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에 대하여

이동휘
이동휘는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 을 함께 쓰고,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번역했다. 워크룸 프레스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https://economic-writings.xyz

1. 들어가며

처음에는 세마 코랄이라는 미술 연구 플랫폼에 어울릴 만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미술에 대해 뭐라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았다. 현재 미술 씬의 어떤 문제(?)를 찾아 지적해야 하나? 미술 창작의 새로운 논리(?)를 발견하고 제안해야 하나? 하다못해 전시라도 하나 보고 와야 하나? 그렇지만 나는 ‘씬’ 같은 것을 잘 알지 못 할뿐더러 미술 창작에 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고, 전시 보기를 크게 즐기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쓸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나는 세마 코랄에 어울리는 필자가 아닌 건가 싶어서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결국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쓰기로 했다. 사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쓰는 것 외에는 나에게 아무런 도리가 없다. 유성원 작가도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들에게 읽힐 만한 글을 써내고 싶다. 하지만 강요하거나 증명하려는 마음으로 해내려고 하면 안 된다. 어차피 안 써진다. 어차피 안 써지는 것을 남을 의식하면서 쓸 필요는 없다.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한 문장씩 써나갈 수 있을 뿐이다.”1 그래서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것, 즉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으로 쓸 것이다. 그냥, 말하자면 일기를 쓰듯이 써볼 것이다.

나는 ‘어려움’이라는 키워드로 나의 짧은 텍스트 창작 과정을 훑어보고자 한다. 여기서 ‘어려움’이란 ‘작품이나 이론 등 어떤 대상에 관하여 수용자가 그것을 마주했을 때 추가적인 행위에 참여할 여지가 없거나 많지 않다고 느낌’을 의미한다고 약속하자. 나는 오랫동안 무언가 어려운 것을 마주하고, 그것을 어렵다고 느끼고, 그 어려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왔던 것 같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꾸준하게 겪게 되는 그런 과정들은 나의 창작 과정에서 언제나 중요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2. 어려움을 소리내어 말하기

2022년 1월 나는 네이버 블로그에 「『분더카머』 어려움 (읽기-어려움)」(이하 「읽기-어려움」)이라는 짧은 글을 써서 트위터에 올렸다. 『분더카머』라는 책을 내가 구입한 것은 2021년 말이었고, 「읽기-어려움」은 일종의 독후감이었다. 나는 『분더카머』라는 책을 읽는 것이 어려웠다. 그것이 이 책의 독서 과정에서 내가 느낀 가장 뚜렷한 감상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 관련된 출판사 소개글과 추천사, 짤막한 리뷰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느끼는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 책을 둘러싼 출판사, 추천인, 많은 독자들은 나의 어려움을 전혀 해결하고 있지 않고 있었고, 나는 그 점을 이상하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읽기-어려움」에서, 해당 책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대신, 출판사 소개글, 추천사, 몇몇 리뷰들을 갈무리하여 ‘읽기 어려움’이라는 나의 해소되지 않은 감상을 토로했다.

“요컨대 『분더카머』는 출판사의 수사(‘분류할 수 없는 책’), 추천인의 수사(‘완결될 수 없는 책’), 독자의 수사(‘깊은 책’), 이렇게 삼중의 수사에 의해 감싸져 있다. 뒷날개에 있는 말들이나, 출판사 책소개나, 이를 추천하는 글이나, 이 책에 대한 서평도 다 조금씩, 뭐랄까, 아무 내용이나 알맹이가 없다. 다들 하는 말이 ‘알 수 없다’라는 것뿐이다. ‘알 수 없으니 좋더라’라고들 생각하는 건가.”2

그리고 나의 이러한 감상은 지금 이 책을 둘러싸고 있는 수사들보다 좀 더 명료한—혹은 바라건대 솔직한—비평이 이루어지기를 요청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나는 『분더카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필자건, 출판사건, 추천인이건, 독자들이건, 서평가이건, 이 책에 상을 준 사람들이건, 그들 중 적어도 누군가는 좀 의욕을 가지고 이런 감상에 대해 대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3

이 글은 내가 썼던 글들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설 명절이어서 그랬는지 조회수와 리트윗이 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그 반응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비판적인 반응들은 주로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내가 (이미 이 책에 대한 호감을 표한) 독자들을 조롱하고 무시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려움’의 원인을 스스로(제대로) 찾지 않는다(혹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어려운지 스스로 대답할 능력이 없는(ir-respons-ible) 무능력을 해당 책에 투사하기에 무책임하다(ir-responsible)’는 신랄한(!) 언어유희도 있었다.] 반면에 좋은 반응도 있었다. 일단은 고맙게도, 글이 재미있다고 해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앞선 비판적인 반응들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나를 대신하여, 그리고 나보다 더 잘 대답해 주었다. 예를 들면 모 트위터리안은 「읽기-어려움」을 “독자의 반응만을 가지고 어느 개인의 창작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라고 말하며, 이처럼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을 갖는 태도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4

내 생각에, 「읽기-어려움」은 분명 아주 사려 깊은 글은 아니었다. 이것은 너무 빨리 썼거나 충동적으로 쓴 글이기 때문이라기보다, 해당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혹은 읽지 못하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서 언급했던 트윗처럼) 「읽기-어려움」이 어떤 텍스트의 수용 환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자평한다. 해당 텍스트와의 ‘정면 대결’은 회피하고 있더라도, 그 텍스트를 완전히 외면하거나 모호한 말을 더하지 않고 그 텍스트를 둘러싼, 말하자면 ‘비평 담론들’을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추가로, 「읽기-어려움」은 무언가를 읽고 느낀 어려움이라는 정서를 입 밖으로 꺼내보았다는 데에서도 나에게 큰 만족을 주었다. 「읽기-어려움」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 대부분이 여기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어렵다고 느낄 때 ‘내가 부족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스스로 ‘돌파’하거나 말없이 회피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나는 「읽기-어려움」을 쓰고 나누며 무언가를 읽고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서로 공유하고 논쟁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3. 어려움을 분석하고 이용하기

2021년 4월부터 이여로와 나는 공저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획에서부터 우리는 예술 창작과 예술이론의 어떤 근본적인 ‘난점’을 해결하고자 했고, 그중에서도 나의 목표는 예술이론–흔히 ‘미학’이라고 불리는 연구물들–을 성립시키는 ‘예술이론성(-性)’의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1년여의 집필과 편집 과정을 거쳐 우리의 생각은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책의 본문 맨 첫 글로 나는 「이토록 어려운 예술이론」(이하 「이토록 어려운」)을 수록했다.

제목에서 말하고 있듯, 예술이론은 어렵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어려움을 대하는 학문의 자세는 별로 ‘학술적’이지 않다고 나는 느꼈다. “그러나 개인들의 독서 상황만 놓고 볼 때, 예술이론에 대해 어렵다, 어렵다 말하는 것은 그저 초심자의 참을성 없는 불평으로만 치부되곤 한다. 이론으로 가는 길은 당연히 어렵고 그러니 걸을 수 있는 자가 걸어갈 뿐 누구도 불평할 필요는 없다면서 말이다.”5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예술이론의 어려움은 각 연구자의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술이론의 어려움을 분석의 대상으로 생각해 보고 싶었다. 예술이론의 어려움이라는 현상의 원인을 알고 싶었고, 또 그 현상을 이론적으로 분해하여 이용하고 싶었다. “그런데 예술이론이 어렵다는 것을 그냥 자연스러운 부대 현상처럼 받아들이는 대신 예술이론의 핵심에 가까운 무엇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예술이론의 ‘난해함’이 혹시 예술이론에 관한 어떤 중요한 무엇을 말해줄 수는 없을까? 그 불평이 기어코 예술까지도 이론화해버리는 인간의 정신에 접근할 가장 일차적인 단서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6 결국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예술이론이 어렵다는 것은 곧 그 이론이 타당한지를 독자가 즉각 알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생각에, 예술이론이 다루는 예술 작품이라는 것이 개념상 사적(private)인 데다가, 예술이론 자체가 그 이론 대상인 예술 작품과 예술 창작에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이론이기 때문이다(나는 이를 ‘담론적’이라고 불렀다). 즉 자연은 자연의 이론을 반영하지 않지만, 예술 작품은 예술이론을 반영한다. 이 점에 예술이론의 고유한 성격이 있고, 예술이론의 어려움은 바로 그것의 고유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이것이 내가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에서 예술이론의 어려움이라는 나의 느낌을 분석하여 도출한 결론이었다.

물론 나는 예술이론의 어려움에 대한 나의 분석이 충분한 것인지 완전히 확신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나는 예술이론이 어렵다는 감상을 ‘무책임함’, ‘능력 없음’ 탓으로 돌리거나 어떤 결론으로 삼는 대신에 새로운 이론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내가 생각한 예술이론의 어려움의 원인은 예술이론이 다루는 예술 작품이 사적이라는 점에 있었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에 객관적인 예술 대상뿐만 아니라 수용자의 해석까지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7 그리고 이를 통해서 나는 예술이론이 예술 작품을 ‘정확하게’ 기술해야 한다는 경험주의적 의무에서 면제될 수 있으며, 예술이론은 일종의 ‘언어적 공동체를 만들기’ 작업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8

4. 어려움을 지나치기

2022년 말에는 내가 번역한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라는 게임미학서가 출간되었다. 저자인 C. 티 응우옌은 여기서 ‘게임이란 행위성을 매체로 하는 예술이다’라는 간명한 주장을 제시한다. 이때 말하는 게임이란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 행위’를 말하는데, 소위 승패 혹은 성공과 실패의 규정이 있는 게임이라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책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게임을 할 때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견지하는 동기 구조가 역전된다. 결과를 위해 수단을 선택하는 일상생활의 동기 구조와는 반대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수단, 즉, 분투(striving)9의 활동을 경험하기 위해서 결과(일회용 목표)를 장착하게 된다. 이러한 동기 역전의 요인은 게임에서 나타나는 가장 흥미롭고도 고유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행위성이 두 층위(장기적 행위성과 일시적 행위성)로 중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당장 눈앞에 놓인 목표를 최종적인 목표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목표를 추구하는 분투 활동이 진정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게임이 끝난 뒤 장기적으로는 그 게임 속 목표를 자유롭게 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게임을 제대로 ‘즐겼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행위적 중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장기적 행위자는 일시적 행위자의 분투 활동을 ‘미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때 게임은 예술이 된다. 요컨대 게임은 ‘행위성을 매체로 하는 예술’이다.

응우옌의 주장을 통해서 우리는 게임의 ‘본질’에 대해 매우 명료한 이해를 할 수 있다. 게임이란 제약과 목표로 이루어진 자발적 행위라고 정의함으로써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아주 많은 게임을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흔히 게임이론이 주목하는 온라인 컴퓨터게임이나 스포츠 철학이 주목하는 프로 스포츠 경기 이외에도, 아주 일상적인 수준의 보드게임, 카드 게임, 파티 게임, 생활 체육, 심지어는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바보 게임이나 술자리 게임까지도 우리는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의 가치를 (서사, 영화, 논변 등) ‘게임이 아닌 것’을 통해 편의적으로 정당화하기보다, 실제 게임 플레이의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게임을 이해하도록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우리를 이끈다. 더 나아가서 게임을 통해서 행위성 자체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기도 하다. 인간의 행위성은 단일하지 않고 중첩되어 있으며, 이는 소수의 예외 상태가 아닌 (적어도 게임 활동만큼이나) 매우 일반적인 현상인 것이다.

재미있게도,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응우옌은 논증의 과정을 치밀하게 전개하는 것과 별개로 아카데미적 장황함을 거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행위성 개념을 생각해 보면, 서양 철학으로만 범위를 한정해도 행위성 개념 및 의도, 동기, 의식 등 주변 개념에 관한 복잡한 연구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응우옌은 『게임: 행위성의 예술』 서두에서 행위성을 ‘의도적 행위 혹은 이유를 가진 행위’라고 간단히 규정하면서 이를 둘러싼 연구사에 독자를 끌어들이기를 기꺼이 거부한다. “나는 결코 이것이 행위성에 관한 완전한 설명이라고 전제하고 있지 않다. 나는 종이접기가 종이를 접는 것을 매체로 삼고 있다는 유용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종이’에 관한 온전한 정의 혹은 형이상학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게임이 행위성의 매체를 사용한다는 유용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행위성’에 관한 한 가지 특수한 철학적 설명을 정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10 이 외에 응우옌은 예술과 게임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도 예술 정의에 대한 역사를 훑기보다 예술에 대한 간명한 정의만을 규정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응우옌의 이러한 경쾌한 태도는 역자로서 나를 매혹시켰을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의 독서를 돕고 책의 시의성을 더욱 빛나게 했다. 나는 「역자 후기」에서 그에 대한 소회를 밝혀두었다. “또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빠르고 가볍다. 게임의 진면모를 보이겠다는 고전적인 목표를 견지하는 반면에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라며 달려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설명하기 전까지 용건을 말하지 않고 버티면 독자는 소진된다. ‘총정리’는 독자에게 별로 줄 것 없는 ‘훈장님들’이 생각하고 대화하기를 회피할 때 사용하는 핑계일 따름이다.”11

내 생각에, 이러한 C. 티 응우옌의 태도는 그의 다른 글 「예술은 게임이다: 왜 중요한 건 (예술과의) 고투인가」에서 내용적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 응우옌은 예술에 대한 감상자의 참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기술한다. 일상의 다른 영역에서라면 우리는 무언가를 ‘알기’ 위해 전문가에게 기댄다. 약에 관해서는 약사에게, 자동차에 관해서라면 기술자에게, 법에 관해서라면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문가의 증언을 나의 견해보다 더 믿고 수용한다. 반면 예술에서는 상황이 같지 않다. 예술작품을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는 전문가에게 기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술에 관해 진짜 옳은 답을 내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에게 의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지금, 베토벤이 나에게 온갖 풍부하고 놀라운 느낌과 반응을 전달하려고 하는데, 나는 베토벤이 뭘 하는 건지를 이해하는 데 틀림없이 필요해 보이는 음악이론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만약 베토벤에 관해 옳은 판단을 내리고 싶다면, 클래식 전문가에게 의지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런 의지(deference)는 예술감상이라는 활동 자체에 있어 핵심적인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같다.”12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응우옌은 어떤 예술작품을 마주했을 때 감상자들이, 그 예술작품이 아무리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직접 맡아야 할 행위적 영역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보존한다. 응우옌의 글은, 우리가 예술에 있어서 직접 맡아야 하고 또 직접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흥미롭지 않은가? 예술작품이 아무리 감상자의 손을 훌쩍 벗어나버리는 것 같더라도, 결국 예술작품을 만나고 직접 맛보아야 하는 것은 결국 각 감상자 자신이다. 이것은 감상자를 격려하려는 말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5. 현대 미술의 어려움

그리고 이제 현대 미술에 관해 짧게라도 이야기해 보자. 조금 짓궂게 말하자면, 나는 현대 미술을 ‘소화’하는 데 실패했고, 거꾸로 현대 미술은 작품으로써 나에게 그 장르의 존재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현대 미술은 나에게 어떤 장르나 작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면 현대 미술은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현대 미술은 나에게 공간으로 존재한다. 가령 미술관이 존재하고 미술 교육 기관이 존재한다. 또 현대 미술은 이벤트로 존재한다. 전시가 열리고, 비엔날레가 열린다. 그리고 현대 미술은 사람으로 존재한다. 동료가 전시를 열고, 친구가 미술비평상을 받고, 지인이 비엔날레에 다녀온다. 말하자면 그뿐이다. 혹시 내가 게으르고 무식해서 현대 미술의 ‘중핵’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이제 현대 미술은 회화와 조각일 뿐만 아니라 사진이고, 영상이고, 기계이고, 설치이고, 행위이고, 액티비즘이고, 공연이며, 아카이브이고, 담론이고, 교육이 된 것 같다. 마르셀 뒤샹의 〈샘〉(1917)에서부터, 그게 아니라면 그 외의 어딘가에서부터, 현대 미술은 부정과 확장의 논리를 통해 ‘그 어느 것도 아닌 것’으로 소멸하거나 혹은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으로 형해화되는 것 같다.

나에게 현대 미술은 어려운가? 당연히 어렵다.

잠시 내가 좋아하는 글에 대해 말을 하자면, 한유리 작가는 산문집 『눈물에는 체력이 녹아있어』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서 이런 글을 썼다.

“책을 읽다가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순간이 너무 자주 반복돼서 큰 ‘현타’를 맞고 잠시 책을 덮은 채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이 괴롭고 아픈 멍청함 속에서 나갈 수가 없는지를 멍하니 생각하고 생각했다. 주장이 있고 전제가 있는데 주장을 읽을 때쯤에는 전제가 기억이 안 난다. 전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제를 왜 이해하지 못했느냐, 그것은 전제의 전에 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전제의 전제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내 주변의 공부 비슷한 걸 한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적게 읽고 적게 보고 적게 깨달은 사람 같다. 나 혼자 멋진 음악도 영화도 모르고 가장 값싼 취향을 가진 것만 같고 무식해서 참고문헌 없는 글밖에 못 쓰고 불안하고 싫다. 내가 무슨 말을 막 하고 난 후에 그런 말을 한 철학자가 이미 있었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 학자의 말이 내 아이의 형제가 돼서, 걔가 내가 모르는 곳에 있어서 손잡고 데려올 수 없는 듯한, 뭔가 눈앞이 깜깜해지고 막막해지는 기분이 든다. 무슨 말이냐면, 내 인생을 따돌린 세계가 있는 것 같다고.”13

이 멋지고 쉬운 글은 어떤 어려움에 의한 한유리 작가의 좌절과 자괴감과 불안함(‘내가 제일 적게 읽고 적게 보고 적게 깨달은 사람 같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필자가 무언가를 어려워하는 이유에 대한 분석(‘전제의 전제를 이해할 수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한유리 작가가 수시로 발견하는 “내 인생을 따돌린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 있는 텍스트로부터 나의 행위 영역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 즉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 우리는 ‘내 인생을 따돌린 세계’를 만나고 있다. 나에게는 『분더카머』가 그랬고, 수많은 예술이론이 그랬다. 이렇게 ‘내 인생을 따돌린 세계’를 만났을 때, 그 세계를 외면하거나 경외하는 것 이외에 우리가 스스로의 행위를 발생시킬 여지는 어떻게 발견될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나 나의 질문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현대 미술 또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어려우니까. 하지만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엔 어려운 것도 있는 법이다’는 일갈은 더더욱 소용이 없다. 다만 나는 우리가, 예술 안쪽 또는 바깥쪽에 서있는 동료 아마추어로서, 서로를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미술 기관이, 현대 미술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위할 여지를 만들고자 한다면, 마찬가지로 전시를 통해서든 출판을 통해서든 여기에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어려움을 소리 내어 말하고, 어려움을 분석하여 이용하고, 어려움을 지나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서로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 어려움을 향해서 혹은 어려움을 등지고서.14


  1. 유성원, 「스위치 켜기」,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파주: 난다, 2020), 75. 

  2. 이동휘, 「『분더카머』 어려움 (읽기-어려움)」, 2022, https://blog.naver.com/mollumbo/222635223236

  3. 이동휘, 「『분더카머』 어려움 (읽기-어려움)」. 

  4. 트위터 ‘문예지 소설 단평’ 계정, 2022년 2월 1일, https://twitter.com/litterphile_arc/status/1488182761177624585

  5. 이동휘, 이여로,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언어·이론』(서울: 미디어버스, 2022), 17. 

  6. 이동휘, 이여로,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언어·이론』, 17. 

  7. 이동휘, 이여로, 「예술은 사적이다」,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언어·이론』 참조. 

  8. 이동휘, 이여로, 「예술이론, 예술이론성, 언어」, 「배열a」,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언어·이론』 참조. 

  9.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게임을 설명할 때 단연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개념어인 분투는 말 그대로 ‘애쓰다’ 혹은 ‘고투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게임을 할 때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러한 게임 플레이를 ‘분투형 플레이’라고 한다. 분투형 플레이어는 분투 활동을 ‘위해’ 목표를 장착하고 또 폐기한다는 점에서 목표 자체에 큰 가치를 두는 ‘성취형 플레이어’와 구분된다. 또 분투형 플레이는 그 플레이의 가치를 분투 활동 자체에 두는지 혹은 분투 활동에 따라오는 것(예컨대 신체 건강)에 두는지에 따라 내재적 분투형 플레이와 외재적 분투형 플레이로 나뉜다. 

  10.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옮김(서울: 워크룸 프레스, 2022), 35. 

  11. 이동휘, 「역자 후기」,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346-347. 

  12. C. 티 응우옌, 「예술은 게임이다: 왜 중요한 건 (예술과의) 고투인가」, 이동휘 옮김, 이동휘 블로그, 2021, https://economic-writings.xyz/text/textblocks1/art_is_a_game.html

  13. 한유리, 「내 인생을 따돌린 세계」, 『눈물에는 체력이 녹아있어: 포기하지 못할 꿈의 기록들』(서울:중앙북스, 2022), 102-103. 

  14. 집필 과정에서 이 글을 함께 읽어준 슬, 의주, 태우, 대한, 유리 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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