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로야 작가 인터뷰: 시각예술에서 언어를 녹일 방법들

봄로야
봄로야는 시각예술가이자 기획·매개자다.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2016-2018)과 <다독풍경>(2019)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물질세계의 뒤죽박죽한 창발을 상상하며 도시와 몸의 불가분한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사적 경험이 미술가, 작가, 음악가 등과의 대화와 협업으로 통과되어, 다른 사건으로 전개 및 발화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내러티브는 ‘우연적 해프닝’ 혹은 ‘사건 현장’의 단면처럼 표상되고, 드로잉, 텍스트, 미디어, 사진 아카이브 등 다양한 매체로 가시화된다.

세마 코랄의 커미션 연구 웹프로젝트는 그간 온라인으로 작가와의 대화나 강연을 동반하고 내용을 정리해 공개해 왔습니다. 2023년에 기획된 세마 코랄 웹프로젝트에 관해서는, 일종의 웹진 기능을 하는 세마 코랄의 특성에 더욱 집중하여 작가의 작품 세계에 관한 대화를 텍스트로 교환하는 지면 인터뷰 형식으로 생성합니다. 그 첫 번째로 시각예술가 봄로야와의 문답을 통해 세마 코랄 커미션 연구로 재구성해 선보인 〈-과 -사이 쓰기〉(2023)의 배경과 과정을 들어 봅니다.
〈-과 -사이 쓰기〉 작업 소개 페이지 ↗

작가의 자기 정의, 다시 쓰기

김진주(전 세마 코랄 기획/편집자): 작업 활동이 쌓여갈수록 작가에게 자기소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익숙함, 반복으로부터 작가로서의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작가로서의 자기 정의를 지우고 다시 쓰는 충동이 일지 않나요? 음악 활동, 기획자,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작가 그룹의 일원 등 여러 면모를 펼쳐오신 봄로야 작가의 소개글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요?

봄로야: 질문이 흥미롭습니다. 우선 음악 활동은 현재 소개글에 쓰지 않은데요. 음악가의 주요 활동인 음반 발매와 공연으로 살펴보면, 〈선인장 크래커〉 책과 음반을 발매한 2008년에서 〈사라의 짐〉 개인전과 음반 발매가 있었던 2014년 사이에는 음악가로서도 저를 소개했었어요. 최근에도 사람들이 저를 소개해 줄 때 ‘노래도 해요.’라고 많이, 자주 말하는데, 손사래를 치면서도 왜 그렇게 소개될까를 생각해 보면 ‘노래하는 봄로야’를 강하게 기억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 질문에도 앞 자리에 음악 활동이 가장 먼저 써 있는 걸 보면요. 그러나 그 이후에는 2019년 개인전 《다독풍경》에서 덩굴이로 분장하고 불렀던 노래 두 곡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하지 않고 있어요. 물론 2016년 개인전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 때에는 작업의 주제를 악보로 만들어 다양한 음악가와 협업하고, 낭독과 사운드를 합친 공연을 전시 오프닝에서 선보였어요. 영상 작업 중 일부는 사운드를 직접 만들거나, 음악가와의 협업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현재는 ‘시각 예술가, 기획·매개자’로만 저의 정체성을 소개합니다. 시각 예술 콜렉티브 ‘노뉴워크’ 활동과 여성주의와 교차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므로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도 유효하겠네요. 음악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작업과 활동의 폴더 트리를 만들지 않고 부딪힌 2·30대의 여러 경험을 통해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거나, 하지 않게 되거나, 더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조금은 알게 되었거든요. 집중해서 선택하지 않으면 말씀하신 과거의 자기 정의를 통째로 부정하게 되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그림 그리고, 글 쓰고, 노래하는 봄로야’로 천진하게 소개했던 과거의 저를 못 견디겠더라고요. 동시에 소개 글을 자꾸 고쳐 쓰는 저 자신이 너무 가벼워 보였습니다. 지금은 자기소개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프로젝트에도 다시 곡을 쓰고 노래하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거든요. 어떤 미시사가 타인과 접촉하며 다른 사건이 되어 이동하는 과정에 관심을 두고 있고, 이 프로젝트의 단초도 우연히 피아노가 생기면서부터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우연성을 잘 즐기지 못해 괴롭기도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근 몇 년 방황하며 알게 된 건 ‘현재’의 저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답이 없는 장면을 사랑하고 있더라고요. 이렇게 쓰다 보니, 관성적으로 사용 중인 작가 소개 글과 작가 노트를 빠른 시일 내 다시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진주: 이번 세마 코랄 웹프로젝트를 작가님께 제안하게 된 계기는 《봄못/양생 중(vernal pond/curing)》(전시공간, 2023) 전시였습니다. 전시 작품 중 피아노를 활용해 설치했던 〈-과 -사이 쓰기〉를 웹으로 옮겨 와 또 다른 작업을 만들면 어떨까, 기획자로서의 관심과 생각을 조심스레 드렸어요. 건반 사이 꽂힌, 작가님의 고민과 건네는 말이 담긴 엽서들은 마치 또 다른 건반들 같았거든요. 처음 이 제안을 받고 어떠셨나요? 독자들은 작업이 어떻게 구상되기 시작했는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을 것 같습니다.

봄로야: 《봄못/양생 중(vernal pond/curing)》의 주제는 소진된 신체와 회복된 상태가 공존하는 시점과 장소를 과거의 텍스트와 이미지로 재맥락화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사적인 접근으로 살펴보면 기력이 소진되고 머리가 백지 상태가 되어, 꽤 오래 작업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이 자주 들었고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 한 채, 그렇다고 작업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 엄살인가, 회피인가를 고민했던 시간이 길었어요. 그간의 작업 중 지우거나 버리지 않은 것들을 수정하거나 새롭게 만들거나 다시 정리했고, 그 시기에 우연히 기획자 S로부터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피아노를 받게 되었어요. 앞서 말했듯, 음악 활동에 갈증도 조금은 있었고,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짐〉(2014) 작업 중 지운 작업과 빈 오선지를 피아노 위에 올려 두었어요. 전시 때의 〈-과 -사이 쓰기〉는 사실 작품으로서 완성된 형태라거나 관객 참여형의 인터랙티브를 예상한 형식도 아니었어요. 피아노 건반과 건반 사이에 끼워 둔 편지 봉투에는 토종 넝쿨 씨앗 몇 알과 자기 부정, 자기방어, 소멸 충동 등의 감정과 감정 사이를 나열한 한 줄의 문장이 적힌 빈 켄트지가 전부였어요. 관람객이 한 통씩 뽑아 가고 난 자리는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이조차 매번 하지 않았어요. 비운 자리(공백)를 악보화하는 것의 의미보다, 백지에 아무것도 그릴 수 없고, 빈 원고지에 아무것도 쓸 수 없었던 상념의 무게가 피아노 건반을 누를 수 없게끔 만들었다는 현상 자체에 집중했어요. 또한, 누군가가 제 곁에서 함께 비워주고 비질해 준다는 믿음이 필요했고요. 당시 저는 심리상담을 받고 있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복잡하게 얽힌 감정 덩어리를 세세히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고, 해결 방법은 당분간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하셨어요. 그런 면에서 작업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좀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작업’으로 상정하고 ‘작업’하지 않았고 그 점이 좋았습니다.

시각 예술에서 언어를 녹일 방법들

김진주: 참, 그러고 보니 앞서 말씀하신 작업 〈사라의 짐〉은 자꾸만 ‘사라짐’을 되뇌게 합니다. 제가 이 전시나 작업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작품 설명을 찾아 보니 예상 대로 사라짐을 연상케 하도록 의도하셨더라고요. 그 사라짐은 ‘기억’이라는 짐을 뜻하고요. 다른 작업에서도 언어유희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언어의 활용이 의미의 이동뿐 아니라 형태(또는 형식)의 상상에도 변이를 일으키는 것이 작가님 특유의 공감각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세마 코랄 웹프로젝트에도 글이 많이 쓰였고요. 마치 소설책, 에세이집, 몽환록, 그 어떤 것이 되어도 좋을 책의 글귀를 클릭해서 넘어가고 사라지는 웹페이지와 건반 사이로 옮겨온 것 같았어요. 이처럼 언어를 재료로 쓰고, 그 언어를 다른 감각으로 치환하고, 다시 언어로 돌아오고, 또 다시 언어를 떠나는 수행성을 작가님의 작업에서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데, 언어란 어떤 즐거움이면서 과제인가요?

봄로야: 작업에 대한 경험이 돌고 돌아 ‘쓰기’의 행위가 작업의 시작점이고, 그 결과가 글이 아닌 매체로 표현되더라도 중요한 귀결임을 더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이미지를 문장화해서 인식하는 편이더라고요. 말로 설명하기 모호한데, 눈으로 어떤 장면을 볼 때도 그것을 이미지로 기억하기보다 메모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설명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드로잉을 할 때도 글을 먼저 쓰고, 음악을 만들 때도 가사를 먼저 씁니다. 그러다 보니 5~6년 전부터 평면 작업보다 영상 작업의 비중이 늘게 된 이유도 글로 전달하는 방식에 그림, 사진, 무빙 이미지를 결합했을 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요. 말씀해 주신 매체와 매체 사이의 이동이 아직은 많이 경직된 것 같고, 시각 예술의 범위에서 언어를 녹일 방법들을 아직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기에, 이 부분을 차차 살펴보려고 합니다.

김진주: 이번 세마 코랄 웹프로젝트에서 편지를 선택하는 과정은 댓글을 (다는 게 아니라) 빼는 행위를 상상하게 하고요. 또 이렇게 관객-상대방의 행위로, 그 “매일의 우연으로 악보를” 만드는(만드시려는) 과정도, 웹-온라인의 생성 과정과 닮았으면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되어줄 것 같았습니다.

봄로야: 실제로 관람객에게 ‘고민이나 걱정을 생각하고 뽑아 주세요.’라고 타로점을 보듯 말씀드렸어요. 타로를 믿든, 믿지 않든 내 의지로 빼내거나 뽑는 선택은 ‘우연’의 복잡성을 포함한 결정이 되고, 우연임에도 불구하고, 편지 속 문장이 내 의식의 흐름과 연결되어 영향을 받게 되어요. 요즘 유튜브에서 타로마스터가 운영하는 ‘온라인 타로점’이 유행하는데요. 재미있는 게, 스프레드한 타로 카드에서 타로마스터가 1차로 4~5장을 뽑고, 사용자가 그 중에서 1장을 고르게 되어 있어요. 각 카드에 대한 해석은 타임스템프에 배치되어, 내가 뽑은 카드로 바로 건너뛰어 내용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가 직접 뽑는 게 아닌(애초에 뽑을 수가 없지요.), 1차로 마스터가 뽑은 카드 중에 내가 다시 뽑게 되어있는 통제된 구조이지요. 많은 사용자가 타로마스터의 메시지에 큰 위로를 받거나, 그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믿고 활용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댓글을 달아요. 스크린 속 타로마스터는 타로 카드, 이미지 카드, 주사위 등을 아름다운 제스처로 섞고, 질문에 집중하여 마스터와 사용자의 기운을 모으는 시간도 타임라인에 배치합니다. 이를 냉소적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면 아날로그적 매체와 디지털 매체의 온도차를 줄이는 방법으로 느껴졌고,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작은 실마리, 각성, 반성, 고마움 등 다양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편지(작업)안의 내용은 창작자가 통제하되, 사용자의 우연에 기대어 다시-쓰기를 해볼 언젠가의 시점을 염두하고 이번 프로젝트로 확장해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김현정 디자이너와 사용자의 선택 범위, 자신의 ‘쓰기’를 공유하는 범위 설정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과 -사이 쓰기

김진주: 프로젝트의 구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봄로야: 큰 구조로 보면, 사용자의 선택에 의해 25종의 편지가 해체되며 낮은 도에서 두 옥타브 위 높인 도까지 25개의 피아노 건반이 나타납니다. 편지는 21편의 글과 15개의 드로잉을 기본으로 제가 짠 디렉토리와 #(해시태그)로 구성되어 있어요. 전시장에서는 한 장만 뽑도록 제한했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는 편지 선택의 개수, 사용자의 쓰기 여부 등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설정했습니다. 동시에 제가 간접적으로나마 사용자의 그림자처럼 머물기 바라는 마음, 흑과 백으로 나누지 말고 그 사이를 쓰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웹페이지에 몇 가지의 규칙을 (은근슬쩍) 설정했어요.

  1. 한 통의 편지를 선택하면 두 개의 건반이 동시에 눌리며 하나의 글과 또 하나의 이미지가 제공된다.
  2. 검은 건반과 흰 건반 사이, 흰 건반과 흰 건반 사이, 처음의 ‘도’와 끝의 ‘도’ 사이 편지는 규칙에 따라 #(해시태그)에 따른 추가 원고, 동일한 원고 반복을 설정하였다.
  3. ‘악보 그리기’로 기보가 되거나, 웹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면 더 이상 편지를 선택할 수 없다.
  4. ‘악보 그리기’를 누르지 않으면 선택한 결과값이 데이터화되지 않는다.

초기에는 편지를 주고 답장을 받는 방식부터 AI나 챗GPT 사용까지 온갖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만, 저처럼 자기 부정의 상태에 놓인 누군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전제에 더 신경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렵지 않은 온라인 참여 방식을 고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솔직한 저의 이야기가 배설로만 끝나지 않도록 말을 고르는 데 더 집중했어요. 참여 이후 스스로를 되돌아보려면 접촉을 분리하고 혼자 빈 문서를 띄우고, 백지를 바라보고,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바라봐야 하잖아요. 제가 그랬듯 그 홀로 쓰는 시간 감각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김진주: 이번 작업을 설명하는 문장들 “그만두기, 지우기, 버리기, 없애기의 충동”, “소진된 신체와 회복된 신체 사이에 얽힌 감정 덩어리”에 관한 작가님의 경험과 생각을 더 듣고 싶습니다. 이 언표들은 감산과 가산 사이를 왕복하는 운동성을 불러일으키는데요. 이렇게 맴도는 행위를 보통 무의미하다고 인식하게 마련인데,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창작으로서의 가치를 생성하는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맴도는 행위는 이번 작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단서인 악보(또는 멜로디) 그리기를 자연스레 연상시키고요.

봄로야: 기보된 음표가 보편적인 기보법과는 좀 다른데요. 디자이너와 소통하며 생긴 오류였는데, 두 음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어요. 텍스트와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하고 ‘무엇’과 ‘무엇’ 사이를 표현하는 느낌도 나서 수정하지 않기로 했어요. 우연과 그 우연의 의미를 곱씹거나 반복하는 습관이 있고 말씀대로 왕복하지만 왕복하는 태도를 달리하고, 예상에서 빗나가거나 일부러 달리 움직이려 애쓰며 작업을 합니다. 문제는 작업을 그만두고, 모두 지우고 버리고 싶은(눈 앞에 없기 바라는) 심정이 왕왕 있었는데, 저의 내면의 부정적 측면을 깊이, 반복적으로 건드렸어요. 반복이 불협화음처럼 시끄러우면서도 매혹적인 노이즈가 되어 무섭게 저를 가라앉히곤 했습니다. 편지에도 썼지만, 의미 부여를 하기 시작했고 밀려오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면서 원본 지우기를 물리적으로 직접 반복해 보니, 머릿속으로만 알았던 혹은 철학적으로 내가 원본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확 체감되더라고요. 충동과 감정을 실질적인 행위로 옮겨야, 설령 무의미하더라도 그 무의미함이 몸에 새겨지더라고요. 그렇다면 그 무의미는 의미의 반의어라기보다 새로운 감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감각까지만 느끼고 쓰려고 했어요.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대립된 감정이 되지 않으려고 애쓴 시간을 보냈습니다. 참여자가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고, ‘악보 그리기’ 버튼을 누르고, 답장을 써서 저에게 메시지 전송까지 한다면, 저는 그 데이터를 보며 불협화음에 가까운 불확실성을 지속적으로 마주하겠지요. 이 역시 위의 운동성을 상기해 보려 합니다.

두 손이 비었다. 초라하기보다 허전하고 시원하며 측은하다. 만질 수 있던 존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어쨌든 이유 없이 슬프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버리고 지웠다고 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에 덜 슬펐다. 지우고 알았다. 내가 원본이고, 원본이 사라지지 않기를 여전히 바란다는 걸. 비대한 에고가 나를 채우고 있어서, 타인에게 닿길 원하는 마음이 작업을 앞질러, 그 부질없는 장면이 있어야만 완성이 된다는 듯 노려보거나 울기를 반복하며 차마 등 돌리지 못하는 나를, 작업을 지우고 보았다. 연민이면 연민이고, 망가지면 망가지는 거고,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힘이 작업을 버리니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까맣게 덮인 작업은 빠지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검은 늪 같았다. 붓이 아닌 재료로 표면을 긁고 찢었다.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파동을 떠올리며 동그란 선 그리기를 반복했다. 돌은 늪을 깨우는 물성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책이 완성되기 전 원고를 다 찢어 버렸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썼다. 타인을 위한 책이 아니거나, 그것이 책이 아니라고 했다.(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Écrire)』, 윤진 옮김(민음사, 1993), 19)
완성에서 미완성이 된 상태에 멈췄으니, 작업이나 작업이 아니다.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니 초라하지도 않다. 용기가 났다. 긁어낸 표면은 늪에 난 생채기고 이미 여문 흉터다. 원본에 비로소 칼을 댔다. 의지에 따라 미완성으로 남는다.
— ‘그만두기 (와) 버리기 (사이) 쓰기’ 중 발췌

지우기에 빠진 내 손목을 붙잡은 건, 잘못을 혹독하게 반성하는 내면 아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십대 때부터 이십 대의 어린 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 켠으론 그런 나를 견디게 해준 기록들이었는데 기어코 지우고 훼손했다. 검고 텅 빈 표면에 비친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인정하고 안아주는 연습이 이렇게나 어렵다. 지운 작업에 또다른 겹의 의미를 붙여준 기획자 H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기획자 K가 내 발목을 잡았다. K의 어루만짐으로 지운 작업 위에 다시 무언가를 그렸다. 깎고 찢고 얹히거나 튕겨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그 제스처는 나를 다그치지 않는 멜랑콜리아다. 잘못을 가라앉힌 늪을 잊지말라는 다른 질감의 지시다.
— ‘지워버린 잘못 (과) 지운 줄 알았던 잘못 (사이) 잘못의 원본 쓰기’ 중 발췌

작가의 나이와 작업

김진주: 작업을 제안 드리면서, 40대의 길목을 넘어가는/간 작가로서 웹과 미술은 무엇인가에 관해서도 작업 내/외적으로 봄로야 작가님과 함께 풀어보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기도 했지요. 세마 코랄 웹프로젝트에서 한 해에 하나씩 미술관 소장작품 정보·데이터가 담고 있는 주제를 찾아가고 있는데요. 재작년에는 성별 정보로, 작년에는 재료·기법 정보로 풀어봤기에, 그다음은 뭘까? 이 질문에 ‘나이’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화두는 작가의 나이(생-몰년도)로, 작품의 나이(작품 (재)제작-발표-전시연도)로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한편, ‘나이(years)’라는 걸 있는 데이터로 가지고 와서 기획·작업하는 건 너무 뻔해 보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 흥미로운 우회로를 찾고 싶었습니다. 작가나 작품의 생물학적 나이, 그리고 작업의 축적된 시간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요. ‘나이’는 이번 봄로야 작가님의 웹프로젝트와 상관은 크게 없어보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소진’과 ‘회복’이라는 주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봄로야: 이 커미션 작업은 1년간 유지, 관리해야 하는 의무가 계약서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문득 이 작업이야 말로 지우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년 뒤 제가 해당 서버를 (영원히) 구동하지 않으면 되니까요. 작품을 잘못 관리해 곰팡이가 쓸 듯, 오류나 바이러스 등으로 디지털 소스가 사라진다면, 제가 옛 작업을 지우며 느낀 복잡한 감정, 덮은 작업 위에 다시 그리며 든 오만 가지 상념들과는 왠지 다른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기억, 세월 등의 시간성이 느껴지기보다, ‘delete’ 버튼을 누르고 삭제한 찰나만 반복할 것 같은 이 불길함은 제가 그만큼 웹 매체를 아직 낯설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웹 매체에 삽입한 글과 그림이 각각 워드 파일과 스캔본으로 남아있고, 그 데이터를 삭제하고 행여 드로잉 원본까지 파기하더라도, 앞서 언급하기도 한 원본인 내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작업이 어떠한 형태이든 작업의 원본 개념이 사라질 수 없는 것 같아요. 더군다나 웹 매체는 누군가가 소위 박제할 수 있기도 하고요.

별개로 작업을 그만두려고 했던 시기를 창작으로 이렇게 풀어 낼 기회를 얻었는데, 창작자 및 사용자에게 어떠한 종류의 윤리와 신뢰를 갖고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나이와 경험의 관점으로 이 작업을 본다면, 작업 내 글에서 저를 표현한 ‘착하고 비틀린 40대 중년 여자’가 느낀 소진과 소멸감은 작업만으로 회복할 수 없음을 꽤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무엇보다 작업의 질긴 물질성을 툭툭 간과했던 과거의 저를 통해,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으나 결과중심적으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많이 했어요. 이런 경험은 아무래도 작업의 안팎에 축적된 실재 시간이 있었기에 실제로 ‘거울삼아 본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작업의 내용과 상관없이 작업 자체가 거울이 된거지요. 어쩌면 웹-온라인 매체는 이러한 개인성을 제가 생각한 공유 범위와 다른 불특정한 공공의 영역으로 도달하게 해주는 거울 같은 성질의 반사체인 것 같아요. 책 넘김, 실물 그림, 피아노와 편지의 아날로그적 질감을 느끼긴 어렵겠지만, 왜곡해서 보았던 현실 세계의 딱딱한 질감이 다양한 타자의 온도와 만나 서로 조금이라도 말랑말랑해질 수 있길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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