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위한 새로운 이름 짓기

전유진
전유진은 영화음악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부터 사운드, 퍼포먼스, 기술을 기반으로 한 뉴미디어 작업을 발표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혀왔다. 2015년 아티스트그룹 서울익스프레스를 결성하여 《언랭귀지드 서울》, 《나는 죽은 자와 함께 걷는다》 등 실험적인 서사구축에 주목하는 공연을 만들었다. 활동 초기부터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워크숍과 교육프로그램 개발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왔으며, 2017년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을 설립하여 기술문화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흔들리는 언어

이렇게 말 토씨 하나에 민감한 적이 있었던가? 연일 내 타임라인을 도배하는 AI 개발 이슈들 속에서 나를 사로잡는 것은 기술보다도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말)다. 누스코프 선언(The Nooscope Manifested)1을 통해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말을 다시 보았고, 구글 람다(LaMDA)의 지각 논란2으로 ‘지각이 있는(sentient)’이라는 표현을 곱씹게 되었으며, ChatGPT(챗지피티)에 대한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발언3을 통해 ‘표절(plagiarism)’의 기준을 재고하게 되었다. GPT-3가 등장하고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한 표현뿐만 아니라 인지(cognition), 이해(understanding), 창의성(creativity), 학습(learning), 지식(knowledge), 소통(communication) 등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휘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단어가 낯선 모습으로 돌변하거나, 어떨 땐 내 지식 체계의 지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처음 보는 단어라서 사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는 단어인데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지 그 사전적 정의를 재차 확인하는 일이 거대언어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 서비스를 접하면서 확연히 늘었다.

물론 언어는 가변적이고, 그 덕에 사회는 진화하기도 한다. 언어의 변화를 동반하며 사회의 인식과 감수성이 개선되는 예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나는 주로 언어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쪽보다 언어가 변하기를 바라는 쪽에 가까웠다. 내가 겪은 제약, 편견, 한계, 불평등, 폭력 등의 기저에는 늘 언어가 있었고, 그것이 걷힐 때는 언어의 해방과 전복의 서사도 함께 있었으니까.

그런데 AI로 열린 신조어 대잔치에서는 나는 이전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맡은 기분이다. 이 역할이 익숙치도 않을뿐더러, 다들 환호하고 박수치는 잔치집에서 말꼬투리를 잡고 있는 기분이 들어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언어학자도, 문학 전공자도, 번역가도 아니다. 되려 컴퓨터 공학 전공자였던 나는 오늘도 화려하게 펼쳐지는 기술 발전 소식에 감탄하기는커녕, ‘누가, 왜 이런 표현을 쓰는가? 누가 (용)감히 그 말을 가져와 이 자리에 놓는가? 언어는 이 기술권에서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가? 어떻게 사람들을 자극하고 지배하는가? 언어의 힘으로 무장된 기술은 앞으로 얼마나 더 권력화될까?’와 같은 불편한 질문을 늘어놓는다.

새로운 시장과 이름 짓기

AI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학문이자 영역이지만 실제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컴퓨터 성능의 발전과 데이터 축적에 힘입어 AI 기술은 실생활에 응용이 가능한 단계로 진입했고, 이 도약으로 인해 마치 포그 오브 워(Fog of War)4가 걷히듯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열린 듯하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장식할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다. 연구와 학문의 영역에서 실용과 산업의 단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몇몇 용어는 리뉴얼을 거친다. 학계에서 이미 통용되던 어휘더라도 마치 새로운 개념인 냥 재단장되거나 교체되기도 한다. 실로 AI에 전 지구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명명해야 할 새로운 개념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상황이다. 새로운 말이 태어나 생명력을 얻으면 가지치기가 이어진다. 담론이 형성된다는 것은 곧 관련 언어의 활발한 번식 활동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의견과 주장이 난립하면서 그 속에서 힘(관심)을 얻는 표현이 등장하고, 그 말은 다시 유의어를 낳고 반의어를 낳기도 한다.

신대륙을 정복했던 자들의 상황이 이 같을까. 새로운 세상에 펼쳐진 나무, 꽃, 동물 등 모든 것이 신기하다. 그리고 그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는 일 또한 얼마나 신나고 설레었을까. 그중 대부분은 이미 토착어 이름이 있었을 테지만, 자신의 행위를 정복이 아닌 개척이라 믿는 이들에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로 짐작건대 그들 다수는 정복지를 더 낫게 만든다는 당위성으로 무장된, 이른바 개척자 정신, 그 신성한 의무를 따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AI라는 개척지에서도 누군가는 이와 비슷한 태도로 이름이 없는 것들을 찾아 이름을 붙인다. 진보와 혁신(innovation)은 개척 대신에 이곳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실체가 없는 개념에도 이름을 붙여 존재하게(작동하게) 만든다. 더 많은 이들을, 더 많은 자본을 새로운 시장(new market)5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꽤 매력적인 언어가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시대성에 부응해야 한다. 당장의 목마름에도, 미래에 대한 기대에도 부응할 수 있는 약속의 언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이름을 짓는 행위라는 게 참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다. 혁신적이고 창의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아주 작은 차이로 이름을 지어 ‘준다’는 시혜성과 그로서 권위 관계를 획득하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누구의 관점에서, 어떤 각도에서 읽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같은 행위일지라도 그 의도는 다르게 해석된다. 기술 영역에서의 용어를 정하는 과정도 다르지 않다. 사실 추상이 구체화되고, 이론이 실천이 되는 과정에서 용어의 번역이 불가피해지는 경우가 있다. 학문은 순수한 만큼 폐쇄적이기도 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이들의 삶으로 전파되고 생활에 응용되기 위해서는 갑옷처럼 무거운 학술적 용어를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 그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용어가 탄생/재탄생할 때 접근성, 인류의 번영, 공익성 등 여러 보편적 가치를 담은 당위성을 손쉽게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일반(general)이 함의하는 것

얼마 전 SF 소설가 테드 창은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와의 인터뷰6에서 챗봇의 출력 행위를 understand(이해하다)와 같은 의인화된 동사로 표현하는 지점과 ‘I’라는 1인칭 대명사를 쓰는 것이 AI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지난 5월에 열렸던 포킹룸의 전시 《아드레날린 프롬프트: 인포샵》의 연계 워크숍7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ChatGPT는 thinking(생각하기)을 하는 것일까, searching(찾기)을 하는 것일까, ChatGPT가 결과를 출력하는 행위는 creating(창작하기)일까, generating(생성하기)일까.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어휘의 선택부터 재고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우리가 어떤 말을 고르고 사용할 때, 그 기저에 깔린 전제를 늘 의식하지는 않는다. 미처 깨달을 틈도 없이 어떤 (문제적) 언어의 열혈 전파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쏟아지는 기술 어휘를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쓰기엔 우리는 또 얼마나 빠르고 치열한 시간을 겪고 있는가. 신조어를 이해하고 그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일이다. 워크숍은 일종의 제동 장치로서 잠시 숨을 돌리고 함께 생각할 시간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준다. 새로운 단어의 등장 뒤에 숨겨진 특정 집단의 전략과 의도뿐만 아니라, 그 선택을―알면서도 혹은 모른 채로―용인하는 사회와 인간의 욕망이 있다는 것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생산성이 없어 보이는 행위를 자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이 예술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지금의 기술 대잔치를 더 화려하고 성대히 이끄는 꽃가마 역할을 맡기도 하지만, 잔칫집에서 꼬투리를 잡고, 다수에 반하는 짓을 하는 것도 결국 예술이 할 일이 아닌가 하면서…

나를 자극하는 것은 사실 의인화뿐만이 아니다. 특히 ‘general’과 ‘open’과 같은, 말 그대로 ‘일반적’이고 쉬운 단어, 보편성을 함의하는 언어를 채택하는 경우이다. 이미 ‘open’이라는 말이 회사명부터 들어가는 OpenAI(오픈에이아이)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인공일반지능)8’를 들먹이며 그들의 비전을 발표했다.9 특히 그들의 비전을 ‘임무(mission)’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개척자 정신을 곧장 떠올리게 만든다. 일단 ‘open’부터 딴지를 걸면, OpenAI는 AI 시장을 폐쇄적으로 만들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기업이다. GPT-3를 개발했을 때만 해도 소스 코드와 API를 공개했지만, GPT-4의 경우 소스 코드와 학습한 데이터 등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닫힌 소스(Closed Source)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서비스에 대항하며 여러 스타트업, 오픈소스 개발자 커뮤니티는 그간 우리가 알고 있던 오픈이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오픈 소스 AI 언어 모델을 발표해 왔다.10 다음으로 general의 쓰임인데, AGI의 general은 ‘일반’보다는 ‘범용’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바둑에 특화된 AI인 알파고처럼 특정 기능만 수행하는 AI와 구별하고자 AGI의 general은 모든 상황에서 다 쓰일 수 있다는 범용성을 강조하기 위해 붙여진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어 ‘일반’으로 번역될 때, 이 말에 내포된 여러 뉘앙스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일반(general)이란 단어는, 그 사용은 쉬운데, 막상 그것을 정의하려고 하면 어렵다. 영어든 한국어든 이 말은 꽤 추상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을 지칭할 때가 많고, 어떤 경우엔 그것의 지시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마치 무엇이 상식인지 합의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11, 무엇이 일반인지를 정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AI를 약한 인공지능(Weak AI)과 강한 인공지능(Strong AI)으로 구분해 왔다.12 한 기능에만 특화된 AI를 약한 인공지능이라 하고,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장 발전된 AI를 강한 인공지능이라 한다. AGI는 이전에 우리가 ‘강한 인공지능’이라 불렀던 그 개념이다. 물론 강한(strong)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질적인 힘의 논리와 비교법, 이분법의 문제 등 한마디로 촌스러워서 쓰기가 다 부끄러워지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표현이 ‘범용’ 혹은 ‘일반’보다도 훨씬 단순해서 명쾌한 지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어떤 회사가 그들의 이상향, 비전, 목표를 세우는 행위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지만,13 ‘범용’이나 ‘일반’이라는 수식어를 대놓고 쓸 때 생기는 거부감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일반’은 그 뜻처럼 무색무취한 듯 가볍게 듣고 넘어가기에 충분한 듯하고, 확실히 ‘표준’보다는 분명히 덜 딱딱하며 논쟁의 여지가 적은 말이다.

‘일반’이라는 표현이 불편한 다른 이유는 그 반대의 개념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그런 언어의 용태에 익숙하지 않은가. 사회가 ‘정상’이라는 말로 ‘정상성’이라는 그릇된 개념을 강화했듯, ‘일반적’이라는 수식어는 절대로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처럼 ‘일반적이지 않은’이라는―포괄되지 못한―섹터를 만든다. 일반적이라는 수식어는 단순히 일반이라는 뜻만을 지칭하지 않고 ‘일반적이 아닌’을 동시에 호명하게 되어 있다. AGI란 게 앞으로 존재한다면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포함될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AGI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일반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AI는 무엇인가?’, ‘일반적 수준의 지능이란 무엇일까?’, ‘그 위계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솟아났다. 실제로 OpenAI는 그들의 임무를 설명하면서 AGI에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더 똑똑한(generally smarter than humans)’이라는 정의를 덧붙이지 않았는가. 그들은 AGI의 general이라는 수식어를 이미 이런 식으로―인간과 대립하는 위계적 방식으로―쓰고 있다. 위에서 말한 ‘범용’이라는 뜻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그리고 떠오른 질문은 ‘일반에 미치지 못하는 AI를 쓰는 이들은 누구일까?’, ‘일반 인공지능을 쓰지 못하면 일반에 속할 수 없는 건가?’처럼 ‘일반’이라는 수식어는 자연스럽게 사용자를 향하는 쪽으로 확장되었다. 그렇게 보면 general은 어떤 존재를 범주화하는 힘이 있고, 그 집합에 포함될 수 없다는 두려움을 자극하는 언어다. AI의 흐름에 함께 하지 않으면 다수에 포함될 수 없다는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이 AGI 속 general의 용도라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지금 시대에 기술 어휘와 기술 텍스트는 단순히 그 기술의 기능만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 그 관련 사업에 가담하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 AI가 일반이 되는 미래에 그 일반에 속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나만 못할까 봐, 나만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 아파트라는 집단적 주거 형태를 광적으로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불안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작동할 것이 자명하다. 실제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어휘가 등장하며 코딩 열풍이 불었던 것부터, 얼마 전 구글의 CEO가 그들의 챗봇 바드(Bard)14를 발표할 때, 영어와 함께 한국어를 우선 지원하겠다고 한 것도 사실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자극하여 지갑을 열게 만들고, 온갖 플랫폼과 구독 서비스에 종속되게 만들고, 그렇게 생명력을 키우는 이 시장에서 우리는 사실상 VVIP 고객(a.k.a. 호구)이니까.

오픈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말이 아니다

난데없이 고백하자면, 나는 비슷한 이름 짓기를 해본 경험이 있다. 2017년 만든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WOMAN OPEN TECH LAB)’이라는 커뮤니티를 만들면서다. 당시 몇 년간, 여성에게 비친화적인 을지로에서 작업하며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지치는 차별을 경험했기에 나와 비슷한 이들을 위해 이름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 아마 을지로가 아니었다면 다른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젠더성을 드러내지 않고, 충분히 나의 취향과 예술성(?)을 담아서… 하지만 을지로에서 내가 가장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예술보다도, 이곳에 나 같은 여성 메이커, 여성 창작자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쫓겨나고 무시당할 정도로 기술에 문외한이지 않고(기술 잘 모른다고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당연히 아니다), 기술을 활용하고 만드는 것에 진지하고 주체적으로 임하는 남성 아닌 다른 성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어떤 영역에서 완전히 부재하거나 극소수로 인식되고 나아가 부정당하는 존재였기에, 나와 내 커뮤니티는 오히려 그것의 젠더성과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하는 선언이 필요했고 그 의미를 담을 이름이 필요했다. 기술을 활용하고, 배우는 데 있어 누군가의 성별이 그 어떤 연관성도 갖지 않게 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열린’이라는 표현 또한 함께하고 싶다는,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간 주류의 기술 문화가 가진 폐쇄성과 위계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오픈 소스 운동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고, 기술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픈 소스가 있었기에 나 같은 개인 창작자도 기술을 접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작업이 다양해지고, 창작의 영역이 확장될 수 있었다. 다만 오픈 소스로 발생하는 오해와 누락되는 문제 또한 있었다. 그 문화의 젠더 편향성뿐만 아니라 오픈 소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위기는 기술 만능주의(techno-solutionism)를 부추겼다. 그리고 많은 오픈 소스들이 영어로 되어 있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경우 겪게 되는 언어적 장벽의 어려움은 줄곧 언급되지 못했다. 언어능력이 개인 역량 평가의 가장 대표적인 척도가 되는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만큼은 철저히 개인의 문제(무능력)로 여겨졌다. 사회에 팽배한 능력주의는 기술 리터러시 이전에 언어 리터러시에 막혀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을 문제시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기술의 매개, 대표적으로 기술 텍스트 번역15의 필요성을 덜 중요한 위치에 놓았다. 공짜와 저작권 프리의 개념이 뒤섞이며 오픈 소스라는 표현 때문에 예술 현장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이 벌어졌다. 현재 오픈 소스는 IT 시장에서도 자본주의의 한 생존 전략으로서 자리 잡으며 초기의 이상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진다. 물론 전 세계의 다양한 오픈 소스 커뮤니티와 기여자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여전히 초기에 강조되었던 공유 정신에 따라 기술이 인류 보편의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과거 ‘오픈’이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과는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처음에는 오픈 소스였는데 시간이 흘러 클로즈드 소스로 정책이 전환되는 경우도 많았고, 단계와 급을 나눈 구독 및 유료 정책에서 부분적 오픈의 형태를 취하는 서비스들도 무수히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유 정신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고, 당연히 지속가능성도 언급해야겠지만, 이 글에서 중요한 건, open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굳이 OpenAI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작년 《코드 밀 키트(Code Meal Kit)》16에서 선보인 10개의 워크숍 중 여섯 번째의 워크숍은 예술과 기술 현장에서 ‘오픈 소스’라는 개념이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그 워크숍 제목을 ‘엎질러진 소스(Spilled Source)’라고 지은 이유는 코드를 음식과 빗대어서 우리의 기술 문화를 살펴보는 전체 기획에 맞춘 것이기도 했지만, 마치 엎질러져 버린 소스처럼 열려는(open) 있지만 더 이상 기대했던 가치를 얻을 수는 없는 지금의 상황을 잘 표현하기 때문이었다. ‘오픈’이라는 말은 너무 흔해져서, 혹은 너무 일반화되어서 그것의 효력이 끝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다. 한 마디로 언어의 약발이 다했다, 혹은 오염되었다는 표현도 나왔다. 그럼에도 지금의 IT 기술과 산업을 있게 한 오픈 소스에 대한 충성심(loyalty), 진정성(authenticity), 자부심(pride) 등을 표현하기에 유효하다는 말도 있었다. 참여와 공유 정신, 공동체 의식, 기술 민주주의 등 이 언어의 시대적 의미는 여전히 힘을 지니기 때문에, 어떤 기업의 이미지와 브랜드를 만들 때 특히 필요하다.

결국 ‘열린/개방’이라는 그 말의 원뜻만 협소하게 가리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이미지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기업이 그들의 서비스를 ‘오픈’이라 지칭하고 그 원뜻인 ‘열린’에 반드시 부합하지 않더라도 대충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이 기술 시장에서 ‘오픈’이란 원래의 의미를 지칭하기 위해선 어떤 표현을 써야 할까? 말 그대로 ‘오픈’이 더 이상 ‘열린’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뭐 ‘진짜 열린(real open)’, ‘정말 열린(literally open)’으로 강조하며 구별해야 하나? 솔직히 ‘오픈’의 이미지만 취하면서 실제로 ‘오픈’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게 사기(fraud)랑 뭐가 다른가? 법으로 규제할 수 없어서 사기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가장이고 기만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언어는 늘 변하는 것이라 해도, 이렇게 open처럼 그 본뜻을 가늠할 수 없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말과 그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은 누가 책임지는가? 무엇보다 ‘오픈’과 ‘공유’라는 가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힘이 빠지는 일일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난 기술 언어

여전히 나는 내 커뮤니티(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에 붙은 ‘열린’이라는 수식어에 마음이 치이는 사람이다. 아무리 단체명에 ‘열린’이 붙어있어도 실제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커뮤니티를 만든 첫해에 깨달았다. 매년 다양한 워크숍과 프로그램을 마련하지만, 여전히 접근성은 내게 다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고민이자 숙제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표현 또한 마찬가지다. 일반화된 대상을 지칭하기에, 여성이 많지 않았던 을지로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그것이 가진 상징성은 분명히 있었지만, 지역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활동이 나아갈 때, 남성을 비롯한 다른 성의 배제, 지정 성별 구분법 등의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랩을 소개하는 어느 자리에 가서건 이 커뮤니티의 이름에 있는 ‘여성’이 단순히 지정 성별의 구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이렇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말로 이름을 짓는다는 것에 어떤 어려움과 책임이 뒤따르는 지를 체감하는 시간이었다. 6년 전 커뮤니티를 만들 때, 분노와 문제의식에만 휩싸여 내가 얼마나 무모했고 동시에 나이브했는지를 반성하면서 말이다.

AI 시장에서 이름을 붙이는 것은 훨씬 더 큰 신중함이 필요하고 더 큰 책임감이 뒤따르는 일이다. 기술의 영향력은 이미 크고, 몇몇 기술, 플랫폼, 기업은 이미 권력화되어 있다. 기술이 권력이 되는 세상이기에 기술 영역에서 태어난 어휘는 태생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이런 용어는 일종의 금수저로 자본주의의 생리를 따른다. 누군가의 말, 회사명, 상품 홍보 문구 등 기술스러운(techy, tech-savvy) 뉘앙스만 얹어져도 신뢰성을 획득하는 사회다. 최첨단, 하이테크라 불리는 기술일수록, 거대자본이 투여된 분야에서 시작된 말일수록, 그에 비례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어떤 말들은 그 지위가 적합한 지 논의조차 거치지 않고 자리를 잡는다. 언어마저도 금수저라니, 강력하고도 참 익숙한 자본주의의 논리다. AI 또한 실제 지능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무언가를 하기 이전에 ‘지능’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상상의 어휘가 현실이 되는 것에 환호하느라 그것이 실제로 현실에 잘 부합하고,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는 늘 소외된다. 미래와 기술에 관해서만큼은 다소 허황된 표현일지라도 슬쩍 넘어가 주는 관대한(공정하지 못한)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권력과 이익과 직결되는 위치에 있는 존재는 책임감이나 부담감 없이 가장 그들의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는 이름을 짓는다. 애초에 말은 여러 사람이 쓰기 시작하면 그 생명력을 갖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 테크 기업들이 만들고 배포하는 순간, 사실 작업은 끝난다. 한두 차례 기사나 인터뷰에 언급되면 돌이킬 수 없다. 이미 그 언어는 쓰이고 있을 테니까. 언어를 만들어 낸 사람이나 의도는 이런 언어의 파급력에 가려진다. 다 같이 멈추고, 언어를 만든 이의 책임감이나 양심을 따져 묻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만든 이뿐만 아니라 사용한 이들도 그 언어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공범이 되며 책임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AI를 위한 새로운 이름 짓기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 그 자체를 문제화하기도 쉽지 않다. 사실 인간 문명에 속한 그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특히나 그 역할을 자주 맡아왔다. ‘메타버스’도 수십 년 전 쓰인 SF 소설17에서 따온 말이 아닌가. 예술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이미 이름이 있는 것에는 비유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수식어를 더했으며, 이름을 짓는 행위 자체에도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해 왔다. 굳이 김춘수의 시, ‘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고, 어떤 존재가 비로소 작동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술을 통해 경험해 왔다. 예술을 ‘무엇인가 언어화하고 표현하는 한 과정’이라 정의한다면 이름 짓기는 그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핵심이 되는 행위일 것이다.

언어가 흔들리고, 지식 체계마저 위협받는 자본주의와 기술 권력의 시대에, 예술이 할 수 있는 ‘이름 짓기’란 과연 무엇일까. 동시대 예술은 미디어와 기술의 영향력을―기술 그 자체든, 기술 담론이든―어떤 식으로든 벗어날 수 없다. 그중 미디어 아트는 기술을 앞장서서 적용해 보고 실험하는 영역이면서, 그에 관한 문제의식도 가장 먼저 감각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런 위치에서 예술은 기술 어휘의 강력한 소비자이며 사회적 통용을 촉구하는 배포자이다. 기술에 환호하는 이들에 비해 그 수는 좀 적었지만, 기술의 부정적인 이면을 상기시키는 예술 작업도 분명히 있었다. 인간 소외와 같은 기술 발전으로 초래되는 문제를 가시화하고, 개인정보 침해나 감시와 같은 기술 권력의 문제나, 데이터 편향의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들이 존재했다. 《코드 밀 키트》에 참여했던 이들도 “누가 ‘웹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붙였을까?”, “기술이 신화화되는 현상을 경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굳이 그 기술이 필요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면?” 등 기술 경도 사회에 대한 반성과 그를 키운 언어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하는 질문을 남겼다. 텅 빈 버즈워드(buzzword)18에 시대착오적 언어까지 뒤섞일 땐 정말 답이 없는 기분이 든다. 기술 시장에서 새로운 어휘는 풍요를 넘어 범람하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이곳의 언어 부재는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로의 책』19에서 최승준 작가가 기술이 무언가를 해결한 듯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는 개념을 메타 버그(Metabug)라고 표현했듯20, 시대를 장악하는 기술 어휘가 다른 방식으로 뒤집히는 사례를 더 보고 싶다. ‘퀴어(queer)’처럼 폄하되었던 언어가 전유되어 이 시대에 정체성이라는 가치를 대변하게 되는 것처럼 예술이 이 기술 권력의 사회에 좀 더 나은 언어를 만들고, 그를 파급시킬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위에서 이미 언급했던 인터뷰에서 테드 창은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누군가 ‘1954년의 잘못된 단어 선택’이라고 답하는 것을 트위터에서 보았다고 인용한다. 이어 그는 AI를 대체할 용어로 ‘응용 통계(applied statistics)’를 제안했다.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이름 짓기’가 있다면 허황되고 위험한 기술 언어를 골라내어 그에 적합한 이름을 다시 붙이는 일이 먼저이지 싶다. 이참에 ‘AI를 위한 새로운 이름 짓기’, 일명 ‘AI 개명’ 워크숍을 열어 볼까? AI라는 말부터 누스코프 선언의 ‘지식 도구(knowledge instrument)’든 테드 창의 ‘응용 통계’든 혹은 더 정직한 무엇으로 갈아치우고 싶다. AGI에서 general은 ‘다용도(multi-purpose)’나 ‘통합 기능(integrated functional)’ 정도로 처리하면 어떨까? 혹은 실체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론 단계(theoretical)’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의 제기 환영합니다.) 이제는 누군가를 두렵게 만들지 않고 이분법으로 대립하지 않는 언어, 위계화와 범주화의 위험이 없는 언어를 듣고/짓고 싶다. 레이블링(labeling)21의 위험이 없는 이름 붙이기가 필요한 때다. 우리의 문명과 언어는 그 차이를 알 만큼 섬세하고 발전하지 않았나. 욕심과 허세로 가득 찬 기술의 어휘를 적합하다 싶을 때까지 끌어내리고 가장 적절한 표현이 무엇인지 다양한 이들과 함께 궁리하고 싶다.


  1. 마테오 파스퀴넬리(Matteo Pasquinelli)와 블라단 욜러(Vladan Joler)의 누스코프 선언(The Nooscope Manifested)은 컴퓨터 과학과 인문학 모두를 도발할 의도로 누스코프(Nooscope) 지도를 만들고, 이를 통해 AI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AI를 ‘지능적 기계(intelligent machine)’라는 이념적 지위에서 지식도구(knowledge instrument) 중 하나로 끌어내리는 데에 있다’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고, 나는 이 선언문을 통해 처음으로 AI에 붙여진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말의 적합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2021년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소개되었고 다음 링크에서 그 내용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 https://13thgwangjubiennale.org/ko/pasquinelli-joler/

  2. 람다(LaMDA, Language Model for Dialogue Applications)는 구글(Google)이 개발한 대화를 위한 언어 모델이다. 2022년 구글의 부서 Responsible AI의 소속이었던 연구원 블레이크 레모인(Blake Lemoine)이 해고되면서 ‘람다가 지각 능력이 있다(LaMDA is sentient)’는 그의 주장 또한 사회적으로 알려지며 논란이 되었다. 

  3. 2023년 2월 세계적인 언어학자이자 메사추세츠공대(MIT) 명예교수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유튜브 채널 ‘EduKitchen’에 출연해 ChatGPT를 “천문학적인 양의 데이터에 접근해 규칙성, 문자열 등에 기반해 문장을 만드는 하이테크 표절(High-Tech Plagiarism)”이라고 비판했다. 

  4.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가 그의 저서 『전쟁론』에서 처음 언급한 개념으로 군사 작전에서의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게임에서 한번도 탐색하지 않거나 정보가 없는 영역을 지도에서 시각적으로 가리는 개념을 뜻하기도 한다. 

  5. 2023년 5월 3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Federal Trade Commission)의 위원장인 리나 칸(Lina M.Khan)은 “우리는 AI를 규제해야 한다(We Must Regulate A.I. Here’s How.)”는 성명을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에 기고했다. 공정한 경쟁을 이끌고 독점, 담합과 같은 불공정한 행위를 규제하는 FTC의 역할이 AI라는 새로운 시장(new market)에서도 다르지 않게 작용할 것이라 밝히고 있다. 마지막에는 기술에 대한 미국의 세계 주도권을 지키자는 강조를 덧붙이고 있다. 나는 AI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라 생각되는 양상들이 사실상 학문이나 기술 영역이 아닌 이곳이 ‘시장’이 되면서 일어났다는 측면에서 앞으로 ‘AI 영역’, ‘AI 분야’, ‘AI 업계’라는 표현보다는 ‘새로운 시장’ 혹은 ‘AI 시장’이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6. 2023년 6월 2일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는 의식이 없다(The machines we have now are not conscious)’라는 제목으로 SF 소설가 테드 창(Ted Chiang)의 인터뷰가 기사화되었다. https://www.ft.com/content/c1f6d948-3dde-405f-924c-09cc0dcf8c84. 그는 ‘우리가 선택하는 단어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는 의견을 덧붙이며, AI 개발자나 언론이 ChatGPT와 같은 챗봇에 투사하는 ‘understand’, ‘learn’, ‘know’와 같은 의인화된 언어와 ‘I’와 같은 개인 대명사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했다. 

  7. 포킹룸(기획: 강민형, 송수연, 최빛나)은 2023년 5월 ‘아드레날린 프롬프트’를 주제로 탈영역우정국에서 전시, 토크, 워크숍을 열었다. https://www.forkingroom.kr/2023info. 이곳에서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은 기술비평zine 『펨텍톡(FEM TECH TALK』 창간호를 발표했고 〈ChatGPT를 활용한 기술 텍스트 번역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이라는 제목의 워크숍을 진행했다. 

  8.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AGI(인공일반지능)은 가상의 지능형 에이전트로, 인간이나 동물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지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자율 시스템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OpenAI, DeepMind, Anthropic과 같은 인공지능 회사/연구의 목표기도 하다. 이 용어는 2002년경 셰인 레그(Shane Legg)와 벤 괴르첼(Ben Goertzel)이 인용하며 대중화시켰는데, 벤 괴르첼에 따르면 1997년 마크 아브룸 구브루드(Mark Avrum Gubrud)가 1997년의 글 ‘나노기술과 국제 안보(Nanotechnology and International Security)’에서 완전히 자동화된 군사 시스템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처음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https://goertzel.org/who-coined-the-term-agi/

  9. 2023년 2월 OpenAI는 ‘AGI와 그 너머를 위한 계획(Planning for AGI and beyond)’라는 글을 블로그에 공개했다. https://openai.com/blog/planning-for-agi-and-beyond 내용을 요약하자면 그들의 AI 서비스가 AGI에 근접했고, AGI가 인류에 끼칠 영향력, 위대함, 위험성을 함께 강조하며 신중하게 AI를 개발하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 2023년 5월에는 ‘Governance of superintelligence’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Superintelligence라는 새로운 표현으로 재설정된 그들의 비전과 AGI를 낡은 개념으로 보겠다는 관점을 읽을 수 있다. https://openai.com/blog/governance-of-superintelligence/

  10. 예를 들어, 2023년 4월 AI 비영리 단체 LAION과 다수의 개발자는 ‘Open Assistant’ 라는 ChatGPT 대안 프로젝트를 서비스화 했다. 같은 해 3월 스타트업 투게더(Together)는 OpenChatKit을 발표했고, 특히 2월 메타(Meta)가 공개한 라마(LLaMA)를 기반으로 하여 레드파자마(RedPajama), 알파카(Alpaca), 비쿠냐(Vicuna) 등 오픈 소스 언어 모델이 나왔다. 이미지 생성 모델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으로 유명한 스테빌리티 AI(Stability AI)에서도 4월 오픈 소스 소형언어모델 ‘스테이블LM’을 출시했다. 

  11. “상식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Common sense is not common)”는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Voltaire)의 말이다. 컴퓨터 과학자인 최예진(Yejin Choi)은 2023년 4월 테드(Ted) 강연 ‘AI가 놀랍도록 똑똑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멍청한 이유(Why AI is incredibly smart and shockingly stupid)’에서 이 명언을 언급하며 LLM기반의 AI가 갖는 문제점을 설명했다. https://www.ted.com/talks/yejin_choi_why_ai_is_incredibly_smart_and_shockingly_stupid?utm_campaign=tedspread&utm_medium=referral&utm_source=tedcomshare

  12. 미국의 언어철학자 존 설(John Searle)이 1980년 ‘중국어 방 논증(The Chinese Room Argument)’을 위해 처음 제시한 가설이다. 중국어 방 논증은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방 안에 놓인 중국어 기호를 조합하여 중국어 답변을 생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고실험이다. 이해하지 않고도 기호와 형식만으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기계를 인간의 두뇌, 마음과 동일시하는 사고의 허점을 지적한다. 50년대 이후 기계의 지능 여부를 판단해 온 튜링 테스트(Turing test)에 반박하는 논증으로 알려졌으며, 이 글에서도 다루고 있는 ‘지능’, ‘강한 AI’, ‘AGI’ 표현에 대한 반증 논리로 해석될 수 있다. 

  13. 하지만 OpenAI는 AGI가 그들의 비전이라기보다 인류 공통의 숙원 과제처럼 말하는 언어전략을 구사한다. 그들의 연구와 사업이 인류 번영을 위한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14. ChatGPT의 대항마로 구글이 개발한 대화형 생성형 AI 챗봇이다. 2023년 5월에 열린 구글 I/O(구글이 매해 개최하는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CEO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는 바드의 본격적인 서비스 시작을 알리며 영어 다음으로 제공될 언어가 한국어라고 밝혔다. 이재덕, 「구글 CEO “1999년 서울서 휴대전화 3대 쓰는 택시기사 본 기억 강렬…기술에 역동적인 나라”」, 『경향신문』, 2023.05.12, https://www.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2305122104015

  15. 2021~2022년 정앎(alm chung) 작가의 제안으로 참여했던 『친절한 오류 메시지 세계화 가이드북(Friendly Errors i18n Book)』에서 기술 용어 번역에 관한 글을 접할 수 있다. https://almchung.github.io/p5-fes-i18n-book/

  16. 《코드 밀 키트(Code Meal Kit)》는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 프로그램 《정거장》과 연계하여 제작된 워크숍과 카드를 말한다. 2022년 7월부터 10월까지 김승범, 전유진, 정앎 세 명의 작가가 호스트를 맡아 10회의 워크숍 모임을 남서울 미술관에서 진행했다. 매주 코드와 기술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참여자가 남긴 질문을 엮어 동명의 카드 묶음으로 제작하였다. https://codemealkit.github.io/

  17. 메타버스(Metaverse)는 닐 스티븐스(Neal Stephenson)의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 (1992)에서 처음 등장한다. 

  18.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버즈워드(buzzword)는 새로 만들어지거나 이미 존재하는 단어나 구문으로, 일정 기간 동안 인기를 얻는다. 주로 기술 용어에서 파생되며, 유행에 따라 원래의 기술적 의미가 사라지고 단순히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19. 『제로의 책』은 2022년 “공공예술의 재배치를 상상”하는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강민형, 김화용, 전유진)’에서 기획하고 출판사 돛과닻(발행인: 김영글)에서 출간했다. https://0makes0.com/

  20. 『제로의 책』에 실린 글 ‘메타버그 세계관’에 따르면 최승준 작가는 소셜 미디어에서 ‘메타버스’의 오타, 메타버그(Metabug)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다음과 같은 개념을 부여한다. “메타버그는 디버깅에 생기는 버그로 뭔가를 바로잡고 통제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운명의 버그를 말하는 걸까요?” 최승준, 「메타버그 세계관」, 『제로의 책』(서울: 돛과닻, 2022), 26-27. 

  21. 인간이나 그의 행동, 사건 따위에 부정적 꼬리표를 붙여 대상에 일탈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1960년대 미국의 사회학자 베커(Becker, H.)가 낙인 이론(Labeling Theory)을 제창하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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