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화되는 기술의 쓰나미 속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감수성

후니다 킴
후니다 킴은 인간 생태계에 깊게 침투한 기술과 기술이 촉발하는 생태계의 변화에 주목해 왔다. 인간의 지각 능력과 감수성은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고 엄청난 정보량을 감각, 분석하기 힘들다. 후니다 킴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장치인 ‘환경 인지 장치’를 제작해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환경 인지 장치’를 인간에게 직, 간접적으로 이식(implant)함으로써 기술과의 필연적 결합을 직시하는 그의 방식은 포스트 휴먼의 변화된 인식 방식과 감수성(감각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다루고 있다. 최근 전시로는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 : 뉴타입 몸을 위한 명상기구》(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23), 《c-lab 7.0 : 파인튜닝되는 신체 감각》(코리아나 미술관 2023)등이 있다.

지금처럼 정보가 쏟아지고, 오픈되어 있으며, 수많은 기술이 매일 새로이 나오는 시대도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예술은 어디쯤 있어야 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감각해야 하는가? 많은 생각의 파편을 퍼즐 조각처럼 나열해 보려 한다.

나에게 디지털 기술은 현재의 세상을 읽어 내는 통로이자, 사유체(思惟体)이다. 나는 여러 기술에 대한 지식을 수직적으로 쌓아서 표현의 인풋으로만 사용하기보다는, 기술을 다양한 경험의 실험체로 여기며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곤 했다. 그 순간순간 집중했던 것들에 태그를 달고, 어디에 쓰일지 모르지만 내 안에 진열해 두기도 했다. 나는 미술을 시작한 이래 십여 년 간은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작업보다는 여러 매체의 속성과 기술에 대한 탐구에 집중했다. 그 시간의 쌓임과 흐름에 따라 접점이 없던 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어느 순간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경험을 했고, 이를 통해 통찰하게 되는 부분들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내 안에 구름처럼 떠다니던 많은 사유의 조각들은 컴퓨터 베이스(디지털 기술)와 관련되기에, 나는 수(数)에 의한 시적(詩的) 사유가 가능한 지점들에 대해 항상 고민한다.

우리는 꽤 많은 대상을 빠르게 스캔하듯이 보고, 듣고,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것을 인지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보인다’를 ‘본다’로, ‘들린다’를 ‘듣는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우리의 생태계에서 디지털 기술은 기능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생활, 문화, 생각의 방식에까지 수많은 영향을 준다.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사회가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와 같은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으로 하여금 다중적 관점으로 세계를 읽을 수 있게 하는 듯하지만, 그에 반해 어떤 감각들은 훨씬 무뎌진 듯하다. 나는 그러한 무뎌진 감각들에 자극을 주고 기민함을 요하는 사유체로서의 장치들을 생성하며, 관중에게 이러한 경험 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몰입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예술 사이: 접착이 아닌 융화에 대해

1984년 7월 KBS에서 방송된 대담에서 백남준은 바둑판 매트릭스 구조의 경우의 수와, 그에 비할 수 없는 수많은 경우의 수의 표현 능력을 가지는 매트릭스 구조 기반 미디어에 대한 예를 들었다. 이를 통해 디지털 기술의 무궁무진한 표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미디어 그릇에서 표현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기반 창작’이 새로운 미술 창작에 영향을 줄 것이며, 미술학도들이 이를 연구하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여기서 언급한 매트릭스 구조의 미디어는 컴퓨터로 계산되어 창작되는 시각 매체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당시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 예술계에 ‘소프트웨어 기반 창작’이, 그 디지털 기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소프트웨어와 이를 구성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오늘날 우리 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며, 없어서는 안 되는 미디어가 되었다. 컴퓨터는 프로그램에 쓰인 코드를 번역, 해석, 실행하여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한다. 사람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사물을 인지하고 사고하는 방식’을 형성해 가고 있다. 우리는 프로그램 코드를 만들 뿐 아니라 프로그램에 의해 우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컴퓨터 프로그램은 다양한 관점과 표현에 대한 사고 변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사물을 인지하고 사고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행위가 개념을 전달하려는 미술 작가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백남준이 말한 가능성이 이 시대에 얼마나 녹아들어 있는가 생각하며 머릿속 정보들을 빠르게 스캔하다가, 백남준의 대담으로부터 시간을 뛰어넘어 1997년 ACM에서 주최한 OOPSLA(Object-Oriented Programming, Systems, Languages & Applications) 컨퍼런스의 기조 연설을 떠올렸다. 거기서 컴퓨터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엘런 케이(Alan Kay)는 “아직도 컴퓨터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과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선구자이자, 퍼스널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이 발언은 컴퓨터 기술의 잠재력이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이해되거나 활용되지 않았다는 그의 견해를 드러낸다. 컴퓨터가 단순한 계산 도구 이상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용도로는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관점인 것이다. 물론 엘런 케이의 주장의 현재적 유효성은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등의 발전을 통해 컴퓨터 혁명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수준에서는 창작, 사회,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자가 컴퓨터(메타미디어)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직 부족하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엘런 케이 자신이 현재까지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아직도 컴퓨터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이 유효한지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에 의해 사고방식의 변화가 거듭 일어나고 있는 이 시기에도, 우리에게는 디지털 기술에서의 컴퓨테이셔널 씽킹(Computational Thinking)과 알고리즘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많은 창작의 가능성을 체화하고 언어화하는 실험이 필요하다. 수많은 병렬적 가능성과 디지털 월드의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한 고찰은 더 이루어져야 한다.

디지털 기술 시대 이후 사물을 인지하고 사고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는 기술과 새로운 표현 방식에 대한 고찰은 창작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기술의 프로세스는 하나의 예술 작품을 독특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미술, 특히 현대미술이라는 장르에서 창작의 본질과 깊이 그리고 작가 자신만의 관점을 보여 주지 못하는 작품은, ‘기술적 연출’에 의한 심미적 일루전(환영)이라는 맥락에서만 유용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효과적이고 유용하며 편리한 기술의 표면적 속성을 접했으나 그 아래에 있는 기술적 레이어들의 깊이를 읽어 보지 않았다면,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인지하게 하는 기술, 사유체로서의 기술을 감각하고 수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초기 진입 경로에 따라, 기술 자체를 창작의 도구적 관점으로만 바라보거나 자기 안에서의 사용 범위에 한계를 두는 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래전에 생긴 깊은 골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터넷이 고속화되고 다양한 전문적인 정보들을 누구나 얻을 수 있게 되면서, 2000년대 초중반부터 인터페이스를 통한 물질적 상호작용을 표현 매체로 하여 공학 베이스의 실험을 하는 창작자들이 늘어났다. 한때 현대미술계에서도 이에 주목했지만, 관심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한 기술들을 사유체로 체화하려면 ‘수’를 감각의 변환 매체로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조각, 회화, 영상, 설치 기법 등 오랜 기간 숙성된 창작 방식에 적응한 예술가들이 ‘수’를 창작의 연장선으로 체화하고 흡수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수’를 시뮬레이션의 도구로써는 익숙하게 사용한다.)

이 시기를 생각하면 나는 과거에 나름 성공적으로 예술과 과학 기술의 융합을 이끌어낸 선구적인 그룹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의 활동을 떠올리게 된다. 2018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선보인 전시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의 소개글에는 이렇게 써 있다.

“E.A.T.는 1966년, 예술가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버트 휘트먼, 벨 연구소의 공학자 빌리 클뤼버와 프레드 발트하우어가 결성한 비영리 단체로 예술과 과학기술, 나아가 산업의 영역 등 다양한 분야의 협업과 교류를 선도했다. 이들은 급진하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개인이 소외되지 않도록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고자 했다.

‘기계 시대의 끝’이라 명명되었을 만큼 새로운 기술적 시도가 범람했던 1960년대 사회적 상황은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갈망했던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E.A.T.의 활동은 예술가에게 예술적 표현 범주를 넓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공학자에게는 새로운 시각에서 기술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또한 서로 다른 분야의 경계를 끊임없이 실험했던 E.A.T.는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을 넘어서, 예술의 영역 바깥으로 사회 참여적 프로젝트를 확대해 나갔다.” 1

인용한 글에서, E.A.T. 그룹이 “급진하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개인이 소외되지 않도록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고자 했다”는 설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계 시대의 끝’이라 명명되었을 만큼 새로운 기술적 시도가 범람했던 1960년대 사회적 상황은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갈망했던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판단은 엘런 케이의 “아직도 컴퓨터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언설과 다시금 오버랩되면서 현재의 미술을 생각하게 한다. E.A.T.는 당시 신공학 기술로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 냈는가? 현재의 예술가들은 과연 어떠한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기가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현재는 컴퓨터(메타미디어)가 우리의 경제, 문화, 사회의 중심에 더욱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컴퓨터는 디지털 이전의 기술과는 다른 층위에 있다. 컴퓨터는 고정된 하나의 도구가 아닌 다양한 미디어를 만들 수 있는 미디어, 즉 메타미디어다. 이러한 컴퓨터의 속성을 조금 더 감각하고 수용할 수 있다면, 기존의 자신과 잘 융화하여 자유롭게 관점을 바꿔 나갈 수 있다면, 기존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기 신호인 ‘수’에 기반한 창작 기술을 조금 더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수’의 계산으로 다양한 창착이 가능한 퍼스널 컴퓨터(메타미디어)가 활성화되면서, 표현의 자유는 확장됐다. 이를 통해 이전의 아날로그 미디어 방식보다 비약적으로 효율적인 시뮬레이션과 다양한 표현 기술이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메타미디어’이기에 발현될 수 있는 창작적 사고와 ‘수’로 표현되는 세계 구조, 즉 ‘표현 불확정성 구조’를 예술 안으로 융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술가에게 소비가 아닌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와중 최근 몇 년 사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의 빠른 발전으로 또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고 있지만, 실제의 구조는 더 깊이 블랙박스화되어 가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창작자에게 새로운 창작 도구 그 이상의 것이 생겼다는 점에서 즐거운 부분도 있다. 그러나 매체를 더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체화해서 사용하고자 하는 관점에서는, 기술적 레이어와 사고 구조의 블랙박스화가 높아져 ‘수’적 사유와 자기 체화는 더 흔들리고 흐려지는 것 같다. 프롬프트 기반의 창작 방식(ChatGPT, Stable Diffusion 등)은 편리하며, 얼핏 보면 인간으로 하여금 사유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최적의 도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적 발전은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술의 밑바닥에 있는 ‘표현 불확정성 구조’를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인공지능의 발전은 수적 사유를 익히기도 전에 그 필요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어쩌면 디지털 기술을 통해 무언가를 관통하는 능력을 가진 몇몇 혁신 기업이 자신의 관점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수’의 사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블랙박스화된 신기술들을 발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음모론까지 상상하게 된다(웃음). 지금 이 순간에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기술들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기술에 대한 메타적 인식의 격차가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여 계층 간의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전기에서 비트(bit)로의 전환과 그에 따른 사고 변화

전기의 on, off 신호 이후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의 0, 1 이진 숫자 비트(bit)의 탄생, 그리고 1947년에 벨 연구소(Bell Lab)의 반도체 연구원에 의해 개발된 반도체 트랜지스터(전자 신호 및 전력의 증폭과 스위칭에 사용)의 출현으로, 더 작고 값싼 라디오, 계산기, 컴퓨터 등이 개발되었다. 1974년에는 인텔(Intel)이 초기 퍼스널 컴퓨터에서 사용될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을 개발하면서, 컴퓨터가 컴팩트한 사이즈로 성능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을 바탕으로 1980년대에는 0, 1 비트를 숫자, 문자, 이미지, 소리 데이터로 변환하는 것이 가능한 8비트 퍼스널 컴퓨터의 보급율이 높아졌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이 보급되고 1990년대 후반에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으로 수많은 정보가 전 세계에 공유돼 새로운 정보에 대한 진입이 쉬워졌다. 이로 인해 인류는 보다 많은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고, 가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시대로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는 개인 수준에서 더 많을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협업에서도 장르 구별 없는 연결이 더 수월해졌다. 그 결과 지금의 생태계는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며 물리적 편리함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사회, 문화 그리고 인간의 사고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가능성에 오히려 숨이 차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으로, 한국에서는 초, 중학교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이 필수가 된 2018년 전후에 ‘디지털 리터러시’ 관련 교육과 담론이 사회적으로 부상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통상적으로 기술에 대한 리터러시는 읽고 쓰는 능력의 숙달이지만 컴퓨터는 하나의 도구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디지털 리터러시’에서 내가 중시하는 점은 기술을 스스로 언어화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어 회화를 책으로 공부하여 지식으로 사용하는 것과 그 문화권에서 생활하며 사고방식을 체화하여 영어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한 분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는 그것을 잘 모르는 채 여러 실험을 할 때인 것 같다. 1960년대 컴퓨터 신(scene)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당시에 컴퓨터 전문가가 적었던 반면, 다양한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에 뛰어든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컴퓨터’라는 정의조차 없었던 시기에는 그 내용들을 설명하고 공유하기 위한 은유적 표현을 다른 영역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거기서 흥미로운 접점을 찾았던 것 같다.

나는 이번 글에서 ‘예술이 어떻게 디지털 미디어-기술을 감각하고 수용해야 하는가?’, ‘우리는 기술을 공유하고 있는가?’, ‘기술을 공유할 수 있는가?’와 관련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 실마리는 미술 안이 아니라 미술 밖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엘런 케이의 행적을 보면, 그는 컴퓨터 철학자이지만 생물학, 수학, 컴퓨터 연구 전반에 걸쳐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음악가이자 예술가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미술과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강연에서 미술의 심오함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지금의 퍼스널 컴퓨터에 엄청난 영향을 준 엘런 케이는 여러 분야를 관통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앞으로의 예술의 방향과 관련해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점이다.

컴퓨터 기술을 이용한 예술에서 구조적 실체는 ‘수의 연산’과 ‘알고리즘의 행동’이다. 프로그램 코드가 실행하는 출력을 인간이 지각하고 알고리즘 그 자체와 상호작용함으로써 예술적 체험이 가능해진다. ‘수’의 알고리즘은 형상이나 색, 움직임, 소리와 같은 인간이 지각 가능한 것으로 변형되어 생성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변형된 매체에 접촉한다. 많은 창작자들 또한 이미 잘 설계된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 GUI)가 잘 구성된 플랫폼상에서 값의 조합으로 소리, 빛, 이미지, 움직임 등을 표현하는 데에 익숙할 것이다. 지금의 창작자들에게 수의 연산과 알고리즘을 온전히 느끼고 체화할 기회가 있는지, 그럴 필요가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이야기 나눌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간 인공지능의 발전이 실용적인 영역으로 침투하면서, 더 많은 가능성이 초거대 밀푀유 케익처럼 쌓여 가고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초가속 인간 탈중심화’ 시대로 향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온전히 우리이기 위해, 신기술의 쓰나미에 쓸려 가지 않도록, 자신과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에 대한 메타인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공생, 예술과 기술의 공생을 위해 지속적인 관찰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무수히 쌓여 가는 기술 레이어의 산 위에서, 기술을 새로운 창작의 도구로만 소비하기보다 우리의 속도를 낮추고 새로운 표현과 관점을 얻는 것의 차이와 밸런스를 생각해야 한다. 빠른 환경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새로운 신체감각’2 에 대해서도.

예술 작가들은 가끔 자신의 창작 이전에 현시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그 언저리에 있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더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마치 철학책을 읽으며 사유하듯이 말이다. 끝으로 엘런 케이가 ‘seminal 1997 OOPSLA keynote’에서 말한 내용 중 일부를 편집하여 적어 본다.

“무언가를 학습한다는 것이 창조의 행위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됐다. 이전에 없었던 일이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통해, 고정된 맥락에서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정의가 내려진 맥락은 항상 최적화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로운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기존 맥락의 일부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창의적인 행위는 일반적인 틀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상적인 예술 또한 생각하는 맥락이 무엇이든 그것과 다른 맥락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접근이 항상 우리가 속한 맥락에서 벗어난 우리를 만들어 준다.”


  1.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국립현대미술관,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1803260001029

  2. 인간은 온몸으로 주변을 인지하고 감각하는 시대에서, 기술 발전으로 인간의 감각을 섬세하게 하는 도구의 시대를 맞이했다. 지금은 도구의 시대를 지나,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고 감각하며 정보를 습득하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 현재는 디지털 기술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의 대상을 다중적 관점으로 읽기에 용이한 환경이 되었다. 즉, 새로운 기술들(스마트폰, chatGPT, 각종 센서장치들)에 의한 ‘감각의 보철물’들을 장착한 인간은 보다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인간 본래의 감각의 경우, 몇 개의 손가락과 뇌, 깊고 좁아진 눈과 무심해진 귀만이 ‘신체 감각’으로서 남겨지는 것 같다. 인간의 기존 감각, 수용 능력으로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방대하게 확장되는 정보와 가속화되는 감각들. 인공지능에 의해 수많은 데이터를 빠르게 보강하고 지속적으로 파인튜닝(fine-tuning) 하며 결과를 찾아내는 세계. 그 안에서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상황을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우리 자신에 맞게 무언가를 파인튜닝하고 체화하는 ‘새로운 신체감각’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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