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양식으로서의 흩어짐 : 영상 작품의 비물질적 소장에 대하여

유운성
유운성은 영화평론가이다. 2001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영화평론가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후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2004~2012)와 문지문화원사이 기획부장 (2012~2014), 『인문예술잡지F』 편집 위원을 역임했다. 2016년 영상비평지 『오큘로』를 창간, 이후 현재까지 미디어버스 임경용과 함께 공동발행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2018)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비물질적 무빙 이미지의 소장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오늘날 미술관이 취할 수 있는 여러 가능한 대응책들 가운데 하나에 대해 논할 것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이 논의의 목적은 관리상의 실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현재 어딘가에서 실제로 실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앞으로 고려해 봄 직한 다소 급진적인 제도적 대안 하나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여기서 논할 무빙 이미지의 범위와 한계에 대해 미리 언급해 두는 것이 좋겠다.

2017년 10월 10일에 발행된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관리지침』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무빙 이미지 작품은 ‘뉴미디어’ 항목에 속한다. 여기서 뉴미디어란 “영상, 음향, 조명 등을 포함하는 예술 작품”으로 “퍼포먼스, 무형의 개념미술, 인터넷 아트, 코딩 아트, 소프트웨어 등을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텔레비전, 비디오, 필름, 조명, 컴퓨터, 디지털 장치 등을 사용한다.” 여기서 나는 뉴미디어 작품 일반의 소장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전, 비디오, 필름, 조명, 컴퓨터, 디지털 장치 등을 사용한 것들 가운데서도 아주 제한적인 범위의 무빙 이미지 작품들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논의의 범위를 이처럼 제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복제 가능성(reproducibility)이 접근 가능성(accessibility)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는 무빙 이미지 작품들에만 논의를 집중하기 위해서다. 이는 2020년 7월 24일, 25일 양일에 걸쳐 서울시립미술관이 마련한 심포지엄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소유에서 공유로’라는 이념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현재 대부분의 미술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전통적인 방식의 소장 및 관리 방침에 변화가 필요한 것은 다매체적이고 형태가 복잡한 뉴미디어 작품보다는 오히려 매우 단순한 무빙 이미지 작품 때문이다. 전자의 작품에서 무빙 이미지는 이러한 작품을 이루는 여러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뉴미디어 작품 가운데 다매체적이고 형태가 복잡한 것들은 오히려 전통적인 소장 및 관리 방침을 참고해 얼마간 다룰 수 있는 반면, 하드 드라이브나 USB와 같은 저장 장치에 간단히 저장할 수 있는 작품은 의외로 여러모로 까다로운 문제들과 얽히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까다로움은 물론 관리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법적이거나 제도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으며, 나아가 철학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손쉽게 복제해서 여러 종류의 플랫폼을 통해 전시, 상영,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단채널 영상 작품들1의 소장과 관련된 문제다. 조각적, 건축적 영상 설치 작품의 형태를 띤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채널 영상 작품의 경우에도, 물질적인 동시에 개념적인 특성을 띠곤 하는 현대 예술 작품의 소장에 대한 기존의 지침들을 참고하면 얼마간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일 뿐 그 실행에 따르는 기술적 절차가 용이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테면,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의 작품을 (비)소장하는 사례와 같은 기존의 미술적 제도는 조각적, 건축적 영상 설치 작품이나 다채널 영상 작품의 경우 진정 소장해야 할 것은 디스플레이 기기나 영상 저장 매체 등속이 아니라 이러한 기기와 저장 매체의 배치 방식을 상술한 지시서일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를 준다. 반면에 단채널 영상 작품의 경우에는 소장과 관련해 참고하거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제도적 사례들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현재 미술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단채널 영상 작품과 관련된 이런저런 제도적 절차들은 몇몇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취한 여러 임시변통의 결과들이 뚜렷한 원칙 없이 조합된 사례들처럼 보인다.

소장과 관련해 진정 복잡한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실로 단채널 영상 작품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오늘날 미술과 영화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활동하는 작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미술관이 이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관리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하면, 영상 작품의 소장과 관리에 대한 논의가 미술관에서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필름 아카이브라든지 예술 영화나 실험 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배급사 등에서 그동안 운용해 왔던 제도적 관행 및 규약들과 부딪히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단채널 영상 작품에만 국한해 고찰해 보는 일이 유용한 것도 정확히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폭넓게 뉴미디어, 혹은 그 하위 범주로서의 무빙 이미지 일반을 상정하고 영상 작품의 소장이라는 문제를 논의하다 보면 자칫 간과할 수 있었을 핵심적 쟁점들을 단채널 영상 작품이라는 제한적 매개를 통해 더욱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소장과 보존의 분리

여기서 주요 논점은 디지털 형식의 단채널 영상 작품 소장과 관련된 것이지만, 소장과 더불어 종종 함께 논의되곤 하는 보존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미술 작품, 그리고 16mm나 35mm로 촬영된 영상 작품의 경우, 해당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물질적 대상 자체에 대한 권리를 취하고 이러한 대상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원형 그대로 보일 수 있도록 보존,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작품의 공적 활용보다 보존, 관리의 측면이 강조되는 경우 ‘수장(收藏)’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미술관은 디지털 형식의 단채널 영상 작품과 같은 비물질적 예술 작품을 소장할 때 전통적인 절차를 따라 인위적으로라도 어떻게든 물질적 대상을 가공해 수집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때 보존,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물질적 대상이다.2 가령,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때로는 작가나 기관이 특별히 제작한 보관함이 딸린) 마그네틱 하드 드라이브를 영상 작품을 보관하는 매체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하드 드라이브가 임시적인 저장이 아닌 장기 보존을 위한 매체로는 매우 부적절하다는 점은 디지털 보존과 관련된 전문가들의 논의에서 일찌감치 지적된 바 있다.3 이보다는 바람직한 것으로, 하드 드라이브 외에 테이프나 광학 미디어를 통해 보존용, 복사용, 전시용 카피를 따로 제작하는 방법을 활용하는 곳도 있지만,4 이 또한 데이터의 정기적인 이전을 통한 관리가 필수적이다.

디지털 기반의 영상 작품 소장과 관련된 사안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작품 자체는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 비물질적 정보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5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조망의 감각을 제공하는 하드 드라이브와 같은 물질적 대상을 저장과 보존을 위한 매체로 활용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언뜻 보면 그다지 문제 삼을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문제 삼을 것이 없어 보인다는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영상 작품을 물질적 대상에 ‘담아’6 보관하는 것을 규정화하는 작업은 비물질적 작품이 암시하는 예술 작품의 ‘비물질적 공유’라고 하는 급진적인 사안을 은폐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의 소장과 관련된 문제를 이론적으로 급진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를 보존이라는 문제로부터 잠정적으로 떼어 낼 필요가 있다.

물론 보존과 관련된 기술적이고 정책적인 논의와 실천은 꾸준히 계속돼야 할 것이다. 강원도 횡성군에 건립 중인 시설로 2022년 7월에 개관 예정인 서울시 박물관 및 미술관 통합 수장고에는 전통적인 필름부터 자기 테이프나 디지털 매체의 보존을 위한 시설이 과연 적절히 구비될 수 있을까? 이 통합 수장고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통적 소장품 위주로 설계됐기 때문에 그러한 시설이 제대로 마련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그렇다면 단채널 영상 작품의 경우 2016년에 개관한 파주보존센터를 비롯해 보존, 관리를 위한 시설을 완비하고 있는 한국영상자료원과 협의해 그곳에 보존, 관리를 위탁7하고 미술관은 뉴미디어 작품의 비물질적 소장과 관련된 측면의 제도적 정비에만 주력하는 것은 어떨까?

비물질적 작품의 비물질적 소장

디지털 형태의 오디오비주얼 뉴미디어 작품과 관련해 가장 좋은 데이터 보존 전략은 여전히 없다는 단언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단채널 영상 작품의 소장과 관련된 논의를 물질적 보존과 관련된 논의와 분리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이제 비물질적 작품의 비물질적 소장이라는 급진적 제안을 둘러싸고 있는 제도적 문제와 그 정치적 함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시대 미술계의 담론을 주도하는 이들은 종종 급진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도 유독 소장과 관련된 문제에 봉착하면 돌연 아트마켓 딜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고 회로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공 미술관의 정책을 수립하는 주체들이 소장이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딜러의 고민을 대신할 필요는 없다.

기술적 복제가 아우라 없는 예술의 도래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주장(물론 그러한 미래에 대한 벤야민의 태도는 사뭇 양가적이기에 그의 주장은 냉철한 전망과 급진적 희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는 한다)은 실제로는 집요하게 재(再)아우라화의 방향으로 다시 정위되곤 하는 제도적 실천들에 의해 번번히 가로막혀 왔다. 예컨대, 필름이라는 물질 자체를 페티시화하고 미적 대상으로 삼는 문화라든지 사진과 영상 작품에 에디션을 부여해 소장품으로 삼음으로써 복제와 유통을 통제하곤 하는 미술 기관들의 기묘한 정책 같은 것을 떠올려 보라.

아카이브나 수장고에서 영상 작품을 적절히 보존하기 위해 기술적 해결책을 찾는 노력은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이와 별개로 우리는 비물질적 작품을 위한 최선의 보존 전략으로서의 산포(散布)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여기엔 또한 급진적인 비물질적 소장 개념이 함축돼 있기도 하다. 보존 전략으로서의 산포는 사진적 복제를 통해 얼마간 간접 체험이 가능한 평면적, 입체적 미술 작품들과는 달리 프로젝션되거나 디스플레이되는 동안에만 작품으로서 일시적으로 생존하는 시간 기반 작품의 공유를 위한 최선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때 영상 작품의 산포란, 단지 저용량으로 압축된 파일을 올리거나 온라인 스트리밍하는 등의 소극적인 정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산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플랫폼에 영상 작품 원본을 공식적으로 퍼뜨리고 누구나 이를 다운로드해 각자의 저장 장치에 보관할 수 있을 정도로 과감히 허용하는 단계가 필수적이다. 단채널 영상 작품들의 경우, 전시용 원본 파일이라 해도 PC에서 재생 가능한 포맷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용량은 몇백 메가바이트에서 몇십 기가바이트 정도8라 각 개인이 다운로드 받아 저장하고 보관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즉, 산포라는 전략을 통한 비물질적 보존은 현재 제도적으로 문제가 될 뿐 기술적으로는 아무런 장애가 없는 셈이다. 산포는 원본성이 중요한 물질적 작품의 경우에는 아예 적용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이를 비물질적 작품의 보존 전략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작품이 작가 개인의 보관함이나 기관의 수장고 등 제한적인 장소에만 존재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변형, 훼손, 분실의 위험에 대해 강력한 보완책을 마련할 수 있다.9 무엇보다, 이처럼 비물질적 작품의 보존 전략으로서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 산포 개념이 진정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은 ‘수장(고) 없는 소장’, 진정한 비물질적 소장의 가능성이다.

한편으로는, 어떤 영상 작품이 누구나 볼 수 있게끔 여기저기에 산포돼 있다면 해당 작품을 물리적으로 전시하고자 하는 큐레이터는 전시 공간의 구성이라는 문제에 대단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작품을 적절한 주제로 묶어 전시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기획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산포는 영상 작품의 전시 기획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창조적 작업으로 변모하게끔 촉발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

물론 영상 작품의 산포와 관련해 떠오르는 문제는 적지 않다.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입장에서라면, 작품에 에디션을 부여하고 그것의 전시나 상영의 빈도를 조절해 얻을 수 있는 금전적 보상이 사라질 것을 우려할 법도 하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산포와는 별개로 여전히 미술관이나 기관은 작가와 소장 계약을 맺은 영상 작품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리 주체(영화적 모델을 참고하자면 일종의 배급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영상 작품이 물리적 공간에서 공중을 대상으로 전시되거나 상영되는 경우 권리 행사를 통해 작품 임대료나 상영료를 받고, 이렇게 얻은 수익을 소장 작품의 작가들에게 정기적으로 정산해 지급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작위적으로 산포된 작품이 물리적 공간에서 전시되거나 상영되는 것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에 수반되는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다. 이에 대해서는 도서 ISBN과 유사한 국제 표준 시청각 자료 번호(ISAN: International Standard Audiovisual Number) 시스템 같은 것의 도입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10

김구림, <1/24초의 의미>(1969), 16mm 필름, 컬러ㆍ흑백, 무음.

더불어 저작권과 관련해 논의하고 풀어야 할 문제도 적지 않다. 미술계의 영상 작품들과 관련해, 영상 저작물의 저작 재산권은 공표한 때로부터 70년간 존속한다11는 규정과 관련된 해석의 문제 또한 법적인 자문을 받아 섬세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작품인 김구림의 단채널 16mm 영상작품 〈1/24초의 의미〉(1969)의 공표12시점은 언제인가? 기술적 사고로 실패로 돌아간 첫 상영이 시도됐던 1969년인가, 혹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 공개 상영된 2001년인가? 〈1/24초의 의미〉는 “연속적인 영상(음의 수반 여부는 가리지 아니한다)이 수록된 창작물로서 그 영상을 기계 또는 전자 장치에 의하여 재생하여 볼 수 있거나 보고 들을 수 있는” 영상저작물인가, “물품에 동일한 형상으로 복제될 수 있는 미술저작물”로서 디자인과 같은 응용미술 저작물인가, 혹은 둘 다인가? 작품 자체의 유일성으로 인해 전통적인 미술 작품은 크게 문제될 일이 없겠지만, 영상 저작물의 경우 공유(public domain)로의 전환과 공정 이용(fair use) 등이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데 미래의 미술관은 이러한 문제에 어떤 대응할 것인가? 단채널 디지털 영상 작품과 같은 비물질적 작품의 비물질적 소장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물음들과도 단단히 얽혀 있다.

*본고는 2020년 7월 24~25일 서울시립미술관이 개최한 SeMA Agenda 2020 ‘수집’ 〈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심포지엄 발표문을 각색 및 재편집한 원고입니다.


  1. 조금 더 구체적으로 대상을 한정하자면, 특수한 기기(예컨대, 생산이 중단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등)를 필요로 하지 않고, 특별히 고안된 퍼포먼스와 연계되지도 않고, 장소 특정적이지도 않으며, 온라인을 통해서건 오프라인을 통해서건 관람객 및 다른 작품이나 장치와의 상호작용이 없는 단채널 디지털 영상 작품.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의 디지털 영상 파일. 

  2. 2020년 7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의 공고문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뉴미디어(영상) 작품의 경우 수집이 결정되면 작품을 파일 형태로 별개의 저장 장치에 담아 다음과 같이 3종을 제출해야 한다. ① 전시용 파일 ② 리뷰용 저용량 파일 ③ 마스터 파일(선택). 본 원고의 초안을 토대로 2020년 7월 25일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기 전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들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수집 대상 영상 작품의 작가에게 외장 하드 1개와 USB 2개를 받아 수장고 내의 미디어 보관 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다. 하드웨어의 불안정성 때문에 대용량 저장 서버인 나스(NAS: Network Attached Storage)에 백업하여 보관하고 있으며 나스에의 접근은 수장고 내에서만 가능하다. 영상 작품은 작품 보험의 대상이 아니며 외장 하드만 보험 대상이 된다. 즉, 보존과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상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하드 드라이브라는 물질적 대상이다. 이는 비물질적 작품을 물질적 작품의 관리 규준에 따라 다루는 데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3.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가 디지털 영화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7년과 2012년에 펴낸 보고서(밀트 셰프터와 앤디 몰츠가 공동으로 책임 편집) 『디지털 딜레마』 1권의 디지털 저장 기술에 관한 절(5.1)을 참고. “마그네틱 하드 드라이브는 전기에 의해 계속 회전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므로 장기간 선반에 그냥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드라이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데이터 레코딩 표면에 가끔씩 윤활유를 바르도록 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내부 구성부품이 서로 접착이 되어서 잠기는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마그네틱 하드 드라이브 외에도, 디지털 데이터 테이프(AIT, DLT, LTO), 디지털 비디오 테이프(HDCAM), 광학 미디어(CD, DVD) 등의 저장 매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다음, 데이터의 마이그레이션과 에뮬레이션이 현장의 보존 전략으로 활용되고는 있지만 “가장 좋은 데이터 보존 전략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결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딜레마』 1권과 2권은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서 번역, 발간하였으며 영진위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PDF를 내려받아 볼 수 있다. 1권은 ‘디지털 영화 자료의 보존 및 접근에 대한 전략 과제들’을, 그리고 2권은 ‘독립영화 제작자, 다큐멘터리 및 비영리 시청각 아카이브의 관점’을 다루고 있다. 미술관에서의 디지털 자료 보존에 대한 사례를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뉴욕 소재 독립 비영리 예술 조직으로 퍼포먼스 및 설치 기록물을 보관하고 있는 프랭클린 퍼니스의 사례 등은 일부 비판적으로 참고해볼 만하다.
    ※ 『디지털 딜레마』 [1권 다운로드] [2권 다운로드] 

  4. 2020년 7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이러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5. 35mm 필름으로 촬영된 100분짜리 영화라 해도 어찌 되었건 144,000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영화사 초기에 저작권 등록을 위해 제작사들이 취한 방식 가운데 하나는 영화를 구성하는 프레임 전체를 종이 프린트(paper print)에 인쇄해 납본하는 것이었다. 종이 프린트로 보존된 초기 영화의 발굴 및 복원에 관해서는 켐프 니버(Kemp Niver)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18분짜리 단편 <종이 두루마리에서 되찾은 미국 역사(Reclaiming American History from Paper Rolls by the Renovare Process>(1953)가 유용한 참고가 된다. 이 단편은 미국의회도서관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으며 다운로드도 가능하다. 한편, 현대적 컴퓨터의 원리를 제시한 이로 잘 알려진 앨런 튜링이 그의 튜링 기계 운용을 위해 구상한 외부 데이터 기억 장치 역시 두루마리형 테이프였다. 다만, 튜링 기계는 엄밀히 말하자면 물리적인 기계가 아니라 무한 집합을 상정하는 추상적인 수학 개념이며 따라서 튜링 기계의 운용을 위해 필요한 두루마리의 길이는 이론적으로는 무한해야 한다. 

  6. 철저하게 물리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이는 하드 드라이브 내 플래터 원반 특정 구역의 자기장 극성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7. 한국영상자료원은 영화의 소유권은 소유자에게 그대로 있는 상태로 영화(디지털 파일 포함)를 한국영상자료원에 위탁하여 보존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안내에 따르면 영상 관련 정부 기관, 단체 및 문화예술단체도 가입대상이 된다. 관련 내용은 한국영상자료원 웹사이트 참조. 

  8. 2020년 7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단채널 영상 작품들 기준. 

  9.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후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봉준호의 <기생충>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영상자료원은 이 영화의 극장 개봉 버전 DCP(Digital Cinema Package)를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이 영화의 ‘원본’ 이 변형되거나 훼손되거나 심지어 사라져버린다 해도 제작자들은 완전한 패닉 상태에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이 영화의 디지털 파일, 블루레이 그리고 DVD 등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토대로 ‘원본’에 가까운 DCP를 다시 제작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대중을 상대로 한 상업적 유통망이 전무하다시피 한 미술계의 영상 작품에 <기생충>의 사례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상 작품의 산포가 반드시 수익 가능성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관건은 산포되는 지점들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각주 10을 참고. 

  10.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한 심포지엄 자리에서 필자가 본 원고의 초안을 토대로 발표할 당시, 유튜브 생중계로 이 행사를 참관하고 있던 한 사용자는 영상 작품의 산포와 블록체인(block chain) 기술의 결합을 고려해보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흥미로운 제안을 실시간 댓글에 남긴 바 있다. 

  11. 저작권법(제39조와 40조)에 따르면 저작재산권은 저작자 사후 70년간 존속하지만, 영상저작물의 경우(제42조)에는 공표 후 70년 동안 존속한다. 다만 창작한 때부터 50년 이내에 공표되지 아니한 경우에는 창작한 때부터 70년간 존속한다. 

  12. 저작권법에 따르면 공표란 저작물을 공연, 공중송신 또는 전시 그 밖의 방법으로 공중에게 공개하는 경우와 저작물을 발행하는 경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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