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 1부: 송년회: 올해 우리가 본 것들

이연숙
이연숙은 〈2021 SeMA-하나 평론상〉 수상자로, 닉네임 ‘리타’로도 활동한다. 2015년부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왔다. 페미니즘과 퀴어 예술, 그리고 하위문화에서 발견되는 소수자 문화의 저항적 형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비평을 지속하려 한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고,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남웅
남웅은 인권운동과 더불어 시각문화 및 미술평론을 한다. 2011년 제 4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미술비평 부문에 “동성애자 에이즈 재현에 관련된 논의—에이즈 위기부터 오늘의 한국사회까지”로 당선된 바 있으며, “오늘의 예술 콜렉티브—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보지만, 얼마동안 빛이 있는 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로 2017년 제2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공저로는 『감염병과 인문학』(2014), 『메타유니버스—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2015), 『한국의 논점 2017』(2016)이 있다. 현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상임활동가이다.
이진실
이진실은 독일현대미학을 공부하고 시각예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리드마이립스》(성지은 공동기획, 합정지구, 2017), 《미러의 미러의 미러》(합정지구, 2018), 《합창 Dictee:Chorus》(안옥현 주최, 아마도예술공간, 2021)를 기획했다.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Ágrafa Society)’의 일원으로 웹진 ‘세미나’를 공동 기획, 편집했다. 2019년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사랑과 야망: 한국 동시대 페미니즘 미술의 시차들』(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1)이 있다.

집담회 1부 〈송년회: 올해 우리가 본 것들〉은 2021년 SeMA-하나 평론상 제4회 수상자 이연숙이 꾸렸다. 그는 비평가이자 그 경계를 넘어 활동가와 기획자로 실천하는 남웅(2회 수상자)과 이진실(3회 수상자)을 토론자로 초청하여 올해 미술계를 메운 전시와 작가에 대한 ‘애매한’ 이야기를 나눈다. 공적 대화와 사적 대화의 사이에서, 진지한 비판도 ‘인상 비평’도 아닌 그런 각자의 (비평)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할 수 있는 그 모호한 (비평적) 경계들을 점검해 본다. ― 세마 코랄

‘미술비평이 없다’는 지적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1985년 최민은 비평가로서 쓴 「최소한의 윤리: 비평가의 자세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압축한다. “70년대 이후 오늘에 걸쳐 미술비평은 관심 갖는 사람들 사이에서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 반응을 받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비평가는 있되 비평은 없었다고까지 이야기될 정도로 그 활동이 보잘것없었고, 생산적인 기여를 했다기보다는 어떤 면, 기존의 제도적 병폐와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해 왔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울 것이 못 된다.”1 이어지는 문단에서 최민은 익살스러운 투로 일반 관객에게 비평가란 무엇인지를 요약한다. “[그들은] 대충 비평가들이란 유명한 작가의 주변에서 할일없이 맴돌다가 가끔 신문이나 잡지 또는 전시회 목록의 첫 페이지에 너절하게 찬사나 늘어놓거나 알쏭달쏭한 어휘와 논리로 헛소리나 해 대는 줏대 없는 친구들쯤으로 상상하고 있다.”2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최민이 제시하는 대안은 (자신을 포함한) 비평가들이 관념 대신 현장을 더 가까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로 젊고, 막 시작하려는 작가들의 현장에 참여함으로써 비평가가 “작가들의 모임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고 위험 부담을 공유함으로써 작가들과 참다운 연대 의식으로 맺어질 수 있다”3고 쓴다. 이러한 “연대 의식” 또는 ‘공모 의식’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비평가들 역시 각종 국가·제도 장치들로 인한 압력에 취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비평가는 단순히 제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안팎에서 자신의 시각과 논리를 (“손가락질”과 “따돌림” “망신” 심지어 “끝장”나는 것과 같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4) “주도적”으로 펼쳐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비평가에 대한 멸시 어린 평가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최민의 비판은 오늘날의 미술비평계(‘계’라는 것이 있다면)의 상황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기금 제도를 중심으로 편성되고 운영되는 한국(그중에서도 서울)의 미술 현장에서 비평가는 기관 혹은 작가, 기획자에 의해 일시적으로 고용되는 텍스트 생산자의 역할에 머물도록 조건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한편 미술비평뿐 아니라 모든 정치적·문화적 영역에 걸쳐 (“참다운”?) ‘공론장’이라는 것이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SNS의 폐쇄적인 ‘피드’로 대체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에서, 미술 현장에 개입한다는 것은 때로 전시장 방문 ‘인증샷’을 게시하는 행위만으로 충분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비평이라는 행위·실천의 한 극단에는 개별 작가와 전시를 위해서 쓰인 30-50매가량의 청탁 원고가 있고, 다른 한 극단에는 인증샷이 있는 셈이다. 물론 우리는 양극단 사이에 위치한 중간지대들을 알고 있다. 잡지와 웹진과 같은 비교적 형식을 갖춘 매체는 물론이고, 팟캐스트와 유튜브, 블로그와 메일링 서비스와 같은 비교적 애매한 (그래서 자유로운) 매체들 역시 최근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땡땡 콜렉티브’의 전시 리뷰를 다루는 메일링 서비스인 ‘땡땡 레터’,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열리는 전시 리뷰와 인터뷰를 발행하는 (역시 메일링 서비스인) ‘하루에 하나’가 그렇다. 비평적 개입과 중립적 감상의 사이에서 이뤄지는 이들의 쓰기와 말하기 실천은 그 자체로 유사-공론장의 역할을 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쓰고 말하는 방식을 더 발명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 오늘날 애매해지는 것만큼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송년회: 올해 우리가 본 것들〉이라는 다소 사적인 제목의 행사에 ‘비평가’의 “참다운” 자세와 책임에 대해 따져 묻는 최민의 글을 인용한 까닭은 우회적이나마 그의 문제의식과 연결되기 위함이다. 물론 이 행사는 지금까지 내가 앞에서 쓴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예정이다. 행성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로서 때때로 단체의 블로그에 미술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는 남웅, 그리고 웹진 『세미나』의 공동 기획자이자 종종 미술 전시를 기획하기도 하는 이진실은 대부분의 경우 ‘비평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런 만큼이나 자신을 한정 짓는 그 이름의 경계에서 많은 활동을 해 왔다. 우리는 모여서 올해 본 것들에 대한 ‘애매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공적 대화와 사적 대화의 사이에서, 진지한 비판도 인상 비평도 아닌 그런 이야기들을. ― 이연숙


이연숙: 안녕하세요. ‘송년회: 올해 우리가 본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남웅 선생님, 이진실 선생님과 집담회를 진행하게 된 이연숙(리타)이라고 합니다. 이번 집담회는 올해 저희가 본 것들에서 받은 인상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제가 집담회 소개문에도 썼듯이 “공적 대화와 사적 대화의 사이에서, 진지한 비판도 인상 비평도 아닌 그런 이야기”를 “애매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초대한 두 분은 남웅 선생님, 이진실 선생님이신데요. 어쩌다 보니까 공교롭게도 남웅 선생님은 2회 수상자시고, 이진실 선생님은 3회 수상자신데, 제가 이 두 분을 초대한 이유는 꼭 수상자여서가 아니라 두 분 다 여러 영역의 경계를 넘나 들며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집담회 소개문에 남웅 선생님은 “행성인(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활동가로서 때때로 단체 블로그에 미술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한다”라고 썼고, 또 이진실 선생님은 “웹진 『세미나』의 공동 기획자이자 종종 미술 전시를 기획하기도 한다”고 썼습니다. “자신을 한정 짓는 그 이름의 경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애매함’이 오늘 이야기할 주제와 잘 맞는다고 생각을 해서 두 분을 섭외하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두 분과 이야기 나누기 전에 제 책 『진격하는 저급들』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이 책은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세 번째 총서로 기획되었어요. 감사하게도 수상 이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세마 코랄에 글을 연재할 기회를 주셨고 그 글들을 묶어서 책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래서 젠더, 퀴어, 하위문화를 다룬 이런 이야기들이 이 책에 들어 있어요. ‘퀴어(Queer)하다’라고 말해지는 어떤 형식이나 양식이 비단 미술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고 영화, 만화 등 여러 장르에서 발견되는데 그런 것들을 엮은 책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7장은 2022년에 3회에 걸쳐 진행한 라운드테이블 중에서 레즈비언 미술을 이야기한 대담을 뽑아서 수록한 것입니다.

이제 ‘올해 우리가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 보려고 하는데요. 처음에는 올해 본 전시들을 위주로 이야기하려고 했다가 그것보다도 더 광범위한 이야기들로 점점 확장되면서 여러 키워드들이 등장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그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 집담회를 준비하며 제가 두 분께 아주 가볍게 질문을 드렸어요. “올해 본 것 중에 전시가 됐든 영화가 됐든 뭐가 됐든 재밌는 것들, 흥미로운 것들이 있었느냐?”라고 여쭤봤더니 여러 키워드들이 두 분에게서 나오게 됐어요. 먼저 저의 제안을 들었을 때 어떤 감상이셨는지부터 여쭐게요.

이진실: 일단 저는 올해 전시를 많이 안 봤어요. 부지런히 돌아다니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해야 할 과업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조금 다운된 상태였어요. 우리가 다 기억하겠지만 작년 말쯤 일어난 이태원 참사부터 시작해서 무력감이 많이 드는 한 해였던 것 같아요.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면서 솔직히 혼자 책을 보고 그냥 혼자 생각하고 글을 쓰고, 하지만 글도 많이 안 쓰고. 개인적으로 그런 한 해였는데 ‘우리가 본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 ‘우리’는 뭐고 ‘본다’는 건 뭘까라는 고민을 좀 했어요. 여기 나와 계시는 이 두 분과 저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여성주의나 퀴어 미술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기도 한데,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전시들과 어떤 작업들을 ‘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봤다’라는 것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전시 사진들부터 여러 피드에서 올라오는 투덜거림과 비판, 또 찬사와 열기까지 다 포괄해서 우리가 뭘 ‘봤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요. 구체적인 작업이나 전시보다는 2023년에 미술판에서 흘러다니는 어떤, 우리가 미처 텍스트화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웅: 저는 ‘올해 우리가 본 것들’이라는 주제로 SeMA-하나 평론상 시상식에서 이야기 나눈다고 했을 때 감회가 새로웠어요. 이 자리에 다시 온 것도 그렇고, ‘우리가 본 것들’이라고 했을 때 어떤 걸 이야기 해야 할까, 전시를 하나씩 다시 한번 살펴봐야 되나 생각하게 됐죠. 유감스럽지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 더 많은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자리는 분명히 불평 대잔치가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했고요. 누군가를 축하해 주는 자리인데 우리끼리 이렇게 경박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끝나도 괜찮을까 걱정도 했어요. 또 토크를 녹취까지 해서 세마 코랄에 공개한다고 해서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요. 그래도 이건 우리를 부른 리타(이연숙) 님과 미술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이야기를 편하게 하면 좋겠어요. 여기 계신 청중 여러분도 공감이 되거나 다른 의견, 다른 본 것들이 있으면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자리여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편하게 먹고 왔어요.

장애예술과 접근성

이연숙: 네, 감사합니다. 첫 키워드부터 굉장히 중요한 화두를 꺼내게 되었어요. ‘장애예술과 접근성’이라는 키워드인데요. 이것에 대해서는 남웅 선생님께서 먼저 대화의 물꼬를 터 주실까요?

남웅: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작년 말쯤에 혜화역에서 장애인들이 장애인 권리 예산을 확대를 요구하면서 매일 같이 시위하고 기자회견을 하던 때였어요. 비슷한 시기에 정부에서 장애예술 제도를 지원해 주고 그 예산을 지원해 준다면서 장애예술에 대해 상당한 지지를 보였어요. 그래서 작년이랑 올해 ‘장애예술’이라는 키워드가 상당히 눈에 많이 띄었던 것 같아요. 겉으로 봤을 때 전시도 신경 써서 진행하는 모양새였고, 정부에서도 많이 밀어주고 지지해 준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제가 캐치를 못했던 전시도 꽤 많더라고요. 보시면 알겠지만 서울시에서도 지원을 하고 정부에서도 지원해 준다고 수차례 이야기를 했죠. 청와대에서 전시한 소식은 뉴스로도 나왔고요.

그런 풍경들을 보면 소위 미술계라고 하는 미술 기관이나 갤러리에서 자체적으로 기획이 되고 담론을 만들어서 장애예술과 재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기보단, 그냥 ‘장애예술’이라는 프레임으로 큰 전시를 계속 여는 거예요, 이벤트처럼. 그래서 장소를 보면 《이토록 아름답고 황홀한 만남》은 부산 벡스코에서 하고, 청와대 춘추관에서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를 열었죠. 상당히 정부에서 만든 듯한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가지고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사실 미술이 장애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했던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작가 중에서도 계속 노화나 사고, 트라우마를 다루면서 장애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을 거고, 그리고 또 본인의 장애를 예술의 방법론으로 가져가는 작가들도 상당히 많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정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장애예술을 확장하기보다는 좁은 의미의 장애예술에 가둔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장애인의 미술 활동이나 장애인의 남다른 감각으로만 수렴하는 기획의 말은 쉽게 보이는데 이것과 관련한 학술적인 접근이나 미술계 안에서의 담론을 환기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죠. 이런 시도들보다 아트페어에서 전시하는 방식으로 반복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작가마다 섹션을 나눠 작업을 배치하는데, 그게 이 사람의 장애나 미술의 역할을 환기하기보다도 “이 사람이 장애인이야. 등록 장애인인데 이런 작업을 했어. 그러니까 장애인들의 창의성을 한번 보렴.” 이런 식의 접근들이 너무 눈에 띄는 거죠.

다른 경우는 사설 기관이나 기업에서 기획한 전시가 있죠. 《모두의 어떤 차이》 같은 경우에는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을 기념해서 했던 거고, 《LUSH 아트페어》가 있었고, 그리고 한가람미술관에서 했던 《내가 사는 너의 세계》는 잠실에 있는 장애인 예술 창작센터에서 같이 했던 전시인데요. 찾아 보면서 인상에 남는 게 하나 있었어요. 《모두의 어떤 차이》에는 캐나다에서 활동하다 돌아가신 이원영 작가님의 유족분들이랑 미술 관계자분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 있었어요. 이것을 장애예술이 아니라 그냥 예술로 봐 달라는 말을 다들 한입으로 하시는 거예요. 정부에서는 계속해서 장애예술이라는 키워드를 ‘장애인들의 예술’로 계속 이야기하는데 다른 편에서는 미술계, 그러니까 장애와 비장애를 나눴을 때 비장애 미술계라고 하는 것에 대한 욕구와 열망이 너무 커 보이는 거죠. 이 이질감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을 때,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지원을 하려고 이런 선언들을 했고 제도를 만들었는가?’ 이런 것들을 살펴보게 만드는 거죠.

이번 정부가 대통령의 취임 직후에 장애예술인 지원에 관한 정책 의지를 표명했고, 장애예술 활성화를 12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삼았어요. 그 이전에는 이미 문재인 정부 때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2020년 12월)했더라고요. 그리고 작년에 ‘제1차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지원 기본 계획’을 확정해서 발표해요(2022년 9월). “각 국공립 미술관이나 지자체 공공기관은 창작물 구매액의 3% 이상을 장애예술인 작품으로 구입을 해야 된다”는 내용이었고요. 그리고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 발의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이 올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는데(2023년 5월), 여기에는 “접근권뿐만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장애예술에 관한 전시들을 해야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이런 기준과 지원제도를 만들 때 ‘장애예술인들은 기뻐할까? 어떤 지점에서 기뻐할까? 그냥 예산이 더 들어오고 전시 기회가 더 많아지는 것 외에 어떤 성취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거예요. 그렇다면 ‘장애예술인으로 정체화를 하는 이들은 또 누구일까? 이들은 그냥 장애인복지법에서 말하는 등록 장애인으로 한정하고 예술 지원 제도를 복지 차원으로 접근할 때 조명 받는 예술인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술 작업을 하면서도 본인의 손상이나 장애나 노화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형식으로 만들어 왔던 이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이런 것들도 궁금증으로 남았고요.

저는 또 하나 기시감이 들었는데, 여기 계신 분들은 ‘퀴어 예술’이라는 키워드를 낯설지 않게 생각하실 텐데요. ‘퀴어’를 하나의 실천으로서, 아니면 형용사나 부사적인 효과로서 이야기를 해석하기도 하지만 LGBT라고 하는 정체성 안에서 이야기하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이것이 정체성 미술로 국한이 됐을 때, 그러니까 정부나 국공립 미술관 같은 데서 퀴어 예술을 지원한다고 할 때, 이런 것들을 선례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하나 기시감이 들었던 것은 제가 아까 복지 차원에서의 예술 서비스 이야기를 했었는데, 시설 안에서의 장애인들만 염두에 둔다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장애인들이 자활을 하면서, 자립생활 활동을 할 때 예술 활동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랬을 때 앞서 언급한 전시들은 이런 결과물을 보여 주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서 예술계에서는 장애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지에 대해서 교차점 없이 계속 형식적인 지원을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만약에 이번 정부가 끝나고 다른 정부에서 이 기금이 끝난다면 장애예술이라는 키워드는 또 유행처럼 사라지는 건가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서 이런 지원에 대해서 더 보지 못했고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고요. 처음에 말씀 드렸던 것이 혜화역에서 계속해서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을 비롯한 장애 운동 단체들이 이동권이나 노동권을 포함해 장애인 권리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싸운다는 이야기였잖아요. 그건 뭐냐면 “이동권에 대해서 확보를 해 달라” “예산을 늘려 달라” 이런 건데, 내년 예산도 보니까 거의 고정이 돼 있더라고요. 그냥 관리만 해 주겠다는 거거든요. 확대는 안 하고.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게 행정적으로 너무 보이는 거죠.

지금 보여 드린 사진은 작년에 장애예술인 특별전《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가 청와대에서 열렸을 때, 전장연이 그 당시에 삭발 투쟁을 하면서 박스에다가 매일같이 삭발을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그 머리카락을 실어서 전시장에 찾아간 모습이에요.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했던 건데, 그 풍경이 좀 인상적이었어요. T-4 (Action T-4)라고 과거 나치에서 우생학적인 정책을 위해서 내 놓은 것을 패러디를 하면서 기습적인 점거 퍼포먼스를 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이야기를 제발 좀 들어 달라”고 외치면서 점잖은 전시의 풍경과 대비되는 행동을 한 거예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시장의 ‘‘장애예술인’과 전시장에 출몰한 ‘전장연 활동가들의 퍼포먼스’는 서로 적대만 하는 것일까?’ ‘두 주체가 어떻게 단절되거나 연결될까?’ ‘여기 안에서는 어떤 논쟁 지점이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미술계 안에서 좀 더 많이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소위 말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예술’이 분과 예술 또는 하나의 분야로 자리를 내어 주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 사람의 자리를 조금 마련해 주는 방식이 아니라, 하드웨어만 지원하는 게 아니라, 이 안에서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이고 예술계 안에서의 체제나 정상성, 비정상성의 담론들을 어떻게 좀 더 논쟁적으로 밀어붙일지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진실: 네. 남웅 님이 사전 미팅 때 말씀하셔서 저도 생각나는 사진,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사진을 가져왔어요. 남웅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은 장애인의 복지와 예산과 관련해 한쪽으로는 굉장히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인 탄압 혹은 억압이 있는 동시에 한쪽에서는 기금이나 어떤 장을 마련해 준단 말이죠.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나아가 예술의 주체가 되는 일을 권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시혜적 관점으로 본다는 것, 그 다음에 카테고리를 나눠서 그 범주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 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기도 한데, 원론적으로는 장애예술과 일반, 그러니까 보통 미술 혹은 예술이라고 부르는 장 사이에 어떤 구분이나 선명한 경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있고, 또 있어야 하는 측면도 있겠죠. 그런데 장애예술이라는 카테고리를 계속 강화해 나가고 이에 대해서 기금이나 지원 방식으로 그 기반을 마련해 나가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정부든, 기관이든 예산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이런 상황이 장애예술이 입맛에 맞는 것, 불편하지 않은 것, 시민의 눈에도 정부나 어느 기득권의 눈에도 거슬리지 않는, 그런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로만 드러날 수밖에 없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건 일견 예술에 대해서 공공기관들이 취해 온 태도와 굉장히 유사하거든요. 레지던시를 만들어 주든 기금을 조성하든 간에 그것이 공공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듣기 좋은 이야기, 껄끄럽지 않은 것들만 보여 주는 방식으로 가고, 극단적으로 블랙리스트라든지 이런 것까지 가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선별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사전프로그램 《서쪽 서식지》 행사 전경. 사진: 최형락. ⓒ서울특별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미술관 내에서 장애와 예술의 관계 변화를 생각해 봤을 때 눈에 띄는 지점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등이 장애인 접근성 문제에 대해서 매뉴얼 등 여러 가지 정책을 마련해 나가고 있는 부분이에요. 제가 알기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미 지금 공식 매뉴얼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리움미술관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들었어요. 사진은 올해 진행된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사전 프로그램입니다. 금천구에 생기는 서서울미술관 개관을 준비하면서 서울시 문화본부에서 여러 사전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행사 기간 5일 내내 모든 프로그램이 문자통역을 기본으로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지점이 이제 국공립미술관이 가져가야 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이 쉬운 글 해설, 수어 통역 도슨트 등 여러 가지 접근성 개선을 위한 실천을 해 나가고 있는데 그것이 전시를 담당하는 큐레이터의 의지라든지, 아니면 전시의 콘셉트라든지,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최대한 기본적으로 매뉴얼화되어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미술 안에서 접근성에 대한 것들을 고민하고 토론하는데, 아직까지도 보편적인 차원보다는 개별화돼 있고, 시혜적으로 보고 있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져요. ‘우리의 고급 취향’을 맛보게 해 주자는 이런 방식의 접근 태도들이 여전히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장애인을 진짜 예술가 주체로서 생각하기보다 수동적인 관람객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많이 있고, 분명 장애인 예술가들이 미술판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과 얼마나 소통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 좀 의문이긴 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가 며칠 전에 ‘SeMA 신진미술인 전시 리뷰 프로그램’에 잠깐 갔었는데, 홍세진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발표하고 있었어요. 홍세진 작가는 회화 매체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고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수어를 쓰시지 않고 주로 음성 언어로 이야기를 하세요. 그런데 사실은 청각장애인이 음성 언어로 노력해서 이야기를 해도 저는 절반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더라고요. 예전에 작가님을 OCI 미술관에서 뵀을 때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날은 제가 거의 절반 정도는 작가님 말씀을 놓쳤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 보니 청각장애인이 발제자로 참여하는 행사에 문자 통역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홍세진 작가님한테는 문자 통역이 제공되고 있었다고 하긴 했지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장애인 예술가를 같은 동료로서 인정하고 발표할 때 끄덕끄덕해 주고, “잘한다, 잘한다” 해 주는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서로의 작업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소통하는 게 중요한데, 그렇게 생각하자면 홍세진 작가가 음성언어로 말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청능중심주의가 작동했다고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이죠. 이 조건 자체를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더 소통할 것인가를 섬세하게 고민하고 방법을 마련해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자리에 있는 관객들이 홍세진 작가한테 박수를 보내는데, 저는 과연 이들이 다 알아들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또 이런 자리에서는 관객들이 비판을 안 해요. 이것이 장애인 예술가를 진정 동료로 대하는 태도인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장애인 예술에 대한 카테고리를 내재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차원에서 장애라는 것과 예술이라는 것이 굉장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의 존재론적인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예술이 장애라는 것을 소재로 쓸 수 있고, 퀴어라는 것을 소재로 쓸 수 있고, 여성이라는 것을 소재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맞닿아 있는 지평들, 조건들을 같이 모색하는 장이라고 봐요. 그런 지점에서 ‘어떻게 이들과 같이 프로젝트를 해볼 것인가?’ ‘무엇을 해보면서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킬 것인가’ ‘우리가 어떤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좀 더 고민하는 섬세한 프로그램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장애여성공감’의 극단 ‘춤추는 허리’가 있는데요. 2018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퍼포먼스와 전시를 하기도 했었죠. 이런 프로젝트들이 미술관 안에서 더 확대되고 많은 논의의 장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한 방식이 ‘관 중심’의 시혜적 태도, 혹은 관이 판을 벌여 주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장애예술에 대해서 아직도 잘 몰라서 고민되는 지점이 굉장히 많은데, ‘춤추는 허리’의 서지원 씨가 그런 말을 했던 게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왜 이렇게 몸이 불편한 상황임에도 공연 예술을 하느냐”고 했을 때 그분이 그런 말을 했어요. “장애인들은 일상에서도 그렇고 예술을 하든지 뭘 하든지 실패를 한다.” 근데 그건 장애인만 겪는 게 아니죠. “우리는 늘 실패를 한다. 계속 실패하면 장애인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하지 말랬잖아, 몸이 아프니까 가지 말랬잖아, 다치니까 위험하니까 하지 말랬잖아.” 그런다는 거예요. “하지만 예술 안에서는 그 실패가 바로 특권이다. 그게 내가 예술을 하는 이유다”라고 지원 씨가 이야기를 했을 때 저는 굉장히 많은 인사이트(Insight)를 얻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삶과 어떤 감각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대화들이 장애인 예술가들과 많이 오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습니다.

이연숙: 저는 지난 몇 년 간 퀴어 예술에 대한 글을 생산하면서 ‘은유로서의 퀴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퀴어라는 개념 자체가 공동체를 확장하는 하나의 계기로 전유될 수 있다고 배워 왔어요. 말하자면 퀴어 당사자가 하지 않아도 퀴어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거예요. ‘퀴어를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나아가 동사로 써라. 소수자들 사이의 연결, 연대를 촉진할 수 있는 그런 만남들을 위해서 이 개념을 전유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배웠고 저 역시 그것에 동의하는데, 그러면서도 굉장히 양가적인 감정이 들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그게 맞거든요. 그렇게 해야 되죠. 『진격하는 저급들』도 사실은 그런 관점에서 쓰인 거죠. 저 개인으로서는 실천의 차원에서 퀴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쓰고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만약 퀴어가 은유라면 실제 삶하고는 어떤 관계를 맺는 거지?’ ‘퀴어라는 형용사와 퀴어의 실제 삶은 어떻게 분리되고, 또 접속하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들이 항상 양가적으로 있어요. 저도 제가 어떻게 살아갈지 잘 모르겠는데, 두 가지 관점하고 항상 싸우게 돼요. 삶 그리고 은유. 이 두 가지 관점이 물론 접합이 되지만 또 분리된다고 느낄 때도 굉장히 많거든요.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계기는 재작년에 벗이미술관과 일을 같이 한 경험 때문이에요. 벗이미술관은 아르브뤼(Art Brut)를 전문으로 하는 국내 유일의 미술관이에요. 아르브뤼는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창안한 개념인데, 본인이 정신병동에서 발견한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작품들을 모범 삼아 예술의 살아 있음, 야만성, 생생함 등을 미술의 새로운 개념으로 가지고 온 거란 말이죠. 이런 아르브뤼를 전문으로 하는 미술관의 레지던시에 머물고 있는 작가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실 이 작가들은 대부분 미술관에 의하면 ‘아웃사이더 아티스트’, 말하자면 비전공자이거나 비주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었어요. 발달장애라는 명확한 소수자성이 있는 한승민 작가를 제외하고는요. 제가 느끼기엔 이 작가들이 어떤 종류의 소수자성은 있는데, 그것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면서도 또 매혹을 느끼는 상황처럼 보였어요. 미술관의 태도도 이것과 비슷했어요. 고민이 많았겠죠. 무엇이 ‘아웃사이더 아트’를 ‘아웃사이더 아트’로 만드는 것인가? 만약 작가가 매력적인 소수자성을 가졌을 경우, 그래서 ‘잘 팔릴 만한’ 경우에는 ‘아웃사이더 아트’만은 아니게 되는 반면, 실제로 장애가 있고, 말하자면 덜 매력적인 소수자성을 가졌을 경우에는 ‘아웃사이더 아트’란 단순히 ‘장애예술’의 동의어가 되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장애예술은 아르브뤼, 아웃사이더 아트에 다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미술사에서의 천재는 곧 광인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미술사 전체는 곧 장애예술의 역사라고 봐도 되잖아요. 그런데 장애의 어떤 부분만 ‘예술적인 것’으로서 전유되고 그것의 현실은 전유될 수 없는 거죠. 제가 지금 결론이 있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예술이 어떻게 장애를 전유, 이용해 왔는가를 보는 그런 연구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괴물성: 시각 문화에서의 인간 괴물』, 『미학적 불안감: 장애와 재현의 위기』 등이 있죠. 『미학적 불안감』에서는 이런 말을 해요. “문학 작품에서 장애는 어떻게 재현되는가? 불안한 존재로 재현이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작품에서 장애인들이 등장하면 작품이 붕괴된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이 작품에서 중요한 서사적 전환점으로 기능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퀴어든 장애든 그것들의 매력적인 부분만 주류적인 것으로 확장되는, 이런 전유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 과정에 대해서 더 면밀하게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계속해서 이런 점들을 예민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복과 귀환

이연숙: 이제 다음 화두로 넘어가자면요. 이 화두의 제목은 ‘반복과 귀환’인데요. 굉장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16년을 기점으로 페미니즘 열풍, 혹은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할 만한 그런 시기가 도래했잖아요. 왼쪽 화면의 이 캡처는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의 ‘티나’ 성우 김자연씨 퇴출 사건을 다룬 기사예요. 이 성우가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넥슨에서 해고를 당한거죠. SNS상에서 굉장히 큰 해시태그 운동을 불러온 계기가 되기도 했죠. 이게 2016년이거든요. 그리고 오른쪽 화면은 2023년 12월에 나온 기사에요. 똑같이 넥슨이라는 회사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화면에서 여기 캐릭터의 손가락이 보이시나요? 남초 커뮤의 일부 남성들에 의하면 ‘집게 손가락’이 이제 메갈리아, 즉 페미니스트의 상징이라고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요. 넥슨이 게임 홍보 영상에 “의도적으로 집게 손가락을 집어넣었다”라고 하면서 이 일부 남성들이 굉장히 항의를 한거죠. 그 결과 영상 내 손가락을 수정하고 해당 손가락을 그린 외주업체도 굉장히 큰 곤란함에 놓이게 된 그런 상황입니다. 사실 하청을 받은 이 외주 업체가 혼자서 책임을 다 지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고요. 6년의 시간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일이 게임 업계에서 반복되고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문화예술계, 미술계 안에서도 이런 비슷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진실: 올해 굉장히 무력감이 많이 들었고, 남웅 님 말씀처럼 “보고 싶은 것보다 보기 싫은 게 더 많더라”라고 한 데에는 이런 맥락도 좀 있었는데요. 사실 이 집게 손가락 논쟁을 둘러싼 게임 회사의 태도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정말 웃음도 안 나오는, 정말 뭐라고 해야 될까요? 분노? 혹은 실소? 대응 방식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더불어서 저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어떤 분위기를 보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조용한 백래시’가 일어났고 이런 부분들이 굉장히 가시화됐다고 생각하는데요. Y작가 성폭력 문제가 일어난 게 3년 전이고, 그것을 계기로 아트스페이스 풀이 유야무야 해산된 것이 2020년이죠. 이후 3년의 시간, 그리고 그 전에 있었던 페미니즘 열풍, 모든 미술관에서 페미니즘을 기치로 걸었던 그 열풍의 시기를 지나서, 지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예전의 모습이 반복되는 것들, 그리고 그 가해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조용히 목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Y작가 같은 경우에는 한 사진 갤러리에서 다시 기획자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갤러리 운영자가 ‘우정’ 운운을 했죠. 그렇게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열고 광고를 하는 것을 볼 때 양심과 뭐 이런 저런 걸 다 떠나서 ‘도대체 우리가 성폭력 문제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회의가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또 하나는 특히 사진계에서 이런 분위기가 굉장히 공고한 것 같은데요. 성희롱으로 해임된 사진 전공의 미대 교수 같은 경우에 본인이 활동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와의 친분을 자랑하고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전시해 주고 밀어주는 공간과 기관 큐레이터가 아름다운 페미니스트 캘린더를 만들고 민중, 생태, 페미니즘을 말할 때 저는 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회의감도 굉장히 많이 들고, 물론 모르고 같이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걸 항의를 해야 할지, 아니면 이거를 공론화를 해야 하는 건지 답이 없는 무력감을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사실 그러한 것들이 미술계 담론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예를 들자면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내가 이야기해서 굉장히 불편하게 되는 문제는 회피하는 거죠. 전시 주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생태, 에코페미니즘 이런 거고, 그다음 포스트휴먼, 탈식민 이런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죠. 그런 맥락들이 지금 여기에서의 어떤 현실과 연결되지 않은 채 굉장히 어떤 빛 좋은 말들로만 둥둥 떠다닌다는 느낌도 많이 들었고요. 그래서 생태 관련해서도 사실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비인간이라는 말과 반려종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먹고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대단한 자각을 하는 게 아니더라도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지 진짜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고민이 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들이 계속 전시장을 돌 때 그리고 이러한 개념과 담론이 굉장히 핫하게 유통될 때 굉장히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세계 끝의 버섯』은 굉장히 좋은 인사이트를 주는 훌륭한 책이죠. 그런데 이 책이 2023년에 한국 사회에서 번역이 돼서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구 한쪽에서는 1,800여 명이 죽어가고, 그중의 대부분이 어린이와 여성이라잖아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러 위기 속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 여전히 있는 계급, 이주민, 난민 같은 여러 문제 안에서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굉장히 복잡한 심경이 들거든요. 사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이미 미국에서 굉장히 많이 호응을 얻었고, 2018년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에서도 버섯이 많이 등장했던 것 같아요. 균사체, 버섯, 공동체, 기관학, 생태, 이런 것들이 많은 은유로서 떠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2018년인데, 2023년에 똑같이 다시 등장하는 걸 보면서 우리가 현실에 대해서 너무 생각하지 않고 어떤 개념이나 혹은 어떤 담론 같은 것들을 쫓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남웅: 앞에 말씀하신 전시들이나 저서들을 봤을 때 그냥 그려지는 풍경이 있어요. 이런 주제들을 주로 어디서 보느냐고 했을 때, 많은 경우 비엔날레거든요. 올해도 그렇지만 비엔날레를 가면서 제가 예상하는 어떤 그림들이 있어요. 기후정의, 전쟁, 인종, 젠더 등등이 있는데, 크게 벗어나는 경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이 김 빠짐과 지루함은 무엇일까? 이게 여기(비엔날레)에서만 주로 이야기하는 것인가, 이미 이렇게 다양성을 보여 주는 제한된 장으로서 비엔날레라는 프레임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비엔날레라는 한정된 프레임 안에서 다른 관점과 접근을 찾아 나가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넥슨 관련해서도 이런 사태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정말 허무맹랑한데 허무맹랑한 게 현실로 도래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진지하게 담론적인 것들을 계속 제시할 때, 이 현실과 저쪽의 예술의 간극은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비평적인 차원에서의 흥미로움이 있었는데 《2023 대구사진비엔날레》는 ‘다시, 사진으로’가 주제였잖아요. 그게 저에게는 거꾸로 신선했어요. 왜냐면 “다른 비엔날레들처럼 이렇게 가지 않겠다” 그러니까 “주제에 매체성이 묻히거나 주제를 지루하게 반복할 바에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딱 집중을 하겠다”고 취지를 이해했는데요. 너무 궁금해서 가 봤어요. 주제를 어떻게 소거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다는 게 솔직한 궁금함이었죠. 한데 주제가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죠. 기획은 형식을 이야기하고 사진의 기술적 속성을 이야기하는데 내용이랑 형식을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진이라는 매체와 기술의 키워드들을 경유하면서 이 형식을 어떻게 갱신하고 연출을 달리해 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유통하고 담론으로 만들어 냈는가?’ ‘그 과정 자체를 좀 보여 줘야 하지 않았을까?’라고 저는 기대를 했고, 종국에는 그것이 내용의 전형적인 재현이나 시각언어를 어떻게 해체하거나 다시 구축하는가를 보고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기존의 내용적인 소재들, 아까 말한 비엔날레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소재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 같은데, 구태여 회피하듯 형식으로만 ‘쇼부’를 보겠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점이 이상하고(?), 징후적인 방식으로 참신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정말 반복적으로 동시대의 담론들을 이야기하는데 이걸 담아내는 필드가 정해져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여기서의 전시는 시급함을 하나의 태도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 관성을 경계하기 위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매체와 사진 형식에 주목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전시가 기획되는 상황들, 그렇다면 지금의 예술이 어떻게 재현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저는 담론과 학제를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큐레토리얼에 관련한 이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관련해서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가 2022년 12월 코리아나미술관에서 기획을 해서 전시한 《땅, 호흡, 소리의 교란자: 포스트콜로니얼 미학》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해외와 국내에서 사회적 투쟁이나 지역을 지키고 살아가기 위한 시도들을 예술의 형식으로 어떻게 실천을 해 왔는지 탐색하고, 콜렉티브와 비슷한 방식으로 실천을 하는 일군의 조직들을 섭외해서 전시를 해요. 전시장에 가니까 작가님이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관객들에게 전시 설명을 해 주시더라고요. 여기서 감동을 하고 성의를 보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설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미술관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전시의 방식을 현장에서 투쟁의 방식과 어떻게 연결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한편으로는 (이따가도 계속해서 불평을 이야기하겠지만) 시장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잖아요.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회적인 현실이나 투쟁에 관련한 예술적 실천과 미술시장은 어떻게 서로 간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계속해서 짚어 낼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땅, 호흡, 소리의 교란자: 포스트콜로니얼 미학》,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2022) 전시 전경. ©리슨투더시티.

이진실: 현실과의 괴리에 있어서 저는 기금 탓을 하고 싶은 생각도 좀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미술의 생태계라는 것이 기획서를 1년 전쯤에 내고, 기금을 받아서 전시를 준비하고, 그 전시를 잘 열고, 정산을 하는 사이클로 돌아가는 한, 지금 전쟁이 나든 어쨌든지 간에 이걸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 방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술의 생태계 자체가 심하게 말하자면 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작가들한테 기금에 의지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실 이 사이클로만 미술을 생각했을 때 우리가 처할 수 있는 한계 같은 것들을 좀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조금 더 긴급한(emergent) 어떤 것들이 미술 안에서 작동하는 것을 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연숙: 생태 예술이라는 게 뭔가를 팔기 위한 라벨지를 붙이는 그런 일에 가까워졌을 수도 있죠. 예시를 들어 설명해 드리고 싶은데요.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전시이자 동명의 책 『플래닛 B: 기후 변화 그리고 새로운 숭고』입니다. 얼마 전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는데요. 숭고라는 것이 측량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느끼는 압도적인 감정으로 정의되는데, 이제 기후 변화를 다룬 예술과 같은, 지금 세계가 어떻게 멸망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예술들이 새로운 숭고를 주는 작업들로 자리 잡았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연결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최근에 미술관에서 기후 위기에 대한 전시를 할 때 반복되는 어떤 경향성을 발견했거든요. 기후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우리가 지구를 아끼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 미술관에 가벽을 설치하지 않고 그대로 콘크리트를 노출하는 트렌드가 있잖아요. 저는 그게 되게 싫더라고요. 서울에서만 본 게 아니라 요 몇 년 간 세계 각지의 여러 미술관에서 그렇게 하는 걸 봤어요. 기후 위기에 대한 전시를 하면 딱 그때만 낭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가벽 설치를 안 해요. 이게 약간 이상한 제스처인 거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이런 시대다”라는 것을 잠깐만 보여 주고 그 이후 전시에서는 하던 대로 그냥 하는 거죠. 왜 그런 식의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니콜라 부리오의 관점에도 마찬가지의 의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숭고다”라는 건 알겠는데, ‘그럼 그대로 두는 건가? 새로운 숭고인 채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도 기후 위기와 같은 주제를 새로운 트렌드나 아이템으로 다루지 않고,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이해하고 또 가능한 실천들을 모색하는 여러 작가들이 있죠. 2022년 말에 개관한 A.P.23이라는 공간이 서울 마포구에 있습니다. 생태, 여성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작업해 온 작가들의 아카이브를 전시하고 있어요. 그리고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이라는 콜렉티브가 있습니다. 여기는 열린 콜렉티브라서 1년에 한두 번씩 신입 회원을 받아요. 기후 위기와 관련된 시위를 조직하는 한편 ‘그 안에서 예술의 형태로 어떻게 우리의 메시지를 보여 줄 것인가?’라는 고민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집단이라서 소개를 하고 싶었어요.

퍼포먼스

이연숙: 다음 주제는 퍼포먼스입니다. 이건 2023년 한해 제가 퍼포먼스를 많이 봤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인데요. 차례대로 이야기해 보면, 작년 말(2022년 12월)에 차연서 작가의 〈모스키토라바쥬스(Mosquitolarvajuice)〉가 있었고, 지난 1월에 윈드밀에서 상연된 장영해 작가, 민혜인 작가의 〈블랙 마리아(Black Maria)〉가 있었어요. 10월에 미성장 모텔에서 딱 하루 전시된 팀 W/O F. (우프)의 기획전 《모텔전: 눈 뜨고 꾸는 꿈》이 있습니다. 이게 제가 1년 사이에 와르르 봤던 큰 규모의 퍼포먼스들인데요. 특히 여성/퀴어 작가들이 퍼포먼스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는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모텔전》 같은 경우는 딱 하루만 했고, 관객들에게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찍는 등의 어떤 기록 행위도 허용하지 않았는데요. 모텔의 각 방을 참여 작가들의 전시 공간으로 쓰기는 했지만 이런 점이 제가 이 전시를 해프닝, 더 넓게는 퍼포먼스로 읽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게 되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미술이 상품으로 또는 물질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들이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지면서 ‘우리는 작업이 상품으로 통용되고 유통되는 가시성의 세계에 진입하지 않겠다’는 자세이기도 할 거고요. 또 한편으로는 아까 진실 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프로덕션 크기가 굉장히 커지는 것은 결국 기금의 문제와 연결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돼요. 뒤에서 이야기 할 예정이지만 《모텔전》의 경우는 기금이 없이 진행됐지만요. 어쨌든 세 전시 모두 저는 매우 재미있게 봤는데요. 이 전시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가시성을 통해 비가시성에 접근하는, 여성/퀴어 작가들의 태도라는 주제를 공통적으로 보여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컨대 ‘저장되고 기록되고 계속해서 회자되는 것보다도 일회적인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차라리 사라지는 편을 택하겠다’는 안타고니즘적인 태도랄까요. 저는 이런 태도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러면서도 퍼포먼스가 최근 눈에 많이 띈 것은 결국 ‘다원예술이라고 하는 기금의 파이가 커진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모텔전: 눈 뜨고 꾸는 꿈》(홍대 미성장, 2023) 포스터. ©팀 W/O F.

이진실: 저는 그중에 《모텔전》을 못 봤어요. 이야기하신 것처럼 그 퍼포먼스만이 줄 수 있는 현장성, 생생한 감각 등이 굉장히 흥미로웠을 것 같아요. 사실 《모텔전》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 이유가 기록도 못하게 하고 그날 딱 하루만 한다는 거였죠. 젊은 작가들, 이제 졸업한 혹은 한 10년 안의 연차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들의 퍼포먼스를 볼 때, 과거의 퍼포먼스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는데, 일단은 매체 실험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단순히 우리가 보통 퍼포먼스라고 하면 생각하는 해프닝적인 성격, 돌발적인 것을 특징으로 간주했는데, 일시성이 아니라 사실 너무나 잘 연출된 것들 그리고 다채널 영상이 계속 송출되는 듯 다시점의 어떤 상황들이 펼쳐지는 것이죠. 이 감각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것들도 굉장히 재밌긴 한데, 조금 더 욕심을 내는 퍼포먼스들도 본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여러 유명한 레퍼런스를 자기 작업에 끌어들이는 경우나 영상 매체로 다시 선보이기 위해 카메라를 의식한 퍼포먼스들이 있었어요. 물론 그런 경우엔 그 작가가 가진 여러 가지 가능성을 또 다르게 보여 줄 수 있고 자기 실험의 한 방편이기도 할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원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 Multi-use)처럼 보이기도 해요. 퍼포먼스라는 게 굉장히 큰 돈이 필요하잖아요. 사실 전시를 하는 것도 그렇긴 하지만 그 하루의 현장에 굉장히 많은 공임이 들어간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또 영상으로 남겨서 다른 작업으로 전시를 하고 또 거기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설치라든지, 물질적인 작업들을 달리 또 선보이기도 하면서 계속 재생산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같이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실 원소스 멀티유즈라는 것은 굉장히 효율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인데, 물론 작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런 계획성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퍼포먼스에서 뭘 읽을 수 있나?’ 혹은 ‘공감할 수 있나?’ ‘뭘 가져갈 수 있나?’ 같은 문제를 생각했을 때 현장의 감흥 같은 부분들이 갈수록 덜해지는 것 같다는, 이런 꼰대 같은 생각도 좀 들었습니다.

이연숙: 조금 더 이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앞서 말씀드렸듯 《모텔전》 같은 경우에는 기금을 받아서 했던 전시는 아니고, 입장객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방식으로 작가들 나름대로 꾸렸던 것 같아요. 이 전시를 보면서 퀴어 예술에서 ‘퍼포먼스’의 중요성과 ‘방’이라는 공간, 굉장히 사적인 만남들이 이루어지는 그런 작은 방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했어요. 《모텔전》은 미성장이라는 홍대에 있는 모텔을 하루 대여해서 대부분의 방을 참여 작가들 각각의 전시 공간으로 꾸린 그런 전시입니다. 총 10명(팀)의 작가들(곽예인, 김보람, 성재윤, 콜렉티브 야광, 재훈, 차연서, 홍지영, 황선미, 황아림, 황예지)마다 회화,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각기 다른 매체를 사용했고요. 당연하지만 유명한 미술사적 레퍼런스인 《여성의 집》, 즉 주디 시카고(Judy Chicago)와 미리엄 샤피로(Miriam Schapiro)가 1970년대에 기획한 전시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방이 굉장히 중요한 공간으로 사용이 됐거든요. 18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각자의 방이 전부 다 있었다고 해요. 사적 공간을 전시 공간이라는 공적 공간으로 옮겨 오면서 발생하는 정치적, 미학적 효과를 겨냥하고 있는 거죠. 요컨대 전시장에 놓였다면 상상하지 못했을 작가의 사적인 맥락과 신체적 움직임들이,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인 방에 놓이면서 훨씬 더 구체적으로 감각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성의 집》의 방과 《모텔전》의 방은 달라요. 후자는 모텔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조건 삼고 있으니까요.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모텔에서의 만남은 보통 일회적이고, 익명적이고, 소위 일탈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지죠.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성적 관행의 바깥에 위치하는 행위들이 모여들고 또 숨어들 수 있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맥락에서 어둡고 좁은 미성장의 공간은 또한 클럽을 연상시키기도 했어요. 클럽이라는 공간이 퀴어 예술에서 중요한 레퍼런스인 까닭은 그 안에서만 가능한 친밀성의 경험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 경험은 이름이 있는, 개별적인 개인들의 만남이 아니라 익명적인 몸의 마주침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일상적이고 비인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깥 세상과 다른 규칙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단지 현장에서 분위기와 리듬을 공유할 뿐, 모인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없다는 점 또한 클럽을 일시적인 공동체로서 이해할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클럽과 시위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클럽이든 시위든 몸들이 가진 힘이 굉장히 중요하니까요. 기존 사회 규범에서는 통제되고 억압되어야 하는 힘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런 것들 때문에 클럽이 퀴어 예술은 물론이고 정치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는데요.

저는 2022년에 봤던 다른 전시이자 퍼포먼스인 콜렉티브 야광의 《윤활유: Lubricant》라는 전시도 생각이 났어요. 여기서도 윈드밀이라는 공간 전체를 마치 레즈비언 클럽처럼 사용했어요. 관객들이 서로를 마치 레즈비언 클럽에 입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의식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조성된 거죠. 딴 이야기지만, 퀴어 예술에 있어서 전자 음악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듭니다. 이걸 중심으로 퀴어 예술의 작은 역사를 쓰는 작업도 재밌을 것 같아요. 오인환 작가님 같은 경우에도 트랜스 음악을 사용했던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고, 정은영 작가님 또한 테크노 음악을 적극 끌어들인 작업을 하셨죠. 또 이강승 작가님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에 참여하고 계신데, 거기서도 전자 음악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해요. 콜렉티브 야광의 전시에서도 디제잉이 전시의 일부로 들어와 있었고요. 제가 말하고 싶은 전자 음악의 특징은 곡에 가사도 클라이맥스도 없다는 점인데요. 계속해서 특정한 리듬 속으로 관객의 신체를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예외적인 시간성, 퀴어한 시간성을 발생시킨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지점들이 굉장히 흥미롭고 또 중요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윤활유: Lubricant》(윈드밀, 2022), 퍼포먼스 공연 전경. 사진: 홍지영. ©야광.

남웅: 원소스 멀티 유즈는 기금과 관련해서 어떤 성과를 내야 되고 자신의 커리어를 계속해서 확장해 가야 하기 때문에 나오는, 의식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있을 것 같고요. 그랬을 때 저는 영리한 작가들이라면 그 매체들에 대한 이해나 숙련도 같은 게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퍼포먼스 같은 걸 구성할 때 ‘이것을 기록하느냐, 안 하느냐’나 아니면 ‘이 영상을 유통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그 구성이 달라질 수 있잖아요. 그리고 몸의 호흡이나 몸의 구도, 아니면 드러내는 방식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잘 고려하는 게 중요할 것 같고 그래서 그 매체에 최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체에 재현되는 몸의 리듬이나 아니면 그런 감각들에 대해서 새롭게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하나가 있어요.

또 하나는 리타 님이 언급하신 퀴어 퍼포먼스들 관련해서, 원소스 멀티 유즈와는 또 다른, 한 번 퍼포먼스를 하고 장렬하게 그냥 탁 끊어버리는 것도 의식적인 선택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해석의 여지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퀴어 문화,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도 재현이 편향적으로 수행되거나 한쪽으로 과대 대표되어 해석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들이 한편에서는 퀴어 예술에 대해 과잉을 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부재와 결핍을 계속 감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리타 님의 『진격하는 저급들』에도 레즈비언 예술에 대해서 “커뮤니티가 너무 빈약하다” “재현의 소스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야광이나 《모텔전》에 접근을 하신 것 같은데, 한편 저는 이 작가분들도 의식적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없다’라는 부재 감각을 가지고 계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 번에 장렬하게 확 해 버리고 그냥 딱 끊어버리자’라는 선택이 있었을 것 같아요. 또 여기에는 커뮤니티에 대한 불신이나, 결핍이 열패감까지 갔을지는 또 모르겠지만요. 그런 것들을 본인들이 어떻게 읽어 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궁금했어요.

또 하나는 사실 커뮤니티라고 하는 게, 저희 이전에는 게토(ghetto)라고도 불렀고, 지금은 공동체성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그만큼 기록되는 인프라가 없고 역사를 이제서야 발굴을 해 내는 게 근래의 작업들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아까 그렇게 영상으로 남기는 것들이 또 하나의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랬을 때 저는 기록하기 너무 어려운 상황에서 전례를 만들거나 아니면 ‘이런 것이 있었다’고 기록을 남기면서 전달을 하는 것에 커뮤니티의 역할이나 책임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게 돼요. 단절이나 부재로부터 급진적인 재현이나 존재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무엇을 침묵시키고 단절시킬지, 반대로 어떤 것들을 전래하거나 배제할지에 대해 책임을 묻고 기록하거나 기록하지 않은/못한 것들에 대한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이런 사례나 의견을 말씀해 주실 분이 이 자리에 계실지 모르겠어요. 계시면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무튼 그런 거에 대해서는 미술씬 안에서 좀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퀴어 미술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면 한쪽으로는 역사에 대한 결핍이나 전례를 찾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단절하려 했다면, 또 한쪽에서는 이 안에서 사람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예술인적인 면모 등을 부각하는 작품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연극연습5. 번안 연습 - 로미오와 줄리엣 and more〉(LG아트센터 서울, 2023) 공연 전경. 사진: 모지웅. © LG아트센터, 연극연습 프로젝트.

그래서 그냥 올해 봤던 것들, 보고 싶었던 것들을 이야기할게요. 그중에 고주영 기획·제작자가 계속 만들어 오고 있는 ‘연극연습’ 시리즈가 있는데, 제가 올해 두 편을 봤어요. 새로 초연을 한 게 〈연극연습5. 번안 연습 - 로미오와 줄리엣 and more〉이고, 〈연극연습3. 극작연습 - 물고기로 죽기〉는 2021년도에 초연을 하고 재공연을 했어요. 이 작품들에서는 작품들마다 하나의 원탑격의 인물들이 계속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로미오와 줄리엣 and more〉에서는 드래그 퀸(Drag Queen)도 하고 안무도 하시는 모어(More/毛魚), 모지민 분이 주역으로 무대에 오르시고, 〈물고기로 죽기〉는 김비 님이라고 소설 쓰시는 트랜스젠더 작가님이 극작을 하셔서 무대까지 오르는 구조예요. 여기에 나오는 분들이 중장년의 퀴어들이고, 퀴어씬 안에서도 ‘같이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 어떻게 아름답게 자연사 할 것인지?’ 같은 고민이 많아지면서 인물들에 대한 발굴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도 그런 어른들을 찾아다니는 시도들이 있잖아요. 최근에 〈어른 김장하〉 같은 영화도 그렇고, 그런 것들과 결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 and more〉 같은 경우에는 모어 님이 그렇게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에요. 아직 쉰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같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안무가들인 거죠. 이들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본인이 하드하게 몸을 계속 써야 되는데, 숨이 가빠 오고, 체력의 차이를 느끼고, 감각도 다르다는 것을 느껴서 자존감이 조금씩 하락하고 있을 때, 이 연출가가 “당신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힘을 불어넣어 줬다고 해요. 그 과정들을 무대에서는 보기 어려웠지만, 부수적인 인터뷰에서는 볼 수 있었어요. 연극 〈곡비〉에는 1세대 트렌스젠더 여성인 색자라는 분이 출연하세요. 이전에도 무대에도 서셨는데, 이 연극 무대를 통해서 본인한테 맞는 톤이나 배역 같은 거를 극으로 풀어내는 거예요. 권아람 감독의 영화 〈홈그라운드〉에는 소위 ‘바지씨’라고 불리는 ‘명우형’이라는 분이 출연하세요.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20세기 중반쯤에 명동에서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는 관계들, 커뮤니티성 같은 것을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귓가에 남는 것이 ‘선배님’, ‘어르신’ 의 대우와 의전이라는 생각이었어요. 그것이 기존 남성 연대와 같은 뉘앙스를 동경하고 반복하고 체화하면서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일군의 퀴어들을 재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관계 자체를 퀴어적으로 수행하는 지점을 재조명하는 건지는 비평의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이성애 체제에 기생하듯 주변화되듯 살아온 성소수자 존재론의 숙명적인 중층성이기도 한데요. 봉합될 수 없는 부분들은 먼저 언급한 일회적인 무대들을 계속 떠올리고 비교하게 되는 거죠. 전래와 단절이라든가, 계보와 전복의 구도는 적대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랬을 때 단절적이면서 반짝하는 섬광 같은 무대들이 있는가 하면 여기에선 계속해서 역사에 하나의 주춧돌을 세우려고 하는 모습들이 보여서 서로 간의 교섭이나 서로 간의 변칙적인 관계성을 좀 더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연숙: 〈홈그라운드〉라는 영화는 얼마 전 극장 개봉을 했어요. 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도 구매하실 수 있고요. 저는 이전에 권아람 감독님과 극장 개봉 전 GV를 가지며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거기서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요. 주인공인 ‘명우형’을 큰 어른, 큰 선배 삼아서 국내 여성 퀴어 또는 레즈비언의 역사를 세워 보려는 시도는 좋아요. 우리도 역사가 있다는 거죠. 굉장히 환영해야 마땅할 시도겠지만, 동시에 이 역사가 매끄럽게 봉합된 역사라는 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그것으로부터 누락된 모순과 충돌, 갈등과 불화의 역사는 또 어디로 가는가. 분명 좋기만 하진 않았을 거거든요. 제게 〈홈그라운드〉는 너무 유토피아적으로, 향수 어린 방식으로 여성 퀴어 공간의 과거를 윤색한 것처럼 보였어요. 과거를 안정화하거나 낭만화하지 않고 어떻게 퀴어는 물론이고 소수자들의 삶과 지식을 공동화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더불어, 마찬가지로 여성 퀴어 선배를 화자로 내세운 이영 감독의 〈불온한 당신〉과 〈홈그라운드〉를 언젠가 누군가가 비교해서 다루는 걸 보고 싶네요.

퀴어, 소수자 재현에 대한 다른 예시들을 좀 보겠습니다. 만화책 『지영』은 작년에 매우 인상 깊게 본 작품인데요. 이런 작업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이번 대화에서 이야기 한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반(反)공동체’로 대답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유하고 단독적으로 구는 방식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어떤 공동체를 상상하게 한다고 할까요. 마찬가지로 유성원 작가의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은 일반적으로 반사회적이라고 말해지는 나쁜 정동들, 말하자면 퀴어한 정동들을 활성화하는 작품이에요. 수치, 우울, 분노, 슬픔 이런 것들을 굉장히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고요. 다시 『지영』으로 돌아가자면, 이 작품은 처음 공개가 됐을 때 작가가 성노동 경험을 일인칭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성노동자로서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을 묘사, 재현하는 작품은 아니에요. 지영이라는 사람으로서 말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지영』은 자신의 안과 밖을 동시에 의식하면서 말하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온전히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무엇보다 유머를 통해 보여 주는 작품이에요. 한번 꼭 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예시로 가지고 와 봤어요.

마지막으로 12월 17일에 〈Fly in Power〉라는 영화를 상영하는데요.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에서 주최한 〈2023 성노동자 추모행동〉의 일환입니다. 저는 지금 이걸 아직 보지도 못하고 가지고 왔어요. 지금까지 제가 소개해 드린 작품들은 아마도 백화점은 물론이고 미술관에서도 보기 어려운, 말하자면 이것들로부터 부정성을 희석하거나 추출할 수 없는 그런 작품들인 것 같아요. 저는 그 부정성을 일종의 정치적인 계기로 이해하고 있고요. 앞으로 이런 작품들을 더 많이 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서울아트위크

남웅: 저희가 사전 회의 때 앞의 주제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기금 이야기가 유령처럼 계속 남아있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우리가 정말 불만 폭주 같은 느낌이다. 그냥 터뜨려 볼까?” 해서 나온 건데 빠질 수 없겠죠. 서울아트위크 이야기를 하면서 다같이 탄식의 시간을 가졌어요. 다들 아실 것 같아요. 경험을 하셨을 것 같고, 키아프(Kiaf Seoul)랑 프리즈(Frieze Seoul)가 열리면서 서울시에서 아트위크를 정하고 기간을 거기에 맞춰서, 거의 모든 미술 기관들이 여기에 행사를 집중하고 전시 기획도 했잖아요. 다들 바쁘게 돌아다니고 어디서든 각자 영역에서 텐션이 높았던 기억도 나고요. 저도 일군의 작가나 기관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에게 이야기를 듣는데, 미술에도 기관에 부합하는 사업과 행정이 있잖아요. 아트 레지던시도 당연히 그렇고요. 그것을 미술시장의 비즈니스랑 어느 정도는 구분하는 게 상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느 순간 이게 깨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를테면 초지역적이고 초국가적인 행사니까 그림이 만들어지잖아요.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가 준비 중이었던 상황에서 프리즈 시기에 맞춰서 행사를 먼저 하거나, 레지던시에서 작가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프리즈 VIP를 대상으로 셔틀버스를 돌리는 등의 이벤트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보면서 이들의 창작이 이미 자본의 논리에 그렇게 어느 정도 휘말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들에게 자율적인 창작권을 보장한다는 취지가 중요하지만 이게 정말 어려워진 상황이라는 걸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걸 왜 기관이 주도적으로 진행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던 거죠. 그래서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는 여기서는 이야기하기가 조금 곤란할 것 같고요.

레지던시 이슈가 미술시장이라는 큰 흐름의 일부로 올해 많이 이야기됐던 것 같아요. 난지미술창작센터에서도 그런 자리를 한 번 가졌던 걸로 알고 있고, 인천아트플랫폼은 아예 레지던시 사업을 정리한다고 하잖아요. 이런 수순으로 가는구나 생각했죠. “대중문화 공간을 만든다”고 해서 다들 지켜보고 있었을 때 레지던시를 정리하고 스타벅스를 만든다는 뉴스가 뜬 거예요. 그랬을 때 사람들의 탄식, 분노, 그리고 레지던시를 없애면서까지 들어오는 대중 공간이 스타벅스라고 한다면, 이 대중들은 어떤 대중들을 말하는 걸까, 지자체에서 말하는 시민이나 대중의 기준은 그냥 소비자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거죠. 그랬을 때 아트위크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할 거고 프리즈는 당분간 있을 거니까, 매년 그즈음이면 집중이 계속될 거라는 생각은 드는데,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적인 방패는 좀 만들어 놔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앞에서 똥을 맞은 이 느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어떤 파도가 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같이 고민을 나눠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여기 계신 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냈어요.

이진실: 별로 덧붙일 건 없는데, 인천아트플랫폼도 그렇고, 금천예술공장도 문제가 제기되었듯이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처리 방식이 있었거든요. 레지던시뿐 아니라 서울과 경기 지역만을 한정해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지만 미술 공공기관들의 공공성이 거의 붕괴되고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게 완전히 행정적인 차원도 아니고, 완전히 자본적인 논리를 따라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어떻게 예술인들의 기본적인 창작 조건들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한데, 이제는 레지던시라는 제도가 가지고 있는 공공성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지자체에서 이 공간을 다르게 쓰겠다고 하면 그냥 뺏기는 것이 맞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의 레지던시 예술가들이 투쟁해 봤자 혜택은 다 그다음에 들어 온 레지던시의 예술가들이 얻는다는 현실적인 한계도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이에 대해서 누구도 같이 이야기해 보지 못하거나 우리의 모든 조건들이 붕괴해 가는 이 지점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연숙: 아까 탄식 이야기하셨는데, 저도 서울아트위크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감정이고요. 감정 이야기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프리즈가 5년 계약이잖아요. 그럼 계약이 끝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항상 작가인 지인들은 “네가 왜 예술가들 걱정을 하냐?” “걱정하지 마라. 네 걱정이나 해라” 또는 “어차피 작가들은 네 말 안 듣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게 5년 계약인 만큼 젊은 예술가들이 프리즈를 ‘목표’로 삼거나, 그와 근접한 어떤 종류의 상업적인 성공 등등 이런 종류의 욕망들을 키울 수 있는데, 그 이후에는 ‘없다’는 거거든요. 다시 계약 연장해야 된다는 말이 전혀 아니라요. 이런 종류의 욕망들에 길들여졌을 때 우리가 대안이라든지, 다른 상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들은 다 우리를 길들이는 것이에요. 가속주의와 같은 아이디어들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욕망이 한번 커지고 난 뒤에는 계속 커진다는 거죠.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감속주의 같은 이야기를 하고는 하지만 쉬운 길은 아니라는 거죠. 예를 들어서 내가 엄청 큰 기관에서 전시를 하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다 포기하고 갑자기 칩거한다거나, 어디 다른 지역으로 간다거나 이렇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때때로 커리어를 쌓아 가고 있는 작가들이 프리즈 기간 중에 어렵게 전시를 계획하거나, 혹은 프리즈의 비공식적인 부대 프로그램처럼 여러 기획을 준비하는 것을 보는데, 이런 것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래요. “왜 굳이 프리즈에 의존해, 혹은 그것에 반해 다른 종류의 액션을 해야 할까?” “왜 프리즈를 중심으로 1년을 편성해야 할까?” 제가 농담으로 계속 “9월을 없애야 한다” 또는 “9월에 모두가 파업을 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일단 많은 이들에게 프리즈란 기회거든요. 잠재적인 기회라고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많은 프로그램을 그 시기에 배치하고, 그러면 해당 시기에 전시가 몰려 굉장히 밀집도가 높아져요. 같은 인력들이 해당 시기에 집중적으로 섭외되고 그만큼 소진됩니다. 개개인마다 이걸 느끼는 방식이 다르고 또 누군가는 바쁘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정말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 사람들이 다 예술계 동료거든요. 지쳐 나가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는가, 거기서 나아가 어떻게 다 같이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이렇게 해야 할까?” 아트위크 기간 내내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좋았던 것들

이진실: 지금까지 저희가 보기 싫은 것, 보고 싶지 않았던 것 이런 이야기를 쭉 했는데 개중에 막 흥미롭게 보았던 것, 응원의 마음도 들고, 감동적인 것도 많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연륜을 가지고 오랜 시간 작업을 해 온 여성 작가님들의 큰 개인전에 경외감도 들고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아요. 김윤신 작가님도 그렇고, 노원희 작가님도 그렇고요. 특히 하이디 부허(Heidi Bucher) 같은 경우에는 몰랐던 작가인데 한 20~30년 동안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데 계속 작업을 해 왔고, 지금에 와서 2010년부터 다시 재조명되기 시작하는 작가더라고요. 그래서 말하자면 ‘희망’ 혹은 ‘외로워도 슬퍼도 잘 해보자, 여러분들 계속 해봅시다’ 이런 생각이 드는 전시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023) 전시 전경. 사진: 박명래. ⓒ서울시립미술관.
《노원희: 거기 계셨군요》(아르코미술관, 2023) 전시 전경. 사진: 홍철기. ⓒ아르코미술관.

이렇게 많은 경력과 연륜을 가진 작가뿐만 아니라 계속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작업과 방법론을 개척해 나가는 전시, 작업은 2022~2023년 사이에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 기억에 남았던 거는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 랩’이 여전히 워크숍, 연구 모임, 강연 이런 것들을 계속 조직해 가면서 또 작년과 올해에는 부산과 광주 지역에서도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부분들이 굉장히 인상 깊었고, 또 언메이크 랩의 활동들, 이번에 포킹룸 2023도 굉장히 재미있었거든요. 그래서 계속 여러 연구자와 기술과 예술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도 굉장히 좋았어요. 또 개인적으로는 류한솔 개인전, 리단 개인전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와 정신병, 신체성, 감각 이런 것들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계속 진화시켜 나가면서 탐색해 보는 강렬한 전시들로서 인상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아니고 작년 말이긴 하지만 제58회 미국 카네기 인터내셔널(The 58th Carnegie International: Is it morning for you yet?)에 김순기, 양유연, 이미래 이 세 작가들이 초청되었던 것도, 국내에서 더 많이 소개되고 같이 공유되고 이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래 작가의 경우에는 프랑크푸르트 MMK (MMK Frankfurt)뉴욕 뉴뮤지엄(New Museum)에서 개인전을 연 것까지도 굉장히 고무적인 부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고무적인 것과는 별도로 아까 우리가 ‘제도 안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제도 바깥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을 했었는데, 여전히 이 울타리가 있기에 또 재미있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울타리 바깥에서 뒷골목에서 꽁냥꽁냥 노는 재밌는 행사가 계속되는 일이 재미와 희망이 아닌가 생각해요. 리타 님이 하고 계시는 〈킬타임트래시(killtimetrash)〉 같이 뒹굴뒹굴거리면서 연말을 같이 보내는 퀴어 예술인들의 모임이라든지, 아까 보여 주신 『지영』 만화 북토크 같은 경우에도 그 친구들이 가진 사랑의 에너지 그리고 어머님이 보여 주신 태도 이런 것들이 정말 새로운 관계성을 상상하게 하고, 뭐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예술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작은 이벤트들이 계속 많이,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웅: 악전고투를 해 나가는 사람들, 기금에 상당히 의존하는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궤적을 만들어 가는 시도들에 눈길을 두는 것 같아요. 그게 서로 간의 네트워크를 한시적으로 만드는 것일 수 있고, 아니면 홀로 꾸역꾸역 계속 해 나가는 방식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앞으로 미래에 누군가가 그것을 해석해 주리라는 기대를 품고서 해 나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 주변에 헤매면서 길을 찾고 있는 작가들이 떠올랐어요. 가령 사진 작업을 하는 양승욱 작가는 저와 또래인 퀴어 작가인데, 예쁜 말보다는 날 선 이야기를 더 많이 해 왔어요. 제가 알기로는 이분이 레지던시나 기금에 대한 경험은 없는 걸로 아는데, 10년 넘는 기간의 사진 작업을 정리해서 사진집을 만드셨더라고요. 날아가기 쉬운 시간들일 텐데, 작가가 이걸 정리하는 방식이 평소 본인의 작업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분이 인형을 게이 찜질방이나 게이 DVD방, 예전에 크루징을 했던 후미진 공원을 배경 삼고 쫘르르 배치하여 촬영하는 사진 작업을 하시거든요. 사진의 방법론뿐만 아니라 이것을 출판의 과정으로까지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어 낸 것에 대해서는 조명이 필요하겠다, 작가의 시간과 기록에 대한 작업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승욱 사진집 『사물의 기억법: TOYS』 (인공위성82, 2023). 사진: 박재영. ⓒ양승욱.

또 하나는 조각을 하는 이소정이라는 여성 작가님이에요. 이분도 커리어가 살짝 끊겼던 분이에요. 조각을 쭉 하시다가 결혼을 하고 생업을 하시다가 다시 조각을 시작했는데, 미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본인의 몸에 천착한 작업을 하세요. 근래에 방송 프로그램 ‘스우파(스트릿 우먼 파이터, Street Woman Fighter)’에 매료가 되어서 비보잉 여성들의 몸을 자신의 몸에 포개서 덤블링하는 여자들의 몸을 3D 펜이나 캐스팅의 방식으로 조형하는데, 몸의 외피나 내피의 형식적인 부분을 본인의 몸, 생계나 생존에 걸치면서도 포획되지 않는 몸의 문제와 결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점에 관심이 가요. 제 이슈이기도 해서인지 모르지만, 저는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작가들을 만나면 당신은 전업 작가가 아닌데 뭐를 해 먹고 사냐고 계속 묻거든요. 답으로 듣는 직종들이 다양해요. 저는 그런 것도 누가 좀 조사를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소정 개인전 《Keep it up》(Hall1, 2023) 전시 전경. 사진: 김진솔. ⓒ이소정.

아까도 기획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했었는데, 장애예술 이야기를 했을 때 사실 기금이나 제도에 대한 수정도 필요하겠지만 기획에 대한 상상력도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장애예술이라고 했을 때 등록 장애인처럼 보이는 일군의 사람들만 섭외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 담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서 작가들을 어떻게 매칭을 시키고 어떻게 연결을 지어서 그림을 만들어 볼 것인가를 좀 과감하게 상상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기관에서 장애 접근권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지만, 장애와 비장애 접근권을 비평적으로 작업의 형식으로 고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고요. 사회운동과 예술이 접점이 있더라도 각자의 형식과 방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 하나 더 소개하고 싶은 전시는, 제가 평론 작업했던 전시이기도 한데, 아트센터 예술의시간에서 했던 《오프-타임(OFF-TIME)》이라는 전시예요. 6월에 했던 전시인데, ‘지금의 미술 씬에서 어떻게 작가들이 전시를 하는가’ ‘작가들이 지금을 어떻게 보고 자기 생존과 작업을 모색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 하는 전시였어요. 기획이 흥미로웠던 점은, 기금에 맞춘 전시 기획의 그림을 유령처럼 놔두면서 정작 전시장에는 재료들만 쌓아 놓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방식의 작업들을 해 나가는, 계속 반복을 하거나 미끄러지거나, 그래서 이 위기를 어떻게 재현하고 그 위기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위치는 어디인지를 계속 감각하게 만드는 전시였죠. 금융자본이나 기후 위기, 기금 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의식하면서도 담론이랑 현실을 교란하면서 자기 주도권을 찾기 위한 긴장을 잃지 않는 전시와 작업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프-타임(OFF-TIME)》(예술의시간, 2023) 전시 전경. 사진: 홍철기. ⓒ유은순.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자면, 말하고 보니 마지막 시간을 홍보로 채우는 것 같지만, 아까도 우리가 이제 정면에서 똥을 맞기 위해서, 그래도 제대로 멋지게 맞기 위해서는 우리한테 어떤 방패가 필요할까 이런 이야기를 살짝 했는데요. 저는 부업 같은 본업으로 인권활동을 하고 있어요. 특히 HIV/AIDS 인권운동에 품을 많이 들여왔는데, HIV/AIDS와 관련한 단행본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어요. 특히 HIV/AIDS 운동이라고 하면 미국의 1980년대 미술이라든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도 많이 결부가 되는 사건이고 하나의 역사적인 포인트이기도 한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이야기 되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2021년에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가 쓴 『애도와 투쟁』이라는 책이 번역 돼서 많이 읽히게 됐고, 사회운동 안에서는 더 케어 콜렉티브(The Care Collective)라고 영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쓴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이라는 책이 곧장 번역되어서 돌봄 담론으로 많이 언급이 됐거든요. 최근에는 서보경이라는 인류학자이자 에이즈 운동을 하는 분이 『휘말린 날들』이라는 책을 썼어요. 인류학의 관점에서 에이즈 운동을 어떻게 같이 해 왔는가, 앞에 선 이들이 어떻게 휘말린 상황에서 삶을 만들어 냈는가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이것이 지금 동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나 세계를 보는 관점을 보여 준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금 더 소개를 드리면 ‘휘말린’이라는 단어는 ‘휘다’와 ‘말리다’라는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의 중동태입니다. 저자는 “이 안에서 던져진 내가 어떻게 나의 길을 만들어 갈 것인가?”라는 포인트를 이야기하면서 정말 오만 군데의 학제들을 다 끌어와서 책을 썼는데, 저는 그게 어떤 지점에서는 미술 씬 안에서도 드러나지 못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발굴하거나 연결 짓는 방법론과 태도를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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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민, 「최소한의 윤리: 비평가의 자세에 대하여」, 『시각과 언어2』(파주:열화당, 1985), 86. 

  2. 최민, 「최소한의 윤리」, 86. 

  3. 최민, 「최소한의 윤리」, 98. 

  4. 최민, 「최소한의 윤리」,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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