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프로듀서 중 하나, 그리고 소셜 마이너리티와 예술 리서치

고주영
고주영은 공연예술 독립기획자이다. 현재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규범에 대해 지속적인 질문 Question 을 던지고, 그 범주에서 벗어난 이상한 Queer 존재들의 삶을 공연을 통해 응시하고 함께 걷는 〈플랜Q 프로젝트〉(극단 북새통과의 협업, 2019~), 연극의 확장과 새로운 연극의 발생을 시도하는 연극함수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등을 기획·제작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예술계, 프로듀서로서의 시작

사람과 삶의 이야기로써 무대를 움직이게 하는 고주영 공연기획자를 2022년 12월 12일 온라인으로 인터뷰했습니다. 예술과 세상 속에서 그가 만들어 온 제작의 경로는 프로듀서의 역할과 정의를 다양하고도 비평적으로 분화시킵니다.

김진주(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세마 코랄 기획/편집): 고주영 PD(프로듀서)님께서 기획하신 공연들은 예술 바깥에서 태어났으나 예술 안으로, 예술의 눈동자를 꿰뚫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이런 점은 곧 진행하실 리서치 주제인 ‘사회적 소수자와 예술’과도 굉장히 부합하고요. 소수자 목소리는 늘 예술 바깥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고 PD님께서는 일전에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도 근무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예술행정가가 기획자가 된 셈인데요. 예술에서 행정이 필수적이지만, 한편, 행정 일은 예술과 굉장히 다른 일이기도 합니다. 다른 경험으로 그렇게 시작하셔서 이렇게 굵직한 공연을 많이 만들어 보시고. 수상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젊은연극상(2021) 후보에도 오르셨고요. 그래서 왠지 고 PD님과의 이야기를 이것부터 시작하면 다른 미술인들한테도 용기가 될 것 같은 거예요.

고주영(공연예술 프로듀서): 사실은 기획자로 먼저 시작을 했어요. 기획자라고 해서 지금처럼 제 기획을 하는 건 아니었고 공연예술 축제의 기획팀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독립예술제라고 불리던 서울프린지 출신이거든요. 그곳의 2기, 2년 차에 사무국에서 일을 했어요. 그리고 몇몇 공연예술축제에서 일을 하다가 일본에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전혀 예술과 상관없는 이유로 갔어요. 일본에서 3년 정도 지내다가 한국에 와서 일한 곳이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IF)』였어요. 『이프』가 이제 막 전성기를 거의 지나고 들어가서 마지막 호까지 내고 그곳을 나왔어요. 잡지 취재, 편집일을 거들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기자로 입사를 한 건 아니었고요, 페미니즘 행사 기획으로 입사해서 ‘안티미스코리아페스티벌’ 홍보로 시작해 ‘안티포르노페스티벌’, ‘여성전용파티―피도 눈물도 없는 밤’ 같은 행사를 기획하다가 예술경영지원센터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저에게는 예술 행정이 오히려 낯설었어요. 기관에서, 특히 공공기관에서 일을 한다는 게 무척 낯설었는데, 어쨌건 그곳에서 꼬박 6년을 넘게 일했어요. 일적으로 가장 많이 성장해야 하는 시기에 저는 행정 일을 한 거죠. 그리고 2012년에 그곳에서 퇴사를 함과 동시에 독립 기획자가 되었어요.

『이프』에서 일하며 여성문화행사의 참여예술팀을 섭외하긴 했지만, 예술계에 속해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럴 때 예술계에서 일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으니 바로 (예술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전에 축제에서 일할 때는 예술은 어렵기도 했고, ‘예술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몰랐고, 내가 꼭 예술을 해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는데, 오히려 바깥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예술계가 정말 뭔지, 예술이 정말 뭔지 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때마침 제안을 받았던 거죠.

김진주: 고 PD님이 예술기관에서 처음 일한 이유에는 조직, 행정, 이런 것보다는 예술이 더 크게 작용했던 거군요.

고주영: 당시 처음 만들어진 예술경영지원센터의 대표가 ‘서울프린지’를 만드셨던 이규석 대표였어요. 내가 아는 한 그분은 행정가이거나 정책을 얘기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굉장히 현장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기관 역시 현장성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김진주: 거기서 나와서 어떻게 공연을 자기 기획으로 만들기 시작하셨나요?

고주영: 2011년 즈음에 회사일이 재미도 없고 고민과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혼자 일본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신청해서 선정되고는 “레지던스를 가기 위한 휴직을 시켜주지 않으면 퇴사하겠다” 선언을 했죠. 신생 조직이어서 직원이 일종의 외부 연수 때문에 휴직을 한다는 선례가 없었는데, 다행히 당시 제 상사가 많이 이해를 해주셨어요. 덕분에 휴직을 하고 2개월 동안 일본 레지던시에 갈 수 있었어요. 다녀와 이듬해에 퇴사를 했지만요.

당시 일본 레지던시를 가서는 소위 “컷팅엣지(cutting-edge)”한 현대 예술 작가들을 굉장히 많이 만나고 작업들을 봤어요. 그중 흥미로운 작가가 있어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거든요. 그런데, ‘서울변방연극제’에서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고, 그때만 해도 연차를 써서 해보려던 것이 조금은 갑작스레 퇴사를 하는 바람에 저의 독립기획자로서의 입봉작이 되었어요.

김진주: 무슨 공연이었나요?

고주영: 건축 프로젝트였어요. 지금은 〈바퀴 달린 집〉이라는 TV 프로그램도 있지만, 당시 일본에서 노숙자들의 생활을 리서치해 ‘움직이는 집(mobile house)’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돈 없이도 지을 수 있고 살 수 있는 집을 위한 설계도를 만들었던 건축가 사카구치 교헤의 작업이었어요. 일본의 가장 남쪽 섬인 규슈의 구마모토라는 도시에서 그 건축가를 만났거든요. 제가 레지던스를 갔던 때가 2011년 가을이었으니, 3.11 동일본대지진의 여파가 있을 때였어요. 도쿄에 살던 이 건축가는 재난 이후의 무정부 상태, 국가가 국민을 전혀 보호하지 못하는 상태를 목격하고는 ‘내가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신정부를 선포하기까지 한 작가였어요. 이런 의식의 전개과정이 단계별로 너무 설득력이 있는 거예요. 집은 축재의 도구가 아니라 삶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어야 하고,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 공공재, 이것을 마련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 사카구치 교헤의 건축 작업, 그리고 신정부 선포 같은 것들이 제게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보이기도 해서 납득을 한 거죠. 그래서 작가를 한국으로 초대해 시민들과 같이 폐자재, 폐품, 버려진 물건 등을 이용해서 집을 지었어요. 굉장히 작고 브랜드아파트 같은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겠지만 한 사람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어요. 시민들과 같이 집을 짓고, 그걸 대학로 거리에 전시하고, 문지문화원 사이나 북소사이어티에서 토크를 하는 〈움직이는 집@서울〉(서울변방연극제 공동주최, 2012)이 저의 첫 기획이었습니다.

김진주: 그때는 본격적인 무대나 대본이 있는 극을 기획한 것은 아니었네요. 사람들의 수행성이 중심인, 그것이 ‘실천하기’ 속에 이루어지는 작업들이었고요.

고주영: 네, 극장이나 무대 공연이 전혀 아니었어요.

프로듀서 실천기

김진주: 대본이 있는 극으로 처음 기획하신 공연이 뭘까요.

고주영: 제가 기획한 작업 중 대본이 있었던 작품은 〈연극연습3. 극작 연습-물고기로 죽기〉가 처음이었어요.

김진주: 아니, 처음인데 그렇게 큰 상에 후보로 오르셨어요.

고주영: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그 직전에 〈연극연습1, 2〉도 있었고, 〈움직이는 집@서울〉에서 좀 더 확장한 마을 프로젝트인 〈서울시주거대책위원회〉(하이서울페스티벌, 2012), 도시 속 유휴공간을 공공공간, 돈 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제로 리:퍼블릭〉(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개관축제, 2015)도 했거든요. 세월호 참사 이듬해부터 5년 간 〈안산순례길〉도 기획했고요. 소위, 대본이 없는 작업들이었죠. 그런 작업들도 스스로는 나름 의미가 있고 최소한 참여했던 사람(관객)들로부터는 좋은 평가와 인정도 받았는데, 상과는 전혀 연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연극연습3. 극작 연습―물고기로 죽기〉가 영예로운 상의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건,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40페이지짜리 희곡이 있고, 극작가가 있고, 연기하는 전문 배우가 있는 연극의 ‘틀’을 갖추고, 잘 알려진 ‘공연장’에서 공연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제가 기획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든 작업이 좋은 평가를 받는 건 무척이나 영예롭고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기준이 작동하는 걸까?’하는 궁금증은 들었어요.

김진주: 그런 점에 비하면 연극은, 미술보다는, 전통을 끝까지 고수하는 측면이 있어 보여요. 무대의 3 요소가 흔들리지 않아야 연극이라고 보는 거죠.

고주영: 일반적인 ‘연극’이 대체 뭘까, 그 틀과 요소를 갖추지 않아도 연극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연극연습 프로젝트〉를 시작한 거기도 해요. 이런 연극도 있다, 이런 연극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그걸 하기 위해서 기존의 ‘연극계’ 안에 있지 않은 요소들을 변수로 대입해 보는 방법을 택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기획이 비로소 극장 안으로 들어온 게 〈연극연습〉 때부터예요. 2018년부터이니 극장 경험이 정말 일천하죠.

김진주: 거리에서 점점 무대로 진행하셨고, 제목에 ‘연극’이라는 주제적 단어를 쓴 점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겠어요.

고주영: 드라마 대본 쓰듯이 대본을 쓰고 그걸 숨죽여서 모두가 그냥 관객이 바라봐야 되는 연극이 어느 순간 나에게 아무 감흥을 못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드라마나 영화보다 연극은 한계가 크잖아요. 시간-공간적 제약도 많고.

김진주: 영화나 드라마는 스토리텔링을 엄청난 속도로 펼치는데, 무대에서는 실제로 사람이 내 눈앞에 있고 스크린 위에서의 전개에 비해서 느리게(일상적으로) 움직이고요.

고주영: 저는 K-드라마 팬이에요. K-독립영화도 좋아하고요. 그런데 그런 작품들보다 드라마 연극을 잘 만들고 관객에게 감동과 재미를 줄 자신은 없어요. 그러면 연극은 뭘 해야 할까? 혹은 연극을 만들고자 하는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바라봐야 할까, 이런 고민들을 했고, 그래서 〈연극연습〉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김진주: 그 고민이 제겐 ‘현대미술’을 둘러싼 반응과 해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네요.

고주영: 연극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생각에서 〈연극연습〉을 시작한 것 같아요. 이렇게 다양한 콘텐츠가 나오는 마당에 대체 이 시대에 왜 연극이 살아남아 있어야 할까, 관객도 적고 해 봤자 돈도 안 되고, 하면 할수록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가 되는 구조고. 그런데도 연극을 하려면 뭔가 이유를 찾아야겠는데 그 이유가 나에게 뭐여야 할까, 드라마나 영화가 할 수 없는 건 뭘까.

그리고 나는 소위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연극을 만들고 싶은,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연극 예술이라는 걸 하면서 계속 현장에서 세상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싶고, 그걸 예술과 삶에서 실천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럼, 연극을 가지고 뭘 하면 될까. 〈연극연습〉뿐 아니라 〈안산순례길〉 이후의 작업들은 다 이런 생각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김진주: 아마도 그전에 거리극들, 그리고 거리 이전에 집을 짓거나 마을에 대해서 생각하는 활동들을 하셨기에, 이러한 실천들로서 연극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연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나오는 지향점들을 무대로 오셔서도 계속 유지하실 수 있는 것 같아요.

고 PD님이 기획한 작품들에서 제게 가장 각인되는 것들, 잡히는 것들, 더 마음이 다가서는 것들은 무대 위의 인물들이었어요. 주인공이 아니었던 주인공들이 화자로 등장하는 것도 ‘연습하기’라는 수행성과 굉장히 맞닿아 있고요. 공연하셨던 인물들 중에 이야기해보고 싶은 이들이 있나요?

고주영: 〈연극연습〉 중에서도 〈연극연습2〉가 ‘이제부터 이런 걸 하려고 합니다’를 정확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연극연습1. 연출 연습―세 마리 곰〉은 ‘때로는 시각작가, 때로는 안무가로 호명되는 정세영이라는 예술인이 연극 연출을 한다’는 기획이었는데, 그 내용이 어떤 선언 같은 거였어요. ‘연극 무대 위에서 굉장히 극적인 상황, 누군가가 다칠 만한 상황이 벌어지지만, 결국은 아무도 다치지 않아. 연극은 결국 가짜야. 그런 슬픈 일, 힘든 일들은 이 무대 바깥, 이 극장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어’라는…

그리고 그다음 해에 세월호 어머님들을 배우로 모셔서 무대에 서게 한 작업이 〈연극연습2. 연기 연습―배우는 사람〉(신재 연출, 마민지 영상, 제로셋프로젝트 공동제작)이었어요. 이 기획은 〈안산순례길〉의 연장선에 있어요. 〈안산순례길〉을 처음 기획할 때는 유가족분들한테 쉽게 다가가지 못했거든요. 안산이라는 지역 자체도 잘 모르는 사람이 연극한답시고 유가족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 무례하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거리를 두고 있었어요. ‘객관적으로 직접 피해자가 아닌 우리의 관점으로 세월호에 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이게 3년 차쯤 되다 보니까, 안산순례길을 통해, 혹은 그 바깥의 삶을 통해 어머님들과의 관계가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특히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에서 연극배우를 하시는 어머님들하고 특히 더 친밀한 관계가 생겼고, 그중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어머니인 두 분을 만났고요. 두 배우님 모두 세월호 극단에 참여하시고 있었지만, 아마추어 배우라고 불리고 있었어요. ‘저들은 왜 아마추어라고 불려야 하는 걸까? 배우라는 게 과연 뭐길래? 배우는 무대를 수행하는 사람이기 전에 삶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그분들에게 ‘유가족’이 아닌 ‘유가족이자 50대 여성이자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사회구성원’으로서 뭘 하고 싶은지 여쭤봤어요. 이분들이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는 무척 밝은 면도 있으시거든요. 그런데 바깥의 ‘유가족다움’, ‘피해자다움’이라는 요구 때문에 다른 면을 보일 수가 없는 거예요. 공적인 자리에서 한 번도 마음껏 웃지도 못하고, 자기 성격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계셨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정말 해보고 싶은 거 있지 않으세요?”라고 물어봤을 때 한 어머님은 노래 강사가 꿈이었다 하시고, 한 분은 유튜버가 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저희도 놀랐어요.

김진주: 그때가 언젠가요?

고주영: 2019년이었어요. 하고 싶다고 하신 그 과정을 같이 한 게 공연의 연습과정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노래 강사가 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서 노래강사협회에 전화해 강사 한 분을 소개받고, 그분이 어머님을 계속 개인레슨하시는 거죠. 다른 어머님께 유튜버 되는 법을 누가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그때 공연의 영상 협업자였던 마민지 감독이 ‘그런 영상 콘텐츠는 닷페이스가 제일 잘 만드니까, 거기에 제안을 합시다’라고 연결해 줬고, 닷페이스에서 ‘유튜브라는 것은 이런 것이고, 유튜브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이런 요소가 필요하다’ 이런 내용을 다 어머님께 개인교습 해줬죠. 영상 편집하는 법은 마민지 감독이 직접 교육하고. 실제로 어머님들께서 무대에서 관객들을 상대로 노래 강사로서 실습하고 관객들의 조언과 의견을 물으며 첫 번째 유튜브 콘텐츠를 고르고 편집하고 자막 넣어 업로드하는 과정이 공연이었어요.

그분들이 꾸며진 연기로, 어떤 대본에 입각해 대사를 발화하고 지문을 구현하는 연기를 하신 건 아니지만, 배우로서 무대에 서신 거예요. 그리고 그 ‘배우’라는 게, 단지 그 대본을 잘 소화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삶을 수행하는 사람이다’라는 기획의 의도를 전달하게 됐죠.

그다음이 〈연극연습3. 극작 연습―물고기로 죽기〉인데, 이때도 시작은 ‘나이 든 성소수자 얘기를 듣고 싶다.’ 이 한 줄이었어요. 저의 개인적인 고민이기도 했고요. 이번에는 ‘극작 연습’이라고 정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더 이상 젊지 않은 성소수자’를 찾으려고 했고요. 몇 명의 후보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한겨레에 “달려라, 오십호” 칼럼을 쓰고 계신 김비 작가님을 발견해 미술작가이기도 한 정은영 연출가와 같이 찾아가 희곡 집필을 의뢰했어요.

‘극작 연습을 해야겠다. 성소수자 얘기를 해야겠다’ 이런 방식보다는 ‘저분과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있는 것 같고, 그것이 구체적인 누군가라기보다 ‘이런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과 이런 걸 해보면 좋겠다’라는 정도의 기획을 가지고 시작을 해요. 그게 과정 중에 다 이런저런 걸 거쳐서 이런 모양새로 나오게 되는 거죠.

김진주: 그래서 고 PD님께서 기획한 무대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봐도 그 사람의 인생, 그 사람이라는 인물, 그 사람의 정체성, 그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세상과 부딪혀 깎여 나갔던 상처, 이겨나갔던 부분들이 더 많이 와닿나 봅니다. 어떤 그런 줄거리나 흐름, 이런 것보다도 그 주인공들의 발 내딛고 있는 그 땅 자체를 무대화시키는 그런 느낌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고주영: 극찬이십니다. 그런 걸 하고 싶어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이 세상에 딱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 이야기를 TV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 방식으로 전하고 싶어요.

김진주: 그렇게 극적이지 않아도, 약간 시시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듣다 보면 이게 그냥 ‘인생극장’ 같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사회의 고정관념과 같은 힘들과 싸워왔는지. 이건 정말 첨예한 얘기들이잖아요.

고주영: 사회적 소수자 혹은 약자들하고 작업할 때는 ‘그 사람들을 혹시 내가 대상화하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볼거리로 만들어버리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해야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뭔가 제가 가지고 있는 일말의 믿음이라면, ‘그냥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흥미로워 보이니 저 사람하고 해야겠어’ 이렇게 기획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안산순례길〉이 있기 전에 이미 안산하고 저는 히스토리가 좀 있었어요. 먼저 말했던 그 도시 프로젝트를 제가 번역한 사카구치 교헤의 책에 기반한 독립국가 버전으로 확장해 안산에서 하기로 해서 안산지역의 시민단체를 만나고 스토리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실행하기 한 달 전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 전면 취소됐었어요. 이듬해 축제에서 국가 프로젝트를 다시 하자고 했지만, 저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안산에서 그 프로젝트를 할 수 없다고 했어요. ‘만약에 안산에서 뭔가를 기획한다면 세월호를 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안산순례길〉이 시작됐고, 거기서 어머님들과의 관계가 생겼고, 그래서 〈연극연습2〉로 이어졌죠.

제가 당사자이거나 어떤 당사자성에 굉장히 가까이 가 있지 않다면, 그 당사자와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최소한 내가 하는 기획에서 이 사람들을 대상화시키고, 이 사람들에게서 갑자기 뭔가를 확 끄집어내서 흥미롭게 보여주는 방식은 택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저는 제 삶 자체를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애와 관련된 기획이 시작된 타이밍도 미묘했어요. ‘제작진행’1을 맡은 공연에서 ‘장애’라는 세계를 아주 살짝 알게 됐는데, 저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감각이었어요. 그래서 공연 후에 공부를 좀 더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지인이 장애인 활동지원사 교육과정을 추천해 줬고, 자격을 땄어요. 자격증도 있으니 한번 일을 해보고 싶은데 마침 발달장애인지원단체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같이 일 할 생각이 있냐고. 마침 그때가 발달장애인과 연극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할 즈음이었어요. 발달장애인과 연극 만들기를 시작한 이유는 제가 장애 중에서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타이밍에 발달장애인지원단체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 거죠. 제가 만약에 발달장애를 책으로만 공부하고 연극만 만들었으면 몰랐을 부분들을 이 단체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부분이 크다고 생각해요. 개개인으로만 만나면 몰랐을, 연습실 바깥의 발달장애인의 삶, 그 안의 배리어(barrier), 장애의 사회적 모델, 이런 큰 그림을 아주 조금이나마 보고 겪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백그라운드를 알고 이들과 연극으로 만나는 것과 ‘그걸 전혀 모른 채로 즐겁게 연극 만듭시다’하는 건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잘 만나기 위해 제가 그 안에서 살며 지내는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을 거치고서야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에게 “나는 현재 비장애인이지만 관객과 함께 차별하지 않는 연습을 해보고 싶다, 같이 사는 연습을 토론연극(forum theater)을 통해 해보고 싶다”며 작업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연극연습4. 관객 연습―사람이 하는 일〉로, ‘장애를 가진 여성이 이렇게 차별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거기 앉아 있는 당신(나 자신)은 어떻게 하시겠어요?’라고 도발(?)하는 작업이었죠. 관객들도 무대 위 배우들도 지켜보는 저도 불편함과 긴장과 주저함에 전전긍긍했던.

김진주: 이렇게 살아가면서 또 한 발 담그는 자세, 달리 말하면 한쪽 눈은 나의 눈, 또 다른 나의 한쪽 눈이 그들의 시선인 것처럼 보는 자세. 이런 자세가 수행성을 좇는 프로듀서가 특유하게 보여주고 있는 태도이고 실천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 프로듀서라는 역할이 예술의 국면에서는 저기 영화의 거대 자본으로 만드는 프로듀서랑 또 다르잖아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예술의 형태가 많은 자본으로 만들어지고, 또 조직화와 전문화를 거치면서 프로덕션이라는 개념도 많이 영화가 아닌 다른 예술계에도 많이 도입되게 되고요. 미술에서도 이제 프로듀서가 많거든요.

고주영: 제가 오늘 아침에 마침 그 얘기를 쓴 원고2를 마감했어요.

김진주: 그 내용이 무척 궁금하네요. 서울시립미술관의 올해(2022) 기관의제가 ‘제작’인데 말이에요. 제작을 영어나 현장 언어로 옮기면 ‘프로듀싱, 프로덕션’이잖아요. 그건 분명히 프로덕션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는 지금 미술판의 얘기이기도 하고요. 이 안에서 프로듀서의 역할들도 이미 많이 나왔단 말이에요. 반면, 제작에 참여하는 누군가를 무엇으로 명명할지 몰라서 프로듀서라는 이름표를 가져다 쓸 수도 있고, 하는 일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로 프로듀서라는 자리로 배치될 수도 있어요. 큐레이터와 프로듀서는 무엇이 다른 걸까요? 미술에서처럼 연극에서도 디렉터, 연출자, 프로듀서의 정의, 역할, 일이 다 다르겠죠? 고주영 님은 이렇게 삶과 수행성의 양발을 두는 태도를 프로듀서의 태도로 확고히 잘 정의 내리신 것 같기도 한데요.

고주영: 원고에 이렇게 썼어요. ‘극장에서 홍보를 하는 사람도 프로듀서고, 미술관에서 선보이는 퍼포먼스를 위한 기술 코디네이터를 하는 사람도 프로듀서고, 지출, 회계, 정산만을 하는 사람도 프로듀서고, 뭔가를 기획해 판을 짜는 사람도 프로듀서고.’ 지원금 신청서만 써줘도 프로듀서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김진주: 제작비를 가져오는 역할도 프로듀서라고 하지 않나요?

고주영: 그래서 이 프로듀서라는 개념을 넓게 봐야 한다고 저 나름대로는 정리했어요. 2012년도만 해도 저를 누가 ‘프로듀서님, PD님’하고 부르면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랬어요. 왜냐하면 제가 생각했던 프로듀서는 ‘당연히 자기가 아이디어 내서 기획도 하고, 돈도 마련하고, 다 책임지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계속 현장에서 경험하고 다양한 곳에 프로듀서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스스로 연출, 안무 아니면 시각 창작을 하는 사람과 기술파트 외의 사람들이 다 프로듀서라고 칭해지고 있고, 굉장히 다양한 유형이 있구나. 그 다양한 프로듀서의 유형 중 기획하는 프로듀서도 있는데, 나는 기획하는 프로듀서이고 싶다, 이렇게 정리해서 그래서 요새는 프로듀서라는 말보다는 기획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해요. 그렇다고 제가 제 기획만 하지는 않아요. 엄청나게 큰 국공립 프로덕션의 코디네이터를 한 적도 있고, 정말 좋은 작업의 제작진행 역할만 한 적도 있고. 그때는 ‘기획자’가 아니라 정확하게 제가 한 일을 표기합니다.

어쨌건 저는 판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니까, 판을 만들려면 많이 알거나, 많이 경험하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쪽은 아닌 것 같고요.

김진주: 왜, 경험은 아는 게(지식이) 안 될까요?

고주영: 제가 공부는 좀 별로인 것 같아요. (웃음) 어쨌건 ‘나는 굉장히 경험주의자구나. 내가 스스로 경험해 봐야 뭔가를 깨우치고 깨닫는 사람이구나’를 알기 때문에 부딪혀 봐야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관심사를 책으로 읽어서 뭘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나에게서 시작된 얘기 거나 관심이 생긴 분야면 부딪혀 봐야 해요.

예를 들면, 내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지만, 장애는 그렇지 않은 경우였어요. 아직까지는 비장애인이고 장애와 관련된 책을 몇 권 보고 후다닥 기획을 해낼 수 있는 능력도 없는 것 같으니 장애에 대한 기획을 하려면 장애인들이 있는 현장에 가서 장애인들하고 계속 부딪히는 시간을 어느 정도 보내야만 기획을 할 수 있어요. 그 수행성마저도,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나의 수행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수행성을 기대하는 것은 좀 억지스럽지 않나 싶어요.

김진주: 그렇게 경험을 통해서 앎이 생기는 건 아닐까요. 경험으로 얻은 것이 지식으로 얻은 앎보다 진짜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어려운 말을 써가는 것보다 말이에요. 한편, 한 단어로 끝날 묘사도 두세 줄로 늘려내는 건 이야기꾼의 재주, 아닐까요?

고주영: 그러니까요. 전 진짜 모든 서류와 모든 말을 되게 간단하게 하거든요. 웬만하면 개조식으로 쓰고. 부풀리거나 장황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게 단점이기도 하고 장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김진주: 기획자로서는 장점일 것 같은데요. 핵심만 간단히 요약해라. 프로덕션 하나에도 경제성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지원서 3장, 4장 낭비하지 말고요.

안식년 동안 만난 무대와 역할, 그리고 비평적인 눈

김진주: 화제를 돌려서, 2022년을 안식년으로 삼으려고 하셨잖아요. 나의 삶으로 살아가기를 경험하려 하신 거죠. 그런데 안식년답게 보내지 못했다고 고백하셨어요. 그렇지만 뒤집어보면, 이건 내가 하려고 했던 휴식이나 재충전 대신에 올해 한 작업이 더 귀했다는 얘기잖아요. 이야기들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요. 안식년이니까 고 PD님이 직접 프로듀싱을 하지 않은 작업이었겠죠.

고주영: 네, 안식년을 갖게 된 이유는 기획자로서 부끄러운 얘기예요. 뭘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전에는 기획하고 싶은 게 계속 마음속에 있거나, 살다 보면 떠올랐고, 그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고, 그래서 실천을 하면서 기획을 했어요. 그런데 작년에는 정말 지원 신청 공고가 떴는데도 ‘낼 게 없는데.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굳이 누군가를 찾아 억지로라도 기획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조차 없었어요.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일하게, 새로운 건 아니지만 코로나가 가장 심했던 시기에 공연했던 〈연극연습3. 극작 연습―물고기로 죽기〉를 재공연 해서 좀 더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해 재공연 지원신청서를 냈는데 탈락했고, 그냥 하지 말라는 얘기인가 보다 싶었어요.

그러면서 2022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안식년이 된 거예요. 내 기획을 안 한다기보다 할 계획이 없어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랬던 상태에서 안식년이라고 스스로 칭한 거죠. 또 따져보니까, 독립기획자가 된 지 딱 10년이 되기도 했더라고요. 안식년을 하면서도 어쨌건 관여된 작업은 3~4개 정도 있었으니까, 평균 페이스 대로는 한 것 같아요. 내가 벌인 판은 아니지만, 작업에 이름을 올리는 걸로는 그 정도 됐어요. 놀랍게도 그중 두 편이 ‘출연’이었어요.

김진주: 배우로 무대에 오르는 건 안식년보다 더 큰 결심인데요. 배우 데뷔. 안식년을 가지려는 이 프로듀서, 이 기획자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끌어들였던 그 공연은 무엇이 있었나요?

고주영: 처음 출연이 여름에 했던 아르코예술극장의 《봄 작가, 겨울 무대》였어요. 이 기획은 신춘문예 희곡 부문으로 등단한 작가들에게 장막 희곡을 쓸 기회를 주고, 낭독공연을 열어주는 기획이에요. 그중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을 선정해서 겨울에 본 공연으로 만들어주는.

김진주: 공연은 이런 면에서 보면 단계별 프로덕션이 있어요. 정식 극을 올리기 전에 대본이 나오고, 대본을 낭독으로 발전시키고, 그리고 무대를 만드네요.

고주영: 대본이 바탕이 되어야 작업이 가능한 구조이지만, 어쨌든 〈과자집에 살아요〉(구지수 작)라는 작업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거예요. 제가 드라마투르그는커녕 대본 있는 작업도 별로 안 해본 지라 처음 전화받았을 때는 좀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 작품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면) 희곡에 대한 공부를 좀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희곡 없는 작업들을 계속하면서 콤플렉스가 하나 있어요. 내가 희곡 있는 작업을 못하는 것은 희곡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은 희곡이 뭔지를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차원에서 해보기로 했어요. 잘 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드라마투르그로서 굉장히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저희 공연의 연출을 맡은 이오진 씨가 극작가이자 대학에서 극작을 가르치는 분이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데뷔한 극작가가 있어 작업을 함께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 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거예요. 희곡을 어떻게 읽는지, 어떻게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지. 이렇게 공부만 해도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이 좀 없지는 않았으나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역할을 했고, 어차피 매일 연습실에 나오니 직접 지문을 낭독해 달라고 연출이 요청하길래,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고자 오케이를 했어요. 재밌었어요. 나름 저 연극반에서 배우 출신이어서요.

김진주: 미술도 제작 현장에서 많이 배우죠. 작가로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미술대학을 나왔어도 현장에서 재교육받기도 하고, 또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미술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보면 다 현장에서 그렇게 작가로서의 역할, 작가가 해야 될 일들을 학습을 하니까요. 제작 현장이 배움의 터전이긴 해요.

그런데 드라마투르그는 무슨 일을 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 개념이 좋아서, 예전에 다른 미술공간에서 기획을 할 때 제목에 써보기도 했지만, 저는 연극에서 드라마투르그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모르겠어요. 실제로 경험하신 드라마투르그는 어때요. 뭘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깍두기 같은 역할인가요?

고주영: 드라마투르그도 프로듀서랑 비슷한 것 같아요. 프로덕션마다 하는 일들이 다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같은 드라마투르그여도 프로덕션이 요구하는 사항은 다 다르다고. 지금 통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드라마투르그는 제1의 관객”인 것 같아요.

제가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했을 때, 지문을 읽어야 하니까 점점 대본을 더 뚫어지게 보게 되고 그렇게 배우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연출의 현명한 노림수였다고 생각해요.

김진주: ‘그다음 단계로 무대에 올라가십시오’가 자연스럽게 되었네요. 흥미롭습니다. 미술계에도 역할들이 많아지니까 프로덕션을 꾸린다는 것에 관해서 작가들도 고민이 많아요. 주변에 미술인도 많이 있는 걸로 아는데, 고주영 PD님 생각에, 미술에도 이런 드라마투르그 역할이 필요할까요?

고주영: ‘왜 자꾸 이렇게 예술작업을 하는 데 새로운 역할들이 늘어나야 할까?’ 하는 의문은 있어요. 창작이 어쨌든, ‘창작의 책임 혹은 핵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어요. 자기 혼자 무언가를 결정해서 추진해 나가는 게 굉장히 살 떨리는 일이잖아요. 특히나 ‘크리틱한 눈(비평적 시선)’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창작자나 작가에게 작업적으로 계속 대화의 파트너가 필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 작업에서 드라마투르그를 써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제 작업에서 오히려 대화 상대는 진짜 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연출가와, 나와, 그리고 이 출연자가 같이 대화를 하면 되었어요. 아니면 연출과 내가 대화하면 되었고요. 여기에 전혀 지금까지 제작이나 연습의 맥락을 같이 해오지 않은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비평적인 눈을 가지고 제1의 관객이 굳이 되어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내가 생각했던, 내가 해왔던 기획의 일 안에 그 역할도 이미 포함되어 있어요.

김진주: 그것도 희한하네요. 미술은 비평은 비평가를 미리 매칭하거나 큐레이터가 리뷰어 역할을 겸해서 작가와 작품 제작에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한편 미묘한 장력이 작동해서 가르침을 그저 따르지는 않으려는 반작용도 생기거든요. 코칭받아서 작업이 매만져지면 작가로서 자신이 역할이나 주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들 수 있고요. 그래서 어떤 무대를 만들어 가면서 조언을 얻고 계속 다듬어서 극을 완성하는 것과 미술 작품을 만들 때의 리뷰는 다른 성격일 것 같아요. 그렇지만 미술작가들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화상대는 계속 원하고 있고요.

고주영: 11월에 공연한 〈설근체조〉(이윤정 안무)는 관객으로서 초연을 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무용 작업은, 연극에도 한계가 있듯이, 그 한계 때문에 저는 다른 연극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저는 무용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무용으로 자꾸 서사를 전하려고 하는 것은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김진주: 굉장히 찔렸어요. 미술로 얘기하지 않아야 되는데 미술로 얘기한다고 하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고주영: 제가 감동하는 것은 무용하시는 분들이 정말 몸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요. 자기 몸을 이렇게 계속 응시하면서 그 몸이 움직여지는 과정을 드러낼 때 무척 감동을 받아요. 관객으로 〈설근체조〉를 보는데 그 공연이 딱 그런 공연인 거예요. 이 공연은, 혀, 그러니까 설근 때문에 몸의 움직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탐구를 해요. 너무 집중된, 너무 절절한 움직임이 나왔어요. ‘절절하게 움직여야지.’ 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냥 혀의 움직임 때문에 나오는 움직임인데, 그게 너무 아름답고 좋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윤정 안무가와는 그냥 아는 사이 정도였는데 초연과 재연 사이에 절친이 된 거죠. 연초에 ‘올해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 그랬더니 ‘그럼, 와서 ‘제작진행’ 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나 ‘e-나라도움(정부보조금관리시스템)’ 못하는데 괜찮아?’라고 했더니 ‘괜찮다’해서 팀에 들어갔고, 제작을 관리하고 진행해 주는 역할을 한 거죠. 어쨌건 제가 좋아하는 공연 작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이런 식으로 내가 벌린 판이 아닌 곳에 들어가서 뭔가를 하는 게 저에게는 흔치 않은 경험이지만, 좋아하는 작업이고 이 작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 있게 사람들에게 ‘나 같이 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진주: 〈설근체조〉 다음이 배우로 등장하신 그 공연이죠? 어떤 극이었는지 설명해 주세요.

고주영: 〈(별점없음) 아마추어의 아마추어에 아마추어를 위한 실험〉(2022)이라는 공연이에요. ‘펭귄어패럴’이라는 공연팀은 봉제를 중심으로 모인 팀이고요. 배우로 모든 공연에 출연하시는 두 언니는 소위 ‘구로공단 여공’ 출신이고 현역 미싱사예요. 노동운동도 계속하고 계시고요. ‘신소우주’라는 (기획자이자 작가, 연출자인) 친구가 봉제 작업실을 내고 미싱을 배웠어요. 배운 미싱으로 뭔가 작업을 하려고 하다가 그 두 배우 언니들을 만나면서 펭귄어패럴 팀을 꾸리고, 그때부터 그 언니들과 계속 작업을 하는 거죠.

지금까지의 공연은 그 언니들이 해왔던 투쟁의 삶, 그 언니들과의 관계, 언니들의 새로운 삶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는데, 그 공연이 어쩌다가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하게 된 거예요. 초청을 받아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그 언니들이 나와서 계속 미싱 박고 자기들끼리 수다 떨고 이러는 공연을 누군가 보고 ‘아마추어’, ‘별점 없음. 이건 정말 아마추어의 아마추어를 위한 실험이다.’ 이렇게 리뷰를 남긴 거예요. 이 리뷰를 보고 작가가 너무 충격을 받은 거죠.

자신들 스스로 프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딱히 ‘아마추어들이 하는 연극이니까’ 이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별점 없음’(리뷰)을 받고 너무 충격받아서 ‘우리는 왜 아마추어냐? 정말 그러면 우리는 아마추어로 실험을 해보겠다.’ 그래서 공연 제목을 ‘(별점없음) 아마추어의 아마추어에 아마추어를 위한 실험’, 이렇게 그 리뷰에서 그대로 따왔어요. 아마추어들을 모아서 작업을 한 거죠. 저는 아마추어 미싱사로 들어갔어요.

공연에는 ‘아마추어, 미싱 박사, 팔방 미싱사’가 있어요. 박사와 팔방은 두 언니고, 작가가 초보 미싱사예요. 저는 관객 1, 2, 3 중에 하나예요. 공연에 출연하는 관객 1, 2, 3은 지금까지 펭귄어패럴의 작업을 다 본 사람이에요. 이들의 공연을 다 봤는데, 이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던 사람이 관객으로 초대된 거예요. 이 관객이 배우와 같이 미싱을 밟으면서 서로의 아마추어적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요.

‘당신의 아마추어적인 부분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라는 요구를 받은 것은 아니에요.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 외에 각자가 지금 고민하는 생각을 적어주세요.’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 각자가 ‘너무 아마추어 같다. 그러나 아마추어로서 사는 게 왜 나쁘냐. 아마추어로서 예술을 하는 것이 뭐가 나쁜 것이냐. 그건 굉장히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이제 독백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죠. 독백들이 나오고 결국은 ‘그래 우리 아마추어야. 그런데 아마추어가 나쁜 게 아니니까. 네가 얘기했던 그런 혹독한 별점 같은 그런 느낌의 아마추어가 아니라, 우리는 아마추어의 느낌으로 계속 삶을 살아가고 있어.’ 이런 식의 공연이 됐죠.

김진주: 별점이라는 건 무척 냉정하게 혹은 편하게 평가 내리는 지표잖아요. ‘리뷰’라는 것이 뭐가 되어야 할까요? 특히 동료 사이에 만들 수 있는 리뷰, 그걸 통해서 또 많이 배우기도 하고요. ‘어떻게 우리는 서로 리뷰를 주고받을 수 있을지?’ 그 고민도 하게 돼요.

고주영: 그래서 이 작가는 저 같은 오랜 관객을 초대한 것 같아요. ‘우리의 공연이 정말 그렇게 별점 없을 만큼 그런가요. (형편없나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단 투쟁과 미싱에 있어서는 완전 날아다니는 프로페셔널한 분들을 만나게 된 게 일단 너무 좋았어요. 그냥 그 언니들이 있어서 좋았어요. 그렇게 단단하게 살아오고 일하고 삶을 쌓아오신 분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여유 같은 게 있더라고요. 뭐든지 다 수용하고 수행하고. 공연 연습 과정에서 문제가 일어나 봤자 얼마나 대단한 문제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에 조바심을 내잖아요. 언니들은 전혀 안 그래요. ‘이렇게 하면 되지’ 하고 여유 있으시고.

김진주: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리뷰, 받으면 뭐 어때서요?

고주영: 맞아요. 맞아. 그냥 그 여유 안에 내가 받아들여진다는 느낌 때문에 너무 좋았어요. 제 짝꿍 언니께서 독백을 쓰셨는데, 마침 저의 짝꿍의 따님이 연극 배우시래요. 연극하는 따님이 얼마 전에 공연했던 얘기를 언니가 자기 독백으로 바꿔서 하세요. 그 독백을 보고 느껴지는 바를 써달라고 요청받았어요. 독백에서 딸이 좋아하는 작품이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예요. 제가 체홉 작품 중에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바냐 아저씨는 예술가를 후원하려고 죽도록 노동하는 사람인데, 그 예술가는 정작 예술이 아니라 돈과 여자에 관심이 있고요. 예술가인 척하는 허세 부리는 예술가였던 거죠.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바냐는 자기 노동의 덧없음을 깨달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를 인용해보기도 했어요. 그 바냐가 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 허세 부리는 예술가가 나인 것 같기도 하고, 바냐를 위로하는 조카 쏘냐가 나인 것도 같아요. 쏘냐가 하는 대사를 인용했어요.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어요.” ‘이 대사를 되게 좋아해서 들을 때마다 울컥한다. 나는 정말 예술을 한다고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 정말 아마추어 같지 않냐.’ 이런 식의 대사를 했어요. 제가 지금 고민하고 있던 것을 다 까발렸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했어요. 부끄럽게도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렇지만 꺼내서 얘기를 했다는 것 때문에 뭔가 속이 시원해진 느낌도 받았어요.

대사 중에 이 얘기도 썼어요. ‘제가 올해 한 해 쉬어 가려고 했는데 먹고 사느라고 하나도 못 쉰 것 같고. 안식년이 끝나면 뭔가를 다시 해야 될 것 같은데, 난 내년에도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식으로 썼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읽으면서 눈물이 날 수밖에요. 창작해내는 사람 중에 훌륭하신 분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창작할 거리를 가지고 계시겠지만, 모두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창작의 소재와 주제가 계속해서 생각날 수는 없어요. 당연히 안식년이든, 안식월이든, 잠깐 쉬는, 창작을 멈추는, 창작이 아니어도 일을 멈추는 시간들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겠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관성이 있어서 잠깐이라도 쉬면 불안하잖아요. 큰 데서 갑자기 작업의뢰가 올 수도 있는데, 그것도 안 하고 어쨌거나 한 해를 쉰다는 의미니까. 한 해를 쉬었을 때 그다음에 올 파장을 생각하면 쉽게 엄두를 못 내는 거잖아요. ‘내가 1년 동안 작업을 쉬겠어요. 하지 않겠어요.’ 말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뭔가에 의해서, 어떤 수요에 따라서 계속 창작을 하고 움직이는 것이 정말 창작을 해야 되는 사람한테는 결코 좋은 리듬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프로덕션화, 제작화된 지금 환경이 더 안식년이라는 걸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김진주: 그렇죠. 계속 기금을 따서 팀을 만들고 예산 규모 짜서 구성 요소들을 채우는 제작 체제에서, 우리가 쉬어가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잠시 멈출 수 있는 그런 과단성을 과연 발휘할 수 있을까요?

고주영: 제가 안식년을 할 수 있었던 건, 저 혼자여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물론 작업 프로덕션을 꾸릴 때는 여러 사람들을 모아서 하지만요. 제가 극단을 갖고 있는 대표라면 이렇게 못 쉬겠죠. 나만 쉰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극단에 속해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쉬어야 된다는 의미가 되니까. 어쨌건 저는 그래도 혼자 움직이는 사람이어서 ‘올해는 쉬겠어요.’라는 게 가능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좀 슬픈 거죠. 이렇게 연결된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쉴 수도 있는 거니까. 나 혼자 쉬어도 주변 사람들 다 잘 지낼 수 있으니까.

코로나 시작과 함께 책을 읽을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생겨 SNS에 읽은 책 내용을 공유하고 있는데, 그중에 ‘혼자 읽자니’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책들이 있어요. ‘혼자 읽자니’는 예술교육실천가들이 모여 책을 읽는 모임이에요. 2022년 1월에 예술교육실천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움직임 중에 하나로 소모임 만들기 지원이 있었어요. 저는 아주 잠깐씩이나마 어차피 맨날 읽는 책, 같이 읽어보자 싶어 소셜북클럽 ‘혼자 읽자니’를 제안해 참여자를 모았는데 하나같이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어요. 장르도 다양하고요.

저는 제 자신을 예술교육가라고는 정체화하지는 않지만, 조금 넓은 의미에서, 예술이 사회와 만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예술교육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저도 예술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거죠. 독서모임을 꾸렸는데 멤버들이 너무 서로 모르는 사이이기 때문에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코로나 덕(?)에 심야에 줌으로 모여서 책 얘기하고요. 책 얘기보다는 사는 얘기를 더 많이 하는 모임 같기도 해요. 지금까지 1년 동안 모임을 계속하고 있고 같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렇게 됐어요.

김진주: 책에 밑줄 친 부분을 사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리시잖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밑줄이나 공유하지 않은 밑줄도 있을까요?

고주영: 안식년에 읽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책이 바로 은유 작가님의 『쓰기의 말들』예요. 그 책 중에 계속 생각이 나는 두 문장이 있어요. 하나는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다른 하나는 “소재의 빈곤은 존재의 빈곤이고, 존재의 빈곤은 존재의 외면일지 모른다.” 그 책 제목이 “쓰기의 말들”이니까, 은유 작가님이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 같은 것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쓰기’를 다 ‘예술’로 바꿔도, ‘연극’으로 바꿔도, ‘기획’으로 바꿔도 저에게는 다 말이 되는 거 같은 거예요. 그 두 문장이 제게 가장 뼛속 깊이 박힌 올해의 문장인 것 같아요. ‘이 책은 창작하는 사람 모두가 읽어야 되는 책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너무 흥분했었어요.

마이너리티와 예술을 찾아 다시, 일본으로 갑니다

김진주: 저도 찾아봐야겠어요. 이제 일본 리서치 계획에 관해 얘기를 나눠볼까요. 계획서를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서치 주제인 ‘사회적 소수자와 예술’이라는 부분이 던져주는 게 많았어요. 가서 어떤 분들 만나실지 궁금합니다.

고주영: 이번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제가 2011년에 갔던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같은 프로그램이에요.

김진주: 10년, 11년 만에 다시 가는 거예요.

고주영: 컴백하는 거죠. 제가 10년 전에 ‘현장 작업을 하고 싶다. 휴가를 내서라도 하고 싶다.’라고 마음을 먹게 된 게 그 레지던시 때문이었어요. 결국은 퇴사도 했고요. 그래서 이번에도 안식년의 끝에 이 레지던시를 가는 게 저에게는 좀 의미가 있어요. ‘이 레지던시가 나에게 새로운 어떤 문을 열어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 기대 같은 것들이 있고요.

11년 전에는 기존의 연극과 무용의 틀로는 설명되지 않는 너무나 다양한 동시대 공연예술이 일본에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걸 보러 갔었거든요. 그게 제가 지금까지 한 작업들의 동시대성의 기반이 되어줬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 독립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저의 어떤 시야, 포커스가 오히려 더 좁아진 거죠. 컨템퍼러리한 모든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그 안에서도 연극으로 목소리를 좀 더 확장시켜 줘야 되는 어떤 존재들을 제가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일본의 공연 예술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주제를 선택했어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건 『웹진 이음』에 2022년 여름에 세 차례 연재했던 「일본의 장애예술」예요. 제가 그 분야에 관해 잘 알아서 쓴 게 아니라, 글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아서 시작했어요. ‘일본의 장애예술에 대해서 너무 알려진 바가 없으니 리서치를 해서 좀 글을 써줄 수 있겠느냐’라는 제안이었어요. 리서치를 하면서 일본에도 장애예술에 관련해서 굉장히 많은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우리나라처럼 장애인 예술과 관련된 기관인 ‘이음’ 같은 곳이 있어서 한눈에 확 보이는 건 아니지만요. ‘이걸 눈으로 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뿐만이 아니라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와 관련해서도, 일본에서 분명 어떤 예술적인 움직임들이 있을 텐데, 그런 사회적 운동/행동과 예술이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어요.

김진주: 일본에서의 리서치와 관련해서 연구자로서의 고주영 프로듀서의 활동을 세마 코랄의 웹프로젝트로 옮겨오는 작업도 시작하셔야 하잖아요. 일본 장애예술 하면 중요한 인물인 이토 아사 님을 인터뷰해 보면 좋겠다고 얘기 나누기도 했고요. 고주영 님께서는 일본어도 하시니까 이토 아사 님의 책뿐만 아니라 생생한 리서치 인터뷰를 담은 이 분의 웹사이트도 더 이해하고 보셨을 것 같아요. 장애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이토 아사 님의 연구를 어떻게 보시나요?

고주영: 저는 ‘사회 안에서 장애와 어떻게 만날까?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어떻게 만나야 될까?’ 사회 안에서 장애와의 만남에, 그러니까 사회적인 구조에 집중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토 아사 님이 관심을 두는 것은 ‘장애의 감각’이잖아요. 이건 또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장애의 어떤 영역인 것 같아요. 그리고 ‘장애’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는 것은, 결국은 ‘어떻게 하면 같이 살 수 있을까?’라는 목표점을 향해서 가고 있는 거잖아요. ‘다른 루트를 통해서’이지만, 이 감각을 연구한다는 것이 결국은 이 공존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신지가 가장 궁금해요. 이토 아사 님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보이는 어떤 감각이 어떤 걸까’를 캐는 것 같진 않거든요.3

김진주: 이토 아사 님은 자신을 ‘정상’으로 규정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내가 감각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또 나와 다른 ‘장애’의 감각을 가진 사람들,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이 세계의 감각을 알아내고 말하기 위해서 이 장애라는 감각을 연구하시는 것 같아요.

한편, 연구를 위해 사람을 만난다는 행위를 웹프로젝트로 옮겨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무대 위의 배우처럼 연구도 수행하는 거잖아요. 웹에서 벌어지는 수행은 ‘클릭’이나 ‘스크롤다운’ 밖에 없는 걸까요? 좀 더 재밌게 풀어볼 수는 없을까요? 프로듀서를 작가로 모셔놓고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고주영: 작가라고 불리는 순간, 뭔가 부담스러워서 긴장돼요.

김진주: 이제 배우를 지나서 작가가 되는 건가요.

고주영: 이것들이 어떻게 보면 다 프로듀서의 역할이었는지도 몰라요. 미술계에 프로덕션 개념이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이런 질문이 생겨요. ‘미술관 퍼포먼스는 미술관 퍼포먼스이기 때문에 유용한 어떤 가치들이 있는데, 거기에 공연 개념을 그렇게 개입시켜서 규모를 키우고 사람, 인력을 더 투여하는 것들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 하지만,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미술에도 프로덕션 개념이 더욱 적용된다면, 이 추세는 뭘까요?

김진주: 몇 가지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장르적으로는 영상에서 영화로 발전하는 흐름이 있고, 현실적으로 좀 더 큰 스크리닝 환경이나 긴 장편 영화를 만들려면, 실험적 제스처로 끝내거나 퍼포먼스를 그저 기록하고 편집하는 방식으로 끝낼 수 없는 거죠. 조명이 들어와야 되고, 극본이 들어올 수도 있고, 연기가 당연히 들어오고, 이러면 진짜 영화가 돼버리는 거니까 어떤 면에서 장르 구분은 모호해지죠. 가장 간단하게는 상영 장소의 유무 정도를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주영: 개봉하느냐 마느냐.

김진주: 그런데 개봉은 경제적으로 많이 다른 문제긴 해요. 관객이 얼마나 들어오느냐의 문제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거예요. 미술계에서 프로덕션이라는 용어와 특성은 2000년대 중반 이후로 하나 둘 나타나 점차 보편화된 걸로 기억해요. 그즈음 크레딧 라인이 자리 잡고, 거기에 프로듀서나 그 비슷한 이름들이 생겨났으니까요. 그리고 미술이 프로덕션화되는 것은 미술제도 또는 문화정책의 문제일 수 있어요. 지방정부, 문화재단, 미술관에서 비엔날레 같은 대규모 행사라든가 큰 개인전, 회고전을 열 때 프로덕션이 들어가게 돼요. 작품을 제작하는 데 비용을 지원하고, 이후에 그 작품을 소장하기도 하고요. 그것이 또 미술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그다음 미술, 그다음 미술은… 이렇게 제작이라는 것이 수레바퀴를 추동시키는 것 같아요. 말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네요. 한두 번의 대화로 끝날 것이 아니니까요. 일본에서 보고 듣고 담아 오실 리서치 궤적4에서 미술과 공연예술을 둘러싼 연구와 제작의 문제를 경유하는 여러 디딤돌을 얻을 수 있길 기대하면서 대화를 마무리할게요. 잘 다녀오세요.

고주영: 네, 잘 다녀올게요!


  1. ‘제작진행’은 이미 언제, 어디서, 어떤 의도와 개념을 가지고 만들지 등의 ‘기획’이 정해진 공연의 전반적인 제작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역할과 일을 말한다. 

  2. (인터뷰어 주) ‘예술인의 직접적 권리’ 등의 주제로 열린 집담회를 정리한 『2022 예술청 아고라: 예술로 노동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예술청, 근간)의 공연예술인 편에 실릴, 고주영 프로듀서가 쓴 서론 격의 글을 말한다. 

  3. (인터뷰어 주) 고주영 프로듀서는 2023년 2월 일본에서 미학자 이토 아사를 직접 만나 대화했고 “(이토 아사가) “장애인의 감각”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다양한 스펙트럼’의 감각”을 연구하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라고 (이 인터뷰의 편집 과정에서) 소회를 밝혔다. 

  4. (인터뷰어 주) 고주영 프로듀서의 일본 리서치 결과는 세마 코랄 커미션 웹프로젝트 〈Social Minorities and Art in Japan〉(가제)으로 2023년 4월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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