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1. 여성 퀴어 작가의 콜렉티브

야광
야광은 90년대생 레즈비언 예술가 동인 김태리, 전인으로 이루어진 콜렉티브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90년대생 여성 퀴어의 사랑과 실패, 노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첫 번째 전시 《윤활유: Lubricant》(2022) 를 열었다. 전시를 통해 이들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급진적 시도를 통해 젠더의 고정된 시각성과 개념을 배반하고, 가공된 내러티브의 직조를 통해 동시대의 불화하는 타임라인에 응답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홍지영
홍지영은 사진을 주요매체로 활동하며, 신체를 기반으로 퀴어, 폭력, 섹슈얼리티를 연구한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을 위해 셔터 소리로 탑을 쌓고, 펜으로 비석을 새기고 있다. 보스토크 프레스의 공모 프로그램 ‘도킹 docking!’에 선정되어 『물의 시간들』을 출간했다. 창작그룹 팀 W/O F.의 소속 작가이며, 간행물 『Without Frame! vol.1 슬픈구멍』, 『Without Frame! vol.2 Trash Can: 나의 힘은 쓰레기통이다』를 기획, 공동 편집했다.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이연숙: 오늘은 연휴 전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올해 저는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저급 이론들의 연합’이라는 제목으로 라운드 테이블을 총 3회 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자리에서는 세 분과 함께 ‘여성 퀴어 콜렉티브’라는 제목의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할 것이고, 두 번째 자리에서는 ‘아마추어리즘과 비평’, 세 번째 자리에서는 ‘실패의 퀴어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라운드 테이블을 이어갈 것입니다.

우선 ‘저급 이론들의 연합’이라는 제목을 살짝 소개해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게시물에서 보셨을 수도 있지만, 퀴어 이론가 주디스 잭 할버스탐(Judith Jack Halberstam)이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참조해서 ‘저급 이론(low theory)’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올해와 내년의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중심 개념으로 삼고자 합니다.

‘저급 이론’은 ‘고급 이론’과 다른 날 것의 지식, 학계에서 유통되는 종류의 지식이 아닌 다른 종류의 지식들을 일컫습니다. 이 개념을 중심으로 소수자들의 대항 담론을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텍스트로 유통이 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미술관 안에서 라운드 테이블의 형식으로 세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제도권 안에 있는 미술관에서 이러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에 상당한 쾌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하실 세 분을 소개해 드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아마 퀴어, 여성 퀴어, 특히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관심 있게 보시고 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라운드 테이블은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자리이기보다는 조금 더 열려 있는 장이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관객 분들께 질문도 많이 드리고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손에 잡히지 않고 공식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개념인 ‘저급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첫 번째 자리에서 나눌 질문은 “‘레즈비언 퀴어 예술만의 미적 형식’이라는 것이 존재할까?”입니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지, 레즈비언 미술은 일반적으로 ‘구리다’고 이야기되는데 ‘구리다’라는 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세 분과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먼저 ‘야광 콜렉티브’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야광 콜렉티브’는 90년대생 레즈비언 예술가인 전인, 김태리 두 분이 함께 활동하시는 팀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90년대생 여성 퀴어의 사랑과 실패, 노동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올여름에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던 첫 번째 전시를 여러분들도 보셨을 텐데요. 저는 이 전시가 “‘레즈비언 미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식이 될 수 있을까?”를 본격적으로 질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급진적 시도를 통해 젠더에 고정된 시각성과 개념을 배반하고, 가공된 네러티브의 직조를 통해 동시대와 불화하는 타임라인에 응답하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야광 콜렉티브’가 지난 6월에 했던 전시를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영상 작업과 설치 작업 그리고 여러 페인팅도 했는데요. 이 사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때 백미가 됐던 것이 총 2회로 진행한 퍼포먼스입니다. 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마치 클럽 같은 분위기에서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특이한 감각을 경험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전시 《윤활유:Lubricant》(2022) 포스터. 포스터 디자인 : 김태리 , 포스터 일러스트 : 젤리껌.

홍지영 님은 사진을 주요 매체로 하여 활동하고, 신체를 기반으로 한 퀴어, 폭력, 섹슈얼리티를 연구하고 있고, 보스토크 프레스의 공모 프로그램 ‘도킹 docking!’에 선정이 되어 올해 사진집 『물의 시간들』을 출간했습니다. 요즘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W/O F.(우프)’라는 창작 그룹에 속해있기도 합니다. ‘우프’는 작년에 발간한 『슬픈 구멍』 외에, 올해에는 『Trash Can! 나의 힘은 쓰레기통이다』라는 두 번째 잡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물의 시간들』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홍지영 님이 자신의 연인이자 디자인 작업을 하는 황아림 작가와의 사적인 맥락이 드러난 사진들, 그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책 중간중간에 끼워 넣은 것입니다. 물론 사적인 맥락이 공적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취약하고 연약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특히 여성 퀴어들의 이런 작업이 가지는 힘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소개해 드림으로써 ‘야광 콜렉티브’와 ‘우프’가 지향하는 바와 두 팀의 작업의 방향성을 여러분도 가늠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팀이 사적인 친밀함을 작업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엔 더 복잡하고 더 접근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보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드리고 중간중간 이야기를 푸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레즈비언 콜렉티브’라는 활동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어요. 왜냐하면 많은 레즈비언 작가들이 한국에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활동을 하고 있지만, 콜렉티브라는 형식으로, 그리고 “우리는 레즈비언 연인이자 작가로서 작업을 한다”고 밝히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건, 제가 알기론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이러한 방식으로 활동하게 되신 계기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저희는 일단 생업을 위해 촬영장의 미술팀에서 동료로 같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콜렉티브를 결성하게 된 건 ‘윈드밀’의 창작자 지원 공간 프로그램의 기획서를 내면서였습니다. 기획서도 레즈비언에 관한 내용으로 쓰게 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작년 여름쯤 서울에서 퀴어 전시들이 크게 열려 개인 작가 분 몇몇의 전시 이벤트를 보았는데 이때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러움도 있었지만, 제대로 해야겠다는 용기를 얻어서 콜렉티브를 결성하게 됐습니다.

이연숙: 사실 저는 야광 콜렉티브의 두 분과도 그렇지만, 이 주제로 다른 레즈비언 또는 여성 퀴어 작가들과 대화를 나눌 때 이 ‘양가적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예를 들어, 어디서 그룹전이 열렸는데 작가들이 다 남성 퀴어, 게이들 위주였다. 여성 퀴어들은 존재함에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시더라고요. 작가님의 주변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편인가요?

전인(야광 콜렉티브): 제 주변 분들에게도 많이 들었고요. 게이 작가들의 전시에서, “요즘 퀴어 미술이 핫한 것 같다.”라는 얘기를 당사자가 아닌 분들에게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레즈비언들의 미술 등이 분명히 있는데, 왜 그 부분은 게이 작가들의 전시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연히 부정적인 감정만 일으킨 게 아니고, 작업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연숙: 혹시 ‘우프’는 어떻게 결성하게 됐나요?

홍지영: 일단 ‘우프’는 총 6인으로 결성된 팀이고, 사진가와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프’ 같은 경우에는 레즈비언 콜렉티브라고 하기에는 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우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먼저 얘기해 보겠습니다. 사진을 보여 줄 만한 기존 매체는 두 개 정도밖에 없었는데요. 거기서 저희의 사진을 보여 주려면 저희의 작업이 매체들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러기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우리의 작업을 직접 보여 줄 수 있는 곳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면서, 함께 사진을 공부했던 친구들과 팀을 결성했습니다.

이연숙: 앞서 보여 드린 것처럼, 작업이 두 사람의 사적 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어서 거기서 나오는 힘도 있지만, 이를 공적인 장소에서 드러냈을 때 개인으로서도 취약해질 수 있는 점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콜렉티브 활동을 하는 분들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사적 관계와 공적 작업을 분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맥락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두 팀 모두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적인 맥락들이 작업의 전면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불안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관계를 밝히지 않으면 저희 작업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레즈비언인 걸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우리의 관계가 작업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었으니 우리가 레즈비언 연인임을 알려 주고 시작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그런 합의를 해 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의 관계가 그냥 매우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 같고, 오히려 전시를 연 후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이게 큰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는데요.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는 동시에, 연인과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되게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홍지영: 저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항상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인데, 셀프 포트레이트를 찍으면서 저의 이야기와 함께 사적인 맥락, 제 얼굴과 신체들이 모두 다 공개됩니다. 제가 저의 애인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식으로 유통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사진의 매체적 특성 때문에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선택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연숙: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사전 미팅을 하면서 본 라운드 테이블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공적으로 드러내어 얘기해 본 적은 없는 질문을 해 보자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왜 레즈비언 미술은 구리다고 느껴지는가?”라는 질문인데요. “레즈비언 미술은 구리다”라는 통념이 저희끼리는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통념에 동의하는지 모르겠기에,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관객 분들께도 이 통념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묻고자 합니다. 잠시 거수투표를 해 보겠습니다. 저희는 레즈비언 미술이 구리다는 것을 각각 다른 맥락과 배경 속에서 알게 되었고 느끼게 되었는데, 관객 분들 중에서는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 명제에 동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레즈비언 미술이 구리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생각보다 몇 명 안 계시네요. 그러면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해 볼게요. “레즈비언 미술은 구리다”라는 명제에 대해 알고 계시는 분 있나요? 생각보다는 별로 없네요. 저희가 이 명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했지만, 이것은 저희끼리의 의견인 것 같습니다.

청중 1: ‘레즈비언 미술’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해 주시면 좋겠어요.

이연숙: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저희가 오늘 ‘레즈비언 미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것을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몇 개의 예시를 보여 드릴 텐데, 그 예시 속에서 ‘구리다’라는 형용사를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명제를 알고 있는 인원이 아주 적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저희끼리 공유한 맥락으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우선 레즈비언 미술 중 어떤 것을 맨 처음 접했고, 또 어떤 것에서 구리다는 인상을 받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홍지영 님께서 이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실 텐데요.

홍지영: 저는 필리스 크리스토퍼(Phyllis Christopher)라는 사진 작가가 1988년부터 2003년까지 찍은 사진들을 다룬 사진집 『다크룸(Dark Room: San Francisco Sex and Protest, 1988-2003)』을 보고 레즈비언 미술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필리스 크리스토퍼가 레즈비언 작가라는 것을 알고 찾아본 건 아니었고, 리서치를 하다가 좋은 사진들을 발견한 것인데요. 저는 스냅 사진을 볼 때 리듬감 같은 것에 주목합니다. 현장에서 어떤 장면을 찍을 때 자기만의 속도가 있는 사진 작가들이 찍을 수 있는 특정 장면이 있는데, 필리스 크리스토퍼의 사진이 자신만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작가 본인도 사진을 찍고 난 후 암실에서 현상을 하면서 눈으로는 확인하지 못했던 장면을 혼자 발견하는 쾌감을 느꼈겠구나 싶었어요. 그런 점에서 필리스 크리스토퍼가 좋아 리서치를 해 봤더니 그는 레즈비언 사진 작가였습니다. 1980~2000년대에 시위에 참여하면서 레즈비언 커뮤니티 LGBT 안에서도 사진을 찍었던 작가였습니다.

이연숙: 필리스 크리스토퍼에 대해서는 홍지영 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시위 현장에서의 친밀함과 에로스를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고, 이 사진집의 부제가 ‘섹스와 시위’라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제가 20살 때 도서관에 가면 항상 도록이 있었고 저는 그 도록에서 참조점을 많이 얻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미국의 레즈비언 미술을 모아놓은 책이었고, 저는 그 책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올여름 아트선재센터에서 아티스트 토크를 하기도 했던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라는 작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미국의 유명한 레즈비언 드라마 〈앨워드(L-word)〉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수염있는 부치들을 통해서 이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부치와 트랜스젠더의 경계에 있는 이분들의 초상을 찍은 작업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끌림을 느끼는 동시에 강렬한 충격을 받았고, 캐서린 오피의 작업을 통해 레즈비언 미술에 대한 인상을 처음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 미술은 나한테 왜 이렇게 구리게 느껴질까?’라는 고민을 계속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두 팀에게는 어떻게 들리시는지, 공감하시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저는 40대 레즈비언 작가 분으로부터, 본인이 대학에 들어가서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레즈비언 미술의 미감이 다 구렸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홍지영: 사진 작가들의 작업 중에는, 퀴어들을 앉혀놓고 초상을 찍은 다음 그 옆에 커밍아웃과 관련한 사적인 내용을 일기로 쓴 것을 붙여놓는 식이 매우 많습니다. 커밍아웃을 했지만 이제는 다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가는,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 있는 퀴어의 초상을 찍은 사진들은, 구리다기보다는 재미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질리지만 항상 반복되는 그런 작업들로 보입니다. 작업으로서의 매력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연숙: 저는 보통 그런 종류의 작업들은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식으로 무언가를 선언하거나 발화하면서 증명사진처럼 쓰이는 것 외에는 작업으로서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구리다’라는 말이 되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저에게는 그런 작업들이 무엇보다도 ‘운동’의 측면이 강하다고 느껴져서, ‘이럴 거면 굳이 사진을 왜 찍는가’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전인 님께서는 또 좋은 예시로서 다른 작가를 언급해 주셨습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제가 소개할 작가는 3회차 라운드 테이블에 게스트로 참여하시는 이반지하 님이십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이반지하 님의 작업을 보고 좋다, 싫다, 어떻다는 감정 판단을 애초에 할 수 없었고,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지금까지도 이반지하 님의 광팬입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하면서 읽는 이반지하 님의 글과 그분으로부터 느껴지는 정서가 너무 효과적이고, 즐길 수 있으며, 재미있고, 충격적이라서 너무 좋았습니다.

또한 구리다는 것은 ‘촌스럽다’라는 말과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촌스러운 것’은 현재 사회가 바라는 주류보다 좀 더 뒤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간적으로 생각하면, 시위 현장에 있는 수많은 플래카드와 사람들, 낡은 건물들, 수도가 아닌 지방 시내의 철제 간판,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같은 느낌으로 저에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이는 제게 의미가 있는 부분인데요. 저는 앞서 언급한 공간들에서 습득한 시각적인 요소들을 제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것들을 예쁘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이연숙: 저희가 이 얘기를 나눌 때 계급적, 계층적, 지역적인 것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도 했었는데요. 홍지영 님께서 이어서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홍지영: 사전 미팅을 하면서도 말했지만, 저는 위스키나 칵테일이 아니라 소주의 이미지가 레즈비언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관련하여 저희 팀 얘기도 이어서 해 보자면, ‘우프’라는 팀은 구성원 6인 모두가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6인 중 한 명만 4년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우프’에는 지방이나 경기도 외곽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많고, 비평이나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작업이 구리게 되는 것은, 저희가 모든 조건에 들지 못해서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희가 팀의 이러한 성격을 처음부터 지향한 것은 아니고요. 하다 보니 팀이 이렇게 만들어졌으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가 이 위치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 것으로, 이 위치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는 중입니다.

이연숙: 계속해서 이 주제에 대한 미팅을 하면서, “어떤 것들이 ‘구린 방식’으로 평가되는가?”라는 질문과 (구린 방식이 재생산되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왜 이걸 구리다고 인식하고 구린 것처럼 읽어내는가?”라는 질문은 성격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홍지영 님께서도 언급해 주셨듯 구리다고 인식되는 것들은 모두 ‘밑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홍지영 님은 밑에 있는 존재들이 생산하는 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과 일맥상통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라운드테이블 진행 당시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이미지. 아래 대화는 해당 이미지를 화면에 띄운 채 진행되었다. 제공: 이연숙.

이미지를 보겠습니다. “왜 레즈비언 미술이 구린 방식으로 인식될까?”라는 질문에 대해, 홍지영 님께서 이런 설명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기준 위에 역사와 과학 등이 있다. 그런데 밑에 있는 것들은 아직 역사가 되지 못했기에 기준 위에 올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밑에 있는 것을 더 위쪽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사적인 맥락들, 구구절절한 말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설명을 하게 되면서 덜 시각적·예술적으로 보이거나, 혹은 덜 상업적으로 보이거나, 덜 매력적으로 보인다.

저는 홍지영 님이 이 예시를 제시해 주셨을 때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이 모델이 푸코가 설명한, 앎 혹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대한 문제와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잭 할버스탐은 『실패의 퀴어 예술(The Queer Art of Failure)』 1장에서 “왜 우리가 저급 이론을 우리의 무기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푸코를 인용합니다. 푸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앎, 즉 죄수들의 앎일 수도 있고 레즈비언들의 앎일 수도 있으며 간호사나 노동자들의 앎일 수도 있는 것들을 우리가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지속돼 온 투쟁과 억압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밑에 있는 존재들의 앎을 가지고 우리가 싸워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홍지영 님이 이 모델과 매우 흡사한 방식으로 “왜 레즈비언 미술이 구린가?”라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 같아요.

홍지영: 저는 앞서 말씀하신 것들이 ‘정상인’을 기준으로 하는 설명인 듯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실 역사와 과학이 세워진 기준으로 말을 하니까 밑에 있는 존재들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밑에 있는 존재의 상태, 즉 밑의 위치가 아닌 밑의 상태를 가름하는 선은 옆에 있을 수도 있고, 밑에 있어서 밑에서부터 쌓이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연숙: 어려워요. 좀 더 직관적인 예시를 들어 줄 수 있을까요?

홍지영: 밑에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위에 무언가가 있음을 상정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있다고 간주되는 것이 사실 위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인 상태로 생각했을 때, 저 위에 쌓여 있다고 생각되는 역사와 과학 같은 것들이 옆이나 밑에 있을 수도 있고 ‘나’라는 존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지영, 〈물의 시간들〉 연작, 2021. ©홍지영.
홍지영, 〈물의 시간들〉 연작, 2021. ©홍지영.

이연숙: 다음은 어려운 부분입니다. 정의되지 않은 것을 저희가 이 자리에서 정의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두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레즈비언 미술’이라는 것을 임시로라도 정의해야, 그것의 특징과 전략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는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 대신에, 우리가 레즈비언 미술에 대해 어떤 형용사적 특징들을 떠올리는지, 어떤 형용사로 레즈비언 미술을 설명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면서 좀 얼기설기한 정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레즈비언 미술의 형용사적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돌아가면서 한 단어씩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전인(야광 콜렉티브): 저는 ‘구구절절’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구구절절’은 면접에서 합격하기 위해 자신을 어필할 때 말이 많아진다든가, 중요한 자리에 갈 때 일부러 과하게 꾸미고 간다든가 하는 등의 행동이 늘어난다는 의미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작업적인 것이든 아니든 할 말이 많고, 설명을 하고 싶어 하며, 자기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키려는 태도를 ‘구구절절’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저는 레즈비언이니까 역시 ‘성애적’인 것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레즈비언 작업을 보여 주려고 하다 보면, 여자 두 명이 그냥 서 있는 것으로만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연숙: 저번에 저희가 사전 미팅에서, 백합물에 대한 굉장한 반감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그런데 백합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니까 선뜻 말하기가 어려운데요. 요즘에는 웹툰의 카테고리에서 ‘백합/GL’로 합쳐서 분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걸 백합으로 볼 수 있는지도 큰 난관이지만, 예를 들면 영화 〈윤희에게〉와 같이 성애가 보이지 않고 손을 잡고 끝나는 정도를 백합으로 본다면, 레즈비언 미술에는 그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성애적인 것을 보여 주는 작가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혹은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펨, 부치의 특징이라든지, 레즈비언만이 가지고 있는 명확한 것들을 좀 더 보여 주려고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홍지영: 일단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소주’인 것 같아요.

이연숙: 왜 이렇게 소주에 집착하시나요? 저는 소주를 좋아하지 않아서 사실 반박을 하고 싶었어요. 소주를 좋아하시나요?

홍지영: 네, 좋아합니다. 제가 저와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서 그런지, 제가 아는 레즈비언들은 다들 소주를 좋아하시더라고요.

이연숙: 소주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홍지영: 옛날 아빠 같은 그런 느낌?

이연숙: 어쨌든 지금 나온 이야기들로 레즈비언 미술을 정의한다면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없을 것 같습니다. 레즈비언이라는 범주에 자발적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없을 것 같은데, 이 경우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이 있을까요?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이 촘촘한 망을 통과하여 남은 것들에 대한 자긍심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연숙: 지금 언급해 주신 ‘구구절절’, ‘성애적’, ‘소주’로 표현되는 레즈비언 미술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이걸 만약에 ‘전략’이라고 한다면요.

홍지영: 이건 조금 다른 맥락일 수도 있는데, 레즈비언 미술에 대해서 생각하려면 레즈비언이 뭔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하잖아요. 레즈비언은 고정된 것인가? 사실 정체성은 고정되기 힘든 거잖아요. 10년 동안 연애를 안 했지만 여성을 좋아하는 레즈비언도 있을 수 있고요. 여성인 채로 만났지만 여성을 좋아해서 여성 둘이 만났는데 정체화를 다시 하게 되면 나머지 한 명은 레즈비언일까요, 아닐까요? 레즈비언을 만나다가 남자를 만나게 될 경우 그 사람은 레즈비언으로부터 이탈하는 걸까요? 저는 정체성이 이처럼 임시적, 유동적, 인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 미술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즈비언 미술은 특수한 방식으로 여성적임을 공유하는 어떤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미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봤습니다.

이연숙: 그것은 페미니즘 미술 아닌가요.

홍지영: 그런 문제가 또 생기는 것 같으니, 레즈비언 미술에서는 ‘성애적인 것’이 빠지면 안 되지 않을까요?

이연숙: 저는 ‘레즈비언 미술’에서 정체성을 떼어 내려고 했습니다. 레즈비언 미술을 레즈비언 정체성으로 정의하게 되면, 즉 ‘레즈비언이 하는 것이 레즈비언 미술’이라고 정의하면, 당장 레즈비언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레즈비언 미술의 시각적, 내용적, 소재적 특징과 레즈비언 당사자를 떼어 내려고 했습니다. 레즈비언 미술을 그런 방식으로 읽어 낼 때, 레즈비언 미술이 아닌 것을 레즈비언 미술로 읽어 낼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이 아닌 ‘특징’을 통해 레즈비언 미술을 이야기해 보려고 했던 것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인(야광 콜렉티브): 전 레즈비언 클럽에서 일을 오래 했습니다. 일단 거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제가 생각하는 존(zone)에 입장을 한 사람들이라고 가정을 하고 봤던 것 같아요. 그들의 얼굴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일단 거기에 자유롭게 입장을 하는 사람들은 레즈비언이라는 가정하에 바라본 것 같습니다.

이연숙: 아마 지금 여기에 계신 분들은 모두 다 의견이 다를 텐데,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이름을 가져가려는 사람은 그냥 가져다 써라. 왜냐하면 여기에는 딱히 좋은 것이 없으니, 일단 가져다 쓰고 싶으면 써라. 이런 방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 이 토크를 준비하면서, 예전에 제가 퀴어 방송을 했을 때 대화를 나눴던 한 남성 분이 생각났습니다. 그분의 목소리가 남자 같았다는 이유로 제가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분은 레즈비언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6~7년 전인데도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게, 그분이 레즈비언이라는 주제에 대해 몹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저는 당시에 그분을 취향이 왜곡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이 토크를 준비하면서, 그 사람은 아마도 레즈비언이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가져가려는 사람은 이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자리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닌데, 여기에 굳이 관심을 가지면서 무언가를 가져가려는 사람은, 레즈비언을 좋아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이성애자 남성일 수도 있지만, 역시 레즈비언인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희가 지금 레즈비언의 특징을 형용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성애적’, ‘소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셨는데, 혹시 청중 분들 중에 이것 이외의 의견을 말씀해 주실 분이 계실까요? 오늘의 라운드 테이블 녹취록이 추후에 세마 코랄 홈페이지에 올라갈 것이기 때문에, 한두 분 정도만 얘기해 주시면 읽는 분들이 즐거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청중 2: 제가 라운드 테이블을 들으면서 레즈비언 미술의 특징으로 떠올린 것들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즈비언 미술은 ‘가족 내 폭력’, ‘추락’이나 ‘자살’, ‘엄마에 대한 애증’ 그리고 엘리트 여성일 경우에는 ‘마스킹’과 관련된다는 점인데요. 본인이 아무리 ‘오픈리 레즈비언’이라도 자신의 작업은 쉽게 레즈비언 미술로 분류될 수 없도록 일부러 혼란을 주는 특징이 떠올랐습니다.

이연숙: 아니, 이 대답을 어떻게 수습하죠? 말씀해 주신 내용은 일반적으로는 건강한 형용사로 여겨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병적이거나 감정적으로 격렬한, 부정적인 영역에 있는 것들이 레즈비언 미술과 관련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 같습니다. 매우 동의하지만, 동의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요. 혹시 덧붙여서 한 분만 더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 이야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 계실까요?

청중 3: 말씀해 주신 것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지금 저에게 떠오른 이미지로 말하자면, 게이 미술은 생 닭 가슴살을 삶아서 예쁘게 플레이트를 한, ‘파인 디쉬’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한다면, 레즈비언 미술은 생 닭 가슴살을 탁 던져놓고 “나 여기 있다”라고 말하는 느낌이 듭니다. 저도 똑같이 20대 초반에 레즈비언 미술을 보고 구리다고 생각하며 등한시했습니다. 오늘 이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 제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레즈비언 미술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고 ‘마스킹’이라는 단어도 새롭게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듯이, 레즈비언 미술의 ‘꾸미지 않으려고 하는 특징’이 페미니즘의 탈코르셋과 연관이 되는 것인지 궁금한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연숙: 청중 분께서 레즈비언 미술이 탈코르셋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질문해 주셨습니다. 매우 연관이 깊은데요.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운동이 아주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도 미국의 영향을 받아 이런 운동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고요. 운동에는 항상 어떤 극단을 향해 가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에서의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전략과 그 운동 속에서 나온 레즈비언 미술은 사회적·문화적으로 부과된 여성성을 거부하거나 그에 반박한다는 데서 매우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인(야광 콜렉티브): 꾸미는 여성, 여성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완전히 대항하는 미술을 많이 봤는데요. 제 생각에 야광 작업에서 사용하는 시각적 전략은 여성성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잉’인 것 같습니다. 저희는 레즈비언 생태계 또는 하위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각적 요소를 반복하고 과잉되게 꾸미는 전략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이연숙: 우리가 오늘 여기서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레즈비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페미니즘이 전제가 되거나, 페미니즘의 주제가 레즈비언 이야기를 잡아 먹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청중 분들이 예시로 들어 주신 이야기를 좀 더 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분은 게이 미술은 파인 다이닝 같고 레즈비언 미술은 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고, 앞서 다른 분께서는 정신적, 물질적 혹은 부정적인 영역에 있는 감정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엄마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이 레즈비언 미술에서 중심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들 동의하시나요?

전인(야광 콜렉티브): 저는 동의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레즈비언 미술은 구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레즈비언 미술을 하는 당사자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엄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떤 경우에는 엄마가 자신의 마음대로 컨트롤이 안 되는 자식에게 일부러 잔인하게, 못되게 구는 경우도 있고요.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 〈러빙 하이스미스〉에서, 가명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글을 발표하며 작가로 살아가는 하이스미스의 삶에서, 엄마에 대한 애증과 폭력성 같은 것들이 중년 여성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홍지영: 저는 사실 엄마에 대한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연숙: 저희가 엄마에 대한 양가적 감정과 레즈비언 미술의 관계를 통합하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레즈비언 미술의 특징에 대해 스케치하듯이 이야기해 보았는데요. 우리가 건강하거나 긍정적이거나 남들이 탐낼 만한 특징이 아닌 것을 가지고 어떻게 레즈비언 미술을 의미 있게 또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홍지영 작가님이 ‘우프’에서 하시는 프로젝트 제목이 『Trash Can! 나의 힘은 쓰레기통이다』인데요. 쓰레기통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려는 방식이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홍지영: ‘쓰레기통’의 특징이 매력적이어서 그것을 주제로 삼는 것을 1순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잘라지고 이어 붙여지거나 계속 스캔되면서 열화(劣化)된 이미지들, 사적인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항상 좋아했습니다. 만화, 웹툰을 볼 때도 외전이나 쪼가리로 올라오는 글과 그림이 항상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이 그간 못 했던 것들을 이번에는 다 해보고 디자인도 한껏 즐겨 보자는 의미로, 이런 특징과 방식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슬픈 구멍』이라는 첫 책에서는 우리가 슬픈 감정을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면, 이번 『Trash Can! 나의 힘은 쓰레기통이다』는 슬픔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슬픔이 왜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있는지를 살펴 보면서 기획하고 있습니다.

야광 개인전 《윤활유:Lubricant》(2022)의 전시 전경. 사진: 김태리.
야광 개인전 《윤활유:Lubricant》(2022)의 전시 전경. 사진: 김태리.

이연숙: ‘야광 콜렉티브’ 두 분은 이번 전시에서 ‘시각적 포만감’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장식적인 부분을 극대화하는 시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시각적 포만감’이라는 용어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장식적인 것도 값어치에 따라서 고급 장식과 하위 장식으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익숙한 장식은 거리나 시위 장소, 또는 대도시에 비해 낙후된 도시의 옛날 나이트 전단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시각적으로 정제되어 있고 많은 것이 소거되어 있는 작업을 많이 봐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하위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시각적인 요소들을 과잉되게, 크게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를 전략적으로 드러냈을 때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고, 이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으며, 그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연숙: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행사를 기획하고 사전에 얘기를 좀 나누면서 제가 첫 번째로 하게 된 생각은 ‘시립미술관에서 레즈비언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게 된 생각은 ‘왜 그래야 되지?’입니다. 평소처럼 ‘여성문화이론연구소’를 대관해서 얘기하면 될 텐데, ‘왜 내가 시립미술관에서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려고 할까? 이 욕망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나눴을 때, 야광 콜렉티브의 두 분과 홍지영 님께서도 양가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셔서 그것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레즈비언 미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게 미술관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시위 현장이나 클럽 안에 언제나 있어 왔다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동의하시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체: 네. 동의합니다.

이연숙: 그러면 하던 대로 클럽에 가고 시위 현장에 나가면 되는데, 왜 레즈비언 미술이 미술관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가?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욕망이 왜 있나? 왜 옆집의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게이 미술가들에 대한 질투를 계속 할 수밖에 없을까? 등의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어떤 감정으로 듣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일단 목표는 소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되기 위해서는 레즈비언 미술의 생태계의 풀을 더 넓힐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의 생태계가 맞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과 갈등, 이벤트들이 더 다양해진 뒤에야 소멸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또한 소멸 이후까지 함께 논의할 수 있어야만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렇게 레즈비언 미술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저도 소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소멸을 누가 지켜보느냐에 대한 궁금증도 있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퀴어 여성, 남성 분들이 많이 와 주셨지만, 만약 레즈비언 미술이 제도권 안에 들어간다면 그러한 레즈비언 미술의 수용자층은 (미술관에 손잡고 데이트를 하러 오는) 헤테로 커플들이 주를 이룰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이 레즈비언 미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점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방송한 〈메리퀴어〉는 퀴어 커플 몇 쌍이 나와서 퀴어한 일상을 보여 주고 마지막에는 결혼과 미래를 약속하면서 마무리짓는 리얼리티 쇼였습니다. 그 방송에서 EXID의 하니 님이 패널로 나왔는데요. 그분이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송에서는 헤테로 여성의 스탠스를 맡았고, 1화부터 9화까지 매번 울기만 하셨습니다. 레즈비언은, 퀴어는 무엇을 하든 불쌍해 보이나 싶을 정도로 많이 우셨습니다. 만약 레즈비언 미술이 제도권에 들어온다면 사람들이 우리의 미술도 좀 다르게 보게 될까? 우리가 보는 것과 일반인들이 보는 시각은 많이 다를까? 하는 궁금증도 갖고 있습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그것 때문에 제도권에 안 들어갈 수는 없고, 오히려 그런 것도 좀 감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제도권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제도권에 들어간 레즈비언 미술의 소멸을 지켜보는 헤테로 분들의 반응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연숙: 혹시 먼저 빨리 소멸하는 것들이 정해져 있을까요?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태계적으로 약한 위치에 놓인 것들이 먼저 소멸할 확률이 조금 더 높지 않을까요?

홍지영: 저는 레즈비언 미술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결론 같습니다. 왜냐하면 레즈비언 미술은 기존에 만들어진 것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기에, 제도권의 입장에서는 레즈비언 미술이 만들고 있는 것이 엄청 탐이 날 수밖에 없고 좋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레즈비언 미술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건 예견된 일인데요. 제도권에 들어간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가 조금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제 경험을 얘기하자면, 저는 보스토크의 ‘도킹 docking!’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3년 정도 편집장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첫 책을 냈는데요.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물론 작가와 편집장 사이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적인 내용과 사진의 수위를 조정하고 사진을 선정하는 기준이 전혀 달랐습니다. 작가와 편집장의 다름뿐 아니라 정체성에서 기인한 차이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기관에 속할 때는 그 안에 퀴어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몇 명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자문으로라도 말입니다. 편집장님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저도 타인에게 무언가를 계속 설명해야 하고 타인도 저에게 설명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 일방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내가 타인을 설득해야만 내가 싣고자 하는 사진을 실을 수 있는데, 이 과정이 저에겐 너무 소진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결국 작업을 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더 중요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데, 말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더 많이 쏟게 되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제도권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거고, 제도권에 들어갔을 때 생길 수 있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준비를 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도권 미술로 진입한 후에 우리가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이런 것들에 대한 방편을 좀 더 마련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연숙: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소수자의 정체성을 다루는 미술, 즉 하위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자본의 논리 또는 훨씬 더 거대한 헤게모니에 편입되고 흡수되어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길임에 동의합니다. 이런 종류의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이미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레즈비언 미술 중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폭력적이거나 매우 극단적인 이야기 또는 소멸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들이 진입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레즈비언 미술에서 무언가를 취한다면 그것은 아름답거나 매우 온순한 것,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는 것일 거고, 같은 정체성 안에서도 모든 게 다 이해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퀴어 여성, 레즈비언이라고 하더라도, 제 주변에는 백합적이거나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하게 있지만 하드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그보다 적습니다. 나에게서, 내 작업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은 그것이 레즈비언 작업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매우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수용되기 어려울 만큼 부정적인 것을 탐구하는 등의 취향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런 것에 대해서는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홍지영: 그것도 일부분 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폭력적인 것들을 탐구하는 작업을 제가 아니라 백인 남성이 했다면 이는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록되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계에서도 엽서로 만들 수 있는 사진만 팔리고 그것만 잡지에 실리게 된 지가 매우 오래되었고, 저희가 이에 염증을 느껴 팀을 만들어서 사진을 보여줄 곳을 찾은 것처럼요. 사실 제도권에 기입되는 작가들도 계속 생길 테지만, 그와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계속 있어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도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폭력적이고 더러운 것들을 표출하는 것에 한동안 더 집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이번 개인전에서 보인 작업에 극단적인 성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가 앞으로 만들고 싶은 이미지는 이전의 것보다 조금 더 강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보여 주는 방식이라든가 알리는 방식에서는 좀 더 단단한 전략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작업의 과정과 실행에 끼칠 영향을 생각한 결과는 아닙니다. 저의 작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걱정이 엄청 휘몰아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연숙: 다음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해 주세요.

전인(야광 콜렉티브): 최근에 배우 로버트 패틴슨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굿타임〉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훔치고, 강탈하고, 결국에는 감옥에 가는 등, 편집이 다채로웠습니다. 이 영화에서 소스를 얻어서 재미있게 작업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영화의 전부를 레퍼런스로 삼는 것은 아니고, 구상이 아직 구체화되지도 않았지만, 이 영화의 영향이 클 것 같습니다.

이연숙: 저희가 더 얘기하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이 자리에 다들 힘겹게 모였으니 청중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것에 이어서 저희의 질문들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주시거나 저희에게 질문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청중 4: 오늘 토크 잘 들었습니다. 맨 처음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레즈비언 미술을 이야기한다는 것의 쾌감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패널 분들이 신나 보여서 저도 서울시립미술관에 호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저는 홍지영 작가님과 이연숙 연구자님께 질문이 하나씩 있습니다. 홍지영 작가님께서 처음에 셀프 포트레이트도 찍고 여행 사진도 찍는 등 여러 가지를 해 보았는데 남은 선택지가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고, 그 이미지들을 드러내는 결심의 이유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그때 그 결심의 배경과 결심 당시의 기분이 궁금합니다.

이연숙 연구자님께서 레즈비언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레즈비언 미술에서 레즈비언을 빼 보고 이야기하면 어떻겠냐고 말하시면서, 연구자님이 퀴어 방송을 진행하셨을 때 레즈비언으로 추정한 남성 분의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아르코 미술관 전시 《올어바웃 러브: 곽영준, 장세진(사라 반 데어 헤이드)》 라운드 테이블에서 오혜진 님이 각자의 당사자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퀴어 당사자성을 차별금지법 제정과 연결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은 큰 차원에서 사회의 법과 체계를 바꾸고 시민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오늘의 라운드 테이블을 들으면서도 이와 관련하여 각자의 당사자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책 『사랑과 야망』에서 흑표범 작가님께서는 퀴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당사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또한 또 다른 당사자성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패널 분들은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홍지영: 제가 먼저 답을 하겠습니다. 작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아니었습니다. 5년 전쯤 제가 20살 때, 하루하루를 버티는 방법이 A4 용지 한 장 정도를 글자를 꽉 채워서 글을 쓰고 다섯 장 정도를 드로잉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쓰는지가 중요했다기보다는 수행하는 느낌으로 종이를 꽉 채우곤 했습니다. 또 하나는, 어쩌다가 시작하게 됐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카메라를 세워 놓고 하루에 500장 넘게 제 자신을 찍는 일을 수행으로, 기도로, 하루를 버티기 위한 마음이자 방편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면서 수행의 나날을 보내다가, 이것이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3년 전쯤 제가 황예지 작가님의 사진 스터디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저도 이 수행을 혼자서 지속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예술 학교에 사진이나 결과물을 가져갔을 때에도, 사람들은 호기심 넘치게 바라보거나, 신기하고 매력적이라고 말하곤 끝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몹시 필요해 여기저기 찾아 헤매다가 들어간 게 황예지 작가님의 사진 스터디였습니다. 황예지 작가님은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나 제가 찍는 사진,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말해 주고 들어 주셨습니다. 그게 저에게는 되게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선택지가 없었다”는 말의 뜻은, 여러 개를 두고 선택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제가 하고 있던 일을 쭉 해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연숙: 청중께서 오혜진 선생님의 말씀과 흑표범 작가님의 말씀을 가지고 질문을 해 주셨어요. 저도 두 분의 말에 동의하지만, 질문해주신 분을 위해 다른 관점도 덧붙여 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정체성과 관련한 ‘경험’이 없더라도, “나는 레즈비언이니, 지금부터 레즈비언으로 불러줘”라고 말하는 상황 자체가 발화자에게 매우 큰 변화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정체성이란 ‘선언’을 통해 자기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반드시 수반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선언’을 위한 ‘선언’은 별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정체성이 고안되고, 우리가 정체성으로 여러 이론을 만들게 된 이유는, 소수자인 우리의 경험과 삶을 설명할 만한 언어와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먼저 있고, 그 삶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도구를 발명해 낸 것입니다. 하지만 정체성이라는 이름과 그것의 규범이 삶에 우선하게 된다면, 그게 과연 맞는 순서일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앞서 청중 분께서 해 주신 질문은 이 자리에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청중 5: 저는 토크 중에 레즈비언 미술의 특징을 가족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지어 생각하면서,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문장들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성소수자 중에는 부모님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을 싫어하지 않고 더불어 잘 지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본 성소수자 부모님에 대한 다큐멘터리에는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서 열렬히 활동하는, 마치 유니콘처럼 느껴질 법한 비현실적인 부모님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되게 놀라웠고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들 중 레즈비언의 부모는 얼마나 될까 싶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부분에는 모든 부모들이 나와서 자신을 어떤 이의 부모라고 밝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밝히는 부모들은 대부분은 게이 아들을 가진 부모였고, 나머지가 MTF의 부모였습니다. 그들의 부모 자식 관계는 마치 자식이 퀴어라는 사실만 해결하면 이물질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에 비해 레즈비언들은 기본적으로 부모와의 관계에 다소 폭력적인 정서가 깔려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연숙: 네, 저희가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한 지 1시간 반 정도가 지났는데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의 예시를 들어주셨는데요. 만약 자식이 성소수자인 것만 빼면 정상 가족이지 싶을 만한 경험이 거의 없는 그런 존재들이 레즈비언들이라면, 지금 이 토크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단순히 드라마틱하거나 부정적인 경험들이 우리의 토대에 있다고 얘기하고 끝내면, 우리는 그냥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에 불과하게 되잖아요. 이대로 끝내도 되나요? 그 경험이 우리의 공간에 있다고 말하고 끝내도 되나요? 그 외에 다른 설명을 할 만한 언어가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나요?

홍지영: 트라우마와 같은 경험이 레즈비언에 한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물론 레즈비언이 더 고통받을 수 있지만, 레즈비언이 아니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살아가며, 각자의 위치에서 겪는 고통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트라우마를 가질 만한 사건을 일생에서 몇 번은 겪습니다. 그러한 사건을 특히 더 많이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그들이 바로 레즈비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고통이 항상 부정적인 감정을 수반한다기보다는 이를 즐기면서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즐겨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라, 즐거움이 정말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면 고통이 아닌데, 우리는 고통이라고 인지하고 그 고통을 아픔으로 받아들이잖아요. 여기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인지하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홍지영 님의 말씀에 조금만 더 이야기를 보태자면, 제도권에 들어가서 레즈비언 미술을 보여 주는 게 그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료들을 더 만들고 우리들의 고통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공유하는 데서 나오는 힘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청중 6: 방금 제도권 얘기를 하셨는데, 지금의 제도권 미술의 의사 결정자들 중에 퀴어는 압도적으로 적습니다. 퀴어 예술은 즐거운 것이었으나, 제도권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사라졌습니다. 처음 클럽에서 했던 퀴어 예술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원 사업에 매달리고 맞추다 보니 퀴어 예술이 재미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제도권에 들어가려다가 망가진 플랫폼들을 많이 보았는데, 왜 이래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퀴어 예술을 해야 하는가, 퀴어 전시를 오픈해서 만나는 관람객들이 헤테로라면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인(야광 콜렉티브): 저희는 다 기획서를 썼습니다. 개인전도 아르코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한 것인데요. 당시의 계획서를 통해 저희가 제도권 미술이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의 작업을 했다고 판단했기에 아르코에서 저희에게 기금을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무용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들이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클럽에서 행사를 하고 있고, 그곳에 온 사람들과 얘기는 안 해도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제도를 통과하려고 구겨 넣으면서 저희 기획에서 삭제된 것이 많이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들이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태리(야광 콜렉티브): 사실 돈이 없으면 전시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보여 주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청중 5: 기금과 관련해서 하나의 긍정적인 예시가 될 만한 게 있습니다. 저는 작업에 필요한 예산을 대부분 멀티미디어, 뉴 미디어 신(scene)에서 가져오는데요. 거기에서는 레즈비언 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멀티미디어, 뉴 미디어 신에는 기술이 있는 대신 내용이 없기 때문에, 시각 예술 신에서만큼 이야기를 자세히, 비평적으로 쌓아 올리지 않더라도,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뉴 미디어 신에서 1년 동안 지속한다는 것 자체를 기뻐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아까 언급되었듯 불쾌한 이야기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것을 얼마나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기금을 따기 전에는 어느 정도 선을 지켜서 이야기를 하고, 기금이 들어오고 나면······.

그리고 제가 아까 말한, 엄마에 대한 애증이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퀴어가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부정적인 얘기가 많이 나온다고 생각을 하시는데요. 저의 경우에는, 저희 엄마는 제가 레즈비언인 것을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고, 이를 좋게 봐주시는 편입니다. 이상하게도 제 주변의 몇몇 친구들의 어머니들 또한 저희 엄마와 비슷하십니다. 하지만 저도 엄마를 향한 애증은 당연히 갖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것은 제 주변 친구들의 한정된 얘기일 수도 있고 보편적인 얘기일 수도 있는데요. 저의 주변 친구들은 엄마와의 관계에 에로틱한 사랑의 감정이 섞인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모종의 정신적인 SM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제 주변에는 이와 같은 감정선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기에, 이 부분도 추가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청중 6: 저는 ‘과연 사람들이 레즈비언 미술을 탐내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까 ppt에서 보여 주셨던 선 밑에 있는 존재들이나 구구절절함이 사람들이 탐내지 않을 특성인가 질문한다면,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흔히들 ‘불행 배틀’이라고 말하잖아요. 퀴어의 ‘고유성’을 사람들이 원하기에 제도권 진입이 당연하다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도권을 많이 언급하고 계속 의식하는 것 자체가 퀴어 정체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제도권에 들어가서 재미가 없어지거나 포기해야 할 것이 생기는 것 자체가 사실 제도권에 큰 힘을 부여하고 권위를 주는 행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홍지영 님이 ppt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밑에 있는 존재들을, 그들의 감정을 강점으로 만들 수 있는 전략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퀴어가 불행하다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청중 7: 야광 팀에서 전시 후에 그 전시가 동료를 찾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셔서 생각이 났는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퀴어 레즈비언 네트워크를 어떻게 또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해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셨는지도 궁금해요.

이연숙: 저희 역시도 라운드 테이블을 준비하며, 이것이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작업하는 사람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대화를 했습니다. 실제로 네트워크를 한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요. 구심점이 없는 텅 빈 연합체 같은 게 있으면 좋지 않겠냐고 이야기했을 때 좋아하는 분도 계셨고 굉장히 우려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저는 그냥 ‘잘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도, 하는 중에도, 끝난 뒤에도 계속 했습니다. 자신이 작업을 했을 때는 어땠는지를 말해 주는, 저희보다 먼저 작업을 시작한 작가들이나, 아직 작업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 작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콜렉티브라서 둘이서 작업을 하지만 적은 수이기 때문에 저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했고, 이런 이야기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 조직이 만들어졌을 때 그것을 활성화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저는 걱정이 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이연숙: 레즈비언들이 모인 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한 굉장히 많은 역사적인 예시들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우려가 일단 되게 큰 것 같고요. 제가 요즘 피부로 느끼는 것은 야광 팀이나 홍지영 님과 같은 주제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같이 “이런 작업을 나 말고 누가 또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들끼리 무얼 좀 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차원에서 제가 불쑥 네트워크를 제안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홍지영: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네트워크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우프’에서 진행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잡지 1호에는 저의 작업과 더불어 10명 정도가 더 참여했고, 1호 후에 저희가 새로운 호를 준비하면서 욕심이 났던 부분이 있었는데요. 저희도 작업을 시작한 지 1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그보다 더 최근에 작업을 시작하신 분들을 찾아보거나, 작업을 매우 오래 하신 분들에게 접촉하거나, 우리가 좋아했던 사람들도 두드려 보자는 차원에서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들 중 절반은 대답이 없었고 절반에게서는 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분들과 작업을 할 때 그저 작업을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행사도 열어서 그분들이 어떤 과정으로 작업을 했는지 직접 이야기도 듣는 등 소통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우프’를 시작했을 때는 6명으로 출발했지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고, 점점 우리가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고 느껴 그것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준비하는 새로운 호는, 우리는 통로 같은 역할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해 보자는 취지로 만들었습니다. 덧붙여, 그동안 이것이 잘되겠다는 판단이나 희망 같은 것은 없었는데, 좀 더 쉬엄쉬엄 생각하면서 큰 통로를 진짜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전인(야광 콜렉티브): 저는 네트워크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천 레지던시의 전시를 보러 갔을 때 발견했던 캐비닛이 있었는데요. 그곳에는 그동안 레지던시를 거쳐간 작가들의 파일이 다 꽂혀 있어, 거기에 온 사람들이 오며 가며 작가들의 파일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물질적인 장치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연숙: 네, 질문이 더 없으면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들어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저급 이론들의 연합’〉(연구자: 이연숙) 중 첫 번째 라운드테이블 “여성 퀴어 작가의 콜렉티브” 현장 장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세마 러닝 스테이션, 2022년 9월 8일. 패널: 야광 콜렉티브(김태리, 전인), 홍지영, 이연숙. 사진: 김진주.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본 원고는 아래 일정으로 열렸던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저급 이론들의 연합’〉의 현장에서 나눈 말을 글로 옮기고 편집을 거쳐 보완된 녹취록입니다.
2022년 9월 8일 목요일 오후 3~5시 “여성 퀴어 작가의 콜렉티브”(패널: 야광 콜렉티브, 홍지영, 이연숙)
2022년 9월 16일 금요일 오후 3~5시 “아마추어리즘과 비평”(패널: 강덕구, 이여로, 이연숙)
2022년 9월 23일 금요일 오후 3~5시 “실패의 퀴어 예술”(패널: 문상훈, 양승욱, 이반지하, 이연숙)
라운드테이블 전체를 정리한 글은 이연숙, 「〈저급 이론들의 연합〉: 후기」입니다.

녹취록 초고 작성: 박지연
교정, 교열, 윤문: 정혜진

© 2024 작가, 저자,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세마 코랄 | SeMA Coral)에 수록된 콘텐츠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작가, 저자,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있으며, 저작자와 서울시립미술관의 서면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각 저작물에 담긴 의견은 미술관이나 세마 코랄과 다를 수 있으며, 관련 사실에 대한 책임은 저자와 작가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