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바다는 무한하다(ver.2)

미셸 웡
미셸 웡(Michelle Wun Ting Wong)은 홍콩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연구자이며,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에서 전시와 정기 간행물을 통해 유통과 교환의 역사를 탐구하고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1925–2009) 아카이브에 관해 연구했다.

우선 “배움의 바다는 무한하다(學海無涯)”라는 제목 이야기부터 할까 합니다. 이 문장은 중국 속담으로, 제가 2017년 광저우 타임즈 미술관(Times Museum)에서 했던 발표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당시 저와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동료들은 고(故)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작가의 아카이브를 3년에 걸쳐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연구만큼이나, 하 비크 추엔의 자료를 아카이브로 분류하고 디지털화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프로젝트 공간을 1년간 운영하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때 저와 동료들은 하 비크 추엔의 기록들에 실제로 무엇이 담겼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말 그대로 아카이브를 언패킹하는 일에 쏟았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하 비크 추엔의 수집 자료가 가진 풍부함에 우리는 경탄했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아무런 학문적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예술과 시각 문화 전반에 강한 욕구를 가졌던 예술가 하 비크 추엔에게는 이 아카이브가 자기주도적 학습 도구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동시에 팀으로서 우리가 직면한 이 수집 자료 묶음은 그것을 직접 들춰보고 연구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연구자들 또한 번번이 잘 알지 못하면서 어떤 미지의 것을 다루기 위해 자기 학습을 해야하는 처지에 놓였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와 같은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미칠 영향이 무엇일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한 개인의 창조적 삶으로 깊이 빠져드는 연구가 어떻게 우리의 지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바꾸어 놓는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하 비크 추엔의 아카이브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거쳐갔던 과정들을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그 작업에서 들었던 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 비크 추엔은 누구인가?

1976 홍콩 시정국 예술상 수상전(Urban Awards Winner Exhibition), 홍콩 시청.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하 비크 추엔은 1925년 광둥성 신후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50년대 마카오를 거쳐 홍콩으로 건너와서, 1960년대 예술가가 되기 전까지 가족사업으로 종이꽃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처음 접한 하 비크 추엔의 이미지는, 1976년 홍콩 시정국 예술상 수상전(Urban Awards Winner Exhibition)에서 찍은 사진의 밀착 인화지였습니다. 이 이미지는 스캔을 거쳐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가 소장한 파일로 저장된 것으로, 제가 실제 밀착 인화지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풍부한 시각적 정보를 담보하고 있었기에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 이미지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저는 하 비크 추엔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나무 같은 물질을 다루는 조각가이자 판화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문 사진가를 고용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와 인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꺼이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며, 사진 현상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2009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남긴 아카이브에는 홍콩 안팎에서 찍은 2500점 이상의 전시 사진을 포함해서 50년치 분량의 전시 기록과 자잘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술과 다른 주제를 아우르는 5천 권 이상의 책으로 가득한 개인 서가를 축적했습니다. 그는 또한 주제별로 라벨이 붙은 수백 개의 박스에 잡지와 신문 스크랩을 꼼꼼하게 수집하고 정리해 두었습니다. 하비크 추엔은 이 스크랩 중 일부를 사용하여 300건 이상의 책 콜라주를 완성하였으나 생전에는 전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토콰완(To Kwan Wan) 지역에 위치한 하 비크 추엔의 스튜디오, 2014.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를 맵핑하기, 이동하기

2014년 작가의 유족들이 하 비크 추엔의 자료들을 가지고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에 연락을 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작업은 작가 스튜디오에 놓인 자료들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희는 토콰완의 오래된 골목에 있던 하 비크 추완의 스튜디오 겸 아카이브 공간을 다양한 영역으로 나누고 그 각각에 이름과 설명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실에서 저와 동료들은 몇날 며칠을 걸려 하 비크 추엔이 자료를 모은 방법과 체계를 해독하고, 이 자료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이 자료들이 하 비크 추엔에 의해 어떻게 분류되고 정리되었는지에 관한 청사진을 얻을 수 있었지요. 때로는 그중에서 중요해 보이는 것을 골라내고 또 나중에 그 판단을 바꿔보기도 했습니다. 이 작업을 했던 그해 여름, 우리는 홍콩의 비영리 미술공간 ‘스프링 워크숍(Spring Worshop)’에서 이 자료들을 스캐닝 했습니다. 그때 하 비크 추엔 스튜디오에서의 장면을 담은 사진은 제게 축적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보냈던 시간을, 또 그 시간과 함께 생겨났던 감정들을, 또 우리 옆에 있던 사람들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프로젝트와 자료들은 각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다른 삶들을 불러모읍니다.

하 비크 추엔의 작업실은 2016년 누수로 인해 천장 일부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는 그의 아카이브를 옮기고 또 처리할 전용 공간을 운영하는 것과 관련해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중요한 결정을 기관 차원에서 내렸습니다. 공간 운영을 위한 자금을 3년 동안 모았습니다. 그리고 2016년 여름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의 많은 직원들이 동원되어 하 비크 추엔의 아카이브를 건물 9층 아래로 옮겼고, 마침내 이 자료들은 트럭에 실려 [홍콩의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포탄(Fotan)에 마련된 저희의 프로젝트 공간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사를 해 본 적이 있는 분은 누구나 짐을 꾸리고 이사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일이란 것을 아실겁니다. 저희나 하 빅크 추엔의 조수들은 이 자료들이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잘 기억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하 비크 추엔의 작업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찬 자료를 옮기는 문제를 풀려면 건축적 사고가 필요했습니다. 사전에 표시해 놨던 자료의 경계가 이제는 실제 자료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라벨, 즉 다른 팀원이 무엇을 포장했고 어디에 옮겨 놨는지의 경로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해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희를 도왔던 건축가 사라 리(Sarah Lee)와 유타카 야노(Yutaka Yano)의 창의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심한 배려에도 무척 감사하게 됩니다. 이 라벨들은 우리가 그후로 몇 년 동안 모든 것을 다시 포장해두어도 우리가 작가의 아카이브 자료들과 그것들이 머물렀던 공간과 맺었던 굉장히 물리적이고 때로는 감성적인 관계를 어느 정도 추적할 수 있게 해줍니다.

2016년 여름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 이전 과정.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2016년 여름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 이전 과정.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하비크 추엔의 자료를 연구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실제로 이 자료들이 제도나 기관의 의제에 맞춘 것이 아닌 전복적 성격의 자료에서 잘 정리된 폴더와 상자에 담긴 목록과 기록으로 변모한 점도 있지만—이 자료가 이전에도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이것들은 작가의 유족에게는 가족 구성원이었던 그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도는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선택했다면, 그것은 이 과정의 일부가 되기로 선택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또한 그랬고요. 때때로 우리는 작가의 스튜디오 공간이 지녔던 본래의 상태가 상실되었음을 애도하고 있었을 겁니다. 마치 하나의 설치 미술과도 같았던 그 물질들의 원상태를 잃어버린 상실감이지요. 이 작업 후 무엇보다 저는 우리가 이 물리적이고 개념적인 공간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었던가를 깊이 느꼈습니다. 이 공간에서 저는 홍콩과 그 너머의 지역의 미술사를 서술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다면 지식 생산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동으로 가득 찬 과정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조직하기, 목록 만들기, 디지털화하기, 연구하기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의 포탄 프로젝트 공간, 2016-2021. 제공: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에서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 작업을 할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디지털로 바꿀 대상을 어떻게 선택하나요?” 였습니다. 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글쎄요. ‘많이’ 토론하고 논쟁을 거쳐야 하지요. 그리고 그전에 ‘더 많이’ 토론하고 논쟁해야 할 것은 자료의 재구성과 재포장 문제입니다. 또 그 자료들을 ‘실제로’ 다시 포장하고 다시 정리해야 하고요.” 다시 말해서, 아카이브에서 일하는 것, 그러니까 아카이브 자료들을 다루는 일은 대부분 굉장히 일상적이고 반복적이고 또 지루한 작업입니다. 하지만 자료를 다루는 이들이 가능성을 열어두고 인식한다면, 이 일상적인 과정에서 마주치는 자료들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촉발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5년 동안 포탄 프로젝트 스페이스를 운영하며 저와 동료들이 각자 연구 활동을 하나씩 맡거나 새로 찾을 수 있는 팀을 구성한 까닭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사용하고 전달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것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 아프거나 여행을 가거나, 심지어 일을 그만두더라도 팀은 작동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동료가 하는 일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에서 일하는 동안만큼은 이곳이 각자의 개인적 성장의 추구를 허락 받는 것을 넘어서 장려되는 시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탐구력에 힘입어, 그리고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의 다른 협력자들과 함께 하 비크 추엔 자료에 대한 연구를 확장해 나갔고, 때로는 기존 가설을 뒤집기도 했습니다.

하 비크 추엔의 아티스트 북 중 콜라주.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왼쪽부터]
조각을 사유하는 사진, 1981.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하 비크 추엔의 사진, 1983년 경.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말라카 여행기 98, 하 비크 추엔의 여행 기록집 및 전시, 1998.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예를 들어, 왈리드 라드(Walid Raad)가 하 비크 추엔의 콜라주 작업을 찾아낸 적이 있습니다. 이 발견은 우리가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에 접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 비크 추엔의 콜라주 한 페이지를 살펴 봅시다. 이 페이지는 깔끔히 이어진 하나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자료에서 오려내 붙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 비크 추엔의 작업실에서 일할 때 이 콜라주 아티스트 북이 300권 넘게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이 콜라주 책의 발견을 통해, 우리는 하 비크 추엔이 자신이 참여했던 전시에 관해서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창작 활동으로서 면면을 기록하기 위해 이 아카이브를 구성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아카이브는 단선적 기록이나 선형적 역사를 넘어서야 하고, 하나의 창조적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페이지는 벽으로, 다시 벽은 페이지로 생성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하 비크 추엔의 여행 사진과 형상-변형(shape-shifting) 사진 콜라주 작업에 굉장히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요. 하 비크 추엔의 사진 작업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자료들을 보며 저는 예술과 이미지가 순환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작업들을 계기로, 왜 지배적인 서사에서 어떤 항목은 누락되는데 어떤 항목은 공고한지, 그리고 특정 서사를 다시 전면화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활성화하기, 지지하기

아카이브의 정리와 병행하여 저희가 한 것 중 가장 보람 있고 영감을 준 활동 중 하나는 활용과 교육을 위해 아카이브를 개방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미술 실기, 미술사, 심지어 건축에 이르기까지 홍콩의 다양한 대학과 전공의 학생들을 포탄 프로젝트 스페이스에 초대했습니다. 홍콩대학교가 진행한 ‘홍콩 아트 워크숍(Hong Kong Art Workshop)’처럼 학생들이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홍콩의 미술사에 대한 기본 연구를 수행하는 장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작가와 큐레이터를 대상으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지식과 이해의 부재로 인해 인식하거나 서술할 수 없었던 질문들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포탄 프로젝트 스페이스 운영 임무 중 하나는 하 비크 추엔의 자료를 수장할 여러 장소를 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대한 분량의 아카이브를 한 기관이 단독으로 영구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 비크 추엔의 아카이브는 현재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 홍콩 대학교, 그리고 M+ 미술관, 이렇게 세 기관이 나누어 소장하고 있습니다.

〈아키비스트의 테이블〉, 《포탈, 서사 그리고 또 다른 여정》 전시 전경, 타이 쿤 컨템포러리((Tai Kwun Contemporary), 2021. 촬영: Kwan Sheung Chi. 제공: 하 비크 추엔(Ha Bik Chuen) 유족 및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제가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에서 진행한 마지막 프로젝트는 2021년 봄부터 여름까지 타이 쿤 컨템포러리(Tai Kwun Contemporary)에서 열렸던 하 비크 추엔의 아카이브 전시였습니다. 《포탈, 서사 그리고 또 다른 여정(Portals, Stories, and Other Journeys)》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아카이브가 어떻게 창작의 장소가 될 수 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하 비크 추엔의 스튜디오가 가진 정동 그리고 포탄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벌어진 지속적인 전개 과정은 저를 포함해 다른 예술가 모두에게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와 같이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정동은 큐레토리얼 차원에서도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었습니다. 이 정동은 전시 속에서 연극적 태도로 번역되었고, 마침내 전시는 방문객이 입장함으로써 완성되는 열 개의 “세트”로 기획되었습니다.

종종 아카이브에서 출발하는 전시는 종종 정보의 실증적 배치에 크게 의존하지만, 저는 《Portals》 전시가 이와 다른 온도를 갖는다고 상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갖고 있는 정동을 표출하는데 열중했습니다. 친밀한, 시간이 얼어붙은, 그러나 또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공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전시에서 우리는 예술가들과 함께, 그들과 다른 실무자들이 어떻게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과 관찰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긴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같은 아카이브, 같은 작가라 하더라도 함께 발견하고 마주하게 되는 미지의 것들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아카이브는 아티스트의 개입을 위해 열어둘 때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것으로 변모합니다. 여기서 의문이 남습니다. 아카이브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의미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의미 자체를 배제하지 않고 아카이브와 관계 맺을 수 있을까?

제가 2016년 하 비크 추엔 아카이브 연구 경험에 관해 발표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을 먹여 살리는 작가가 있고, (옆에서 담배를 하도 피우니까) 당신을 질식시킬 작가들이 있고, 그리고 또 당신 앞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제게 하 비크 추엔은 유령 같이 나를 사로잡는 작가였습니다. 그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와 양상은 다양했습니다.” 당시 이 출몰이 다중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이유는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 비크 추엔에게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출물은 저와 함께 일어나고 있으며, 그 또한 중첩됨을 깨닫습니다. 작가가 저를 맴돌며 괴롭히는만큼 저 또한 그를 맴돌며 괴롭히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를 가만두지 않으려 합니다. 계속해서 그의 아카이브와 작업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통해, 구조의, 우리 자신의, 그리고 역사의 변화하는 감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하 비크 추엔의 아카이브 작업을 하면서 몇 가지 은유가 생겨났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은유들을 자주 떠올립니다. 아카이브와 함께, 그 안에서 작동하는 은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직 다 모르는 복잡하고 뒤얽힌 미로를 헤쳐나가기
이미 바다에 떠있는 상태에서 나침반을 만들기
조감도 없이 지도 그리기
악보를 쓰는 동시에 음악을 연주하기

하 비크 추엔의 아카이브 작업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다른 방식으로 계속 일하고 있지만, 이 은유들은 여전히 의미가 통하고, 어떤 점에서는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그동안 상황은 변했고, 세상도 매우 달라졌습니다. 그간 저와 동료들은 이 자료들을—그것들이 가진 의도, 욕망, 정동, 그리고 실제로 그것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지도와 악보를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독해의 여정은 아직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예술사적 진실이나 아카이브의 진실을 향한 여정은 아니지만, 이러한 요소들과 방법들 중 어떠한 것이 가능하며 또 가장 나은 것인지에 대해 예리하게 초점을 맞추는 명료한 순간이 분명히 찾아올 것입니다. 제 희망은 처음 하 비크 추엔의 아카이브와 관련한 작업을 시작했을 때와 그대로 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과정 중에 무엇을 평평하게 하거나 납작하게 만들지 않기를, 그리고 계속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되짚어 보기를, 그리고 이 일을 홀로 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 글은 2022년 1월 16일, 세마 러닝 스테이션(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에서 있었던 《세마 러닝 스테이션: 전환》의 〈공공미팅—배움의 전환(Public Meeting―Shift in Learning)〉 중 연사 미셸 웡(Michelle Wun Ting Wong)의 발표문(영어 원문)을 보충하고 이후 재번역한 원고입니다.

*영문 보기: Michelle Wun Ting Wong, ‘The Sea of Learning is Infinite (ver. 2)’

번역, 편집: 김진주, 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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