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과 있음들에 대하여

윤여일
윤여일은 사회학자-작가이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로 베이징에서, 도시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교토에서 체류했으며, 제주대학교 학술연구교수로 제주에서 지내고 있다. 『물음을 위한 물음』, 『광장이 되는 시간』,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동아시아 담론』,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를 쓰고, 대담집 『사상을 잇다』를 펴냈으며,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어느 방법의 전기: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잡기』, 『일본 이데올로기』, 『사상이 살아가는 법』,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재일의 틈새에서』, 『사상으로서의 3·11』,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을 옮겼다.

없음있음들에 대하여

1. “거기에는 늘 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김남주가 아닌 또 하나의 목소리도 듣는다. 재일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아니, 오히려 우리야말로 북도 남도 아닌 하나의 조선”이라고 힘주어 외친 남자의 목소리다. 그 오사카 시인은 광주사태를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늘 내가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갈라진 해협의 거리가 아니라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이다. 시대에 짓눌리면서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무기’로 바꾸려 했던 또 한 명의 시인. 자신의 어둠을 향한 통절한 목소리.

이 글은 사쿠라이 다이조(櫻井大造)라는 일본의 연극인이 썼다. 여기서 ‘우리’란 ‘바람의 여단’이라는 1980년대 일본의 텐트연극집단을 말하지만, 이 대목은 넘어가겠다. 따로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대신 이 글에서 몇 가지 단어를 챙겨두고 싶다. 목소리, 재일, 감옥, 시인, 어둠, 그리고 존재.

이 글을 만났을 때 ‘그 오사카 시인’은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거기에는 늘 내가 없다.” 십수 년 전 어느 일본 연극인의 글에서 김시종의 시를 처음 접했다. 매 어절을 끊어가며 읽어 들어야 할 시였다. “거기에는 / 늘 / 내가 / 없다.”

수년이 지나 이 구절이 김시종의 『광주시편』에 수록된 「스러지는 시간 속」의 첫머리임을 알게 되었다. 시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늘 내가 없다 / 있어도 아무 지장 없을 만큼 / 나를 에워싼 주위는 평정하다

사건은 으레 내가 없는 사이 터지고 / 나는 진정 나일 수 있는 때를 헛되이 놓치고만 있다

이 시에는 강한 부재의 감각이 있었다. “진정 나일 수 있는 때”를 헛되이 놓치고 있다는 한탄이 있었다. 한탄의 밑바닥에 역사의 현장 속으로 진입하고 싶다는 갈구가 있었다. 그 갈구도 한탄도 부재로부터 연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 있던 자신이 고립당한 80년의 광주로 갈 수 없었다는 한탄이었을 뿐이라면 다음 문장으로 충분했다. “거기에는 내가 없었다.” 김시종은 그렇게 쓰지 않았다. ‘없었다’가 아니라 ‘없다’라고 현재형 동사를 가져오고, ‘늘’이라는 부사를 ‘거기’와 ‘나’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하여 이 문장은 과거의 술회에 그치지 않게 된다. 그는 여전히 거기에 없는 채로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부재하는 그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저 일본의 연극인이 쓴 글에서 단서를 찾는다면 “재일이라는 감옥”일 것이다. 재일在日. 일본어 발음 자이니치.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 혹은 조선인을 일컫는 말. 그런데 왜 재일이 감옥이라는 걸까. 그들이 일본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수난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2. 있음을 살다

김시종은 식민지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1세 혹은 그들이 일본에서 낳은 2세와는 달랐다. 그는 1929년생이다. 식민지기 제주의 보통학교에서 황국소년으로 자라나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4‧3 때 해방된 조국에서 남조선노동당 연락책으로 활동하다가 자신이 연루되고 사상자가 생긴 우편국 사건 이후 숨어 지내던 중 1949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배에 올랐을 때 청산가리를 품고 있었는데 한국 경찰에게 붙잡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 밀항에 성공해 조선인이었던 그는 한국인이 되지 않고 재일자在日者가 되었다.

이후 김시종은 반백년 넘게 자신의 사연을 숨기고 살았다. 일본에 오게 된 일을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지냈으며, 4‧3에 대해서는 그 오랜 시작詩作의 세월 동안 “읍내에서 / 산골에서 / 죽은 자는 / 오월을 / 토마토처럼 / 빨갛게 돼 / 문드러졌다”(「여름이 온다」에서)처럼 아주 드물게, 그것도 극도로 압축해 적었을 따름이었다.

김시종이 4·3을 두고 공적 발언을 한 것은 2000년이니 반세기가 지나서였다. 그는 4·3에 관한 침묵을 깨며 왜 침묵했는지도 함께 말해주었다. 남로당 연락책이었던 자신이 겉으로 드러나면 군사정권이 강변해온 공산폭동 운운을 괜히 뒷받침해 주민봉기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으며, 홀로 도망쳐 나왔다는 죄의식으로 말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으로 불법입국한 사실이 밝혀져 강제송환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2000년 1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4·3특별법이 통과되어 4·3이 역사적으로 복권되자, 그해 4월 그도 ‘제주도 4·3사건 52주년 기념강연’에서 청중들에게 4·3 때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한국 사회에서 4·3이 터부시 된다면 그 역시 여전히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재일이라는 감옥’. 이 표현에는 4‧3 때 밀항해 재일자가 된 김시종의 말 못 할 사정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는 광주로 대변되는 냉전의 남한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사건은 거기에 있으나 자신은 거기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여기, 일본 사회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숨기고 살아가야 한다.

‘재일을 살다.’ 이 명제를 김시종이 처음 제시했다. 재일은 ‘일본에 있다’를 말한다. 그래서 이 명제를 풀이하면 ‘일본에 있음살다’가 된다. 여기서 ‘있다’는 ‘있다’로 안착하지 못한 채 ‘있게 되었다’로 사정이 깊어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로 흔들리는 듯하다.

3. 부재의 재

김시종의 시를 처음 접하고 수년이 지나 그의 자서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를 번역하게 되었다. 책 제목의 번역 자체가 고민스러웠다. 일본어판의 제목은 ‘朝鮮と日本に生きる’다. 生きる는 ‘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에 붙은 조사가 보통 머무는 장소에 붙는 ‘で에서’가 아닌 ‘に에’다. 이것은 안착하지 못했다는/않겠다는 미묘한 조사 선택 같았다. 그래서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가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 살다”로 번역했다. 조사가 で가 아닌 に가 되면 ‘生きる살다’도 함의가 달라질 것이다. ‘거주하다’가 아니라 ‘살아가다’, ‘살아지다’, ‘살아내다’가 뒤섞인 울림을 갖게 되는 듯했다. ‘재일을 살다’라는 그의 명제가 그랬듯이 말이다. 거기에는 일본에 在하면서도 부재不在한다는 부유감이 있다.

그의 자서전은 구성상 세 덩어리였다. 식민지기의 황국소년 시절, 4·3, 그리고 밀항 후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간 시기. 그가 살아간 궤적은 단절의 사건(8·15) 이후의 있었음(4·3), 없게 되었음(밀항), 그리고 있게 되었음(재일)에 관한 이야기로 읽혔다. 그의 자서전을 번역해 출간하며 옮긴이 후기의 제목은 ‘부재의 재’로 달았다.

그의 자서전을 번역하던 2015년 무렵 나는 교토에서 지내고 있었고, 멀지 않은 고베에 계시는 그와도 오사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제주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로 향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여행차 두 번밖에 가본 적 없는 섬이었지만, 김시종이 떠나온 제주에서 살아보는 일은 왠지 거쳐야 할 과정 같았다.

4. 카메라와 함께인 사람

그렇게 2016년 3월 제주 살이가 시작되었고, 4월 3일 그의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그날 처음으로 4‧3 위령제에 갔다. 부슬비가 내리고 가라앉는 날이었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일반인들이 앞에 차려진 단에 헌화하던 무렵이었다. 뜻밖에 김임만 씨를 만났다. 그는 촬영 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작년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도 그는 카메라와 함께였다.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집단 거주하는 오사카 가마가사키의 삼각공원 여름축제에 갔던 때 만난 그는 촬영 중이었다. 그는 재일조선인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김임만 씨는 위령제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떠나간 묘소의 묘비들을 찍었다. 정확히는 묘비명들을 찍는 듯했다. 묘소라지만 시신도 묘도 없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 있을 뿐이다. 유족들이 이곳에 와서 찾는 것은 이름이다. 유족들은 비석에 가지런히 써 내려간 한자명들에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 김임만 씨는 무슨 생각을 하며 묘소를 찍는 것일까.

빗속에서 한참의 촬영이 끝나고 평화공원을 나오면서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고씨 할아버지 댁이라고 했다. 그는 내게 함께 가자고 했다. 그 할아버지에게 대단한 이야기가 있다며. 함께 가서 통역을 해달라고 했다. 그날은 그를 따라 고씨 할아버지를 찾아간다는 게 왠지 해야 할 일 같았다.

고씨 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두 시간 넘도록 4·3 때 겪은 고초를 들었다. 확실히 대단한 이야기였다. 내용이 파란만장해서기도 했지만 당시 일의 묘사가 너무도 세밀했다. 사실 김임만 씨가 고씨 할아버지를 찾아뵌 것은 4·3 때 고초를 듣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고씨 할아버지는 김임만 씨 아버지와 소학교 동급생이었다. 김임만 씨는 이따금 아버지에게서 4‧3 때 일을 들었는데 어딘지 기억이 토막 나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고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찍어서 그 영상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면 보다 분명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5. 뿌리 찾기

날이 어두워져 고씨 할아버지 댁을 나와 제주시로 돌아왔다.

그날이다 싶었다. 이번에는 내가 김임만 씨를 인터뷰했다. 제주에서 처음 맞이한 4‧3을 그렇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녹음기가 없어서 위령제와 고씨 할아버지를 촬영하려고 그가 가져온 카메라로 인터뷰를 녹화했다. 그는 삼각대를 설치하고 구도를 잡아 스스로 프레임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몇 년째 〈용왕궁의 기억〉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간의 경과가 알고 싶었다. 무엇보다 4‧3 평화공원과 고씨 할아버지 방문도 그 작업과 관련되어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용왕궁도, 4‧3 평화공원도, 그리고 어머니가 계시던 부엌도 모두 ‘기도의 공간’이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기도의 공간’을 따라 크게 돌고 있는 중이었다.

1920년대부터 제주에서 오사카로 사람들이 많이 건너갔고, 언젠가부터 그들은 제주에서 지내던 해녀제를 요도가와 강변의 한 부락에서 하기 시작했고, 그곳은 ‘용왕궁’이라 불렸다. 해녀가 물질하는 바다에 산다는 그 용왕 말이다. 용왕궁은 재일제주인들이 가족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굿당이 되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2000년대가 되어 용왕궁을 지키던 당시 심방(무당을 이르는 제주말)이 세상을 떠나자 오사카 행정은 불법점거라며 퇴거를 강요했다. 기도는 해도 되지만, 뭔가를 태우면 불법방화고, 강물에 흘려보내면 무단투기라는 식이었다. 결국 용왕궁은 2010년 8월 철거될 예정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임만은 용왕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용왕궁의 마지막 심방인 도요다 심방 집에 찾아가 종종 이야기를 들었다. 도요다 심방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 제주로 건너갔다가 열네 살에 홀로 오사카와 제주를 잇던 정기여객선 기미가요마루를 타고 돌아왔다고 한다. 나막신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서른여덟에 심방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해서 글을 못 쓴다고 한탄했다.

김임만 씨는 도요다 심방의 이야기를 듣다가 정작 어머니에 대해서는 많이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어머니도 1930년대에 태어났고, 읽고 쓰지 못한다. 어렴풋이 4·3을 겪고 오사카로 온 듯했다. 어머니를 알지 못하면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를 알 수 없다. 그 자각에서 〈용왕궁의 기억〉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로 번져갔다. 알고 보니 어머니도 그간 털어놓지 못한 곡절이 많았다. 그런 어머니의 이야기를 카메라로 담아내는 것은 자신이 어디에 왜 있는지를 알아가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고향 제주로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2006년부터 십 년째 카메라를 들고 어머니, 아버지, 도요다 심방, 고씨 할아버지, 용왕궁, 4‧3 평화공원처럼 타인과 타지를 배회하며 자신을 구성하는 내력, 사건, 사연, 장소들의 기억을 모아 재구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뿌리 찾기’라고 불렀다.

6. “왠지 모르게 그런 것들에 끌린다”

제주에서 정착해가던 2017년 겨울, 제주시에 있는 예술공간 ‘이아’의 레지던시 입주 작가 분들에게 연속 강의를 할 일이 생겼다. 다섯 차례에 걸쳐 내게 소중한 사상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기획해주신 분은 고승욱 씨였다. 나의 책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시다는데, 이아에서 처음 만났다. 연속 강의가 끝난 이후 거기서 만났던 작가분들을 위해 글을 쓸 일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 연속 강의를 들어주신 여섯 작가들 중 세 분의 작품론, 작가론을 쓰게 되었다. 고승욱 씨도 그중 한 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런 것들에 끌린다. 뭔가를 해보고 싶어 진다.” 작가론을 쓰기 위해 그와 지난 작업들에 관해 대화하다가 이 말을 종종 들었다. 그는 저 땅을, 저 돌을, 저 무덤을, 저 기억을 만나자 무슨 일인가 벌이고 싶어 져서 작업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의 작업은 “왠지 모를” 그 충동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고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20년 가까이 서울 생활을 하다가 2012년 무렵 제주로 돌아왔다. 제주에는 서울과는 다른 끌림이 있었던 듯했다. 그의 제주 작업을 파악하기 위해 내게는 ‘있지 않음’을 부재不在, 비재非在, 미재未在로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부재는 있었다가 사라짐이다. 비재는 있으나 지워짐이다. 미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음이다. 이것들은 범주가 아니다. 동학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는 부재하고 비재하며 동시에 미재할 수 있다. 나는 그가 제주에서 그런 존재들에게 끌렸다고 느꼈다.

7. 부재

어쩌면 제주는 부재의 섬이라 말할 수 있다.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마을. 4‧3 이후 제주는 부재가 떠도는 섬이었다. 그래서 은폐, 망각, 왜곡, 실증, 증언, 추도의 길항이 여전히 제주의 현실을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그는 부재를 어떻게 작업했던가. 아니, 부재와 어떻게 만나고자 했던가.

〈미지의 초상〉(2018)은 70년 전 부재하게 된 얼굴을 지금 그려내는 작업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2018년 4·3 70주기 때 일주일 간 큰 굿이 벌어져 많은 유족이 4·3 평화공원에 모였다. 그와 동료들은 행사장 한 구석에 ‘옛날 사진관’을 열고 4·3 유족들의 초상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러다 4·3 때 돌아가신 부모에게 보내는 유족들의 글을 받기로 했는데, 그중엔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으니 꿈에라도 나타나 주세요” 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세상에 없는 얼굴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유족들의 집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집 얼굴은 다 긴디.” “우리 작은 아이가 아버지 닮았다고 해.” 이런 말들을 바탕으로 부재하게 된 자의 노년 모습을 그려 유족들을 찾아가 전했다. 이 과정이 담긴 영상에 정작 그가 그린 초상화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초상화를 받아 든 유족이 지긋이 그것을 바라보는 표정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딸의 그 표정을 보며 부재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상상하게 된다.

8. 비재

비재는 있으나 없는 취급당하는 존재이다. 배제되었을 수도, 망각되었을 수도, 아니면 그저 무시되었을 수도 있다. 현실의 정치를 사회적 경험과 판단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의 예술은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기억되어야 할 것을 규정하는 경험의 형식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랑쉬 폭낭〉(2017). 그는 2년 동안 다랑쉬라는 마을 아랫동네에서 살았다. 이따금 다랑쉬 마을에 갈 때마다 다랑쉬 폭낭(팽나무)은 앙상해져가고 있었다. 그 아름드리나무가 이파리가 사라지고 가지도 몇 개 안 남아 왜소해졌다. 폭낭은 신목神木으로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왔지만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는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 폭낭의 모습에서 4·3 때 다랑쉬굴에서 학살당했다가 1992년에야 발견된 11구의 백골을 보았다.

이 나무를 어떻게인가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만든 영상물을 보면 그 과정이 나온다. 도토리를 주워 모은다. 주차 표지물 간의 거리를 잰다. 사람들에게 도토리를 준다. 사람들이 주차 표지물 간의 거리만큼 떨어져 서고 그 모습을 촬영한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들을 그 거리만큼의 실 길이로 엮는다. 그 실을 다랑쉬 폭낭에 묶는다. 다랑쉬 폭낭의 예전 울창했던 모습이 사진으로 이어진다.

9. 미재

미재는 있어야 하나 좀처럼 나타나지 않은 존재이다. 어쩌면 아직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데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미존微存, 즉 약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의 감응 능력이며, 그의 작업은 약한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파장을 잠시나마 증폭시켜 사건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백비〉(2016). 제주 4·3 평화공원 전시실 초입에는 비명을 새기지 않은 비석, 백비白碑가 누워 있다. 옆에 이런 문구가 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 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4·3이 여전히 모호하게 사건으로 불리듯 백비는 아무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채 미래에 올 이름(정명正名)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는 백비를 일종의 스크린으로 보았다. 무명無名의 희생자들 이야기가 비칠 수 있는 스크린. 백비는 아직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기에 빈 그릇처럼 다른 곡절들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다면 백비는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명명과 규정을 초과해 다성多聲적인 백비百砒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탁영拓影을 고안했다. 백비에는 새겨진 글자가 없으니 탁본拓本해본들 그저 검을 뿐이다. 백비로는 그림자처럼 규정되지 않은 역사들, 기억들, 상흔들, 가능성들이 아른거린다. 그는 그림자를 탁영하기 위해 탁본을 다시 하얗게 칠한다.

이 미재하는 것을 위한 작업들은 모두 빛과 그림자의 관계 위에서, 빛이 약해지고 어둠이 드리우는 시간대에 진행되었다. 지나치게 밝은 빛은 모든 걸 보이게 만들어 미존하는 것들을 오히려 지워버린다. 미존을 위해서는 미명微明이 필요했다.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림자의 윤곽도 또렷해진다.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번져가되 그림자가 어둠과 아직은 구분될 수 있는 약한 빛과 그 시간. 미재하는 것들은 존재하는 것들의 윤곽이 불분명해지는 곳에서 언뜻 그림자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고승욱은 이렇듯 무언가에 이끌리면 언뜻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나름의 조작으로 관련지어 ‘사건화로서의 예술’을 하는 듯했다. 그런 식으로 부재, 비재, 미재하던 것들의 있음을 일으키려고 했다.

10. 난민과 국경

2018년도 여름, 갑작스러운 사건이 제주를 찾았다. 제주국제공항으로 500여 명의 예멘 난민들이 입국했다. 예멘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이 말레이시아에 있다가 비자가 필요 없는 제주를 향한 것이다.

내게는 김시종의 또 다른 책 『재일의 틈새에서』 번역을 마친 무렵이었다. 생각해보면 4‧3 때 남로당 연락책으로 활동하다가 밀항한 김시종은 일본에서 난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였을 것이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다 비‘국민’으로 내몰려 숨어 다니다 ‘난민’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사회를 ‘유민’으로 떠돈 자였다. 그는 제주를 떠나 ‘재일’을 살았다. 그렇다면 예멘에서 내전을 피해온 난민들의 제주살이란 어떠했을까.

예멘 난민들은 김시종도 겪었을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김시종은 바다를 건넜지만 일본 사회에 안착할 수 없었다. 자기 내력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난민은 국경을 넘어가려 했으나 그것을 잡아끌고 온다. 국경은 그것을 벗어나려는 난민의 신체에 들러붙고, 난민은 어디를 가든 국경을 질질 끌고 다닌다. 국경은 자국을 벗어나 타국을 떠도는 난민에게 그저 지도상에 그어진 경계선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 자를 어디까지고 쫓아가 뒷덜미를 잡는다. 그래서 난민은 하나의 선을 분명 넘었을 텐데도 여전히 국경 위의 존재다. 그들이 육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제주에 붙잡아둘 때 바다는 아직도 건너야 할 국경이며, 그들이 한국에서 추방된다면 이 나라 전체가 그들에게는 거대한 국경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국경 위의 존재에게 심문은 불시에 찾아온다. “당신 예멘 난민이지.” 옛날 김시종도 일본에서 들었을 것이다. “당신 조선인이지.” 그 무렵 프란츠 파농도 프랑스에서 기차 속 아이의 외침에 움찔했다. “어머 흑인이다.” 흑인이란 규정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규정성에 붙들리는 한 파농은 백인 아이 앞에서 그저 흑인의 한 사람으로 뭉뚱그려진다. 그때 파농은, 그리고 김시종, 예멘 난민 역시 그런 규정 앞에서 “나는 그것만이지 않다”라고, 당신의 규정에는 “내가 없다”라고 항의하기 어렵다. 존재는 움츠러든다.

11. 미지수 x의 존재

그들은 규정당한다. 예멘 난민들은 무척 멀고 낯선 곳에서 왔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윽고 알만한 존재가 되었다. 549명, 무슬림, 미혼 남성 다수, IS, 할례, 조혼. 이 앎들로 족했다. 이것들을 짜 맞추니 그들의 속성에 관한 범죄기질론과 여성억압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야기될 안전위협론과 무임승차론이 만들어졌다.

겪기도 전에 그들이 누구이고 어찌할지를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속성상 그러하며 잠재적으로 그리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기에 더 이상 알려하지 않았다. 그들이 왜 예멘에서 왔는지, 왜 젊은 남성이 많은지, 왜 스마트폰을 꽉 쥐고 있는지에 대해. 더 이상 알려하지 않은 채 이미 알고 있는 것들만 가지고서 숙덕거렸다. 그리하여 그들을 대하던 초기의 연민 의식은 불안 감각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그들이 거리로 나오면 불안하고, 몰려 있으면 불안하고, 자기네들 말로 웅성거리면 우리가 모르는 음모를 꾸미는 듯하다.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불안의 이유는 잠재적인 것으로 제시되었다. 여성에게 나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세금을 축낼지 모른다. 일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 지금 어찌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지 모른다. 실제로 어떤 일은 일부 유럽 국가에서 일어났다. 근거 있는 불안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는 아직 어쩌면의 일이고 어찌 될지 모를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불안의 이유가 되었다. 그들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을 야기하며, 그런 그들을 우리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이 이어지며, 앎을 차단하는 단편적인 앎들이 퍼져나가 우리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그들에 대한 혐오(제노포비아xenophobia)는 제노xeno, 즉 이방의 것, 낯선 것, 결정불가능한 것에 대한 불안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불안케 하는 미지수 x로 구겨 넣어지고 있었다.

12. 틈새와 경계

난민들의 들어옴 그리고 그들에 대한 밀어냄을 제주에서 겪으며 있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어떤 존재의 있음은 자명하지 않다. 어떤 존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듯하나 다른 곳에 있다.

김시종은 말했다. “거기에는 늘 내가 없다”라고. 이제 난민들에게 모국인 예멘은 ‘거기’가 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주에 있어도 이곳 인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셈해지지 않는 공집합이다.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이 세계 바깥으로 내몰린다. 이 세계에서 거부당했으나 이 세계를 떠날 수 없다. 이러한 어긋남의 장소에 그들은 있다.

어긋남의 장소, 그곳은 김시종 평론집 제목 『재일의 틈새에서』를 빌리자면 틈새라 할 것이다. 틈새로 빠지고 틈새에 갇힌 자들이 있다. 틈새로는 불가항력의 여러 힘들이 가해진다. 그 힘들을 받아내야 하는 자들의 삶은 뒤틀린다. 또한 그곳은 김시종 시선집 제목 『경계의 시』를 빌리자면 경계라 할 것이다. 내부에서 자리 잡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자칫하면 외부로 추방될 수 있는 자들이 있다. 어디를 가든 그들은 경계 위에 서게 된다.

그런 예멘 난민들이 왜 우리를 불안케 하는가. 불안해하는 것은 그들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 또한 그들이 이곳에 완전히 들어와 있지 않은 경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난민은 거기서 살 수 없어 떠나왔지만 이곳에 순치될 수도 없는 존재다. 난민難民은 우리라는 경계를 범하며 우리를 어지럽히는 난민亂民이 된다. 그런데, 거기에 어떠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들이 있는 그곳, 틈새와 경계의 삶은 불확정적이다. 그곳에서의 앎은 불투명하다. 그곳에 있는 존재는 흔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곳은 흔들림 가운데서 무언가가 시작되는 장소일 수도 있다. 그곳은 의미가 불분명한 지대이기에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는 출처일 수도 있다. 그곳에 어떤 예술이 있다. 시가, 다큐멘터리가, 초상화가, 설치미술이 있다.

13. 흔들리는 시

김시종은 그곳에 몸을 두고 가해지는 여러 힘에 떠밀리면서도 그 힘들을 떠맡으려 했다. 그렇게 수동성과 능동성이 중첩되는 그 자리를 김시종은 시작詩作의 거처로 삼았다. 그곳에서 흔들리는 자기 존재를 파고들 때 경계는 임계가 되고 거기서 비로소 새로운 지평이 드러난다. 그의 첫 시집 제목은 『지평선』이었다.

혼자만의 아침을 / 너는 바라서는 안 된다 / 볕드는 곳이 있으면 응달도 있는 법 / 어긋날 리 없는 지구의 회전만을 / 너는 믿을 일이다

해는 네 발밑에서 솟는다 / 큰 호를 그리며 / 반대편 네 발밑에서 저물어간다 /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게 아니다

네가 서 있는 그 지점이 지평이다 / 그야말로 지평이다 / 멀리 그림자를 뻗치며 / 기우는 석양에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 / 다시 새로운 밤이 기다린다 ―김시종, 『지평선』

그는 고향 상실자였으나 고향을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4·3으로 도망쳐 나온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고, 고향은 그저 그리운 장소일 수 없었다. 그는 길 잃은 자, 방황하는 자, 확고한 자아를 박탈당한 자였다. 그런 자가 정신의 타향 속에서 계속 시를 쓴다면, 그것은 잠시라도 머물 정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또 그 자리를 떠나며 자신의 방황을 기록하는 이정표를 새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계에서 방황하는 그에게로, 그의 삶, 그의 시에게로 타인의 사연이 찾아온다. 그의 시는 흔들리며 타인의 사연을 품고, 타인의 사연을 품으며 흔들린다. 그의 시는 그의 삶 속으로 밀려든 그 사연들을 전언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읽는 이를 사연 많은 삶들로 데려간다.

없어도 있는 동네. / 그대로 고스란히 / 사라져버린 동네. / 전차 애써 먼발치서 달리고 / 화장터만은 잽싸게 / 눌러앉은 동네. / 누구나 다 알지만 / 지도엔 없고 / 지도에 없으니까 / 일본이 아니고 / 일본이 아니니까 / 사라져도 상관 없고 / 아무래도 좋으니 / 마음 편하다네. (중략) 바로 그것. / 이카이노가 이카이노가 아닌 것의 / 이카이노의 시작. (중략) 이카이노는 / 한숨을 토하는 메탄가스 / 뒤엉켜 휘감는 / 암반의 뿌리. / 으스대는 재일의 얼굴에 / 길들여지지 않는 야인의 들녘. / 거기엔 늘 무언가 넘쳐나 / 넘치지 않으면 시들고 마는 / 일 벌이기 좋아하는 조선 동네. / 한 번 시작했다 하면 / 사흘 낮밤. / 징소리 북소리 요란한 동네. / 지금도 무당이 날뛰는 / 원색의 동네. / 활짝 열려 있고 / 대범한 만큼 / 슬픔 따윈 언제나 날려버리는 동네. / 밤눈에도 또렷이 드러나 / 만나지 못한 이에겐 보일 리 없는 / 머나먼 일본의 / 조선 동네. ―김시종, 「보이지 않는 동네」

14. 방황하는 다큐멘터리

김임만의 다큐멘터리도 타인의 사연과 함께 흔들린다. 〈용왕궁의 기억〉도 그러하며, 전작 〈가마가사키 권리 찾기〉도 그러했다. 오사카 가마가사키는 지난 20세기, 일본만이 아니라 오키나와, 홋카이도, 조선에서 몸밖에 팔 것이 없는 객지벌이 노동자들이 모여든 인력시장이었다. 지금도 날품팔이 노동자와 노숙자가 밀집한 지역이다. 〈가마가사키 권리 찾기〉는 오사카시가 그들을 주민으로서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이 주거권과 선거권을 쟁취하려는 모습을 담아냈다.

그리고 김임만 자신이 오사카의 하청노동자였다. 그리고 본명을 쓸 수 없는 노동자였다. 2009년 그는 오사카 시의 하청을 받은 대형건설사의 하청업체에서 일거리를 구했다. 그런데 건설사 측은 일본식 이름이 아닌 김임만을 이름으로 쓰는 그에게 취업증명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영주권자인 그는 제출할 필요가 없는 서류였다. 하청업체는 그에게 김임만 대신 ‘가네우미’라는 이름이 새겨진 헬멧을 내밀었다.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그는 통명通名으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삼 개월 반이 지나 하청인 건설회사와 원청인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것은 재일조선인에게 암묵적으로 일본식 이름을 강요하는 사회와 국가를 향한 첫 소송이었고, 이 과정을 〈가마가사키 권리 찾기〉에 담았다.

〈용왕궁의 기억〉 또한 흔들리며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행적이다. 2016년 그를 4‧3 평화공원에서 만났을 때, 그는 이 작업으로 8년째 카메라와 함께 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찍다 보면 타인의 사연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이 또다시 찍는 행위를 추동한다. 찍다 보면 찍는 자의 위치가 움직이고, 그 이동이 또다시 찍는다는 행위를 추동한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엄청난 분량의 기억을 뒤적이며, 그 기억의 단편들을 애써 이어 붙이고 있었다. 그런 방황을 거쳐서야, 그렇게 긴 시간을 들여서야 가까스로 알게 되는 자신의 있음이 있다.

15. 함께 있으려는 예술

그리고 고승욱의 작업들. 그는 틈새와 경계에 있는 것들에 이끌려 작업한다. 상실했거나 배제되었거나 망각된 것들, 부재하거나 비재하거나 미재하는 것들. 그가 “왠지 모르게 그런 것들에 끌린다”라고 말할 때 ‘왠지’는 솔직한 표현이며, 또한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그는 그런 것들에 매혹당하는 자이며, 매혹이란 섣불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자신을 끌고 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앗아가 버린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 그것은 또한 그 자체의 감각적인 성격을 버리고 세계를 버린다. 그리고 세계의 내면으로 은둔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어 당긴다.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어떤 것들―사진이, 돌이, 나무가, 묘비가 왠지 시선을 끈다. 마음을 빼앗는다. 감각과 사유의 문을 두드린다. ‘이건 대체 뭐지’, ‘여기에 뭐가 있지’라는 물음이 생겨난다. 이제 그것들에 휘말려 무언가 사건을 벌인다. 감수感受, 감염感染, 감동感動. 느껴 받고, 느껴 물들고, 느껴 움직인다.

왜 하필이면 그때 그런 것들에 감응했는지, 왜 그런 식으로 감행했는지는 사후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 수동적 능동성의 과정은 작가 자신에게조차 해명하기 어려운 비밀의 영역일지 모른다. 그래서 ‘왠지’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경계에 있음, 불안정하게 있음, 내몰려 있음, 가려져 있음과 관계하려면 큰 제약이 따랐겠으나, 그 제약들은 그에게 사고가 얽혀들고 행동의 모험이 요구되는 계기였으리라는 점이다. 제약의 크기만큼 작업은 흔들려야 했을 테며, 그 작업을 대하는 나를 흔들었다.

그의 작업은, 작품이라 하기에는 작作은 이루어지나 품品에는 이르지 못한 혹은 이르지 않는 미결정성이 남아 있다. 그 미결정성은 (작가 자신조차)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찾아올 수 있는 잠재성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부재하거나 비재하거나 미재하는 것들과 함께 있으려는 예술의 공통된 속성일지 모른다.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와 전시의제의 소주제를 발굴하는 2022 SeMA 의제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록되었습니다.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의제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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