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SeMA-하나 평론상〉 심사평

[심사 총평] 17.5%의 미술가, 0.3% 이하의 미술비평가

조주연(미술이론가)
제5회 SeMA-하나 평론상 심사위원장

2023년에 SeMA-하나 평론상은 제5회를 맞이했다. 격년제 공모니까 10년이 된 것이다. 그 10년 사이에 이 상이 배출한 일곱 명의 젊은 평론가는 현재 한국 미술비평계에서 발군의 역량을 키워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른/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상시적 위기 상태’인, 두말이 필요 없지만 다시 말하기도 식상한 한국 미술비평의 현실에서 이 상의 존재가 빛나는 이유다.

지정주제와 자유주제의 평문 두 편을 제출하는 것에서 자유주제의 평문 한 편을 제출하는 것으로 바뀐 제3회 이후 공모 방식의 변화에 따라, 올해 심사 대상은 자유주제의 평문 28편이었다. 2015년 제1회 SeMA-하나 평론상에 쇄도한 70여 편의 응모에는 미치지 못한 수였지만, 제2회 이후 20편 후반대와 30편 초반대를 등락해온 응모 편수의 현황에 비추어서는 크게 줄어든 수치가 아니어서 일단 반가운 마음이었다. 분류상으로는, 작가론이 12편으로 가장 많았고, 전시비평, 제도비평, 주제비평, 메타비평 등 미술비평의 여러 영역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평문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문의 질적 수준은 분류만큼 다양하지 않았는데, 28편의 전체 평문 가운데서 비평적 문제 설정, 해답 모색의 논리, 미술 실제의 근거, 평문의 구조와 정합성 같은 비평의 기본 자격을 갖추지 못한 글이 예상 밖으로 많았던 것은 여러 심사위원이 공유한 충격이었고, 심지어 ‘현대미술 분야의 비평’이 아니거나 아예 비평이 아니라 정책 제언이라고 해야 할 글까지 있었다는 것은 해당 지면이 그만큼 부족/부재한다는 반증으로 여겨져 착잡함을 더하기까지 했다.

물론 괜찮은 평문, 잘 쓴 평문, 그리고 아주 잘 쓴 평문도 있었다. 심사위원 7인이 개별적으로 평가한 1차 심사의 결과에서는 이 평문들에 대한 평가가 당연하게도 엇갈렸으나, 잘 쓴 평문과 아주 잘 쓴 평문에 대한 이견이 많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었다. 질문의 구체성과 시의성, 이론의 적합성과 수용성, 분석의 정확성과 설득력, 평문의 전문성과 접근성, 평자의 개성적 문체와 성장 가능성을 두루 가늠한 2차 심사에서 심사위원 전원이 모여 각자의 평가를 서로에게 비추어보며 조율하는 시간을 함께한 결과다. 각자의 고유한 의견들을 열렬히 개진하는 한편 다른 의견들에 대해서도 열린 귀로 경청하며 논의를 생산적으로 모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한다.

최종 심사인 인터뷰 대상작은 세 편으로 간추려졌다. 「“만지지 마시오(Do Not Touch)”: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동시대 미술관의 말하기 전략에 대하여 」, 「부재를 스크리닝 하기: 임철민의 〈야광〉」, 「배움: 외화면의 내재성―김민애에 대한 노트」가 그 셋이다. 기존의 SeMA-하나 평론상 시상 연혁에 비추어 제5회는 2인 공동 수상과 1인 단독 수상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진행했으나, 인터뷰 결과는 「부재를 스크리닝 하기: 임철민의 〈야광〉」 1편으로 압축되었다. 특정한 시공간에 한정되는 것이 역사적 경험의 속성이고 그 시공간의 불가역성이 역사의 본성인데, 상기가 아니라 상상에 입각한 포스트메모리 개념으로 비경험 세대의 역사 경험 가능성을 열고, 이 가능성을 성소수자의 크루징이라는, 여전히 과소대변 상태인 문제와 연결하며, 이 주제를 다룬 실험적 영상 작업인 임철민의 〈야광〉을 분석한 전문성과 설득력에서 이 평문의 필자는 압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작업 분석의 전문성이 대상 매체의 여러 장치에 대한 평자의 직접 학습과 이해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이 학습과 이해가 어설픈 비약이나 손쉬운 일반화를 스스로 막는 진중하고 치밀한 문체를 낳았다는 점, 그 문체에 담긴 낮고도 귀에 감기는 목소리가 실험 영상의 분석에 필연적인 전문성의 장벽을 뛰어넘는 매력적 설득력을 구사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소수자의 과소대변 문제에 대한 이 평자의 관심이 비단 성소수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이미 상당 기간 축적되어왔고 이후 더 넓고 깊게 확장되어나갈 것이라는 점이 주목되었다.

최종 후보작에 올랐던 다른 두 편 「“만지지 마시오(Do Not Touch)”: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동시대 미술관의 말하기 전략에 대하여」와 「배움: 외화면의 내재성―김민애에 대한 노트」도 충분히 잘 쓴 평문으로, 특히 동시대 미술(관)과 비평에 대해 상반된 관점을 보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전자가 날로 고급 스펙터클 또는 엔터테인먼트로 변해가는 전시 관행을 비판한 평문이라면, 후자는 이른바 ‘비판 이후’라고들 하는 동시대 비평에 필요한 전환의 전망과 작품 분석을 결합한 평문이어서, 시의적 적실성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다만 전자는 비평적 질문과 목표가 모호하고 현대 이후 미술의 담론화로 인한 비평의 필수적 역할과 관람자의 행위주체성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 탓에, 평문의 성격이 비판인지 냉소인지 또는 제안인지 확인인지 갈피를 잡기 힘든 글이 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후자는 문학 비평 활동을 하는 평자가 문학과 더불어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에 대해 시도한 미술비평이라는 점에서 환영의 마음이 컸으나, 동시대 비평에 대한 인식이 전환의 필요를 넘어 ‘비판 이후’ 비평의 한계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고 이에 따라 비평적 확장성의 전망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1947년에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후일 추상표현주의자가 되어 미국 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신진 미술가들이 처한 참담한 현실, 작업에 전념할 수 없음은 물론 기본적 생활마저 위태로운 현실을 개탄했다. 2023년에도 한국의 미술가 대부분은 전업 작가로 생활할 수 없다. 2021년 시점에서 미술가가 개인적 예술활동으로 얻은 수입은 연평균 439만원이었다. 그런데 당시 예술 분야에서 종사하는 화가 및 조각가는 17.5%로서 작가(14.8%)보다 많은 최상위를 기록했는데, 평론가는 0.3%로 모델, 희극인(0.1%), 마술사, 지휘자(0.2%)에 이어 하위 3위다(문화체육관광부 『2021 예술인 실태조사』). 더구나 이 수치는 모든 예술 분야 평론을 망라한 것이므로 실제 미술비평을 하는 평론가는 훨씬 적을 것이다. 연봉 400만원대는 작업은 물론 생활도 지속가능하지 않은 액수고, 이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무척 부족하고 갖가지 문제도 많지만 공적 차원의 미술 지원제도를 이끌어내고 있다. 미술비평은 어떤가? 이런 극한 상태에서도 미술가가 17.5%인데 미술비평가는 0.3% 이하라는 사실은 두 가지를 말하는 것 같다. 미술비평가는 극한의 극한 상태를 강요당한다는 것, 미술비평가를 육성하고 지원하는 제도가 더없이 시급하다는 것. SeMA-하나 평론상과 같은 제도의 개발에 우선 국공립미술관이 발 벗고 나서기를 촉구한다.

[심사평]

곽영빈(예술매체학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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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회를 맞은 SeMA-하나 평론상의 심사위원 참여 요청을 받고, 지원자들의 원고를 모두 모은 두꺼운 책을 감탄과 탄식을 오가며 밑줄 쳐 읽은 뒤, 최종 선정된 세 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의 고견에 귀 기울이는 일련의 과정은 유일무이한 경험이었다. 심의나 심사는 이제 익숙해졌지만, 이는 내가 2015년 처음 제정된 이 상을 (김정현 선생과 함께) 최초로 수상한 장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수상자에서 수여자로의 이행’이란 경험이 어디서건 그리 흔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의미에서, 아래의 글은 내가 ‘미술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한 것과 (거의) 동일한 과정을 뒤늦게나마 목도할 수 있었다는 감흥을 정리한 신변잡기식 ‘참관기’나, ‘후배 비평가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격려한다’는 식의 고루한 형식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문학비평을 제외하면 여전히 독보적인 규모의 지원과 형식을 유지해온 이 제도가 배출해낼 새로운 인물을 향한 기대와 바램만큼이나, 지난 8년간 내가 체험하고 이번 수상자가 그 연장선에서 목도하게 될 소위 ‘비평의 지속적인 고사(枯死) 상태’가 이렇게 안일한 회고나 수직적 간극(의 환상)에 의해 강화되어온 것일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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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 음악을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예술이론과 비평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교육과 학술 연구 경험에도 불구하고, 공식 데뷔 전까지 관습적인 의미의 미술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던 인류학적 의미의 ‘참여관찰자(participant observer)’의 시각에서 볼 때, 비평을 제대로 읽는 이들은 여전히 드물다. 주변의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성토하듯, 이러한 관찰은 ‘비평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드물다’는 진단과도 맞물려 있다. 이는 ‘창작과 비평’이라는 표현이 전제하는 ‘선(先)창작 후(後)비평’이라는 ‘선후 관계’의 환상이나, ‘좋은 글과 좋지 않은 글’의 구분이란 문제를 ‘쉬운 글과 어려운 글’이란 가건물로 대체해온 고질병과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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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국에만 국한해도 매해 적게는 수백에서 수천 명의 작가가 배출되고 그보다 많은 작업이 산출되며, 비평은 그 뒤를 조신하게 뒤따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독일(초기)낭만주의 이래 세공된 근원적인 의미의 ‘비평(Kritik)’과 내재적으로 연동되는 ‘역사라는 도살장’에서 살아남는 작업과 작가는 0.1%도 안된다. 이들 대부분이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이나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보다 먼저 잊혀질 것이고, 짧게는 몇 년, 길어야 수십 년 사이에 다른 이들에 의해 대체되며, 이렇게 가차 없이 수정되는 ‘(흑)역사’의 운명에는 이 글을 쓰는 나와 지금 이를 읽고 있는 독자는 물론, 학자를 포함하는 학술장과 비평(가)도 당연히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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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우리 모두가 ‘세상이라는 공통의 텍스트’를 따로 또 같이 인용하고 조합하며, 미세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밑줄 치(려)는 존재이기 때문인데, 이 상황에서 대상이 현실이냐 작품이냐, 누가 먼저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은 하루에도 몇 백 번씩 바뀌는 유튜브의 쇼츠(shorts)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이는 이상적인 엘리트주의라기보다 그것이 라면이건 책이건, 아이돌이건 분식집이건 하나의 시장에서 채 5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상품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환기하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상식에 가깝다(보들레르 이후에도 자신이 상품이 아니라는 사실, 혹은 ‘특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게으른 저자와 독자에게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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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업 비평가’들은 전업이란 이유로, 이들을 제외한 ‘부업 비평가’들은 부업이란 이유로, 좋은 글을 꾸준히 써내기 어려운 조건은 그 어떤 개인의 그것보다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잡지나 전시 도록, 레지던시와 비평 매치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글의 길이는, 대개 변명처럼 따라붙는 고료와 함께 비평(가)의 기대수명을 실질적으로 예언하고 규정하는데, 이는 어차피 몇 년 후면 새로운 정권과 대학(원)생들이 씬 자체를 대체할 것이라는 회계연도 차원의 ‘세대론’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글을 요청하는 입장에서나 제공하는 입장에서나 별다른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어느 글이 정말 좋은 글인지’ 눈에 쌍심지를 켜는 이들은 당연히 적다. 어떤 작가의 냉소적인 관찰을 다소 순화하자면, 이러한 정황은 ‘찬사는 일단 기분이 좋고, 비판은 일단 기분이 나쁘다’는 자명한 이유로 자신의 작업에 대한 글조차 엄격히 준별해 읽어내는 ‘독자로서의 작가’가 (없진 않지만) 의외로 드물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이는 이른바 ‘국제적’인 반열에 오른 한국 작가와 그들의 작업 대부분이 이들을 근원적으로 규정하고 넘어서야 할 ’K-비평‘ 없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유통된다는 현실과 부드럽게 연동되는데, 이때 대부분의 한국 비평(가들)은 해외의 저명한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에게 현지의 정보를 먹기 좋은 형태로 요약해 제공해주는 ‘원주민 정보원(native informant)‘의 지위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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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수상작으로 결정된 글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러한 책임을 부분적으로나마 나눠 갖는 의미에서 덧붙이자면, 이 글을 처음 접한 나는 ‘영화학 전공자’의 작업이라 단정하고 안타까워했던 게 사실이다. 문학비평과 사상사가 접목된 박사논문을 쓰긴 했지만, 제도적으로는 ‘영화학’ 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이로서 돌이켜 보면, 이 아이러니한 착각은 역설적으로 해당 글과 수상자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줬다. 실지로 다시 읽었을 때 이 글은, ‘실험영화’나 ‘퀴어’라는 범주를 자명한 지평이나 소재로 전제하고 공회전하는 많은 시도들과 달리, 가령 ‘그라인더(Grindr)’라는 매체적 조건을 통해 양자가 서로를 역사적으로 재규정하고 어떤 의미에서 (재)발명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아가 그것이 워홀과 구조주의 영화의 전통은 물론, 미술관이 아닌 영화관이라는 관람조건의 역사적 점멸과 어떻게 당대적으로 연동되는지 적확하게 포착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그가 인상적으로 환기한 일련의 문제의식과 프로젝트들 역시, 이 글이 함께 펼쳐낼 성좌(Konstellation)에 대한 기대를 지극히 선명한 것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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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신을 포함한 동시대의 거의 모든 해당 관계자들이 자명하게 공유하는, 어떤 일반적인 기준에 근거해 준엄하게 내려지는 것으로 비평이 오해되는 한, 이번 심사 또한 공정한 ‘합의’나 ‘타협’에 의거한 결과로 읽힐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은, 근원적인 의미의 비평이란 ‘쓰이지 않은 것을 읽는’ 것이란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합의’된 평가의 기준 자체에 균열을 내며, 이를 허무는 작업과 작가, 혹은 비평(가들)과의 조우를 욕망한다는 것, 아니 이에 대한 거의 비의지적인 ‘충동(Trieb)’에 의해 추동되고 (오)작동한다는 외설적인 사실과 항상적인 긴장 관계에 있을 뿐이다. 미술(비평)사와 예술사, 그리고 매체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 성실하게 암기/적용하는 학자와 비평가, 작가의 삼위일체는 반드시 망각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번 수상자와 SeMA-하나 평론상, 그리고 여러분과 나의 미래를 응원하면서.


김상민(문화연구자)

비평이 사회적으로 아무리 그 시효를 다했다고 (주장되곤) 해도, 좋은 비평의 가치와 필요는 역설적으로 더 커진다는 것을 이번 평론상을 심사하며 여러 지원자들의 비평문에서 직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글들에서 유독 반짝이는 문장들을 읽을 때는 어떤 설렘 같은 것도 번졌다. 가끔 재치있는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느닷없이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글이지만 독자를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문장력이 부치는 경우도 있었다. 훌륭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도중에 길을 잃고 허둥대는 글을 읽을 때는 함께 헤매면서 길을 찾아보고 싶기도 했다. 작품이나 작가로부터 혹은 현대 예술의 어떤 경향으로부터 새로운 생각을 길어올리지 못하고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일에 너무 열심인 글도 꽤나 있었다. 일반적인 비평의 문법을 구사하면서 견고하게 문장을 끌고 나가는 글들은 모범 답안처럼 보여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는 최종 후보에 오른 세 편의 글 중에서 「“만지지 마시오(Do Not Touch)”: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동시대 미술관의 말하기 전략에 대하여」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미술비평가가 아닌 문화연구자에게는, 동시대 예술계의 다양한 행위자들이 새로운 미디어라는 세속적 (그리고 파괴적) 환경 및 상징체계의 변화와 더불어 어떻게 각자의 입장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지를 탐색하는 복합적인 방식에 유독 눈이 갔다. 다만 후반부의 논의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배움: 외화면의 내재성—김민애에 대한 노트」는 작가에 대해 우리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어떤 면을 날카롭게 포착해 ‘배움’이라는 개념으로 추상화하고 있는데, 뒤로 가면서 그 배움이 누구의, 어떤, 무엇의 배움인지 다소 모호해졌다. 당선작인 「부재를 스크리닝 하기: 임철민의 〈야광〉」은 글의 구조와 내용이 두 손을 꽉 맞잡은 듯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비평문이었다. 틈새 없이 짜맞춰진 목제품처럼 견고해서, 독자의 생각이 흘러들어 가거나 배어나올 여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가 흔히 ‘미술’이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이 평론상의 취지에 적합할지를 염려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매체의 경계를 지우고 보이지 않는(던) 것을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글이 동시대 ‘예술’ 비평의 관습을 무너뜨리고 확장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데 급진적이기까지 하다니.

동시대 미디어 환경이 비평의 장소를 점점 더 협소하게 만들 것임은 분명하다. 비평이 애초 걸러내어 판별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수없이 스트리밍되어 쏟아지는 콘텐츠와 그것을 큐레이팅하는 미디어가 어쩌면 비평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비평이 없어지거나 비평가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좁아져만 가는 비평의 장소에서 외롭게 분투하는 젊은 비평가들에게 SeMA-하나 평론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한다.

신승철(국립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심사 요청을 받자마자 평론상 공고문과 지난 수상작, 그리고 심사평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아마도 이는 공모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시간차를 두고 공통으로 하는 일일 것이다. 반복이 차이를 만든다고 했던가? 대동소이한 심사 프로세스와 기준 속에서 매번 개성과 역량을 갖춘 수상자들이 나와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데, 희망고문에 가까운 이 상의 권위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평론 활성화”라는 미술계의 기대를 반영하는 평가일 뿐, 공모 지원자들은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올해 역시 각자의 입장과 수준에서 쓰인 다양한 평문이 제출되어 “나이, 전공, 학력, 경력, 활동 분야”를 따지지 않는다는 상의 취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종류의 심사는 1등을 뽑는 데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고, 수상의 영광을 얻으려면 자신의 글이 다른 공모자의 것보다 비교우위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자연스럽게 문장에 묻어나는 학문적 역량과 글쓰기 경험은 분명 무시하기 힘든 조건일 듯싶다.

이번 공모의 선정작은 영상 이미지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쓰였으며, 거의 이견 없이 선택되었다. 사변에 의존하지 않고 이미지에 기초해 논의를 이끌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공적 기억’에 대한 필자의 진지한 관심이 미술관의 이념과 상의 취지에 적합해 보였다. 수상자에게 축하와 활발한 활동에 대한 당부를 동시에 전한다. 그리고 서툴지만 날카로운 관점과 비판 의식이 돋보인 몇몇 평문이 기억에 남는데, 블라인드 심사인 관계로 필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심사평을 읽는 이들에게 대신 위로의 말을 남긴다. 상이 다가 아니며, 이 상 역시 좋은 평론가가 되기 위한 유일한 관문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안소연(미술비평가)

어떤 비평을 읽다보면, 글 쓴 사람이 비평의 대상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가지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이 거리의 문제는 단지 비평가와 비평적 대상 사이의 단선적인 앎의 태도나 앎의 방식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밤하늘의 별이 수광 년 떨어져 있는 (죽은) 별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실과 상상을 오가며 공존하는가의 문제처럼, 비평적 대상에 관한 상상적 이미지에 다가갈 수 있는 지식과 경험과 감각과 통찰로 끊임없이 조율되곤 한다.

SeMA-하나 평론상에 지원한 비평 글을 받아 1차 심의를 위해 하나씩 읽으면서 가졌던 생각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나 비평적 관점을 서술하기 위한 논리적 짜임새나 문장 및 글 전체의 완성도에 있어서 상당한 격차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어느 정도 논리력과 완성도를 가진 글 중에서도, 비평의 대상을 주제와 연관시키는 창의적인 통찰과 상상력이 전제된 비평문은 드물었다. 간혹 글의 완성도에 가려져 특수한 비평적 접근이 필요한 주제를 일반화하는 오류가 보이기도 했다. 비평적 실천과 방법론의 대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글에서는 지면상의 한계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비평의 대상으로 제시한 작가 및 작품에 관한 논의가 피상적인 동조에 머문 것 같아 글에 대한 공감과 아쉬움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단독 수상작 「부재를 스크리닝 하기: 임철민의 〈야광〉」은 3차 심의까지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읽고 검토하면서, 필자가 작품을 경험하고 지각했던 일련의 과정을 함께 좇으며, 필자가 제시한 ‘포스트메모리’ 혹은 ‘비경험 세대’의 기억과 상상의 맥락에서 밀도 있는 리서치 연구에 기반한 비평적 접근에 다가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글의 시작과 끝에 이르는 호흡이 일관성 있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비경험 세대의 포스트메모리에 관한 상상을 “부재”라는 키워드로 엮어, 이를 스크린에서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이동하는 “경험”에 포함시킨 서술의 흐름이 글 전반에서 엿볼 수 있는 필자의 비평적 태도와 중첩되어 있어 읽는 내내 즐거움을 주었다. 경험과 리서치 연구의 균형을 장점 삼아 창의적인 비평의 실천을 앞으로 꾸준히 이루어가기를 기대하면서, 수상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3차 인터뷰에 참여한 지원자의 글을 두고 다시 한번 심의위원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논의와 기대가 있었기에, 각자의 역량을 펼쳐 비평적 글쓰기의 시도를 꾸준히 이어가기를 바라면서 지지와 응원의 인사를 전한다.



2023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작 ↗
2023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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