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 샌드박스 - 레지던시 (Grey - Sandbox - Residency)

권도연
권도연은 기억의 단편들을 현실로 소환시켜 사진으로 재구성하고, 현존했던 대상들을 지금 마주하는 세계로 교차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주요 개인전으로 《정지비행》(021 갤러리, 2022), 《SF》(갤러리 소소, 2020), 《북한산》(갤러리누크, 2019), 《섬광기억》(갤러리룩스, 2018), 《고고학》(KT&G 상상마당, 2015) 등이 있으며, 미국 포토페스트 비엔날레, 스페인 포토에스파냐 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안성석
안성석은 무기력하고 비참한 소식들이 전세계에서 쏟아져 나오지만, 마지못해 산다는 말 보다는 태어난 김에 의미 있는 삶을 살며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드는데 많은 힘을 쓴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30대 후반의 시각 예술 작가이다. 전시 《미래가 그립나요?》(현대모터스튜디오 부산, 2021)에서 〈어린이〉(2021),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9)에서 〈나는 울면서 태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다〉(2019)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은솔
이은솔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킴벌리 리(Kimberly Lee) 라는 가상 캐릭터를 만들어 그를 유지하고 보수한다. 작가는 개별 기업들의 온라인 경제 활동들이 얽혀 하나의 거대한 프로세스를 형성하는 경제 구조 안에서 디지털 객체의 존재가치를 탐구한다. 동시에, 다양한 플랫폼과 미래의 거주지를 연구하며 네트워크 내 킴벌리의 생존을 위한 거주환경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주요 작업으로 〈킴벌리와 친구들(Kimberly & Friends)〉(2022), 〈Firefly〉(2021)등이 있다.
박수정
박수정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현대미술사로 석사를 마치고, 현재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에서 근무하며 레지던시 프로그램 기획을 맡고 있다. 금천예술공장 오픈스튜디오 프로젝트 전시 ⟪Life Logging⟫(금천예술공장, 2021) 기획을 시작으로, 창고동 스크리닝 프로젝트 ⟪TEASER⟫, 실험프로젝트 전시 기획 등 레지던시를 중심으로 예술창작 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동시대 예술의 실천방식과 환경적 조건을 탐구하고 있다.
정시우
정시우는 서울 외곽에 위치했던 공간 교역소(2014–2016)를 공동 운영했으며 플랫폼엘, 부산비엔날레, 현대자동차 제로원(ZER01NE)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하며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운영을 맡았고 《그리드 아일랜드》(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2)를 담당했다. 《폴리곤 플래시》(인사미술공간, 2018), 《굿즈》(세종문화회관, 2015) 기획에 참여했으며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 생산과 소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조주리
조주리는 독립 기획자이자 연구자로 심리학, 미술사, 디자인문화역사, 문화정책 연구 등 다양한 학제적 연구 배경을 갖고 있다. 연구 기반의 전시 만들기와 비평적 글쓰기에 집중하며, 미술을 통한 지식 생산과 다양한 협업 방법론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기획한 전시로는 《나의 잠》(문화역284 서울, 2022), 《트리플 링; 복각본들, 어제 글피로부터》(문화역 284서울, 2021), 《화이트랩소디》(우란문화재단, 2020), 《끈질기게, 끈질긴》(d/p, 2019), 《베틀, 배틀》(토탈미술관, 2018), 《동백꽃 밀푀유》(아르코미술관, 2016), 《리서치,리:리서치》(탈영역 우정국, 2016) 등이 있으며, 그 외 다수의 국제교류전과 공공기획에 참여해왔다.

〈그레이 - 샌드박스 - 레지던시 (Grey - Sandbox - Residency)〉는 《그리드 아일랜드(Glid Island)》 전시와 연계해서 진행한 비공개 토크 프로그램이다. 이 토크는 2018년에 《난지아트쇼》를 통해 선보인 《회색전집(The Collected Works of Grey Literature)》과 2022년에 서울시립미술관의 2022년 기관의제 ‘제작’ 주제전 《그리드 아일랜드》를 통해 공개한 GSR(Game - Sandbox - Residency)의 예시를 통해, 물리적 작품으로 수렴되는 ‘미술제도’ 주변에서 생산되는 광범위한 유무형의 데이터를 다룬다. 《그리드 아일랜드》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미디어에서 데이터로 넘어가는 당대 시각예술의 미학’으로, 이 전시는 미술관의 ‘제작’ 기능을 수행하는 ‘레지던시’를 호출하고 있다. 레지던시가 매체와 작품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미술관의 기능인 제작을 담당할 수 있을지 논의하고, 좀 더 넓은 범주에서 작품 제작의 인프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회색전집》 제작론

조주리: 저는 2018년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연구자로 참여했습니다. 입주 당시 저는 레지던시를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생산하는 오피스 개념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레지던시에 입주한 연구자는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드 아일랜드》 전시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제가 레지던시에 있었던 시기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이었고, 당시 입주 작가들의 연령은 요즘에 비해 높았던 것 같습니다. 레지던시를 기반으로 하여 활동하는 작가의 폭이 최근 MZ세대로까지 확장되면서, 한 때 일종의 연대의식이나 우정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했던 낭만적, 집단적 정서가 점차 소거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일 년 동안 레지던시에 있으면서, 기관에서 으레 기대하는 기획 전시나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 전시에서 작품으로, 작품에서 작가로, 다시 작가의 생각으로, 생각의 기원과 주변으로 이동하며 구체적인 창작과 제작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즉, 미술적 담론을 일상의 층위로 계속 쪼개 나가며 실체적인 데이터를 수집하고 나아가 편집하고자 했습니다. 입주 초기, 레지던시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과정을 기록하고 결과물을 축적해 나갈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다가 ‘회색 문헌(Grey Paper)’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문헌정보학에서 사용하는 분류 체계이자 서지학 용어로, 통상적으로 문서를 분류할 때 3단계로 분류합니다. ‘블랙 페이퍼’는 대외비, 즉 아무한테도 공개할 수 없는 문서이고 ‘화이트 페이퍼’는 백서로, 모두에게 낱낱이 공개되는 문서입니다. 둘 사이에 있는 모든 문서들을 ‘회색 문헌’이라 부르는데, 이는 일부는 공개되고 일부는 공개되지 않은 문헌을 가리킵니다. 다양한 정보로 가득 차 있는 레지던시의 인적 구성이 마치 도서관처럼 느껴졌고, 각 작가들을 전통적인 개념의 서적으로 간주하는 접근방법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공공 기관에서 운영하는 예술가 집합체가 갖는 일시적 개방성과 내용적 불투명성을 회색 문헌과 연결해 보았습니다. 입주 기간 동안 회색 문헌이 ‘회색 전집’으로 확장해 나가는 점진적인 과정을 상상하면서요.

《회색 전집》을 위한 사전 프로그램 겸 ‘휴먼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난지 리브로’ 참여를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12기 작가들에게 제안하는 이메일, 2018. 3. 25. 《회색 전집》 자료집 영상 보기 링크. 제공: 조주리.
《회색 전집》을 위한 사전 프로그램 겸 ‘휴먼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난지 리브로’, 2018. 4. 제공: 조주리.

오래된 기획 방식이지만, ‘휴먼 라이브러리’, 즉 사람에게 사람을 빌려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는 도서 축제에서 한때 많이 유효하게 쓰였던 기획 문법입니다. 사람을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해 본다면 책 제목이나 키워드, 분류 체계가 있어야 하기에, 저는 《회색전집》에 참여한 입주 작가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예술적 서지를 구성하도록 하였습니다. 작가들은 의외라면 의외일 수 있는 일, 혹은 너무 뻔히 기대되는 내용을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해서 일주일 동안 서로의 스튜디오에서 휴먼 라이브러리 프로그램을 열었습니다. 각자의 기질과 취향, 과거 이력 등 작업 외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입주 당시 공식적으로 작가 PT를 듣긴 했지만, ‘난지 리브로’로 명명한 휴먼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는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풍부한 요소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다른 작가들과 기획을 도모하거나 새로운 작업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치 같은 층 또는 같은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입주민들이 반상회하듯, 2주에 한 번씩 회의를 하며 서로 부담이 안 되는 선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그다지 의미 없어 보이는 작은 단서나 작가들 간에 주고받는 사진 혹은 정리되지 않은 글귀 같은 것들을 편집해 컴필레이션 북으로 구성하는 기획 방향을 작가들에게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만으로 동료 작가들의 작업 세계나 그들이 추구하는 바에 대한 총체적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지했고, 파편적인 것들이 하나둘 쌓여 조금 더 긴 서사로 엮이는 과정을 함께 만들어 가고자 했습니다. 10월 즈음 되니 얼추 데이터가 모였고, 12월에 열리는 오픈 스튜디오에서 결과를 보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색전집』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을 가진 한 권의 책이 나왔고, 돌이켜 보니 이 프로젝트는 즐거운 경험 이상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결코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이 기획적 방법론에 침투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잭 블랙 트리뷰트 연주 퍼포먼스, d/p, 2019. 8. 15.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12기 작가 협업. 제공: 조주리.

제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나온 다음 해에 기획한 전시 《끈질기게, 끈질긴》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끈질기게, 끈질긴》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있을 때 인연을 맺게 된 분들을 초대해서 만든 전시로, 낙원악기상가의 예술공간 d/p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보통 기획자들이 미술대학의 동기나 가까운 지인들을 모아 전시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데, 저에게만큼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무척 기억에 남습니다. 이는 전시 주제와 전달하고자 하는 담론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지지해 줄 작가들을 규합하여 기획 전시를 실천했던 기존의 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 내지는 그로부터 일종의 ‘퇴행’을 감행한 전시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동료들의 특징을 떠올리며 구상한 전시는 그전과 같은 주제 기획전이 아니라 훨씬 관계적이고 과정 지향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전시를 목표로 록 밴드를 조직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합주를 하며 6개월간 트레이닝을 거친 결과물을 소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회색전집》이 일종의 데이터 전시이자 출판 포맷이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굉장히 육체적이고 수행적인 방식을 취한 것으로, 전시라기보다는 퍼포먼스, 음악 공연에 가까웠습니다.

형식의 차이는 있지만 《회색전집》은 책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이지 《그리드 아일랜드》와 비슷한 구성이라고 봅니다. 반면 《끈질기게, 끈질긴》 전시와 출판물 프로젝트는 멤버들의 헌사의 대상이었던 잭 블랙을 초대하는 일이 부끄럽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밴드 음악을 연습하고, 콘서트를 보러 영국으로 떠나고, 함께 헌정서를 만드는 귀찮은 과정을 말 그대로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쌓아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역 구성적인 프로젝트’는 다시없을 방식의 기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코로나 원년이 되었고 전시를 만드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기획 초기에, 큐레이터로서 가진 전시의 의제와 작품들 간의 관계 맺기를 공간 안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고자 물리적 접점을 만드는 것에 많은 공을 쏟아부었던 것 같습니다. 대규모 기획 전시의 숙명이기도 하겠지만,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만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도 합니다. 그냥 작품이 아니라 그 전후 단계나 각자의 매니페스토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전시 이외의 실천들이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물리적 전시에 대한 고민은 코로나 이후 강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전시하지 않고도 전시할 수 있는 방법, 큐레이팅의 디지털적 확산,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청취하는 과정의 프로그램화에 관심을 갖게 된 시점이었습니다.

2020년에 기획했던 전시는 일종의 ‘큐레토리얼(curatorial) 페스티벌’이었는데, 그냥 행사명을 《기획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기획전》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행운의 기획 편지’를 발송해 참여를 독려하고, 참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다른 이에게 전달해달라고 요청해서, 약 한 달 동안 총 134명 정도의 기획자가 모이게 된 온·오프라인 기획 페스티벌이었습니다. 전시장 안에는 134개의 포스터만 모여 있었고, 실질적으로 작품은 선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직 지면으로만 존재하는 기획의 매니페스토가 소환되었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아흐레 동안 기획 발표회와 토크, 콘서트, 경품 추첨, 각자 원하는 기획상을 가져갈 수 있는 시상식 같은 소소한 이벤트가 진행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저의 기획 역사에서 가장 디지털적인 혹은 물질이 축소된 전시였습니다.

전시 기획에 관한 선언적 문구를 담은 포스터 134장을 설치한 《기획전》 전시 장면, 문화비축기지 T5, 2020. 7. 제공: 조주리.
《기획전》의 데이터 분석 보고서, 2020. 《기획전》 보고서 전체 PDF 보기 링크. 제공: 조주리.

따지고 보면 이 전시의 기획도 《끈질기게, 끈질긴》이 전제하는 육체적 수행, 관계적 미술 및 퍼포먼스를 전시장에서 보여줘야 하는 부담에 대항한 새로운 ‘안티테제’였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또 다른 양상으로 기획을 지속하고 있지만, 제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지원했을 때만 해도 저의 큐레이팅 서사가 이렇게 역동적으로 진행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작가들과의 인간적인 유대나 미술계 안에서의 친목 관계 같은 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기획자였고, 그와 선을 긋는 것이 오히려 직업 윤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지던시의 경험을 통해 일종의 궤도 이탈이 일어났습니다. 작가적 삶의 일부분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장기간 바라보며 공감하는 일이 글쓰기와 전시 만들기에 분명한 영향력을 미치고, 장점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작가를 리서치했던 방식은 대체로 전시 관람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들이 쌓아 온 전시 이력 및 키워드를 수집·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기획의 ‘재료’였던 작업 포트폴리오가 기획적 맥락 안에서 정교하게 배치되고, 얼마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전시를 위한 양적 조사를 하고 있고, 사전에 그려놓은 기획의 시놉시스를 따르는 방식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획전》을 통해 저는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흔들리는 상황 안에서 기획의 불투명성과 무력함을 수긍하게 되었고, 각자가 독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상당한 동일성을 갖는 시대의 부산물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기획전》은 진행 과정과 추진 방식을 여러 단계를 거쳐 참여자에게 리포트하고, 전시에 관한 70여 장의 통계 시각화 자료까지 만들며 마무리하였습니다. 저는 원래 대단히 꼼꼼하거나 기록물을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경험하면서, 넘쳐나는 아카이브 속에서 작가와 관련된 미시적인 데이터, 그리고 작품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진 않지만 증언해 줄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데이터들이 ‘새로운 내용’을 구성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시를 통해 이를 잘 기록하고 축적하려는 관성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주로 의뢰받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프로세스 하나하나를 남기거나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동되는 플랫폼을 운영하기는 어렵습니다. 구태여 지속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 성격의 일을 할 때 갖는 기준선과 대칭점을 늘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가 《회색전집》, ‘회색 문헌’으로부터 시작해 《기획전》까지 연결되는 서사였습니다.

권도연: 저도 《기획전》에 참여했는데, 신기했습니다. 미술계 시스템에서 하나의 뜻하지 않은 괴수가 튀어나온 것 같은 굉장히 흥미로운 전시였습니다. 전시에 관한 통계 자료를 만든 것이 너무 재밌었습니다.

조주리: 과정은 코미디를 표방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통계 자료는 굉장히 실증적인 자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는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정보들이 모여 하나로 수렴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또 완전히 의미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작가들도, 기획자들도 한 십 년 동안 본인 기획만 쳐다보면서 남과 다름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눈을 들어 수평적인 시각으로 보면, 다들 비슷한 것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쓰는 어휘나 기획의 숙련도 같은 미시적인 차이 때문에 서로가 굉장히 다르다는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이삼 년 동안 대두된 기획 대부분이 공유 플랫폼을 만들거나, 디지털 문화에 적합한 무언가를 해 보고, 제도가 억압하는 여러 조건에서 자유로운 작업을 하려는 시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물질성에 대한 탐구나 생태 이슈, 조형에 대한 고민 등 유사한 의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요. 다만 여러 전시와 작품이 서로 우위를 가리거나 감각의 차이를 증명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권도연: 저는 《기획전》이 시스템 안에서의 기획 과정, 즉 기금 기획서를 작성하고, 작가를 섭외하고, 고된 감정적·육체적 노동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많이 겪은 기획자의 블랙 코미디 같았습니다. 기획자가 스스로를 희화화하며 불특정 다수와 낄낄거리면서 웃는 점이 흥미로웠고, 미술계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드 아일랜드》 전시 연계 토크 프로그램 〈그레이-샌드박스-레지던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세마 러닝 스테이션, 2022. 7. 29. 토론자: 권도연, 안성석, 이은솔, 박수정, 정시우, 조주리. 사진: 홍철기.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그리드 아일랜드》 전시 연계 토크 프로그램 〈그레이-샌드박스-레지던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세마 러닝 스테이션, 2022. 7. 29. 토론자: 권도연, 안성석, 이은솔, 박수정, 정시우, 조주리. 사진: 홍철기.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레지던시’ 특정적 전시와 제작

조주리: 저는 박수정 주임이 기획한 금천예술공장의 《온앤오프(on&off)》 전시를 방문했을 때, 좋은 의미로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의 경우, 외부 기획자로서 갑자기 어떤 영역에 침범하거나, 이미 만들어진 관계 속에 개입해 전시를 구성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는데요. 그와 달리 박수정 주임은 기관 안에서 행정 업무와 프로그램 기획을 하면서 작가를 돌보는 역할을 해 오셨고, 그 점이 기획에 내밀한 방식으로 반영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수정: 이전까지 금천예술공장은 외부 기획자를 섭외하여, 기획적으로 접점이 없는 16팀의 작가들을 모으는 형태의 전시 기획을 부탁드렸습니다.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분야에 접점을 두는 재단의 성격과 인력 구성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보다 경험이 많은 전문가에게 기회를 넘기며 레지던시 운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금천예술공장을 대표하던 프로그램인 ‘다빈치 크리에이티브’가 2020년을 기점으로 종료되면서, 레지던시로서의 정체성을 새로이 고민하는 가운데 2021년에는 ‘오픈 스튜디오’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온앤오프》라는 대주제 아래에서, 작가로서의 삶의 ‘OFF’에 해당하는 일상적 측면에 집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타이틀인 ‘라이프로깅(lifelogging)’이라는 말 그대로 작가들의 작업과 일상의 경계 및 사적 영역까지를 레지던시에서 공유하고, 그러한 작가의 흔적이 묻어난 시공간적 특성을 지닌 전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특히 레지던시는 잘 다듬어진 전시 공간이 아니며, 방문자들도 레지던시에서 미술관과 같은 경험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온앤오프》 전시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작업의 속성을 전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언어로 접근하고, 레지던시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를 바랐습니다.

같은 해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가 독특한 포맷을 선보였는데, 《온앤오프》와는 다른 방식으로 레지던시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공립 기관에서 운영하는 현재의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다듬어져 정형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번 전시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레지던시 모델의 차별성을 보여주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시우: 보통 입주자들이 레지던시에 기대하는 것은 네트워킹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레지던시의 성격은 프로그램 기획의 측면도 있지만, 입주자들의 경우에는 레지던시와 관련하여 다소 낭만적인 풍경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러한 관계성 안에서 레지던시의 운영은 전적으로 입주자에게 기대어 이루어지기에, 매 기수마다 레지던시에 대한 만족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프로그램에 좀 더 고유한 성격을 부여하고자, 정형화된 프로그램을 대폭 축소했습니다.

조주리: 작가들의 저항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정시우: 입주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입주자들이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많아 이에 대한 입주자들의 반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사람만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였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점차 프로그램을 축소하는 방향을 고민하였습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입주자들은 본인에게 주어진 기회가 사라진 듯한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하는지 고민했고, 웹을 중심에 둔 온라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게임-샌드박스-레지던시(GSR)

정시우: ‘GSR(Game-Sandbox-Residency)’이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GSR은 참여 작가가 본인의 디지털 파일, 작품 데이터를 업로드하고 설정값을 입력하면 짧은 3D 애니메이션이 재생되는 일종의 생성기입니다.

GSR을 설명하기에 앞서 간략하게 《그리드 아일랜드》 이야기를 하면, 《그리드 아일랜드》는 미술관의 기능인 수집과 연구, 전시와 교육의 바탕이 되는 ‘제작’에 관한 전시입니다. 이 전시는 시각예술에서의 제작의 개념을 정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작은 예술 행위 안에서 필수적인 것이기에 제작의 개념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목했던 것은 동시대의 제작 환경 혹은 제작 방식이었습니다. 동시대 미술 형식이 미디어에서 데이터로 변화되었다고 한다면, 미술에서 그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시의 중심에 ‘게임-샌드박스-레지던시(GSR)’를 놓았습니다. GSR 구상의 시작점에는 메타버스라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현실이 가상에 영향을 미치고 가상이 현실에 영향을 미침으로서 결국 양쪽이 동기화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게 메타버스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시각예술에서 웹을 활용하여 진행한 프로젝트로는 가상 공간을 만들거나 3D 데이터를 자유롭게 내려받을 수 있게 하는 등의 사례가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샌드박스 게임 형식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샌드박스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서사성이 배제된다는 점입니다. 샌드박스 게임의 사용자는 자신에게 제공되는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제공받은 기본 요소를 활용해 마치 블록을 쌓듯 구조를 만듭니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서사나 놀이 방식은 전적으로 사용자에게 맡겨집니다. 저는 이 샌드박스라는 형식이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게임과 샌드박스, 레지던시를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GSR을 레지던시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참여 작가들이 보았을 때는 어떠한가요? 이것을 레지던시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안성석: 저는 ‘온라인 레지던시’가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레지던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달리하니 다른 방향에서 생각할 거리가 생겼습니다. 저는 GSR이 레지던시라고 생각하지만, GSR이 다른 형태의 레지던시라고 해서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레지던시에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저는 GSR을 통해 지금까지 해 왔던 작업들을 한 번씩 점검하고 데이터를 복기함으로써, 데이터와 현재 나의 상황 및 위치를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교차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온라인에만 있다 보면 공허함과 회의감이 몰려와, 실물 조형물을 만들거나 실제 사람을 대면하여 대화를 하고, 이것에 지치면 다시 디지털 세계로 이동합니다. 작업은 전반적으로 물리적인 작업실을 점차 줄여가면서 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원본 필름과 작품을 폐기하는 동시에 스캔해 데이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기에 온라인 레지던시에 입주하게 되었고, 제 작품이 어떤 서사에 기대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데이터와 저의 생각을 점검하면서 《그리드 아일랜드》를 준비했습니다.

이은솔: 사실 저는 GSR을 왜 ‘레지던시’라고 부르는지 궁금합니다. GSR이 레지던시가 아니라면 ‘큐레이터’가 GSR의 기획와 운영에 더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시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에게 특정한 주제가 던져지거나 본인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을 때 작업을 더 재미있게 여기고 도전 의식을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GSR에서는 큐레이터가 핵심적인 부분을 ‘데이터’로 한정하고, 주제나 작가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뒤로 숨는 것 같았습니다. 레지던시의 기능은 작가에게 판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 판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자신이 앞으로 해나갈 작업에 대해 리서치를 하는 등 시간을 활용하고 어떤 작업을 할지 결심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GSR이 레지던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시우: 레지던시라고 칭할 때 그에 관한 고정관념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레지던시를 담당하고 있지만 기존의 정형화된 형식을 답습하는 것을 경계하는데, 레지던시 매니저라기보다는 큐레이터로서 접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입주자 구성이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기보다는 좀 더 핵심적인 구조를 만드는 기획 방식을 선호합니다. 대부분의 기획들이 그렇지만, 큐레이터가 핵심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서 발생되는 사건들은 대체로 작가, 이 프로젝트에서는 입주자에게 맡기는 방식을 지향합니다.

이렇게 구조를 만드는 것까지가 저의 역할이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콘텐츠나 이벤트, 해프닝 등은 전적으로 참여자에게 맡긴다는 점에서 GSR은 제가 지향하는 레지던시와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프로그램의 구조와 사용 방식을 다소 견고하게 만들고 제가 그 뒤로 숨었다는 점에서, 앞서 말씀하신 이은솔 작가의 표현이 정확합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지향점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미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레지던시의 지향점은 일종의 공유 오피스인데요. 예를 들면, 입주자들에게 지금처럼 방해받지 않는 개별 스튜디오만이 아니라 서로 섞일 수 있는 유무형의 공간, 일종의 기회이자 조건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레지던시에서는 프로그램이나 네트워킹이라는 매개가 없으면 개별 작가들이 잘 묶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레지던시가 입주자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되 새로운 시도를 해도 괜찮은 곳, 실험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온라인 레지던시에서, 참여자들이 본인의 작품이나 레퍼런스에 관한 데이터를 공유하고 그 데이터를 누구든지 사용하며, 저작물과 이용에 관한 권리를 나눌 수 있는 관계성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관계성과 협업이 형성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레지던시이기 때문에 GSR에 저의 방향성이 투영되었습니다.

이은솔: 최근 온라인 레지던시가 많은데, 이들의 정체성은 확고합니다. ‘포린 오브젝트(Foreign Objekt)’는 포스트 휴먼과 가속주의를 주제로 연구자들과 스터디를 하고, ‘디포멀(De: Formal)’은 온·오프라인 전시의 큐레이팅에 맞춰 운영됩니다. 이와 비교할 때 GSR 참여 작가의 선정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정시우: GSR 프로젝트는 이미 조직된 레지던시에 입주하거나 이를 운영하는 것이 아닌, 레지던시라는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이 중요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따라서 전 과정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는데요. 참여 작가는 기본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세 단어인 ‘게임(Game)’, ‘샌드박스(Sandbox)’, ‘레지던시(Residency)’가 시각예술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작가들이 그동안 진행해 온 작업의 주제나 형식 혹은 생각이 작동하는 방향일 수도 있지만, 특히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작가들이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레지던시를 표방하지만 철저히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오픈 콜(Open Call)’과 같은 국공립 레지던시의 정형화된 방식의 반대편에서 진행하고 싶었습니다. 웹의 공공성이나 공유와 협업의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조직 방식은 그 반대라는 것이 모순되지만,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실험하기에는 이러한 방향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주리: GSR에 관한 설명을 듣다 보니 90년대부터 PC 통신이나 온라인, 웹상에서 만들어진 커뮤니티의 서사들이 떠올랐습니다. ‘오픈 소스(open source)’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그 공간에서 이미 서로의 음원이나 데이터, 사진 등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원본성과 저자성이 파괴된 상태의 창작물을 만들어 낸 사례가 상당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GSR은 국공립 미술관의 부속기관에서 만들어진 온라인 공동체라는 부분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 것 같고, 설명을 들을수록 명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시우 학예연구사가 모순점이나 딜레마를 잘 설명해 주어서 저의 의문점은 해소된 동시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어렵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드 아일랜드》가 참여 작가들 입장에서는 강한 동의와 흥미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실험을 한 프로젝트인 것과는 반대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출신의 여타 작가들은 《그리드 아일랜드》에서 사용한 매체나 방식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기에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이은솔: 저는 모두를 이해시키기 위한 더 많은 설명은 불필요한 것 같습니다. 디지털 매체와 웹 문화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만 이해하면 되는 것 같은데요. 다음 숙제는 GSR이라는 온라인 레지던시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만나서 작업을 공유하게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GSR이 반드시 다른 작가와 작품을 섞어야 하는 형식이었다면 저는 참여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참여자가 자율적으로 모일 때 더 재미있는 커뮤니티가 형성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드 아일랜드》 연계 온라인 레지던시 〈게임-샌드박스-레지던시(GSR | Game-Sandbox-Residency)〉 화면 갈무리, 서울시립미술관, 2022. 웹사이트 디자인/프로그래밍: 홍진훤, 프로덕션 매니징: 곽노원.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정시우: 제가 GSR 프로그램을 함께 개발한 홍진훤 작가와 공유했던 궁극의 지향점은 온라인 레지던시 플랫폼이 대중에게 유통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는 GSR 프로그램이 참여 작가 6명의 데이터만을 참조하지만, 예를 들어 약 백 명이 참여해 자신의 작품 데이터를 하나씩 오픈 소스로 공유하고 그것이 알고리즘에 의해 섞이면서 상상하지 못한 이상한 형태가 나오게 되는 상황을 상상했습니다. 이렇게 생성된 디지털 조형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어떻게 공동의 저작 혹은 이용 권리를 설정할 수 있을지 논의했습니다. 동시대 시각예술에서 데이터의 미학은 공유와 공동 작업 그리고 저작물의 공동 소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색전집》이 다루었던 무형의 데이터 혹은 디지털로 수렴되지 않는, 경혐에 기반한 다른 방식의 정보도 모두 데이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참여 작가 두 사람은 GSR에서 다뤘던 시각 데이터를 미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나요?

안성석: 제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이 프로젝트가 더 많은 설명이 요구될 정도로 실험적인 기획이라는 사실입니다. 시각예술 안에서 샘플링이나 공동 저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르지만, 이것이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작동하는 웹사이트와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었기에 이야기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지속 가능할지, 그리고 함께 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공유 가능한 데이터 대부분을 업로드했는데요. 이것이 다른 데이터와 어떻게 매시업(mashup) 될지 궁금했고, 미학적 설명보다는 실질적으로 이 데이터를 활용하고 이와 같은 창작을 희망하는 예술가 세대가 존재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조주리: 사진 매체는 고유한 이미지를 작가의 관점에 의해 좀 더 정교한 혹은 개성적인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나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데이터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이해하고 있지만, 사진을 주요 매체로 다루는 작가가 GSR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 할지 궁금합니다.

권도연: 저는 초현실주의 시대에 문학가들이 하나의 소재를 놓고 서로 스토리를 이어받아 글을 썼던 행위가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보르헤스가 도서관에 대한 글을 썼다면, 보르헤스의 글을 다른 작가가 이어받아 숲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그런 방식과 GSR이 유사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시각예술 매체가 하나의 데이터로 수렴될 수 있고, 사진도 하나의 데이터이니 참여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주리: 이 조건을 수용하고 관심을 갖는 작가의 양상이 동질성에서 벗어날 때 발생하는 혼선이나 확장성이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큐레이터가 정교한 기준으로 멤버를 구축하는 방식도 문제지만, 기준을 너무 열어두는 것도 흥미를 반감시킬 수 있습니다. 룰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안성석: 데이터가 매시업 되었을 때 이것이 누구의 데이터인지 확인할 수 있는 요소들이 업데이트되면 좋겠습니다.

조주리: 이러한 경험을 창작자들이 해 보게 된 것 자체가 고무적인 것 같습니다. 작품과 작품, 이미지와 이미지, 작가와 작가가 매칭되는 것은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글쓰기나 큐레이팅 영역까지로 넓혀서 생각해 보면 그와는 다른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두 사람이 하나의 텍스트를 지우고 다시 덧붙이는 방식으로, 서로의 경계가 없는 글쓰기를 시도해 본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결과물을 볼 때, 어디까지를 내가 썼고 어느 부분을 누가 덮어 썼는지에 대한 변별점이 점점 사라져서, 내 것이기도 하고 우리의 것 혹은 그의 것이기도 한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박수정: 작가든 기획자든 본인의 데이터가 어디에서 어디로 출력될지 모르는 상태이기도 하고, 온전한 본인만의 창작이 어렵다는 점은 작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창작에서 저작권은 특히나 중요한 이슈이기에, 협업 프로젝트의 경우 면밀한 검토를 통해 사전에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경험이라는 측면인데요. 참여자 본인이 실험의 과정을 경험하고, 그것을 자신이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이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기회이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참여할 것 같고, 조주리 큐레이터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양한 유형의 참여자가 모인다면 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성석: GSR은 현재 오픈 베타인데, 상상과 글로만 존재했던 실험적인 것을 일단 구현한 상황입니다. 이를 차치하더라도 온라인 레지던시는 굉장히 재밌는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온라인 레지던시에 입주한다는 것은 이 공간이 놀이터임을, 누구나 들어와서 공유된 요소를 자유롭게 조립·해체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때 각자의 작업은 그 안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형태나 이야기, 이미지로 매시업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현재는 플랫폼을 통해 시각화되는 이미지가 다소 만족스럽지 않지만, 추가 개발을 통해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인다면 결과물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이터들이 실질적으로 매시업 되어 상상을 넘어서는 상태를 언젠가는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굉장히 개념적인 고민을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첫 단계인 것 같습니다.

정시우: 결국은 작가들이 이러한 관계 설정을 원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수요가 있다면 플랫폼 개발의 당위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작가에게는 고유성이 중요한 덕목인데 콜렉티브 활동과 달리 고유성을 공동의 것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 같습니다. 웹 플랫폼을 활용하면 협업과 공동 작업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작가들은 개인의 감각이나 서사, 고유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성석: 다수의 작가들이 이러한 플랫폼을 환영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오픈 소스 프로그램이 많아졌기 때문에 참여자가 반드시 작가일 필요는 없고, 오히려 학생이나 일반 관람객같이 미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접근하기에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시각예술에 국한되지 않은 행사나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상업적 플랫폼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방향 설정이 이야기를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조주리: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GSR은 개인의 것, 나만의 것, 순수한 것,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오늘날의 미술시장에 역행하는 일종의 유토피아니즘으로 오해받을 소지도 있습니다.

정시우: 《그리드 아일랜드》를 준비하면서, “작품이 비물질 데이터로만 작동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영상, 사운드 그리고 컴퓨터로 제작한 3D와 2D 이미지 등 대부분의 시각예술 매체는 비물질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반면, 역설적으로 팬데믹 이후 물질성이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드 아일랜드》에 참여한 작가들은 디지털, 비물질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합니다.

안성석: 질문이 광범위해서 저의 답변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3D나 영상과 같은 비물질 작업을 계속 진행해 왔습니다. 감사하게도 피드백을 받거나 전시를 할 기회를 많이 얻은 반면, 제도 안에서 작품의 판매나 소장을 위한 시도들은 번번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비물질 작업을 주로 생산했던 저도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비물질 작업이 저에게는 이상적인 언어라고 생각하는데, 이를 고수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드 아일랜드》에 출품한 작품의 경우, 이러한 저의 상황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위해 굳이 프린트를 하고 액자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작업 데이터는 이렇게 빼곡히 넘치지만, 이를 물리적으로 현실에 구현하고 작업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은솔: 저에게 전시 공간은 비물질적인 이야기나 영상 데이터를 출력하는 곳입니다. 데이터를 익스포트(export)해서 나의 가상 세계를 광고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성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출력해서 어디에 배치하고 어떻게 연출하느냐가 작품에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그리고 데이터는 웹 3.0과도 연관되는데요. 저에게 NFT(non-fungible token)를 발행하자고 제안했던 회사들도 있었지만, 저는 “내가 스스로 퍼블리싱 하는 것이 웹 3.0인데, 왜 기업이 이것을 수행하고 권리를 나누지? 이건 웹 3.0이 아니야.”라고 생각해서 계속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주제인 ‘제작’과 관련하여 미술관이 제작을 지원하는 장이 만들어지면서, NFT를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술에 기반한 혁신들은 어딘가에서는 이미 일어나고 있고, 이번 제 작품 〈킴벌리 앤 프렌즈(Kimberly & Friends)〉는 NFT 기술을 활용해 최소한의 자립 여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들을 홍보하는 자리였습니다. GSR은 데이터로만 이루어져 있어 조금 더 이상적인 계획이 들어가 있고, 《그리드 아일랜드》는 현실과의 접점, 즉 ‘그리드’가 형성되는 장소에 있으니, 이를 현재 나의 작업 방식과 내가 생각하는 웹 3.0의 개념을 제안하는 자리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중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다소 거창했지만 킴벌리와 친구들을 통해 제작된 작업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전경.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와 주변 마포자원회수시설 일대의 공간을 LiDAR로 3D 스캔한 이미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레지던시(Residency)는 무엇을 ‘제작’해야 할까?

정시우: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팬데믹 이후 2년간 웹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GSR과 유사하게,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를 벗어나고자 했던 프로젝트들이었기에, 완벽하진 않더라도 실제 공간을 디지털화·가상화하는 형식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시각예술의 견고한 미감으로 봤을 때 디지털, 웹 프로젝트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고, 정형화된 레지던시의 기능을 기대한 작가들에게 웹 프로젝트의 장점과 고유의 미감 등을 설득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통해 결국 레지던시 그 자체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레지던시의 정형화된 매니징 역할 안에서는 이러한 웹 프로젝트를 굳이 진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리적 스튜디오를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고, 입주자 개개인의 작품세계가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 활발한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한가?”하는 의문이 있고, 공유되는 시간성 안에서 활발한 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실제 사용자인 작가들께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방향성에 관해 생각하시는 바를 공유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성석: 필수적인 영역들이 최대한 사라지고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매니지먼트에만 국한되면 레지던시의 역할이 너무 축소되니, 입주자에게 희망 프로그램과 관련된 다양한 선택지가 보장되었으면 합니다. ‘샌드박스’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자유도가 굉장히 높아야 할 것 같습니다. 레지던시에서 무언가를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면 입주가 일종의 수혜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그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박수정: 금천예술공장의 레시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레지던시는 매니지먼트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학예연구사처럼 기획을 하셨던 분이 공간을 맡았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처음 레지던시에 들어왔을 때, 필수적인 프로그램들과 매니지먼트가 잘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최근 금천예술공장은 안성석 작가의 의견처럼 작가로부터 희망하는 프로그램 목록을 받아 이를 시행하고자 했습니다. 운영 사무실과 입주 작가 간의 회의를 주기적으로 가지면서 의견의 간극을 좁혀 나가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물리적 환경과 현실적 조건을 기반으로 해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관과 입주 작가 사이에서 입장을 절충하고 실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레지던시의 지향과 운영 방향이 명확하다면, 이를 프로그램 기획을 비롯해 그 공간의 특성이자 강점으로 위치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금천예술공장은 작업 환경을 안정적으로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데요. 이것은 정형화된 프로그램을 고수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능한 한 필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나 환경을 다듬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가능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고민되는 것은 제가 온라인 시스템을 항상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활용하는 데 미숙하기도 해서, ‘온라인 레지던시’라는 개념이 굉장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레지던시가 어떤 공간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할 때, ‘공유 오피스’라는 개념이 저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유 오피스가 또 다른 레지던시의 방향성을 내포하는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안성석: 공유 오피스의 방향성이나 시도 자체는 좋은데, 공유 오피스라고 해서 모든 것을 섞거나 해체하기보다는 입주자 본인이 성장 과정 속에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이를 새로운 생각과 시도의 단계로 여긴다면, 여러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도연: 제가 처음 레지던시를 지원했던 이유는 작업실의 필요와 더불어 동료 작가를 만나고 싶어서였습니다. 제가 몇 차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경험하면서 느낀 것은 오프라인 요소인 레지던시의 위치와 건축의 중요성이었습니다. 각각의 레지던시가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떤 건축의 형태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커뮤니티와 생활 그리고 창작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도 한강에 작은 섬처럼 위치해 있으며, 기획자가 있고 미술관의 입장에서 운영된다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저 또한 박수정 주임과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는데요. 견고한 거점을 두고 안정적으로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일은 국공립 레지던시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레지던시를 더 견고하게,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내부 프로그램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방향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은솔: 레지던시 안에 있을 때는 순수예술이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민할 일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부에서는 시기가 이런데 순수예술이 살아 있을 수 있냐고 질문합니다. 순수예술을 둘러싼 환경이 제도의 존폐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코로나19와 같은 천재지변도 있고, 정치적으로는 정권이 바뀌면 지원 제도가 갑자기 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를 고민하는 것은 결국 기획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본인의 작업을 하느라 너무 바쁜데,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 작가는 내가 출근할 곳이 있고 내 작업이 항상 같은 곳에 있다는 사실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면서 다음 커리어를 계획하곤 합니다. 그래서 미술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는 작가 개개인이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지던시를 기획하는 사람이라면 기민하게 환경에 대응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웹 전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주리: 레지던시가 언제까지 존속될지를 상상해 보면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한번 만들어진 제도가 사라지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어서 적어도 10년, 20년은 관성대로 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는 주기를 생각해 보면 언젠가는 레지던시도 없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2000년대 초반 이후 레지던시 제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현재 20년 차를 맞이하고 있는데, 레지던시는 어디를 가도 유사한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레지던시는 동시대 문화예술 행정의 수준과 지향점을 미술관보다 잘 반영하는 기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시라는 메타 프로덕션을 보여주는 공간이 미술관이라면, 사람을 직접적으로 관리·제어·양성·재교육하는 등의 기관 미션이 많은 곳이 레지던시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습니다. 레지던시가 새로운 제도로서의 정점을 지났다는 것 또한 알고는 있지만, 어찌 되었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도가 계속 유입되어, 기성화·토착화된 문법을 중시하지 않는 세대가 사회를 주도하게 되면, 구체제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를 레지던시가 존속하는 동안 많은 시도를 해 봐야 할 텐데, 여전히 똑같은 문법, 유사한 방식으로 레지던시가 운영되는 것은 다소 의문입니다.

정시우: 새로운 원동력이 부재하는 한, 레지던시의 향후 10년을 가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레지던시가 교육 기관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절반만 동의합니다. 제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의 지난 16년간의 키워드를 나열해 보았는데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보다는 미술관의 모든 기능을 다 끌어안는 백화점 형식으로 진화해 왔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현시점이 레지던시의 목적성, 즉 일종의 특이점이 생겨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레지던시의 기능을 ‘제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뿐 아니라 제작의 전후 과정까지 고려할 때, 레지던시는 제작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은솔: 레지던시에 있는 작가들은 너무 바쁩니다. 다른 것을 할 여유가 없고, 잠잘 시간도 없습니다. 다른 스튜디오가 궁금해도, 본인 작업을 마감하는 데 급급한 상황이기에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개별 스튜디오가 공장처럼 돌아가, 말 그대로 ‘제작’은 확실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주리: 작가들이 바쁜 이유는 신작 주기가 빠르기 때문인데, 그것을 견인하는 주체가 미술관과 큐레이터입니다. 저 역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기존의 작품과 관련해서, 혹은 전시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에서 가능한 프로그램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작가들에게 늘 기획 의제에 맞는 작업을 발 빠르게 만들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신작의 의미를 비평적으로 소화하기도 전에 또 다른 기관과 큐레이터에게 포섭되어 새로운 작업을 계속 제작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팬데믹 시기에도 전시가 줄어들기는커녕 매우 활발하게 생산되면서, 현재를 진단하고 과거를 되돌아보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설정한 의제인 ‘제작’은 단순히 물리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고, 낯선 것들을 연구하고 협업을 시도하며 과거와 미래의 작업을 연결해 고민하는 시공간적 개념과 실천을 포괄한다고 짐작해 봅니다. 모든 것이 발 빠른 성과주의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제작을 둘러싼 복합적 논의가 흥미롭지만 새롭게 담론화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흔한 말 같지만, 미술관과 레지던시에서 기획전시와 입주제도를 통해 가시화되는 제작의 속도와 방향, 철학에 대하여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시우: 축구에서는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의 선수의 움직임을 ‘오프 더 볼(off the ball)’이라고 지칭하며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레지던시가 실질적인 제작을 위한 기관일 뿐 아니라, 제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입주자의 활동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제도여야 하겠습니다.

이은솔: 전시를 하지 않아도 내가 작업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한 달만 작업을 안 해도 불안해지고 작가적 위치를 고민하게 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안성석: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자꾸 빠르게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데,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러한 문화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정시우: 결론적으로 국공립 미술관과 레지던시 같은 제도가 갖고 있는 정형화된 프로그램 기획의 관성, 그리고 실질적인 사용자이면서 생산자인 입주자의 창작 관성을 벗어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정리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드 아일랜드》 전시 연계 토크 프로그램 〈그레이-샌드박스-레지던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세마 러닝 스테이션, 2022. 7. 29. 토론자: 권도연, 안성석, 이은솔, 박수정, 정시우, 조주리. 사진: 홍철기.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와 전시의제의 소주제를 발굴하는 2022 SeMA 의제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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