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박스 (Pinkbox)

김혜순
김혜순은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론집으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산문집으로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그리핀 시 문학상, 시카다 상, 삼성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명예교수이다.

지금 막 도착한 핑크 박스, 뚜껑이 열리길 기다리는 핑크박스, 이것을 껴안아 보면 멀리서 온 것의 냄새가 나. 그러나 한번 몸을 들여놓으면 그 누구도 여기를 나가지는 못해. 아아 귀여운 핑크박스. 나의 첫 아기 핑크박스. 까꿍 핑크박스. 요람에 넣고 흔들어 보고픈 핑크박스. (참고로 말하지만 하나님은 네모난 것은 만들 줄 몰라.)
포개진 핑크박스, 모두 잊고 싶어. 엄마도 잊고, 아빠도 잊고 싶어. 칼날처럼 누워서 복수만 꿈꿀 거야. 가슴을 아프게 당겨 올리는 젖 몽우리 두 개 숨어 있는 핑크박스. 핑크박스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어. 이 박스는 나보다 적어. 비좁아 죽겠어. 핑크박스엔 피 흘리는 핑크구멍. 플라스틱 테이프를 주욱 찢은 다음 핑크박스 안으로 빛을 비추면 죽어버릴 거야. 나는 병든 핑크박스, 밤낮으로 오직 핑크가 싫었어. 박스 바깥으로 말해 봐야 소용없어. 박스의 말은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아. 쉬어라 먹어라 잊어라 종소리 울리는 박스. 먹먹한 칠판 밑에서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핑크박스. 학교에 가지 않으려면 아픈 핑크박스가 되어야 해. 저기 저 건너편의 고층 아파트를 들여다 봐. 저마다의 박스에 비스듬히 누워 모두 같은 박스를 바라보고 있잖아.
찌그러진 핑크박스, 사랑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몸 속에 숨은 포로. 당신을 보지 못할 때마다 누군가 구석에 몰린 쥐처럼 핑크박스를 갉아 먹었어. 아무리 접어도 핑크박스인 핑크박스. 무엇이 들어 있냐고 물어봐야 소용없는 핑크박스. 당신이 오면 노래를 부르고, 떠다니고, 흘러넘치는 핑크박스가 될 거야. 비 오는 밤을 헤치고 나가는 거품을 문 핑크빛 배가 될 거야. 이파리 무성한 나무를 가득 심은 채 망망대해 떠가는 핑크빛 배 한 척이 될 거야. 그러나 이 삶은 오직 찢어진 구멍으로 엿보는 저 머나먼 것일 뿐, 나는 그저 빈 박스일 뿐. 찌그러져서 내팽개쳐진 핑크박스.
펼쳐진 핑크박스, 늙은 누에처럼 소중한 글씨들은 다 뱉어냈어. 언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혼자 바다 위를 떠도는 나무판자처럼. 아무것도 없어. 빗줄기 얻어맞는 핑크박스. 지하보도에 깔리자 때 묻은 발가락들이 비집고 들어오는 핑크박스. 손 시리고 발 시린 핑크박스. 나는 언제 가라앉을까.
떨어진 핑크박스, 던져진 핑크박스, 찢어진 핑크박스, 차라리 지평선을 끌어안는 게 낫지. 멀리 헤어져 껴안아 볼 수도 없어. 더러운 핑크박스, 냄새나는 핑크박스, 구겨진 핑크 박스, 흘러내리는 핑크박스, 뭐라고 뭐라고 이름이 적혀 있던 글씨도 이제는 알아보지 못하게 흐려진 핑크박스, 더러운 핑크, 낡은 핑크, 열린 구멍 핑크. 너덜거리는, 머리칼 늘어진 핑크. 카메라처럼 당신을 담았지만 필름 꺼내지자 아무것도 없는 핑크, 다시는 여기 돌아오지 못하게 해, 겨우 더러운 종이 주제에. 이 박스를 태워 버려.


Pinkbox that has just arrived. Pinkbox that waits to be opened. When I embrace
the box, it smells of a faraway place. But no one who goes inside can escape.
Ah adorable pinkbox. Pinkbox, my first baby. Hello, pinkbox. I want to rock
pinkbox in a cradle. (For your information, God doesn’t know how to make
anything rectangular.)

Folded pinkbox. 1 want to forget about everyone. Want to forget about Mommy
and Daddy. I’ll just lie down like a knife blade and dream only of revenge.
Pinkbox has two
hidden breasts that pull on the chest painfully. Blood streamed down pinkbox.
This box is smaller than me. It’s unbearably tight. Pinkbox has a bleeding
pinkhole. Pinkbox will die if the tape is ripped and light is shone inside. I’m a
sick pinkbox. I hated the pink all the time. It’s useless to try and be heard
outside the box. No one listens closely to what a box has to say. Rest, eat,
forget, bell ringing box. Pinkbox can’t speak, hear, or see under the deafdeaf
blackboard. You need to become a sick pinkbox if you don’t want to go to
school. Look over there at the high-rise apartment building. In each box boxes
lean and look out at the same boxes.

Dented pinkbox. Love has been a prisoner inside me since I was born. Someone
gnawed at pinkbox like a cornered rat every time I couldn’t see you. Pinkbox is
still a pinkbox no matter how many times it gets folded. Pointless to ask
pinkbox what’s in the box. I’ll become a pinkbox that sings, drifts about, and
overflows when you arrive. I’ll become a boat with a pink light, foaming its
way through the rainy night. Ill become a boat of pink light carrying trees with
leaves out to the widewide sea. Yet, life is nothing but a glance from a torn
hole, a distant thing. I’m just an empty box, a discarded, crushed pinkbox.

Unfolded pinkbox. Has spit out all the precious writing like an old silkworm.
When did this all happen? Like a lone plank of wood floating in the sea of
pitch-black darkness. There’s nothing. Pinkbox takes a lashing from the rain.
Dirty toes dig in as pinkbox gets flattened in the underground passage. Pinkbox
with cold hands and feet. When will I sink down?

Fallen pinkbox. Torn pinkbox, pinkbox cast away, it might be better to grab
onto the horizon. Can’t embrace it since it has parted far. Dirty pinkbox, smelly
pinkbox, crumpled pinkbox, flowing pinkbox. Pinkbox covered with faded writing,
dirty pink, old pink, open hole pink, flapping, its hair down pink. Like a
camera, pink captures you, but there is nothing after the film is taken out. Don’t
let the box return. It’s just dirty paper. Burn this box.

*이 시는 저자의 허락을 받아 재수록했습니다.
한국어 원문 시는 『당신의 첫』(서울: 문학과지성사, 2008)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영번역 최돈미.
This poem is written by Kim Hyesoon, and translated from Korean to English by Don Me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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