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재숙련

김정현
김정현은 비평과 창작이 서로 개입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2015년 “퍼포먼스의 감염 경로는?―퍼포먼스 예술의 동시대성을 찾아서”로 제 1회 SeMA-하나 평론상을 공동 수상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공저로 『멀리있는 방』(2016), 『비디오 포트레이트』(2017), 『침묵의 미래』(2020) 등이 있다.

질문의 재구성

이 글1은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기획전 《그리드 아일랜드》(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2.5.26.-8.15.)와 연계해서 작성되었다. 원고는 둘 중 한 가지 방향을 선택해서 집필하도록 요청됐다. ‘첫째, 전시 리뷰를 포함한 비평, 둘째, 국내 레지던시의 수행성에 대한 제안’이다. 이 중 두 번째 주제를 선택한 데는 필자가 2017년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연구자로 레지던시를 직접 경험하며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배경이 있다. 아티스트 레지던시는 여러 예술 중에서도 특히 미술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운용되고 있다. 한국에서 2000년대 초반에 도입되기 시작한 레지던시 제도는 동시대 미술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또한 이런 질문을 던진 기획 주체가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인 ‘제작’을 과제로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먼저 전시 서문을 통해 기획의 맥락을 간단히 살펴보자.

《그리드 아일랜드》는 미술관의 기능인 수집과 연구, 전시와 교육의 바탕이 되는 ‘담론의 생산 조건이자 과정으로서 제작(production)’에 주목하는 전시입니다. (…) 이번 전시는 (…)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한 공유와 협업을 가능케 하는 웹의 잠재력을 전시 프레임으로 설정하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제작 플랫폼 구축을 통해 새로운 창작의 방식, 제작 개념을 제안합니다. (…)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에서 작동하는 《그리드 아일랜드》를 횡단하는 장치이자 창작의 새로운 조건으로 다수의 창작자가 웹을 기반으로 상호작용하는 온라인 레지던시를 구체화합니다. 이를 위해 평면, 입체, 공간, 사운드 등 시각예술 매체를 게임의 구성 요소에 대입해 데이터를 공유하고, ‘세계(world)’를 생성하는 온라인 레지던시 〈게임-샌드박스-레지던시 Game-Sandbox-Residency〉(이하 GSR)를 구축했습니다.2

기획자가 서문의 첫 번째 문장으로 강조했듯이 이 전시는 ‘제작’에 주목한다. 그중 경기 침체와 포스트팬데믹의 상황에 입각해서 예술작품 제작 규모의 확대를 비판적으로 지적하며 탈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표현의 의미를 시대적으로 재정립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동시대 미술의 데이터화 경향을 강조하며 웹 형식 도입의 근거로 삼고, ‘게임-샌드박스-레지던시 GSR’이라는 명칭 아래 참여 작가가 각기 다뤄온 매체를 데이터로 해석해서 공유하도록 했다. 이에 관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비물질적 제작을 지향했으나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전시를 위해 다시 물질적 출력을 감행했다는 모순적 사실. 다른 하나는 GSR이라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온라인 레지던시’라고 개념화하는 사고의 비약이다.

현실 논리의 차원에서 행정적 한계를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복합적인 이면을 숙고하기 위해 미술관과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레지던시 사이, 사물-결과로서의 제작과 과정으로서의 레지던시 사이 등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레지던시 일반에 관해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은 기획의 맥락에서 레지던시 중에서도 국공립 레지던시에 관한 것으로 논의를 한정하고자 한다.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미술 제도의 주요 기관인 미술관의 맥락에서 새삼스럽게 주목한 ‘제작’의 확장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중 레지던시가 역사적으로 맡아왔다는 제작 역할은 무엇이고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앞으로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 국내, 동시대 미술 및 미술 기관의 맥락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제작, 큐레토리얼/큐레이팅 담론의 현재의 과제는 무엇인가?

아티스트 레지던시와 제작

국내 국공립 레지던시는 기관마다 구조와 운영 방식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동소이하게 발전해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매니저 박희정의 분석대로, 2000년대 초반부터 도시재생과 공공 프로그램 운영 목적으로 설립된 국공립 레지던시는 안정적인 예산 운용을 바탕으로 연간 단위의 개인 작업실과 작업장을 제공하며, 자체 보유 공간에서 오픈 스튜디오와 입주 작가 보고전 및 프로젝트 전시를 여는 것으로 정례화되었다.3 국공립미술관 산하 레지던시는 《그리드 아일랜드》처럼 레지던시 주체가 기획한 전시가 아니더라도, 사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해당 레지던시의 연계 기관인 미술관 소속 학예연구사의 초대 및 기획을 통해 입주작가의 미술관 전시 참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장의 전시 참여를 위해 발표용 작업을 준비하는 공간으로서의 레지던시는 1, 2차 생산에서 유통까지 미술/문화 산업/사업이 더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생산 공정에 밀착 관여하는 효율적인 행정적 매니지먼트 역할. 이것은 제작의 공간으로서의 레지던시의 의미를 가장 축소한 설명이다.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 매니저 박수정의 언급대로, 매니지먼트 시스템 자체가 불안정해서 기본적인 작업 환경의 구축 자체가 중요해지는 경우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4 그러나 행정적 매니지먼트 기관으로 레지던시를 바라보는 경우 레지던시를 중심으로 제작을 창작에 관한 담론으로 논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해지고, 물리적 공간, 인력, 예산의 운용에 관한 실무적 검토가 주요 과제가 된다. 물론 이것 또한 큐레이팅 실무의 정치에 관한 중요한 화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행정적 한계의 문제로 논의를 축소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큐레토리얼 담론과 큐레이팅 실무의 접점에서 제작에 관한 레지던시의 역할을 살펴보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2012-2016)은 2014년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레지던시 제도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그는 공적 자금에 의지해서 유지됐던 대안공간 운영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적 가능성으로 레지던시에 주목한다. [대안공간의] “형태를 변경해 공공기관의 기본 예산을 가지고 있는 제도권의 미술관에서 대안적 기능을 강화하는 방법”을 택하자는 것이다.5 이는 명백하게 신제도주의적인 인식이다. 서구 미술계에서는 90년대를 기점으로 그간 실험적인 큐레토리얼 방식을 주도해온 독립 큐레이터의 시대가 저물고 많은 독립 큐레이터가 미술관 등의 미술 기관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신제도주의(New Institutionalism)’ 현상과 담론이 부상했다.6 독립 큐레이터이자 쌈지스페이스 관장(1998-2008)으로 국내 대안공간의 발전을 주도했던 김홍희 역시 2008년에 경기도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때마침 개관한 경기창작센터(2009)의 설계에 관여했다.7 서구의 사례를 참고하면, 이러한 행로가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국내 상황에 따른 한국 동시대 미술 큐레토리얼 전개의 대략적인 흐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이행을 경험한 큐레이터 옌스 호프만(Jens Hoffman)은 신제도주의가 초래한 상황을 문제적으로 인식한다. 독립 큐레이터가 저마다 추구했던 상이한 형식과 방법의 비주류적인 큐레이팅이 국공립 미술관의 제도를 거치면서 “보다 큰 규모의 실험적인 그룹 전시”로 나타났으나 이는 대중적으로 실패했다. 또한 기관에 기용된 독립 큐레이터는 관객 수 증가와 기금 확보라는 목표에 매여있는 보수적인 기관과의 타협이 불가피해서 ‘실험성이 단지 알리바이로만 작용’한다며 현실을 냉혹하게 진단한다.8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고려할 때, 국내에서 신제도주의는 동시대 미술 실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까? 특히, 국공립 레지던시는 제도권 미술관의 대안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

올해(2022)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서 《그리드 아일랜드》 전시에 참여한 작가 이은솔은 “레지던시에 있는 작가들은 너무 바쁩니다. (…) 개별 스튜디오가 공장처럼 돌아가, 말 그대로 ‘제작’은 확실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며, 예술 창작이 기계적 생산으로 변질된 상황을 자조적으로 언급한다. 그와 함께 전시 연계 토크에 참여한 독립 큐레이터 조주리 역시 “모든 것이 발 빠른 성과주의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미술관과 레지던시에서 기획전시와 입주제도를 통해 가시화되는 제작의 속도와 방향, 철학에 대하여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며 비판적 시선을 던진다. 이들의 지적에 따르면 국내 전개 약 20여 년 만에 돌아본 레지던시 제도는 예술가와 기획자의 실험적 창작을 지원하는 대안적 기지 역할을 다소 압도하는 성과 중심의 미술 산업과 공공 기관 사업의 생산 기지로 작동하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담당 학예연구사 정시우는 2010년대 중반에 해당 기관 입주 지원자 수 감소 등을 근거로 들어 국내 국공립 레지던시가 쇠퇴기로 들어섰으며 “국공립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활동이 부흥했다”라고 평가한다.9 정량적 자료만으로 레지던시의 대안적 역할의 감퇴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2014-2015년경의 풍경을 기억한다면 그러한 심증에 조금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과거 정시우가 공동 운영자로 있던 교역소를 포함해서 반지하, 케이크갤러리, 커먼센터, 시청각과 같이 당시에 독립 큐레이터와 작가 등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공간들, 그리고 이듬해에도 이어진 단기 임대 전시 공간을 만드는 행위가 크게 주목받았다. 이들 ‘신생 공간’의 활약을 지지하며 ‘국립현대미술관에 청년관을 신설하라’는 주장이 부상하기도 했다. 자생적으로 시작한 문화적 권력 투쟁이 다시 제도적 수용을 요구한 것이다. 신생 공간과 청년 세대가 주도하는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것으로서의 집단적인 실천’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국공립미술관에 청년관이 생기지도 않았지만,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을 위한 제도적 논의는 활성화되었다. 국공립미술관은 전시 참여 작가의 이력을 보수적으로 평가하기 마련이지만, 그중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로운 현상에 빠르게 반응하며 이들이 참여한 그룹전을 개최했고(《서울 바벨》(2015)), 2010년대 이래로 점진적으로 확대된 문화예술 공적 지원 사업에서 ‘청년예술가’ 지원 사업이 추가되면서, 청년 세대가 제도권 내 세력 집단으로 공식화되고, 집단적 실험은 다시 일부 작가 개인이나 콜렉티브의 성취로 갈무리되었다.10

최근에는 예술가 집단의 네트워크-창작-공간의 중심이 대안공간이든, 레지던시든, 신생공간이든 어느 한 곳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산발적이고, 파편적으로, 여러 상이하고 이질적인 태도와 지향성을 지닌 주체들이 흩어지고 분리되어 제각각의 방식으로 소그룹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여러모로 현재의 국공립 레지던시가 미술계 안팎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한편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레지던시가 국내 미술계의 창작문화 및 제도적 변화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또한 현재 진행형으로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이 문단의 첫머리에서 ‘네트워크-창작-공간’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여러 예술 장르 중에 문학과 함께 비교적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창작 형식에 머물러 있던 미술이 최근과 같이 동료 집단의 긴밀한 상호 작용과 협업을 통해 작동하는 것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레지던시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레지던시는 여전히 여러 국공립 미술 기관 및 제도 중에 가장 개방적이고 유연한 곳으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국고지원사업과 국공립미술관의 사업이 복잡한 증빙 절차와 1년 이내의 결과 환수를 조건으로 하는 반면, 레지던시는 기관 특성상 전시 개최나 관람객 유치 등의 성과 압박과 예산 운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그만큼 고정 운영비 외의 가용 예산의 규모가 크지 않다.) 유연한 조건은 더 실험적이고 우연적인 프로젝트의 실행을 지지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레지던시의 큐레토리얼에 대한 연구는 이론, 제도, 정책과 같이 추상적이거나 거시적인 차원으로 넘어가기 이전에, 레지던시에서 벌어졌던 활동, 협업, 관계, 대화, 아이디어 등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최근의 기억할만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역사적인 사례 연구는 추후의 과제로 남긴다.

창동레지던시에서 열린 카로 악포키에르(Karo Akpokiere)의 《분실된 그림들》(2022) 전시 장면. 사진: 최연근.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올해 초 대통령 선거 기간에 창동레지던시 전시실 중 하나가 대통령 선거 투표소로 사용되는 동안에 있었던 일이다. 전시실에 공개되었던 《분실된 그림들》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다. 2018년 창동레지던시에 입주했던 나이지리아 출생 독일 작가 카로 악포키에르(Karo Akpokiere)는 입주 당시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계기로 입주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경찰청 유실물 종합관리시스템에 올라오는 유실물을 주시하며 2년간 드로잉을 남기고 신문 형태의 인쇄물로 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스트 드로잉(Lost Drawings) ― 누군가의 분실된 기억이 담긴 그림들〉(2022)이 대통령 선거 기간 중 투표소로 사용되는 공간 반대편 전시실에 벽보 형태로 전시되었다.11 카로의 프로젝트는 창동레지던시 출신작가 후속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실행되었다. 일반적으로 국공립 레지던시의 전시나 프로젝트 지원 사업이 입주 작가의 입주 해당 연도에 한정되거나, 입주 이전 및 입주 기간 중의 사전 기획서를 요구하고, 모든 입주 작가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지는 것과 달리, 창동레지던시의 후속지원 사업은 선택적이고 비정기적으로 운용되며 입주 기간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레지던시 주체가 작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하며 실현해냈다. 이렇게 창작의 시간성과 레지던시와의 협업이 입주 기간인 1년(해외 작가의 경우 3개월) 단위를 넘어 보다 장기적으로 연장됨으로써 비로소 구현할 수 있는 작업이 있다.

코로나팬데믹 19의 발발로 빚어진 초유의 사태에 국공립 미술관이 어김없이 타격을 입은 시기에 레지던시의 유동성은 창작의 변칙을 찾는 주요 동력이 됐다. 여기서 ‘창작의 변칙’이란 표현으로 일컫고자 하는 것은 창작의 실패나 포기에 대한 단순한 변명이나 방만한 요식행위가 아니다.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을 전제로 하되 그에 대한 유의미한 변형을 가한 경우에 제한해서 보자.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 보고전의 한 기획은 이런 면에서 눈여겨볼 만했다. 팬데믹의 여파로 해외 입주작가의 방문이 무기한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있던 당시에 독일 작가 요하네스 후고 스톨 역시 입주 취소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 입주 작가 중 9인이 요하네스와 온라인으로 소통하며 그를 대신해서 집단적 협업을 통해 가상의 스튜디오를 조성해서 입주작가 보고전이 열리는 시기에 공개했다. 9인의 참여 작가는 각기 다른 층위에서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이미지와 매체로 시각적 구성물을 내놓았다. 부재하는 자의 대리는 무한한 상상의 가능성을 담보하기도 하고, 대리할 수 없음의 인식에서 오는 사고와 감각의 불투명성으로 시각화되기도 하고, 부재를 더 이상 특정한 인물의 존재로 한정하지 않고 추상화하여 부재 일반에 대한 정동(affection)이자 작가 없는 스튜디오의 유령성을 이미지화하는 데로 흐르기도 했다.

고양레지던시 입주 작가 보고전 《2021 고양레지던시 오픈스튜디오 17: 어느 날 갑자기》 중 요하네스 후고 스톨(Johannes Hugo Stoll)의 스튜디오.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작가의 스튜디오는 기본적으로는 그 공간을 점유한 작가의 저자성이 표상된 작품을 준비하고 만드는 공간이다. 그러나 국공립 레지던시는 작가의 개인적 공간을 넘어 같은 시기에 한 건물의 공간을 사용하는 작가 다수의 저자성이 교차하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공동의 저자성은 때로 개인 작가를 그저 괴롭히는 것으로 그칠 수 있다. 사적으로 마련한 스튜디오이든 국공립 기관의 스튜디오이든 홀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길 바라는 작가도 사실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태도가 비난받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레지던시가 단지 작가에게 제공되는 인적, 물리적 서비스 시설에 그치지 않고, 미술관의 대안적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는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주체들 간의 교류와 예술적 실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실무와 담론의 접점에서

제작이라는 개념은 그 단어의 범용한 속성으로 인해 일상적이고 통속적인 차원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재료를 다뤄 사물을 만든다’는 사전적 정의는 지나치게 간략하고 중립적으로 서술되어, 제작 행위에 담긴 역사적 변천사를 기록하거나 환기하지 못한다. 제작은 단순히 사물로서의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한 충분조건이나 도구적인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동시대 미술의 담론적 차원에서 제작의 개념을 숙고하기 위해 그것의 역사적 변천과 현대적, 동시대적 이념을 고려해야 한다. 장인이 견습공에게만 비밀스럽게 비법을 전수하던 고대부터, 산업화를 거치며 기계 생산과 노동 소외를 낳은 근대와 그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의 제작의 개념을 떠올린 근대 이후 예술에 자율성에 관한 이념, 그리고 다시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 당대 문화경제의 논리에 대한 비평 역할을 수행하는 제작까지 말이다.

근대 이후 제작 개념의 변천은 미술관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특히 현대 미술 및 동시대 미술에 관해, 미술관과 큐레이터의 인식과 역할은 지난 약 한 세기 반 동안 큰 변화를 겪었다. 1960년대 이후 현대 미술의 매체와 형식이 다변화하며 큐레이터의 역할도 함께 확장되었다. 그러나 예술작품이나 전시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큐레이터의 역할, 큐레이팅과 큐레토리얼 담론에 관한 논의는 비교적 최근에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담론 형성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인 큐레이터 폴 오닐(Paul O’Neil)은 본인의 기획 편저에 참여한 필자들의 논의를 종합해서 큐레이터의 역할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비유적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매개자, 산파, DJ, 에이전트, 매니저, 플랫폼 제공자, 셀프 프로모터, 예언자, 요정, 신, 케어기버, 협력자, 문화매개자, 조력자, 교섭자, 문화 선동가’ 등과 같은 것이다.12 이러한 사정은 국내에서도 예외가 아니라, 각종 전시 및 프로젝트의 크레딧 표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명칭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명칭들은 큐레이터의 역할 분화와 확장 또는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무쌍함에 대한 방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큐레토리얼 접근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큐레이터의 역할이 더 이상 작품이나 예술가의 관리자 역할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옌스 호프만의 주장은 절반만 맞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국내 사정에는 말이다.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시티비엔날레 큐레이터 등을 지낸 이지원은 큐레이터 김신재의 기획으로 열린 좌담 〈프로젝트, 프로듀서, 프로덕션, 프랙티스〉(원룸, 2018)에서 “요즘 한국의 미술 기관은 큐레이터들이 가장 미술과 가까운 것부터 결국 포기하면서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미술은 더 이상 자족적인 오브제가 아니며, 큐레이터는 더 이상 오브제로서의 작품을 관리하고 선별하고 디스플레이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미술의 형식은 매우 변화무쌍하며, 주제적, 공간적, 방법론적, 관객 체험의 방식 등에 있어서 다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큐레이터의 역할 변화가 강력하게 요구되는데도 불구하고 기관은 적절한 대응에 실패했다. 그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국공립 미술 기관이 ‘코디네이터’라는 역할을 두고 작가와 기관 사이의 매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임기응변식으로 메워오려고만 했다는 이지원의 비판은 지나친 일반화의 우려는 있으나 타당하게 들린다.13 이때 김신재는 “큐레이터의 역할 안에 프로덕션이라는 개념이 이미 어떤 형태로든 있었고, 프로듀서라는 게 그 역할을 재배열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입장을 밝혔는데,14 두 사람의 관점의 차이는 전자가 현재 국내 기관의 문제에 집중하는 데 반해 후자가 호프만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맥락에서 살피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당 좌담은 제작과 제작자가 하는 일을 주제로 하면서 미술(이지원)뿐 아니라 영화/무빙이미지(김신재)와 공연(신진영) 분야의 제작 경험을 가진 패널들이 모여 ‘제작’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직함이나 역할 아래 서로 다른 예술 장르에서의 활동을 비교해보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미술에서 보통 큐레이터, 큐레이팅이라고 칭하는 것을 별다른 설명 없이 프로듀서, 프로듀싱과 구분하지 않고 치환하여 논의한다. 주로 미술계 작가들과 협업해온 이지원이 소개한 제작 사례를 보면 영상이나 설치 등 규모가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따라 영화나 공연 분야의 창작에서 대표 작가와 협업하는 다양한 ‘제작진’의 역할을 제작-큐레이터가 담당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매칭이 되지만, 실은 모든 미술 작품의 제작이 그와 같은 과정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나 공연의 제작 시스템에 비할 만큼 큐레이터가 실무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작품의 규모 및 영상 등의 특정한 매체 선정이 미술 내 제작 담론 형성의 전제가 되는 것일까? 영상이나 라이브 퍼포먼스와 같은 매체가 일차적으로 제작을 실무적 관점에서 가시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담론적 차원에서는 비단 특정 매체, 규모, 실무적 경험에 한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령, 여전히 영상 매체의 경우에 해당하지만, 영상 작가 차재민은 “내용이 협력을 담보하는지, 다자가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내용에 담겨 있는지, 이런 것들이 프로덕션에서 중요한 쟁점”이라고 밝히며, 영화 제작 현장의 사례를 살펴본다. 그는 일반적인 상업 영화에서 전문 제작진이 세분화된 크레딧을 분담하는 경우보다, 여러 제작진이 다양한 역할을 구분 없이 수행하고 그에 따라 독특하게 표기된 영화 크레딧의 경우에 주목한다.15 영화 크레딧에 대한 연구는 제작 과정의 세세한 역할을 의식적으로 환기한다. 미술에서 표현 매체가 개인 작가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매우 복잡해지고, 전문적이고 헌신적인 다양한 협력자들의 존재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지만, 협업자들의 기여와 역할의 중요성은 아직 충분히 의식되지 못하고, 복합적인 협업의 결과로서의 작품 역시 개인적인 창작으로 인식되는 데 그치는 경향이 있다. ‘제작’은 단지 큐레이터의 확장된 실무의 영역에 한정되는 과제가 아니다. 그동안 실행되어온 실험적이고 다원적인 복합 매체 작품 및 프로젝트에서 간과되었던 협업의 문제, 또는 창작 과정에서 전보다 적극적으로 실험할 과제로서 세부적인 과정에서의 협업의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한다. 이는 단지 대형 제작에만 유효한 과제가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창작 과정에 잠재된 협업의 가능성을 되짚어 보도록 한다.

제작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미술의 실무와 담론을 교차시켜 보자. 제작은 실무의 차원에서 미술 기관의 관습적인 행정으로 인해 방치된 창작의 과정을 중요한 과제로서 환기한다. 큐레이터가 특수한 고용 조건의 특정한 직급을 일컫는 것으로 왜곡되는 현상의 이면에서, 큐레이터의 직업적 역할, “노동 분업의 실패”를 지시한다.16 제작은 큐레토리얼 담론의 차원에서 오늘날 점차 시각적 스펙터클 자체보다 중요해지는 리서치 기반의 교육적이고 유권자적인(constituent) 프로젝트를 촉구하는 중요한 방법론적 프레임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작가주의 미학을 실현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실행 인력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여기 모인 사람들이 공동으로 무엇을 할지, 공동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데서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국공립 레지던시가 그러한 실험의 거점이 될 수 있을까? 우연히 한데 모인 작가, 기획자, 스태프가 당장의 결과와 성과 발표의 압박 없이 수시로 공동의 대화를 벌이고, 고정된 역할에서 벗어나 제작 과정의 다양한 역할을 맡아봄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개별적인 시도를 일회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정치적, 역사적, 비평적, 이론적으로 축적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이 글은 미술관의 ‘제작’ 활동에 주목하는 전시 《그리드 아일랜드》(2022)와 맞물려 기획되었으며,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와 전시의제의 소주제를 발굴하는 2022 SeMA 의제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록되었습니다.


  1. 이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정시우 학예연구사,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예술창작스튜디오 박희정 매니저, 인천아트플랫폼 이은진 큐레이터, 큐레이터 김신재와 서면 및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고 자료 협조를 받았다. 

  2.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그리드 아일랜드》 전시 소개 페이지,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039819

  3.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매니저인 박희정의 글은 2017년도 기준 국내 레지던시에 관한 구체적인 데이터와 현황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박희정, 「한국의 시각예술 지원 정보 (2) : 한국의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_현황과 제안들」, 『더 아트로』, 2017년 12월 12일, https://www.theartro.kr/kor/features/features_view.asp?idx=1342&b_code=10e

  4. 《그리드 아일랜드》 전시 연계 대담 기록 「그레이 - 샌드박스 - 레지던시」, 『모두의 연구실 코랄(세마 코랄)』, 서울시립미술관, 2022년 10월 25일, http://semacoral.org/features/grey-sandbox-residency 참조. 

  5. 김해주, 「[피플/미술전문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더아트로』, 2011년 1월 14일, https://www.theartro.kr/kor/features/features_view.asp?idx=1095&b_code=32e&page=1&searchColumn=&searchKeyword=&b_ex2=. 

  6. Jonas Ekeberg ed., New Institutionalsim (Oslo: Office for Contemporary Art Norway, 2003). 

  7. 최근 (구) 경기창작센터의 정책 변화에도 관여하고 있다. 이연우, 「경기창작센터→경기창작캠퍼스로 전환···경기서부권 복합문화공간 자리매김」, 『경기일보』, 2022년 3월 31일.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20331580044

  8. 옌스 호프만, 「큐레이팅의 어떤 경향」, 폴 오닐 엮음, 『큐레이팅의 주제들』, 변현주 옮김(서울: 더플로어플랜, 2021), 163-168 참조. 

  9. 필자와의 화상 인터뷰(2022년 7월 7일)에서 정시우 학예연구사가 발언한 내용을 참조했다. 

  10. 참고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청년예술가 지원사업의 신청자격을 ‘만 39세 이하’로 설정하고 있으며, 서울문화재단 등 주요 지역문화예술재단의 경우에도 기준이 대동소이하다. 

  11. 필자와의 서면 인터뷰 답변서(2022년 9월 9일) 중 레지던시가 제작에 관해 긴밀하게 협조한 사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창동예술창작스튜디오 박희정 매니저의 답변 참조. 

  12. 「여는 글: 애니 플레처가 인터뷰한 폴 오닐」, 『큐레이팅의 주제들』, 13-24 참고. 

  13. 김신재가 진행하고 이지원과 신진영이 패널로 참여한 좌담 〈프로젝트, 프로듀서, 프로덕션, 프랙티스〉(원룸, 2018년 10월 20일) 녹취록에서 이지원의 발언 참조. 

  14. 좌담 〈프로젝트, 프로듀서, 프로덕션, 프랙티스〉 녹취록에서 김신재의 발언 참조. 

  15. 차재민, 김신재, 「만드는 방식이 우리를 결정한다」, 『차재민, 사랑폭탄』(2019), 86-87. 

  16. Simon Sheikh, “From Para to Post: The Rise and Fall of Curatorial Reason,” Springerin, Issue 1 (2017), https://www.springerin.at/en/2017/1/von-para-zu-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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