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를 스크리닝하기: 임철민의 〈야광〉

장한길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운드 작가이자, 번역가이자, 평론가이다. 소위 ‘필드’ 혹은 ‘현장’에서 사용되는 동시대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목소리와 구술성에 관련된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공적 기억의 형성에서 기술매체가 수행하는 역할을 실험적으로 다룬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으며, 그에 관해 웹진 『세미나』, 『그래픽』 타이포잔치 특별호, 『퐁』,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 등에 글을 게재했다. 이외에도 『딕테』(DICTEE)에 대해 쓴 석사 논문이 국역되어 『동방학지』에 게재되었고, 2018 베트남 시민평화법정 조사팀원으로 일하면서 『한겨레 21』 및 Asia-Pacific Journal에 기고한 바 있다. 번역서로는 『무의미의 제국』(2024년 출간 예정), 공역으로 참여한 『짐을 끄는 짐승들』 등이 있다.

어떠한 사건이 집단적 기억으로 남으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것이 기억되는 방식을 통해 영향을 받게 된다. 1990년 초반에 마리안 허쉬(Marianne Hirsch)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기억도 기억으로서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포스트메모리’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이후 2012년에 출간된 허쉬의 단행본 제목 『포스트메모리 세대(The Generation of Postmemory)』에는, 한 사건을 같은 시대에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포스트메모리 세대’가 늘어나면서 생기는 공적 기억의 지형 변화가 암시되어 있다.

오늘날 허쉬의 개념은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기억’ 같은 것을 형성하게 되는 현상을 분석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한다. 포스트메모리가 일반적인 기억과 다른 점은 과거와 연결되는 주된 방식이 상기가 아닌 상상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허쉬가 포스트메모리 개념을 고안하게 된 계기 중 하나, 즉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 같이 홀로코스트 이후에 태어나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험자인 가족 또는 가까운 사람들의 기억을 다루는 작가들의 작업이 있었다.

임철민의 〈야광〉(2018) 또한 상기가 아닌 상상에 의존해야 하는 작업이다. 〈야광〉은 크루징스팟으로서 기능하던 1970년대 서울 종로 일대의 극장을 소재로 한다. ‘크루징(cruising)’이란 공원, 다방, 극장, 터미널 등 공공장소에서 성소수자들이 서로를 만나기 위해 배회하는 것을 뜻하는데, 만남의 장이 대부분 온라인으로 옮겨간 오늘날, 크루징은 과거의 것이 되었다. 크루징은 기록되지 못하고 공적 기억에 남지 못한 한국의 성소수자 역사의 일부이다. 한국에서는 포스트메모리와 함께, ‘비경험세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곤 하는데, 이러한 용어는 기억, 특히 공적 기억이 경합의 대상이 될 때 유용하다. 다양한 종류의 기억이 서로 부딪치게 되면, 몇몇 기억은 필연적으로 ‘기억’으로서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 한국 사회에서 크루징에 관한 기억은 물론, 퀴어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포스트메모리, 혹은 비경험세대의 기억은 서로 다른 상상, 그리고 망각의 욕망이 충돌하는 장이 된다.

“트랜스와 퀴어가 한국 사회에 존재해 온 역사를 삭제”하는 것은 이성애 규범적 사회로서의 한국이라는 “망상”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망각의 일환이라는 루인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1 〈야광〉이 다루는 크루징스팟으로서의 극장 역시 가시적인 흔적이 매우 희미한 주제이다. ‘비경험세대’라고 할 수 있는 임철민이 크루징스팟으로서의 극장을 어떤 방식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전하려 하는가?2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비단 크루징스팟이라는 소재만이 아니라 ‘비경험세대’로서 경험하지 않은 주제들을 다뤄야만 할 때, 중요한 참조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경험: 임철민과 앤디 워홀

크루징 같은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재를 다룬다는 것 외에도 〈야광〉은 앤디 워홀의 초기 영화와 접점이 많다. 〈야광〉의 영문 제목인 ‘글로 잡(glow job)’은, 임철민이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영어로 구강성교를 뜻하는 ‘블로 잡(blow job)’을 연상시키도록 의도된 것인데,3 공교롭게도 앤디 워홀 역시 1964년 〈블로 잡〉이라는 영화를 만든 바 있다. 여기에는 배우 드버렌 북월터(DeVeren Bookwalter)가 제목 그대로 (짐작건대 다른 남자로부터) 블로 잡을 받는 모습이 담겨 있으며, 41분의 러닝타임 동안 카메라는 북월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채 고정되어 있다.4 이렇게 고정된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만으로는 실제로 구강성교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으며, 북월터의 표정과 머리 움직임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그림1) 미술사학자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주 짧은 시간 뒤에, 어쩌면 두 번째 릴의 중간부터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관객]는 우리가 이미 봤던 것의—미세한 변화를 동반한—반복만을 볼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남자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볼 거고, 시선을 위로 하거나, 아래로 하거나, 앞으로 향하게 하거나, 가끔은 양옆으로 돌릴 것이다. 5

앤디 워홀, <블로 잡>, 1964
Andy Warhol, Blow Job, 1964
16mm film, black-and-white, silent, 41 minutes at 16 frames per second
© The Andy Warhol Museum, Pittsburgh, PA, a museum of Carnegie Institute. All rights reserved.
Film still courtesy The Andy Warhol Museum

‘반복’을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야광〉 또한 마찬가지로, 후반부 후시녹음 장면이나, 화면이 적색, 녹색, 청색으로 깜박이는 플리커(flicker) 장면 모두 반복 재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도, 〈야광〉은 대부분이 매우 정적인 롱 테이크로 구성되어 있고 카메라 움직임이 전무한데,6 고정된 프레임과 이를 지루할 정도로 길게 유지하는 형식은 워홀 초기 영화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도 꼽힌다. 〈블로 잡〉의 41분이 길게 느껴졌다면, 고정 프레임으로 잠든 상태의 존 지오노(John Giorno)를 촬영한, 총 5시간 20분 길이의 〈잠〉(1964)을 보며 러닝타임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이 두 영화에서는 적어도 고정된 프레임 내에서 피사체가 조금씩 움직이기라도 하는데, 8시간 길이의 〈엠파이어〉(1965)에서는 피사체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즉 건물이기 때문에 피사체의 움직임마저도 전무하다.7 워홀은 고정 프레임 촬영에서 더 나아가 아예 프레임 자체를 정지시키기도 하는데, 앞서 언급한 〈잠〉은 잠든 존 지오노의 얼굴을 담은 정지 프레임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임철민 또한 〈야광〉에서 정지 프레임을 사용하는데, 후시녹음 장면 직후 정지 영상에 ‘데이 포 나이트(day for night)’라는 시각 효과를 입히는 과정을 담은 장면이 여기에 해당한다.

임철민과 앤디 워홀이 공통으로 활용하는 영화의 형식 요소인 고정된 프레임, 반복 재생, 정지 프레임, 그리고 플리커는 사실 P. 아담스 시트니(P. Adams Sitney)가 자신의 1969년 글에서 명명한 구조주의 영화의 네 가지 주요 특징이자, 앤디 워홀을 구조주의 영화의 선구자로 지목하기 위한 근거로서 제시한 바 있다.8 하지만 당시 시트니의 이러한 주장은 구미(歐美) 실험영화계에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시트니의 글은, 특히 워홀을 구조주의 영화의 선구자로 지목한 것에 대해 게재 직후 피터 쿠벨카, 조지 마키우나스 등 당대의 저명한 실험영화인들의 반박을 불러일으켰고 이후에도 폴 아서, 브루스 젠킨스 등이 시트니의 정의의 타당성에 대해 논쟁한 바 있다.9 구미의 실험영화인들은 이미 워홀 이전부터 주류 극영화의 서사적 그리고 재현적 역량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으며, 영화의 매개적 성격, 즉 우리가 감각하고 있는 대상과 우리의 지각 사이를 영화가 그리고 영화를 구성하는 물리적 조건들이 어떻게 매개하고 있는지를 부각하는 것이 중요 의제였다. 이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작업에서 전개하고자 시트니가 제시한 구조주의 영화의 네 가지 특징을 포함한 다양한 실험 양식을 이미 활용해 왔기 때문에, 시간적 선후관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쓴 시트니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또한 시트니가 열거한 요소들은 이후의 실험영상 작가들 (그리고 주류 극영화 감독들까지) 사이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고, 활용 방식 또한 작가마다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임철민과 앤디 워홀이 단순히 그 특징들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둘의 작업을 유의미하게 비교해 보기 위해서는 앞서 인용한 크림프의 글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블로 잡〉에 대한 에세이에서 크림프가 강조하는 것은, 〈블로 잡〉을 보다가 문득 앞으로 보게 될 내용이 “이미 봤던 것의 반복”일 거라고 자각하는 순간이다.10 그는 이러한 자각을 익숙한 방식의 영화 관람방식에서 탈피해 더욱 자유롭고 다른 관람방식을 추구하는 기회로 삼았는데, 시트니는 이러한 자각이 유도하는 좀 더 일반적인 반응, 즉 ‘지루함’에서 워홀 영화의 차별점을 찾았다. 처음 구조주의 영화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나서 몇 년 뒤 출간한 자신의 저서 『시각영화(Visionary Film)』(1974) 에서, 시트니는 다른 구조주의 영화 작가들로부터 워홀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듀레이션(duration)’, 즉 영화가 만들어 내는 시간의 경험에 있다고 설명했다.11 이는 동일함 혹은 유사함의 반복이 지루하게 지속되는 시간, 즉 견뎌내야 하는 시간을 가리킨다.12

시트니는 구조주의 형식 실험의 핵심은 관객이 영화의 매개적 성격이나 통각적인(apperceptive) 조건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구조주의 영상작가들은 그들의 영화가 길어지거나 늘어져도, 관객이 인내하고 보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워홀이 고정 프레임, 정지 프레임, 반복재생, 그리고 심지어 초당 24프레임으로 촬영된 영화의 상영 속도를 초당 16프레임으로 줄여 관람 시간을 인위적으로 늘렸던 것은 어떤 메타적인 인식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반복적인 것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 관객이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을 시험대에 올린 것으로 분석했다.

그[앤디 워홀]는 관객의 최초 지각 상태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최초의 영화 제작자였다. 그저 기다리는 것만으로, 인내심 있는 관객은 영화 속 이미지의 동일함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꿀 것이다. 워홀은 비어있음, 혹은 같음을 참아내는 관객의 능력을 시험대에 올리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가장 엄격한 이론적 금기를 깼다. (…) 그리고 구조주의 영화에 커다란 과제를 남겼다. 어떻게 듀레이션을 주조해야 하는가. 워홀의 영화를 보면서 여기저기 분산된 관객의 이목은 존재론적 인식을 유발한다. 이를 어떻게 허용할 것이고 동시에 어떻게 그러한 인식을 특정 목표를 향해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13

시트니가 그리는 구도대로라면, 워홀이 후대의 실험영화인들에게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남긴 과제는 다음과 같다. 어떤 방식으로 시간의 경험을, 그리고 흐트러진 관객의 집중도를 활용할 것인가? 임철민의 〈야광〉 또한 워홀이 남긴 과제에 대한 응답으로서 본다면 흥미로운 분석이 가능하다.

화면과 극장

〈야광〉은 워홀의 작업처럼 고정된 프레임으로 찍은 한 장면이 몇십 분 혹은 몇 시간씩 지속되는 극단적인 시간을 경험하게 하지는 않지만, 인내력을 요구하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야광〉에서 가장 긴 고정프레임 장면의 길이는 사실 5분 내외로, 워홀의 작업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짧다. 하지만 임철민은 길게는 5분, 짧게는 1~2분 동안 지속되는 고정 프레임 장면 간의 유사함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이어 붙이고, 반복적인 느낌을 자아냄으로써 시간의 경험을 구성한다. 〈야광〉은 빗소리 같은 노이즈가 들리는 검은 화면으로 시작한다. 음의 높낮이나 박자를 구분할 수 없는, 즉 ‘똑같이 들리는’ 노이즈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화면을 5분 가까이 시청하고 나면,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색조를 띤 어두운 숲의 모습이 등장한다.(그림2) 낮에 촬영된 장면을 밤에 찍힌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이 포 나이트’ 효과가 입혀진 숲속의 장면은 정말 어둡지만, 이미 눈이 검은 스크린에 익숙해진 탓인지, 어스름한 숲의 모습이 처음 등장할 때는 그 차이가 꽤 극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효과가 적용된 숲속의 장면들이 계속되다 보면, 극적인 느낌은 곧 반복의 그것으로 바뀐다.

그림2. 〈야광〉 데이 포 나이트 장면

맨 처음 검은 화면 이후 〈야광〉의 첫 15분가량을 차지하는 이 숲속 시퀀스에서 피사체들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또한 반복감을 자아내는 데 일조한다. 김주현, 유정화 두 퍼포머가 각자 등장하는 장면에서, 둘은 모두 미디엄 클로즈업된 프레임의 중앙 혹은 중앙으로부터 조금 오른쪽으로 비껴간 위치에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다. 이는 워홀의 〈스크린 테스트(Screen Tests)〉 시리즈(1963-66)에서 최대한 움직이지 않은 채 고정된 카메라를 응시하는 에디 세지윅(Edie Sedgwick), 앤 뷰캐넌(Ann Buchanan), 메리 워로노브(Mary Woronov) 등을 생각나게 한다.14 나란히 앉은 두 퍼포머가 대화를 나누는 뒷모습을 5분가량 담은 장면에서도, 초반에 오른쪽에 앉은 퍼포머가 팔을 움직이며 이야기할 때 말고는 둘의 움직임은 거의 포착할 수 없다. 〈야광〉을 통틀어, 고정된 화면 안에서 ‘액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 만한 장면은 두 퍼포머가 스튜디오 안에서 후시녹음을 하는 장면인데 이마저도 반복 재생으로 이루어져 관객의 인내력을 시험한다. 숲속 시퀀스 다음으로는 아직 남아 있는 극장 내부와 사라진 옛 극장 터에 들어선 여러 건물 내부가 나오는데, 각 1~2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장면이 전환되고 있지만, 너무 규칙적인 편집 페이스와 고정된 프레임은 별다를 게 없는 건물의 내부 공간을 촬영했다는 인상과 그것이 반복될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오늘날의 이미지 문화에서는 카메라가 인간의 지각으로 온전히 처리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각도를 바꿔가며 움직이거나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수많은 장면 전환이 익숙하기 때문에, 움직임이 거의 전무한 장면들이 각각 1~2분씩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상당히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야광〉에서 이러한 시간의 경험은 어떻게, 무엇을 위해 활용되고 있는가? 다시 워홀에 관한 분석 몇 가지를 둘러보자. 데이비드 E. 제임스(David E. James)는 워홀의 정적인 카메라를 화면 위 그리고 화면 밖 공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서 이해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15 긴 시간 동안 카메라가 다른 곳을 비추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이 그 장면을 구석구석 탐색해 볼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진다는 뜻이고, 따라서 워홀의 영화에서 관객이 화면을 훑어보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정적인 카메라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크림프는 분석했다.16 하지만 “이미 봤던 것의 반복”이 계속될 거라는 느낌에 지루해지기 시작하는 관객에게는, 영화의 화면 안쪽뿐 아니라 화면 바깥, 즉 주변 공간을 둘러보게 되는 것이 사실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워홀의 영화를 화면 안과 밖의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라고 한 제임스의 분석도 여기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제임스의 분석을 확장해 보면, 영화의 화면 안 (혹은 스크린의 위)와 화면 밖의 상영 공간의 관계를 고찰하게 하는 기제에는 비단 고정된 카메라나 반복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뿐 아니라, 화면의 물성을 부각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화면을 표면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 표면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인식 또한 뒤따른다. 〈야광〉은 ‘노멀 맵(normal map)’을 사용하여 이러한 인식으로 관객을 유도한다. 노멀 매핑이라는 것은 3D 그래픽에서 모델링된 대상의 표면 위에 가상의 빛의 굴곡을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물체의 표면 질감은 어떤 형태든 굴곡이 있을 것이고, 그 굴곡이 만들어 낼 빛의 반사를 구현할 수 있다면 실제로 굴곡이 존재하지 않아도 보는 사람이 그 굴곡을 느낄 수 있다. 노멀 맵은 이러한 점에 입각한 기술로, 폴리곤의 표면에서 구현할 굴곡값을 RGB 이미지의 형태로 저장한다.17 폴리곤을 더 많이 사용하여 대상의 질감을 하나하나 모델링하여 그래픽을 산출하는 것보다 적은 수의 폴리곤 위에 삼원색의 노멀 맵을 씌우고, 렌더링 과정에서 이 삼원색 값을 굴곡값으로 처리하는 방식이 컴퓨터에 부담이 훨씬 덜하다.(그림3) 〈야광〉에서는 이 노멀 맵을 3D 모델링된 ‘낙원’의 이미지가 등장할 때 드러내고 있다. 낙원의 풍경이 형광색으로 변하는 순간이, 그곳의 지형물 및 물체에 적용된 노멀 맵이 보여지는 순간이다. 이때의 3D 물체는 굴곡값이 최종적으로 처리되기 전 단계, 즉 삼원색으로 표시되고 있기 때문에 질감이 구현되기 전의 단순화된 폴리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낙원 영상에서는 노멀 맵이 드러나는 장면과 최종 렌더링이 된 장면을 서로 번갈아 보여 주기 때문에, 노멀 맵에 저장된 굴곡값이 모두 처리되어 미세한 질감이 돋보이는 최종 렌더링 이미지와 형광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단순화된 폴리곤 이미지가 자연스레 비교되고, 이를 통해 노멀 매핑이 만들어내는 ‘환영성(illusionism)’이 드러난다.(그림4)

그림3. 노멀 맵 작동방식
그림 4. 〈야광〉 낙원 장면

낙원 영상 이후에는 밝은 연보라색이 지배적인 영상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촬영된 영상을 노멀 맵으로 전환한 것이다.18 (그림5) 보통 실사 이미지를 노멀 맵으로 전환하는 이유는 그 이미지를 3D 모델링된 오브젝트의 표면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19 하지만 〈야광〉에서 노멀 맵으로 전환된 영상은 정지영상이 아닌 움직임이 있는 동영상이기 때문에 노멀 맵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활용될 수 없다. 또한 표면의 굴곡과 같은 미세한 깊이를 처리하도록 고안된 노멀 맵핑에서, 공간의 깊이란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어선 영역이다. 이 때문에, ‘노멀 맵화’된 극장 복도나 건물 밖 길거리 영상은 심도와 공간감을 상실한 채 마치 부조 같은 질감을 자아내고, 화면을 꽉 채워 마치 화면에 이러한 질감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노멀 맵은 화면(畵面)을 표면(表面)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림5. 〈야광〉 노멀 맵 장면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노멀 맵 사용을 보여 주는 영상이 끝나면 삼원색의 플리커 장면이 바로 뒤따르며, 그 뒤에는 퍼포머의 얼굴이 확대되어 등장한다.(그림7) 자글자글하게 움직이는 디지털 그레인(grain)이 눈에 띄게 보이는 이 장면 또한 퍼포머의 피부 질감이 아니라 화면 이미지의 질감을 부각한다. 임철민은 한 인터뷰에서 〈야광〉을 작업하며 느낀, UHD TV로 4K 포맷을 상영하는 것과 HD 포맷을 프로젝터로 상영하는 것의 차이를 화질, 즉 충실도(fidelity)나 해상도(resolution)가 아닌 “디지털의 표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이야기한 바 있다.20 후시녹음 장면에서 스튜디오 모니터에 나오고 있는 영상을 확대하여 화소 낱알이 보이도록 한 것도 전술한 맥락에서 비롯했을 것이다.(그림6) 화면의 질감이 표면으로서 부각되면, 필연적으로 영화의 재현적 역량이나 환영성이 약화되며, 이에 따라 화면의 물성과 더불어 상영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림6. 〈야광〉 모니터 화소 장면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화면 자체의 물성이 두드러지고, ‘반복감’으로 인해 영화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된 관객은 부지불식간에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 자신이 속한 공간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 구조주의 영상 작가들은 여기서 관객이 메타적인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노렸겠지만, 임철민의 경우 완전히 다른 대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 대상은 〈야광〉이 다루고 있는 주제인 ‘크루징스팟으로서의 극장’과 직결되는 것인데, 이는 바로 영화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다. 극장이 크루징스팟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크루저’들이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는 상태가 전제되어야 한다. 서로를 인식하고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는 것이 중요했던 과거의 시간 경험을 활용하여 〈야광〉이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크루징스팟으로 기능하기 위해 극장에서 전제되어야 할 기본 조건 그 자체, 즉 극장에서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는, 혹은 하지 않는 상태다. 흥미롭게도 임철민은 〈야광〉을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던 개인적 체험”을 꼽은 바 있다. 21 구미의 실험영화인들은 환영과 서사가 만들어 내는 몰입에서 벗어나 영화 상영 공간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인식을 급진적 가능성으로 보았지만, 극장 안의 크루저들에게 그러한 인식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욕망의 실천을 위해 그 인식을 활용하는, 다른 의미에서 굉장히 능동적인 관객이었다는 것을 〈야광〉은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임철민이 데이 포 나이트 효과를 통해 인공적인 밤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영화의 화면 속, 즉 ‘가상’의 공간과 화면 밖의 물리적 상영 공간 사이를 고찰하게 해 준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데이 포 나이트 효과는 단순히 밤이라는 환영의 구현 이상으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데이 포 나이트 효과를 입힌 숲속 시퀀스에서처럼 “다양한 농도”로 구현된 어둠이22 깃들 때는 화면의 빛으로 가려졌던 극장 내부 공간을 오히려 잘 볼 수 있을 것이고,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기가 좀 더 쉬울 것이다. 〈야광〉에서 인공의 밤이 드러내는 것은 상영 공간이고, 또한 그곳을 찾은 사람들이 그 공간과, 그리고 서로와 형성하는 관계이다.

그림 7. 〈야광〉 디지털 그레인 장면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사실 화면 안에도 있다. 임철민은 데이 포 나이트 효과에 꽤 공을 들였는데, 이는 극 중에서 조명을 이용해 그림자를 지워 밤을 만들어 내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숲속 시퀀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시퀀스의 첫 부분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없는 숲의 어딘가를 비추는데, 2분 정도가 지나면 갑자기 데이 포 나이트 효과가 벗겨지며, 효과가 입혀지기 전의 주간 촬영 장면이 나타난다. 그다음엔 숲속에서 촬영 스태프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조명을 다루는 (마찬가지로 데이 포 나이트 효과를 입히지 않은)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인상적인 점은, 그 조명이 가만히 서 있는 퍼포머의 얼굴에 직선으로 빛을 쏘고 있어서 얼굴의 밝기가 지나치게 높아지고 화면상에서는 이목구비조차 구분할 수 없이 그저 하얗게 보인다는 것이다. 데이 포 나이트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일반적으로는 노출도와 채도를 낮추기 위한 ND 필터 및 달빛을 모방하기 위한 블루 필터를 적용하고 대비 효과를 조절하지만, 밤이라는 느낌을 더욱 설득력 있게 살리기 위해서는 밤에는 낮에 비해 그림자가 짙게 지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강한 조명을 얼굴에 직선으로 비추어 그림자를 지워내는 것이다.(그림8) 흥미롭게도 데이 포 나이트 효과가 적용되기 전, 그림자를 지우는 과정에서 강한 빛으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는 상황은, 임철민이 소수자 성원권에 대한 우화로서 참조했다고 하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를 연상시키기도 한다.23 하지만 퍼포머의 얼굴이 인공적으로 조성된 밤 속에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크루징에 관한 도균의 글을 상기시킨다.

가로등 불을 피하듯 어두운 곳을 서성이며 이따금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람,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를 향해 무언가 소리를 내다 시선이 마주치자 웃는 사람,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무언가 말을 건네는 사람, 옆을 지나가는 나를 슬쩍 붙들고 자신의 신체 부위를 드러내는 사람, 크루징이 이루어지는 공원의 풍경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 왔지만, 그것을 가시성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어둠 속을 서성인다.24

그림8. 〈야광〉 숲속 촬영 장면

크루징은 어둠에만 의존할 수는 없으며, 극장과 마찬가지로 빛과 어둠과의 관계에 의존한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영화 후반부의 노멀 맵이나 낙원 장면처럼 화면이 형광 혹은 연보라색으로 밝게 빛날 때 극장 안 누군가의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잘 드러난다. 이 때문에 크루징스팟으로서 극장을 찾은 ‘관객’은 화면이 밝게 빛날 때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극장 안의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기엔 최적의 환경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야광〉에서는 화면의 빛을 받고 있는 퍼포머들을 담은 장면이 많다. 블라인드가 쳐져 야외광이 차단된 스튜디오에서 모니터를 앞에 둔 채 녹음하고 있는 김주현, 유정화 퍼포머와 극장 안에서 영상을 관람하고 있는 위성희 퍼포머의 모습이 그러하다. 특히 위성희 퍼포머는 실내등도 모두 꺼진 극장 안에 있기에, 그의 얼굴에 비추는 각양각색의 스크린의 빛이 더 부각되고, 화면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퍼포머의 얼굴 또한 더욱 자세히 볼 수 있게 된다. 화면 안에서도 극장에 앉은 관객을 보여 줌으로써, 〈야광〉은 단순한 영화 관람을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이 아니라 크루저의 관점에서 보도록 유도하고, 이를 통해 크루징스팟이라는 극장의 또 다른 층위 속에서 화면의 가상공간과 상영의 물리적 공간의 관계는 극적으로 재설정된다.

마치며

게이로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고릿적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생각처럼 오래된 과거는 아닐 수도 있겠다. 내가 ‘P싸롱’이라 불리던 파고다극장에 처음 ‘데뷔’했던 날 상영하던 영화는 다름 아닌 팀 버튼의 〈화성침공〉이었으니까. 화성인이 신나게 지구를 침공하는 와중에, 나의 모든 촉각은 극장 안 풍경에 집중하고 있었다. 왜 이 극장은 불을 완전히 끄지 않는 걸까. 왜 사람들이 서 있는 걸까. 왜 그들은 자꾸 나를 쳐다보는 걸까. 왠지 모를 당혹감에 서둘러 극장을 나왔던 초짜 게이는 이제 새로울 것 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중년이 되었지만, 그 당혹감에 얹혀 있던 해석 불가능한 에너지와 기이한 공동체의 정서만큼은 잊을 수 없는 감각으로 각인되었다.25

과거의 감각, 예컨대 이혁상 감독이 말하는 “해석 불가능한 에너지와 기이한 공동체의 정서”에 대한 감각은 이제 대다수의 성소수자에게 접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위 인용문에서, 그리고 본고에서 인용한 〈야광〉에 대한 대부분의 문헌에서 지적되었듯, 오늘날 성소수자끼리의 만남은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라인더(Grindr)이다. 그라인더는 최초로 스마트폰의 위치인식 기능을 활용하여 매칭을 가능하게 한 성소수자 온라인 데이팅 앱으로, 크루징을 과거의 유산으로 만든 매우 상징적인 서비스인데, 〈야광〉에서 극장 터에 들어선 건물과 그 내외부를 담은 시퀀스에 바로 이 그라인더 알림음이 병치된다.

그라인더가 크루징을 대체했듯 극장이 있던 자리를 대체해 버린 공간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그라인더 알림음이 울리는 광경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음식점처럼 보이는 공간 장면에서 인파 소리와 함께 어딘가로부터 보니 엠(Bonnie M.)의 히트곡 중 하나인 〈바빌론의 강〉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처럼 이 시퀀스의 대부분은 정적인 주변음만이 들리지만, 종종 불규칙한 리듬으로 마치 전혀 다른 공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믹싱된 그라인더 알림음이 울리며, 주변음과 대비를 이룬다. 영화 화면에 담긴 시각적 정보만으로는 알림음이 어디서 울리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영상과 음성은 서로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임철민은 그 벌어진 틈 속에서 화면에 담기지 않을 무언가를 드러내려 한다. 여기에, 극장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공간이 (〈야광〉이 상영되는) 극장의 스크린 안에 비치고 그라인더 알림음이 울리는 상황, 그리고 극장의 누군가가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조성된다. 〈야광〉은 이 틈새를 통해, 극장의 화면에 다 담기지 않을 다양한 상황 혹은 공간, 그리고 그들에게 깃든 시간의 흔적과 중층적 성격을 인식하고 상상하게 해 준다.

임철민은 이러한 인식과 상상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과거의 감각과 현재 감각의 간극을 드러낸다. 크루징이 성행하던 당시의 극장 공간이 중층적 성격을 가졌듯이 이제는 없어졌거나 곧 없어질 장소에도 역사가 중첩되어 있다. 임철민이 밝힌 대로, 이는 “시간의 속성이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26 어두운 극장 안에 앉아 있는 위성희 퍼포머의 얼굴에 각양각색의 빛이 비춰졌던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자. 낙원, 그리고 노멀 맵 장면까지 전부 보고 나면, 스크린을 꽉 채운 적·녹·청의 플리커에 맞춰 그라인더 알람음이 울린다. 이때 혹시라도 옆 사람의 얼굴을 돌아본 관객이 있다면, 빨강, 초록, 그리고 파랑 빛이 비춰지던 위성희 퍼포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지금 보고 있는 삼원색의 플리커가 몇십 분 전 화면 속 위성희 퍼포머의 얼굴을 비췄던 것인지 궁금해질 수도 있다.(그림9) 〈야광〉은 자신이 있는 곳에 자신과 어떻게든 연결된 사람이 있었다는 감각 또는 경험을 만들어 낸다.

그림 9. 〈야광〉 위성희 퍼포머

미국의 실험영화 작가 홀리스 프램튼(Hollis Frampton)은 영사기를 사용하며 선보인 렉처 퍼포먼스 〈강연(A Lecture)〉(1968)에서 마이클 스노우의 녹음된 목소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예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습니다. (…) 아뇨, 정확히 이 공간이 아니라, 이 어둠의 총칭 말이죠. 우리 문화권에서 하나의, 혹은 최대 두 종류의 감각을 집중해서 쓰도록 만들어진 유일한 공간 말입니다.” 어느 시점이든, 어떤 구체적인 장소든, 스크린의 빛이 만들어 내는 어둠 속에 우리 모두 있었다는 연결된 감각을 말하는 것만 같다. 임철민은 영화를 통해 다양한 시공간에 속한, 이질적이지만 연결된 것들을 겹쳐 놓는 데 탁월하다. 하지만 그러한 연결은 화면 안에서 볼 수 없다. 위성희 퍼포머의 얼굴 위로 삼원색의 빛이 깜박이고 있었을 때, 그가 실제로 뭘 보고 있었는지 사실 우리는 알 수 없다. 오직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된 것과 앞서 봤던 것을 종합하여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마치 워홀의 〈블로 잡〉에서 실제로 구강성교는 보지 못한 채, 클로즈업된 북월터의 얼굴만을 보고 유추해야 하듯이 말이다. 이것이 〈야광〉이 보여 주지 않으면서 보여 주는 방식이다.



2023 〈SeMA-하나 평론상〉 심사평 ↗
2023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 인터뷰 ↗



  1. 루인, 「Queering up history: 가장 소란스러운 아카이브」, 웹진 『세미나』 2호,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2/트랜스-역사-퀴어링-아카이브/

  2. 임철민 역시 크루징에 대한 체험이 부재하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도훈, 「극장을 상상하다: SIDOF 2019 〈야광〉 임철민」, 『REVERSE』, 2019년 3월 23일, http://reversemedia.co.kr/article/149.  

  3. 임철민, 「야광」, 『2019 독립영화 쇼케이스』(서울: 한국독립영화협회, 2020), 45. 

  4. 41분이라는 길이는 초당 16프레임으로 상영했을 때의 길이이다. 영화는 원래 초당 24프레임으로 촬영되었는데, 프레임레이트를 줄여 ‘슬로우 모션’ 효과를 자아내는 것은 워홀의 여러 무성영화의 특징이다. 

  5. Douglas Crimp, Our Kind of Movie: The Films of Andy Warhol (MIT Press, 2012), 4. 필자 번역. 

  6. 첨언하자면, 임철민이 ‘낙원’이라고 명명하는, 후반부의 3D 애니메이션 시퀀스에서 모델링된 지형을 조망하는 시점이 움직이긴 한다. 

  7. 〈블로 잡〉과 마찬가지로 〈엠파이어〉 또한 초당 24프레임으로 약 6시간 반가량 촬영되었지만, 워홀은 이를 초당 16프레임으로 상영하여 러닝타임을 8시간으로 늘려 놓았다. 

  8. P. Adams Sitney, “Structural Film,” Film Culture 47, 1969. 본문에서의 인용은 다음 선집에 실린 판본을 참조했다. P. Adams Sitney ed., Film Culture: An Anthology (New York: Praeger, 1970), 327. 시트니의 정확한 용어 사용에 관해 첨언하자면, 필름영화에서 반복재생은 필름을 찍은 뒤 이를 복사하여 재사용하는 기법, 즉 반복인화(loop printing)에 해당한다. 또한 시트니의 정의를 그대로 따르면, 네 가지 요소 중 정지 프레임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영화 화면의 재촬영”(rephotography off the screen), 즉 다시 사진으로 찍는 것이 대신 열거되어 있는데, 시트니는 워홀의 영화 〈잠〉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지 프레임을 사용한 것을 영화 화면의 재촬영이 자아내는 효과와 같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를 정지 프레임으로 기술한다. 다음 참조. P. Adams Sitney, Visionary Film: The American Avant-Garde 1943-2000, 3rd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350. 

  9. 시트니의 글은, 특히 워홀을 구조주의 영화의 선구자로 지목한 것에 대해 게재 직후 피터 쿠벨카, 조지 마키우나스 등 당대의 저명한 실험영화인들의 반박을 불러일으켰고 이후에도 폴 아서, 브루스 젠킨스 등이 시트니의 정의의 타당성에 대해 논쟁한 바 있다. 다음 참조. Paul Arthur, “Structural Film: Revisions, New Versions, and the Artifact,” Millennium Film Journal 2,1978; Bruce Jenkins, “The Case against ‘Structural Film,’” Journal of the University Film Association 33.2, 1981. 

  10. Crimp, Our Kind of Movie, 4. 필자 번역. 

  11. Sitney, Visionary Film, 351. 

  12. 길이, 시간, 지속 혹은 지속시간 등의 번역어가 존재하는 이 용어를 해당 인용문에서 굳이 ‘듀레이션’이라고 음역하는 이유는, 기존의 번역어에서는 ‘견뎌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시간’이라는 뉘앙스가 매우 희미하거나 없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 ‘듀레이셔널(durational’ 예술 art)과 ‘인고(忍苦, endurance) 예술’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서, 전술한 뉘앙스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 Sitney, Visionary Film, 351-352. 필자 번역. 

  14. 〈스크린 테스트〉는 워홀 주변의 몇백 명에 달하는 유명인사와 지인 들을 전술한 방식대로 촬영한, 각각 3~4분 정도 길이의 연작이다. 촬영된 사람들은 최대한 움직이지 말고 카메라를 응시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움직였던 피사체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니코(Nico)다. 

  15. David E. James, Allegories of Cinema: American Film in the Sixties (Cambridge, MA: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66. 

  16. Crimp, Our Kind of Movie, 72. 

  17. 부연하자면, 노멀 맵은 굴곡 정보 값인 법선(폴리곤의 접평면〔tangent plane〕과 수직을 이루는 선)의 X, Y, Z 축 좌푯값을 각각 R(빨강)채널, G(초록)채널, 그리고 B(파랑)채널에 저장해, 이를 시각화한 것이다. 따라서 맵의 전체적인 색깔은 각 채널에 저장된 벡터값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노멀 맵의 색 정보는 렌더링 과정에서 굴곡값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색깔이 그대로 나가지 않는다. 임철민은 노멀 맵이 입혀진 과정 영상과 최종 렌더링 된 영상 사이를 번갈아 보여 준다. 또한 낙원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3D 공간 안의 모든 물체가 원색으로 바뀔 때도 수면을 구현한 부분은 자연색 그대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수면에는 노멀 맵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림4) 

  18. 앞서 낙원 영상에서 나오는 노멀 맵(그림4)과 이 영상(그림5)은 전체적으로 색감이 매우 다른데, 그것은 전자의 경우 오브젝트 공간(object space) 노멀 맵, 그리고 후자의 경우 탄젠트 공간(tangent space) 노멀 맵이기 때문이다. 오브젝트 공간의 노멀 맵은, 법선의 좌푯값이 3D 공간을 기준으로 하므로 모든 법선의 좌표계가 동일하고, 세 좌푯값의 편차가 크지 않은 반면, 탄젠트 공간은 맵이 적용될 사물의 표면을 기준으로 하므로, 모든 법선마다 좌표계가 다르다.(그림10) 따라서 탄젠트 공간 노멀 맵은 채널별 값에 차이를 둬야 하고, B채널에 각 법선 좌표계의 기준이 되는 Z축 값을 둔다. 즉, B채널에는 대상의 표면이 얼마만큼 튀어나와 있을 것인지 대한 법선 벡터값이 저장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두 굴곡값보다 기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표면은 바깥을 향해 있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B채널 값이 가장 많고, 따라서 푸른 색감이 지배적인 것이다.(그림11)

    그림10. 오브젝트 공간(왼쪽), 탄젠트 공간(오른쪽)
    이미지 출처: https://docs.cryengine.com/display/SDKDOC4/Tangent+Space+Normal+Mapping
    그림11. 오브젝트 공간 노멀 맵(왼쪽), 탄젠트 공간 노멀 맵(오른쪽)
    이미지 출처: https://github.com/ssloy/tinyrenderer/wiki/Lesson-6bis:-tangent-space-normal-mapping

  19. 예를 들어, 사람의 피부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오렌지 껍질 이미지를 노멀 맵으로 변환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어차피 원본 이미지의 색깔은 잃기 때문이다. 

  20. 임철민, 「야광」, 44. 

  21. 변성찬, 「[초이스] 야광」,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2018년 10월 8일, https://www.kmdb.or.kr/story/12/2527. 이것은 임철민이 상영 공간으로서 다른 공간보다 영화관, 즉 극장을 필연적으로 선택해야만 하는 근거 또한 제시한다. 중간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결코 자연스럽지는 않은 영화관과 전시공간의 영상 설치를 비교해 보자면 후자의 경우 시청자가 나가 버리면 전술한 조건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22. 이도훈, 「극장을 상상하다」. 

  23. 첨언하자면,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에 등장하는 것으로, 인터뷰에서 임철민이 참조했다고 하는 그림자와 소수자 성원권에 관한 문헌은 김현경의 책으로 보인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주인공 페터 슐레밀이 회색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그림자를 팔고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하는 내용으로, 김현경은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 이야기를 알레고리 삼으며 소수자 성원권 문제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전개한다.  

  24. 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서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필자 강조. 

  25. 고유정, 김일란 외, 「다큐 감독, 관객이 되다! 감독들이 뽑은 DMZ국제다큐영화제 기대작 10」, 『REVERSE』, 2018년 9월 10일, http://reversemedia.co.kr/article/67

  26. 임철민, 「야광」,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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