을 자축하는 CCRU(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다)라는 반-기념비적인 실천. 학술대회, 영화제, 비엔날레, 홍보 문구, 보도자료, 자축연, 파티, 언론사 인터뷰, 거짓말과 자아의 공모를 이제는 (마지못해/기꺼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점에, 저 글은 또 다르게 읽힌다.

즉, 자아와 홍보의 공모를 인정하라 수밖에 없는 그런 지점에서 우리는 출발해야만 한다. 자아의 노출이 일반적이다. 자아 표현은 기본적인 디폴트값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비단 극장에 틀어박혀 있거나, 방 안에 갇혀 있는 한 명의 시네필이나 관객이라도 마찬가지다. 왓챠나 레터박스로 대표되는 별점 평가 사이트들은 관객이 ‘작품’을 경유해 자아를 표현하도록 강권한다. 그것은 부정한다 해도 쉬이 물리칠 수 없다. 이는 관람의 방식에 근본적으로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환경은 관객-평론가-창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에 균열을 내지만, 그러한 변화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손을 들어준다.

지로니가 마주한 아카데미 내부의 경쟁과 압력은 제도에 입회한 개인을 밀어붙인다. 파비오 지로니의 사례는 비단 서구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익숙한 사례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이들은 지로니처럼 학계에 진출해서 자신의 삶을 꾸리지 못한다. 나는 꽤 경력이 있는 기획자가 하던 일을 그만둔 후, 잠적할까 고민하는 글을 우연찮게 봤다. 평론가들이 특정 금액 이상이 아니면 원고 청탁을 받지 않겠다는 보이콧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글의 수요가 그렇게 크지 않은 곳의 필자는 원고료 인상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 그러나 원고료 문제는 심각하지만 개인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수요자들은 유료로 글 읽기를 꺼려한다. 요 근래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구독형 텍스트 플랫폼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글들은 아마도 비평은 아닐 것이다. 비평은 한국인들이 읽기에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는 텍스트다. 국제 정세, 시장 동향을 알려주는 숱한 글들은 정보로 빼곡하다. 비평은 정보보다는, 감흥을 표현하는 수사와 설명하는 논리가 담겨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가성비를 찾는 이들이 비평을 선호하기란 어려울 터다. 공급자는 많지만, 수요자는 적은 상황에서 적당한 페이를 요구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자는 소수다. 저자-평론가-비평가는 한정된 인원만 충당할 수 있는 자리다. 그렇게 글을 썼던 이조차 기회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예컨대 대학원에 진학한 경우, 학계에 앉을 수 있는 자리로) 간다. 내가 예전에 즐겨 읽던 웹진 ‘피카소’ 창립자 역시 지금은 (릴 체리가 있는) 레이블 오너로 활동한다고 들었다. 음악계의 글 대우가 제일 밑바닥인 건 변함없는 사실임에도,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글도 재미나 쓸모, 액세서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요가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글을 필요로 해야 한다. 글은 어떤 ‘-계’ 이상으로 항상 나와야 그 정도 대접을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비평은 공적인 지식이 되어야, 동시에 공적인 것의 지평을 되돌아보는 글쓰기가 되어야 의미가 있다.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리베라시옹(Libération)』 기고 글들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다네는 그 정도 되는 언론사에 자신만의 일관된 주제의식의 글을 싣는다. 특히 텔레비전에 관한 글이 그렇다. 그는 텔레비전의 시대에 영화의 매체성을 시네필리아적으로 고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시대 변화에 따른 공적인 것의 위상을 조명한다. 그게 아마도 특정한 분야의 평론가가 공적인 것을 만드는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론가는 문화향유자들이 나르시시즘적으로 표출하는 자아 표현을 돕는 조력자 역할에 만족한다. 관객들은 자아 표현을 하고, 비평가는 그것을 돕는다. 이 관계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다만, 어떤 순간에 비평가가 일련의 플랫폼이 강제하는 식의 교양을 제공하는 데 그칠 확률이 크다. 자아를 표현하고자 하는 관객들은 실상 다른 곳에 자아를 의탁하는 서비스를 받는다. 나는 ‘콜리그’가 자아 표현에 대한 대안적인 보상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별점을 찍고, 평론가의 말을 받아 적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는 나 자신을 소비자로서 한정 짓는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기능은 자아를 무너트리고 재건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에 다분히 폭력적인 순간을 요구한다.

하지만 소비자로서 ‘나’는 뭐랄까… 그는 ‘로너’가 아니다.

‘콜리그’는 ‘로너’가 각자의 보상체계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플랫폼이 갖고 있는 중앙집권적인 체계는 콜리그에 없다. 애초에 콜리그는 조금 더 게시판에 가까운 성격이다. ‘콜리그’의 소개글은 아래와 같다.

“소용돌이, 즉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구멍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우리가 생각하는 문화의 형상에 제일 가깝습니다.

그것은 무차별적인 식욕처럼 손에 집어 드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삼킵니다. 그것은 무늬, 운동, 패턴이므로 고정된 정체성이나 역사적 맥락과 무관히 어디에서도 통용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소용돌이는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중앙정부로 권력이 편향되어 집중되는 한국의 정치 체계를 분석하기 위한 개념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 소용돌이는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나선, 〈사이코(Psycho)〉에서 배수구로 핏물들이 휘감기며 생기는 무늬입니다. 이처럼 소용돌이는 개별적인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성의 형상입니다.

콜리그는 이러한 형상을, 다시 말해 소용돌이의 패턴과 운동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영화비평을 보내는 독자에게 보내는 메일링 서비스로 출발했던 콜리그는, 팀블로그라는 실험을 거쳐, 모든 이들을 위한 비평공유플랫폼으로 나아갑니다. 비평공유플랫폼으로서 콜리그는 지금의 문화에 소용돌이를 형성할 수 있는 구멍을 뚫고자 합니다. 여기서 구멍은 구조동형성을 지녔지만, 몇 가지 갈래로 나뉘는 상이한 구멍들을 지칭합니다.

별의별 수를 쓰면서 온갖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예술향유자들의 마음 내부에 뚫린 구멍,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빨아들이려는 문화로서의 구멍. 그리고 두더지로서 관객-작가들은 이 구멍들을 자유로이 오가고, 또 통로이자 출입구인 구멍을 팝니다. 망치는 소용없습니다. 콜리그는 지금 지하로 진입하며, 미래의 동료가 될 이(지금 이 소개글을 보는 독자)들에게 지하로의 여행을 권유합니다.

그간 콜리그는 영화, 음악에 비중을 두었지만, 플랫폼 콜리그는 문학, 미술, 영화, 음악 등 모든 문화 관련 분야에 열려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선 절대 뒤돌아 보지 마세요.

코를 흙에 처박은 눈먼 두더지처럼 행세해야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 두더지와 로너.

나는 두 가지 형상을 들어 콜리그 참여자들, 혹은 자아 표현으로서 (역설적으로) 자아를 무너트리려는 이들과 마주하고자 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리카르도 피글리아(Ricardo Piglia)는 톨스토이(Lev Tolstoy)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1 톨스토이의 아내가 톨스토이의 일기를 발견한다. 일기에는 그토록 가까웠던 아내조차도 모르는 톨스토이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그의 성욕, 욕구, 충동이 가득 적혀 있었고, 아내는 톨스토이의 자아를 마주했다. 내밀하고 추잡한 비밀은 글을 통해 정제된 표현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그러한 글이 톨스토이의 머릿속에만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의 마음을 죽을 때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가 고독하다면, 그의 내면과 외면에서 벌어지는 투쟁 때문에 그럴 터다. 글이란 그 경계에 있다. 콜리그에 글을 투고한 두더지(그들을 만약 비유적 형상에 기대 설명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들은 특정한 지식을 전파하려는 목적이 없다. 오히려 식욕과 같은 자동적 충동에 의해 글쓰기를 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쓴 글들은 무엇보다도 어딘가를 지시하는 손가락과 같다.

“어디엔가 무엇이 있다! 그쪽은 여기야.”

나는 콜리그에 게재된 글들을 전부 그렇게 읽는다. 지식생산은 부차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대신에 콜리그는 글쓰기, 즉 자아표현에 관한 욕동들이 날뛰는 현장에 가깝다. 나는 읽는 사람도, 글 쓰는 듯 읽기를 바란다. 이 싱거운 표현은 글쓰기의 교본에서 나오는 교훈을 의도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독자는 글을 쓰는 사람의 내면을 따라간다. 그때 글쓰기는 하나의 선이다. 동시에 필자는 자신도 의도하지 않았던 선들을 펼쳐 놓는다. 필자도 자신이 누군지 정확히 모른다(넌 알아?). 독자는 필자와 그의 무의식이 협동해서 그린 선들을 따라가서 어디인가로 도착한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콜리그의 독자와 필자는 ‘이상주의자’다. 분명한 이념을 기반으로 한 신앙인이라기보다는, “못 먹어도 고(go)!”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이 글 전부가 ‘모두’에게 훌륭할까? 또 훌륭해야 하나? 대다수의 필자들은 위에서 언급하나 ‘프로페셔널 저자’를 꿈꾼다. 그건 모두가 그렇고, 글 쓰는 사람이 커리어를 추구한다 해서 비난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하나의 압박처럼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절대 흥미롭지 않은) 일화 하나를 들려줄까 한다.

내 친구가 있다. 실험영화나 동북아시아 영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나이 든 시네필과 만나 극장 건립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지원금도 타야 하고, 이걸 어떻게 연계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친구는 시네필에게 방법을 묻는다.

“야, 뭘 고민해. 그냥 인생 태우는 거야. 뭐 그리 재고 있냐?”

친구는 대화를 회고하며 허탈하게 웃는다. 나이 든 시네필의 말처럼 그 옛날의 예술계가 그랬듯, 특정한 계에 편입되는 대신, 새로운 장을 만드는 멋진 실천을 하는 게 더 옳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살씩 먹을수록,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늘어간다. 자아 표현, 글쓰기, 영화 관람은 다소 사치스럽게 보인다. 나이 든 시네필이 반문할 수 있다.

“그것들이 왜 사치스럽게 보이지? 그냥 하면 되잖아.”

폐허에서 건물을 세우는 것과, 건물들이 빽빽한 곳에서 건물을 사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점차 확신을 잃어간다. 내가 쓰는 것이 나의 삶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 기분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나 자신과 정말 상관없는 일을 하는 것 같아서.

사고방식은 이렇게 흘러간다.

영화 관람→글쓰기→생업으로 이어지지 않음
영화 관람→글쓰기→의미 검토(취미 vs. 더 지속할 것인가?)

나와 내 꿈이 점점 멀어지는 일은 이처럼 비관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경쾌한 공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나에게 여러 존재를 제공한다. 나를 이종(異種)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이는 영화감독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가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에서 “진리는 하나의 꿈이 아니라, 여러 꿈 안에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킨다. 글쓰기는 다른 꿈을 만드는 행위 중 하나다. 그것은 두더지가 굴을 파는 방식처럼 무차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한 명의 내면을 외부로 꺼내 들어 중립적 사물로 만든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글보다 중요하고, 이로 인해 글의 퀄리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덴마크의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는 단도직입적으로 “쓰레기”를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폰 트리에의 이 발언은 〈다섯 개의 장애물(The Five Obstructions)〉이라는 폰 트리에의 작품 중 유일한 다큐멘터리에서 나온다. 트리에가 평소에도 존경하던 감독 요르겐 레스(Jorgen Leth)는 슬럼프에 빠졌다. 쉽지 않다. 그는 쿠바에서 은둔하다시피 한다. 트리에는 존경하는 영화감독이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한다. 그는 레스의 영화적 재활치료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레스가 자신의 초기작을 다시 리메이크할 것이다. 대신에 폰 트리에가 제안한 규칙에 따라서 만들어야 한다. 12프레임으로 만들어야 하며, 애니메이션으로 바꿔야 한다, 등등. 폰 트리에가 제안한 ‘장애물’ 중 가장 어려운 미션은 ‘비참한 이들을 이미지로 보여주지 않은 채로, 그 비참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레스는 실패한다. 폰 트리에는 잘 만든 영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일단 먼저 장애물을 맞이한 채로 쓰레기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먼저 쓰레기를 만들어볼 것.

형편없어도 충분하다. 당신만의 규칙이 있으면 된다. 허들을 넘고, 장애물을 통과한다면, 그걸로 그만이다. 아름다움이 추가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하지만 아름다움은 1순위가 아니다. 당신의 마음, 당신의 의지, 결행이 1순위다.

우리는 제도라는 것을 상상할 때, 어떤 이미지를 상상할까? 나 같은 경우에 걸어가는 사람을 어딘가로 이끄는 압력을 상상한다. 혹은 ‘디자인 용어’를 빌리자면, 멘털 모델. 우리가 컴퓨터를 비롯해 IT기기를 다루는 데 디자인은 우리에게 ‘예상’을 던져준다.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옆으로 움직이면, 화면이 전환될 것이라 예상한다. 예상이 맞으면,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또 다른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디자인은 멘털 모델을 만든다. 제도는 내부에 다양한 언어들을 ‘멘털 모델’에 기반해 배열한다. 어떤 언어는 제도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비평가는 자아 표현에 직접적인 검열을 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도가 강요하는 규범과 기대경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악하지만은 않으며 오히려 따스하고 편안한 편이다. 제도는 공동체다. 제도는 연대다. 제도는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제도에서 쓰레기는 용인되지 못한다. 예술가와 비평가는 자신의 자아표현, 끝없는 글쓰기의 충동에서 얼마간은 자신을 잘라내야 한다. 나는 한동안 제도 자체보다 ‘시장’을 미래로 바라보았다. 제도가 강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국가(다분히 우리를 보호하고자 하는)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상품을 만드는 기업,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는, 가격이라는 중립적인 신호를 보고 거래에 나서므로, 훨씬 더 공정한 공간에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근래 나는 이 생각도 고쳐 먹었다. 일단 시장을 관장하는 기업도, 소비자도 일관적이지 않으며, 어떤 지점에선 그 흐름은 훨씬 더 변화무쌍하다. 제도는 ‘국가의 입맛(은밀한 취향)’에 맞춘다 치면, 시장은 더 많은 취향의 교류를 강제한다. 어쩌면 어떤 이의 눈에는 제도보다 시장이 낫다는 주장이 하나보다 둘이 낫다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양성을 재검토해야 한다. 이른바 다양성을 옹호하는 첫 번째 목소리는 그것이 사회의 다이내믹한 운동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어떤 계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보다 나은 둘, 둘보다 나은 셋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술적인 의미의 다양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다양성을 정의하는 방식은 정상성에 도움이 되는 동력 정도로 그친다. 그 다양성은 일반적인 평균을 지탱하고, (정상이면 비정상도 포괄해야지”와 같은) 그것의 건강함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다.

문화다양성법령은 ‘다양성’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1. “문화다양성”이란 집단과 사회의 문화가 집단과 사회 간 그리고 집단과 사회 내에 전하여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며, 그 수단과 기법에 관계없이 인류의 문화유산이 표현, 진흥, 전달되는 데에 사용되는 방법의 다양성과 예술적 창작, 생산, 보급, 유통, 향유 방식 등에서의 다양성을 포함한다.”
“2. “문화적 표현”이란 개인, 집단, 사회의 창의성에서 비롯된 표현으로서 문화적 정체성에서 유래하거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 예술적 영역 및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다양성 추구는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외국인’처럼 정규분포에 색다른 뉘앙스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다양성에 정규분포와 평균값을 바꾸는 역할까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선 프랑스 철학자들의 면밀한 분석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평균을 제도로 이해해도 좋다. 제도는 사람, 기관, 자원을 배분하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이곳은 예상 가능한 안정성을 제공한다. 예컨대 우스갯소리 중 하나로 공공기관에 시중에 떠도는 ‘밈’이 사용된다면, 그 밈의 유통기간이 끝났다는 말이 있다. 밈은 급작스레 나타나서 세를 불리고, 또 금방 사라지는 흐름에 올라탄다. 밈의 생애주기 끝에 공공기관이 있다는 말은, 공공기관의 콘텐츠가 그만큼 일반적이고 규범적인 언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제도는, 공공기관-계-사기업로 이뤄진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가려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되, 그러한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퀄리티는 빼어난 작품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글쓰기가 갖고 있는 자아표현이 얼마간은 감쇄하는 것을 목격한다. 앞에서 글쓰기가 자아의 결함까지도 노출시키는 자아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자아표현은 의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차원이며, 이는 저자 자신도 모르는 자동적인 글쓰기로서, 저자도 예측하지 못했던 유토피아로 독자를 이끈다. 무의식의 글쓰기, 혹은 무의식으로서의 글쓰기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제도가 가하는 예측 가능성이 글쓰기의 다른 측면을 억압한다고 느껴질 만하다. 물론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끝없이 두 갈래로 이어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국가가 주최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볼라뇨(Roberto Bolaño)도 시가 주최하는 문학상에서 수상했다. 나는 여기서 ‘새로움과 실험정신, 혁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제도가 만드는 경로는 커리어를 요하는(글쓰기를 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다) 필자가 선택할 수 있는 미적 방법론의 선택지를 좁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의미하는 제도는,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가 힘써서 새로이 갱신하고 개혁해야 할 대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글쓰기라는 충동을 커리어 패스라는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리비도 경제를 일컫는다.

나는 어떤 것도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못하겠다. 그저 글 쓰는 사람이 있다. 저 글 쓰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어울리지 못하는 글을 썼다. 그 글은 콜리그에 올라간다. 모두들 일정하게는 로너다. 모두들 일정하게 두더지다. 이들이 어디선가 만날 것이다. 굴을 파는 필자, 이곳저곳을 유목하는 필자, 콜리그는 그들이 만날 수 있는 공유지이자 잠정적 자율지대일 뿐이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제언을 건넨다. 하단의 글을 2022년 겨울의 매니페스토라고 바라봐주어도 좋다.

1) 자주영화, 자주예술, 자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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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영화에 관한 이 글을 읽고 나서, 자율성에 대해 생각해봤다. 자율성은 무엇일까? 글 쓰는 사람으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율성을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하지 못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글쓰기란 혹은 예술 창작이란 일련의 자동적 충동에 기반한다. 그것은 ‘최면’과 같은 의미를 띤다. 어떤 쾌락과 즐거움, 향유를 향한 자율성,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 아닌 나’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탈출구다. ‘독립 영화’에 담겨 있는 ‘독립’의 의미가 퇴색하는 오늘날, 단지 즐거움을 향한 충동을 예술의 태도로 삼는 건 무책임하고, 무모한 일일까? 나는 우리가 내는 글이 항상, 우리가 맞닥트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획이 담겨있는 매니페스토였으면 좋겠다. 그것은 충동이 흘러가는 도주선처럼 보일 것이다. 구체적인 안을 내놓으라고, 어떤 이들은 요구한다. 구체적이라고? 여기 담겨 있지 않은가. 계속 흘러가는 것.

2) 미스터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재능 있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앙드레 지드(Andre Gide)의 「위폐범들(Les faux-monnayeurs)」은 인간이 ‘걸어 다니는 모순’임을 증명하는 인증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오락가락하는 인간성 내면의 풍경을 가리키는 것일까? 하이스미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살인행위’를 그리는 이유는 그것에는 동기나 원인이 부재하는 신비로움이 존재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적 맥락으로 미스터리를 개봉하면 할수록, 당신도 느낄 것이다.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적인 것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분해되고 변형된다. 그것이 미스터리다. 이 미스터리를 보존하려는 방식은 역설에 있다. 그러니까 무도회장에선 교훈을 거부하길. 남는 건 윤무(輪舞). 데이비드 보위는 신문이나 책을 오려내, 보이는 단어를 가지고 작사를 한다고 한다. 극단적인 임의성은 미스터리를 낳는다. 미스터리는 침묵, 한숨, 어둠을 동반한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과 예술을 통해 나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롭고 완전하게 표현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내 두 팔, 침묵, 망명, 술수를 이용할 것이다.2

침묵, 망명, 술수.

3) 일기

일기를 쓴다. 일기장 예술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글 쓰는 사람은 항상 일기 쓰는 사람이다. 일기장 예술은 힐난의 대상이다. 자신을 표현한다는 명목은 유치하기 때문이라서? 하지만 리카르도 피글리아는 다르다. 그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베세(Cesare Pavese)는 “실패의 권위”를 말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그 문구는 피츠제럴드로부터 온 것이다) 파베세의 삶은 그가 쓴 모든 글은 비밀을 품고 있고 또한 어떤 복수의 장소라는 것을 증명하므로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그 비밀은 항상 상처(무력, 알콜중독, 자기 파괴)이다. 복수란 삶이 작가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속죄다. 시인은 최종 판결까지 자신의 삶을 소비하는 고통 속에서, 자신이 생산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이는 단어의 정화를 위해서 고통을 요하는 기이한 화학이다. 이처럼 신앙자들이 종교-경제에서 고통의 효용을 발견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표현-경제에서 고통을 사용하는 방식을 발견하는 주인공은 작가다.”

현실은 항상 상처를 입힌다. 우리는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를 아래로 이끄는 본성의 중력이 되어버린다. 현실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우리를 작살내곤 단 한마디 없이 침묵한다. 파베세는 현실에서 실패했다.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현실의 실패에 대한 복수로 파베세는 글을 썼다. 우리는 일기장 예술이라는 힐난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일기장은 현실의 실패를 만회하는 장소로서, 인생을 다시 사는 법을 알려준다.

인생사용법 : 그러니 우린 글쓰기=일기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4) 타협

영화는 얼마간, 복잡한 상세명세서를 갖고 있는 산업이고, 예술이다. 수백 명이 참여하며 수백억의 예산규모를 갖고 있는 산업이다. 이곳에서 타협을 안 하기란 불가능하다. 히치콕(Alfred Hitchcock)은 쇼맨이었다. 그는 방송에 출연했다. 영화를 판매했다. 그는 대머리였고, 배불뚝이였다. 그는 유쾌했고, 타협주의자였다. 그는 배우를 인형처럼 다뤘고, 오만했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를 찍었다. 우리는 어떤 갈래에 선다. 커리어에 투항할 것인가? 아니면 비타협주의자로 위대한 예술가로 남을 것인가? 우리는 갈팡질팡한다.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는 평생을 박스오피스 바깥에서, 말년의 니콜라스 레이(Nicholas Ray)처럼 비타협적 영화를 만들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그는 조지 루카스(George Lucas)만큼은 아니지만, 부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타협할 상황이란 무엇일까? 제도는 강요하지 않고, 유인한다. 사람들은 밀어붙이지 않고, 회유한다. 강요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성공의 유혹일 것이다. 혹은 안정에 대한 유혹. 그러나 조금 더 게임의 양상을 복잡하게 바꿔보자. 단지, 제도와 반(反)제도라는 이분법 구도를 채택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창작에서 독자들, 혹은 자기검열과 마주하는 창작자가 마주하는 다양한 선택지로 바라보자. 이는 바둑과 닮았다. 집을 포기하고, 집을 사수한다. 집을 내주고, 집을 사수한다. 바둑에서 목표는 승리다. 하지만, 글쓰기에서 목표란?

글쓰기=일기이므로 그것의 목표이자 승리는 자아표출이다.

그것은 ‘나 아닌 나’를 나로 대체하는 일이며, 비정하고 냉혹한 현실에 복수하는 것을 꿈꾼다.

히치콕에 관한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히치콕을 교화시키려고 거짓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넣은 일이다. 부친은 꼬마 히치콕이 선해지길 바랐지만, 히치콕에게 그 일은 두려움과 공포를 선물한 평생의 상처가 됐다. 히치콕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복수하기 위해 영화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복수가 가능하다면 타협 따위야.

5) 게임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는가? 나는 생각했다. 도저히 일과 즐거움을 병행할 수 없는데, 자아표출로 인해 얻는 보상은, 유무형의 물질적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임의 승리는 무엇을 보장할까?

5-1) 쾌락: 게임 진행 시의 쾌락, 게임 승리 후의 아드레날린

게임의 패배는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까?

5-2) 게임 속의 죽음: 게임은 가상의 공간이다. 그것이 스포츠일 때조차 게임은 가상을 전면에 내세운다. 권투 시합에서 죽음이 일어났다 해서 우리는 권투선수를 과실치사로 처벌할 수 없다.

게임의 대가는 작지만, 쾌락은 크다. 보상체계의 양 극단을 벌리는 것이 게임의 성패를 가른다. 하지만 글쓰기라는 게임은 정반대다. 그것은 실수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쾌락은 항상성을 지키며 그 자리 그대로 있다. 게임 속의 죽음은 때때로 실물보다 크다. 글쓰기는 스릴 넘치는 게임이다.

인생사용법 2 : 그것이 우리가 현실과 싸우는 방법이다.


  1. Ricrado Piglia, The Diaries of Emilio Renzi: Formative Years, trans. Robert Croll, Newyork : Restless Books, 2017. 

  2. James Joyce,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젊은 예술가의 초상),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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