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시간을 찾아서

윤원화
윤원화는 시각문화 연구자이다. 도시와 미디어, 미술과 시각문화의 접점에 관심을 두고, 동시대 서울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말과 글로 기록하고 매개하는 데 주력한다.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등이 있으며, 역서로 『광학적 미디어』, 『기록시스템 1800/1900』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서울시립미술관,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

Scene #1. 스팸 메일함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스팸 메일함을 확인할까? 나는 아침 저녁으로 메일함을 정리할 때마다 스팸 메일함을 열어 본다. 그것은 하루를 열고 닫는 일상적 습관의 일부이다. 관심 있는 분야가 있으면 SNS에서 정보를 찾기보다 뉴스레터를 구독해서 정보를 받아보는 편이라 날마다 적잖은 수의 메일이 쌓인다. 그걸 다 읽는 것은 아니다. 신문을 볼 때 헤드라인을 훑다가 눈길이 가는 기사를 클릭해 보는 것처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무엇이 이야기되고 있는지 대략적인 정보만 확인하고 나면 대부분은 휴지통으로 보낸다. 찬찬히 읽고 싶은 것만 남겨 두었다가 혼자 밥을 먹거나 지하철을 탈 때 다시 열어 본다. 그 중에서 나중에 수업 자료나 다른 용도로 쓸 일이 있겠다 싶은 것은 따로 모은다.

이것은 모래 바람 속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정보 분류 시스템이다. 나중에 읽으려고 했지만 지나간 메일 더미 속에서 찾을 수 없게 된 것, 잘 읽고 따로 저장해 뒀지만 존재 자체를 잊어 버려서 검색조차 할 수 없게 된 것들이 넘쳐난다. 개인 메일함은 디지털 미디어의 아주 작은 채널일 뿐이지만 그 정보량은 이미 내 기억의 용량을 훌쩍 넘는다. 그 속에서 어떤 정보를 받아서 합산하고 해석할 것인가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기 이전에 어느 정도는 우연히 결정된다. 바람이 길잡이가 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마주치는 예상치 못한 풍경이 있다. 그렇지만 무방비 상태로 두들겨 맞을 수는 없기 때문에 날마다 바람에 날아온 모래를 치우는 것처럼 묵묵히 약간은 강박적으로 메일함을 정리한다. 창틀에 끼인 모래알까지 싹싹 털어 낸다는 기분으로 스팸 메일함도 비운다.

『에런트 저널』이 발송한 뉴스레터 중 《Crisis Imaginaries: On Slow Violence and the Anti-Spectacle》 스크리닝 행사 안내 페이지 갈무리.

그 메일은 스팸 메일함에 있었다. 『에런트 저널 Errant Journal』에서 보낸 스크리닝 행사 안내 메일이었다. 코니 정(Connie Zheng)이라는 작가의 신작 〈씨앗 시간〉을 상영하고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다음과 같은 작업 소개가 첨부돼 있었다.

“〈씨앗 시간〉은 사변적 씨앗, 일상적이고 집단적인 지식 생산,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환경 파국 속에서 분기하는 희망의 표현에 관한 실험적인 3부작 영화 프로젝트의 두 번째 파트다. 영화는 〈외로운 시대〉에서 시작된 서사에 기반해 씨앗 탐색자들의 소규모 커뮤니티를 따라간다. 거듭되는 재난 속에서 희망, 부인, 집단적 소망을 오락가락하는 이들은 씨앗 시간의 프레임을 통해 길을 찾는다. 그것은 동면 상태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 비가시적이고 지하적인 변형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외로운 시대〉와 마찬가지로, 〈씨앗 시간〉은 즉흥적인 보이스오버와 움직임을 바탕으로 서사를 구축하며 집단적인 신화 만들기를 통해 파국적 사고를 거부하는 행동의 연습으로 고안됐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만에 보는 오프라인 행사 공지였다. 스크리닝은 〈위기의 상상계: 느린 폭력과 반(反)스펙터클에 관해〉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7월 21일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소재의 프레이머 프레임트(Framer Framed)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도시 간 거리 계산기를 돌려 본 결과에 따르면 그곳은 여기에서 8,578km 떨어져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메일을 닫았지만 지우지 않고 다른 폴더로 옮겨 놓았다.

Scene #2. 작가 웹사이트

작가 코니 정(Connie Zheng)의 웹사이트 화면 갈무리.

다음 날 저녁까지도 〈씨앗 시간〉의 정보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무언가 이미 파종됐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간질간질한 느낌을 따라 다시 메일을 열었다. 모든 메일은 하나의 작은 포털이다. 거기에는 링크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행사 예약 링크, 주최 기관의 웹사이트, 저널 구입과 구독 안내, 특가 판매 안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그 사이에 작가 웹사이트 링크가 있었다. 나는 이곳으로 들어가서 사변적 ‘씨앗’ 연작에 관한 더 상세한 정보와 3~5분 분량으로 발췌된 영상 클립을 발견했다.

첫 번째 파트 〈외로운 시대〉(2019)는 모든 병폐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마법의 씨앗에 관한 소문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어떤 씨앗일까? 정말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정말 그것은 좋은 것일까? 씨앗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흐릿하게 불어난다. 그것은 중국의 유전자 조작 공장에서 유출돼 캘리포니아 해변으로 밀려 왔다고 한다. 그것은 달이 없는 밤에도 저 혼자 반짝인다고 한다. 이 정체불명의 방문자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허술한 방호복과 보안경, 마스크로 무장하고 해변을 뒤진다. 영상은 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른 시공간의 기억과 가능성을 함축하고 세상을 떠도는 일종의 씨앗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두 번째 파트 〈씨앗 시간〉(2020)은 죽은 것처럼 잠든 사람들, 돌과 식물, 씨앗을 심고 기르는 사람들을 보여 주면서 씨앗의 잠재적 시간에 관해 성찰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시간, 아직 모르는 시간이다. 희망은 잠들어 있다. 그것은 다행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영상은 이 질문에 성급하게 답하는 대신 〈씨앗 시간〉이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을지 천천히 그려 본다.

작품을 마저 볼 수 있을까? 더 볼 필요가 있나? 나는 〈씨앗 시간〉을 봤다고 할 수도 없고 안 봤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자문했다. 만약 이것이 어느 비엔날레 현장에 설치된 수많은 영상 작품 중 하나였다면 나는 이 정도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작품 소개와 영상을 번갈아 보다가 대충 어떤 작품인지 알 것 같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전시의 규모가 크고 비슷해 보이는 작품들이 모여 있을수록 그렇게 된다. 안내 책자에 나열된 작품 정보를 차근차근 관람 경험으로 변환하면서 습관적으로 머릿속에서 시간을 잰다. 그런 기계적인 과정 속에서도 어떤 것은 머릿속에 찰싹 달라붙어서 뭔가를 써 내라고 독촉한다. 그리고 글을 쓰려면 작품을 적어도 한 번, 대개는 여러 번 다시 봐야 한다. 나는 〈씨앗 시간〉을 마저 보고 싶었다. 웹사이트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포함해서 이 작품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정보들을 제공했지만, 나는 작품에 관해 더 알기 전에 일단 충분히 보기를 원했다.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 볼까? 하지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나는 개인 메일 계정을 제외하면 인터넷에 나의 활동 내역을 입증하거나 내 존재의 디지털 대체물로 작동할 만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간에,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오늘날의 촘촘하게 규격화된 기록 시스템 내부에서 움직이는 데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한때 작가의 웹사이트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여행 가방 속 상자 La Boîte-en-valise〉처럼 한 작가의 영토를 그려 보이는 독특한 형식의 지도였고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이제 그것은 확장된 포트폴리오를 거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개인의 방대한 역사책 겸 신분증으로 진화하고 있다. 가끔은 놀라울 정도로 빈틈없이 명쾌하게 정리된 작가 웹사이트를 본다. 실제로 작품을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그런 문서 공간들을 떠돌다 보면 굳이 작품을 보고 글을 덧붙이는 일이 거의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뭔지 모를 것을 궁금해 하는 비효율적인 시간은 아직도 허용 가능한 범위 내에 있을까? 씨앗이 어떤 나무로 자랄지, 실제로 싹을 틔울지도 알지 못하는 채로 그것을 돌보고 관찰하는 길고 불투명한 시간은 무엇으로 방어될 수 있을까?

Scene #3. 온라인 전시

‘미네소타 스트리트 프로젝트’의 온라인 전시 웹사이트 화면 갈무리.

작품을 보고 싶다는 바람은 의외로 쉽게 이뤄졌다. 작가 웹사이트에 링크된 인스타그램에 온라인 전시 링크가 달려 있었다. 코니 정의 개인전 《뉴 얌피시 씨앗거래소 new yamfish seed exchange (nyse)가 샌프란시스코의 미네소타 스트리트 프로젝트(Minnesota Street Project)에서 운영하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갤러리에서 7월 31일까지 진행 중이었다. 작가는 지적 성찰, 근거 없는 추측, 도박에 가까운 투자가 모두 ‘speculation(사변, 투기)’이라는 한 단어로 수렴한다는 데 착안해, 뉴욕 증권거래소(NYSE)의 금융 투기를 세계를 재생성하는 사변적 씨앗의 공유로 대체하는 상상적 거래소를 제안했다. 이 전시는 영상 외에도 사변적 씨앗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포함했다. 실제로 우리를 먹여 살리는 씨앗들이 바다와 대륙을 가로질러 간 궤적이 표시된 커다란 지도 그림을 중심으로, 작가가 상상한 사변적 씨앗과 그 발아 과정을 담은 그림들이 벽에 걸렸다. 청사진 기법으로 파란색을 낸 이 이미지들은 미래를 다른 방식으로 그릴 가능성을 암시했다. 관객들에게 각자의 실제적, 상상적 씨앗을 직접 교환하고 파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워크숍 자료도 비치돼 있었다.

이 모든 것이 VR 전시의 감질나는 해상도 너머에서 아른거렸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보면 더 좋았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는 단순히 더 높은 해상도의 몰입적 환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씨앗의 겉껍질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고 하물며 싹을 틔워서 열매를 키우지 못한다. 하나의 생각이 구체화돼 퍼져 나가고 또 다른 생각과 행동을 낳으면서 현실을 고쳐 쓰는 과정은 실제로 씨앗이 이동하고 성장하고 증식하는 과정에 비견될 수 있다. 작품들은 제각기 하나의 씨앗이며 그것들은 이웃하는 몸들을 붙잡고 자기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찾아 떠난다. 그것이 반드시 물리적 접촉을 통할 필요는 없다. 무빙 이미지 형식의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전시가 어떻게 파종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전시 양쪽 모두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한다.

〈씨앗 시간〉은 전시장에 설치된 책상 형태의 중간 크기 스크린으로 상영돼 있었고 비메오(Vimeo) 링크를 통해 온라인 관람이 가능했다. 짧은 발췌본이 〈씨앗 시간〉의 개념을 시적이고 간결한 방식으로 전달했다면, 전체 영상은 작가가 그 개념을 발전시켰던 지난 몇 년간의 특정한 시간을 드러냈다. 전작의 연장선에서 〈씨앗 시간〉의 시대 배경은 생태 붕괴로 황폐해진 근미래로 설정됐다. 그러나 실제로 화면에 보이는 것은 영상이 제작된 동시대 캘리포니아의 시간이었다. 마스크와 방독면을 쓴 사람들은 비일상적인 재난 상황을 연기하는 동시에 달라진 일상의 몸짓을 연습한다. 거듭되는 산불의 매캐한 연기와 냄새 없는 바이러스 사이에서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디스토피아 영화 같은 오렌지색과 윈도우 바탕 화면 같은 파란색을 오간다. 여기에는 현재에 이미 내재하는 시공간의 다중성 속에서 또 다른 세계의 생성을 모색하는 시학적 접근, 그리고 예기치 못한 팬데믹이 불러일으킨 현재의 요동을 허구적 미래로 덮지 않으려는 윤리적 판단이 뒤섞여 있다. 작품을 구상하고 촬영하고 녹음하고 편집하고 유통하는 현재는 계속해서 둘로 나뉘어진다. 껍질을 뚫고 나오는 씨앗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사람들, 또는 그저 몸을 맞대고 즉흥적으로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미래의 감염 위험과 그런 걱정에서 자유로웠던 과거의 향수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 시간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전 지구적 동시성의 한 부분이고, 지구 전체의 기후가 변화하는 지질학적 연대기의 한 순간이다. 또한 그것은 살아 있는 몸들이 각자의 국지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고유한 리듬 속에서 펼쳐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각되는 시간, 인식되는 시간, 체험되는 시간의 척도는 더 이상 통합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씨앗 시간〉은 미래의 불투명한 전망이 과거의 의미를 고쳐 쓰는 불안정한 현재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그 출렁이는 시간을 가로지를 수 있는 작고 단단한 몸을 상상한다. 아무것도 더는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과 무언가 예상치 못한 것이 우리 안에서 깨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 사이에서 몸들은 천천히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온 씨앗이고, 익숙하지만 낯선 무엇이다.

Scene #4. 오프라인 전시

〈씨앗 시간〉의 익숙한 부분에 관해 말하기는 쉽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행성에 살면서 부서진 시간을 헤쳐 나가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낯선 부분에 관해 말하기는 그보다 어렵다. 조금 돌아서 가 보자. 전작인 〈외로운 시대〉에서 씨앗 탐색자들이 캘리포니아 해변에 떠밀려 온 부유물들을 들여다볼 때, 또는 씨앗으로 보이는 어떤 존재가 길을 잃고 떠돌고 있을 때, 이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의 몸체는 다른 시간과 장소들이 투영되는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코바야시 타이요(Taiyo Kobayashi)의 〈너희들한테서는 언제나 예감이 든다〉(2019)를 떠올렸다. 그것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쓰나미로 유실됐다는 한 불상에 관한 영상 작품이다. 이시노마키 해변 근처에 설치됐던 이 불상은 원래 교토에서 제작돼 이송 중에 풍랑을 만나 바다에 가라앉았지만 수십 년 후에 멀쩡하게 이시노마키로 돌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작가는 불상이 이번에도 물길 닿는 대로 떠도는 여행을 무탈하게 즐기고 있기를 바라면서 이시노마키에서 알게 된 친구를 통해 불상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영상 속에서 불상은 어딘지 모를 해변을 정처없이 걷고 있는데, 그 몸체는 마치 물로 가득 찬 것처럼 주변 풍경을 반투명하게 굴절시킨다.

불상은 씨앗과 다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죽지 않는다. 그것은 싹을 틔우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번성하거나 다른 살아 있는 것들과 연결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불상에 마법 같은 힘이 있다면 긴 시간을 변함없이 견디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곁을 지켜준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굳이 따지자면 옛 사람들의 선물이다. 죽음과 단절을 가로지르려는 마음이 관계를 형성한다. 코바야시의 작품은 이 가로지름에 초점을 맞춘다. 영상은 제각기 다른 곳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두 개의 채널로 분리해서 보여주면서 그들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드러낸다. 스크린을 통해 그들의 대화를 뒤따라가는 관객 역시 그들과 떨어져 있음을 저절로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또는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보는 동안, 우리는 거기서 더 멀어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곁을 지킨다. 영상 속의 인물들은 모두 혼자 있지만 그 뒷모습은 때로 신기하게 닮아 보인다. 단절은 성급하게 봉합되는 대신에 관계가 다시 시작되는 초기 조건으로 수용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가는 쓰나미가 밀려 오는 뉴스 영상이나 대규모 재건 사업의 스펙터클로는 가시화되지 않는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를 재난지의 경계선 바깥으로 끌어낸다.

나는 이 작품을 2021년 1월 시청각에서 정유진과 코바야시 타이요가 함께 만든 전시 《해류병》에서 처음 접했다. 각각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두 작가는 대지진의 피해자가 아니었으나 각자의 위치에서 지진의 그림자 아래 있었고, 직접 겪지 않은 재난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작품으로 매개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이 문제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더욱 복잡하고 난해해졌다. 바이러스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쳤고 그 피해는 실제 환자에 국한되지 않았지만 바이러스의 위험과 그에 대응하는 역량은 매우 불균등하게 배분됐다. 재난의 당사자는 이분법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스펙트럼이나 상호 관계의 네트워크로 다시 그려져야 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국경이 봉쇄되면서 문화적 교류와 대화의 여지는 더욱 협소해졌다. 사람과 사물을 막론하고 물리적인 몸체를 가진 것들은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바다가 위험해진 것이 아니라 국경이 봉쇄됐기 때문이었다. 전 지구적 재난 앞에서 개별 국가들은 전력으로 면역 시스템을 가동했다. 우리 자신을 지키려면 고립돼야 한다는, 적어도 ‘마음은 가까이, 몸은 멀리’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 아래서 개인이 느끼는 재난과의 거리, 그리고 개인들 사이의 거리는 더욱 알 수 없게 됐다.

전시의 제목으로 쓰인 ‘해류병’은 이처럼 불투명한 상황을 가로지는 매개체로 호출됐다. 그것은 바닷물의 흐름을 파악하는 아주 간단한 도구로, 출발점의 시공간 좌표를 써서 바다에 던져 넣고 우연히 회수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도착점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해류병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상태로 움직이면서 물길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 부유물에 더 많은 소망을 담을수록 그것은 더 멀리까지 흘러가야 하고 그 궤적은 더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그저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부유물은 국경을 넘고 세관을 통과해야 하며 일시적 방문자로서 자신의 적법성과 무해함, 더 나아가 유익함을 입증해야 한다. 그것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감지하고 그에 적응하면서 자기를 재현하는 올바른 방법을 익히고 자기를 도와줄 조력자들을 찾는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고, 전시되고, 관객을 만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관심한 인공물은 어떻게 상징적 사물로 깨어나서 자신의 의미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미리 규정된 위치에 한정되지 않고 미지의 삶에 연결될 수 있을까?

이는 재난의 시대에 미술 작품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잠들지 않는 데이터의 흐름에 휩쓸려 다니는 살아 있는 물질로서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씨앗이 될까? 아니면 불상이? 그것들은 둘 다 파도를 타고 움직인다. 겉보기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의 전령으로서 고유한 운동성을 함축한다. 시간은 단일한 노선이 아니며 때로는 노선의 형태조차 취하지 않는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시간과 별도로, 살아 있는 것들이 호흡하고 분비하고 섭취하고 배설하고 분해된 것들이 겹겹이 누적된 시간이 있다. 그것은 공기와 흙과 물과 데이터의 시간이다. 그 속에서 씨앗은 삶의 시간이 재생되기를 기대하고, 불상은 삶의 시간을 넘어서는 영원을 꿈꾼다. 그러나 누가 퇴적층이 되고 싶어할까?

Scene #5. 디지털 저널

Connie Zheng, “Amidst slow violence: cascading reincarnations in Thao-Nguyen Phan’s Becoming Alluvium,” Errant Journal, no. 2, 2021, 95–105.

뒤늦게 구입한 『에런트 저널』 2호에는 타오-응우옌 판(Thao-Nguyen Phan)의 〈충적토 되기 Becoming Alluvium〉(2019)에 관한 코니 정의 에세이가 실려 있었다.1 그것은 다른 작가의 작업에 대한 비평이기 이전에 본인의 사변적 씨앗 연작에 수반된 질문들을 곱씹는 글이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떻게 현재의 충격에 압도당하지 않고 시간을 형상화할 수 있을까? 불안정한 기후 변화의 시간은 흔히 자극적인 스펙터클의 연쇄로 재현된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들은 인간을 포함하여 생태 환경 전반에 가해지는 지속적이고 느린 폭력의 시간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단순히 타임랩스 영상으로 압축하거나 지질 시대표를 기준으로 측량할 수 있는 장기적인 변화의 시간이 아니다. 느린 폭력은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몸에 기입되는 것이며, 외부적으로 강제되는 시간이 몸의 고유한 시간과 상호작용해 전파되고 굴절되면서 때로 예기치 못한 변성을 일으키는 비선형적인 과정이다. 씨앗의 은유는 설령 이런 폭력 때문에 몸이 파괴되더라도 그 생동적 기억은 물질적으로 보존되고 재생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충적토 되기〉는 삶의 시간에 한정되지 않는 체화된 기억의 연쇄를 따라 메콩 강의 탁류에 잠긴 시간의 너비와 깊이를 복원한다. 이 연쇄의 매개체는 2018년 라오스 댐 붕괴 사고2로 죽은 한 형제다. 이들은 홍수에 휩쓸린 후에 강의 은총으로 각각 이라와디 돌고래와 부레옥잠으로 환생한다. 당신이 지금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곳에 있다면, 이 간단한 플롯에 나열된 시간, 장소, 사건, 등장 인물들을 잠시 검색해 보는 것만으로 서로 연결되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인터넷은 우리를 대신해서 지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기억하고 망각하면서 무질서한 허물의 더미를 남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몸이 윤곽을 알아볼 수 없이 확장되다가 흐릿하게 멀어져 가는 가상의 지평이자 그런 반투명한 몸들의 흔적이 누적된 매장지다. 〈충적토 되기〉에서 아이들이 환생하는 메콩강도 이와 유사한 기억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 시간의 구조에는 차이가 있다. 아이들은 실제로 물 속에서 떠다니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모든 이라와디 돌고래와 모든 부레옥잠이 돼 강이 실어 날랐던 모든 것들을 자기의 전생으로 기억한다. 이런 식으로 메콩 강의 기억은 아이들을 통해 되살아나고, 아이들은 그 기억을 통해 다른 삶들로 환생한다.

아이들의 몸과 수생 생물들의 몸이 겹쳐지면서 때때로 강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보인다. 그것은 순수한 토착적 자연으로 환원되지 않는 혼성적이고 확장적인 집합체다. 그렇지만 고유한 지속성과 가변성을 지닌 뿌리 깊은 시간의 줄기로서 강은 다양한 삶들과 동일한 층위에 놓이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와 자기 아닌 것,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다. 〈충적토 되기〉에서 메콩 강은 이방인들을 태운 배, 행복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몬순의 이슬 같은 보석을 갖고 싶어했던 크메르 공주의 시체를 실어 나른다. 자기가 전달하는 것에 무관심한 절대적이고 강력한 매개체로서, 강은 생명을 잇는 동시에 거두어 가서 비옥한 땅을 형성한다. “내세에 어떤 삶을 물려받든 이라와디 돌고래와 부레옥잠은 메콩 강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모성적 어머니이자 위대한 적이다.”3타오-응우옌 판은 이렇게 쓴다. 어떤 아이도 충적토가 되기 위해서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은 강의 아이로서 충적토에서 태어나 언젠가 그 흙으로 되돌아간다.

Scene #6. 전자 도서관

El Lissitzky, “Topographie der Typographie,” Merz, no. 4, 1923, 47.

어떻게 예술적 실천이 다른 시간성의 씨앗을 퍼뜨릴 수 있을까하는 질문은 흔히 그 씨앗이 파종될 동시대 미디어 환경과 미술 제도에 대한 비판적 비관주의를 수반한다. 문화 예술의 장이 씨앗을 길러내는 부드러운 토양이 아니라 되려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뿌리를 뻗는 식물적 생장을 통해 균열을 내야 할 척박한 땅으로 경험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은유적 진단은 직관적으로 호소력이 있는 만큼이나 한계도 명확하다. 애초에 오늘날과 같은 기술적, 제도적 유통망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작품들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란적이고 거의 무분별한 정보의 흐름 속에서 느린 식물적 시간을 함축한 낯설고 조금은 이국적인 작업들이 빠른 속도로 떠내려 온다. 바다를 가로질러 온 태풍이 먼 곳의 부유물을 해변에 끌어 올렸다가 다시 휩쓸고 가는 것처럼,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 관한 정보가 화면 위에서 반짝이다 사라진다. 그 모든 것을 보려고 한다면 나는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정보 처리 장치가 돼야 할 것이다.

미술의 지리적 확장과 양적 팽창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만큼 더 많은 좌절과 불안을 전염시킨다. 그것은 새로운 연결성이 우리에게 내린 축복이자 저주이다. 근대적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흐름들의 교차로 안에서 정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도시화는 물질과 데이터의 흐름이 촘촘하게 뒤얽힌 전 지구적 현상이며, 그 속에서 매끄러운 순환과 끊김 없는 접속은 그 자체로 사회적, 경제적, 미적 가치를 가진다. 네페르티 타디어(Neferti Tadiar)는 이 같은 편재적 도시가 흐름의 중심과 주변, 즉 능숙하게 순환에 탑승해 가치를 생산하는 삶과 그런 순환을 떠받치는 도시 인프라의 일부로서 소모되는 삶을 끊임없이 양분한다고 지적한다.4 그 경계선은 거시적 차원에서 인종적, 지리적 구획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미시적 차원에서 한 사람의 일정표를 가로지를 수도 있다. 많은 미술가들이 미술을 하는 동시에 미술을 하는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흐름의 중심과 주변을 오간다. 파도를 타기 위해 스스로 파도를 일으켜야 하는 우리의 분주한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것은 신화적인 강보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에 가깝다.

바다의 기억은 어떻게 간직되고 되살아날 수 있을까? 전 지구적 순환의 미디어는 자기를 기억하지 않는다. 파괴적 혁신, 점진적 개량, 또는 그저 신선한 외양을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 업데이트의 과정에서 링크는 끊어지고 문서는 지워지고 공간은 사라진다. 미국에서 인터넷이 활성화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출판된 과학, 기술, 의학, 법학 논문을 분석해 보면 거기 실린 참고 문헌의 웹 링크 중 과반수가 깨졌거나 변질됐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5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는 미술 관련 문서들의 상황은 그보다 더 나쁠 것이다. 이 글에 달린 링크들은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이 글은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내용의 타당성과 접근 가능성을 전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 글의 기대 수명을 그렇게 길게 잡기는 어렵다. 풍경이 변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계속 발생하는 공백들이 있다. 우리가 수명을 다했을 때 도달하는 곳은 대체로 그런 공백이다.

그 공백을 개간해서 씨앗을 저장하거나 퇴비를 만들 수 있을까? 또는 그저 작은 텃밭을 만들려고 한다면 어떤 구조물이 필요할까? 이런 질문들은 전자 도서관에 대한 아주 오래된 상상을 상기시킨다. 1923년, 그러니까 거의 100년 전에, 엘 리시츠키(El Lissitzky)는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의 잡지 『메르츠 Merz』에 전자 도서관의 가능성에 관한 짧은 글을 썼다. 그것은 미디어 기술의 변화에 부응해 문자의 공간을 어떻게 재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사변이었다. 그는 혁명적 현대주의자였기 때문에 도서관을 기억의 저장고로 보지 않았다. 옛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는 수단이었던 인쇄된 책을 다시 한번 초월한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것이 그의 질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디지털 도서관에 소장된 잡지의 스캔 이미지로 확인한다.6 오래된 생각은 붉게 변색된 지면에 간신히 보존돼 있다. 그것은 죽은 것일까 아니면 잠든 것일까? 아니면 이미 퇴비가 돼 웹 브라우저로 접근 가능한 모든 시공간에 흩뿌려졌나? 그 잔해에 또 다른 씨앗을 심는다면 어떤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코니 정의 사변적 씨앗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은 찰흙으로 다양한 종류의 씨앗을 빚었다. 코인 씨앗, 비전의 씨앗, 고양이 씨앗, 레인보우 레이저 건 씨앗, 확장하는 씨앗, 벌레 씨앗, 재생성적 씨앗, 풍요의 씨앗, 내장의 씨앗, 도넛 씨앗, 스파게티와 미트볼 씨앗, 생장하는 공동체의 심장 씨앗…7


  1. Connie Zheng, “Amidst slow violence: cascading reincarnations in Thao-Nguyen Phan’s Becoming Alluvium,” Errant Journal, no. 2, 2021, 95–105.  

  2. 한국이 공적 개발 원조 사업의 일환으로 개발에 참여한 세피안-세남노이 수력 발전소 보조댐 붕괴 사고를 말한다. 이 사고로 최소 71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A broken dam and broken promises: Laos doubles down on hydropower despite risks,” Asean Today, July 27, 2020.  

  3. Thao Nguyen Phan, “Becoming Alluvium,” Han Nefkens Foundation, 2019.  

  4. Neferti X. M. Tadiar, “By the Waysides, or, Bypass and Splendor,” Modernism/modernity, 2:4, 2018.  

  5. Jonathan Zittrain, “The Internet is Rotting,” The Atlantic, June 30, 2021.  

  6. El Lissitzky, “Topographie der Typographie,” Merz, no. 4, 1923, 47.  

  7. conniezheng.com/seed-alman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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