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2. 아마추어리즘과 비평

강덕구
강덕구는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진이다. 한예종에서 영화이론과 영화사를 전공하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다. 동시대 영화, 한국 힙합, 힙스터리즘 등 사회와 예술이 만나는 접경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있다.
이여로
이여로는 지원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블로그, 독립출판, 해적번역 등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각자의 만들기 속에서 가치나 인정, 행동의 체계가 정립되는 과정을 ‘아마추어리즘’이라 부르며 예술을 비롯한 모든 만들기에 주목한다. 『긴 끈』(아티스트북),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이동휘 공저, 이론서), 『미술 구술: 전시 보기와 말하기 매뉴얼』(임가영 공저, 워크북) 등을 출판하며 현장 비평과 연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이연숙: 안녕하세요. 오늘 라운드 테이블에서 함께해 주실 이여로 님과 강덕구 님은 이번과 같은 계기로 꼭 만나 뵙고 싶었던 분들이라서, 저도 지금 이 자리가 무척 기대가 됩니다. 이번 두 번째 라운드 테이블 자리에서는 ‘아마추어리즘이라는 태도 또는 정체성’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아마추어리즘이 무엇인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적인 도구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을 어떠한 삶의 방식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위계와 마찬가지로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위계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최근 두드러지는 활동을 시작한 두 분과 함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예시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우선 제가 두 분을 짧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여로 님은 독립 기획자이자 저술가입니다. 지원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예술 사업과 웹진, 1인출판 등을 통해 2019년 창작과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요. 예술에서 각자의 언어와 이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한 연구서를 2022년 출간했습니다. 지식의 투명화와 접근성에 대한 관심 아래 인문예술 분야에서 출판, 기획 등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강덕구 님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진입니다.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이론과 영화사를 전공하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고요. 동시대 영화, 한국 힙합, 힙스터리즘 등 사회와 예술이 만나는 접경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두 분이 함께 ‘한국문학의 구조’라는 인터뷰도 진행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강덕구 님은 개인 단행본을 준비하는 중1이시고 이여로 님은 이동휘 님과 함께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미디어버스, 2022)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먼저 이 책과 아마추어리즘 개념에 대한 반응을 조명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들 책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 안에서도 아마추어리즘의 개념이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읽었던 몇 대목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어떤 예술 이론을 말하지 않고 예술에서 이론하기의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 가장 약탈적인 방식, 도둑질, 경박함, 가벼움, 정확하지 않음에 의해서 이 이론을 전용할 가능성이 열린 것도 사실이다.”2

“단순함이 우리가 취할 것이다. 단순함에서 시작해 복잡함에 이르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성의 방법이다.”3

저는 이 이야기가 아마추어리즘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여로 님께서 책에 대한 반응,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반응을 얘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 ‘세마 러닝 스테이션’의 벽면 한 쪽에 붙어 있는 글들. 2022년 9월 16일. 사진: 이여로.

이여로: 내용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인사를 하고 싶어요. ‘세마 러닝 스테이션’에 들어오시면서 뒤쪽 벽에 붙어 있는 글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4 지난번에는 이 공간에서 예술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도 열렸습니다. 이곳은 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특히나 좋아하는 공간인데요. 오늘 여기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굉장히 기쁩니다. 저는 이여로라고 합니다.

‘아마추어’ 혹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단어는 사상가들이나 학자들이 짤막짤막하게 언급한 적은 있지만, 제가 알기로는 이를 정돈된 하나의 개념이나 이론으로 전개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도 아마추어리즘을 하나의 명제로 정리해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기보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의 내부와 외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고 나면 두 시간 후에는 ‘이 사람들이 이런 걸 얘기하려는 거구나’하고 공감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마추어리즘에 도달하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는 것에서 시작해 볼게요. 저는 2019년 전까지는 문화예술과 무관한 삶을 살았어요. 심지어 애호가도 아니었고요. 다만 재밌는 글이 있으면 번역해 보고, 궁금한 게 있으면 써 보는 식으로 새로운 걸 접하며 눈앞의 작은 관심사들과 사건들을 이어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저의 관심이나 욕망은 기성의 트랙이나 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그것들과 크게 겹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는 ‘자격’이 없으니 제도에 합류할 수도 없었습니다. 뒤늦게 그 자격을 갖추고자 의미를 지연하거나, 자격 여부에 따라 의미와 무의미를 결정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몇 편의 평론을 쓰다 보니 평론가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보통 평론가라고 하면 영화평론가, 문화평론가, 미술평론가 등 평론가라는 이름 앞에 매체가 특정되고, 해당 매체의 제도에 따라 활동이 특정돼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이유로, 저는 문학에 관한 글을 썼지만 문학 평론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뭘 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뭘 해야 될까?’라고 생각할 때, 제가 바로 갖다 쓸 수 있는 이름이나 방법이 없다 보니, 지금 내 상황인 ‘아마추어’를 그대로 긍정해서 ‘아마추어리즘’으로 표현해 보고자 했습니다. 누가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나는 비평적인 아마추어다.”라고 말해 보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런데 ‘아마추어’라는 말에 붙은 선입견을 고려할 때, ‘아마추어적인 것’과 ‘비평적인 것’은 서로 의미가 어긋나 있죠. 이 말들을 이어 붙이면서 발생하는 어긋남 속에서, 계속 생각하고 실천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아마추어는 경멸의 의미로 많이 쓰이는 말이자, 다들 벗어나고 싶은 상태일 거예요. 모두가 아마추어의 상태에서 어떤 크레딧, 자격, 인정을 얻어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지, 아마추어리즘 자체를 진지하게 사고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마추어 자체를 긍정했던 이유는 두 가지인데요. 문화에서 욕망과 활력을 발견했던 곳이 아마추어의 영역이었습니다. 그건 실체로서의 아마추어들이기도 했고, 아마추어적인 것이기도 했어요. 실체로서의 아마추어는 당시에 블로그를 비롯한 웹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광적으로 글을 쓰고 번역하고 자료를 유통시키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이 앞서 있어 보였어요. 당시 제 주위에서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등단을 하려는 마음이 그들의 동력인 것처럼 보였는데요. 이와는 다른 동력을 가진 아마추어들의 생산력은 마술적인 것으로 보일 정도였고, 나도 이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추어에는 이렇게 활력과 욕망 같은 속성들이 부여되는 것 같아요.

다른 한편, 아마추어의 부정적 속성으로는 조악함, 어설픔 같은 것이 있겠죠. 대개 아마추어적인 것을 긍정한다고 할 때는 좋은 특징 몇 개를 뽑아 아마추어를 순수, 희열, 욕망의 세계로, 전문가를 체계의 세계로 나누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기만적인 구분이 불만스럽기도 했고, 실제로 아마추어의 영역에서 활력뿐 아니라 체계성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반응과 관련해서는, 이 개념이 원래 존재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 자신과 이 개념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현상에서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에 제가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을 다시 언어에 적용해서 관찰하는 순환적인 되먹임 구조가, 어떤 것을 ‘-이즘’이나 ‘-주의’라고 부르게 되는 장치인 것 같아요. 당시에 제가 이런 것을 의식했던 것은 아니고, 단지 ‘이즘’이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무언가와 차이를 두려 했을 뿐이지만요. 제가 두 번째로 관찰한 것이 ‘체계’인데, 이 부분은 조금 의아하실 것 같아요. 아마추어와 체계는 별로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것이 어떤 체계성인지는 이후의 이야기를 통해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연숙: 제가 책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에 대한 반응을 얘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 반응이 양분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책을 유용한 실용서처럼 여기면서 책에서 해방감을 느끼거나, 이 책이 어설프고 쉽고 단순한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반응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여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여로: 결국 아마추어인데 뭘 하겠어’라던가 ‘알겠는데 현실은 어쩔 수 없잖아’라는 반응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말씀하신 책의 반응은 읽기 자체를 거부한 경우에 가까운데, 이것도 무관심이나 비판과는 좀 다른 반응이고요. 한 편의 글이나 한 권의 책으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라 실효성을 가진 활동, 경험적인 흐름이 이어져야 하는 문제 같아요. 애초에 그런 반응은 책이나 글의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서요.

반대로 이런 이야기에서 누군가 해방감을 느꼈다면, 매우 기쁘죠.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의문이 들지만 결국 다 무관해지고 나의 언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뽕에 차오른다’고 누군가 남기셨던 기억이 나요. 이러한 해방감은 저에게도 매우 중요한 감각인데, 단순한 응원과는 다른 것 같아요. 정서적 추동과 이론적 확신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그게 나의 자아와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대중서를 쓰면서 여러 분야에서 읽히기를 희망했지만 예상하지는 못 했는데요. 예상 못 한 반응들과 영향관계를 맺는 일도 아마추어리즘과 연관된 과정인 것 같아요. 예술행정 및 커피, 연극평론, 인공지능 및 윤리학 연구 등 여러 분야에서 말씀을 남겨주셨어요.

이연숙: 인터넷 서점에는 굉장히 좋은 별점밖에 없네요.

이여로: (웃음) 북펀딩으로 출간한 책이라, 리뷰를 쓰면 적립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동기가 있던 것 같고요. 하지만 어떤 내용을 쓸지는 그들의 자유인데요. 예술 종사자가 아닌 분들이 리뷰를 더 많이 남겨 주어서, 책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었어요. 특히 ‘병원에 상주 보호자로 들어와서 아직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리뷰가 인상적이었는데, 책 발간 전에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가 아니라 ‘시급하지 않은데 인기만 많은 문제’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거든요. 시급한 건 일상의 문제들이라고요.

그런데 필요하다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 예술이 정확히 뭘 지시하는 것인지를 먼저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특정한 예술 작품이 그 자체로 필요하다고는 저도 생각하지 않는데요. 저희는 예술을 통해서 이론이나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밝혔어요. 이론이나 언어는 사고와 행동을 구조화하는 틀이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실재들도 당연히 어떠한 언어를 갖고 있는데요. 이것을 한번 의식해보고, 단순한 직관에서 시작해 체계에 이를 방법을 제시해보자. 예술은 그러기에 좀 용이한 곳이니, 실험실로 삼아보자. 그런 말을 하는 책이에요. 이건 예술이냐 아니냐는 배타적 선택을 종용하는 게 아니에요. 시급함과 중요함을 경쟁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협력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한 형식적 보편성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독자들도 느껴주셨다고 생각해요. 취향의 공유를 넘어서요.

이연숙: 이 책에 대한 반응으로서, 아마추어리즘을 자기 삶에 실용적인 방식으로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저에게도 매우 즐거운 소식입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번 라운드 테이블을 시작해 보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와 질문을 나눠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부터 해 보겠습니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사실 두 분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쩌다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자기 작업에 적용하는지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강덕구 선생님께, 아마추어리즘 개념을 어떻게 발견했고 그에 왜 이끌렸는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이동휘, 이여로,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언어·이론』, 미디어버스, 2022.
강덕구, 『밀레니얼의 마음: 2010년대, 그리고 MZ의 탄생』, 민음사, 2022. 제공: 민음사.

강덕구: 안녕하세요. 방금 소개해 주신 대로, 저는 비평 공유 플랫폼 ‘콜리그’를 운영하고 있고 영화나 음악, 이것저것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현재는 반경을 넓혀 2010년대의 문화사회사를 그린 책을 10월 출간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사실은 기억이 흐릿하지만, 저는 이여로 님의 글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용어를 발견하고 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관심은 제 상황과 맞물려 지속된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영화의 관객군과 관련된 한 가지 흥미로운 단절 현상이 있습니다. 관객군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20대와 40~50대가 나뉘고, 3~40대 관객은 영화 관련 종사자로 한정됩니다. 특정 세대는 고전 영화나 실험 영화, 예술 영화를 보는 경험이 자신에게 쓸모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어, 예술 경험을 향유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또 다른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한 일이나, 다른 어떤 일들을 하겠죠. 이런 현상이 ‘단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학생이었던 과거에는 예술 경험에 대해 지금의 내 상황과 걸맞지 않다고 느끼거나, 작가나 비평가가 되는 데 실패했으니 가성비가 좋지 않은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단위에 대한 재조정이 없으면 내가 영화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겠구나, 나는 이제 영화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혼자 글을 쓰고 있는 저를 보며 누군가 “왜 혼자 글 써? 이건 룸펜(룸펜 프롤레타리아, lumpenproletariat)이 하는 일 아니야?”라고 말할 때면,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궁리해 보곤 했습니다. 이여로 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해적들이 영화를 디깅(digging)하고 공유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공유하고 싶을 뿐입니다. 보지 못한 영화들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쓰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쓰는 겁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작가 조세희가 그랬던가요? 쓰지 않는 것이 더 힘들다고요. 저는 무언가를 쓰고 싶었습니다. 쓰고 싶은 주제나 내용이 모호하더라도요. 저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쓴 겁니다. 그 이기주의 속에서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이연숙: 저 역시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단어를 두 분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이후에 다른 의미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을 이야기하는 저작물들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이 단어가 나에게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두 분의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적인 계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저에게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특정한 종류의 위계를 항상 느낍니다. 세상을 보는 법을 제도적인 것과 제도 바깥에 있는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 등의 위계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익히게 되었습니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에서도 이런 것을 다룹니다. 낮은 위계에 속한 것들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러한 문제의식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전공하는 사람들 안에서만 유통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당연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나 퀴어로 정체화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지식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가 없겠지만요. 그런데 두 분이 처음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을 글에서 얘기해 주시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강덕구 님께서 ‘비천함’이나 ‘실패’라는 키워드를 자주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 두 분과는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추어여도 괜찮고 아마추어인 것은 오히려 좋다고 말하는 지식은,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며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소위 열등하고 저속한 것이 매력적인 것, 기꺼이 하고 싶은 것이 된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을 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추어리즘이라든지 소위 부정적인 것을 의미화하는 두 분의 방식을 유통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아마추어리즘을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마추어리즘의 뿌리나 정의보다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를 고려할 때, 아마추어리즘은 제가 지향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하시는 분들 중에도, ‘도대체 아마추어리즘이 무엇인가’, ‘이 개념이 아예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솟아난 건가’라는 질문을 가진 분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간 여러 저작물에서 아마추어가 어떻게 이야기되어 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칸트적〉이라는 용어를 그는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고 사용한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적이라는 것이 단지 〈말할 수 없는 것이 종교나 예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가 한 줄로 주장한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 아주 많은 내용들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이 바로 철학 아마추어에게서 볼 수 있는 성급함이다. 혹은 뎃상 실력 없이 무리하게 추상화를 그리는 자의 특성이다.”5

“한 사람이 로티가 주장하는 양손잡이가 되면 좋을 것이다. 로티의 표현처럼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키에르케고르와 크립키에 대한 관심을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데이비 루이스와 쉘링에 대해서 동시에 공부하면서 자신의 지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티가 지적하듯이 철학자의 직업 시장구조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가로막는다. 철학자의 직업 시장구조는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를 요구한다. 따라서 분석철학, 현대 유럽철학, 현대 독일철학, 선진유학, 한국철학 등의 전문가를 요구한다. 더 나아가 이런 엉성한 전문 영역을 더 세분하여 다른 영역을 기웃거리는 양손잡이에 대해서는 전문가라는 칭호보다는 아마추어라는 칭호를 붙인다. 따라서 분석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현대 유럽철학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글을 쓴다면 단지 분석철학의 좁은 문제 영역에 대한 글을 쓴 사람보다 더 낮게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한 영역에만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6

강덕구: 보여 드린 글은 서강대 철학과 교수이자 유명한 네이버 블로거인 김영건 님의 글입니다. 여기서 ‘아마추어’는 두 가지 의미,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데생 실력 없이 무리하게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아마추어라고 표현하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하거나, 논의 전개 방식에서 무언가를 빠뜨리고 진행하는 사람을 아마추어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글은 리처드 매케이 로티(Richard McKay Rorty)의 말을 정리한 것입니다. 아마추어를 한국 철학 혹은 프랑스 철학과 같이 전문화된 분야의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 여러 분야를 오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의미화합니다. 김영건이라는 한 명의 철학자에게서도 아마추어는 대단히 다른 조건 내에서 다양하게 표상됩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흥미로웠는데요. 아마추어리즘은 그것을 규정하는 조건들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에는 서투른 화가로, 다른 때에는 가교 역할을 하는 철학의 정령으로요.

이연숙: 저희는 로티의 말을 정리한 김영건 님의 글에서 아마추어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고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지식인의 표상(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이라는 책에도 ‘아마추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오늘날 지식인은 아마추어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아마추어란, 한 사회의 분별력 있고 사려 깊은 구성원이 되고자 한다면 가장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행위에 있어서조차 그 행위가 자신의 국가와 관련되고 그 국가의 권력과 관련되며 다른 사회와의 상호작용 방식은 물론 자국 시민들과의 상호작용 방식과 관련될 때, 그 핵심에서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마추어로서의 지식인의 정신은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단순히 직업적인 일상에 들어가 이를 훨씬 더 생기 있고 급진적인 무언가로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로 여겨지는 것을 묵묵히 수행하는 대신, 그것을 왜 해야 하며 그것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며 그것을 어떻게 하면 개인적 기획과 독창적 사고에 다시 접목할 수 있을지 물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7

여기서 얘기하는 바는, 어떤 사람이 공부한 것을 사용할 때 그 쓰임새가 전문가적 지식이 된다면 국가나 제도 같은 이미 승인된 체계에 영합하고 부역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아마추어가 되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예로, 앤디 메리필드(Andy Merrifield)의 책 『아마추어: 영혼 없는 전문가에 맞서는 사람들(The Amateur)』을 보겠습니다.

“삶의 아마추어는 전 세계를 포용하고, 보들레르가 말한 ‘보편적 교감’ 즉 인간적 공감과 세속적 공동체 활동 등에 참여한다. 군중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목말라하며, ‘비아’로 그 욕구를 채운다. 보들레르는 기스의 말을 인용해서, “그의 강렬한 시선과 풍부한 제스처 덕분에 기억에 남은 말은 ‘군중 속에서 지루해하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바보야! 바보라고! 나는 그를 멸시하네!’ 이다”라고 했다.”8

이 저자 역시 에드워드 사이드와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를 인용하면서, 왜 아마추어리즘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대항적인 존재 방식인가를 이야기합니다. 이 글은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에 대한 예시를 들면서, 아마추어를 세계를 매번 새롭게 보는 존재, 군중 속에서 계속해서 즐거울 수 있기에 어린아이가 되는 존재로 명시합니다. 이 글 역시 대항으로서의 아마추어리즘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가 두 분의 글에서 발견한 아마추어의 개념입니다.

“이를테면 ‘위기는 기회다’라는 진술에 대해 생각해보자. 현실 정치 운동이 완전히 실패할 때 무조건적 가속주의자는 흥분을 느낀다. 부정성을 멸균한 정치 운동이 자본주의의 속도에 완전히 압도당해 존재 당위와 생명력을 잃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 정치 운동의 실패는 주체에게 속도에 적합한 방식으로 소멸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주체의 소멸은 가속으로 인한 것이므로, 시간 안으로 휩쓸려갈 기회만을 노리는 무조건적 가속주의자에게 무엇보다 흥분되는 일이다. 좌파운동이 무너지는 틈 속에서, 자본주의가 주체를 소멸시키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비평가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다. 그곳에서 그저 사라지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관객인 비평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
(…) 비평가는 자신이 겪는 존재론적 실패, 당혹감 전체를 비평의 기저로 삼는다. 비평가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다. 그에겐 예술가들이 누리는 명성도, 부도,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다. 특별함과 재치도, 재능도 없다. 단지 실패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비평가가 쥐고 있는 유일한 권리헌장이다.”9

강덕구 님의 글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은, “위기는 기회다.”라는 진술을 오직 즐거움만 찾는 비평으로 즐거울 수 있는 것은 비평가뿐이라는 의미로 독해합니다. 그러면서 “실패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비평가가 쥐고 있는 유일한 권리헌장”이라고 말합니다. 실패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비평가라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 같은데요. 이는 곧 아마추어와도 연결될 것 같습니다.

강덕구: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은 『마테리알(ma-te-ri-al)』 3호에 게재되었습니다(당시 t毬x(malware)라는 필명을 썼습니다). 이 글이 놓인 맥락은, 비평가를 쓸모없는 존재로 표현하는 경향에 대한 반감입니다. 누군가 비평가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면, “그래 우리는 쓰레기야.”라고 받아치는 식의 논박이랄까요. 사람들은 비평가를 창작자가 되지 못한 사람으로 보거나, 영화를 볼 때 즐길 수 없는 사람으로 보면서, 비평가에게서 이중적인 실패자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창작자도, 향유자도 되지 못한 어중된 실패자라는 거죠. 저는 비평가가 경험하는 실패 혹은 비평가에 덧씌워진 실패자라는 이미지로 작품을 관통하는 것이 비평가의 특권적인 작업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비평가는 실패자입니다. 제가 아마추어리즘과 비평을 연결하는 관념은 ‘실패 혹은 변두리적 존재로서의 비평’입니다. 어중된 존재로서의 아마추어 비평가는 기존의 구도, 즉 ‘완결된 창작자의 의도’의 세계와 ‘수동적 해석에 머무는 관객’이라는 단위를 붕괴시킵니다.

이연숙: 이여로 님께서도 글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을 통해서 아마추어리즘의 개념과 체계를 구성하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최소한 이 글 자신은 아마추어리즘을 사고하고 이 개념으로부터 작성되었다. 자신의 즉각적 필요를 인지하고 흰 개미처럼 갉아 먹어 나가는 아마추어리즘의 수행적 측면은, ‘전문성’이라는 관념과 조건에 의해 지연되거나 좌절된 행동과 그만큼 만연한 이유들을 다시 되돌려놓는다. 인간을 백치화하는 무반응적이고 텅 빈 환경에서 벗어나, 반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개인적 환경에 적극적으로 제한되고 감각적 박탈의 악순환을 끊는 것. 그것은 각자가 처한 하부구조 속에서 주어진 욕망과 재료를 가지고 손 닿는 사람들과 작업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은 언제나 주위 3미터 이내에서 작업했다고 말한 것처럼 사실 누구든 인지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리고 정동적으로 그럴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짧은 글은 당신도 설득했을까? 앞으로의 아마추어리즘은 설득에서 나아가, 우리가 이 모든 상황에서 아마추어의 이름으로 함께 한다고 말할 것이다.”10

이 글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여로: 제가 아까 아마추어의 영역에서 활력을 보았다고 했는데, 활력만 있다면 행위나 실천은 단편적인 모습으로만 존재할 것입니다. 잠깐 신나서 무언가를 행하고 또다시 좌절하기를 반복하는 조울증적 증상에 가까워집니다. 제가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어떤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의도를 불문하고 체계를 만들 때, 그 시작이 (체계라는 말이 갖는 엄격함과 달리) 즉각적인 필요에 따르는 사례들입니다.

아마추어리즘의 보편성이 있다면 이런 순간일 것 같아요. 이연숙 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번 ‘비평연구 프로젝트’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도 아마추어리즘의 매개적이고 부분적인 보편성 덕분이 아닐까요? 아마추어리즘은 분명 실제적인 아마추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아마추어를 위한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뒤편에서 함께해 주고 계시는 관장님께서도 기관 안에서 아마추어적 실천을 하실 수 있을 것이고, 저는 그러한 실천의 가치가 수행자와 대상자 모두에게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아마추어리즘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의미를 생산하는 일에 접근하고 노출되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피드백을 받지 못하는 행위는 의미의 생산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대개 개인들은 이미 만들어진 사회적 관습과 제도, 상징을 획득하면서 피드백을 받습니다. 그런데 점차 이러한 조건들이 자본화되는 것 같아요. 자율성이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적인 경험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자격을 얻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소유권처럼 되어 있어요. 글을 씀으로써 작가가 되는 게 아니라 글을 쓰고 싶으면 작가가 되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다른 분야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근래 전문직 종사자나 사회적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보상심리와 피해망상, 배타적 원한 같은 정념에서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더 잘 드러나고 있어요. 자격과 증명, 근거를 요구하는 사고가 점점 행정화와 함께 사회 속에서 자연화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해당 구조를 통과한 사람들에게도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커리어주의자들이 안쓰러운 것은 그들이 스스로가 바라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자격 위주의 사고를 내려놓고, 작은 단위와 적은 여건 속에서 내 행동에 대한 즉각적인 피드백을 얻고 누군가와 교류하는 경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왜 할 건지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말이에요. 잠시 후에 이야기해 볼 ‘같이 놀기’도 이러한 경험으로 진입하는 단순하고도 중요한 방식일 것 같아요. 그런 단순함, 일시적 폐쇄성, 맹목성, 개인의 즐거움 같은 것 역시 체계로 이어진다는 점을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을 통해 사유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정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예술은 이러한 사유를 이해하고 수행하고 나누기에 효율적인 영역이에요.

이연숙: 원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나서 “왜 아마추어리즘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더 드리려고 했는데, 이미 이여로 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아마추어리즘이 비평과 이론에서도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커리어주의자인 면도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마추어리즘이 어떻게 지식으로 구성되고 인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갖고 있습니다. 왜 아마추어리즘이 삶이 아니라 비평에서 필요한가라는 질문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여로 님께서 이어서 대답해 주셔도 좋고, 강덕구 님께서 얘기해 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비평에서 왜 설익고 허접한 것들이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강덕구: 보통 ‘아마추어’는 설익고 비체계적이고 즉흥적인 생각에 따라 활동하는 존재에 대한 멸칭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아마추어라는 멸칭에 담긴 비체계적 존재라는 선입견에 대한 반례를 들어 볼까요? 순수한 즐거움으로 움직이는 발명가라고 해서 그가 과학에 반하는 게 아닙니다. 발명가가 과학의 원리들로 직관적인 발명품들을 만들어 내잖아요. 저는 아마추어라는 존재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던 실패로서의 비평을 떠올려 봅니다. 저는 아마추어적인 비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비평 자체가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여로 님께서 말씀하신 보편적인 순간처럼 말이죠.

전문가적인 접근을 하면요. 영화사 초기에는 많은 비평가들이 자격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 비평가들은 영화관이라는 천박한 장소에 들락날락하면서 저급하고 유치한 창작물에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자신의 관람 경험을 다시 한번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글을 썼을 뿐입니다. 저는 비평 행위 자체에는 이런 의도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은 기억술입니다. 예전에는 영화를 재차 관람할 수 없었으니, 글을 통해 또 한번 저급하고 천박한 영화 관람의 경험을 기억술로 재생시킨 것이죠. 비평은 쾌락의 일종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전문화된, 혹은 저널리즘이 만든 자격으로 구획화된 비평 문화를 생각해 보면, 저는 이보다 더 복고적이고 원시적인 역사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저는 블로그에서 그런 복고성을 맞닥뜨렸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술학교를 졸업했는데, 선생들이 예술학교 학생들에게 ‘일기장 예술’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기장 예술이나 초창기 영화 비평은 모두 경험을 향유함으로써 매 상황을 임시변통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저는 아마추어리즘과 비평을 같은 것으로 간주해봅니다.

이여로: 예술 이론이나 평론에서 각주나 인용 없이 글을 쓰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해 볼게요. 그가 아무리 명망 있는 비평가나 이론가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글쓰기의 순간에는 아마추어로 명명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에 따르면’이라거나 ‘무엇이기 때문에’라고 말할 ‘무엇’이 없을 때 그는 자신의 직관을 내놓은 다음 ‘왜냐하면’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개념화하고 체계화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우리의 바람이 기존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기는 힘든데요. 유효하게 쓰이는 비평적 개념이나 꼭 들어맞아 보이는 작업이라도 내부에는 세부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1%의 다름을 붙잡고 파고들어 가면, 주관성이 노출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주관성을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그 객관화는 나의 직관을 어떻게 언어화하느냐의 문제인데요. 그때의 주체는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예술 비평은 직관이나 취향을 정당화하는 과정인데, 제도 비평은 오히려 직관을 경감하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요.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이 누가 말했던 어떤 역사 속에 있고 어떤 개념과 연관되는지 논함으로써 주관성이 안전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바리케이트나 보호막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선 무언가를 던져 놓고 그것을 연결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이야말로 아마추어적인 순간입니다. 현대 예술은 성격상 담론적, 해석적이며 열린 개념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런저런 권위에 기반하지만 권리상 자율성을 가질 수 있는 모순된 영역입니다. 이런 모순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 영역에서 주로 아마추어리즘이 시작되고 탐구되어왔고, 반대로 예술 비평이나 창작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죠.

이연숙: 두 분의 말씀을 매우 공감하면서 듣고 있습니다. 이 대화 속에서, 제가 알고 있는 저의 태도가 일종의 ‘만남’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쓰기, 각주 인용하지 않기,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기, 블로깅(blogging) 등이 아마추어리즘의 실천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격지심이나 수치심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실천들은 저로서는 결코 놓을 수 없는 활동이겠지만, 그 활동에 대한 부끄러움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이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는 번듯한 직업도 지위도 없이 블로그에 계속해서 글을 써 왔고, 지금도 쓰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저에게 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블로그 활동을 이력서에 쓰냐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블로그밖에 없었고 그 일이 제게 중요했기에, 그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굉장히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는 제가 맺고 있는 관계와도 매우 연관이 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블로그에서 많은 실패자 친구들, 글 쓰는 친구들을 만났고, 이는 하위문화적인 존재들의 표상과 연관됩니다. 블로그 활동은 사변적이고 중요하지 않고 변두리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정의하지 않지만, 주변에서 저의 활동을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할 때면 이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되었어요.

이여로 님께서 ‘함께 놀기’와 ‘인정의 체계’, ‘피드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요. 이런 개념들이 블로그 활동이나 콜렉티브 활동처럼 마냥 즐겁게 노는 일들 사이에서는 발견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아슬아슬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마추어리즘의 수치심과 자격지심에 대해 우리가 더 얘기해 볼 수 있을까요?

강덕구: 제가 대단한 필자였던 건 아니지만, 제가 맞닥트린 경제적 상황, 이를테면 글값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내가 이걸 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쩔 땐 수치심으로 변했죠.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기분도 들고요. 그러다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와 함께 다른 일을 하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느낀 감정은 『마테리알(ma-te-ri-al)』에 실었던 「질식자의 편지」의 후기로 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에 잘 나와있습니다.

2018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저만의 보상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제가 어떤 자격도 갖지 못했다는 불안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문예지 관련 좌담회에서 녹취하는 일을 했던 게 떠오릅니다. 그때 등단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좌담회에 오신 한 분이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등단을 한다. 그러니까 글 못 쓰는 사람들은 사실 등단을 못 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렇구나. 글쓰기는 등단과 비등단으로 나뉘고, 글 쓰는 사람은 결국 등단을 향한 여정에 나서는 겁니다. 이후 저는 더 이상 경제적 보상을 찾기보다는 제가 스스로 쓰고 싶은 글의 형태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걸 쓰되 스스로 보상 체계를 만들자, 순환하지 않는 피를 펌핑하는 피드백 체계를 만들자는 마음가짐으로 글쓰기를 지속했습니다.

이여로: 보상 체계를 스스로 만든다는 것이 블로그 활동과 체계의 문제와 연관돼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제가 쓰기에는 과한 것 같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함께하는 대상이 실제로 저급하고 하위문화적이고 대중문화적이라고 해도, 그것을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연구자나 비평가에게는 즉각적인 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저는 문자 매체로 글을 남기는 순간에도 보상이 따른다고 생각해서, 수치심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반면 자격지심은 계속 저의 문제로 생각해 왔어요. 보통의 사회에서는 자격, 증명, 근거가 있고 그 다음에 행위가 있는데요. 조건이 선행되지 않고 행위가 먼저 있는 상황에서 갖게 되는 ‘근거 없음’의 불안감이 존재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어디서 피드백을 주고받을지를 고민하던 당시에는 블로그가 중요한 매체였던 것 같습니다.

이연숙: 혹시 블로그를 몇 년도에 시작하셨어요?

이여로: 블로그를 개설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2018년 정도부터입니다. 그 당시 블로그 네트워크에는 어딘가에 명확하게 소속되지 않는 관심사를 가진 주체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가령 조만간 나올 강덕구 님의 『밀레니얼의 마음』은 2010년대 문화사를 정리하는 책인데요. 이것의 초고가 되는 방대한 분량의 글이 조악한 PDF 파일로, ‘포효하는 10년대’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었어요. 강덕구 님이 그걸 올리면서 1년 동안 쓸 글에 대한 계획을 세우시더니, 영화의 조건을 따져 묻는 글들이 업로드되더라고요. 제가 즉각 느꼈던 것은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라는 감각이었고, 그것으로 인식이 확장되었어요. 이것이 아마추어리즘이 타인에게 즉각적으로 주는 첫인상인 것 같습니다.

블로그는 적당히 닫혀 있고 적당히 열려 있는 이중적 상태에 있기 때문에, 시스템이 생성하기 좋은 조건이에요. 여타의 SNS나 웹 공간에는, 시스템의 일부가 아닌 외부자가 지나치게 개입하기도 하고, 피드백이 아예 보이지 않기도 해요. 블로그를 운영하지 않더라도 각자가 어떻게 그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까를 고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 늘고 있는 소모임, 워크숍, 세미나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연숙: 블로그가 더 많은 인정을 위한 발판이나 첫걸음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강덕구: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이 쓴 책에는 본인과 교류한 블로거가 누구인지, 블로그에서 그와 어떤 만남을 가졌는지와 같은 내용이 항상 등장합니다. 하먼처럼 블로그를 상징자본을 증식하는 도구로 정체화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 블로그는 일종의 훌리건 활동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글을 많이 썼는데요. 이는 정식 서포터즈가 아닌 상태로, 마음대로 블로그 활동을 하자는 의미가 컸습니다. 질문해 주셨던 부분들을 고려했다면 조금 더 정돈된 글을 썼을 텐데······. 그 대신 아까 이여로 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1년 동안 썼던 험악한 글들을 모아서 PDF로 만들었죠. 이후에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들어서 지웠지만······. 제게 단지 상징자본이나 명예가 필요했다면 이런 방식의 활동은 안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고 문자를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아를 훼손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 강덕구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제가 사용했던 블로그 이름인 ‘gkd’를 사용하거나 이명들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을 고려할 때도, 블로그 활동은 제 자신을 계속해서 파괴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블로그는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이명을 늘려 가는 훼손의 의미도 있습니다. 저는 두 명입니다.

콜리그’의 인덱스 페이지 캡처 화면. ©콜리그.

이여로: 지적대로 블로그가 커리어를 위한 대기소, 준비단계로 간주될 수도 있어요. 제가 블로그를 시작할 당시 활동하던 블로거 중에는 지금은 제도와 성공적으로 동기화된 분들도 있는데요. 그들이 욕망하는 것은 사실 상징적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이었고, 블로그는 자신의 멜랑콜리한 정서를 처리하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반대로 아예 기성의 제도와는 접점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분들도 있고요. 그것 또한 존중하지만, 저는 제도의 내부에서 어떤 샛길들을 연결하는지가 좀 더 궁금해요. 활동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무엇으로 연결되는지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어디에서건 아마추어적 태도와 방법의 유지 여부에 따라, 위계에 관한 생각에 따라, 다른 길들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령 제도라고 인지되는 곳과 함께할 때에도 내가 제도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아무리 작은 개인일지라도 나 역시 하나의 제도이자 체계이므로 이 만남은 제도 간의 협업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시작과 결과를 낳아요. 이처럼 저는 아마추어리즘이 위계적인 사고와 무관해질 수 있는 힘인 것 같아요.

아마추어적인 방식과 태도의 예시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방금 소개된 책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는 미학 전공자 이동휘 님이 블로그에 쓴 글에 제가 댓글을 달면서 시작되었어요. 책의 초고가 된 글이었는데, 거기서 이동휘 님은 예술 이론을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제일 크게 느꼈던 감흥이 ‘어렵다’였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렵다는 말을 쉽게 긍정하는 데서 투명함을 느꼈습니다. 저도 그러한 주제에 관심이 있는데 공동 연구를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자격보다 직관이 앞서는 방식인 거죠. 잘나가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함께하고 싶은 태도가 아니고요.

이연숙: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음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강덕구 님께서는 블로깅이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그 예로 들어 주셨고요. 저자 정체성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되는 것인데, 블로깅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블로깅과 같은 활동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공적 작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맥락이겠습니다.

또한 이여로 님께서 말씀하신, 직관과 느낌으로 동료를 정하는 댓글 달기 역시 프로다운 방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것은 태도에 가깝고, 아마추어 정체성은 아마추어로 사는 것, 즉 제도 바깥에서 공부하고 아웃사이더 아트 작업을 하며 클럽과 대중문화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에서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태도와 정체성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우리가 이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강덕구: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니, 저는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단절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처음 영화가 들어오고, 프랑스문화원이 생기고, 서울아트시네마의 전신인 문화학교가 생기는 과정에서 일정한 경로가 생깁니다. 경로 만들어지는 방식은 아마추어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비디오를 모아서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보고 비디오테크를 만듭니다. 시네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다 보입니다. 그때는 모든 게 빌드업되는 거예요. 정체성이 굳어져 갑니다. 예를 들면, 시네필은 어떤 존재이고, 몇 편의 영화를 보며, 어떤 영화를 아는지와 같은 의미를 규정하면서 시네필로서 자신을 정체화합니다.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체화는 앞의 세대가 이미 다 해 놓았기에, 지금 시대에는 썩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재는 이런 상황입니다. 예전에 아마추어적으로 시작했던 것들이 경로의존적으로 변합니다. 저는 아마추어리즘을 기회주의적으로, 특정한 전략으로 사용합니다. 제가 영화 제도 바깥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 속에서 저는 아마추어리즘을 통해 사람들과 더 많이 연합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혹은 연합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접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클을 만들면 그 내부에서도, 서클 간에도 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게 아마추어리즘의 기회주의적 의미입니다. 전문가, 비평가가 아닌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생각을 만듭니다. 그것이 훨씬 더 공적인 지식에 가깝습니다. 지금 영화 관객들 안에서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나 시네필리아(cinephilia)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논쟁이 펼쳐져야 합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어떤 기대 경로에 따라 페미니스트 혹은 시네필이 전문가로 좁게 구획된 것 같고, 두 정체성이 화해 불가한 상태로 영역화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여로: “태도냐 정체성이냐”라는 문제의식을 조금 확장하면, “방법이냐 존재냐”가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둘은 순환적으로 함께하니까, 태도로 드러날 때도 있고 정체성으로 의식될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한쪽이기만 하면 좀 의심스럽달까요. 저는 그런 질문이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포함해) 관계에 일으키는 변화에 더 관심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지금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 “나는 분홍색을 좋아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이미 정해 놓은 나의 취향에 대한 부연 설명이 될 수도 있고, 나를 넘어서까지 나를 견인하고 이해시키고 다른 것과 특별하게 관계 맺어주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죠.

이연숙: 태도인가 정체성인가의 문제는 아마추어리즘뿐만 아니라 퀴어 이론의 굉장히 오래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는 동일성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동성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일 자체를 퀴어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델에 동일시를 해야 하고, 그러한 동일시를 통해서만 우리는 퀴어라는 이름에 묶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여로 님께서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기’를 말씀해 주셨는데, 거기서 나아가 저는 ‘금방 잊어버리기의 기술’을 떠올렸습니다. ‘잊어버리기’는 퀴어 이론가인 아비탈 로넬(Avital Ronell)이, 또한 망각에 대해서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가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왜 잊어버려야 하는가? 아주 단순히 정리하자면, 계속 과거를 기억하며 원한에 빠져 화만 내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처럼 다시 학습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라운드 테이블에서 ‘저급 이론’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그 단어를 사용한 잭 할버스탐(Jack Halberstam)이 자기 책에서 예시로 드는 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애니메이션 〈스폰지밥〉이고 두 번째는 〈니모를 찾아서〉 시리즈입니다. 〈스폰지밥〉에서 ‘뚱이’는 ‘스폰지밥’에게, 지식이라는 것은 너와 친구를 맺을 때는 필요 없는 것이고 나는 지식보다는 바보가 되는 길을 택하겠다고 말합니다. “너와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바보가 될래”라는 식의 얘기인 거죠. 이 역시도 관계를 위한 적극적인 망각, 잊어버림을 말합니다. 자기 정체성조차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죠. 〈니모를 찾아서〉의 ‘도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가진 캐릭터로, 친구들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깜빡임’을 계속 말합니다. 도리의 단기 기억상실증은 다른 인물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유연하게 잡아 나가고 새로운 방식의 언어를 개발하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망각하는 것, 기억이나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은 유구한 퀴어 이론의 전통에 속하는 생존 전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아마추어리즘에서의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기’나 ‘자기 파괴로서의 블로그 행위’가 퀴어 이론의 개념들과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리즘은 정체성에 고착되면 유용하게 쓸 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럼 무조건 파괴하면 되는 것인가, 계속 자해하고 잊어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마추어리즘인가라는 질문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에 대한 예시를 들어 볼까 하거든요.

이여로: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을 누군가 사용하려 할 때 마주할 수 있는 선입견에 대해 미리 논의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시작의 순간만을 강조하거나 대안성을 대상화하는 쪽으로 빠지면 더 이상 사고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서로가 극단적으로 달라 보이거나 무관해 보이는 사례 두 가지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데카르트인데요. 데카르트는 우리가 기성의 사고 체계를 논할 때 원천으로 여기는 철학자이고, 유럽 사상의 아버지라고 불리죠. 저는 데카르트를 아마추어라고 가정해 볼게요. 그의 사상을 잘 정리해 놓은 교과서가 아니라 원전인 『방법서설』과 『성찰』을 읽어 보면, 그는 아마추어-되기를 스스로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이야기로 책을 시작해요.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고민을 했는데, 그게 동시대의 논리나 사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나봐요.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그의 추종자가 될 뿐이라고 비판해요. 그런데 그의 비판은 부친 살해나 상징적인 권력 다툼 같은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종교적, 윤리적, 도덕적 혼란과 고민을 사고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예요. 그런데 그러한 고민은 기존 사상을 통해 해결될 수 없었고, 기존 사상과 관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어떻게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며, 모닥불 앞에 앉아 명상을 시작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잊어버리기’의 기술이 생각나요. 알고 있다면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기. 그렇게 시작하기. 이와 같은 탈-학습, 언러닝(unlearning)에 관한 담론도 꽤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민지, 『코끼리 미용실』, 노란상상, 2019. 제공: 최민지, 노란상상.

두 번째로 아마추어리즘이 의도적인 망각과 시작만 반복하는 게 아니라 체계화로 나아간다는 것을, 그리고 잊기 위해 앎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그림책 작가 최민지 님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최민지 작가님은 책 『문어 목욕탕』(노란상상, 2018)을 출간하기 전까지 그림을 한 번도 안 그려 보았다고 합니다. 사설 그림책 만들기 워크숍에 참여해서 처음 만든 책이 『문어 목욕탕』이라고 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숨겨진 재능이 있었네”, “그림을 원래 잘 그렸나 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숨겨진 능력도 재능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필요와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 즉각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로 독립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보시는 화면은 『코끼리 미용실』(노란상상, 2019)의 한 장면인데요. 일상에서 무언가를 그린다고 할 때, 그림의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되는 것은 대상의 사실적 재현 여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재현의 테크닉을 숙달하지 않은 사람은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그림을 ‘체계적으로 그리는 것’과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그럼 이제 반대로 물어볼게요. 우리가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사물이 기호화되기 시작합니다. 기호는 이미지와 관념이 자의적으로 연결된 걸 뜻해요. 예를 들어서 ‘나무’라는 한국어나 청각적 이미지가 실제 나무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요. 그럼 내가 ‘기뻐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싶은데 그것을 재현할 수 없다고 해 봐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를 그림만으로는 모릅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들과 연결됩니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 또 다른 기호들을 옆에 그리기도 하며, 기쁨의 상황을 보여 주려고 애쓰게 됩니다. 알 수 없는 외국어를 여러 맥락에서 반복해 들을 때 그 뜻을 이해하는 것처럼, 하나의 시각 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일본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虫, Osamu Tezuka)는 숙련된 만화가가 의도적으로 형상을 변형하는 데포르메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려 본 적 없는 사람들의 낙서조차 이론적 함의를 갖고 있다고 말해요.

두 번째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원근법을 이해하고 그 표현의 테크닉을 숙달하고 난 다음부터 그림에 깊이감을 줄 수 있습니다. 크기가 작으면 멀리 있는 것으로 이해되죠. 그래서 원근법을 학습하지 않은 어린이들의 그림은 모든 사물이 벽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근법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이것은 불가능이나 결함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이렇게 물어볼게요. 공간적 중심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사물들이 여기저기 평면 위에 배치되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각각의 시각적 서브 텍스트로 멋대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하나의 기준에서의 불가능은 또 다른 가능성의 기준이 됩니다.

최민지 작가님의 최근작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모래알, 2022)에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공간이 그려지고 있어요. 그는 공간을 그리게 된 것이죠. 그런데 공간을 그린다는 것은 회화의 역사에서 어떠한 새로움도 없는, 기초에 가까운 테크닉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새로움, 아방가르드의 허위성을 충분히 성찰한 것 같아요. 각자의 언어 체계에서 새롭게 의미화되는 것을 발견하는 게 훨씬 중요하고, 그럴 때 말 그대로 의미가 생산됩니다.

아마추어리즘이 단순히 못 만든 것, 조악한 것과 어떻게 구분되냐는 물음에도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질문을 뒤집어 아마추어리즘이 ‘잘 만든 것’의 가치판단 기준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어요. 주관성을 발견하고 체계화한다는 점에서요. 그것은 최민지 작가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자기 언어를 만들기 시작했는지의 여부에 좌우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중국어가 영어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어요. 한국어가 태국어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고요. 가치 판단에는 가치라는 공통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와 달리 언어는 언어화되는 순간 자신의 기준에서만 판단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이 쓰는 언어가 무엇인가’와 같은 외적 기준을 가져오면 비교가 가능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가치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시스템입니다. 가치는 특정 언어 내부에서만 판단될 수 있는 개념이에요. 물론 어떤 언어가 하나의 체계로서 충분히 구성되어 있는지 판단할 내재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각자의 언어 체계에 대한 이해를 선행하지 않고 내리는 가치 판단은, 기준의 외부성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진행한 이진실 님의 대담에서도 페미니즘적인 맥락에서 ‘퀄리티’ 개념이 많이 언급됐던 걸로 기억해요. 저는 이것이 ‘못 만든다’, ‘잘 만든다’는 판단을 대체하거나 상세화하는 관점인 것 같습니다.

이연숙: 두 분 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천천히 잘 나눠 주신 것 같습니다. 잘 만들었다거나 못 만들었다는 판단보다, 제가 공유하고 싶었던 것은 구체적인 사례 또는 저의 요구에 대한 반응입니다. 저번에 강덕구 님께서도 예시를 들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강덕구: 근데 한번 허를 찔러서 예시를 들어 보죠. 줄리어드 음악 학교에서 작곡을 가르치던 교수 레너드 캐슬(Leonard Kastle)은 2년 정도 자료 조사를 하고 〈허니문 킬러(The Honeymoon Killers)〉(1970)라는 영화를 딱 한 편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의 영화 경력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사람을 영화에 대한 아마추어라고 불러야 하는지 전문가라고 불러야 하는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실 영화사 전체를 돌이켜보면, 이여로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언어라는 측면이 되게 중요합니다. 얼마 전에 작고한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혹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에 참여한 분들이, 영화라는 천박한 예술, 자기 언어가 없어 보이는 공산품 같은 예술에서 자기 언어를 찾고자 한 것을 상기해 봅시다. 이는 영화에서 아마추어적인 것 혹은 사적인 것을 발견하는 태도입니다. 스튜디오에서 활동했던 감독들의 일화에 따르면, 영화 안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신호를 몰래 심어 놓는다고 합니다.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를 시나리오 작가에게 던져 줘서 이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만들곤 합니다. 이야기가 이중부호화되어 있는 거죠.

프로페셔널한 영화 산업에서조차 자기 자신이나 친구들만 인식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영화사 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순간입니다. 예술은 자기 언어 없이 존속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범죄 소설가 레이먼드 손턴 챈들러(Raymond Thornton Chandler)는 범죄 전문가가 아니고 범죄에 대해서는 형사보다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취재와 관련해 많은 소설가들이 강박을 갖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정말 잘 쓰인 보고서는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마추어리즘적 관점에서는, 정보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챙겨 오거나 약탈해서 창작을 하는 것이 예술의 조건인 것 같습니다.

이연숙: 이여로 님은 자기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마추어리즘적인 것이라고 얘기해 주셨습니다. 강덕구 님의 이야기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얘기한 소수 문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소수 문학은 수적으로 적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에도 저것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수 언어를 전유하고 약탈하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을 표시할 수 있는 문학이자 언어를 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아마추어리즘은 잘 만들거나 못 만드는 ‘퀄리티의 위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 소수적인 것을 고집하고 발명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추어리즘을 우리의 삶과 작업에 어떤 방식으로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이 도구 또는 무기를 쓸 수 있을까라는 실용적인 질문이 떠오르는데요. 먼저 강덕구 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덕구: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저는 유닛(unit), 단위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도화되고 행정화된 절차에서는 관객이나 비평가, 창작자가 사실상 다 분리되어 있습니다. 예술적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단위의 차이란 그저 예술적 경험의 다양한 양태에 불과합니다. 영화계 지원 같은 경우, 영화 산업만을 지원하거나 독립 예술인만을 지원하는 문제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이 어떻게 지역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지도 전제 조건과 단위에 대한 재검토 아래서 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재정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는 지원이 필요하지만, 예술인이라는 특정한 조건과 자격을 만들고 이를 지원하는 형태보다는 우리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단위와 보편성을 재발명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있는 무수한 문화 재단들이 관객과 비평가, 창작자를 모두 분리함으로써 지역 사람들의 삶과 얼마나 연결되었는지 묻는다면,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예술인 지원을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예술인들은 본인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는데 왜 자신을 지역 주민들과 연결시키냐고 따집니다. 지역 주민들은 그 연결이 예술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간극은 전혀 좁혀지지 않습니다. 지금의 영화제 문화, 저널리즘과 관련된 문화에서 기본적인 단위를 뒤흔드는 방식이 없다면, 문화 자체는 더 고착화될 것입니다. 지원 방식에서조차요. 우리는 길을 찾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마추어는 이를 위한 전략입니다.

이연숙: 사전 미팅에서 다룬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가 지금 말씀해 주신 제도 이야기였습니다. 제도가 수용자와 생산자를 가르고 관객과 비평가를 가르는 방식으로 계속 예술의 역할을 분할한다는 이야기였는데요. 제게 이 말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온 이유는, 퀴어 하위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클럽에서 노는 사람과 바에서 일하는 사람, 드랙(drag)을 하는 사람이 이론과 비평, 문화를 생산하는 역할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에서는 왜 여러 일을 동시에 하면서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의 ‘산만함’은 생산적인 문화를 만들고, 관계를 창조하며, 구분 짓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는 퀴어 하위문화의 덕목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강덕구 님께서도 관련해서 예시를 들어 주셨는데요. 혹시 좀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강덕구: 『인공호흡』의 저자인 라틴 아메리카 소설가 리카르도 피글리아(Ricardo Piglia)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왜 당신들은 작가라고 할 때 작가로서의 작가만 생각하느냐, 이것은 미국적인 현상이다.” 이를테면 라틴 아메리카나 제3세계에서는 작가가 편집도 하고 번역도 하는 등 여러 역할을 떠맡으면서 문화를 만듭니다. 물론 한국에도 편집자나 번역가가 소설을 쓰기도 하지만, 그분들에게는 편집은 생계이고 지향점은 작가라는 식의 구분이 존재합니다. 저는 삼각편대를 이루며 상호 부조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른 영역에서 경험한 것들 순환시키기 위해서는 작가로서의 작가 혹은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미지에 고착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은 비단 소설에 한정된 것은 아니죠. 이러한 순환과 순류는 모든 문화에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이여로: 저는 마지막으로 아마추어리즘과 제도에 관한 예시를 소개하고 싶어요. 20세기 중반 뉴욕에서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영화작가협동조합의 주축이 되었던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의 말인데요. 좀 길지만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파괴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새로운 종류의 영화, 더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 일에, 카메라의 해방에 쏟았다. 우리는 경쟁적이고 상업적인 영화 배급 시스템과 싸우거나 그것을 파괴하려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만의 협력적인 배급소를, 비경쟁적인 인간관계에 기반한 영화작가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우리는 검열법과 싸우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우리는 검열법을 변화시키는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는 심지어 부패한 공공정보매체와 싸우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우리만의 지하정보영화, 뉴스릴을 만들었다. 영화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들에 관여하지 않았다.”11

흔히들 제도를 현존하는 이해관계 집단이나 공공 기관, 인맥 네트워크 등으로 실체화하고 이를 반대 또는 수용할 대상으로 단순화하곤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제도가 내부적으로는 행정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할 여지가 있고, 외부적으로는 다른 제도로 복수화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이연숙: 이제 저희 셋의 대화는 마무리를 하고, 혹시 관객 여러분 중에 질문 있으신 분들은 손을 들어 주시면 저희가 마이크를 들고 찾아가겠습니다.

청중 1: 안녕하세요. 발표 잘 들었습니다. ‘아마추어’와 ‘프로’라는 단어를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그것을 전업 여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추어들이 어떤 행위를 개인적인 흥미나 취미로 한다면, 프로는 제도 속에서 특정 행위에 상응하는 유무형의 보상을 주기적으로 제공받고 그에 대한 책임이나 사명을 짊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강덕구 님과 이여로 님 두 분 다 기존 제도의 보상 체계의 부재를 아마추어리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고 이야기하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제도가 프로를 양성하는 구조로서 보상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면 보상 체계의 부재는 제도의 기능에 의문이 발생하는 지점이므로, 제도의 부재 자체가 모두를 아마추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업 평론가라는 게 불가능하고, 연구자나 대학원생이 아닌 평론가의 존재 가능성이 희박해진 현재의 삶에서, 제도의 부제 자체가 모두를 아마추어로 만드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강덕구: 굉장히 정확한 얘기인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아마추어리즘이 저희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문학 혹은 저널리즘 비평의 ‘제도 부재’였던 것 같습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제도의 부재는 저희를 미는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여로: 아마추어리즘이 실존적으로 필요해지는 환경이 조성된 것 같지만, 아마추어리즘을 박탈이나 부재로 느끼고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상황을 불능의 상태로 받아들이기보다, 각자가 자신의 상황에 맞춰 스스로를 제도화하는 모습들을 보고 싶어요.

이연숙: 덧붙이자면, 어떤 조건이 아마추어를 만든다는 얘기는 다시 정체성 이야기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실패를 긍정하거나 아마추어를 긍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패나 아마추어리즘을 자신의 일부이자 태도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은 자기 착취와 자기 제도화 사이에서 파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모두가 좋든 싫든 아마추어로 불릴 운명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한 아마추어리즘의 특수한 맥락을 소거한 채로 제도 바깥의 이들을 모두 아마추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리즘을 세대론과 정체성에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 같습니다. 분명 아마추어리즘은 오늘 대화에서는 언어에 대한 것, 새로운 창조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앞서 의견을 밝혀 주신 청중께 동의하면서도 결국에는 반대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청중 2: 라운드 테이블을 들으면서, 아마추어리즘을 계속 해 나가기 위해서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말씀에 놀랐습니다. 아마추어리즘과 체계를 빈번하게 연결시키는 것이 신선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마추어리즘을 생각하면 ‘재미’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두 분에게는 지금 재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어떨 때 재미있다고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여로: 여전히 재미가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 같아요. 재미없는 사람과 재미없는 기획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면, 시립미술관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불러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재미를 우선시한다는 것은 자신이 관념적으로 종합해 놓은 틀을 계속 벗어나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데 재미있는 게 있을 것 같아서 따라가 보면 내가 모르던 분야를 만나게 되기도 해서, 저한테는 여전히 재미가 중요합니다.

강덕구: 오늘날의 ‘쾌락’이라는 단어에는 수많은 역사적 폭력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쾌락은 다소 음험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쾌락이라는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되찾아올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아마추어리즘도 그렇죠. 아마추어는 그저 쾌락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보상 체계를 만들고, 즐거움의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를 만들고요.

이여로: 덧붙이면, 어떤 종류의 재미 혹은 쾌락인지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누군가는 정복하거나 우위에 있을 때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죠. 저는 모르던 것과 마주하는 상황이 재미의 큰 요소인 것 같네요. 재미와 체계를 순환시키다 보면 재미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막막함이나 집요함 같은 것이 재미가 되어요. 또한 나와 배경과 전제가 다른 타자를 만날 때면 어떤가요? 내 관심사가 아니면 아무리 유명인이라도 그냥 ‘사람1’일 뿐이잖아요. 제로에서부터 내 언어를 설명하고, 반대로 상대의 언어를 내가 이해하려고 하는 의지적인 순간이 저에게는 뭔가 비교 불가능한 순간인 것 같아요. 한 분야에 고착되어 있으면 유명세나 선입견 같은 것이 이미 정해진 의미로 다가와요. 그와 다른, 의미를 생산하는 순간의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청중 3: 오늘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아마추어리즘이 토머스 새뮤얼 쿤(Thomas Samuel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1962)에서 말한 과학혁명으로 나아가는 단계이며,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간학문, 메타적 제너럴리즘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아마추어리즘이 혁명의 과정처럼 느껴졌는데요. 퀴어 예술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저는 어떤 예술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 수 있지만 또 다른 예술은 끊임없이 모방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자기 보상 체계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닿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계속 모방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마추어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방을 하는 것은 어떤 지위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연숙: 아까 제가 강조하려고 했던 키워드는 도둑질, 약탈, 해적질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페미니즘, 퀴어 이론에서 모방은 매우 중요합니다. 차용, 전용과 같은 개념은 매우 중요하고,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입니다. 이는 언어가 남성적이라고 할 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우리를 억압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억압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창조가 불가능하게끔 위치된 사람들에게 아마추어리즘은 궁극의 자기 긍정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좋아’라는 식의 긍정이 아니라, 나는 내가 훔친 것에 대해서만 정직하고 그것으로만 말할 수 있다는 식의 자기 충실성일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태도가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마추어란 곧 특정한 조건에 위치 지어진 사람들을 뜻할 뿐이지 않냐는 질문에 저는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추어로서의 자기 긍정이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종류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퀴어 이론가들도 많이 있고, “소수자가 하는 것이 곧 소수 문학이 아니다”라고 한 들뢰즈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훔친 것, 빌린 것,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으로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해 나간 문학이 바로 소수 문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퀴어 이론, 퀴어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태도는 백인적인, 남성적인 아방가르드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그들이 하려는 것과 우리가 하려는 것은 매우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마추어리즘에서 두 분이 사용하시는 개념인 약탈, 해적, 도둑질이 넝마주이 같은 것 혹은 허접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의 존재 방식과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에서의 소수자적인 것은 매우 접합이 잘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여로: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기만적인 게 아닐까, 특수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걸 모두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해 주신 상황도 그렇고요. 하지만 어떤 이가 자신은 모방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이 그 사람의 언어의 한 단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방이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거나, 무엇이 새로운지 모르겠고 허접해 보일지라도, 거기에 잠재하는 언어와 세부적인 것, 복잡성 같은 것을 믿고 끝까지 이어갔을 때의 상황이 저는 궁금한 것 같습니다.

강덕구: 청중 분께서 말씀하셨던 제너럴리스트적인 측면이 아마추어리즘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이 부분이 사적인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러 분야를 임시변통적으로 읽을 때 거기에는 공적인 차원 혹은 제도적 담론장 안에서의 새로움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셨던 다른 작가들에 대한 모방은 모두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위대한 제너럴리스트들의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청중 4: 안녕하세요. 저는 아마추어와 관련해서, 한정된 도구와 재료로 즉각적 필요에 맞게 원하는 것을 최적으로 창조하는 ‘손재주꾼’이 떠올랐습니다. 이 손재주꾼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L’Anti-Oedipe)』에서 언급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개념인데요. 이러한 손재주꾼이 아마추어라는 개념에 부합하는지, 혹은 이 개념으로 아마추어를 바라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로는, 저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블로그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특히 〈에반게리온〉과 관련하여 엄디저트 님이 쓴 글12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분은 상업적인 목적을 갖지 않고 자신이 만든 자료를 PDF파일로 다 배포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태도를 잘 보여 줬습니다. ‘내가 이런 걸 하려고 했던 원래의 이유가 뭐였지?’를 자문해 보면, 저는 과거에 이런 사람들을 보고 나도 이렇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여로: 저는 아마추어리즘을 생각할 때, 레비스트로스가 고안한 개념인 ‘브리콜라주(brigolage)’에서 큰 영감을 받았어요. 다른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더하면,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인류학의 창시자 격인 사람이에요. 20세기 초중반까지 서구에서는 문명과 미개를 구분하여 후자를 본능적 욕구에 충실하고 비과학적인 것, 따라서 문명인과 같은 사고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사회라 불리는 곳에 직접 가서, 그 생활세계 전반에서 서구와는 다른 사유의 형태와 논리를 발견해요. 그럼으로써 서구식 사고를 지탱한 전제와 인식론을 해체합니다. ‘브리콜라주’는 그러한 사유 방식을 설명하는 개념 중 하나인데요. 가령 배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예로 들면, 서구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도면을 먼저 그리고 배의 재료를 따로 만들어서 도면에 따라 조립합니다. 반면 손재주꾼들은 주변에 있는 재료들을 곧장 가져다가 배로 만들어요. 휘어 있는 나무 조각들이 있으면 가져다가 배의 바닥으로 곧장 만드는 식이에요. 이때 나무 조각은 나무 조각이면서 배의 밑바닥일 수 있는 것이죠. 현대 서구사회가 구조에서 사건을 발생시킨다면, 원시사회는 사건으로부터 구조를 발생시킨다는 것이에요. 임시방편의 즉물적 상황이 구조화, 유추, 과감한 비약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이러한 사유는 제가 근거 위주의 사고에서 생성 위주의 사고로 넘어가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창조적이고 지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매체·영역이 따로 있다는 사고는 지금도 만연한데요. 비문자 문화와 실용적 활동 속에서 또 다른 이론성과 사유를 감각하는 일에서도 ‘브리콜라주’는 여전히 큰 영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연숙: 청중께서 두 번째로 언급해 주신 것은 ‘나도 이런 걸 하고 싶다’는 식의 욕심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혹시 강덕구 님은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블로거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강덕구: 그런 경우는 많은 것 같아요. 이를테면 이탈리아 축구팀 세리에A 같은 경우에 전술가들이 굉장히 많은데, 전술가들이 감독 시험을 치릅니다. 그러면 감독이 논문을 써야 하는데, 이 논문을 누가 번역해서 공유한 적이 있습니다. 지식 공유 차원에서 번역을 했다는 점에서 영감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답변과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제가 삭제한 구글 블로그 이름이 애드혹(Ad Hoc) 또는 애드호키즘(Adhocism)인데요. 이런 임시변통적인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미술 분야에서는 흔히들 “작품을 네 마음대로, 네 논리에 따라 끼워 넣지 말라”고 말하죠. 저는 이러한 의견에 반대합니다. 저는 작품을 무한정 이용하고 전유하는 게 비평가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평 윤리로는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상황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위해 도둑질하고 약탈하는 것이 글쓰기에는 중요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중 5: 아까 보여 주신 라운드 테이블 PPT에는 콜렉티브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는데, 오늘은 이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콜렉티브와 관련해 세 분이 어떤 얘기를 나누고자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1회차 라운드 테이블에서, 패널로 참석해 주신 분이 자신은 미술 전공자가 아니고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식의 얘기를 중요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더 듣고 싶은데요. 이 부분이 궁금했던 이유는, 아까 이여로 님께서 이동휘 님과 블로그 댓글을 통해서 만나셨다고 하셨는데, 저는 온라인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들과의 관계를 동료 관계로까지 발전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에서 누군가와 관심을 주고받거나, 누군가를 팔로우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기도 쉽지 않고, 이는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아마추어들끼리 연결되고 콜렉티브까지 만들 수 있게 되는지가 궁금합니다.

이여로: 미술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위인 콜렉티브는 제가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하는 방식과는 조금 어긋난 것으로 느껴져요. 저는 프로젝트 단위의 임시변통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아요. 아까 제가 영감을 받았던 블로거들을 언급했는데, 그분들도 모두 다른 분야에 속한 분들이고, 지금 직접적으로 함께 일을 하는 경우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흔히 말하는 동료도 아니었고, 블로거라는 집합체로 묶일 만큼 강한 중심도 없어 그분들과의 관계는 조금 독특한 것 같습니다. 댓글을 통해 누군가를 만나는 인터넷 기반의 관계성이 어떻게 가능하며 이것이 어떤 조건에서 쉽고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저도 더 생각을 하고 싶네요.

이연숙: 1회차 라운드 테이블을 언급한 맥락은, 콜렉티브 또는 블로그 활동이 같이 일하고 책을 출판하고 연구하기 위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목적 하에 시작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나서 놀다 보니까 ‘아, 이 사람이랑 뭘 더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공부도 같이 하고, 글도 같이 쓰고요. 사람들과 이런 식으로만 만나다 보니 다른 방식으로는 잘 친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게는 ‘놀기’라는 키워드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여로 님께서도 댓글을 달면서, ‘이 사람이랑 잘돼서 나중에 책을 내야지’하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블로그 활동을 하다 보니 서로 관심사가 비슷한 것을 알게 되고 댓글과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는 것은 친구가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만 블로그 댓글을 통해서 이루어진 ‘오타쿠처럼 친해지기’의 방식인 것이죠.

강덕구: 저도 이여로 님과 블로그로 만났네요. 여기에 이런 문제는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무엇이 있으니까 이렇게 만날 수 있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면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실천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저는 만나고 싶으면 만나자고 먼저 말을 하는 편인데 이때 보기 싫다고 답하는 사람도 있고 도리어 만남을 요청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말했듯이 삶에서의 매너의 문제, 사교의 문제에 가깝지 자원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댓글을 어떤 방식으로 다느냐, 어떤 방식으로 친구로서의 호감을 표현하느냐의 문제 아닐까요? 즉, 아마추어리즘에서도 사교 행위의 방식이 또 다른 쟁점이 될 순 있겠네요.

이연숙: 댓글이 딱히 친해지고 싶지 않은 느낌으로 쓰였다면 거기에 답글을 달고 싶지 않겠죠. 블로깅에서 유저의 매력 유무는 분명 자원의 한 종류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 경우에는 대답이 쉽지는 않네요.

청중 5: 제가 똑똑한 사람들끼리만 동료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드리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누군가 제가 하는 작업을 보고 저와 친구를 할 수 있는지, 제가 친구를 구하는지 묻는 메일을 몇 번 보낸 적이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에 답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이런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드린 질문입니다.

이여로: 블로그가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글을 써왔는지를 어느 정도 탐색할 수 있는 시공간이 되어 주지 않나 싶어요. 또한 같은 분야의 사람이 공식적인 경로로 무언가를 제안하면, 그 사람이 목적이 있어서 다가오는 것 아닐까 의심하게 될 때도 있는데요. 그와 달리 누군가 블로거로서 댓글을 다는 것은 ‘놀기’라는 측면으로 다가오는 면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이연숙: 저는 듣다 보니까, 조금 우스울 수 있지만 콜렉티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비위가 좋아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콜렉티브 활동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요. 예를 들면 저 같은 경우는 동료가 될 수 있는지 묻는 메일이 오면 무조건 답장합니다. 내가 상대방을 알아 두면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요. 그리고 저는 상대를 스캐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사람에 대한 비위가 다소 강한 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접근하자면 결국 콜렉티브 활동이라는 건 어느 정도는 비위가 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네요.

저희가 답변을 잘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흥미롭고 재미있는 질문을 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인사를 드리고 2회차 라운드 테이블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저급 이론들의 연합’〉(연구자: 이연숙) 중 두 번째 라운드테이블 “아마추어 연구자와 비평” 현장 장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세마 러닝 스테이션, 2022년 9월 16일. 패널: 강덕구, 이여로, 이연숙. 사진: 김진주.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본 원고는 아래 일정으로 열렸던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저급 이론들의 연합’〉의 현장에서 나눈 말을 글로 옮기고 편집을 거쳐 보완된 녹취록입니다.
2022년 9월 8일 목요일 오후 3~5시 “여성 퀴어 작가의 콜렉티브”(패널: 야광 콜렉티브, 홍지영, 이연숙)
2022년 9월 16일 금요일 오후 3~5시 “아마추어리즘과 비평”(패널: 강덕구, 이여로, 이연숙)
2022년 9월 23일 금요일 오후 3~5시 “실패의 퀴어 예술”(패널: 문상훈, 양승욱, 이반지하, 이연숙)
라운드테이블 전체를 정리한 글은 이연숙, 「〈저급 이론들의 연합〉: 후기」입니다.

녹취록 초고 작성: 박지연
교정, 교열, 윤문: 정혜진


  1. 2023년 1월 17일 현재, 이 책은 『밀레니얼의 마음: 2010년대, 그리고 MZ의 탄생』(민음사, 2022)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 이동휘, 이여로,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 미디어버스, 2022, 129쪽. 

  3. 위의 책, 135쪽. 

  4. 〈전시실의 사적인 대화〉, 서울시립미술관. 

  5. 김영건, 「가라타니 고진 - 트랜스크리틱 4」, 블로그 ‘내 마음의 풍경’. 

  6. 김영건, 「분석적 철학과 대화적 철학 1」, 블로그 ‘내 마음의 풍경’. 

  7. 에드워드 사이드, 최유준 역, 『지식인의 표상』, 마티, 2012, 98쪽. 

  8. 앤디 메리필드, 박준형 역, 『아마추어: 영혼 없는 전문가에 맞서는 사람들』, 한빛미디어, 2018, 교보ebook 7장. 

  9. 강덕구,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 블로그 ‘K-atacccombb’. 

  10. 이여로,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 『문학과사회 하이픈지 문학–사회』, 문학과지성사, 2021년 가을, 130-131쪽. 블로그 ‘이여로 / 기획:1’에서도 읽을 수 있다. 

  11. 요나스 메카스 편저, 이여로 역, 유운성 감수, 신신 디자인, 『영화작가들과의 대화』, 미디어버스, 2023. (3월 중 발간 예정). 

  12. 한국의 비디오 게임 전문 사이트 및 커뮤니티인 ‘루리웹(Ruliweb)’의 애니메이션 게시판에 ‘엄디저트’라는 유저가 연재한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대한 비평글. 엄디저트, 「[에반게리온] 0. 우리들은 무엇을 해석하려 했는가?」, 루리웹. 

© 2024 작가, 저자,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세마 코랄 | SeMA Coral)에 수록된 콘텐츠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작가, 저자,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있으며, 저작자와 서울시립미술관의 서면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각 저작물에 담긴 의견은 미술관이나 세마 코랄과 다를 수 있으며, 관련 사실에 대한 책임은 저자와 작가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