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과 목소리를 조금씩 밀어내며

신예슬
신예슬은 비평가이고, 저술과 출판 활동을 하는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의 일원이다. 음악학을 공부했고 동시대 음악과 소리 사이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찾는다.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작업실유령, 2019)을 썼고, 종종 기획자, 드라마터그, 편집자로 일한다.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 위원을 맡고 있다.

“사람에게 손가락이 열 개밖에 없는 것이 작곡가의 잘못인가?”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1

언젠가부터 인간의 신체조건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음악적 환상들이 발견됐다. 주로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유럽 전통을 따르는 근현대 음악가들의 악보에서 나타난 징후로, 대체로 연습하면 해낼 수 있는 것과 신체 구조상 거의 불가능한 것의 경계면에 있었다. 손가락 열 개는 아무래도 모자란다는 찰스 아이브스는 그 말을 몸소 실천하며 열 손가락으로는 치기 어려운 패시지를 곡에 종종 포함했다. 사람의 손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만큼 예로부터 다 치기 어려운 부분을 마주한 피아노 연주가들은 일부 음을 선별해서 치곤 했지만, 그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곡도 있었다. 두 팔을 뒤쪽으로 쭉 뻗은 채 드럼 몇 개를 왔다 갔다 하며 쳐야 하거나, 피아노 건반의 양 끝점을 연주하기 위해 양팔을 쭉 펼치고 피아노를 쳐야 하거나. 포기하지 않은 연주가들은 통증을 호소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작곡가는 아카데미에서 ‘악기론’ 교육을 통해 악기의 조건과 가능성을 배우지만 음악가의 신체는 특별히 교육 대상이 되지 않는다. 연주 목적으로 쓰였으나 사실상 거의 연주할 수 없는 패시지들은 음악가 신체에 대한 몰이해나 무신경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대부분 연주 가능한 수준으로 악보를 고치는 것으로 그 일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이렇게 성급히 결론지을 수 없다. 연주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면에 있는 것들 중 몇몇 사례들은 인간의 몸으로부터 조금 더 멀리 가보려고 하고, 그 작은 트리거로부터 촉발된 사고는 훨씬 더 먼 곳으로 향하거나 이미 오래된 음악 속에 숨어있었던 어떤 미묘한 균열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88개의 손가락

콘론 낸캐로우(Conlon Nancarrow)는 50여 개의 피아노 연습곡을 작곡했다. 그의 피아노 연습곡에 이르러 새삼 재고되어야 할 역사가 있다면, 그건 이제까지의 피아노 연습곡이 ‘피아노 치는 사람을 위한 연습곡’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하농 연습곡’이라 줄여 부르던 곡의 원제는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를 위한 60 연습곡’이었다.) 사람들이 피아노를 더 잘 칠 수 있길 바라는 연습곡들과 달리 낸캐로우는 피아노라는 ‘악기 그 자체’를 위한 연습곡, 혹은 그 악기를 이해하기 위한 작곡 연습으로서의 연습곡을 남긴다.

카일 간(Kyle Gann)은 낸캐로우의 초기 피아노 연습곡에서 블루스와 그가 좋아하던 피아니스트였던 아트 테이텀(Art Tatum), 얼 하인즈(Earl Hines)의 영향을 발견한다. 하지만 작업이 무르익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가 천착해오던 리듬적 복잡성이 더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인간 피아니스트의 존재는 서서히 흐려진다. 〈자동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24번〉은 14:15:16의 비율, 〈자동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33번〉에서는 √2:2 비율이 작업의 구성원리로 자리 잡았고, 작업 기간만 장장 4년이 걸린 낸캐로우의 대작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37번〉은 열두 파트로 이루어진 캐논으로, 각 성부의 움직임은 무려 150 : 160 5/7 : 168 3/4 : 180 : 187 1/2 : 200 : 210 : 225 : 240 : 250 : 262 1/2 : 281 1/4의 비율에 기반해 만들어졌다.2 이것은 무척이나 빠르고 화려하고 정확한 타건을 선보였던 아트 테이텀은 물론, 그 어떤 인간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점점 더 중요해진 것은 피아노라는 이 악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88개의 건반을 제 손가락처럼 자유롭게 놀릴 수 있고 그것을 동시에 칠 수도 있으며 단 하나의 인풋만 준다면 순식간에 여러 연쇄작용을 거쳐 그 건반에 해당된 음향을 산출할 수 있는 이 고사양의 기계로 정확한 계산 과정을 거쳐 얼마나 정교하고 복합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였다. 피아노라는 몸이 지닌 조건을 더욱 상세히 살펴보고 그 악기의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보는 것. 낸캐로우가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에서 리듬의 복잡성에서 더 나아가 정확한 템포의 불협화를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다성성과 구조를 선명히 드러낼 수 있는 악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조금 더 심화된 ‘악기론’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낸캐로우의 작업에서 피아노라는 악기는 주요한 실행자로 자리매김한다. 인간 신체는 피아노 몸체로 대체됐고 음악은 더 큰 가능성을 얻었다. 그러나 피아노를 연주의 ‘주체’라 칭할 수는 없었다. 피아노는 스스로 연주할 수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연주할지 스스로 프로그래밍하진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악기는 여전히 인간과의 오랜 유착관계 속에 놓여있었다. 자동 피아노를, 자신의 일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주체라 보기는 어려웠다.

HBO에서 제작한 드라마 〈웨스트월드(Westworld)〉의 오프닝 시퀀스에는 인공지능 로봇의 상징물로써의 자동 피아노가 나온다.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차이를 조금 더 선명히 보여주어야 할 때는 엔지니어를 연기한 앤서니 홉킨스가 직접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자동 피아노는 기본적인 피아노에 자동 연주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외견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보편의 피아노처럼 연주할 수 있다.) 자동 피아노는 인간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입력된 것만을 재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피아노를 두드리는 엔지니어를 보면, 그것은 언제고 다시 프로그래밍될 수 있고, 건반 앞에 누군가 앉는 순간 그 프로그램이 언제든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자동 피아노는 ‘텅 빈 캐비닛’처럼 보인다.

하지만 〈웨스트월드〉는 그 텅 빈 캐비닛들이 자신이 캐비닛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에게 내재된 조건이 무엇인지 검토하고, 사라진 기억들을 조금씩 되찾는다. 만약 자동 피아노가 그 몸체를 스치고 간 수많은 음악들을 모두 기억한다면, 자신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면, 각각의 자동 피아노가 자신의 조건을 스스로 파악하고 ‘자동 피아노 일반’이 아닌 ‘자동 피아노 A’, ‘자동 피아노 B’, ‘자동 피아노 C’의 음악을 생성한다면 그것은 어떤 음악이 될지 알고 싶다. 자동 피아노의 역사에서 입력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재생한 피아노를 아직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학습을 통한 단순 모방 혹은 재현의 단계를 넘어, 학습된 과거와 조금씩 어긋나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 그것들을 얼마든지 자동 피아노에 가져다 놓을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이 그 오래된 몸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몸 없는 목소리

전자적으로 소리를 저장 및 합성할 수 있게 되자, 실제 악기 없이도 그 악기 소리를 낼 수 있는 가상악기 플러그인이나 특정 악기의 사운드를 담은 ‘〇〇머신’, 예컨대 드럼 머신이나 베이스 머신 등 실물 전자악기가 하나둘씩 제작됐다. 많은 가상악기가 생겨나며 갈수록 특정 브랜드의 특정 모델의 음향까지 디테일하게 재현할 수 있게 됐지만, 수많은 악기 중에서도 뒤늦게 모방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의 목소리였다.

사람의 목소리는 범접하기 어려운 성역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과도 깊게 연결된 음향적 인장과도 같은 것인 데다, 구사하는 언어나 억양에 따라 소리가 달라져서 그것을 데이터화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리적 문제도 있다. 타인의 목소리를 가져와 조작하는 일은 타인의 얼굴을 가져오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한 일로 여겨진다. 간혹 어떤 방송 프로그램은 작고한 고인의 목소리 데이터를 수집해 그 목소리로 말하게 하는 일을 만들곤 하지만, 그것이 충분한 고민 없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것은 몹시 소름 끼치는 일이 되거나 가짜 뉴스가 된다. AI 셀러브리티들이 그 누구의 얼굴과도 정확히 닮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가상 목소리’ 또한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어야 한다.

홀리 헌든(Holly Herndon)은 여러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는 인공지능 스폰(Spawn)을 만들었다. 스폰은 ‘알을 낳다’는 동사와 ‘알’이라는 명사를 뜻한다. 그가 2019년에 발매한 앨범 《Proto》에서 스폰은 중요한 협업자로 초대된다. 전자음악의 시스템 속 필터나 인공지능은 인간의 목소리를 흔적 없이 증강하거나 일부 편집하는 역할로 쓰였지만, 헌든은 스폰의 개입을 통해 음악이 들리는 방식이 바뀌기를 기대한다. 음악은 스폰의 존재를 동등한 또 하나의 목소리로 이해하며 함께 합창하는 것처럼 들린다.3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스폰의 목소리이거나 그의 개입으로 인해 만들어진 소리인지 매 순간 감별하긴 어렵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불현듯 튀어나와 이것이 단 하나의 종이 만들어낸 소리들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목소리는 사전적으로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 그리고 의견이나 주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한다. 즉 성대를 가진 포유류과의 발성 결과를 모두 목소리라 칭할 수 있지만 우리의 언어습관은 ‘목소리’라는 단어를 한 존재자의 의견으로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목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를 그들에게 성대가 있다는 사실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존재자라고 받아들인다. 소리 AI 프로그램이 아닌 ‘목소리 AI 프로그램’ 스폰은, 헌든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기(artificial intelligence baby)” 단계를 지나고 있다.

스폰이라는 이름의 ‘알’로부터 어떤 목소리가 비집고 나올지, 그것이 변성기를 지나 온전히 제 목소리를 가졌을 때 우리가 무얼 듣게 될지 단번에 상상하긴 어렵다. 어쩌면 사람 목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고, 혹은 이제는 꽤 친숙한 ‘AI 목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인간 목소리와 닮은 악기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고,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의 목소리 그 자체와는 다른 소리지만 인간이 목소리를 사용하는 방식과 닮아있을 수도 있겠다. 이미 오래전부터 음악에서 만들어온 ‘성부’라는 개념처럼.

목소리—성부

나는 ‘목소리’라는 개념이 몇백 년 이상의 시간을 지나오며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를 이렇게 이해한다.

아주 오래된 노래를 들을 때면 이것이 누구의 노래인지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한 사람의 노래 선율은 한 명의 화자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 존재는 중간에 사라지지 않고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지탱했다. 그러나 노래 선율의 믿음직스러운 선형성이 조금씩 흐트러지고, 인간의 성대가 아니라 인간이 손에 쥔 악기들이 음악의 영역에 진입하면서, 노래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선을 지칭할 수 있는 용어가 필요해졌다. 노래는 노래로서, 선율도 선율로서 머물렀지만, 목소리라는 단어 사용에는 새로운 맥락이 하나 더해졌다. 그것은 바로 ‘성부’였다.

서양 음악사에서 성부(voice)라는 단어는 목소리(voice)라는 단어와 동일시되어 왔다. 이는 음악의 성부가 본래 사람 목소리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서유럽에서 목소리는 음역에 따라 소프라노와 알토, 테너와 베이스로 구분되어 왔으나 성부는 차츰 목소리로부터 분화되어 특정 음역에서 연주되는 소리를 지칭하게 됐고, 어느 순간 성부는 목소리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됐다. 어떤 성부는 목소리 없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떤 성부는 노래하지도 않았다. 선율이라고 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하나의 ‘선’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노래에서 성부로, 목소리 없는 성부로…4

기악음악 속 어떤 선율을 듣고, 나는 그 선율 뒤에서 노래하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아마 노래를 닮은 선율을 악기로 연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선율에서 인간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선율은 어느 순간 인간의 목소리로는 구현할 수 없는 영역으로 향하곤 했다. 목소리의 물리적 한계를 분명 벗어나지만,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 인간처럼 하나의 주체를 상정한 듯한 음악적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성부’를 그 가상의 주체로 이해한다. (간혹 한 악기가 한 성부를 도맡는 경우도 있지만 한 성부가 여러 악기의 개입을 통해 구성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악기보다는 성부를 그 주체로 상상하는 것이 내게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 성부가 행하고 있는 것을 만약 여전히 노래라 칭해야 한다면 그건 아마도 인간 신체에 의한 노래가 아니라 악기의 노래, 혹은 알 수 없는 존재자-성부의 노래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정혜윤의 논문에서 이런 문장들을 읽었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경험하는 공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유사한 고민을 해볼 수 있다. 슈베르트의 곡의 첫 여덟 마디에서 과연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답은 피아니스트의 손이다. 확실히 피아니스트의 손은 건반 위의 물리적 공간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리고 건반 위를 오가는 피아니스트의 손놀림에 대한 시각적 경험이 음악적 움직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강화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음악 ‘안’에서 경험하는 움직임은 건반 위 손의 움직임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5

나는 이 질문을 이 논문의 논지와 살짝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생각한다.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여기서 노래하거나 움직이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말로 바꾸어본다. 대체로 노래하는 인간을 떠올릴 수 있고,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을 떠올릴 수 있지만, 위의 말처럼 음악 안에 있는 공간과 움직임에 대한 상상을 필요로 하는, 물리 세계의 공간과 움직임과는 결코 다른 영역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움직임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노래하고 움직이는 에이전트를 상상한다. 그 에이전트의 형상은 보통은 노래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이었지만 어떤 순간 그는 인간의 형상으로부터 벗어난다.

인간, 고래, 곤충

1996년, 프랑스 작곡가 제라르 그리제이(Gérard Grisey)는 〈시간의 소용돌이(Vortex Temporum)〉를 작곡했다. 최근 이 곡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음악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패턴을 생각하면서였다. 선형성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 구조가 아닌, 음악을 이루는 다른 모델을 나열해보는 과정에서 이 음악에서 발견되는 나선형의 패턴을 떠올렸고, 그 운동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있는지를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이 음악은 드뷔시(Claude Debussy)의 〈다프니스와 클로에(Daphnis et Chloé)〉의 한 아르페지오를 따와 그 움직임을 가속하거나 감속하며, 끝없이 회전하는 장을 형성한다. 1, 2, 3악장 모두 같은 모티브에 기반하지만 1악장은 소위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시간, 2악장은 팽창된 시간, 3악장은 수축된 시간을 다루는데 이는 같은 대상을 인간의 눈, 망원경,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것에 비견할 만하다. 그리제이는 이 음악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며 비인간 주체들을 초대한다. 1악장이 인간의 시간이라면 2악장은 고래의 시간, 3악장은 곤충 혹은 새의 시간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음악을 경험하는 에이전트는 악장별로 다르게 설정된다.

작은 비유일 뿐이지만 나는 이 말 이후, 음악 안의 에이전트가 누구로 설정되느냐에 따라 한 곡이라는 가상적 세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본다. 그럼으로써 이 음악을 여러 종들이 교차하는 생태계로 받아들이고 종의 차이를 소리의 방식으로 증거 하는 하나의 방식을 배운다.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표면적으로 감지되는 변화는 대체로 음역과 속도의 변화다. 그 변화를 통해 잠시나마 고래의 귀를 가졌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 곤충의 몸으로 진동을 느낄 때 소리가 얼마나 다른 형태로 들릴지 잠시나마 떠올려본다. (물론 비유일 뿐 한 악장의 모든 순간이 고래의 청감각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 차이들로부터 조금 더 넓은 연결망을 생각해볼 힘을 얻는다.

이어지는 상상들. 음역과 속도로부터 인간의 가청주파수 대역폭과 인간이 주로 의사소통하는 데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폭, 그리고 고래가 의사소통하는 데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폭, 포유류가 아닌 곤충들이 그들의 몸으로 감지할 수 있는 주파수 대역폭, 그 동물들의 영역에서 서로 교차하거나 어긋나는 지점들. 그리고 예컨대 잠수함처럼 인간이 만든 기계가 동물들의 의사소통 대역폭에 끼어들며 발생하는 교란, 통신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주파수 전쟁, 땅의 소유를 나누듯 주파수 대역폭을 사고파는 일이 벌어지고 그게 경매가 이뤄진다는 사실, 주파수와 소리라는 개념을 나란히 놓아보았을 때, 소리가 드넓은 주파수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을 말하는 인간중심적인 개념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보기. 소리는 당연히 귀에 들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청주파수 대역폭 안에서도 일정한 진동수를 가지고, 진동과 통증이 아닌 것으로 느끼게 되는 특정한 공기의 진동, 같은 정의를 만들어보기. 그리고 그 넓은 영역 안에서 음악이라는 개념은 얼마나 작고 얇은지 생각한다.

〈시간의 소용돌이〉의 회전 에너지를 타고 그야말로 먼 곳으로 생각을 내보냈다가 다시 고래와 곤충 등 비인간 동물들의 영역으로 돌아와 본다. 그리제이의 음악 속 고래가 아닌, 실제 바닷속의 고래들은 일반적으로 12~25Hz로 의사소통 하지만 그 주파수 대역폭에 또 다른 산업의 기계들이 끼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을 떠올린다. 사람의 음성 대역폭은 300~3000Hz다. 공기 중에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알 수 없는 존재자가 이 대역폭에서 계속해서 소리를 내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인간은 그것을 더 정확히 막아낼 수 있는 노이즈 캔슬링 기기를 더 정밀하게 만들거나 최대한으로 침묵하거나, 혹은 반드시 말해야 할 때는 목소리를 더 높고 선명하게 낼 것이다. 이것이 천 년쯤 반복된다고 했을 때, 언젠가 인간의 음향 체계와 언어, 그리고 몸에는 적지 않은 형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아마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은 보철

한 연구자는 눈이 생겨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선캄브리아기 동물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없었다. 이때 눈이 나타남으로써 빛이 동물의 행동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캄브리아기에 눈이 형성됨으로써 빛을 활용할 수 있게 돼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고 급속도의 진화가 가능해졌다.”6

다른 연구자들은 귀가 생겨난 뒤 어떤 장점이 생겼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기 중 소리를 감지하면 동물이 동종은 물론 포식자 및 먹이에 대한 주요 정보를 높은 방향 정밀도로 인식할 수 있다. (중략) 초기 수생 네발 동물의 균형 기관은 다리와 턱을 통한 소리의 전도에 의해 포착된 표면 기반 지면 진동을 통해 포식자 또는 경쟁 동종 동물의 발걸음을 감지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이 최초의 네발 동물이 공기의 압력 변화에 의해 유도된 소리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들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지면과 접촉하는 팔다리를 통한 진동 감지는 효과적인 전략이며, 따라서 척추동물이 서두르지 않고 오로지 공중 청각만을 진화시킨 이유가 된다. (중략) 오늘날 포유류에게 있는 유일한 공중 청각 시스템에 대한 첫 번째 진화 단계는 아마도 지상 진동을 균형 기관에 더 잘 연결하는 형태였을 것이다.”7

눈과 귀가 자라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전설보다 더 거대한 일로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지금 생활하는 도중에 분명히 더 다른 신체 감각, 혹은 더 선명한 신체 감각을 필요로 하는 것을 보면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몸 또한 그런 기나긴 변화의 여정 중에 있겠지만 지금 당장 그 바람이 해소될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조금 다른 신체 감각을 얻고 싶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완해줄 수 있을만한 ‘감각의 보철’을 찾는다. 후니다 킴과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다원예술 2021: 멀티버스’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2021) 전시 매뉴얼 중 하나로 작은 이야기책 『바라보고 읽어내는 장치 Through The Looking Apparatus』를 준비하며 이렇게 썼다.

임플란트(implant)는 ‘심다’, ‘뿌리내리다’는 뜻을 지닌다. 이 말은 의학적 목적으로 인체에 무언가를 이식하거나 매입할 때 사용되며, 다른 이의 마음에 생각이나 태도 등을 심는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인공치아 식립으로, 잇몸 뼈에 보철물을 심는 일이다. 이처럼 임플란트는 치아처럼 일부 상실된 신체 부위 일부를 대체하거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덧대지는 ‘보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안경과 보청기 또한 일종의 보철일 수 있다. 시력을 보완하고자 하는 이들은 깨어있는 시간에는 거의 한시도 빠짐없이 안경을 장착한다. 청력이 감퇴하여 소리를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정도로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은 보청기를 사용한다. 안경과 보청기는 착용자들에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해상력을 가져다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다른 사물이 누군가에겐 보철처럼 장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인용한 과학자의 현미경이 그러한 예다. 현미경은 과학자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필수 조건이고, 그는 그가 신체에 내장된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시야에 익숙해야 하고, 그것을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몸에 직접 장착되지 않은 것도 우리의 감각에 이미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면, 그것 또한 우리의 신체에 임플란트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8

인간 신체를 보완해줄 수 있는 유용한 장치는 점점 작아져 몸에 더 착 붙는 형태로 발전한다. 인간을 대신해서 듣는 거대한 녹음기계와 인간이 들은 것을 다시 내뱉어주는 거대한 재생기기가 에어팟 사이즈가 되기까지 약 150년이 걸렸다면, 150년 뒤에는 어떤 것이 우리 몸에 붙어서 소리를 기록하거나 들려줄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탈부착되던 것들은 언젠가 몸에 영구장착될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긴 시간 속에서 인간 신체가 변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몸 바깥에 있는 안경이나 이어폰, 보청기 같은 외부 장착물들이 점차 신체 더 깊은 곳으로 향하며 ‘보철’이라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몸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다.

미셸 와이스비스(Michel Waisvisz)의 ‘핸즈(The Hands)’, 그리고 레티시아 소나미(Laetitia Sonami)의 ‘레이디스 글러브(Lady’s Glove)’는 글러브 타입의 악기다. 손의 움직임이 곧 소리로 이어지는 셈인데, 이것은 손으로 덩어리 형태의 다른 물체를 조작함으로써 소리를 내는 것보다 한층 몸에 더 가까워진다. 강지연의 작업 〈보이스〉는 손목의 센서를 통해 손의 위치에서 들을 수 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꺼내 들려준다. 즉 손을 귀 역할로 사용한다. 〈보이스〉는 ‘공간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이었고 공간 곳곳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추적하기 위해 강지연은 귀가 된 손을 움직인다. 시야를 크게 바꾸지 않고도 그는 다르게 듣는다.

이들의 작업은 악기의 장착과 신체의 확장의 접합지점에 있다. 지금은 얼굴에 씌워진 안경처럼 그들의 존재를 명확히 볼 수 있지만, 언젠가 그것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렌즈처럼 살짝 덧씌워지거나 아예 몸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곰곰이 떠올려본다. 손을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면 전자음이 진동하고, 가제트의 팔처럼 귀가 자라나 먼 곳에 있는 소리를 잘 듣게 된다면, 우리의 몸이 내는 소리와 듣는 소리, 그리고 그 몸들이 모여 사는 곳의 소리 풍경은 어떻게 될지 상상한다.

다음 이야기

다시, ‘언젠가부터 인간의 신체조건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음악적 환상들이 발견됐다.’는 첫 번째 상황을 다시 되돌아본다. 그것이 음악가 신체에 대한 몰이해 혹은 무신경에 의한 불찰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감히 비인간 주체들의 일들을 떠올리기 어렵지만 적어도) 인간 조건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질문하는 것이었다면, 그들의 접근은 이제 시작이었을 뿐 앞으로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늘 완전히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대단히 벗어나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에게 손가락이 열 개밖에 없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아이브스도 손가락 열두 개나 열세 개 정도면 칠 수 있는 것들을 썼지 아예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을 쓰진 않았다. 타악 연주가와 피아노 연주가에게 어깨 통증을 선사했던 작곡가들도 더 유연하고 길고 강한 팔과 어깨를 필요로 한 것이지 그렇다고 인간 신체와 완전히 다르게 생긴 무언가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제이의 일도 그저 상상에 불과했고, 헌든의 스폰도 협력할 뿐 스스로 우뚝 서지 않는다. 한 발짝 넘어서는 것은 가능했지만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진 않았다. 그것은 인간을 이루는 여러 구성요소 중 가장 단단한 존재론적 조건에 관여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거나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마 인간을 통해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구성해왔던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끄트머리에서 그것을 듣고 생각하는 나 또한 인간의 조건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소리를 구성하고 만드는 어떤 이들은 그 ‘인간’이라는 조건으로부터 일부 벗어나 보기 위해 아주 수고스러운 노력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엉겁결에 ‘인간’으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음악과 소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작업에 심는다. 한편 어떤 이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는다. 소리를 구성하고 만드는 일을 자신의 권한 밖으로 내보내고, 그저 벌어지는 일을 관찰한다. 사건을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어떤 장을 형성하고 거기서 무언가를 발견해보려 애쓴다.

혹자는 이미 있는 것들에 가서 조용히 마이크를 가져다 댄다. 다른 누군가는 나무가 내는 소리를 듣는다. 또 다른 이는 유리구슬들을 한자리에 모아둔다. 그들은 결코 우발적이지 않은, 아름다운 패턴으로 움직이며 스스로 소리 낸다.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여기서 노래하거나 움직이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눈앞의 유리구슬이라 간단히 답할 수 있겠지만, 실상 그 유리구슬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은 무엇이고, 그건 어떻게 작동하며,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구성해낸 움직임과는 얼마나 다를 것인가?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해서 복잡해진다.


  1. Charles Ives, Essays Befora a Sonata (New York: The Knickerbocker Press, 1920), 100 

  2. Kyle Gann, The Music of Conlon Nancarrow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digitally printed first paperback version, 2006), 193-200.  

  3. Emily Mackay, “Holly Herndon: Making music with her AI child Spawn”, BBC, 2019. 5. 11, https://www.bbc.com/culture/article/20190511-holly-herndon-making-music-with-her-ai-child-spawn

  4. 문석민, 오민, 신예슬, 『비정량 프렐류드』(서울: 작업실유령, 2022), 13. 

  5. 정혜윤, 「음악적 공간과 움직임, 은유인가 아닌가」, 『음악학』 18권 1호(2010), 114-115. 

  6. 김도현, 『동물의 눈』(서울: 나라원, 2015), 59. 

  7. Ben Warren and Manuela Nowotny, “Bridging the Gap Between Mammal and Insect Ears – A Comparative and Evolutionary View of Sound-Reception,” Behavioral and Evolutionary Ecology, 2021-07-29, https://doi.org/10.3389/fevo.2021.667218

  8. 후니다 킴, 신예슬, 『바라보고 읽어내는 장치 Through The Looking Apparatus』(2021), 14-15. 이 책은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21: 멀티버스’ 전시의 일환으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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