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을 불태워라!: 불 밝히는 트랜스 뮤지엄

안진국
안진국은 미술비평가이다. 홍익대학교에서 판화와 국어국문학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디지털문화정책을 공부했다. 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 평론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 비평을 시작했다. 미술비평가로 활동하기 전에는 시각예술가로 개인전 6회를 개최하고 단체전 50여 회에 참여했으며, 미술 비평을 하면서 종합 인문주의 정치 비평지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미술정책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불타는 유토피아』(2020)와 『한국현대판화 1981-1996』(2020), 『비평의 조건』(공저, 2019), 『기대감소의 시대와 근시 예술』(공저, 2017)이 있다.

미술관은 변하고 있다. 움직이고 있다. 불타고 있다. 미술관은 이제 단순히 미술 작품을 수집, 보존하고, 연구, 전시하는 경직된 곳이 아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고 공유되는 ‘공론장’으로 변하고 있다.

여전히 미술관(museums)1 은 “교육, 연구, 향유를 목적으로 인류 및 환경의 유형 및 무형의 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소통, 전시하고, 사회 및 그 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대중에게 개방된 항구적 비영리 기관”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 정의는 유네스코 산하 비정부 조직인 국제 박물관 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이하 ICOM)가 1946년 ICOM 헌장에서 정의한 이래, 1951년 규약 개칭 이후 6차례 개정(1961, 1974, 1989, 1995, 2001, 2007)을 거친 2007년의 최신 정의다. 하지만 이 정의는 근본적으로 1974년 정의와 같다. 1974년 이래 미술관의 정의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 들어 미술관의 역할이 다변화되면서 미술관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급기야 ICOM은 2019년에 기존과 크게 다른 새로운 미술관의 정의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ICOM은 2017년 1월 ‘미술관의 정의, 전망, 잠재력을 위한 상임 위원회’(Standing Committee for Museum Definition, Prospects and Potentials, 이하 MDPP)를 설치해 MDPP로부터 새로운 미술관 정의 추천안을 받았고, 2019년 9월에 교토에서 열린 제25회 ICOM 총회에서 이 개정안 채택을 논의했다. 새롭게 제안된 정의에 따르면, 미술관은 “과거와 미래에 관한 비판적 대화를 위한 민주적이고 포용적이며,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polyphonic; 다성의, 대유의) 공간”이다. 또한, “현재의 갈등과 도전을 인정하고 논제화”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다양한 기억들을 보호”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산에 대한 동등한 권리와 공평한 접근을 보장”하는 곳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 전 지구적 평등과 안녕 및 안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참여적이고 투명하며, 다양한 공동체를 존중하면서 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기존의 기능인] 수집, 보존, 연구, 해석, 전시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다. 이 제안된 정의에는 기존의 미술관과 어울리지 않는 낯선 내용들이 등장한다. ‘비판적 대화’, ‘민주적, 포용적’, ‘다성의 공간’, ‘논제화’, ‘동등한 권리와 공평한 접근’, ‘존엄성과 사회 정의’, ‘전 지구적 평등과 안녕’ 등. 이 새로운 미술관 정의는 우리가 알고 있던 미술관과 전혀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아쉽게도 이 정의는 현재 유보된 상태다. 제25회 ICOM 교토 총회 이전부터 ICOM 프랑스 측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고, 각 나라 사이의 의견 충돌로 인해 채택 투표를 통과하지 못했다.2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의 미술관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를 위해 상상하라: ‘모두의’ 미술관과 IT 상상의 미술관

물론 미술관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이 아니다. 단순히 ‘유형 및 무형 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소통, 교육, 전시 기능’을 하는 미술관에 대한 비판은 1980년대부터 있었으며, 이때 ‘신박물관학(New Museology)’이 등장하면서 사회 변화를 실천하는 장으로서 미술관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미술관이 변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ICOM이 1974년 이후 45년 만에 미술관의 정의를 전면적으로 개정하려는 것은 최근 세계의 체제가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 위기를 겪으며, 대처리즘(영국)과 레이거노믹스(미국)로 대표되던 신자유주의의 오작동을 경험했다. 이로써 저성장, 저금리, 고규제의 경제 및 경영 환경이 조성됐고, ‘뉴 노멀(New Normal)’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그런가 하면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신기술들이 전 세대의 삶을 바꿨다. 2007년부터 전 세계에 쏟아진 스마트폰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무선 정보 통신 기술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만민 디지털-인터넷 시대’를 열었으며, ‘21세기 석유’라고 불리는 빅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빅 데이터를 사용한 ‘딥 러닝(deep learning)’을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인공 지능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사이 환경은 더욱 피폐해졌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자본 축적의 과열화 양상은 지구를 채굴 대상으로 삼아 무참히 깎아냈다. 그 사이 엄청난 양의 탄소가 배출됐다. 이는 1970년 이후 지구 평균 기온이 7000년의 홀로세 기간의 평균 기온 상승률보다 170배 높은 ‘이상 기후’를 불러왔다. 이러한 행동은 기후 위기의 불구덩이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꼴과 다를 게 없었다. 인간의 자본주의적 욕망이 낳은 공장제 축산 산업은 육생 척추 동물의 총 질량 중 가축을 67%로 높인 반면, 야생 동물은 불과 3%에 지나지 않는 엄청난 불균형을 초래했다. (인간은 30%를 차지한다.)3 인구와 (인간을 위한) 가축의 증가는 야생 동물의 서식지를 감소시켰고, 활동 영역이 줄어든 야생 동물은 인간의 영역에 근접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러한 변화는 야생 동물을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에 인간이 쉽게 자주 노출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결국 바이러스의 숙주 역할이 인간에게도 넘어왔다. 이것이 바로 사스(2002), 신종플루(2009), 메르스(2015) 감염병이며, 2020년부터 장기간 전 세계를 얼어붙게 한 코로나19(COVID-19) 감염병이다. ‘인수 공통 감염병’으로 불리는 이 감염병들은 기후 위기와 함께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의 긴 목록 중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뉴 노멀 시대에, 수집과 연구를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소통과 전시를 통해 새로운 것을 실험하는 미술관은 지구적 공공성을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 사회적 공간의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 미술관을 바라보는 시각이 최근에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2009년에 비영미권의 7개 미술관이 연합해 만든 일종의 협의체인 ‘인터내셔널(L’Internationale, 랭테르나시오날)’은 “미술과 미술 기관이 … 전반적인 제도의 공식적인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논의하기 위한 적합한 플랫폼”4이라고 했다.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Pínacoteca de Sãulo) 디렉터 요헨 볼츠(Jochen Volz)는 베르비에 아트 서밋(Verbier Art Summit)의 2019년 연례 컨퍼런스에서 “예술이 다중적 진실을 기꺼이 지지하며 공공의 삶의 다른 영역에 이를 적용할 새로운 방법을 찾을 것”5이라고 말했다. ICOM의 새로운 미술관 정의에 관한 움직임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미술관의 새로운 정의를 준비하기 이전인 2015년 11월 유네스코가 「미술관과 소장품의 보호와 증진, 다양성과 사회적 역할에 관한 권고(Recommenda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Museums and Collections, their Diversity and their Role in Society, 이하 「보호, 증진, 다양성, 사회적 역할 권고」)」를 채택한 것을 보면, 이미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ICOM은 유네스코 산하 조직이다.)

MDPP가 제안한 새로운 미술관 정의가 채택되지 않았음에도 현재 세계 유명 미술관들은 이미 변하고 있다. 시대정신을 반영해 다양성과 다분야성, 사회적 역할과 공동체성 중시, 포용성과 비판성 등 새로운 미술관 정의가 추구했던 방향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영국의 테이트(Tate)는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소장품 수집의 우선 순위를 여성, LGBTQ+, 소수 민족, 유색 인종 예술가의 작품에 두기로 했다. 이는 인종, 문화, 종교, 성적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테이트의 중장기 계획이다.6 또한, 2025년까지의 핵심 목표 중 탄소 소비를 의미 있는 수준으로 크게 감축하기로 했다.7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은 「다양성과 포용, 동등한 접근에 관한 정책적 성명서」를 발표했으며,8 2020년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망 사건으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이 뜨겁게 불붙었을 때, 「2020년 반인종주의와 다양한 강한 공동체를 위한 13가지의 약속」을 제시하며 미술관의 시스템을 바꾸기로 선언했다.9 
더불어, 장애가 있는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다수 마련하고 있다. 미술관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주요 미술관이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Centre Georges-Pompidou)10와 호주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 11, 미국의 워커 아트센터(Walker Art Center)12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전 세계 각지 유수의 미술관이 지금까지 미술관에 오지 못했던 관객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도록 시설과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관객(non-audience)’을 미술관으로 부르고 있다.

현시대 체제 변화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IT(information technology, 정보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다. IT와 관련 매체는 전 세계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플랫폼 경제(platform economy), SNS, 탈진실(post-truth; 가짜 뉴스), 온라인 혐오, 마녀사냥, ‘신상털기’, 블록체인(blockchain), 대체 불가 토큰(non-fungible token, NFT), 가상화폐, 메타버스(metaverse) 등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개념과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미술관은 이러한 발전된 IT를 수용하고자 노력한다. 「보호, 증진, 다양성, 사회적 역할 권고」 제19항에서 “정보 통신 기술(ICTs)의 발달로 인한 변화는 … 미술관에 새로운 기회를 준다. 지식 공유 및 보급, 주요 기능 개선에 필요하다면 이러한 기술에 접근할 방법을 확보”해야 한다고 권고한다.13 굳이 이러한 권고가 없더라도, 다성의(polyphonic) 사회적 공간을 지향하는 오늘의 미술관은 물리적 미술관을 비물리적으로 확장하고 이동할 수 있는, 관객의 접촉면을 넓히고 상호 작용성을 높일 수 있는 IT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 영국의 테이트는 본 기관의 웹사이트 ‘테이트 온라인(Tate Online)’을 다섯 번째 미술관으로 표방하고 있으며,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마이크로소프트사와 함께 인공 지능을 이용한 ‘개방형 접근성(Open Access)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독일의 슈태델 미술관(Städelsches Kunstinstitut)은 광범위한 디지털 정보 제공 방식을 선보였으며, ‘타임머신(Time Machine)’이란 기획으로 19세기의 슈태델 미술관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는 가상현실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여러 세계적 미술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IT를 전시와 교육에 접목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구별짓기(La Distinction)』(1979)를 통해 문화 계급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음을 보여줬는데, 미술관은 그 도구 중 하나였다. 미술관은 오랫동안 사회문화적 계층을 구별 짓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오늘의 미술관은 ‘모두의’ 미술관을 추구하며 미술관을 찾지 않는 ‘비관객’을 포용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 중이다. 그중 IT는 비관객을 포용하는 데 매우 유용해 보인다. 물리적 미술관에 오지 않고도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는 방법, 혹은 ‘아비투스(habitus)’14로 미술관 문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이를 미술관으로 이끄는 방법은 편재(遍在)한 IT 미디어를 통로로 사용하여 확장된 미술관에 비관객(및 관객)을 접속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일상의 많은 만남이 비대면으로 이뤄지고, 물리적 공간을 자유롭게 방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IT에 의한 ‘확장현실(XR, eXtended Reality)로서 미술관’은 비관객의 포용을 넘어서 미술관을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이끌 것이다. 이것은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가 복제 기술로 작품의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탄생했다고 말한, 물리적 실체와 다른 의미를 지닌, ‘정신적인 것’으로서 상상의 장소, 바로 ‘상상의 미술관(Le Musée Imageinaire)’의 IT 버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은 것들아 부활하라: 전시의 증식

근대의 예술가와 비평가들은 미술관을 미술의 무덤으로 바라봤다. 미술관에 들어오는 작품들은 공식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미술관은 이 작품들이 더는 변하지 않도록 보존하고15, 이 완료형을 전시하고 연구하고 교육해야 했다. 따라서 근대적 미술관에 들어간 미술 작품은 박제품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변형 가능(mutable)하고 유동적(liquid)이며, 상호 작용성(interactivity)과 원격 현전(telepresence)이 가능한 뉴 미디어(new media)16가 미술관에 결합하는 순간, 죽은 것은 부활한다. 완료형이었던 미술 작품은 진행형으로 바뀌고, 실물 작품 앞에서 입안으로 삼키던 관객의 목소리는 뉴 미디어의 통로를 통해 발화돼 작품에 새로운 의미의 형상을 덧붙인다. 미술 작품 표면을 배회하는 다성적 목소리는 시시각각 작품의 내외적 의미를 변화시키며, 공동묘지 같은 미술관을 활력이 넘치는 축제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그렇지만 단순히 미술관이 뉴 미디어를 활용했다고 작품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작품은 유령이 되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한다.

앙드레 말로는 ‘상상의 미술관’을 이야기했다. 어떤 이는 이 미술관을 단순히 물리적 작품을 사진으로 담아 모아 놓은 화집 정도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상의 미술관은 화집과 다르다. 말로는 기존 미술관이 단정(affirmation)의 공간이었지만, ‘상상의 미술관’은 기존의 것에 대한 의문(interrogation)의 공간이라고 말했다.17 그렇기에 상상의 미술관은 원본 작품에 의문을 제기하는 복제 작품(사진), 즉 원본 작품과 다른 작품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말로는 사진이 다른 질감의 형상을 만든다고 말했다. 작품을 촬영하기 위해 조명을 비추고, 구도를 잡는 것, 세부를 생략하거나 작은 작품을 확대해 촬영하는 것 등 사진 촬영의 과정이 작품에 개입하면서 사실과는 동떨어진 다른 형상이 드러난다. 이로써 강렬한 가공의 예술이 탄생한다고 그는 말했다.18 하지만 이 또한 결과적으로 완료형 작품에서 잔상을 뽑아내는 것에 불과하다. 새로움으로 보기에는 ‘단정’의 느낌이 너무 강하다. 이것은 실물의 잔상, 그저 유령일 뿐이다. 그렇기에 죽은 미술을 살린다고 볼 수 없다.

뉴 미디어 차원에서 이러한 예술의 유령화는 크로스 플랫폼(cross-platform)과 멀티미디어(multimedia) 방식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같은 내용을 여러 미디어를 통해 교차 배포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전통 매체들의 개별 기능을 통합 및 혼합해 다양한 형식의 정보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두 방식 모두 원본 작품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추가로 얻게 되는 새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콘텐츠 전략으로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 이하 OSMU)를 들 수 있다. 하나의 원본을 다양한 매체로 변환하고 중첩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이다.19 여기서도 원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미술관의 전시 과정에서 OSMU는 지배적인 전략이다. 전시한(혹은 소장한) 작품을 설명한 글이나 촬영한 디지털 이미지를 웹사이트에 게시하는 것, 학예사가 작품을 설명하며 전시 투어 영상을 유튜브 계정에 올리는 것, 스마트폰 전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음성 가이드를 활용하게 하는 것, 혹은 작품 관련 아트 상품을 제작하는 것 등이 OSMU 전략의 소극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유령이 된 미술은 매체 사이를 유동하며, 다른 매체의 형식에 맞게 변형되지만, 원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원본 작품은 박제된 채로 존재한다. 이러한 다매체로의 확장은 비관객에게 미술관의 접촉면을 넓힌다는 면에서 분명히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위계 관계를 만드는 권위적 방식이다. 여기서 비관객(및 관객)은 박제된 미술을 그저 수용하는 수동적 존재밖에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유령화 방식이 아닌, 사용자(관객 및 비관객)가 능동적으로 참여해 죽은 미술에 숨을 불어 넣을 순 없는가? 뉴 미디어를 활용해서 미술관에 박제돼 존재하는 미술을 살아서 증식하는 미술로 바꿀 방법은 없는가? 여기서 다양한 매체를 넘나든다는 측면에서 OSMU와 유사해 보이지만, 개념의 심층적인 함의가 전혀 다른 트랜스미디어(transmedia)20를 떠올릴 수 있다.

‘트랜스(trans-)’는 가로지르고 초월하고 경계를 통과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단(縱斷)이 아닌 횡단(橫斷)을, 수직적이거나 위계적이 아닌 수평적이고 네트워크적인 이동을, 통시성보다는 공시성을 함의한다. 예술과 미디어 생산에서는 초문화적 접촉, 초텍스트적 교차, 초매체적 연결과 관계된 다양한 움직임을 뜻하기도 한다.21 따라서 트랜스미디어는 여러 문화, 텍스트, 미디어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다양한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움직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움직임에서 중요한 것은 ‘자족성’과 ‘통합성’의 동시 실현이다. 트랜스미디어는 형성된 내러티브들이 독립된 모듈로서 자족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더불어 다채롭게 변주된 내러티브들이 이것을 포괄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유연함 속에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완결된 구조, 즉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해야 한다.

사실 트랜스미디어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트랜스미디어는 매체를,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매체의 서사 형성을 의미한다.) 쉬운 예로 『해리 포터(Harry Potter)』를 들 수 있다. 『해리 포터』는 소설, 영화, 게임, 테마파크, 포터모어(J. K. 롤링이 만든 웹사이트) 등 다양한 미디어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미디어가 각각 독립된 모듈로 기능하면서도 합치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통합체가 된다. 이러한 트랜스미디어 현상을 로버트 프래튼(Robert Pratten)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도식화했다(도1).

로버트 프래튼이 트랜스미디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도표로 왼쪽에는 영화, 게임, 책을 상징하는 각각의 퍼즐 형태가 독립적으로도 존재하지만, 오른쪽에는 독립된 퍼즐이 하나의 조각으로 맞춰지면서 트랜스미디어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도판1] 로버트 프래튼, ‘트랜스미디어 현상’ (출처: Robert Pratten, “Transmedia in Pictures,” Zen Films, Sep 11, 2009.)

트랜스미디어에서는 사용자가 중요하다. 사용자는 트랜스미디어의 공간에서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주체다. OSMU 전략이 세로 축 방향으로, 트랜스미디어 프랜차이즈 전략이 가로 축으로 ‘트랜스’할 수 있는 반면, 사용자는 방향성 없이 트랜스미디어의 장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다. 작품 향유를 위해서 사용자는 방향과 순서에 상관없는 이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쉬운 예로 『해리 포터』를 들 수 있다. 『해리 포터』의 스토리텔링 증식은 (도2)와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해리포터의 다양한 팬 커뮤니티에서는 팬들 간의 소통을 이루고 데이터를 축적하며, 팬들의 창작 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로 인해 팬픽과 같은 자족적이면서도 통합적인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가 창작된다. 해외의 대표적인 커뮤니티는 ‘해리 포터 위키아’, ‘해리 포터 서브레딧’ 등이 있으며, 국내에서는 네이버 카페에 ‘해리 포터와 머글들의 이야기’, ‘미스터포터의 해리 포터’, 디씨인사이드에 ‘해리 포터 마이너 갤러리’ 등이 대표적이다.22

해리 포터를 예로 들어 트랜스미디어 현상을 설명한 도표로, 세로축은 미디어를 가로지르는 현상을, 가로축은 프랜차이즈로 확장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도판2] ‘『해리 포터』 시리즈의 사용자 향유와 창작’
(출처: 윤혜영, 「트랜스미디어에 대한 개념적 고찰」,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9(11) (2019), 650.)

트랜스미디어 사용자는 단순히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닌, 적극적인 가담자로서 전체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대체현실 게임(Alternate Reality Game, ARG)에서처럼 등장 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콘텐츠 향유와 창작 사이를 오가며 소비와 비평을 겸하는 ‘크리슈머(creasumer)’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원하는 콘텐츠를 선택하고 조합해서 향유하는 큐레이터(curator)가 되기도 한다. 또는, 창작자이자 소비자로서의 ‘프로슈머(prosumer)’가 된다.23

트랜스미디어에서 주체가 되는 사용자를 설명한 도표로, 여기서 사용자 개념은 향유와 창작의 행위의 주체이며, 각각 크리슈머, 큐레이터, 프로슈머로 불린다.
[표 1] 트랜스미디어 사용자

따라서 미술관에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적용하면, 관객 및 비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불러와 완료형의 전시(혹은 소장)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변하고 증식하는 진행형 작품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변종을 만들다: 개인 고유의 논리를 구축하는 트랜스미디어 미술관

제니 키드(Jenny Kidd)는 『새로운 미디어스케이프의 미술관(Museums in the new Mediascape)』(2014)에서 미술관의 트랜스미디어 적용 방식을 탐색한다. 여기서 키드는 ‘브루넬의 SS 그레이트 브리튼(Brunel’s SS Great Britain)’을 포함해 20개의 미술관과 갤러리를 분석하여 미술관의 트랜스미디어 특성을 네 가지로 꼽는다. 바로 ‘공동의 장소24와 편만함(co-location and pervasiveness)’, ‘세분화(granularity)’, ‘미완성(incompletion)’, ‘몰입감과 유희성(immersion and playfulness)’이다.25

[도판3] ‘브루넬의 SS 그레이트 브리튼(Brunel’s SS Great Britain)’ 안내도.
①Go Aloft ②Horse & Wagonette ③Dockyard Cafe Bar ④Visitor Centre ⑤Brunel Institute ⑥Dry Dock ⑦Victorian Pissoir ⑧First Class Dining Saloon ⑨Vee Engine ⑩Dockyard Museum ⑪Flash Bang Wallop ⑫Below Deck
[도3의 ⑥]: ‘드라이 도크(Dry Dock)’의 모습.

키드는 이러한 미술관의 트랜스미디어 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영국 브리스톨의 그레이트 웨스턴 항만(Great Western Dockyard)에 정박해 있는 ‘브루넬의 SS 그레이트 브리튼’을 그 사례로 제시한다. 2005년 ‘세상을 바꾼 배’로 대중에게 공개된 이곳은 ‘SS 그레이트 브리튼’이라고 불리는 선박과 그 주변을 물리적 박물관으로 조성한 곳으로, 상점, 카페, 연구소 등 총 8개의 구역으로 구성돼 있다(도3). 방문자는 배 옆에 세워져 있는 항만 박물관(Dockyard Museum)(도3의 ⑩)에서 배를 조정하거나 터빈을 돌리는 수동 인터렉티브 게임에 참여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시청각 자료를 볼 수 있다. 또한 항만에서 마치 ‘바닷속으로’ 들어가듯이 ‘드라이 도크(Dry Dock; 마른 부두)’(도3의 ⑥)로 내려가 그곳을 걸으며 배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을 직접 경험할 수 있고, 투명 아크릴 수지로 돼 있는 ‘드라이 도크’의 천장에서 굴절돼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며 마치 실제 바다 아래에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느낄 수 있다. 배에 탑승하면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일등석 승객부터 배의 고양이까지 네 가지 중 하나를 탐색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티켓과 QR 코드, SNS를 팔로우하고 댓글을 달고 공유하라는 메시지, 박물관의 지도가 있는 전단이 제공된다. SS 그레이트 브리튼은 온라인을 통해서도 다양한 경험을 권장하는데, 역동적인 웹사이트에는 아카이브 자료 링크와 상호 작용 기능을 가진 게임 등이 존재하며,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의 SNS는 정보 제공과 소통 창구로 활용된다.26 제니 키드는 SS 그레이트 브리튼이 “다양한 내러티브를 제공하는데, 이러한 내러티브는 방문자가 구성해 가는 이야기에 영향을 주며” “[여기에서 제공하는] 내러티브에 대한 경험은 이미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범위와 조합, 조정, 조우에 따라 다중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27 쉽게 말하면, 방문자는 다양한 정보를 선택하고 조합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미술관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키드가 말한 미술관 트랜스미디어의 네 가지 특성(‘공동의 장소와 편안함’, ‘세분화’, ‘미완성’, ‘몰입감과 유희성’)을 기초로 다양한 내러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때 어떠한 가치를 중심에 두고 이런 내러티브들을 제공하느냐에 따라 구축된 통합체의 성격이 달라진다. SS 그레이트 브리튼의 경우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선박에서의 생활, 브루넬의 생애와 선박 제작 업적, 이 선박이 운항할 당시의 상황, 선박의 운행 방식, 바다 아래의 경험 등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선박에 관련된 지식을 중심으로 다양한 내러티브가 형성돼 있다. 따라서 SS 그레이트 브리튼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성격은 역사와 선박에 관한 ‘교육’적 측면이 강하다. 온라인 및 오프라인 방문자는 이런 내러티브들을 기초로 향유와 창작을 횡단하며 크리슈머, 큐레이터, 프리슈머가 되어 자신만의 독립된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게 된다. 이렇듯 관객 및 비관객의 능동적 활동을 이끌어 내는 트랜스미디어는 기본적인 내러티브의 성격에 따라 ‘교육’, ‘놀이’, ‘제작’, ‘지식 공유’ 등 다양한 가치를 지향하게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방식은 (박물관과 구별하여 정의하는) 미술관에 더 유효할 수 있다. 특정 유물을 가지고 상설 전시를 진행하는 박물관과 달리, 연구를 통해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고 그것에 맞춰 기획해 선별된 작품을 전시 및 교육하는 것이 주요한 역할인 미술관은 순간순간 변하는 미학과 시대정신이 반영된 가치를 선보여야 한다. 이때 미술 작품들과 트랜스미디어의 내러티브를 통해 방향성을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율적 주체인 관객 및 비관객에게 자유로움을 주면서도 미술관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계획 중인 ‘온라인 지식 플랫폼’은 방문자(reader) 중심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실험으로, ‘공동의 장소’가 된 미술관의 온라인 공간에서 지금까지 미술관이 생산한 ‘편만한’ 지식을 방문자가 자신만의 기준(혹은 취향)에 따라 부분적으로 발췌하고 조합해 재구조화하고 공유하는 방식이다. 트랜스미디어 연구의 주요한 학자인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참여하는 시대에 세계 구축은 그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따른다”고 말했다.28 이 실험은 개인의 고유한 논리에 따른 지식의 선별, 재구조화, 공유하면서 개인의 세계를 구축하게 할 것이다. 자족적인 지식이 창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들이 모이면, 지식의 다양성은 증진될 것이다.

MDPP가 새롭게 제안한 미술관의 정의에서 추구했던 “현재의 갈등과 도전을 인정하고 논제화”도 트랜스미디어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와 셰릴 우 던(Sheryl Wu Dunn)이 2009년 출간한 『절망 너머 희망으로(Half the Sky)』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되는 과정을 통해 미술관의 트랜스미디어 액티비즘(activism)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의 여성 인권 보고서인 『절망 너머 희망으로』는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여성의 처참하고 비극적인 실상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했다.29 이후 이 책을 기반으로 미국 출신 배우 6인이 아프가니스탄, 케냐, 캄보디아, 파키스탄, 라이베리아, 시에라, 인도 등의 개발 도상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아동 노동, 성매매, 성폭력 및 성기 절단의 희생자들을 만나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30 PBS TV는 2012년에 이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이뤄진 것이다. 이어 게임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또 다른 공간으로 등장했다. 인도와 동아프리카의 지역 사회를 겨냥한 〈9분(9 minutes)〉, 〈웜 공격(Worm Attack)〉, 〈가족의 가치(Family Values)〉라는 3개의 모바일 게임이 출시된 것이다.31 그리고 연관된 페이스북 게임도 제작됐다. 이 페이스북 게임은 플레이어가 선택한 지역에서 여성이 생계를 위해 일하고 생활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했다. 게임을 하면서 페이스북 친구나 지인에게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알릴 수 있고, 필요한 자원들을 요청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친구들에게 게임을 알리고, 그 취지를 홍보하게 된다. 더불어 게임을 통해 기부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웹사이트와 교육용 비디오 모듈로도 제작돼 또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줬다.32 이렇듯 『절망 너머 희망으로』는 미디어를 가로지르며 다큐멘터리로, 모바일 게임으로, 페이스북 게임으로, 웹사이트로, 교육용 비디오로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집합체가 될 수 있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형성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시키고, 그 문제에 ‘참여’해 의견을 나타내거나 공유하거나 기부하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 내면서 ‘변화’를 이뤄 나갔다.

미술관의 트랜스미디어 액티비즘도 가능하다. 『절망 너머 희망으로』와 유사하게 단일한 문제 의식을 일으키는 미술 작품들을 다양한 미디어 형태로 미술관에 전시하고, (다층적인) 웹사이트와 (작품 설명글이나 전시글이 아닌, 느슨하게 연관된 독립적인 문학작품으로서) 글, (전시 서사를 풍부하게 하면서도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오디오 가이드 등을 제작해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통합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더불어 관객 및 비관객이 크리슈머, 큐레이터, 프리슈머가 되어 온라인 및 오프라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열어 놓음으로써 비선형적이고 유동적인 트랜스미디어 미술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통합체 구축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세계에 들어 온 사람에게 ‘문제 인식 → 참여 → 행동 → 변화’로 이어지는 움직임을 이끌어 낼 것이다.

계속 빛날 것인가, 재가 될 것인가

하지만 트랜스미디어가 장밋빛 전망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낳은 비대면 상황은 ‘N스크린’ 33현상을 더욱 확산하고 가속시켰다. N스크린 서비스는 ‘네트워크, 플랫폼, 단말기, 콘텐츠’라는 전통 미디어 가치 사슬을 수직적 결합에서 수평으로 구조화하면서 다양한 플랫폼과 단말기를 서로 연계, 교차, 통합했다. 그 대표적인 서비스가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다. 사용자는 N스크린 서비스로 인해 이제 시청과 관람의 자유를 갖게 됐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양한 미디어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미술관도 모든 단말기에 맞게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어려움이 크다. 「보호, 증진, 다양성, 사회적 역할 권고」 제29항에는 “신기술이나 신기술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지식과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미술관의 입장에서 신기술은 오히려 잠재적인 장벽이 된다” 34라고 지적했다. 관객 및 비관객은 신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격차가 클 뿐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기기도 제각각이며, 성능도 다르다. 또한, 관객 및 비관객 중에는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오히려 더 어려움이 클지도 모른다. 물리적 미술관에서는 그들을 돕는 다양한 규정이 존재하지만, 온라인에서는 그들을 배려한 옵션을 제공하기 힘들고 원격으로 그들을 돕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장애 유형에 맞춰 웹사이트를 별도로 마련해 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많지 않은 예산을 가지고 그것이 가능할까?) 다양한 포맷의 단말기에 맞는 다양한 버전의 웹사이트를 만드는 것은 재정적인 부담이 크다. 그래서 쉽지 않은 일이다. 넷플릭스와 같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서는 미래의 수익을 위해 거대한 투자 비용을 들이며 신기술을 견인할 수 있지만, 이윤 추구보다 공공성에 방점이 있는 미술관이 신기술에 즉각적으로 재정을 투입하기란 쉽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가 되면서 N스크린 서비스가 큰 폭으로 발전하고, 온라인이 기준처럼 자리 잡으면서 기술에 접근하기 어려운 관객 및 비관객과 재정에 여유가 없는 미술관 양쪽 모두 온라인 기술에 관한 부담감이 더 커졌다. 이전에는 트랜스미디어가 책, 지도, 미술 작품 등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영화, SNS, 웹사이트, 디지털 게임 등 디지털 매체를 횡단하며 다채롭게 스토리텔링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많은 상호 작용성 기능을 디지털 매체가 흡수하면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도 디지털 기술로 편중돼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다른 이슈는 저작권 문제다. 기관 내부에서 미술 작품에 대한 저작권 문제를 해결해 다양한 포맷과 내용으로 작품을 변주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미술 작품의 원저작자에게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요청할 수도 있고, 혹은 기획자나 큐레이터가 원저작자와의 합의나 소통을 통해 특정 작품의 스토리텔링을 진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트랜스미디어에서 사용자가 중요하고, 그들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사용자는 소비, 수집, 조합, 창작이 가능한 존재로 자신의 고유 논리에 따라 자족적인 모듈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듈은 전체 통합체에서 하나의 독립된 부분을 차지한다. 사용자의 이러한 행위는 새로운 내러티브의 창작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봤을 때 원작의 파생 작품을 만드는 작업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사용자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작업이 인기를 얻고, 금전적인 이익이 발생한다면 저작권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사용자는 불특정 다수로, 미술관에서 섬세하게 접근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미리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사전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특정 작품을 내러티브의 중심에 두는 것을 피하고, 전시 기획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 혹은 하나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기획에 방점을 두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러면 미술관의 기획이 저작권을 가지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줄어든다. (그렇다고 아주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기획자가 자신의 기획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데, 이럴 때는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또는, 저작권 소멸 콘텐츠를 사용하거나 원저작자와 여러 측면에서 세세히 저작권 합의를 이룬 후 진행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1900년대 초 아방가르드 예술가(특히 미래주의자)는 “미술관을 불태워라”라는 강력한 발언을 했다. 그들은 과거의 것을 지워버리려는 강렬한 욕구를 이 발언에 담아 외쳤다. 이제 미술관은 불타고 있다. 과거의 것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리적 경계를 벗어 버리려고 미술관 스스로가 불을 지폈다. 강렬한 불빛을 뿜어내는 납작한 액정 화면 안에서 온라인 미술관은 불타고 있다. 빛나고 있다. 하지만 연료가 사라지는 순간 불타오르던 불빛은 꺼지고 재만 남게 될 것이다. 과연 미술관은 온라인 액정 화면 안에서 계속 빛날 수 있을까? 계속 불타오를 수 있을까? 혹시 물리적 미술관을 불태우면서 그 빛으로 온라인 액정 화면 속 미술관만 화려하게 빛나는 건 아닐까? 어느 순간 물리적 미술관은 재가 돼 힘을 잃어버리고, 온라인 미술관만 꺼지지 않는 불을 태우며 빛나게 되는 건 아닐까?
미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미술관을 불태워야 할 시간인 것만은 분명하다.


  1. 영어의 ‘museums’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칭하는 용어다. 프랑스어의 ‘musée’도 미술관과 박물관을 동시에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분해 사용하는데, 이는 미술관 및 박물관을 제도적으로 분리한 일본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museums’를 ‘미술관’으로 번역할 것이며, 의미의 명확성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박물관’을 사용할 것이다. 

  2. ICOM의 새로운 미술관 정의 개정 과정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변지혜, 「ICOM의 박물관 정의 개정 논의 연구—박물관경영의 예측과 제안을 중심으로」, 『예술경영연구』 54 (한국예술경영학회, 2020). 

  3.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 정서진 옮김 (이상북스, 2018), 76. 

  4. “About L’internationale” (2021년 6월 10일 검색). 

  5. “2019 Verbier Art Summit Reflections and Findings,” Verbier Art Summit (February 2019); 임근혜, 「’광장’을 향한 21세기 미술관 담론의 전개 양상」,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전』 (국립현대미술관, 2019), 400 재인용. 

  6. TATE VISION 2020–25 (Tate, 2019), 13. 

  7. 같은 책, 4. 

  8. “Institutional Diversity, Inclusion, and Equal Access Policy Statement,” (2021년 6월 13일 검색). 

  9. “Our Commitments to Anti-Racism, Diversity, and a Stronger Community” (2021년 6월 13일 검색). 

  10. 독립적인 관객 개발 부서를 마련해 장애인 관객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을 세부적으로 수립하고 운영하고 있다. 

  11. 모든 연령대의 장애인 또는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창의적 프로그램인 ‘벨라(Bella) 프로그램’을 연령과 관계에 따라 세분화해서 진행하고, 치매 노인과 보호자에게 삶의 풍요를 경험하게 하는 ‘아트풀(ARTFUL)’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2. 자폐증 스펙트럼 장애 또는 발달 장애인을 위한 ‘감각적인 일요일(Sensory Friendly Sunday)’과 ‘신경 다양성 방문자 투어(Tours for Neurodiverse Visitors)’, 치매 관람객과 보호자를 위한 ‘동시대 여행(Contemporary Journeys)’, 시각 장애가 있거나 시력이 낮은 방문객을 위한 ‘구두 해설과 터치 투어(Verbal Description and Touch Tours)’ 등을 운영 중이다. 

  13. ICOM 한국위원회, 「박물관 및 컬렉션 보호와 증진, 다양성과 사회적 역할에 관한 권고」 (2016), 7–8. 

  14. 부르디외가 만든 개념으로 사회적 위치, 교육 환경, 계급 위상 등 후천적인 조건들로 인해서 길러진 개인의 성향을 의미한다. 

  15. 과정 미술 작품의 경우, ‘변하는 과정’이 멈추지 않도록 관리함으로써 “변하지 않도록 보존”한다. 

  16.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는 ‘뉴 미디어’를 단순히 컴퓨터나 디지털 기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계산 기술과 미디어 기술이 합쳐진 것으로, 근본적으로 수적 재현, 모듈성, 자동화, 가변성, 부호 변환을 원리로 지닌 미디어를 ‘뉴 미디어’로 정의한다. 따라서 현재의 디지털 기반 매체를 통칭하는 의미로 ‘뉴 미디어’를 사용할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하라. 레프 마노비치, 『뉴 미디어의 언어』, 서정신 옮김 (생각의 나무, 2014). 

  17. André Malraux, Le Mus←e Imaginaire (Paris: Gallimard, 1965), 176. 
 

  18. 앙드레 말로, 『상상의 박물관』,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19. OSMU은 하나의 콘텐츠를 영화, 게임, 음반,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 장난감, 출판 등 다양한 장르로 변용하는 방식이다. 

  20. 문화연구가 마샤 킨더(Marsha Kinder)가 1991년에 처음 사용한 ‘트랜스미디어’는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가 2006년 『컨버전스 컬처(convergence culture)』에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 국내외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1. 조윤경, 「접두어 ‘trans-’의 인문학적 함의—탈경계 인문학 연구를 위한 개념 고찰을 중심으로」, 『탈경계 인문학』 3(3) (2010), 6–10. 

  22. 윤혜영, 「트랜스미디어에 대한 개념적 고찰」,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9(11) (2019), 650. 

  23. 같은 글. 

  24. 다른 미디어, 다른 미술관, 다른 콘텐츠, 경험을 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가 같은 공간에 함께 존재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25. Jenny Kidd, Museums in the New Mediascape: Transmedia, Participation, Ethics (Ashgate Publishing, Ltd., 2014), 33. 

  26. 같은 글, 30-32. 

  27. 같은 글, 32. 

  28. 신정아, 「트랜스미디어 콘텐츠의 개발 전략」, 『문화 콘텐츠와 트랜스미디어』, 박치완 외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86. 

  29. 이 책에서는 해당 여성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방법을 강구한다. 그리고 현지에서 그녀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여러 단체와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개인 및 단체를 소개하면서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촉구한다. 

  30. 이 다큐멘터리에서 출연자들이 만난 대부분 여아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부는 납치당했다. 또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심각한 폭력 문제를 보여주기도 했다. 

  31. 여성과 소녀들의 9개월간 임신 과정을 게임으로 만든 〈9분〉은 짧고 설득력 있게 이 과정을 경험도록 했다. 7세 이상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웜 공격〉은 복부 안에 있는 벌레들을 물리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방법을 알려주는 게임이다. 인터렉티브 연속극인 〈가족의 가치〉는 아동이 노동이나 조기 결혼에 대한 반대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여자 아이의 교육 기회 확대를 드러냄으로써 한 가정에서 여자 아이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 제작됐다.  

  32. 김희경, 남정은, 『트랜스미디어 액티비즘』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72. 

  33. ‘N스크린’은 두 가지의 어원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수학에서 미지수를 의미하는 N과 스크린의 합성어다. 여기서 N은 ‘N 분의 1’로 나눈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N을 뜻한다. 둘째, Network의 N과 스크린의 합성어다. 따라서 N스크린은 ‘여러 개의 화면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네트워크 서비스’를 뜻한다. 

  34. ICOM 한국위원회, 「박물관 및 컬렉션 보호와 증진, 다양성과 사회적 역할에 관한 권고」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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